*덧붙여:이 글은 한겨레신문 3월 5일(수)자 34쪽에 있는 고정 칼럼난인 [안도현의 발견]에 님이 "예천 태평추"라는 제목의 칼럼입니다. 좋은 글이라 여겨 이곳에 그대로 옮겨 놓았읍니다.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안도현의 발견]
예천 태평추
‘태평추’라는 음식을 아시는지? 어릴 적에 예천 외갓집에 가서 처음 먹었다. 무슨 잔치가 끝난 겨울 점심때였는데, 도토리묵을 채로 굵게 썰어
뜨끈한 멸칫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와 김 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이었다. 태평추는 국어사전에도
아직은 오르지 않은 말이다. 차가워진 묵을 육수에 데워 먹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 음식은 그 이름 때문에 더 끌리고 신비롭게 여겨진다. 고향
예천에 갔다가 밤늦게 술집을 찾아 어슬렁거리며 다닌 적이 있다. 예천군청 부근이었을 것이다. 그때 어느 음식점 유리문에 ‘태평추’라는 말이 적혀
있는 걸 보고 와락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지금은 일반 가정에서도 자주 해 먹지 않는 그 음식의 이름을 삼십년이 넘어
식당에서 만났으니!
나는 태평추가 귀한 궁중음식이라는 탕평채가 변해서 생겨난 말이라고 생각한다. 탕평채는 녹두로 만든
청포묵에다가 야채와 고기를 얹어 먹는 음식이다.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먹었다고 하니 균형 잡힌 민주주의가 뭔지를 아는 음식인 셈이다. 문자에
어둡던 옛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탕평의 의미를 잘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탕평채를 태평추로 잘못 알아듣고 묵을 데워 먹을 때 이
이름을 줄곧 써온 것으로 보인다. 세상은 태평하지 않았으니 묵을 먹을 때만이라도 태평성대를 꿈꾸었던 것. 어떤 곳에서는 ‘묵밥’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태평추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