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年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女眞族을 吉州에서 토벌하고、정당문학에 올라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시켰다. 同知貢擝를 거쳐 水原君에 봉해졌다.
1389年 예문관대제학 · 문화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고、壁上三韓三重大匡 · 우문관대제학 · 益陽郡忠義伯 등이 되었다.
이성계의 세력이 커지자 落馬를 기회로 그 일파를 제거하려다 芳遠(太宗)으로 인해 실패하고 善竹橋에서 趙英珪 등에게 擊殺되었다. 그는 開城에 五部學堂과 지방에 鄕校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였고、「朱子家禮」에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도하였다. 조준 ·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하고 온건개량파의 입장에서 유교를 진흥하였으며、법질서의 확립과 외교 정책 · 군사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易學에 있어서、先天과 後天은 體用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고、「讀易」에서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原理(天道)를 心으로써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윤리 · 도덕적인 입장에서 牧隱 李穡보다 적극적이었다. 儒者의 道는 모두 일상 생활의 道이지만、불교는 「觀空寂滅」로 종지를 삼기 때문에 인간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참된 진리의 구현 방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一本而萬殊」와 「時中之道」의 관점에서 불교의 비현실성을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