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피닐라의 성깔은 여간이 아니었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이미 분노를 포도송이 처럼 부풀리는 실습을 충분히 해본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걸작품을 낳았다.
1967년 퍼시픽코스트리그의 트리플A팀 포틀랜드 비버에서 뛰던 시절 피닐라는 어느날 1점을 뒤진 가운데 8회 2사만루의 황금 찬스에서 보기좋게 삼진을 먹었다. 무안하기도 하고 제 자신에게 화가 뻗치기도 한 피닐라는 9회 수비를 하러 나가 외야펜스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블록으로 쌓은 바람벽이 그저 만만히 맞아주기만 했으면 그만이었겠지만 펜스도 이유없이 화풀이당한 데에 화가 났던지 가로로 3m 가량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뒷걸음질치는 피닐라를 깔아뭉갰다.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서야 펜스에 깔려 움쭉달싹 못하고 있는 그를 간신히 구출할 수 있었다.
한번 걷어차는 것만으로 펜스를 무너뜨릴 수 있는 피닐라의 '괴력'에 대해 소문을 들은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뭔가 감이 와닿았는지 그를 트레이드해 갔다.
1969년 메이저리그 신인시절 루 피닐라는 방망이의 불길 못지않게 거센 마음의 불길을 발산했다. 어느날 홈게임에서 병살타를 때려 게임을 망쳐놓자 피닐라는 헬멧과 배트를 집어던지는 대신 제 몸뚱이를 내동댕이쳤다. 곧장 외야펜스에 있는 출구로 달려가 문을 열어제치고는 경기장을 빠져나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만약 피닐라가 계속 그런 식으로 가슴의 응어리를 풀기만 했어도 구단의 비품구입비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툭하면 물통을 걷어차 찌그러뜨렸다.
탬파시에 있는 그의 자택에는 캔자스시티 뮤니시펄 스타디움 덕아웃에서 옮겨온 물통 하나가 잔뜩 찌그러진 채 고이 모셔져 있다.
"새 걸 살 때 난 물통값을 물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내가 가져야 할 거 아냐."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피닐라는 입이 없는 물건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곁에 있던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언젠가 스포츠음료 게토레이를 한잔 그득 들고 있다가 패대기친 것을 트레이너 진 모너텀이 홈빡 뒤집어 썼는가 하면 또한번은 홧김에 집어던진 헬멧이 덕아웃 바닥을 통통 퉁기다가 보브 레먼 감독의 다리를 강타하고 말았다.
피닐라는 공식기록원의 판정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1980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피닐라는 자기 생각에 2루타라고 판단되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공식기록원이 에러로 기록, 안타 하나를 도려내자 그는 이닝이 끝날 때까지 세컨드 베이스를 연방 걷어차면서 뭐라고뭐라고 씨부렁거렸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1986년 양키스 사령탑에 앉고나서도 피닐라는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했다. 감독을 맡은 지 불과 17게임만에 퇴장당하면서부터 '관록'을 쌓기 시작했다. 양키스 선수가 삼진당하자 "그게 어떻게 스트라이크냐"면서 심판과 육탄대결을 벌인 결과였다.
그 후 3개월 동안 피닐라는 흙을 걷어차고 모자를 집어던지는 등 선수시절에 사용했던 특허품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연출, 그때마다 퇴장당했다. 어느날 예의 퇴장을 당한 피닐라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 애니터의 생일케이크를 잘랐다.
남편이 퇴장처분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던 애니터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벌써 마흔셋인데 아직도 네살짜리 하고 살고 있으니...에이구, 내 팔자야."
프랭크 프리시
선수나 감독이 심판에게 어필할 수 있게 공식적으로 허용한 경기는 야구밖에 없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한걸음 나아가 심판에게 반드시 어필해야만 이득을 볼 수 있는 규칙까지 있다. 리터치에 관한 것, 타순착오 등은 아예 처음부터 '어필플레이'로 규정돼 있다. 어필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데이 맥페이든라는 투수는 한게임에서 두번씩이나 퇴장명령을 받는 진기록을 남겼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투수 맥페이든은 1940년 어느날 필라델피아 필리즈와의 경기에 나섰다. LG 정삼흠처럼 안경을 낀데다 괴팍한 성격이었던 그는 팽팽히 균형을 이룬 가운데 어느 타자와 볼카운트 2―3까지 숨막히는 씨름을 벌였다. 결정구로 회심의 바깥쪽 직구를 꽂아넣은 그는 틀림없는 멋진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했으나 빌 클렘 구심은 "볼 포!"를 선언했다.
맥페이든은 버럭 성을 내며 안경을 벗어들고 심판에게 다가섰다. 클렘에게 다가선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목청껏 외쳤다.
"자요! 이걸 쓰세요. 이 안경은 나보다 당신에게 더 필요할 거요!"
그걸 조용히 받아넘길 클렘이 아니었다. 당장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맥페이든에게 퇴장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선수시절 누구보다도 퇴장을 많이 경험해본 파이어리츠의 프랭크 프리시 감독이 덕아웃에서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그는 맥페이든에게 그대로 마운드에 서서 몸을 풀고 있으라면서 클렘에게 통사정했다.
"심판님, 한번만 봐주십시오. 난 지금 입장이 아주 난처해요. 우린 투수가 숫적으로 형편없이 부족해요. 쟨 그저 장난으로 그런 겁니다요. 내일은 얼마든지 벌금을 물려도 좋은데 오늘만은 그냥 던지게 해주세요. 심판님이 기분나쁘시겠지만 쟨 그냥 안경만 벗었을 뿐이잖아요. 저거 보세요. 안경알을 닦고 있잖아요. 그래서 벗은 거에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네? 네?"
'메기'라는 별명을 가진 클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안경갖고 그러는 게 아냐. 그건 벌써 10년전에 존 맥그로[뉴욕 자이언츠감독]가 써먹었던 구닥다리 레퍼토리야. 저놈이 내 시력을 의심하는 것까지도 봐줄 수 있지만 날 놀렸어. 저놈이 소리지르는 걸 관중들이 모두 들었을 거란 말이야. 저놈은 쓸데없이 소리를 질러 관중들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단 말이야. 그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프리시감독이 자기 선수를 위해 뭔가 변명하려고 입을 벌리려는 순간 대니 맥페이든이 다시 끼어들었다.
"난 관중들을 선동하려고 큰소리를 지른 게 아닙니다! 아까 소리지른 건 당신 귀가 눈과 마찬가지로 나빠서 안들릴까봐 그런 겁니다!"
"으잉? 뭐라구? 당장 퇴장!"
이쯤 되니 프리시감독도 더이상 수습해볼 길이 없어 신음을 토하면서 불펜에 있는 다른 투수에게 손짓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은 프랭크 프리시야말로 심판을 골리는데 따를 사람이 없는 명수였다. 그는 툭하면 심판에게 달려들어 잡아먹을듯이 으르렁거리거나 기발한 수법으로 '푸른 제복의 사나이'들을 괴롭혔는데 그것은 반드시 제 팀에 유리한 쪽으로 판정을 번복시키거나 화풀이를 하자는 뜻이 아니라 제가 거느린 선수들에게 '아하, 우리 감독님이 우릴 위해서 저토록 애쓰시는구나'하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게 대부분이었다.
프리시에게 사적(私的)으로 가장 친한 친구 세사람을 꼽으라면 빌 클렘, 조코 콘랜, 빈스 리어든 순이었다. 모두 심판들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친한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기중에 퇴장시키는 일이 없었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 그는 어떤 감독보다도 많은 퇴장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빌 클렘은 신발 앞부리로 땅에다 줄을 찍 그어놓고 "이 선을 넘어오면 당장 퇴장이야!"하고 으름짱을 놓는 버릇이 있었다. 어필하는 자가 그 선을 넘으면 정말로 즉시 퇴장명령을 내렸다.
1934년 선수겸감독 시절 프리시가 강력히 어필하고 있을 때 클렘은 예의 발가락선을 1미터가량 옆으로 쫙 그었다. 그러자 프리시는 그 선을 직접 넘지 않고 우회전해서 다가서려고 했다. 클렘은 다시 발로 선을 그렸다. 다시 우회전. 다시 선긋기. 다시 우회전. 다시 선긋기.
그러고나니 클렘은 제가 그린 사방 1미터의 4각형 안에 갇힌 꼴이되고 말았다.
"우헤헤헤 이제 앞으로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실 작정인가용?"
프리시가 쌤통이라는 투로 말하자 클렘의 답변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넌 절대로 못 볼거야. 넌 지금 ‘당장’ 퇴장이니까!"
프리시가 1926년 뉴욕 자이언츠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의 얘기다. 클렘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잔뜩 불만을 품은 프리시는 심판을 골릴 묘책을 마련했다. 그는 스트라이크 콜이 나오기가 무섭게 타석을 벗어나 고개를 흔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팔을 냅다 휘두르는 요란한 몸짓을 하면서도 정작 클렘을 향해서는 부드러운 소리로 속삭였다.
"아 참 좋은 공이네요. 그죠? 아까 바깥쪽에 꽉 차게 들어왔죠?"
그렇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관중들은 팔짝팔짝 뛰는 프리시의 몸짓만 보고 심판판정에 불만이로구나 생각하고 심판에게 야유를 보냈다.
으이그, 쫓아낼 수도 없고.
프리시의 가장 기념비적인 퇴장은 1933년에 기록됐다. 심판은 역시 빌 클렘. 당시 카디널스 감독을 맡으면서 3루 코치박스에 나가있던 프리시는 심판이 3루까지 달려온 주자의 태그아웃을 선언하자 그 자리에서 뒤로 발랑 자빠져 꼼짝하지 않았다.
선수, 코치는 물론 트레이너까지 몰려나가 꼼짝않고 누워 있는 감독을 에워싸고는 의사를 불러라 말아라 하며 소란을 피웠다. 심판이 하도 터무니없는 판정을 하는 바람에 감독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졸도했다고 원망하는 투였다.
처음에는 이거 야단났구나 싶으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던 클렘은 사람들 사이로 죽은 체하고 있는 프리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이놈 프리시! 넌 살았거나 죽었거나 무조건 퇴장이야!"
하긴 진짜로 죽었다면 퇴장명령을 내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프랭크 프리시는 클렘 뿐 아니라 조코 콘랜을 물고들어간 적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그런 대표적인 사례.
1941년 프리시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이끌면서 에베츠필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와 게임을 치를 때였다. 당시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는데도 콘랜은 도무지 경기를 중단시킬 눈치가 아니었다. 3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1점을 뒤지고 있던 프리시는 콘랜을 향해 소리질렀다.
"이러다가 우리 선수들 몽땅 감기 걸리겠다. 이거 강우노게임을 선언할 용기가 없는 거야 뭐야?"
콘랜도 지지 않았다.
"이 정도로 비온다고 해서 싸울 용기가 없는 거야 뭐야?"
다음 이닝이 시작될 즈음 프리시는 우산을 받쳐들고 덕아웃 앞으로 나와 조코 콘랜에게 제발 무슨 뜻인지 좀 알아먹으라고 시위했다.
그러자 콘랜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퇴장을 명하면서 "그 우산까지 그냥 쓰고 나가지 그래"하고 건강을 생각해 주었다.
프리시는 "장난도 못해?"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난하려면 혼자서 해! 괜히 나까지 멍청이로 만들지 말고"
프리시는 1944년 시카고 커브스와의 경기에서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고도 퇴장당해야 했다. 그 사연은 이렇다. 프리시가 감독으로서 3루코치박스에 나가 있을 때 프랭크 재크를 1루에 두고 짐 러셀이 장타를 터뜨렸다. 재크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커브스 3루수 에디 스탱키가 엉덩이로 툭 치는 바람에 재크는 멀리 나가 떨어졌다.
그 순간 프리시는 호떡집에 불난듯이 악을 썼다.
"인터피어런스(수비방해)! 아니지, 옵스트럭션(주루방해)! 제기, 어떤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반칙이야, 반칙! 재크는 홈에 들어가야 돼."
그는 심판에게 삿대질까지 해댔다. 콘랜도 그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나도 알아. 옵스트럭션이야. 홈인 맞아."
그럴 즈음 러셀은 2루를 거쳐 씩씩거리며 3루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가 막 3루로 슬라이딩하려는 순간 스탱키가 태그하려고 하자 프리시는 급한 나머지 자기도 코치박스로부터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해 들어갔다.
조코 콘랜은 현명했다. 그는 러셀을 가리키며 "넌 세이프!"하더니 프리시를 가리키면서는 "당신은 아웃이야. 이 게임에서 퇴장이란 말이야"하고 말했다.
1940년 어느날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게임에서 빈스 리어든 심판이 프리시편에 불리한 판정을 내리자 프리시는 덕아웃에서 뛰쳐나오며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리어든이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묻자 프리시는 "하루종일 게임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무슨 소린지는 알아서 뭐해?"하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리어든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맞춰 봐!"하고 반격했다.
한번은 프랭크 프리시가 퇴장시켜 달라고 자청했는데도 빈스 리어든이 "웃기지 말라"며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1935년의 어느 화창한 날 브루클린과의 더블헤더를 앞둔 프리시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는 브루클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 로첼이라는 곳에 집이 있었는데 며칠째 앞뜰의 장미화원을 손보지 못해 마음이 답답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서 게임을 하지 않고 하루를 제낀다는 건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라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던 중이었다. 궁리끝에 그는 한가지 꾀를 냈다. 옳거니! 퇴장당하면 그냥 내빼도 누가 뭐라고 못할 게 아닌가. 그렇다면 방법은...? 그거다.
첫 타석에 들어간 그는 리어든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때가 오자 프랭크 프리시는 리어든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게 어떻게 스트라이크야? 눈깔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한자는 빠졌겠다.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서 빨리 퇴장시켜 달라는 심정으로 프리시는 심판을 마구 몰아붙였다.
그렇지만 평소같았으면 길길이 날뛰며 당장 퇴장시켰을 리어든은 이날따라 실실 웃으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거 안되겠다 싶은 프리시는 배트를 내동댕이치고 모자를 집어던지고 죄없는 땅바닥도 마구 걷어찼지만 그래도 리어든은 요지부동이었다.
"프리시, 진정해, 진정하라구. 어서 배트를 주우라구.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은 자네가 집에서 장미밭에 물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프리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엄청난 비밀을 어떻게 알았지? 팀내의 '악동' 페퍼 마틴이 게임 전에 리어든에게 그 흉계를 귀띔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1주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래니 햄너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그래니 햄너는 세이프되고도 심판과의 괜한 말싸움에 휘말려 퇴장당한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1957년 6월21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홈경기에서 햄너는 3유간으로 깊숙한 땅볼타구를 쳐놓고 1루로 냅다 뛰었다. 유격수 자니 로건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지만 송구가 짧았고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진 채 송구를 잡은 프랭크 토리가 몸을 홱 돌리며 태그하려고 했지만 이미 햄너가 지나친 다음이었다.
햄너는 1루를 통과한 후 "노! 노!"하고 소리쳤다. 태그당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1루심 켄 버크하트는 기분이 나빴다.
"심판은 나야."
평소에 햄너가 심판에게 자주 대들던 것을 아니꼽게 여기던 버크하트는 시비조로 나왔다.
"네가 통반장 다해먹어라."
햄너도 장호연 못지않게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여긴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바른 말이면 더더욱 많이 해야죠."
두 사람은 햄너가 세이프라는 것은 제쳐두고 쓸데없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점점 혈압을 올렸다. 마침내 버크하트는 "한마디만 더하면 퇴장이야"하고 입씨름을 끝맺으려 했다.
"한마디 더요. 어쩔래요?"
"당 장 퇴 장!"
쟈니 앨런
뉴욕 양키스 투수 자니 앨런[1932~44년에 활동]은 매일 아침식사로 유황불을 먹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 시시때때로 활화산처럼 입과 몸으로 불길을 뿜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심판에서 동료선수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자니 앨런은 스트라이크, 볼 판정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노골적으로 심판에게 투정을 부렸고 심지어 심판에게 '빈볼'을 던지기까지 했다.
앨런은 게임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면 동료들에게도 마구 신경질을 부렸다. 사람좋은 루 게리그 마저 "저 친구는 제가 던질 때마다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게임에 지면 선수들끼리 짜고 일부러 진 걸로 생각하거든"하며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클럽하우스에서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동료들을 씹는 것을 보다 못한 조 매카시 감독은 1935년 겨울 앨런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이를 놓고 뉴욕의 어떤 신문기자는 클리블랜드에 있는 기자에게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골치덩어리가 가니 조심하라"고 경계를 촉구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선 안 샐 리가 없었다. 인디언스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로저 혼스비 감독은 "앨런이 스핏볼을 던진다"면서 캐처가 앨런에게 되돌려주고나면 심판에게 볼을 검사해줄 것을 요구하라고 자기 팀 선수들에게 지시했다.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들마다 볼검사를 요구하니 '냄비'체질인 앨런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심판은 선수가 볼검사를 요구하면 안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 성깔에 불이 붙은 앨런은 심판에게 로빙볼로 던져주지 않고 강속구로 타자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그 다음 이닝에 심판이 또다시 볼검사를 하려고 하자 앨런은 이번에는 글러브도 없는 심판에게 강속구를 집어던졌다. 가슴 프로텍터로 막아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 될 뻔했다.
몇 주일 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를 1-0으로 지던 날 앨런은 브룬스윅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에 앞서 모래를 담아놓은 재떨이를 뒤엎어 로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 벽에 걸려 있던 소화기를 꺼내 거품을 사방팔방으로 뿌려댔다. 그 와중에 전구를 갈아끼우던 호텔 영선과 직원은 히말라야 눈사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눈을 뜬 앨런에게 호텔 측으로부터 수리비 50달러의 청구서가 날아갔고 구단은 25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용불용설(用不用說)에 따른 것일까, 2년 뒤 앨런의 성질 부리기는 한결 단수가 높아져 있었다.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보스턴전에 등판한 앨런은 소매부리가 너덜너덜한 언더셔츠를 입고 나갔다. 타자들을 현혹시키려는 것이었다. 2회말 보스턴의 조 크로닌 감독이 항의를 제기하자 빌 맥고원 구심은 "소매를 매끈하게 자르지 않으면 퇴장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느 때같으면 한바탕 툴툴대고 시끄러웠을 앨런이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고분고분 마운드를 떠나 덕아웃 뒤로 들어갔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경기가 중단된 채 지루하게 기다리던 오시 비트 감독이 라커룸으로 들어가 보니 앨런은 태평하게 샤워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장 나오지 못해?"
비트 감독은 악을 썼지만 앨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투수를 마꾸고 앨런에게는 250달러의 벌금을 매겼다.
그러나 앨런은 그 벌금 처분을 그다지 서운해 하지 않았다. 그 사건이 벌어진 날 오후 앨런은 클리블랜드 시내 중심가의 어떤 가게에 그 너덜너덜한 언더셔츠를 진열하도록 500달러에 팔았기 때문이다.
내셔널리그 소속 피츠버그로 이적한 앨런은 1943년 브루클린과의 경기도중 보크를 지적당했다. 보크가 웬 말이냐고 길길이 날뛰던 앨런은 조지 바 구심의 어깨를 냅다 잡아흔들어 모자를 떨구었다. 리오 듀로셔 감독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재차 심판에게 대들던 앨런은 동료 레스 웨버가 레슬링하듯 머리통을 끌어안자 그제서야 간신히 발광을 멈추었다. 앨런은 그 사건으로 벌금 200달러에 10일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심판은 대가리에 ○밖에 안든 놈들"이라느니 "내 주머니를 노리는 놈들"이라느니 하며 걸핏하면 싸움질을 하던 앨런은 그들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중대 결심을 했다. 그는 은퇴한 지 4년째 되던 1948년 스스로 심판복을 입고 그들과 '한 패'가 됐던 것이다.
진 모크 감독
진 모크 감독은 음식과 원수진 사람 같았다.
1963년 9월22일 모크 감독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휴스턴 어스트로스에 2-1로 석패했다.
울화가 치민 모크 감독이 클럽하우스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때마침 게임후에 선수들이 먹을 식사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싱싱한 과일에다 얇게 썬 햄, 샐러드 그리고 조리사가 특별요리로 준비한 닭다리와 돼지갈비 등.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모크 감독은 10분에 걸쳐 홀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을 온천지에 패대기쳤다. 아아 튀긴 닭이 날아간다. 살아서도 못 날던 닭이 튀겨저서 나는구나. 싱싱한 오렌지도 날아갔다. 음식들이 모두 바닥에 뒹굴자 모크감독은 이번에는 닭다리와 갈비들을 사정없이 발로 짓이겼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비큐 소스를 담은 그릇을 팽개쳤는데 마침 웨스 카빙턴과 토니 곤살레스의 라커가 열려 있는 바람에 그들의 사복은 소스를 옴팡 뒤집어썼다. 그 두 선수의 라커가 식탁에서 가장 가까웠던 게 유죄였다. 나중에 제 정신이 돌아온 모크 감독은 이들에게 사과하고 옷값 200달러씩을 나눠주었다.
1970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감독을 맡았을 때도 모크는 음식에다 대고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 휴스턴과의 원정경기에서 안타까운 패배를 당한 후 모크 감독이 펼친 '난동'을 당시 엑스포스 코치였던 돈 지머의 입을 통해 알아보자.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니까 프라이드 치킨을 담은 그릇이 8개나 놓여 있더군. 아무리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더라도 게임을 진 날은 라커룸에서 얼마간 조용히 앉아서 기분이 울적한 체하는 게 예의야. 물론 난 그렇게 했지.
그런데 러스티 스토브와 또 누군가가 눈치코치없이 통닭을 한접시 가득 담아다가 정신없이 뜯기 시작했어. 아직 성이 덜 풀렸던 모크감독은 그들 뒤로 가더니 '그래, 게임이야 이기건 지건 늬들 배때기나 싫컷 채우라구' 라고 비아냥거리더군. 그러고나더니 식탁 위로 펄쩍 뛰어올라가서 아직 남들은 손도 대지 않은 닭고기들을 마구 던지는 거야.
여섯그릇을 깨끗이 비우더니 나머지 두 그릇은 마루바닥에 내려놓고 구둣발로 방아를 찧는 거야. 한바탕 해대고나니까 식탁 위엔 닭다리 두개만 달랑 남더군. 그 양반이 나가고난 뒤에 난 그걸 슬쩍했지. 젠장, 배가 너무 고프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구."
그러면 진 모크 감독은 음식만 던졌느냐? 그게 아니었다. 1978년 7월16일 당시 미네소타 트윈스에 몸담고 있던 모크 감독은 보스턴과의 경기도중 1루심 빌 컹클에게 "두더지처럼 눈깔이 멀었다"면서 거센 항의를 퍼붓다가 기어이 퇴장당하고 말았다.
모크 감독은 경기장에서 물러나기 전 덕아웃 앞에서 배트를 여남은 자루 집어들더니 내야쪽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이미 퇴장당한 마당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는 심보였다. 나중에 기자회견에서 모크감독은 "그냥 배트를 들고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손에서 미끄러졌다"고 말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모크 감독은 던지기만 했느냐? 그게 아니라 차기도 했다. 엑스포스 시절인 1969년 5월7일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때의 일이었다. 투수 마니크 웨네거가 보크를 범해 동점을 내주자 모크 감독은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었다.
"그게 어째서 보크냐"고 심판에게 악다구니를 썼지만 끝내 통하지 않자 모크감독은 마운드로 걸어가 로진백을 걷어차 20여m쯤 날려보냈다. 그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웨네거로부터 볼을 빼앗아 들고는 축구 골키퍼 처럼 하늘높이 차올렸다. 볼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모크감독이 퇴장당한 것은 불문가지.
게임을 진 날이면 그는 벽에 걸린 전화통을 뜯어발기거나 배트를 유리창 밖으로 내던지고 문과 가구를 걷어찼다. 그런 발작증세만 없다면 모크는 아마 야구계에서 가장 훌륭한 인격자로 꼽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중인격자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1965년 필리스가 신시내티 레즈에 4-3으로 지고나자 모크감독은 기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클럽하우스 문을 걸어잠그고나서 유리창을 깨고 라커룸을 두들겨 부쉈다.
그러나 이튿날 그의 팀이 신시내티를 7-6으로 제치자 모크감독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클럽하우스 문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인터뷰하러 몰려오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엔 어디로들 가셨댔수?"
조지 브레트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간판타자 조지 브레트는 스윙만큼이나 혈기의 분출속도도 빨랐다.
1986년 5월9일 벌어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브레트는 스타일을 구기는 삼진을 먹었다. 그러자 브레트는 배트를 움켜쥔 채 덕아웃에서부터 클럽하우스 쪽으로 뛰쳐나갔다. 그 통로에는 마침 페인트공사를 하다 남겨놓은 페인트통들이 놓여 있었는데 조지 브레트는 도장(塗裝)인부들을 대신해서 작업을 해주기로 작심했다.
게임에서 볼을 헛친 분풀이를 하듯 페인트통을 차례차례 힘찬 스윙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너무나 힘을 들여 페인트통들을 두들기다 보니 그 와중에 배트가 세자루나 부러져버렸다. '페인팅 작업'을 끝내고 나니 벽과 바닥은 초현실주의 화폭으로 변해 있었다.
1980년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브레트는 이듬해엔 '최고악질선수' 제1후보로 떠올랐다. 슬럼프에 빠진 그는 외야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남들을 성가시게 했다. 그는 "벌레들이 자꾸 달려들길래 쫓으려고 그랬다"고 둘러댔다.
1981년 발목부상으로 목발을 짚고 다니던 브레트는 5월14일 사진기자의 머리를 목발로 내려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정식으로 사과한 브레트는 자기 사물함에 신품 목발 두개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엔 '조지 브레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또하나에는 '사진기자 구타용'이라고 씌어 있었다.
1주일 뒤인 5월21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원정경기에 나선 브레트는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서 덕아웃 뒤의 화장실을 세번씩이나 들락거렸다. 타점을 올릴 찬스에서 평범한 내야땅볼에 그칠 때마다 그는 방망이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들어가 좌변기 두개와 세면대를 콩가루로 만들었다. 로열스 구단은 브레트의 '배팅시범' 덕분에 트윈스에 수리비 1천4백달러를 물어야 했다.
그해 연말 『TV가이드』는 연례적으로 최고악질 선수를 뽑았는데 브레트가 당당히 후보에 오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그해의 대상은 월드시리즈 기간중 엘리베이터에서 팬과 싸운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에게 돌아갔다). 이듬해 세븐업 비누 담배 등 브레트를 CF모델로 쓰던 회사들이 슬그머니 모델을 바꾼 것은 우연이었을까.
브레트는 나중에는 성질이 많이 죽었지만 부처님 가운데토막이 된 것은 아니었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스타디움의 덕아웃 통로에는 아무리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있다. 그것은 조지 브레트 전용인데 용도가 쓰레기를 담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데이브 리게티
뉴욕 양키스의 구원전문투수 데이브 리게티는 1986년에 46세이브로 아메리칸 리그 최다세이브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리게티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에서 8―2의 넉넉한 리드를 안고 9회말 구원투수로 나섰다. 이제 스리아웃만 잡으면 양키스선발 더그 그라이벡은 메이저리그 데뷔 첫승을 올릴 판이었다. 누상에 주자가 두명 나가 있긴 하지만 '소방대장' 리게티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2점을 뺏기고나서 만루의 위기에 몰린 다음 기어이 홈런을 얻어맞아 졸지에 8-8 동점이 되고만 것이다.
양키스의 루 피닐라 감독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마운드로 슬슬 걸어가며 불펜에 있던 브라이언 패서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 전날에도 신통치 못했던 리게티는 그렇지 않아도 바운드를 떠나고픈 심정이었다. 그런데 돈 덴킹어 구심이 던져준 새 볼을 무심코 받은 리게티는 "예라이 쌍"하며 공을 라이트 펜스 뒤로 던져버렸다. 마운드에서부터 공이 날아간 거리는 100m는 족히 넘었다.
양키스는 그럭저럭 10회초에 1점을 뽑아 9―8로 이겼지만 클럽하우스로 들어간 선수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리게티를 피했다. 샤워를 마치고 자기 라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리게티는 생전 처음으로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그걸 지켜본 피닐라 감독은 "별 일 아니에요. 좌우간 100m도 넘게 던진 건 정말 멋있었잖아요"하고 대신 해명하고는 "에이구, 내가 선수생활을 할 때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얼 위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얼 위버감독은 170㎝의 단신이지만 성깔로 말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수법을 고안해내는 데에 일가견을 갖고 있던 위버의 레퍼토리를 열거하자면 ▲배트나 헬멧 집어던지기 ▲모자 벗어 걷어차기 ▲손가락을 3지창삼아 심판얼굴 찌르기 ▲발로 흙을 쓸어 홈플레이트에 무덤만들기 등 다양했다.
그러다가 1980년에 새로 착안해낸 실용신안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3일간 출장정지를 부른 명작이었다.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 선수들의 거지같은 플레이에 화가 났는 지는 모르지만(둘 다일 때가 대부분이다) 덕아웃을 박차고 나온 위버는 스모선수 같은 거구의 스티브 팔레르모 2루심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레퍼토리를 총동원한 위버는 세컨드 베이스를 밟고 올라서서는 그위에서 깡충깡충 뛰며 팔레르모에게 대들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위버를 쫓아낸 팔레르모의 해석이 재미있었다.
"젠장, 제까짓게 베이스 위로 올라가면 우리랑 키가 같아질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래봤자 베이스 두께가 얼마나 된다구..."
보비 브래건
보비 브래건은 명장(名將)으로서 야구사에 이름을 남길 일은 없지만 심판을 골탕먹이고 퇴장당하는 데에는 단연 챔피언급이었다. 여느 사람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한 그의 심판골리기 레퍼토리를 살펴보자.
브래건의 이런 수법을 마이너리그에서부터 갈고 닦았다. 텍사스리그에서 팀을 5년간 지휘하는 동안 그는 무려 60회의 퇴장처분을 받는 전과를 쌓았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퇴장명령을 받고 경기장 떠나기를 거부한 것. 한바탕 입씨름 끝에 잔뜩 성이 난 심판들은 퇴장처분을 내렸으나 브래건이 그대로 그라운드에 버티고 서 있자 경찰을 불러들여 그를 끌어내도록 했다.
그러나 날씬한 브래건이 그라운드 안에서 요리조리 도망다니는 데는 체중이 110㎏이나 되는 뚱보 경찰관으로서는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그는 센터필드로 달아났다가 레프트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베이스 사이를 휘저으며 술래잡기 놀이를 하더니 결국 덕아웃 근처에서 덜미를 잡혀 주었다.
퍼시픽코스트리그로 옮겨와서는 재능을 한단계 향상시켰다. 훗날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크리스 펠레커더스 심판과 시비를 벌이던 브래건은 갑자기 심판의 주먹만한 코를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이 왜 그렇게 엉터리 판정을 일삼는지 알겠어. 코가 그 따위로 생겨먹었으니 게임이 제대로 보이기나 하겠어?"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그 죄로 브래건은 리그사무국으로부터 50달러의 벌금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는 샌디에이고 사건으로 3게임출장정지 처분을 감수해야 했다. 할리우드 스타즈라는 팀의 포수겸 감독이었던 그는 퇴장처분을 받자 가슴 프로텍터, 종아리 보호대, 마스크, 글러브, 모자를 차례로 그라운드에 내던지더니 덕아웃으로 퇴장하면서 유니폼 상의, 스파이크, 언더셔츠, 그리고 수건을 스트립쇼하듯 차례차례 벗어던졌던 것이다.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도 심판을 골리는 그의 못된 버릇을 고치는 데는 전혀 약이 되지 않았다.
이듬해 브래건은 훗날 메이저리그 심판이 될 에메트 애시포드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브래건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모자를 백스톱쪽으로 집어던지자 가만히 두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애시포드는 즉각 퇴장을 명령했다. 그러나 브래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홈플레이트가 제집 안방이나 되는 양 거기에 팔베게를 하고 눕더니 휘파람을 불며 좀처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 분 동안 그런 자세로 있다가 어느 관중이 신문을 집어던지자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신문을 뒤적뒤적하면서 게임을 지연시켰다.
무능한 심판들 때문에 도무지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브래건은 어느날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어차피 감독이 나가 있어봤자 뻔하다고 시위하듯 그는 3루코치박스에 배트보이를 내보냈다. 그런가 하면 심판의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 불만을 가진 어느날에는 한 타석에 대타를 집어넣더니 볼 하나가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대타를 투입, 한 타석을 소화하는데 무려 9명의 대타요원을 소모한 적도 있었다.
보비 브래건은 퇴장명령을 받고도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수법은 점입가경이었다.
어느날 퇴장처분을 받은 브래건은 두눈을 감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더듬거리며 걸어가다가 기어이 조명탑 기둥에다 이마를 찧었다. 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렸지만 심판들은 따라웃고 싶은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브래건의 심판골리기 레퍼토리 중에서 단연 압권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1957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감독으로서 밀워키 브루어스와 싸울 때였다.
스탠 랜디스 2루심이 밀워키 주자에게 세이프를 선언하자 브래건은 제 코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심판판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응당 랜디스의 퇴장명령이 떨어질 차례였다.
"잠깐!" 브래건은 덕아웃에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퇴장도 좋은데 쫓겨나기 전에 할 말이 있어. 그렇지만 이 핫도그와 오렌지쥬스를 다 먹을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그러더니 어떤 선수가 건네준 종이팩에 든 오렌지 쥬스를 스트로로 쪽쪽 빨아먹으며 심판에게 다가갔다. 이미 퇴장명령을 받은 브래건은 겁날 게 없었다. 그는 프랭크 다스콜리 구심에게 가더니 오렌지팩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좀 드실라우? 난 또 있어."
"집어치워!"
다스콜리가 성난 목소리로 말하자 브래건은 이번에는 프랭크 시커리 1루심에게 다가가서 쥬스 좀 맛보라고 권했다. 그는 고개를 훼훼 저으며 "어쩌다가 이 따위 너절한 인간들이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는지 모르겠어"하고 투털거렸다.
이제 그를 퇴장시킨 랜디스에게 다가간 브래건은 전혀 악감정이 없음을 보여주고자 쥬스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 역시 거절했고 마지막으로 3루심 빌 베이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스콜리가 굵직한 목소리로 "당장 꺼지지 않으면 몰수게임을 선언하겠어"하고 으름짱을 놓는 바람에 사태는 갑자기 험악해졌다.
"몰수게임? 할테면 해봐. 당신은 그럴 배짱이 없을 걸."
브래건은 킬킬거리며 조롱조로 말했다.
시커리 1루심이 합세하자 브래건은 "가까이 오지 마. 얼굴에 쥬스국물을 쫙 뿌려주겠어"하고 위협했다.
시커리는 턱을 치켜들며 "한번 해보시지"하고 말했다. 그러나 브래건은 아주 현명할 길을 택했다. 클럽하우스를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사실 그가 심판진 전원을 골린 것은 그게 두번째였다. 바로 그 해에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 두명을 동원, 덕아웃 앞에다 물이 찰찰 넘치게 담긴 양동이를 날라다 놓았다. 레즈 선발투수 롤 산체스가 공에다 침을 발라 반칙투구를 한다는 뜻으로 무언의 항의를 했던 것이다.
내셔널리그 워렌 가일스 회장은 쥬스로 심판진을 모욕한 죄로 브래건에게 100달러의 벌금을 물린 후 그런 짓을 한번만 더하면 무제한 출장정지처분을 내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야구는 진지한 사업인만큼 좀더 신중히 행동하기 바란다"는 전문을 띄웠다.
이를 정작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피츠버그의 조 브라운 단장이었다. 그는 이틀 후 메이저리그의 품위를 손상시킨 브래건의 목을 쳤다.
브래건이 버디 테베츠로부터 밀워키 브레이브스감독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1963년이었다. 브래건이 감독실에 들어가 책상서랍을 열어보니 테베츠가 남긴 편지 두통이 들어 있었다. 밀봉된 그 봉투에는 '1번', '2번'이라는 순서가 매겨져 있었고 "반드시 위급할 때만 뜯어보시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제갈량이 죽으면서 남긴 금낭처럼.
시즌이 진행되면서 밀워키팀의 성적이 도통 신통치 않은데다 장차 나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자 브래건 감독은 전임자의 편지를 떠올리고는 1번봉투를 뜯었다. 거기에는 "그게 다 전임자 탓이라고 말하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해에 브레이브스는 성적이 약간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6위에서 겨우 5위로 올라갔으니까.
시즌이 끝나갈 무렵 전임감독이 무슨 묘책을 남겼을까 궁금해진 브래건은 두번째 봉투를 뜯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봉투 두장을 준비하시오."
윌버트 로빈슨
윌버트 로빈슨은 두리뭉실한 체격에다 야구감독생활을 하며 '로비 아저씨'라는 별명을 듣던 사람답게 호인이면서도 어딘지 미욱한 면이 있었다. 다음은 1915년 동계훈련 중에 있었던 얘기.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를 이끌던 로빈슨은 자기 선수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워싱턴 세네터스의 포수 개비 스트리트가 워싱턴 기념탑 꼭대기에서 떨어뜨린 공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왕년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명포수로 이름을 떨쳤던 로빈슨은 그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까짓건 아무 것도 아냐. 난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공도 잡을 수 있어."
숫자개념에 밝은 잭 쿰스 트레이너는 수백미터 상공에서 떨어지는 야구공의 가속도를 계산해내고 그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점잖게 말했지만 이미 말을 뱉어버린 로빈슨감독은 "정말로 받을 수 있다"고 박박 우겼다.
되느니 안되느니 아웅다웅하다가 실험해 보기로 했다. 쿰스 트레이너는
루스 로라는 인근의 여류비행가가 모는 경비행기의 뒷자리에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가 공을 떨어뜨리면 로빈슨감독이 밑에서 그걸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 실험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저스의 익살꾼 케이시 스텡걸이 감독님의 안전을 생각했는지, 아니면 재미있으리고 그랬는지 야구공 대신 자몽을 비행기에 실었다.
자, 비행기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다저스 선수들이 연습하는 필드의 상공을 몇바퀴 맴돌았다. 드디어 로빈슨감독이 준비완료 사인을 보내자 쿰스가 공 아닌 자몽을 투하했다.
170㎝, 105㎏의 땅딸보 로빈슨감독은 외야수들이 하는 식으로 손을 내저으며 "저리 비켜! 저리 비켜!"라고 소리쳐 사람들을 물리치고는 공 밑으로 달려들었다.
노르스름한 둥근 물체가 점점 가속도를 붙여가면서 지상으로 떨어지자 로비의 눈에는 그게 점점 보름달처럼 커졌다. 아직도 그게 정식 공인 줄로 생각하고 있던 로빈슨은 용감하게 그 물체를 미트 속에 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몽은 엄청난 힘으로 미트에 틀어박히는 동시에 폭발하면서 끈끈한 액체와 씨를 산지사방으로 쏟아냈다.
또 로빈슨은 그 통에 미트를 떨구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온몸에 자몽즙을 뒤집어쓴 채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정신을 차린 로빈슨은 얼굴에서 붉으죽죽하고 끈끈한 액체가 흐르자 그게 피인 줄 알고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피나는 것 좀 봐. 아이고 나 죽네"하며 발버둥쳤다.
사람들은 그 모양을 보고 배꼽을 쥐었지만 로빈슨감독에게는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남은 목숨을 걸고 공을 받아냈는데 자몽을 떨어뜨려놓고 웃고 있다니. 이 괘씸한 놈들. 하긴 그게 자몽이 아니라 진짜 야구공이었더라면 그는 턱뼈가 부러져 남이 웃는 꼴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돈 짐머
야구이론과 규칙에 일가견이 있다는 돈 지머는 1980년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을 맡고 있을 때 일생일대의 망신을 당했다. 야구에 일가견을 가졌으니 누구 실력이 길고 짧으냐며 심판과 대보는 일이 잦을 수밖에.
존 슐로크 심판과 언쟁을 벌일 때였다. 씹는 담배를 질겅거리며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아웅다웅하던 지머는 땅바닥에다 칵 담배를 뱉었다. 그러자 슐로크도 가래침을 돋워 퉤 뱉었다.
이제 본격적인 입씨름이 벌어지려니 했으나 지머는 곧바로 휴전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씹는 담배를 칵 뱉는 순간 틀니까지 한꺼번에 빠져나갔던 것이다.
론 루치아노
스포츠서울 창간독자라면 1995년에 연재됐던 '심판도 할말 있다'의 주인공 론 루치아노 심판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1995년에 자살로 불행하게 일생을 마쳤다. 여기서는 '강펀치 소유자'로서의 루치아노를 만나보자.
그는 1971년 6월1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뉴욕 양키스―오클랜드 어슬레틱스전에 2루심으로 나섰다. 9회초 안타를 치고나간 어슬레틱스의 조 루디가 2루도루 사인을 받았다.
투수가 투구동작에 들어가는 순간 양키스 유격수 진 마이클, 1루주자 루디에다 루치아노까지 세명이 일제히 세컨드베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포수 서먼 먼슨의 2루송구가 베이스상에서 약간 1루쪽으로 치우쳤다. 마이클이 어렵사리 공을 잡아 태그했으나 루디는 맵시있게 밑으로 슬라이딩해 들어가 세이프.
그런데 문제는 루치아노의 제스추어에 있었다. 99㎏의 거구인 그가 평영선수처럼 양팔을 쫙 펼치며 세이프를 표시했을 때 아웃당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유격수 진 마이클이었다. 왜 그랬는지를 슬로비디오로 살펴보자.
마이클이 태그하면서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운 것과 루치아노가 수영선수처럼 힘차게 양날갯짓을 한 것은 동시였다. 그런데 양옆으로 뻗는 루치아노의 팔동작은 마치 태권도 선수의 수도(手刀)치기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의 수도에 마이클의 머리통이 걸렸던 것이다.
마이클은 그 자리에서 쭉 뻗어버렸다. 해머질을 하는 듯한 그 동작에 머리뼈에 금이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가련한 진 마이클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그로기에 빠진 복서처럼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바람에 더이상 수비를 하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나가야 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진 마이클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정밀검사까지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목디스크 환자처럼 목에다 브레이스를 끼고 며칠동안 출장치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뭔가가 머리통을 땅하고 때리는 것까지는 기억하겠는데 그뒤로는 전혀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마이클이 라인업에 복귀하던 날 2루심은 공교롭게도 또다시 론 루치아노였다. 마이클은 유격수의 정위치에서 3루쪽으로 약간 치우쳐 자리를 잡으면서 될 수 있는대로 루치아노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첫댓글 너무 길어서 한번에 다 못읽었어요... 담에 계속 읽어야지... 넘 재밌어...특히 자기가 그린 사각형안에 갇힌 심판... 가끔 우리는 우리가 그은 사각형의 사고 안에 갇히는 적은 없는지....
정말 재밌네요. 특히 프리시 감독 하는짓이 아주 귀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