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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자(2)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2 / 어느 날 예수께서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다. 2)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 [참된 행복;눅6:20-2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ㄱ. 시37:11) 6)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만족할 것이다. 7)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10)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12) 그럴 때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 설 교 >
참된 복은 무엇입니까?
마 5:1-12 / 김희찬 목사(리빙스톤교회)
쟌 스타인백이 쓴 “진주”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바닷가에 진주조개를 잡으며 사는 한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부부는 바다 속에서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꿈에 부풀어 말했습니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좋은 집도 살 수 있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식이 퍼지자 병원 치료사는 병이 오래가도록 이상하게 투약을 했고,
동네 사람들은 자꾸 그 부부의 집을 기웃거렸고,
밤에 강도가 침입하는 일도 생겼고,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떼를 썼고,
성당의 신부님도 큰 헌금을 기대하면서 부담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 진주 때문에 점점 기쁨도 사라지고,
밤마다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그 부부는 상의 끝에 그 진주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지기를 원하는데,
물질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복을 이야기할 때,
오래 살고, 돈 많이 모으고, 귀하여 지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아들을 많이 얻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복이라고 하지만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을 많이 보기 쉽습니다.
또 부자가 되는 것을 다 복으로 생각하지만
이것도 복이 되는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재물을 많이 쌓게 됨으로 여러 가지로 허영과 부패에 빠지게
되어서 복이 변해서 화가 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약 10년 전 미국 멧칼프라는 부부가 있었는데 6500만 달러(약 600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곧 이혼하고
남편은 2003년 음주운전과 법정다툼에 시달리다가 45세의 나이로 죽고,
아내는 2005년 11월 오하이오 강변의 대저택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 거액 복권 당첨자들의 90% 이상이 5년 만에 당첨 전보다 더 가난해졌고,
더 불행해졌다고 느낀답니다.
방탕하게 되고,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하고, 친구, 가족관계가 깨지고,
당첨금을 다 탕진한 후에 절도행각을 벌이다 잡히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귀하게 된다는 것도,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보통으로 볼 때는 좋아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조금 잘못하면 오히려 그런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만 못한 것입니다.
또 아들들을 많이 두는 것도 역시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 중 못된 자녀가 나오면 오히려 그런 자녀로 말미암아
좋은 가문이 참혹한 일을 당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으며 또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잠깐 동안 이 세상에 있어서의 복이요,
잠깐 동안 이 세상에 있어서도 오래 갈는지 또한 의문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참된 복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시 랍비가 가르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산에서 이 귀한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이 교훈은 5장, 6장, 7장까지 계속됩니다.
그 말씀이 너무 귀해서 우리는 이 교훈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 위에서 가르치신 교훈이다.
또 산 위에서 가르치신 보물과 같은 교훈이어서 산상보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복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진정한 복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첫 번째 내용이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복은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우리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은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을 본질이라고 본다면,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껍데기란 본질을 감싸고 있는 옷에 불과한 것입니다.
몰에 가면 제일 많은 가계가 옷을 파는 가계들입니다.
옷 가계의 마네킹은 철따라 달마다 새 옷으로 갈아 입곤합니다.
어떤 것은 값비싼 최고급 의상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네킹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여인이라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네킹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은 외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데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돈,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물질이나 외부의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부자 임금님이 병이 났습니다.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행복한 자의 속옷이 있으면 낫는다고 해서
전국에 수소문했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보니, 그는 막상 속옷이 없었습니다.
속옷조차 입지 못하고 하루 하루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어도 감사할 줄 알면 행복한 삶이고, 있어도 감사를 모르면 불행한 삶입니다.
행복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내면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병들면 더 기도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실패하면 모처럼 겸손을 배워서 행복하고,
고독하면 자유가 있어서 행복하고,
가난하면 작은 친절에도 감격해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로서 내적인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인간의 행복이 결정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즐거움과 풍요로움이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복, 구원의 복, 평강과 안정을 얻는 것이 행복의 출발입니다.
내 영혼이 먼저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데서, 내면에서 복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진정한 복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복이 임하기를 바란다.’
‘너희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어떠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술적인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변화된 자에게는 그것이 복이다’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복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하게 변화되면 그것이 복이 된다’고,
변화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하는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지면 그것이 복이야” 라는 의미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말씀은,
“애통하는 자가 되면 그것이 복이야.’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적인 변화가 있는 자에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제 2계명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우상이 큰 죄악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 우상은 기계적으로 ‘우리에게 복만 주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우상, 기복신앙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일방적으로 나에게 복만 주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는데, 그냥 거기에다 복을 부어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전혀 변화되지 않고, 나는 범죄한 그대로 있고,
나는 기도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능력 있는 목회자가 와서 기도해 주면 병도 낫고, 복도 받고,
성공하게 된다는 신앙이라면,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나는 전혀 변화되지 않고, 신앙을 떠나서 죄를 짓고, 멋대로 살아도,
‘하나님, 복을 부어주세요’하는 것,
‘내가 교회에 헌금 많이 할 테니까, 내가 교회는 출석할 테니까,
이대로의 모습에 복을 갖다 부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송아지 신앙이라고 하고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변화 없이 그냥 좋은 것을 누리게 해 달라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도 무엇이 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형통하기를 원하는 것이
기복적인 신앙, 금송아지 신앙인 것입니다.
복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의도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마음으로부터의 변화입니다.
겉으로 변하는 척이 아니라, 중심으로, 진짜로 내가 변화되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사무엘상 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잠언 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의 중심,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렘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으려고,
말씀을 써서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이마 미간에 그 말씀을 붙이며, 집 문설주에 붙여서,
그 언약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안 지켜집니다. 좋은 것은 아는데 마음이 안 따라갑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심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서
속 사람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회개할 때
그들은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습니다.
또한 죄를 자복할 때 그들은 옷을 찢으며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엘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외적인 모습, 형식적인 신앙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참된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소유, 높은 자리, 외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참된 변화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는가?"하는 참된 마음의 변화입니다.
간디의 제자 중에 비노바 바베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디 이상의 성인으로 추앙을 받는데
그의 어머니의 영향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집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 남자가 집으로 구걸을 왔는데,
어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남자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해 주었습니다.
그가 돌아가자 바베가 어머니에게 따지듯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 사람은 건강하잖아요.
그렇게 주면 버릇이 되어서 오히려 사람을 망치게 한다는 말도 있어요.
순수한 사랑의 선물은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합니다.
"얘야. 우리가 누구인데 줄 사람, 주지 않을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
우리가 할 일을 문간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존중해 주고
그를 최대한 예우해 주며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는 일이 아니겠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처럼 천사처럼 생각하며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새롭게 회복해야 합니다.
복은 외면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또한 복은 주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변화, 속 사람의 변화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붙들고 변화를 추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3 / 김양인 목사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내용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상수훈이란 산 위에서 하신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산 위에서 행하신 보배로운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주로 마을에 있는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공생애의 초기에는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신 적이 있지만, 점점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시기 어려워졌으므로 주로 갈릴리 해변이나 산 위와 같은 야외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더구나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자연스레 협소한 회당보다는 넓은 야외가 더 편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 가운데서도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팔복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약 또는 진수를 의미하며, 팔복은 산상수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는 마태복음 주석에서 말하기를 “팔복은 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충만한 즐거움이며, 또 슬픔과 비애가 지우지 못하는 즐거움이며, 눈물 가운데도 비쳐오는 즐거움이며, 죽음까지도 빼앗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팔복의 가르침을 통해서 바클레이 목사님이 언급한 것과 같은 심오한 희열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늘은 팔복 가운데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과 세인들이 말하는 복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를 복이 있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즐거워하는 자를 복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강포한 자가 땅을 차지하지만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배부른 자를 복이 있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냉철한 자가 많은 것을 차지하지만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꾀가 많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불화를 조성하는 자가 행세하지만 주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악을 행하면서도 형통한 자를 복이 있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말하는 복과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물질적이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영적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죄에 오염되어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정결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한시적이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영구적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이 땅에 속한 것이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둘은 종류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러나 니고데모는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알 수 없었으므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니고데모는 그때까지 거듭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팔복을 이해하는데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팔복의 가르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
그런가하면 거듭난 성도라도 나태함과 욕심으로 마음눈이 어두워지면 팔복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갈지라도 그 소속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이해하며,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연히 성도들이 바라는 복도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복과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2. 성도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극도로 가난하여 구걸을 하지 않으면 연명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마음이 낮아집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낮추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바로 이와 같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체로 사람이란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현재 자랑할 것이 없으면 조상을 들먹이면서라도 자랑합니다. 그런 만큼 가난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본디 자타가 알아주던 인사(人士)였습니다. 그는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밝히는 중에 말하기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 세계의 삼 대 도시 중 하나인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이었으며, 예루살렘으로 유학하여 당대 최고의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얼마든지 자기를 내세울지라도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한 동안 그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행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월감을 갖고 지낼 때에는 주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가 복음의 일군이 된 것은 다메섹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완전히 깨어지고 나서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의 못남을 자랑했습니다. 자기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일컬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교만과 자랑을 버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를 들어 위대한 복음의 일군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 123편을 지은 성도는 이같이 간구했습니다. “1)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의 생사는 그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악독한 주인을 만나면 평생 힘든 고생을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선량한 주인을 만나면 긍휼을 입어 안심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노예가 주인의 선처를 바라듯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갈망하며 그 긍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같이 고백합니다.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즐겁고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주만물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 문명을 자랑하고 하나님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번영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니체와 같은 사람은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된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가 하와를 꾈 적에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 하와는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그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가련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인간들의 귀에 대고 “하나님을 반역하라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순종합니다. 그는 자기의 생사화복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갈구합니다. 더구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적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시므로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심으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차지하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천국을 말하면, 대체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영원한 내세를 떠올립니다. 계시록 21장과 22장에 언급되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은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를 말해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나누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계시록에 언급되어 있는 천국이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 집은 이 땅이 아닌 천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팔복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릴 천국은 영원한 내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릴 천국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20)…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다 같이 찬송가 495장/새 438장을 불러봅시다.
♪ “1)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가는 우리 마음속에 임한 천국을 간증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감옥은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쇠사슬로 죄수의 손발을 묶어 두었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습기가 차서 건강을 해쳤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우울하고 슬픈데 다른 사람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그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답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소유한 성도의 마음에는 평안이 깃듭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치중합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천국이 되었다가 여유가 사라지면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성도들은 그 속에 천국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경제적인 형편에 상관없이 언제나 천국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염려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로써 하나님께 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형편과 지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심으로 천국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마음에 모신 성도들의 모임 속에 천국이 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성도들의 만남 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리는 조건은 한 가지,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저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긍휼을 갈구할 때, 그들 가운데 주님께서 임하셔서 천국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화려한 궁궐이라도 인간들만 모여 있다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라한 곳이라도 주님을 모신 곳이라면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마음속에서, 또한 성도들의 교재 속에서, 교회 안에서 천국을 누려야 하지만, 궁극적인 소망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3장 14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성도들은 지상의 삶이 나그네 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받았으나 평생도록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돌이나 목재로 집을 짓고 살만한 경제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영원한 본향을 그들이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막생활은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그들이 감수한 것은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동경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날마다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간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신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욕심과 교만한 마음을 갖게끔 부추기고 자기를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넘어가면 천국 시민의 자격을 누리지 못합니다. 천국 시민의 첫째가는 자격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지 말고 낮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고백하시고 종이 그 상전의 손을 바라듯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하신 마음을 품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고,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천국을 누릴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마 5:1-16 / 이상웅 목사(마중물교회)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위에서 베푸신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이 산상수훈은 한국 교회와 관계가 깊습니다. 구한말 안종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안종수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 일본 농학계의 권위자인 쯔다 박사를 방문하였는데, 그 집 벽에 산상수훈의 말씀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말씀에 크게 감명은 받고 돌아와 정부의 고관이었고 친구였던 이수정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듬해 1882년에 일본에 간 이수정은 쯔다를 찾아가서 신약성경을 구해 읽고,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연구한 후 침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동포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성경번역에 착수하여, 1884년에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한글성경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중국쪽에서 존 로스 선교사에 의해 번역된 성경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성경이 되는 셈입니다. 이수정은 그뿐아니라 1883년에는 미국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여 1884년 알렌 의료선교사와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면서 한국선교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산상수훈이 한국교회 탄생에 크게 기여한 셈입니다.
산상수훈은 한 주일에 한 두절씩 설교를 해도 될 만큼 깊이가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16절을 한번에 전하는 것이니 10주 분량인 셈입니다. 이미 눈치가 빠르신 분은 느끼셨겠지만, 제가 요 몇 주 ‘제자도’라는 관점에서 마태복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큰 명령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려면 제자는 어떤 사람이고, 제자를 어떻게 삼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삼는 사역을 어떻게 하셨는지 보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천국,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버려야 가능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침과 복음전파와 치유의 사역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제자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세한 의미보다는 제자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1. 무리와 제자 사이에서
1-2절은 산상수훈의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굉장히 평범에 보이는 문장 같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 까다로운 문장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상이 무리라는 것인지, 제자라는 것인지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산에서 무리를 보시고 앉으셔서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무리는 누구입니까? 4장 마지막 25절의 말씀입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 복음전파 사역, 치유의 사역을 보고 예수님을 따른 많은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리만이 아니라 그 소문을 듣고 여러 지역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이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깊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고, 어떤 사람은 병고침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사람이기에 줄을 잇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문의 마음을 가지고 정탐하기 위해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무리를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을 곁에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 왔는데,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의 제자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의 길로 입문하려는 무리들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 제자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제자에게 기대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하게 되면 실망하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럼 요즘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믿습니까? 복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으면 복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기대할 복은 무엇입니까?
2. 제자들이 기대해야 할 복
그 내용이 3-12절까지 기록한 팔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서경(書經)의 오복(五福)은 사람들이 누리기 바라는 5가지 행복을 말하는데, 장수, 재물, 건강, 덕, 평안한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팔복을 마치 이런 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전북대에서 대학생 사역을 할 때 였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온통 간판이 팔복이었습니다. 팔복약국, 팔복부동산... 그래서 저는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이름이 팔복동인데, 조선시대 8명의 선비가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급제한 터라고 해서 팔복동이라고 합니다. 이런 복은 모두 소유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전혀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복이 있다’는 선언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성품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천국이기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복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성품과 관련된 것이고, 이런 제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모두 천국, 즉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에 “복이 있나니”하며 뒤따르는 말씀들, 즉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런 표현들은 천국,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복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가난에 찌든 사람, 슬퍼 통곡하는 사람,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되다고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현실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것은 듣기는 좋은데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이상적인 말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면 그 성품이 이런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따를 때 기대하는 복은 부자되고, 강건해지고, 장원급제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은 딴데 가서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 애통하는 자 – 온유한 자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처음 4개의 복은 제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첫 번째, 가난한 자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어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다고 했으니 스스로 자기 영혼을 지탱할 수 없으므로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한 자, 즉 영적 파산자입니다. 이런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래야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복입니다. 두 번째, 애통하는 자라는 것은 자신의 영적 가난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마음을 위로해주시니 하나님의 위로의 다스림을 받게 되니 복입니다. 세 번째, 온유하다는 말은 오늘날 좋아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천하고 낮은 자가 취할 수밖에 없는 비굴한 자세를 의미했습니다. 가난과 슬픔 가운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밖에 없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땅을 기업으로 맡기시기 복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일할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자기 안에 의가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수밖에 없고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4개의 복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가 없으니까 가난한 사람이고, 의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슬퍼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품의 사람이 제자라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후반부에 있는 4가지 복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관련된 것입니다. 내면의 성품의 변화가 있은 제자들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있게 됩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나의 가난을 하나님이 긍휼히 돌아보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가난을 긍휼히 돌아보는 것입니다. 가난을 채움받은 자가 다른 사람의 가난을 채워주는 자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더욱 긍휼히 여기시니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허탄한 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시커먼 마음, 즉 나쁜 동기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니 복입니다. 일곱 번째, 화평케하는 자는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얻게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 바라기에 화평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를 위해 오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지는 복을 얻게 됩니다.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의를 추구하면 칭찬을 받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화평을 추구하면 세상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더욱 드러나기에 불편해하고, 그래서 박해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성품의 마지막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마지막이 모두 의로 끝나고 있습니다. 의가 없어서 가난했고, 애통했고, 온유했고, 굶주리고 목말라 했던 자가 하나님의 의를 선물받고, 그 의가 다른 사람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제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어떤 복을 기대하며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팔복과 같은 심령의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제자의 복입니다. 이 복을 기대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역할
13절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4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적인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되려고 하고, 빛이 되려고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이고, 빛입니다. 그러니 세상 안에 있게 되면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고, 빛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팔복을 통해 주신 말씀은 제자들이 얼마나 세상과 이질적이냐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어떤 사람들을 좋아합니까? 부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강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는 가난을, 애통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는 제자들은 세상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세상이 박해해도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곳은 세상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이미 소금으로, 빛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부패하거나 변질되지 않게 하며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무지를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영적인 가난인지 눈을 떠서 보게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제자로서의 성품으로 살아가면 우리가 있는 그 곳이 부패하지 않고, 맛이 나는 곳이 되며,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인 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800만명의 성도가 있다고 하고, 전도에도 그렇게 열을 내는데 왜 이 땅은 왜 여전히 부패하고 맛을 잃고 어둠 속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잘못된 복에 대한 기대를 가진 제자들, 즉 팔복과 같은 성품의 변화가 없는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들입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과 너무 담을 쌓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둠에 속한 사람이니 거리를 두고 산 것입니다. 말 됫박 안은 환할지 몰라도 말 밖에는 어둡습니다. 이럴 때 말 안의 등불도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팔복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제자가 기대해야 할 복입니다. 또한 세상과 담을 쌓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제자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성도되시길 축복합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I)
마 5:1-12 / 석기현 목사
찬송가 1장은“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라고 시작되며,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에 개회찬송으로 가끔 부르는 28장도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별명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 ‘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진정 복을 받고 싶으면 이처럼 ‘복의 근원자’가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부터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에는 소위 산상보훈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5장 1절에 보면 “1a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큰 무리가 당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는 뉘앙스가 짙습니다.
왜냐하면 1절 하반절에 곧 이어지는 말씀이 “1b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이처럼 ‘무리’와 ‘제자’를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장면이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앉으시니”라는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주로 학생들이 자리에 앉고 선생이나 교수가 단 위에 서서 가르치지만, 당시의 관례는 그와 정반대로 스승은 자리에 앉아서 가르쳤고 제자들은 서서 배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의 “제자들”을 꼭 ‘열두 제자’라고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산상보훈이 ‘일반 대중에게 한 설교’라기보다는 ‘제자 교육을 위한 특별한 교훈’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 산상보훈의 첫 번째 내용이 소위 ‘팔복(八福)’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인데, 영어로는 무슨 ‘The eight blessings’가 아니라 ‘Beatitudes’입니다.
이것은 ‘행복’ 혹은 ‘복을 받음’이라는 뜻의 라틴어 ‘beatu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supreme blessedness’ 즉 ‘최고의 복’을 뜻하며 그래서 ‘팔복’ 대신에 ‘지복(至福)’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영어 성경 중에는 본문에 여덟 번 반복되는 “복이 있나니”라는 단어를 ‘blessed’라고 하지 않고 ‘happy’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전자는 보다 ‘실제적인 복’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마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상태’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물론 후자도 일부 포함되기는 하지만 전자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 ‘여덟 가지의 복’ 역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 자동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을 통해 과연 ‘주님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에 따라오는 구체적인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주일에는 그 중 처음 네 가지 복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복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써 ‘천당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 기록하기를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이 결코 세속적인 복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은 이 첫 번째 복에서부터 명백히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은 모든 사람을 ‘물질적 가난’에서 해방시켜서 ‘평등한 부’를 누리게 해 준다는 따위의 정치적 공약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poor in spirit) 상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자세’를 뜻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자신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지극히 무지하고 무력한 피조물에 불과함을 인정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찾게 되는 심령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무엇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있는 사람 앞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되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가 없으며 오직 그 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높이 받들게 됩니다.
시편 34편 6절에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곤고한 자’라고 번역된 말이 영어로는 바로 ‘the poor man’(가난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문맥에서도 이것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전무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경외하게 된 자가 받게 되는 복이 곧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천당에서 영생하는 구원’이야말로 복 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하지만 그 ‘천국’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복 받는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파산상태’에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한다고 자동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의 교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했지만 실제로는 자기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치명적인 ‘영적 자뻑’에 빠져 있다가 주님께로부터 매서운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기가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그런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가난한 심령’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시작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주권자에 대하여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자세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무엇보다도 먼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통해 결국 ‘천당영생의 구원’의 복까지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복은 ‘자기 죄를 자복 회개함’으로 ‘죄 사함의 안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4절에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애통하는 자’란 ‘복스러운 상태’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애통이란 지극히 슬픈 일, 괴로운 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절로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이란 그처럼 무슨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통곡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애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뵙게 되자 곧바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사 6:5). 사도 바울 역시 자기 자신이 여전히 ‘악을 행하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인하게 되면서 절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하는 자의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애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진심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자에게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위로’는 곧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누리게 되는 안위와 평안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물론 오직 예수님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위로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고 하시면서 그 위로는 곧 “그 죄악이 사함을 받음”(2절)으로써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61장에서는 장차 당신께서 보내어 주실 ‘기름 부음 받은 종’이 바로 그렇게 “모든 슬픈 자를 위로”(2절)해 줄 메시아가 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시므온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라고 칭한 것도 바로 이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라 하면서도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회개의 애통’을 해 보지 않은 교인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교회로 올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통회자복’이라는 것은 무슨 옛날식 부흥회 때나 있던 순서라고만 생각하면서 ‘세련된 현대교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어색한, 상상만 해도 불편해지는 개념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은혜와 복’만 강조하고 ‘죄와 회개’에 대해서는 그냥 어물쩍 넘겨버리는 교인은 결코 복음의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3, 4상)라고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 죄’를 두고 “주께서 (네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이) 의로우시다(라고 인정)하고 주께서 (너는 죄인이라고) 심판하실 때에 (그 심판이)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하)라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라는 ‘위로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의 타락과 부패와 더러움과 사망의 저주 아래 떨어져 있는 상태를 두고 애통할 줄 아는 자만 죄 사함의 위로가 진정 따뜻하게, 행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했던”(스 10:1) 것처럼 자기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의 눈물’을 흘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계 7:17) ‘위로의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셋째 복은 ‘대인관계에서 온유함’을 발휘함으로 ‘금세와 내세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5절에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온유한”이란 ‘점잖은’(gentle), ‘겸허한’(humble), ‘인정이 있는’(considerate), ‘예의바른’(courteous)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형용사로서, 구약에서 ‘심령의 가난함’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자가 타인을 대할 때에 꼭 필요한 기본자세인데, 오직 ‘심령이 가난하고 자기 죄를 애통한’ 자만 제대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 앞에서도 진정 ‘온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온유함’ 역시 예수님의 제자 된 자가 꼭 배워야 할 신앙인격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불신자들은 대인관계에서도 기본적으로 교만하고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상대방에게 꿀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는 신자라면, 그런 ‘신앙의 겸손’은 반드시 ‘대인관계에서의 겸손’으로도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을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약한 상태’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온유함에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편 37편 9절에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말씀하면서, 연이어 11절에서 다시 한 번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라고 선언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차지하다’(inherit)라는 단어는 ‘확실히 소유하게 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땅의 기업’이란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복’의 대명사와 같은 말이며 신약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내세의 복’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얻는 복이란 금세와 내세에서 동시에 누리게 되는 상급입니다.
즉 온유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손해만 당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얻도록 친히 중재해 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대인관계에서 항상 악착같이 따지고 대들어야만 자기가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온유함’이란 그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짓밟히기만 하는 패자가 되는 길을 자청하는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차라리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온유한 마음’을 꼭 발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진짜 ‘땅의 기업’을 얻게 해 주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그랄 땅에서 거부가 된 이삭을 아비멜렉 왕이 시기하여 쫓아내고,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흙으로 메워 버리고, 그랄의 목자들이 그의 목자들에게 위협을 가해 왔을 때, 이삭은 한 번도 그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삭은 화조차 내지 않고 모든 것을 양보하면서 그냥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다시 우물을 파고 새 장막을 치면서 새 터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온유한 이삭’에게 결국 ‘브엘세바’의 축복을 내려 주시고, 그 결과 아비멜렉 쪽에서 오히려 먼저 머리를 숙이면서 화해를 청해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다고 자처하면서 타인이 자기를 비판하거나 공격할 때에는 절로 발끈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바로 그런 경우에도 ‘겸손의 미덕’을 발휘할 줄 아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다투고 악착같이 빼앗아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불신자들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인관계에서 항상 온유함을 지킴으로써 진정 ‘땅을 기업’으로 받는 상급을 금세와 내세에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넷째 복은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써 ‘영적 만족과 보람’을 누리는 것입니다.
6절 말씀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무슨 의인지부터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세 가지 의미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적 의’인데, 이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를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 의’로서,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의’입니다.
마지막 ‘사회적 의’는 세상 사회에서 통하는 일반적인 의, 쉽게 말해서 ‘사회 정의’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의’는 그 중에 두 번째로서 곧 예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바라는 대신에 먼저 구하라고 명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의는 ‘경외의 신앙’과 ‘죄 사함’을 통해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결코 ‘주리고 목마른 상태’가 아니며, 세 번째 의는 물론 당연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기 9장 2절에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고 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완전타락과 전적무능력에 빠져서 스스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가 없었던 죄인을 하나님께서 ‘십자가 대속 공로’로써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칭의’를 입은 성도에게서 자동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 바로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림과 목마름’ 즉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싶어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자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만 할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두고 바로 그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신자에게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만족감, 성취감 등을 가리킵니다.
특히 이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they will be filled’ 즉 ‘자기 스스로 배가 불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불신자들은 그저 물질을 추구하고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고 있지만 결코 그 욕구가 완전히 충족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로운 일’에 자기 인생의 목적을 집중시키면서 사는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결코 스스로 의로워질 수도 없고 또한 의로운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그로 인하여 자기 죄를 회개함으로써 죄 사함의 위로를 얻게 된 신자라면 당연히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마땅합니다.
바로 이사야 61장 3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는” 중생의 복을 받은 사람은 자동적, 필연적으로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삼시 세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성취해 나가는 보람을 매일 맛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선한 일’에 부요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사 완성을 위한 일’에 자기 인생의 족적을 쌓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되는 것을 몸소 체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쫓기다가 ‘멸망하는 짐승’처럼 죽어가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말고,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선한 욕구를 좇아 ‘생애 최고와 최선’을 동원함으로써 진정 ‘영적으로 배부른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원로목사님께서 남기신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현대교인들이 ‘그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감히 절대주권자를 ‘자신의 복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려 하는 엄청난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일단 ‘먼저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복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섬기려고 작정하고 있는 성도에게 그 섬김을 위해 필요한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당연히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스스로 복을 받겠다고 용을 쓴다고 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로 모시고 섬길 때 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조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야곱도 그랬지 않았습니까?
그는 출생 때부터 자기의 쌍둥이 형 에서를 앞질러보겠다고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바람에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도 야곱은 그 복에 대한 욕심을 스스로 성취해 보겠다고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기도 했고 외삼촌 라반과 재산 문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야곱이 진정한 ‘축복의 조상’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을 받게 되면서부터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참된 복을 더욱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 첫째 복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통해 ‘천당 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함’으로써 ‘죄 사함의 은혜와 안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대인관계’를 발휘함으로써 ‘금세와 내세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넷째 복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선행에 최우선을 둠’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정한 ‘만족과 보람’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고 가정이 행복해진다.’라는 따위의 기복주의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복이 아니겠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주객전도의 신앙이 아니라, 이처럼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절로 따라오게 되는 영혼의 복과 육신의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II)
마 5:1-12 / 석기현 목사
‘사람 잘 만나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이나 혹은 좋은 친구나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를 인생을 살아갈수록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만난 것이 그토록 행복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딱 들어맞는 원리입니다.
즉 ‘사람 잘 만나는 복’을 누리고 싶으면 본인이 먼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입니다.
이 ‘팔복’의 나머지 네 가지 복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기독신자가 과연 어떤 대인관계를 발휘할 때 본인에게도 복이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다섯째 복은 ‘남에게 자비’를 베품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7절에 기록하기를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원어로는 ‘자비’(mercy)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힘들고 괴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동정심’인데,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비유의 결론에 가서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예수님을 찾아왔던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36-37). 그러니 물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긍휼”에도 그처럼 자기 이웃 가운데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자비’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마음’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이 두 번째 의미가 좀 더 강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처럼 긍휼을 베풀어 주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긍휼은 곧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는 자비’인 것입니다.
옛날 영화에 보면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은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왕에게 그저 ‘Mercy!’(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딱 한마디만 외치면 그나마 쉽게 목숨을 끊어 주었습니다.
그런 경우의 ‘자비’란 전적으로 왕이 베풀어 주는 것이지 지금 사형언도를 받고 죽게 된 죄인 쪽에서 무슨 ‘공로’가 있거나 ‘조건’을 채웠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긍휼’이 바로 그처럼 100퍼센트 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게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떤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도 자비를 입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단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라면 필연적으로 남에게 긍휼을 베풀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서 우리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미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은 자라면 당연히 타인이 자기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게 되며, 그런 신행일치를 나타내는 참된 신자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고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능하면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나 재앙과 자기 사이에 어찌하든지 차단벽을 쳐 놓고서 자신의 행복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만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고 경고합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지옥영벌이라는 최악의 저주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그저 당신의 자비하심을 발동시키셔서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고 있는 신자라면 결코 그처럼 ‘무심한 방관자’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는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긍휼’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주기도문은 한 주일에도 몇 번씩 외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자비를 베풀어 준 적은 과연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용서란 무기력하고 너무 순해 빠진 것’이며 ‘복수만이 달콤한 것’이라고 여기는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8편 25절과 26절은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라고 이 ‘다섯 번째 복’을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극단적으로 대조시켜 주고 있습니다.
‘남을 긍휼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긍휼을 입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깨닫고, 특히 ‘내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함으로써 주님 재림하실 때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도 ‘긍휼의 용서’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섯째 복은 ‘정직한 마음자세’를 발휘함으로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8절에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청결한”이란 쉽게 말해서 ‘깨끗한’(clean)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희생제물’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나중에 선지서에서는 ‘도덕적 정결’ 및 ‘영적 성결’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어떤 거짓이나 가식이 없이 항상 정직하고 솔직함’을 가리킵니다.
이 ‘청결한 마음’과 정반대되는 대표적인 마음이 곧 ‘위선’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도다”(눅 11:44)라고 책망하신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통상 동굴 속에 안치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봉분 없이 그냥 ‘평토장’을 하고 그 위에 ‘회칠’을 함으로써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회칠한 것이 지워지면 사람들은 그 곳이 무덤인 줄 모르고 그냥 ‘밟게’ 되는데, 그것은 ‘의식적으로 부정해지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깨끗하게 보이는 외식’ 즉 종교적 위선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는 참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는 ‘잔과 그릇의 속이 깨끗해야’ 합니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 앞에서도 늘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5편 1절과 2절에서도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와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오로지 거짓과 외식의 막으로 덮여 있는 사람은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에 거주하는 자,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교제’를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깨끗이 씻음’을 받은 신자는 바로 그 ‘정결함’과 ‘성결함’을 계속 유지하는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어야만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영화’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스포츠에서 심판의 눈을 속이는 행위를 두고 흔히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합니다.
‘외식’과 ‘위선’이야말로 순전히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행을 과장하는 영적 할리우드 액션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런 ‘바리새인’들의 ‘겉만 깨끗한 잔과 대접’, ‘평토장한 무덤’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 오히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온갖 부정한 생각과 악한 행위를 그처럼 가득 덧칠한 ‘위선의 회칠’로 감추고 있는 교인이 진정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나누고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유명한 ‘던킨 도너츠’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가 각 지점의 도너츠 제조실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그 전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게 해 준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단 ‘던킨 도너츠’뿐 아니라, 일반 식당 중에서도 주방 전체를 아예 완전 개방해 놓고서 쉐프들이 요리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개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고객들은 절로 그 음식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는 마음’, 사람들의 눈에도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같이 투명한 인격’을 지켜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인정하시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47). 왜냐하면 시편 24편 3절과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그처럼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만이 결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종교적 외식’이 판을 치는 현실 중에서도 진실로 ‘겉과 속이 같은 청결한 마음자세’를 지키고 발휘함으로써 그런 ‘성화’의 과정을 통해 진정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끝까지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일곱째 복은 ‘화평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양자’로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영어로 말하자면 ‘peacemaker’입니다.
예수님께서 ‘peace-keeper’라는 말 대신에 여기서 ‘peacemaker’라는 말을 쓰신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이 ‘화평하게 하는 자’란 ‘적대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서로 화목하게 만들어 주는 제3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까 ‘긍휼히 여기는 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평하게 하는 자’ 역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전자는 도덕적 의미로서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불화를 중재하여 해결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편 34편 14절의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는 말씀에서의 ‘화평’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역시 영적 의미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평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간단히 말하자면 ‘복음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팔복의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점에 대해 명백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인간사회의 화평’을 파괴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불화하게 만드시겠다는 뜻으로 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화평의 복음’이 ‘값싼 화평’과 혼동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이란 과연 어떤 화평입니까?
이것은 신약성경 곳곳에서 아주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는 사실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영적 적대관계를 십자가 대속을 통해 화목시켜 주는 화평’입니다.
바로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 16절 상반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선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골로새서 1장 20절에도 사도 바울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하면서, 곧 이어서 23절 하반절에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화평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일컬음을 받을 것”(will be called)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중생 받은 신자는 이미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정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양자다운 양자’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그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선포해 주신 이 ‘화평의 복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도 증언할 때에 따라오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길입니다.
즉 ‘복음 전파’야말로 죄인들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그들과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백히 나타내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화평의 복음’과 ‘달래기만 하는 유화책’을 명백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신앙과 진리까지 양보하면서 영적 대적들과 ‘거짓 화평’의 손을 맞잡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싸구려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교회를 원수에게 넘겨주는 배신행위일 뿐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는 말씀이 기독신자가 그런 ‘값싼 화평’에 결코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된 신자는 그런 ‘적과의 동침’이 아니라 진정 ‘선으로 악을 이기는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경쟁과 미움과 싸움만 팽배하고 있는 인간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화평은 먼저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절로 따라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세계 평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함’으로써 이 살벌한 세상과 냉정한 인간관계에 진정한 화목과 평화가 깃들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하) ‘먼 데 있는 자들과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전해 주신 평안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함으로써 진정 ‘하나님 아버지의 영적 인자’를 그대로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양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여덟째 복은 ‘신앙으로 인한 박해’를 당함으로 ‘천당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10절 이하 12절에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나온 일곱 가지 복들도 세속적인 복들과는 아주 다르지만,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이 여덟 번째 복은 실로 기상천외한 복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가장 ‘비현실적인 복’이 아니겠습니까?
전혀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복, 복스러운 상태와 그야말로 정반대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만은 앞의 경우와 달리 훨씬 더 길게 부연설명을 해 주시는 것만 보아도 이것이 사실은 가장 큰 복, 진짜 복 중의 복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박해”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의를 위하여”라는 조건부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도덕적 의’나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 오직 ‘영적 의’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11절에 예수님께서 그 “의를 위하여”라는 말씀의 의미를 “나로 말미암아”라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지사충성의 삶 때문에 불신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온갖 핍박이 여기서 말씀하는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인 것입니다.
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바로 앞에 나왔던 ‘화평하게 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그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독신자가 노력한다 해도 현실은 완전히 평화로운 사회나 완벽하게 화평한 인간관계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과 악의 투쟁, 진리와 거짓 사이의 적대관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는 화평을 원하더라도 사탄은 오히려 ‘자기 때가 가까운 줄을 잘 아는’ 까닭에 최후의 순간까지 더욱 발악하면서 ‘여자와 그 남은 자’를 집어삼키려고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박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하는” 일반적인 핍박으로부터 시작하여, 최악의 경우에는 ‘순교를 당하는 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이처럼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온갖 박해를 당하는 것은 “선지자들”부터 시작해서 ‘사도들’ 및 오늘날의 모든 기독신자들에게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3인칭으로 시작하셨다가, 11절에서 갑자기 “너희”라고 2인칭으로 바꾸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와서 이처럼 스스로 감정이 고조되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신자의 박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 분의 제자 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너와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 중에서 가장 진하고 뜨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 따르는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복과 똑같은 것인데, 그 이유는 ‘가난한 심령’을 통해 ‘신앙’을 얻게 된 신자는 ‘박해까지 기꺼이 당하는’ ‘신행일치’를 나타냄으로써 자신의 신앙이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고 그 결과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박해’를 당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이 정말 천당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진짜 신자임을 가장 명백하게 확인해 주는 까닭에,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할” 최고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박해’는 불신자와 신자라는 이 화해될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어디까지나 ‘화평케 하는 자’인 까닭에 결코 불신자를 박해하지 않지만, 마귀의 사주를 받은 불신사회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적개심을 조금도 완화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자는 이 인류역사 속에서 결코 ‘대세’나 ‘다수’가 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소수였을 때에는 바른 신앙을 지켰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되어 온갖 부와 권세를 등에 업게 되면서부터 급속도로 타락하여 결국 천주교 이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은 참된 교회와 성도에 대해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처럼 수적으로 압도적인 불신가족, 불신상사, 불신권력으로부터 온갖 미움과 욕과 해를 당하게 될 때 그야말로 ‘순교하는 각오’로써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박해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인 동시에 박해를 복으로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순간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행 7:55)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나로 말미암아 박해를 당하는’ 그 진하고 뜨거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도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선지자나 사도만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칭하시는 모든 신자에게 다 해당되는 사실인 것을 명심하면서, 오직 ‘평화시대의 순교자’에게만 완성되는 천당구원의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설교의 결론에서 말씀드렸던 원로목사님의 명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 동안 세 가지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첫째는 ‘대신관계’, 둘째는 ‘대인관계’, 셋째는 ‘대물관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이 세 관계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즉 ‘대물관계’에 자기 인생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그 물질적인 행복에만 최우선을 둡니다.
순전히 그 욕심에만 사로잡혀서 살고 있으니 대인관계에서도 자연히 경쟁심과 다툼과 적대심만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대신관계조차 ‘하나님을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삼으려는’ 주객전도의 신성모독으로 일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복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정립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팔복의 처음 네 가지 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겸손한 심령’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애통하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을 얻어야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사람 앞에서 ‘온유함’으로 발휘하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따라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팔복의 나머지 네 가지 복들은 그처럼 ‘대신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 사람이 이제 ‘대인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신행일치의 삶입니다.
진정한 신자라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정직한 마음으로 대하고’,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비록 다른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당할지라도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낼’ 때에 진정 ‘복스러운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유치한 복, ‘이방인들도 구하는 복’만 혈안이 되어 찾는 교인들과 또한 그런 ‘값싼 복’들로써 교인들을 미혹하는 ‘삯꾼’과 ‘이단’들이 갈수록 더 팽배해지는 이 말세에,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약속해 주시는 이 진짜 복을 금세와 내세에서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천국을 향한 여행
마 5:1-12 / 이정선 목사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것이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들과 가르치신 내용들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마디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의 내용은 천국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4장 23절에서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전파하신 내용이 천국이었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5,6,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1절과 2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가르치신 교훈이라는 의미지요. 영어로는 Sermon on the Mount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등산을 가셨다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좋은 그런 언덕에 올라가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으니까 여러 차례 설교를 하셨을 것이지만, 마태가 잘 정리해서 기록한 것으로는 이것이 첫 번째 설교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마태가 기록한 첫 번째 설교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것도 매우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쓰신 책이 아니라 마태가 자신의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이 첫 번째 설교를 어떤 의도로 여기에 기록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의 메시지는 그의 왕국입니다. 마태는 그 왕국을 천국, Kingdom of Heaven이라는 단어로 표시합니다. 그 왕이 오셔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고, 이 첫 번째 설교에서는 그 왕국에서 어떤 법이 시행되고 적용되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령 알렉산더 대왕이 한 나라를 정복했다고 칩시다. 그럼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먼저 그 나라 백성들에게 새로운 왕국의 이념이나 왕의 통치철학, 또는 바뀐 제도 등을 말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마찬가지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을 선포하시면서 그 나라의 법을 우선적으로 설명하셔야 했단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이 산상수훈의 내용인 거예요. 그래서 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이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산상수훈이 상당히 기피대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따라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거든요. 아무리 믿음 좋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이 말씀 앞에서는 부끄럽게 되거든요. 또 그대로 살다가는 이 험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이나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까지 대 주라는 말씀은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조금 약점을 보이면 그것을 뚫고 들어와 아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이란 말이죠. 또 우리 성품에 맞지도 않습니다. 내가 한 대 맞으면 두 대, 세 대를 때려줘야 분이 풀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성품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산상수훈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힘들어요. 부담이 돼요. 왜 예수님이 이런 어려운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규범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산상수훈이 끝나는 7장 마지막에 보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특정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나중에 우리가 살게 될 그 천국에서 시행될 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천국에도 억지로 속옷을 빼앗고 오른편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거기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니거든요. 이 말씀이 지켜져야 할 상황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법으로 주신 말씀들이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위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 현실에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이 말씀을 성경책 안에만 있는 말씀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구체화되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도덕적 교훈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이 산상수훈은 율법의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어요. 율법 자체가 불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거나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율법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신 이 산상수훈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산상수훈의 중요성과 의미는 커요. 그러니까 이 산상수훈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말씀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두어야 할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이 부분은 팔복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Beatitude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복 받기를 원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로부터 받는 특별한 혜택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기복사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생각을 해보면 밥 먹는 숟가락에 복(福)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밥그릇 뚜껑에도 복자가 있었구요. 잠잘 때 베고 자는 베개에도 복자, 또는 목숨수(壽)자가 수놓아져 있습니다. 옷에도 그렇고, 게다가 복주머니, 복조리 등등 사방에 복, 복, 복이에요. 또 모든 이야기 속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그림을 상상해 보면 복 달라고 비는 것 아니에요? 그만큼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이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는 거지요.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서도 그러한 기복사상이 많은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보다 어떤 개인적인 축복이 더 강조되는 현상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복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복 중에서도 가장 우선이 되는 다섯 가지의 복이 있었는데, 오래 사는 것, 재물이 많은 것, 근심 걱정 없이 건강한 것, 도덕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것, 그리고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근대화와 서구화의 변화를 겪으면서 복의 개념은 개인의 행복추구로 많이 이동을 한 것 같아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복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행복의 열쇠는 돈이라는 명제가 강조되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은 일반적으로 돈과 권력과 쾌락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행복론이에요. 돈을 많이 벌거나 출세한 사람은 대체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고, 애통하는 자, 심지어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 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세상의 행복론에 의하면 얼마나 황당해요?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가 이 예수님의 황당한 행복론에 주목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과연 누가 복 받은 사람일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까? 얼굴이 예쁜 사람입니까? 그런데 복 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더군요. 남들 보기에는 정말 복 받은 것 같아도 정작 본인은 죽지 못해 사는 경우가 있지 않아요? 또 남들 눈에는 초라하고 복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제가 요즘 카운셀링 하느라 여러 사람들 만나보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눅 12:15)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감이 나더군요.
예수님의 행복론의 핵심 역시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나거든요. 시작은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지막은 어떻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그 천국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기 위해서였잖아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의 기준과 판단에 의하면 얼토당토 않는 예수님의 행복론, 애통해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복이 있다는 그 이상한 행복론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참된 행복, 그 행복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행복을 맛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 행복 속으로 한번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셨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행복,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우리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 가운데서 참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의 복
마 5:1-12 / 성홍모 목사
새해 들어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팔복의 말씀을 집중 강해하였습니다. 팔복의 주제로 “행복을 찾아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길지 않은 말씀이기에 암송하여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미국 유니온 대학의 심리학자인 어니스트 리곤(Earnest Ligon) 교수는 “팔복은 예수님의 행복 이론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대로만 반응할 수 있다면 진정 그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팔복의 나오는 8가지의 덕목은 예수님의 인격에서 나온 말씀이요, 예수님의 생활 철학이요, 가치관이요, 인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팔복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팔복은 음악에서 8음계와 같은데, 8음계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이렇게 8개의 기본음계가 있습니다. 한 옥타브의 8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노래합니다. 우리 사람은 8복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생활하면 인생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도,미,솔 첫 번째 음, 세 번째 음, 다섯 번째의 음을 함께 모아 소리를 내면 으뜸화음이 연출됩니다. 넷째 음과 여섯째 음, 그리고 여덟 번째 음을 모아 소리를 내면 버금딸림화음으로 으뜸화음 다음으로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솔시레, 다섯 번째 음과 일곱 번째 음, 그리고 다시 2번째 음을 모으면 딸림화음이 연출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 신실하게 살고 인생을 아름다운 운율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동안 새벽에 나오지 못한 교우들을 위하여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원문을 보면 팔복의 모든 말씀이 “복이 있나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영원한 평안, 어떠한 환경에도 사라지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식을 줄 모르는 항구적인 은총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복되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은총,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안을 누리는 궁극적인 은총을 말합니다.
원문의 복이라는 말은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이 복은 우리가 말하는 동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카리오스라는 복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축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마카리오스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신들이 누리는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은 은총,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이런 복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인생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덕목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영혼의 갈급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를 말하는 원문의 ‘프토코스’라는 말은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의지할 곳이 없는 극빈자를 말합니다. 가난하다고 하는데,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가난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나는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극빈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그렇게 가난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시기를 사모합니다. 부족의 은혜, 그래야 채워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천국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고 차지합니다.
두 번째 덕목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두 번째 복의 덕목은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 가난에 대하여 우는 것, 애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너무나 모자라고 보잘것없어 통회자복하며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오늘 세 번째 복의 덕목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온유하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좀 무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 사람만 좋지’ 그러면 무능한 사람, 제 밥도 찾아먹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개성이 약한 사람, 다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주도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했다, 내가 실수한 것이다, 좀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비굴해지고, 모자란 사람으로 알려는 이상한 풍조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프라에이스’라고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부드럽고, 복종적이며, 겸손하며, 동정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혁교회를 이루신 칼빈 선생님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말씀대로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고, 대대로 물려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 복의 덕목은 의에 주리고 목 마름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사람의 간절한 욕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살아 있다는 말이요,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며, 의로운 삶을 살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 고군분투하는 사람입니다.
신약에서 의라는 말은 의롭게 살아가는 의와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의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복음서로 내려오면서 의라는 말은 의롭게 살아가는 의를 말씀하는데, 서신서로 가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려고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정성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은 영적인 만나로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복의 덕목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말은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은 단순히 동정심을 가진다는 말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풀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굶주린 자에게 있어서 자비는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이 말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수동형으로 쓰여진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수동형으로 사용하는 용법입니다. 그리고 미래형으로 쓰여졌는데,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지막 심판 날에 긍휼로 갚아주시며,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의 복의 덕목은 마음의 청결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청결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청결이라고 하였는데, 청결이란 말은 유대교회에서 정결예식에서 사용하던 말입니다. 불결하거나 더럽지 않은 것을 청결하다고 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것이 청결한 것입니다. 무엇이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것을 청결하다고 합니다. 청결한 것은 단순한 것으로 거짓이 없고, 이중적이지 않고, 성실한 것입니다.
옛날부터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으로 7대 죄악이 있습니다. 음욕, 탐심, 시기, 교만, 미움, 혈기, 거짓을 말하였습니다. 이런 것에서 우리를 어떻게 하면 청결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말씀으로 우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평생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늙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두문불출하면서 집안에만 박혀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허물을 내어놓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곱 번째의 복의 덕목은 화평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본문의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말은 “화평을 만드는 자”, “화평을 창조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평화, 화평을 뜻하는 신약의 ‘에이레네’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의 “샬롬”이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온전한 평화와, 안녕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샬롬은 평화입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의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를 말합니다. 이 샬롬이라는 말은 내적으로 평강을 말합니다. 샬롬은 정의와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엡2:14에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두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 서로 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화평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집니다. 그것은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고 가장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의 목의 덕목은 의를 위한 박해받음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역설적이기 때문이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핍박을 받고 있는데, 그에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면 핍박이 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대 세력을 만나게 되고, 핍박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10절의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말씀이 팔복의 말씀이고, 11-12절은 보충하는 설명구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다보니, 고통을 받습니다.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보니, 악한 사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박해합니다. 세상이 불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니,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그의 어둠이 드러나게 되니 싫어합니다.
우리는 어느 사회에 들어가든지 환영 받고,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시비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트집 잡고 비하하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딤후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설교하시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14:22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13-14에서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셔야 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셨기에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골1:24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첫 번째의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받은 복과 같습니다.
11절의 말씀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들을 때에는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전에 신앙생활하신 신앙의 선배들과 선지자들도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기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중에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따돌림을 당하고, 때로는 물질적인 손해도 감수해야 하고, 그런 모든 것들은 우리 주님이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는 주님 때문에 일생 인정받고, 영광 받고, 융숭한 대접만 받았다고 하면,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에는 주님을 위한 고난도 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운명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같은 삶을 살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10:38절에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1888-1960) 하천풍언이라는 일본인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고베신학교를 나오시고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오신 일본의 가장 저명한 목사님이십니다. 이 가가와 도요히꼬는 유명한 정치인과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청년 시절에 폐병에 걸려 각혈하는 중에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빈민굴에 들어가서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며 희생적인 사역에 힘썼습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눈물겨워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을 반대하다가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중국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중국 장개석총통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장개석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항복 성명을 발표하자마자 장개석총통이 포고령1호를 발표하기를 “철수하는 일본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패전하자 외국에 나가있던 일본인들이 많이 죽었지만, 중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내 민족의 원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지금도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가가와 목사를 생각할 때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다.” 중국에서 살던 200만 명의 일본인들이 무사히 철수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전후에 일본을 연합국들이 분할하려고 하였지만, 장개석이 반대함으로 분할할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이 가장 존경한 사람은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일본에서 가장 예수님처럼 살아간 인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성자였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은 “산상수훈을 읽는 사람은 이미 어제의 그는 아니다. 그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집중적으로 팔복의 말씀을 상고했는데, 상식적으로 알기 위하여 팔복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이 나의 좌우명이 되고,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선포된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팔복은 우리 신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말씀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오르려고 하면 반드시 팔복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기로 결단하신다면 팔복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과 살아가는 모습이 곧 우리의 것이 되어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작은 예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
마 5:1-12 / 양인순 목사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합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보려고 신앙생활도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규정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은데 불행한 사람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는데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젊은이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의사가 말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잘 웃기는 희극 배우가 와서 공연을 하는데 그 공연을 보고 나면 마음이 기뻐지고, 잠이 잘 올 걸세’ 그러자 그 젊은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희극 배우가 바로 접니다.’
남에게는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어도 정작 자신은 불행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행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행복은 영원히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참 행복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복음5~7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성경의 말씀 가운데 기독교의 진수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처음 등장하는 8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론의 요약입니다. 이 팔복은 마치 음악의 8음계처럼 한 옥타브를 이루어서 행복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마치 행복이라는 산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하여 올라가기 위한 8개의 베이스 캠프와 같습니다.
앞으로 ‘복 있는 사람’ 이란 주제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복을 받은 자로, 진정 행복한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의 비밀을 깨닫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다같이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행복한 삶을 위한 첫 번째 베이스 캠프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가 행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특별히 이 민족은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가난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의 구호는 “잘 살아보세” 였습니다. 오직 잘 살기 위해서 몸이 부서지라고 일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보면 부자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헬라어로 ‘프토코스(ptokos)’인데 일반적인 궁핍 상태가 아니라, 철저한 파산 상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홀로 설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물질의 가난을 예찬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물질의 복에 대한 가이드 라인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물질을 가지면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느냐 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이 가난하면서도 마음은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밑 빠진 항아리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이 한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신문사 기자가 옥탑 방 한 칸에 셋방을 사는 부인을 취재했습니다. 남편은 5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습니다. 하루 종일 식당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남편 수발을 하고, 살림을 합니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런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합니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면서 식구들의 빨래를 널 때지요. 그때는 행복감을 느껴요.”
남이 보기에는 행복할 것이 없어 보이는 환경이지만 그 부인은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하는 가족들의 빨래를 널면서 행복을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초호화 빌라에 살지만 항상 불만과 불평에 찌든 삶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결국은 자살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미련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도취된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였던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그는 먼저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세리를 정죄하면서 자신은 세리처럼 토색하거나 불의를 행하거나 간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의를 자랑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절) 바리새인의 마음은 이미 자기 의와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과 두려움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교만함이 넘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전 가까이 나가지도 못합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다만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교만한 바리새인이 아닌 가슴을 치며 애통한 마음으로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세리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리는 자입니다.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는 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됨을 철저히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반대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상한 마음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성 어거스틴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니라.” 대답했습니다. “그럼 둘째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겸손이니라.” “셋째는 무엇입니까?” “역시 겸손이니라.”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니라.” 그러자 제자가 또 묻습니다. “선생님, 교만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다.” 말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철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생생하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성전에 나타나십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광채 앞에서 거꾸러졌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이사야는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순간 자신은 망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빈 손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다가오셔서 “베드로야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출신입니다. 베드로는 고기잡는데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밤새 헛 그물질을 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물고기 한 마리 없던 그 곳에 온 바다의 고기를 몰아서 잡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임을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나를 떠나소서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출발입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베드로처럼 아무리 밤이 늦도록 수고하고 애를 써도 결과는 빈 그물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 고백을 드리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만선의 축복을 주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은 상한 심령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아직 내 안에 교만함의 모습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바리새인처럼 내 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을 드리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더 큰 은혜의 강물 속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물질의 욕망에서 벗어난 마음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심령’이란 단어를 뺐다면 당시 군중들은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가난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 정부의 압제 밑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착취를 당하고 압박을 당하는 서글픈 식민지 백성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가난했고, 삶에 의욕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처지였기에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의 통념을 깨뜨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부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요, 가난한 사람은 저주받은 표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자가 진정한 행복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 명하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계명을 지킨다고 대답했지만 여전히 물질의 노예로 살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지 못하고, 재물을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음서 어디에도 다시 이 청년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재물의 노예로 살아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책망하십니다. 물질의 부요함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명하십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물질에 부요함을 누려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오히려 그 재물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받은 축복을 가지고 의미 있는 일에 쓰면 그것은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처럼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을 탐하면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결국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품게 되고, 결국은 그 덫에 걸려 넘어집니다. 자기를 찌르는 창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그 물질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자신 만을 위해 쌓아두지 않고, 선한 일에 힘씁니다. 베풀고 나누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전에 여수 애양원에서 평생을 바친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수녀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트 수녀는 젊은 나이에 애양원에 들어와 40여년을 젊음을 불사르며 고름이 나고,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들의 곁을 지키며 돌보았습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방에는 흔한 TV도 없고, 사과궤짝 만한 장롱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월 10만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이마저 환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들과 함께 20년간을 일한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들은 새벽 5시쯤 일어난 뒤로 가만히 노는 시간이 없어요. 이분들은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항상 남을 위해 살고 가진 걸 남에게 줘요. 없는데도 줘요. 없어도 주면 무엇인가 들어온다는 걸 이분들을 통해 배웠어요. 내 손에서 나가 내 손이 비워야만 다시 들어올 수 있어요. 내 손에서 나가서 내 손이 비어 있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두 수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가 환자 분들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아요. 저희가 오히려 이분들로부터 받아요. 이분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받는 힘으로 저희가 건강하게 봉사할 수 있어요. 제가 타고난 복(福)으로는 이만큼 살 수 없었어요.”
두 수녀가 쓰던 방안에는 한지 위에 쓰여진 글씨가 하나 붙어 있는데 '하심(下心)'입니다. '아래로 향하는 마음',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한 평생을 이국땅에 와서 낮은 마음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가 싫어서 편지 한 통 남기고 훌쩍 떠났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트 두 수녀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산 분들이 아닐까요?
행복은 재물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재물이 있으면 푹신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편안한 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좋은 보약을 지어 먹을 수 있지만 건강 자체를 살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넒은 저택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나누는 기쁨, 베푸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때로는 갈등이 있고, 긴장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천국은 공간의 개념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주님의 통치 아래 있으면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천국은 얼마나 잘 먹느냐, 마시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결국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베풀어 주시는 평강과 기쁨임을 강조하십니다. 누가 천국을 소유하고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깨닫고,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고, 베풀고 나누는 삶입니다. 그 속에 진정한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 천국이 임하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천국의 행복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38장)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로 올라가려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것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십니다. 그 낮아진 마음-하심(下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낮아지는 하심(下心)이 바로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주 예수님 모시고 사는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되도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아
마 5:1-12 / 류영모 목사
I. 겉치레 문명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관심의 하나는 생태학적인 관심입니다. 환경공해에 대한 신경과민증에 걸려있습니다. 현대 선진국 백성들의 최고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을 마시고, 깨끗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청결"은 그 사회의 "문명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의 청결을 재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사회의 쓰레기통과 화장실을 들여다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겉모양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는 퍽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현대 문명의 특징을 "겉치레 문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겉치레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마음보다 겉치레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들은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엄격히 구별했고 어쩌다 부정한 사람을 보거나 부정한 장소에 갔다오면 반드시 옷을 빨아 입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손을 닦고 옷을 빨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의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손을 닦는 것도 예식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모아 세우고 물을 부어 팔꿈치로 흘러내리게 합니다. 그리고 손바닥을 문지릅니다. 그런후엔 손가락을 모아 아래로 향하게 하여 물이 손가락 끝으로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이런 의식이 오염된 인간을 깨끗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속제일 대제사장이 몸을 닦을 때도 그 규정이 있었습니다. 몸은 깨끗한 물로 다섯 번을 씻고 손발은 열 번을 씻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정결 개념에 "마음 안에"라는 단어를 첨가하므로 청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었습니다. 청결이란 의식이나 예전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요 진실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은 유전을 지키지 않고 손을 씻지 않은채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에서 나오는 그 못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구요.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봉한 무덤을 깨끗하게 회칠을 하므로 겉은 깨끗하게 보였지만 실상 그 속은 냄새나는 송장이 썩어 가는 그 모습이 당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거지요.
II. 마음
예수님이 유대인의 청결개념에 더하신 "마음"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마음(카르디아)이란 3절의 "심령"(프뉴마)과 다른 단어지만 같은 의미를 지난 용어로서 인간 인격의 중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를 합쳐서 성경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어떤 민족은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민족은 가슴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마음이 오른손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심지어 성기에 마음이 있다고 믿는 부족도 있답니다. 아무튼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마음은 가만히만 두어도 때가 묻고 더러워집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인간의 영혼을 썩게 합니다. 그 속에서 냄새가 나고 입을 열면 더러운 말이 나오고 손발이 움직이면 더러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헐뜯고 거짓말하고 더러운 말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 눈은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상처를 보고 좋아합니다. 그 머리에는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교만한 생각으로 채워집니다. 니다.
인간의 불행만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도 마음에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떤 사람에게는 불행의 기회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의 기회가 됩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악마와 같은 더러움이 도사리고 있지만 또 한편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실오라기 하나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비좁고 협잡할 때가 있지만 때로는 우주를 담을 만큼 넓고 포용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음보다 더 차가울 수도 있지만 무쇠도 녹일 만큼 따뜻하고 뜨거울 수도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한 신앙인이 어느날 입이 퉁퉁 부어서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왜 그렇게 입이 부었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놈의 입이 자주 실수를 해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그래서 너무 화가나 주먹으로 입을 쥐어 박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입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정히 쥐어박으려면 마음을 쥐어박아야지요. 이때 어떤 사람은 머리를 쥐어 박을 것이고 혹 어떤 사람은 가슴을 쥐어 박겠지요.
우리가 아름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입이나 팔 다리가 잘못된 까닭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삐뚫어져서 그렇고 우리의 심령이 더러워져서 그렇고 우리의 생각에 병이 들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네 마음의 병을 고치라"고 외쳤고 솔로몬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밭을 갈지 못하고 그 마음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할 때 온갖 잡초가 무성하게 되고 온갖 짐승이 마음의 포도원을 황폐케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의 핵심 또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지요.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시작하여 오늘 여섯 번째 시간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대단히 지성적인 종교이기는 하나 그 지식이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머리가 가난한 자 혹은 머리가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대단히 윤리적 종교이지만 윤리나 도덕이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가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의식을 중요시하나 의식이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외모가 청결한 자, 의식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종교입니다. 인격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때문에 이 시간도 교회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주어야 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마음없이 몸만 오는 행위를 구약은 창기나 하는 짓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마음을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시키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행복하고 하나님께 몸과 정성 담긴 예물을 함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전부 - 전인을 드리는 것이 기독교요 예배입니다.
III. 청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이 말하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청결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청결이란 말은 카타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더러워진 것들을 불로 태워 흔적도 없어진 상태, 때묻고 더러운 옷을 세탁해서 깨끗하게 만든 상태를 말합니다. 옷에 때가 묻으면 그 옷이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고 거기 좀이 슬어 구멍을 냅니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이 더러워질 때 마다 세탁을 하여 깨끗하게 보관하듯이 부단히 우리 마음을 씻고 지키지 아니하면 금방 냄새가 나고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찢고 뚫어서 깊은 상처를 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린 겁니다.
우리 몸의 눈은 하루에 약 2만 5천 번을 깜빡 거린답니다. 그때마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나와 안구를 청결케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우리는 죄의 먼지가 끼고 욕심으로 마음은 더러워지고 상처로 얼룩지게 됩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을 청결하게 하지 않으면 금세 마음은 더러워지지요. 이때 내 마음을 씻어내는 작업이 바로 "카타로스" - 청결입니다. 하루 2만 5천번 주의 보혈을 바르고 기도 말씀 찬양으로 기름을 발라야 마음이 청결해 질텐데 거기다 죄와 상처, 미움과 원망을 바르고 있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더러워져 있을까요?
이 카타로스란 말에서 카타르시스란 말이 생겼는데 심리학에서 이 말은 마음과 정서에 쌓여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상처를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의학에서는 독을 마신 사람의 위장을 세척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쌓인 찌꺼기는 씻어내야 하고 마신 독은 토해내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청결한 상태입니다. 성경적으로는 회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둘째 청결이란 말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말은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은 상태, 금속에 다른 잡물들이 합금되지 않은 상태를 두고 쓴 말입니다.
이 말을 주경가 바클레이는 "동기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처음 동기부터 순수하고 깨끗할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렇게 깨끗한 동기로 따랐던 것만은 아닙니다. 정치적인 이유, 사회적인 이유, 세속적인 욕구, 이기적인 동기 심지어는 빵 한 조각을 얻어먹기 위해서 따랐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도 모두 처음엔 재미로, 가족에게 이끌려서, 병났기 위해, 마음의 수양을 위해, 심심해서... 등등 별의별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요.
문제는 이 그릇된 동기들이 깨어지고 씻기고 순수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도 동기가 잘못될 수 있다고 하나 아직도 그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 머물러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한국교회는 기도 제목도 좀 깨끗해야 합니다. 위복주의 기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구제나 선교나 선행도 좀 깨끗해야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 교회생활 전체가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선교는 교회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성장에 대한 감사요 교회의 본래의 사명, 본질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안개가 시야를 흐리게 하듯이, 잔뜩 낀 구름이 맑은 하늘을 가리듯이, 마음이 더러워진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은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보이고, 명예가 보이고, 이권이 보이고, 자기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눈의 들보는 안보이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슴을 쳐야할 손으로 남을 비난하고 회개할 입으로 비판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두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전심으로 라는 표현은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 변덕스럽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 앞에 전심을 드리고 그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며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말에 "일편단심"이란 말이 있는데 바로 이 단심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우성은 바로 이 단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청결이란 말은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깨끗이 제거한 곡식에 사용된 말입니다. 또는 무능하고 훈련되지 않은 군인들을 뽑아낸 정예화된 부대에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제물이 깨끗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상태의 제물에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구약 전체에 약 150번 정도 나오는데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무려 71회가 나옵니다. 깨끗해진 제물, 상처없는 심령, 옥토같은 마음 밭... 이게 청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전심이라는 하나님의 도전 앞에, 깨끗한 곡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요구 앞에, 정예화된 특공대가 되라는 하나님의 요청 앞에 "나는 마음이 청결합니다"라고 손들어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자기에 흠이 없는 청결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분리된 마음, 정성없는 예물, 말씀을 골라서 먹던 편식의 입맛, 고백과 감격이 없는 찬양으로 예배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IV. 어떻게
어떻게 우리가 정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동서양 많은 철인과 위인들이 청결한 마음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어떻게 이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대답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대답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스가랴 선지자는 놀라운 예언을 했습니다.(슥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이 샘은 로마군병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던 순간에 터졌습니다. 이 샘은 보혈의 샘입니다. 이 보혈은 더러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샘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다시 말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부패케 한 그 죄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교육도 무능하고 수양도 쓸데없고 선행도 무익한 것입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원숭이를 사람되게 하려는 것보다 더 무익합니다. 원숭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해주고 훈련을 시킨다고 해서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청결은 곧 존재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딤전 4:5에서 바울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지속적인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인간의 도덕과 수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로 인간은 청결해 집니다.
V.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치 못한 자는 영적 소경이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Yes. 그렇습니다. 마음의 혼란은 눈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흔들리는 물에는 얼굴을 비쳐볼 수 없듯이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미래의 영광을 보지 못해 늘 믿음에 정함이 없습니다. 사건을 바로 보지 못해 늘 생각하는 것이 오판이요 자신의 부족함을 보지 못해 늘 교만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고 사도 바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장님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영광의 주님을 보고 엎드러져 죽은자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는 세상, 저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내 눈으로 뵈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장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구리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 본다는 단어와 온전히 안다는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안다는 단어는 부부가 함께 살고 함께 잠을 자듯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 이 죄인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뵙게 되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되겠습니까? 빛이 어두운 방에 쏟아져 들어오면 갑자기 온방이 환해지듯이 그분의 얼굴을 뵙는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화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죄 많은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한다니 ! 이 얼마나 황홀한 기쁨입니까?
이 땅은 싫증도 있고 권태도 있습니다만 그때 거기서 하나님을 뵈옵는 만남은 날마다 신기하고 새로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 "내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할렐루야!
하나님이 내게 보이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과거가 한 눈에 보입니다.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이 얼마나 다정하고 섬세하게 나와 함께 하시는지가 보입니다.
·내일, 먼훗날 하나님과 함께 보낼 그 천국이 얼마나 복되고 황홀한 곳인지 보이게 됩니다.
그때 나는 감사해서 울고 기뻐서 울고 행복해서 울 것입니다.
그 눈물이 내 마음을 더욱 청결하게 하여 더욱 선명히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다시 오실 주님, 재림하시는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이 오시는 그날!
내 눈이 더러워져 오시는 당신을 못 볼까 두렵사오니 내 마음을 청결하게 하소서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오 주님.
맘 가난한 사람
마태복음 5:1-12 / 최정운 목사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전파하시고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며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3중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남쪽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 많은 무리를 보시며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귀한 교훈을 말씀해 주십니다. 마태복음에는 5개의 중요한 강화, 즉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포함된 산상수훈, 그리고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선교 강화, 13장의 여러 비유가 등장하는 천국 강화, 18장의 교회에 대한 강화, 마지막으로 23장의 화와 저주에 대한 강화입니다.
보통 학자들은 이 다섯 가지 강화를 모세오경과 대조하여 마태복음이 유대인 독자들을 위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모세오경과도 유사하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긴 내용 중에 처음 등장하는 가르침입니다. 여덟 가지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과 제시는 예수 제자의 특징이면서, 조건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의 서론(1-2)
1, 2절은 산상수훈 즉 마태복음 5-7장 전체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다섯 번의 주요 강화 현장에 함께 있었고, 다른 많은 사역 현장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이 제자들을 훈련하는 데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승천하실 때 그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 과업을 주셨습니다. 그 명령의 주 내용 역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말씀들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고, 주님이 사셨던 삶을 따라 살기 원하고 힘쓰는 자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제자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제자를 삼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의 모습은 이어서 나오는 여덟 가지 복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주야로 묵상하며 읊조리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세 율법을 사랑하며 지키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 주십니다. 그 첫 번째 특징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천국시민의 여덟 가지 특징(3-12)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결핍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겠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 살려고 하기보다,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복된 인생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때로 마음 상태가 가난해질 때가 있습니다. 질병이 찾아올 때, 갑작스런 사고를 당할 때, 관계의 어려움이 찾아올 때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뜻하던 계획이 무너지고 실패할 때 역시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우리 중에 혹시 이러한 어려움, 눈물의 골짜기, 겸손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가난한 마음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한 심령을 위로하시고, 절망한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주님의 만지심과 회복이 가난한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 됩니다.
천국 시민, 예수님의 제자의 두 번째 특징은 애통하는 것입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슬퍼하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 중에 가장 강한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겪는 극심한 비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울며 고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천국 시민은 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부어 주십니다.
천국 시민의 세 번째 특징은 온유함입니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빼고 상대를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힘을 가지게 되면 그 힘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권력과 지위 아래 있는 사람에게 그 힘이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힘을 빼고 온유함으로 대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땅이 주어집니다. 학자들은 주로 이 땅을 영적인 의미인 영원한 나라, 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약한 자, 작은 자, 어린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나는 과연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님처럼 겸손과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네 번째 특징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신약성경에서 ‘의’라고 하는 단어 ‘디카이오수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습니다. 법적인 용어로, 또 정의로움의 의미로, 바울 서신에서는 주로 관계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의롭게 된 것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전반적으로 ‘의’의 개념이 율법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명하면서, 과거의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켜서는 안 되고, 그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하고 보다 근원적으로 지켜 행해야 함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에서 그 교훈이 많이 등장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살인한 것이고, 기도를 해도 중심으로 해야 하고, 금식도 헌금도 그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온 마음과 중심으로 드려야 하고, 모든 종교 행위와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처럼 율법을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중심으로 행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영적인 부요함이 넘치는 구원, 즉 하늘나라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영적 목마름이 있는지 날마다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고도 또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긍휼함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긍휼 역시 우리 주님의 성품이며, 제자들이 닮아가야 할 성품입니다.
장례식에서만 필요한 마음이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가족들, 동료, 동역자들을 바라볼 때도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변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에 약한 자들, 아픈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 또한 긍휼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얻게 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표현은 신적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게 되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세상 어떤 것보다 큰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눈을 들어 긍휼이 필요한 한 사람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섯 번째는 청결한 마음입니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세상이 참으로 혼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자는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빛과 같아서 그를 볼 수도 없다고 했고, 예수님은 순결한 어린양처럼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날마다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생각이 정결하도록, 우리의 손과 발이 정결하도록, 그리고 우리 마음이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과 같이 거룩하고 깨끗한 처소가 되도록 날마다 정결케 관리해 나가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곱 번째는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피스메이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피스메이커는 역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에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말씀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던, 끊어져 있던 우리를 십자가 보혈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역시 날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서 관계 회복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면 그 사이에서 화해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일하시도록 중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과 동일하게 천국이 주어집니다. 여덟 가지 복의 처음과 마지막이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복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덟 가지 복의 핵심은 천국 백성, 천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의 개념을 앞서 율법의 근원적인 실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사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박해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박해 받으셨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다가, 또한 예수님 잘 믿기 위해 애 쓰다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셨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혹시 나에게는 이런 박해가 전혀 없다면, 내 삶이 아직 예수님처럼 율법을 근원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없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팔복 말씀은 10절의 부연 설명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고 고난당한다면, 그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당시의 교회 공동체는 로마로부터 또는 누군가로부터 박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한 박해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도 박해와 고난 속에서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내 삶에 박해가 있는지, 주님으로 인한 고난이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박해 받는 길을 갑니다. 융통성이 없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것 때문에 질책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한 것으로 박해를 받는다면, 그리고 믿지 않는 집에서 홀로 신앙생활하며 이유 없는 박해를 받고 있다면,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러한 팔복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청중들은 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서려는 제자들,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얼마나 합당하게 살려고 힘쓰고 있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우리 마음에 날마다 새기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하려고 할 때 율법의 근원적인 실현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루하루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닮아가며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천국 시민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과 온유함 마음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긍휼히 여기며, 청결한 마음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천국 시민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야로 묵상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대로 실천해 나가는 복된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천국 시민, 예수님의 제자는 주님을 닮아 여덟 가지 복을 받게 됩니다. 나에게 부족한 면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보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봅시다.
2. 마음이 가난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거나 고난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의’는 율법의 근원적인 실현입니다. 요즘 나의 삶에서 형식적으로 치우쳐진 신앙 행위가 있다면 무엇이며 어떻게 바로 세워나갈 수 있겠습니까?
4. 올해 남은 한 달의 시간 동안 더욱 주님을 닮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기 위해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