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머리를 열며 광복 61주년을 맞으면서 일제 잔재 청산의 하나인 친일행위 지식인들의 훼절과 매국적 반역죄를 밝히는 일, 참으로 너무 늦었지만 더 늦기전에 이제라도 라는 청소작업의 일환으로서 친일문인들의 이른바 2차 대전 동남아 일대의 침략적 범죄행위를 성전이라 미화한 그들의 반인륜적 전쟁의 승리를 축수하고 가장 비인도적인 가미가제 특공대의 폭탄 자살 공격을 찬미한 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기존의 평자들에 의하여 총괄적인 전모를1) 밝힌 수십권의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었기에 희귀자료나 새로운 사안은 있을 수 없으나 광복 후 그들이 어떤 자세로 반성 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시침 떼고 반공문학 애국문학의 선두에 서서 세인의 눈을 가리고 양두구육식 명사 내지 지도자 행세를 했는가2) 살펴 보는 것은 새로운 흥미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선조 25년 1592년 임진년 대륙진출의 길을 내놓으라며 침략을 감행,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을 시발로 1876년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진출, 병자수호조규를 맺고 제물포 부산진 원산 3항을 개항 일본 상선이 히노마루를 나부끼며 아메다마를 싣고 온 것은 개화니 개항이니 근대화란 미명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침략의 발톱을 감춘 정한론의 시작이었다.3) 울며 겨자 먹기란 말처럼 눈물 흘리면서 먹어도 맛은 있었다. 그러나 번연히 그 속셈 다 드러내 놓은 침략의 마수인데 웃으며 반기고 통채로 이 강산 모조리 내놓았으니 이런 놈의 일한친선이 미구에 일한합방4) 망국 전야에 문 열어놓고 서방 맞아들인 억지 춘향이, 그 정조를 유린 국가적 강간사건 국치요 망국이었다. 한편에선 경계와 항일, 한편에선 우호와 환영의 친일, 결국 항일세력보다 친일세력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이 땅에는 태극기 대신 히노마루가 하늘을 덮었다. 부끄러운 과거사를 덮어 둘 것이냐, 청소하여 씻어내고 속죄하여 새 출발을 다짐할 것이냐, 망설임과 결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나 고름을 아끼지 않아야 새 살이 차는 교훈을 새기며 이 부끄러운 펜발을 따라가고자 한다.
2. 침략의 전초전 개화바람 1894년5) 이 땅에는 두 개의 바람이 불었다. 하나는 서학에 맞선 동학바람, 또 하나 는 1876년 강화도에 불어온 개항의 왜바람. 그들이 들어와 양성한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 삼일천하 실패한 쿠데타와 김옥균의 죽음, 그로부터 10년 후 동학농민봉기 진압작 전에 불법으로 끼어 든 왜군은 청국과 부딪쳐 청일전쟁을 이기고 한반도 주도권을 잡은 후 친일정권 김홍집 내각에 의한 일본식 공문서 근대화 갑오경장에 의한 개화바람이 불었다.6) 전주 고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농민군 그 지도자였던 전봉준 녹두장군 제폭구민(除 暴救民) ? 척양척왜(斥洋斥倭) ? 오리징치(汚吏懲治) 3대구호를 내걸고 자력에 의한 근대화의 불길이 타올랐으나 봉건탐학의 수구당 왕조는 그 말기의 쇠운을 유지하기 위해 청군과 왜군을 끌어들여 의로운 민중봉기를 역도로 몰아 섬멸하고 마침내 그들의 야욕에 의해 망국이라는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개화, 개혁,7) 언제 들어도 아리송하고 위험한 말이다. 서구식 자본주의로 명치유신을 감행 군벌국가가 된 일본제국주의는 내부 모순을 외부에서 해소시키는 시장확보와 원자재 탈취,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 착취. 룸펜 플로레타리아의 식민지 지배계급 만들기 등 가장 악질적인 천민자본주의에 의한 개화의 군홧발을 이 땅에 들여 놓았다.8) 삼천리 강산에 닛본도 찬 일본의 무뢰배나 깡패가 늘어나고 그들의 게다짝 소리가 딸각 거릴 때 뜻있는 자의 눈에는 수상한 왜바람이 불기 시작했었다. 그 당년 녹두장군의 처형을 슬퍼하는 파랑새 노래는 분명 혁명 실패의 엘레지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만수 무연 풍년새야 너 무엇하러 나왔느냐 하철인가 나왔더니 온갖 풀이 날 속인다 연잎 댓닢 푸릇푸릇키로 삼사월인 줄 알아 나왔더니 백설은 펄펄 휘날리고 동지 섣달 분명하다
<파랑새 노래 전문>
동학혁명에 대한 앞날을 예측하고 그 실패를 비탄한 참요적(讖謠的) 노래이다.9) 파랑새 (동학도) 새(백성들) 녹두밭(동학당) 녹두꽃(전봉준 녹두장군) 청포장수 (민중세력, 혁명세력)등 은유를 사용한 것은 당시 동학도가 역모죄로 몰렸기 때문에 취한 표현법이다. 이 가사의 특징은 동학혁명이 시기상조라는 적극적이지 못한 민중의 체관(諦觀)과 기회주의적 속성이 드러나 있다.「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야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전했네」놀미(論山) 갱갱이(江景)이 민요도 전봉준의 실패를 탄식한 민요로서 반동성까지 엿보인다.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의 봉건적 반동성으로 동학도가 혁명에 실패하여 역도가 되자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식의 반동적 민요가 등장한 것이 다.10)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디다 두고/ 전주(全州)야 숲에서 유시했노」이 민요 역시 녹두장군의 으뜸수장 김개남(金開南)의 패전을 슬퍼하기보다 반야유조가 섞인 반동성이 엿보인다.「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이 <가보세> 노래는 거사를 일으킨 해를 간지로 은유하여 그것을 밀어붙이지 못한 작전의 실패로 탄식하고 있다.11) 가보세 1894년 갑오년(甲午年) 일종의 중의법으로 1894년에 결판내야 한다는 뜻이다. 을미적 1895년 을미년(乙未年 )이 되면 실패할 것을 암시 하여 을미적거린다고 중의법적으로 표현했다. 병신되면 병신년(丙申年) 1896년에는 농 민군이 토벌되어 실패한다는 중의법적 표현이다. 갑오년(1894)에 결판내야지 미적거리다 1895년을 지나 병신년(1896년)까지 간다면 실패한다는 선조를 아뢰는 참요적 성격의 민요이다.
예언자의 그것처럼 동학혁명의 실패를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민요야 말로 기회주의적 속성의 친일세력 동조자들의 입김이 작용한 반동성을 내포하고 있음도 감지된다 하겠다. 아무튼 비공식 통계이지만 20만~30만의 농민군이 고부 전주 일대와 우금치 최후의 전투에서 관군 청군 일본군의 합동적 토벌작전에 의해 전해오는 말로는 금강을 보름 동안 핏빛으로 물들였다 한다.12) 당시 전북 순창 피로리에 일시 은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계획했던 녹두장군은 일제가 내건 현상금이 탐이난 보부상 (褓負商)에 의한 밀고로13) 그가 애민(愛民)했던 민초에 의한 반동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가
일제의 토벌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그들의 약식 재판을 받고 효수(梟首) 된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남긴 비분한 유시(遺詩)는 역사상 수양대군의 왕권찬탈 음모 때 그것을 반대하다 처형당한 성삼문의 시와 궤를 같이 한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 금야숙수 가(今夜宿誰家)리오?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의 목숨 제촉하는데/ 머리를 돌리니 서산 에 해는 비끼었구나/ 황천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 어디서 자고 갈꼬?) 처형장에 서 느긋한 낭만성까지 보이는 이 비장미는 역사상 포은(圃隱)의 <단심가(丹心歌>를 필두로 수많은 변절족의 표상적 노래 이방원의 <하여가(何 如歌)>에 맞선 이 땅의 절 의가(節義歌)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 단심가의 절정에 사육신 성삼문의 고시조「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와 함께 칠언절구 유시는 천추에 남긴 민중의 한을 대변한 <엘레지(挽歌)>였다.14)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았지만 시운 다 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함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 줄것인가.
<운명시 전문>
이 땅에서 봉건 탐학의 정치를 개혁하고 우리 국민의 힘으로 민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동학운동은 파랑새 노래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은 더욱 더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담바고 타령>으로15) 은유화 되던 일제의 침략은 상선에서 군함으로 바뀌며 1894년 이후 그들의 세력은 궁궐로 파고들어 이 땅의 왕좌를 허수아비 자리로 전락시키기 시작했다.
담바고야 담바고야 동래 울산 담바고야 너의 나라 어데 두고 우리 나라 찾아왔나 우리 나라 좋지만 대한제국 살기 좋아 찾아왔소
<울산지방에 유행했던 담보고 타령>
‘타바코 tabacco(포르투칼어)’가 일본에 건너와‘ 다바꼬 タバコ’가 되고 음운의 차이로 우리 나라에선‘담바고’로 口음이 첨가되었고 그 다음 단계 음운 축약이 일어 나 현재 ‘담배’가 된 외래어이다. 담배로 대유법을 써서 장차 그 자본(매판자본)이16) 한반도를 식민지로 병탄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칭 항일민요로 불리우는 민요들은 중의법이나 대유법을 써서 그 뜻을 풍자적으로 숨기고 있었지만 지배계급의 친일적 변절과는 달리 민중은 장차 다가올 일제의 침략과 병탄 야욕을 투시하고 있었다. 몇 개의 민요를 인용하여 그 당대의 실상을 살펴 본다.
① 소련에 속지 말고 소련→속지 미국 믿지 마라 미국→믿지 일본 일어나니 일본→일어나니 조선 사람 조심해라 조선→조심하라
제목은 일종의 시대를 풍자한 조심가 쯤 일종의 두운에 의한 압운(assonance)을17) 밟아가며 국제정세를 피력하고 조선을 경계하였다. 이 국제적 한반도 구도는 100년을 유지해온 터, 식민지 남북분단 시대 최근의 6자회담까지 이어지고 있고 1905년 가쓰 라테프트밀약과 그 다음에 전개된 을사오조약(1905년 11월) 체결 등, 단계적으로 수순을 밟아가며 이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 세력의 음모가 이 4행의 항일민요 속에 여지 없이 축약되어 있다.
② 발 아파 못 신던 미투리 신 고무신 바람에 도망을 간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짚신 장사 김첨지 밥 굶는다
삼대째 내려오던 놋그릇 대롱 양권련 바람에 도망을 간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양권련 연기에 집 떠나간다.
김 잘 매고 베 잘짜는 맏며느리는 양갈보 바람에 도망을 간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정강치마 수통다리 꼴보기 싫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매판자본이 침략해 와서 민족자본이 거덜나고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미투리신, 놋그릇대롱, 베짜는 길쌈은 당시 우리 나라의 전근대적 민족자본을 상징하고 고무신, 양권련, 양갈보(정강치마 수통다리)는 매판자본 일본의 침략을 의미한다. 현재도 외래자본이 이 땅의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악순환은 신식민주의 100년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민중은 아는데 지배계급은 왜 몰랐을까. 모르는게 아니라 상호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민중은 국권 수호 세력이고 당시 지배계급은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운 매국세력이었다.18)
③ 조지로(朝支露) 왜목(倭목)친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쪽바리 등살에 못 살겠네 함경도 원산이 살기는 좋아도 왜놈 등살에 못 살겠네.
<조지로 왜목 친다> 전문
조지로는 남근을 암시하는 중의법인 바 조선과 지나와 러시아를 한자로 썼고 그것을 다시 우리 말 남근의 비속어‘좆’으로 표기하여 남의 나라 침략하는 일제에 대한 반감을 표현했다.19) 1876년 강화도 병자수호조규 이래 인천(제물포) 부산진 원산 3항을 개항하여 그들의 상선 상인(쪽바리)이 들어와 못 살겠다 탄식 하고 있다. 이미 이 땅의 상권이 차츰 일제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역력히 말해주는 민요이다. 당시 이 땅에는 일제의 앞잡이들이 만든 매판자본에 의한 경제단체인 매국노 집단인 일진회(송병준)20) 같은 것이 만들어져 제국주의 침략의 주구가 된 친일 세력이 있었다.
④ 개혁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을 이름이냐 내 수중에 있는 권리 남의 장중(掌中) 넣어 주고 내 국민의 소유권을 남의 인문(咽門) 넣어 주면 이걸 위지(謂之) 개혁이냐 소소백일(昭昭白日) 강림하에 괴기지설(怪奇之說) 너무 마라
<개혁의 속내를 풍자한 괴기지설가>
친일 세력 당시 지배계층에 의하여 협약으로 나라가 넘어가는 괴이한 개혁놀이를 풍자하고 있다. 동학혁명의 3대구호21) 제폭구민 척양척왜 오리정치는 10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정치구호로서 그 이면엔 내 수중의 권리를 남에게 팔아넘기는 매국이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당대 유행한 <新아리랑>도 그 가사 구구절절이 개혁세력= 매국세력임을 풍자한 노래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경제 현실이다.
⑤ 문전의 옥토는 어찌 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인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밭은 헐어서 신작로 나고 집은 헐어서 정거장 되네 (후렴) -------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후렴) ------- 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깨나 매는 놈 부역을 간다 (후렴) -------
상전벽해의 변화 항구, 신작로, 철도 그 눈부신 개혁바람은 개화바람이라는 매국의 왜바람 차츰 나라는 왜놈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1910년 그들의 말마따나 일한합방의 비극은 다가오고 있었다. 1906년 일청전쟁을 배경으로 쓴 신소설 <血의 淚>가 친일파 이인직(李人稙)에 의해 쓰여졌고, 그는 이완용을 도와 한일합방의 공신으로 남작의 작위를 얻었으며, 천재 육당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를 간행 망국의 전야에 <海에게서 소년 에게>라는 괴이한 제목으로「철---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는 신나는 조흥구로 문을 열라고 바다의 입을 빌려 외치었다. <The Ocean> 이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시를 의방한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1908년이면 나라가 망하기 2년전 이미 열린 문 안으로 도적 떼가 무리져 들어와 통감부 치하 궁궐까지 일본의 세력이 점령하고 있는 판국인데, 개화의 물결 새 시대의 물결이 한반도의 잠을 깨우니 어서 문을 열라고 열을 올린 시가 바로 우리 나라 신시의 제1작이었다. 근대화의 촉구 권두시 일까? 망국촉진 친일시 제1작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근대화의 신문학 신시대의 물결이 이 땅을 식민지의 나라로 잠식해 가고 있었다.
3. 한일합방과 한국의 신문학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 거사의 날 하얼빈 역두의 의로운 육혈포 총소리, 한 의인의 총알 심판이 동양의 원수 이토히로부미의 그 음흉한 흉중에 세 방의 총알 세례를 퍼부었을 때 초상집으로 변한 통감부는 그 잘못을 깨우치고 반성하기 보다는 안중근 의사를 깡패(壯漠)으로 비하, 그 저격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당초의 합방개혁을 앞당겨 일찌감치 수순을 밟아 계획보다 빨리 한일합방이라는 범죄적 남의 나라 강도질을 감행했다. 그래도 나라 망했다고 열사들의 자결이 잇따랐고 전남광양 출신 황현의 <절명시>는22) 산하를 우르러 통곡했다. 그러나 그 오열도 잠시 친일 세력들은 총독부의 관저에 의자 하나씩 꿰차고 주구노릇을 시작했다. 현해탄의 연락선은 더욱 바빠지고 친일 지식인 친일 문학인들은 보호색 잘 갖추면서 요로 요로에 숨어 그 매국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2人문단 시대 뭇 신문학가를 대표하여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새시대 주역으로서 계몽문학의 선두에서 이 땅의 신문학을 이끌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은 해외 유학생 <2.8선언문>과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초안한 신문장가들이었 다.23) 1차대전 종료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다. 일견 약소국가의 인권이나 독립을 부추기며 제국들의 식민지 침략정책을 비판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속내는 자국의 인디안 토벌로 18개주에서 50개주를 만들기까지 200여회 전쟁을 벌이고도 그들은 해외 식민지가 없었다. 몬로 대통령은 몬로 독드린을 선포 아메리카 기본 전략인 몬로주의가 선포되기도 했다.24) 해외 식민지가 욕심은 나고 먹으러 갈 틈은 없고 그래서 너희만 먹지 말고 내 먹을 것도 남겨달라는 복잡한 화법이 숨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윌슨의 말을 배경삼아 2?8선언과 기미독립선언을 온건한 입장에서 전개했다. 그러나 온건한 종교계 지도자와는 달리 민중의 투쟁은 가열차 7천명이 구속 되거나 사상을 입은 이른바 커다란 조선폭동으로 번졌다.25) 초안자 최남선은 33인 서명을 거부 말썽이 있었으나 자구 수정을 거쳐 채택되었고 그 난해한 국한문 혼용체 선언문은 방방곡곡에서 낭독되었다. 33인 전원검거, 초안자도 물론 검거되었다. 당당한 항변으로 일관 조선독립 이유를 밝히면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의 부당성을 역설한 만해(萬海) 한용운은 3년형이었으나 눈물 질질 짜며 참회한 최남선은 진짜 서약 그대로 훈방된 후 차츰 친일의 길로 기울기 시작했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만해가 길거리에서 육당을 보고 인사해도 육당은 이미 죽었다고 아는 체 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오히려 쓴웃음을 자아낸다. 총독부의 왜곡 조선사 편찬 편수관이 되어 훈도 이병도와 함께 조국과 조상의 부정과 비하 작업에 일조를 한 그의 고시조 조선주의 운동은 변질을 시작한다. 최초의 논문이라고 하는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 化論(1927))>도 장차 백두산의 정기가 후지산(富士山)으로 옮겨간다는 덜떨어진 아첨은 역시 주구 소질도 천재성임을 입증했을까. 광복후 민족반역자 명단에 올라 구속 수감시 스스로 쓴 참회의 자백서 <자열서(自列書)>는 참회보다는 친일의 변 그것도 문화와 민족과 역사를 학문적으로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그것도 처벌도 받기 전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세력 포용정책’으로 무산되고 그 특별 재판부마저 해산되었으니 가위 이 땅은 친일파의 천국, 그들은 재빨리 시세에 맞추어 반공세력, 친미세력으로 변신하기 마련이었다.27)
다 부서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물은 듯 단단한 속은 알이 알가 하노라
<육당의 <깨어진 벼루의 명>전문>
일찍이 고시조를 집대성한 시조유취를 편찬했고 ≪백팔번뇌(1926)≫라는 현대 시조집을 펴내기도 한 육당, 그의 친일 이력은 화려하였다. 친일족으로 3崔(최 린,?최남선?최재서)가 있었다. 33人의 한 사람인 변절자 최 린보다는 수입이 적었으나 만주제국의 관리를 양성하는 건국대학교수를 지내며 조선사 편수위원회 위원, 중추원 참의, 관동군 군가제정 위원, 조선인불온분자를 흔히 비적이라 비하한 독립군 민족주의자 투항권고문? 청년학생 지원병 권장 연설등으로 전성기엔 갑부 박흥식 같은 이의 수입은 못 미쳐도 다른 문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최상층 관료급 높은 급료로 그 대우는 대단했다 전한다. 그런 속내를 ‘변명의 시’ 로 궁색한 비유를 논한 그의 시조를 들여다보니 가소롭고 ‘지조를 팔아서 돈벌이를 한 사람’치고는 그 해독의 간교함이 매우 파렴치하다. ‘다 부서지는 때’ 라고 전민족을 걸고 넘어지는 것도 야비하고 ‘금이야 갔을 망정’ 을 내세워 ‘벼루 는 벼루로다’ 라고 변명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의 속내가 다 들여다 보여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물은 듯 단단한 속’ 이란 감추어 놓은 지하조직 이중첩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뉘우치기는 커녕 자기의 정당화에 급급한 이 ‘변명의 글’ 은 그 반동성이 너무도 역력하다. 그의 변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938년 일제 말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1920년대 그의 운명은 친일의 길로 급히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일제 말기가 되자 수필체로 쓴 <아세아의 해방><성전의 설문><신의 뜻 그대로의 옛날을 생각함>등 논설을 통해 아시아 대공영을 꿈꾸는 침략전쟁을 미화시키고 있다. 그는 아시아의 중대성을 강조하면서 구미의 식민지 그 악한 질곡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성전의 설문>이란 글에선 성(聖)자의 설문적 관찰을 그 유식한 한자 실력으로 풀이하고 있다. 3개의 요소로 구분되는 耳와 口와 壬(?) 3글자 풀이로써 우로 천성(天 聲)을 듣고 아래로 민의(民意)를 들음을 나타내어, 천성은 곧 정의에 편드는 진리와 양심의 명령으로 현세기의 과제가 되어 있는 아시아의 해방 같은 것이 그의 급선무라 지적했다. 입구(口)자는 진리와 양심의 명하는 바를 실행의 목표로서, 소소(昭昭)히 게출 (揭出)하여 파사현정(破邪顯正), 차악양선(遮惡揚善)의28) 군호를 삼아---소위 대동아 전쟁의 찬양문구를 짜맞추고 있다. 자타가 공인한 그 천재성이 기껏 일본의 침략전쟁 미화라니 신문학의 선각자란 명예를 어디다 얹을 것인가.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1944년 2월 일어판 신시대란 잡지에 발표한 이 글은 그 미화된 성전 속에서 인류의 양심이 피를 흘리고 조선의 죄없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최남선보다 연하인 이광수는 1892년생 그의 문인으로서 문명은 소년(1908)지나 청춘지(1915)에 실험적 단편이나29) 신시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었다. 그는 동경에 유학 조도전대학 영문과에 적을 두고 소위 <무정>이란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을 연재하고 있었다. 진남포와 인천 오가는 연락선 선상에서 담배팔이를 하는 고아(부모가 호열자로 한꺼번에 사망)가 된 아명 보경이 그는 인천에 상륙한 신식 일본문물을 보고 이미 일본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직감했다. 담배팔이로 인생을 허탕칠 것인가. 그는 과감히 밑천 판돈을 모아 구입한 일본어 속기 단기완성 독본으로 일본어를 깨쳐 일진회 유학생에 발탁30) 그 매국집단의 돈으로 일본 명치 중학을 마친다. 한때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오산중 훈도를 지내나 그의 야망은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가에서 그의 출세의 야망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31) 그래서 김성수 재단의 장학금을 얻어 고등교육 유학의 길을 재차 떠난다. 그의 입지전은 소설만큼이나 다기하고 아기자기 하였다. 대학생으로서 신소설가가 되어 자유연애 사상을 주제로 한 계몽소설을 연재, 그의 문명은 대단하였고 석간신문 발매 시간에 맞춘 성급한 독자는 줄을 서서 소설속 비운의 여주인공 ‘영채’의32) 운명에 가슴 조이고 있었다. 그러나 빈곤과 지병인 폐병 악화, 각혈을 하고 실신, 입원했다. 당시 조선인 여의사가 재직했던 우시고메 여의전(女醫專) 부속병원의 여의사 허영숙과의 연애는 그의 운명을 바꾼다.
형식적이나마 민족주의자의 길을 버리고 그 가족들의 반대를 피하여 북경으로 애정도피, 때는 1919년, 조국과 동지의 부름이 그에 2?8선언문을 작성케 했다.33) 우리 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 얼마나 감격적이며 큰 영광인가. 그러나 검거령이 내려 상해로 도피, 거기서 민족의 아버지 안창호를 만나게 되고 친아들보다 극진한 사랑을 받는다. 이 사실을 안 일제는 그 내연의 처 허영숙을 포섭, 이광수 국내 유인책을 썼다. 도산의 권유로 미국행 학문의 길도 있었으나 그는 어째서인지 허영숙을 따라 인천에 상륙후 경시청으로 직행 자진출두 조사받고 서약하고 불기소처분 받 는다.34) 그 다음엔 신혼의 꿈이 깃든 그들의 보금자리로 든다. 이 모든 것은 총독부의 제1호 친일문학가 포섭작전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서서히 친일의 길로 들어선 그는 엉뚱하게 < 해외 유랑청년 선도의 길>35) 같은 아리송한 논고를 쓴다. 그리고 총독부 추천으로 동아일보 객원기자 편집국장에 취임 언론인이자 문학가 이광수의 새로운 변신이 시작된다.
안창호의 감화로 흥사단원이 되었으며 톨스토이를 사숙36) 그 사상의 둘러리로 인도주의라는 도금술을 발휘했고 <재생><개척자><유정><그 여자의 일생><애욕의 피안에서><혁명가의 아내><이차돈의 사><단종애사><원효대사><흙><사랑> 그의 펜대에선 줄줄이 누에의 똥구멍에서 명주실 나오 듯 소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작품은 이런 것들이 아니고 오히려 <지원병 권고 연설>이나 <창씨개명의 변>< 성전축시><친일시>의 걸작을 남긴 것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3?1운동 직후 20 년대에는 은밀하게 위장된 인도주의나 종교소설 연애소설로 ‘조선청년 타락 시키기’ 에 실력을 발휘하다, 대동아전쟁 발발과 저 유명한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시에는 그의 전성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무덤은 어딘가 태평양이 온통 그의 무덤이라고 하리다마는 그는 죽지 않았음에 무덤이 무슨 소용이랴 미아리 공동묘지의 누누한 분묘를 바라보며 내 벗은 외치니라 “묻노라 저 무덤 속에 누운 선배들아 그대들은 무슨 일을 하다가 죽었느냐??고 그때 무덤들은 묵묵하더라 종로 네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아 일생의 노력이 한낱의 죽음을 위한 준비일 때에 그 일생은 바쁜 일생이니라 진주만의 구군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니라
<이광수의 진주만의 구군신 전문>
제2차대전이 유럽에서 독일과 연합군 사이에 마지막 고비를 다투고 있을 때 일본은 유럽 제국과 아시아령 네델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 남) 말레이반도 버마 등 일대를 침략, 고무?주석?석유 등의 강탈을 노렸고, 1940년에는 태평양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 진주만 공격의 공격을 계획했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이었다. 한반도 침략 당시 이미 미.영과 내통도 했고, 상호 불가침도 묵계되어 있어 미.일간 전쟁은 반신반의였지만 그러나 1941년 12월 정식 선전포고도 없이 야마모도이소로구( 山本五五干郞)를 사령관으로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7~8일 양일간 휴일을 즐기고 있 는 무방비 상태의 진주만을 쑥밭을 만들었다. 그 전투에서 90% 전승을 올린 일본은‘ 가미가제(神風) 돌격대’37) 구군신의 죽음을 거국적으로 의도적으로 예찬 추모하여 전 국민의 전의에 새로운 불씨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때 이광수의 선도적 찬양시는 명작이 아니라 웃음거리 허위적 친일시 거짓시 제1작이 아닐 수 없다. 진주만 공격의 전개 상황 자체가 사기극 비슷한 웃음거리로서 침략적 제국주의의 바톤을 미국에 건네주는 전쟁광적 행동이거니와 가미가제 돌격대 폭탄 비행기 비행사의 죽음을 신격화시키는 그들의 전쟁광적 시도는38) 일본 전국민을 마조키스트 국민으로 병신 만드는 웃음거리인 바 거기에 춘원의 졸시가 불쏘시게 노릇을 한 그런 꼴이었다. 선전포고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공, 정박중인 함정 연통 속으로 가미가제 폭탄비행기를 투하하는 그 야만적 발상이라니 인류의 전쟁사상 또 하나의 희화된 광신적 전쟁 범죄의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39) 그런데 식민지 국민의 하질 시인이 일본의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여 터무니 없는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40) 신시대(42.4)에 발표하여 일제에 충성을 보였다. 이것은 일본의 군벌이나 군국주의자들과 다른 그들의 하수인 졸개로서 자신의 민족과 조국엔 엄청난 피해와 매국의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시 내용도 웃질은 아니나 저질이면서도 악의적이어서 축수치고는 가소로운 가식의 충성심이 서푼짜리도 못되는 게 분명하다. 더구나 죄없이 죽은 미아리 공동묘지의 자국민 망령을 불러 질타하며 ‘너희선배들아 무엇하며 죽었느냐’ 꾸짖고 종로 네거리에 오가는 선량한 조선인들을 불러 호통치면서 ‘진주만 구군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사리에도 안 맞고 씨알도 먹혀들어가지 않는 개소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대게 일제의 주구가 되어 친일의 대열에 선 그들의 재능이나 충성심이나 헐값에 팔린 썩은 지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사실이나 이런 가짜들이 주는 혼란을 용인하거나 이런 오점을 그대로 남긴다면 혹자 진주로 착각하고 역사적 악용이 가능하여 청소작업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大詔)를 내리시다 십이월 팔일 해뜰 때 빛나는 소화 육십년
화와이 진주만에 적악(積惡)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지니아 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육 프린스 업 웨일즈 영함대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민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짓밟힌지 2백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宣)하시다.
<이광수의 선전대조 전문 신시대 42.1>
이 시 역시 진주만의 구군신과 같이 태평양전쟁을 명한 천왕의 큰 가르침에 따라 영미 지배하의 아시아 식민지 해방전쟁을 치룬다는 미명하에 그 성은과 성덕을 신년 초의 축수시로 게재하고있다. 내용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반민족적 주구의 개소리 그것이지만 청소하지 않고는 더럽혀진 그 ‘낙서족’들을 용납할 수 없음을 밝힌다. 사실 이런 쓰레기 허접 시 나부랭이보다는 그의 ‘창씨개명의 변’ 같은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평생을 출세지향적 사고로써 빌붙고자 노력한 빈곤한 가정출신 천재의 비극을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제말기 1940년이 되면 일제의 전쟁광적 그 단말마는 극에 달하였다. 그의 야망을 태평양으로 확대하면서 새로운 전쟁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 금지와 창씨개명, 물자동원, 징병징용,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을 궁리를 하였다. 이에 이광수는 적극 동조 선착으로 40년?2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창씨개명의 변인 <創 氏와 나>라는 글을 게재하였다.41) 「내가 香山이라는 씨(氏)를 창설함에 대하여 혹은 면대하여서 서간으로 내 창씨의 동기를 묻는 이가 있다. 대다수는 나의 香山이라는 창씨에 대하여서 비난하지마는 또 그 중에는 찬성하는 이도 있고 창씨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이도 있었다. 오늘 내가 받은 익명인의 편지에는 나의 창씨를 강하게 비난하고 그 동기와 이유를 발표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반드시 이 서간만을 응함만이 아니나 이 때를 당하여 나의 태도에 대하여 일언 할 필요가 있음을 통감한다. 創氏의 동기! 내가 香山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光郞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天皇御名)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天皇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李光洙라는 씨명으로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香山光郞 이 좀더 天皇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內鮮一?!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를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이 아닌가. <創氏와 나의 일부>」 더 이상 들으나마나한 변이지만 평북출신으로서 묘향산(妙香山)에서 향산을 따온 것 이 아니라, 2천 6백년전 天皇의 遠祖 神武天皇께서 즉위한 곳에 있는 산이 香久山이어 서 황송하옵게도 거기서 香山을42) 따고 자기의 본명 光洙에서 光자를 따고 일본식 명인 낭(郞)자를 따서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자기 족보 자기 이름을 버림은 조상과 조국 근본을 버리는 것, 세상의 어느 망나니도 할 짓이 아닌 이 구차한 짓을 하면서 그 못난 주둥이로 더러운 말 늘어놓는 그 꼬락서니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저 변절자란 무엇인가. 대개 이런 쓰레기들인 것이다. 이른바 가짜 사기꾼 계열의 인간 낙오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 쓰레기들이 역사를 오도하고 민족의 운명을 그르치는 오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43) 시로, 논설로, 소설로, 온갖 재주를 다 동원하여 그 씨명과 혈통까지 바꾸고자 광분 하였던 그 반역자도 어이없는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해방 앞에서 쇠운을 맞고 더 이상의 변신을 꾀하지 못한 채 낙백의 시대를 맞는다. <꿈>과44) 같은 조신설화로 연애소설을 농하던 그는 6.25를 맞아 북으로 끌려간 뒤 그 하찮은 잔명을 마감한다.
4. 논고를 마치며 1910년 한일합방에서 1919년 3.1운동 10년간 무단정치 치하 최남선과 이광수로 대표 되는 2인문단시대는 일종의 전초전이자 실험무대였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망국의 치하에서 계몽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한일합방의 합리화와 그의 정착을 위한 내선일체 기반 다지기 그것을 묵과할 수는 없다. 식민통치 무단정치에 대한 항일운동의 새로운 출발과 다짐을 모토로 한 조선인의 독립의지와 인권투쟁과 함께 양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과정에 일어난 항일투쟁의 실천적 운동이 표면화 된 것이 기미년 독립운동이었다.45) 그러나 완전 성공까지는 한계가 있었던, 어떤 의미에선 그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운동이 3.1운동이었다. 우리 민족의 결의와 독립 의지를 만방에 고하고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린 것만도 그 성공이었다.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의 전환, 언론이나 출판에 대한 자유를 얻어낸 것도 성과로 들 수 있다. 1920년대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성과였다. 허지만, 이 성과 는 표면적인 현상일 뿐 총독부의 음모는 이 문화라는 아편을 칼 대신 활용함으로써 병든 문화 병든 문학으로써 새로운 식민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문화정 책의46) 올가미에 걸려든 대표적 문학가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뿌린 씨가 1930년대 말기가 되면 수많은 곁가지들이 자라나 제2 제3의 최와 이가 친일의 충성을 합창하기 시작하였다. 김소운, 주요한, 김기진, 모윤숙, 노천명, 서정주, 이 땅의 문단사에 그 이름도 빛나는 유명한 문사가 줄줄이 성전 축수의 대열에 섰으며 그 실력을 다투었다.47) 졸개들에 의한 친일문학 전성기를 예고하는 이 시점에서 일단락을 짓고 다음날을 기약한다. 거명된 문인들 교과서에서 대접받고 과거사 아무도 시비하지 않은 채 요직 요로에 서 그의 문명(文命) 드날리고 친미와 숭미 반공주의자로서 거칠 것 없는 삶을 영위하였다.
과거사 청산, 요란하였지만 매국노 친일파 재산 부동산 찾기도 중단시키지 못한 상태다. 뿐만아니라, 친일문학 비판자에 대하여 벌떼 같이 일어난 친일문학 옹호자들 48)이 어처구니 없는 반동의 역사 속에서 필발이 부끄러운 후학의 언설은 여기서 끝맺는다. 중단이건 미완이건 간에 정과 사를 가려야 하는 역사적 진실 규명작업은 중단할 수 없는 양심인의 사명임을 재천명하며 미완의 논고를 마친다.
<註> 1)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종국(林鍾國)에 의하여 친일문학론(1978. 평화출판사간)으로 방대한 자료에 의한 친일작가들의 반동적 매국적 친일문학의 전모를 밝힌 바 있다. 2) 일제치하 반민족적 친일문학에 충성을 다한 반동적 작가들이, 반민 특위의 해체와 함께 이승만정부의 친일파 옹호정책에 힘입어 모두 친미주의로 둔갑 반공주의자로 행세했다. 3) 임진왜란 때부터 꿈꾸었던 征韓論은 명치개혁정부의 국론에 의하여 외교와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한반도를 지목, 이등박문 시대에 그 정책이 본격화 되었다. 4) 친일분자, 이인직, 이광수 등은 일본숭상정신에서 일청전쟁, 일한합방 등 일을 한자 앞에 놓았다. 5) 1894년은 민중봉기였던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민족의 내적 모순인 계급모순, 부정부패, 제폭구 민, 척양척왜를 내세운 혁명이 일어난 시기이나, 그것을 악용 일제가 침략의 발판을 삼았다. 6)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배후세력 영미의 비호를 받으며 가쓰라(桂太郞)와 테프트(미국국방상)에 의한 비밀조약으로 한반도 일본 침략을 도왔다. 7) 개화니 개혁이니 하는 말들은 주권이 박약한 나라의 경우, 그를 돕는다는 명분의 강대국에 의해 합법적 침략을 하는 식민지정책의 미사여구 헛된 구호이다. 8)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명치유신 이후 군국주의적 천민자본주의에 의해 내부 모순이 크게 발생하자, 그것의 해소책으로 한반도 침략을 획책했다. 9) 참요(satinical poem)란 어떤 정치적인 징후를 동음이의어나 은유 ? 파자 등을 이용하여 그 성패 나 앞날을 예측케 하는 노래(민요?동요 등). 조선족 건국의 참요인 목자요(木字謠) 같은 것. 10) 혁명의지가 박약한 종족이나 봉건왕조가 길었던 후진국 등은 변화나 혁명을 두려워하는 반동성이 있다. 우리 나라는 비교적 왕조가 길어 혁명에 의해 바뀌는 경우가 드물었다. 11) <가보세>노래는 전봉준이 전주성 함락 후 곧 서울로 향하지 않고 중앙정부의 시간벌기 회유책인 집강소 설치 같은 흥정에 끌려 청군이나 일본군을 끌어들일 시간을 주어 작전상 실패했다는 참요다. 12) 우금치 전투의 참혹상을 서사시로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의 《금강》이라는 서사시가 있다. 신동엽 시인의 기념비가 금강가에 서있다. 13) 보부상은 등짐 매고 다니는 행상 봇짐장수를 말하는데, 최하층 상민이면서, 농민군 대장을 현상금 때문에 밀고한다는 것은 그들의 반동성이나 반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4) 서정시의 갈래중 Elegy는 비가 애도가 만가로 번역되며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나 고귀한 신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칭한다. 여기서는 죽음을 앞둔 비가의 뜻이다. 15) 포루투칼어 tabacco에서 일본어 다바꼬(タバコ)에 バ 탁음이 없는 관계로 우리 나라에선 口음이 첨가 담바고가 되었다가 모음 축약으로 담배가 되었다. 16) 買辦資本은 외국자본과 결탁하여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중간에서 이윤을 착취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질이 좋지 않은 중간상인의 농간이 낀 자본으로 민족자본의 반대이다. 17) 頭韻을 어두에 동일한 음이 오도록 맞추는 압운법인데 그 외에 허리에 맞추면 요운(腰韻) 끝에 맞추면 각운(脚韻) 또는 末韻이라한다. 여기서는 동음보다 비슷한 음이다. 18) 매국노나 매국세력은 입으로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외치지만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는다.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와 같다. 19) 조지로는 비어로 좃으로>좆으로 음이나 한자로 쓰면 朝支露로 써서 조선지나 러시아가 합심하여 쪼바리 왜놈을 끝장내자는 욕소리이다. 20) 一進會는 구한말 친일단체로, 민씨 일파의 박해로 일본에 망명해있던 매국노 송병준(宋秉畯 일본 창씨명 野田平久郞)등이 주축이 되어 철저하게 일본 이익을 위한 합방의 전위부대들이었다. 21) 동학의 구호. 除暴救民, 斥洋斥倭, 汚吏懲治는 100년 동안 이 땅의 민족운동 중심 과제로 현재 진행중이며 이 땅에서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다. 22) 황현은 구한 말 일제 한반도 침략과 조정 농락의 비화를 집대성 梅泉野錄을 저술했고 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비분하여 지식인의 책임감을 탄식하며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했다. 23) 한일합방 후 언론인 문인들 신문학 신학문을 하던 많은 신지식계급이 총독부 산하로 들어앉고 문단에는 20대 전후의 최남선과 이광수가 중심이 된 계몽문학을 이끌었다. 24)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나 몬로 대통령의 몬로주의는 모두 America의 Monroe Doct -rin으로 상호 불간섭을 원칙으로 한 고립주의로서 그것과 유사한 입장이 민족자결주의이다. 25) 3?1운동의 연구가들은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계 인사인 점 등 평화적 건의 정도의 성명서 낭독이었으나 학생과 민중으로 확산되며 대대적인 봉기저항운동이 되었다. 일본은 이것을 조선 폭동이라했다. 26) 일제의 조선사 특히 고조선을 부정하는 일 등 많은 것을 왜곡했는데 최남선은 그 왜곡 조선사 원고에 서명하고 협력함으로써 그의 조선주의 운동을 무색케 했다. 27) 일제치하 악질 매국노 등 많은 친일파가 구명책으로 친미파가 됨은 물론이요, 반공주의자로 변신 보수진영의 일익을 담당 이 나라의 우익정치를 도왔다. 28) 기미독립선언서 국한문 혼용체를 연상시키는 그 한문투 문장은 일제찬양에도 써먹었음을 잘 보여준다. 29) <소년의 비애><어린 벗에게><방황><윤광호><어린 희생> 등 비교적 성장기 자서전적 사소설 형태의 실험적 단편이 실렸다. 그의 본격적인 단편은 <무명>이나 <가실이>다. 30) 그의 출세를 기약한 일본유학의 자금이 매국노 일진회 송병준의 돈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돈의 위력 마력은 인간의 양심을 팔고 살 수 있다. 31) 일본유학하고 귀국 후 이승훈의 천거로 오산 중 훈도를 했다. 인기 절정의 그가 홀연 시베리아 여행을 떠났다. 바이칼 호수에서 엽서를 보냈다 한다. 훗날 그곳이 유정의 배경이 되었다. 32) 무정의 여주인공 구여성의 전형, 신여성 선영이보다 훨씬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광수의 소설적 능력 부족이라고 김동인이 춘원연구에서 비판했다. 33) 우메고시 여전 부속병원에 입원중 알게 된 백의의 천사 허영숙(그는 치료비를 대납했다) 목숨을 건 연서로 구애하여 가정의 만류도 이기고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 그의 본처 백혜순과 이혼했다. 34) 이 일로 배신감을 느낀 안창호는 그 후 이광수와 절연. 사망시 불러 울고 나온 후 석왕사에 은거 돌베개로 참회. 그러나 바로 친일 행각으로 급전환. 그 관계가 지금도 수수께끼다. 35) <해외 유랑 청년 선도의 길>은 경시청의 용서를 받은 후 총독부에 보은키 위해 망명 운운하며 독립운동한다고 떠도는 해외 조선 청년을 총독부가 포섭 은전을 베풀라는 괴이한 글 36) 흔히 사람들은 이광수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를 연결짓는데, 이는 터무니 없으며 일백상통한 점이 전무하다. 다만 그가 위장술이나 도금술로 친일행위 호도책으로 썼다. 37) 역사상 몽고는 육전엔 강하나 해전엔 약했다. 섬나라인 일본을 침공한 몽고 함대 큰 역풍(태풍)을 만나 실패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神風이라 했고 돌격대 명칭으로 삼았다. 38) 가미가제 찬양시는 이광수를 필두로 주요한, 모윤숙, 서정주 등이 걸작(?)을 남겼으며 주요한 전국을 돌며 젊은이들 앞에서 낭독하고 한국인 가미가제 이인석을 찬양했다. 39) 가미가제보다 더 악질적인 행위는 여성근로 정신대로서 그들을 위안부로 변신시켜 병사들 이동과 함께 싣고 다니는 야만적 행위를 했다. 천인공노할 국가적 강간범들이다. 40) 이광수의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香山光郞과 매국노 송병준의 일본식 이름 野田平久郞이 두사람의 이름을 비교한다면 어느것이 더 忠犬형일까? 41) 우리 나라에서 누가 제일 먼저 창씨개명을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송병준보다 이광수가 제1착이었다 한다. 누구 말마따나 친일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42) 씨족사회인 우리는 父系의 姓으로 그 족보가 정해지나 일본은 각자 글자 그대로 姓을 짓는다(창씨한다) 밭가운데서 낳은 놈(田中) 산위에서 낳은 놈(山上) 등등... 43) 변절자는 세상이 변할 때마다 시세에 따라 변한다. 친러파 이완용은 을사년엔 친일파가 되었고 英米 머리털이 노란 원숭이들을 무찔렀다 찬양시를 쓴 친일시인 S씨는 해방 후 친미파가 되었다. 44) 이광수의 불교적 설화(조신설화)로 만든 꿈은 광복 후 쓴 소설이다. 調信은 신라의 세달사 승려로, 김 흔(절의 장사)의 딸에 매혹되어, 꿈속에서 속세의 사랑을 얻었으나 갖은 고초를 겪고 유혹에서 벗어나 법사가 되었다 함 45) 1910~1919년대 이광수나 최남선의 계몽주의는 민족주의라기보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신문학 신문화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조선인을 위함인가? 일본인을 위한 계몽인가? 46) 제국주의의 문화정책이란 문화를 아편이나 욕구불만 해소책으로 사용하는 아편이나 술 엿 같은 타락에 있다. 4S정책, Sex Song Screen Sport가 그것이다. 47) 임종국저 친일문학론에 소개된 친일작품만도 450편이 넘으며 그 일에 종사한 친일작가도 그 편수에 근접한 몇 백 명이다. 해방 후 문필을 계속한 사람도 수 백 명이다. 48) K씨가 서정주의 친일문학을 비판하자 많은 항의 논평이 나왔고 오히려 서정주 찬양의 글이 쏟아져 나왔다. 또 그 문학관에 친일시만이 아니라, 전장군 생일 축하 시가 게재됐는데도 그 묘소에 국화분이 노오란 꽃밭을 이루었다
1. 글머리를 열며 광복 61주년을 맞으면서 일제 잔재 청산의 하나인 친일행위 지식인들의 훼절과 매국적 반역죄를 밝히는 일, 참으로 너무 늦었지만 더 늦기전에 이제라도 라는 청소작업의 일환으로서 친일문인들의 이른바 2차 대전 동남아 일대의 침략적 범죄행위를 성전이라 미화한 그들의 반인륜적 전쟁의 승리를 축수하고 가장 비인도적인 가미가제 특공대의 폭탄 자살 공격을 찬미한 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기존의 평자들에 의하여 총괄적인 전모를1) 밝힌 수십권의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었기에 희귀자료나 새로운 사안은 있을 수 없으나 광복 후 그들이 어떤 자세로 반성 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시침 떼고 반공문학 애국문학의 선두에 서서 세인의 눈을 가리고 양두구육식 명사 내지 지도자 행세를 했는가2) 살펴 보는 것은 새로운 흥미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선조 25년 1592년 임진년 대륙진출의 길을 내놓으라며 침략을 감행,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을 시발로 1876년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진출, 병자수호조규를 맺고 제물포 부산진 원산 3항을 개항 일본 상선이 히노마루를 나부끼며 아메다마를 싣고 온 것은 개화니 개항이니 근대화란 미명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침략의 발톱을 감춘 정한론의 시작이었다.3) 울며 겨자 먹기란 말처럼 눈물 흘리면서 먹어도 맛은 있었다. 그러나 번연히 그 속셈 다 드러내 놓은 침략의 마수인데 웃으며 반기고 통채로 이 강산 모조리 내놓았으니 이런 놈의 일한친선이 미구에 일한합방4) 망국 전야에 문 열어놓고 서방 맞아들인 억지 춘향이, 그 정조를 유린 국가적 강간사건 국치요 망국이었다. 한편에선 경계와 항일, 한편에선 우호와 환영의 친일, 결국 항일세력보다 친일세력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이 땅에는 태극기 대신 히노마루가 하늘을 덮었다. 부끄러운 과거사를 덮어 둘 것이냐, 청소하여 씻어내고 속죄하여 새 출발을 다짐할 것이냐, 망설임과 결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나 고름을 아끼지 않아야 새 살이 차는 교훈을 새기며 이 부끄러운 펜발을 따라가고자 한다.
2. 침략의 전초전 개화바람 1894년5) 이 땅에는 두 개의 바람이 불었다. 하나는 서학에 맞선 동학바람, 또 하나 는 1876년 강화도에 불어온 개항의 왜바람. 그들이 들어와 양성한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 삼일천하 실패한 쿠데타와 김옥균의 죽음, 그로부터 10년 후 동학농민봉기 진압작 전에 불법으로 끼어 든 왜군은 청국과 부딪쳐 청일전쟁을 이기고 한반도 주도권을 잡은 후 친일정권 김홍집 내각에 의한 일본식 공문서 근대화 갑오경장에 의한 개화바람이 불었다.6) 전주 고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농민군 그 지도자였던 전봉준 녹두장군 제폭구민(除 暴救民) ? 척양척왜(斥洋斥倭) ? 오리징치(汚吏懲治) 3대구호를 내걸고 자력에 의한 근대화의 불길이 타올랐으나 봉건탐학의 수구당 왕조는 그 말기의 쇠운을 유지하기 위해 청군과 왜군을 끌어들여 의로운 민중봉기를 역도로 몰아 섬멸하고 마침내 그들의 야욕에 의해 망국이라는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개화, 개혁,7) 언제 들어도 아리송하고 위험한 말이다. 서구식 자본주의로 명치유신을 감행 군벌국가가 된 일본제국주의는 내부 모순을 외부에서 해소시키는 시장확보와 원자재 탈취,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 착취. 룸펜 플로레타리아의 식민지 지배계급 만들기 등 가장 악질적인 천민자본주의에 의한 개화의 군홧발을 이 땅에 들여 놓았다.8) 삼천리 강산에 닛본도 찬 일본의 무뢰배나 깡패가 늘어나고 그들의 게다짝 소리가 딸각 거릴 때 뜻있는 자의 눈에는 수상한 왜바람이 불기 시작했었다. 그 당년 녹두장군의 처형을 슬퍼하는 파랑새 노래는 분명 혁명 실패의 엘레지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만수 무연 풍년새야 너 무엇하러 나왔느냐 하철인가 나왔더니 온갖 풀이 날 속인다 연잎 댓닢 푸릇푸릇키로 삼사월인 줄 알아 나왔더니 백설은 펄펄 휘날리고 동지 섣달 분명하다
<파랑새 노래 전문>
동학혁명에 대한 앞날을 예측하고 그 실패를 비탄한 참요적(讖謠的) 노래이다.9) 파랑새 (동학도) 새(백성들) 녹두밭(동학당) 녹두꽃(전봉준 녹두장군) 청포장수 (민중세력, 혁명세력)등 은유를 사용한 것은 당시 동학도가 역모죄로 몰렸기 때문에 취한 표현법이다. 이 가사의 특징은 동학혁명이 시기상조라는 적극적이지 못한 민중의 체관(諦觀)과 기회주의적 속성이 드러나 있다.「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야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전했네」놀미(論山) 갱갱이(江景)이 민요도 전봉준의 실패를 탄식한 민요로서 반동성까지 엿보인다.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의 봉건적 반동성으로 동학도가 혁명에 실패하여 역도가 되자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식의 반동적 민요가 등장한 것이 다.10)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디다 두고/ 전주(全州)야 숲에서 유시했노」이 민요 역시 녹두장군의 으뜸수장 김개남(金開南)의 패전을 슬퍼하기보다 반야유조가 섞인 반동성이 엿보인다.「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이 <가보세> 노래는 거사를 일으킨 해를 간지로 은유하여 그것을 밀어붙이지 못한 작전의 실패로 탄식하고 있다.11) 가보세 1894년 갑오년(甲午年) 일종의 중의법으로 1894년에 결판내야 한다는 뜻이다. 을미적 1895년 을미년(乙未年 )이 되면 실패할 것을 암시 하여 을미적거린다고 중의법적으로 표현했다. 병신되면 병신년(丙申年) 1896년에는 농 민군이 토벌되어 실패한다는 중의법적 표현이다. 갑오년(1894)에 결판내야지 미적거리다 1895년을 지나 병신년(1896년)까지 간다면 실패한다는 선조를 아뢰는 참요적 성격의 민요이다.
예언자의 그것처럼 동학혁명의 실패를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민요야 말로 기회주의적 속성의 친일세력 동조자들의 입김이 작용한 반동성을 내포하고 있음도 감지된다 하겠다. 아무튼 비공식 통계이지만 20만~30만의 농민군이 고부 전주 일대와 우금치 최후의 전투에서 관군 청군 일본군의 합동적 토벌작전에 의해 전해오는 말로는 금강을 보름 동안 핏빛으로 물들였다 한다.12) 당시 전북 순창 피로리에 일시 은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계획했던 녹두장군은 일제가 내건 현상금이 탐이난 보부상 (褓負商)에 의한 밀고로13) 그가 애민(愛民)했던 민초에 의한 반동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가
일제의 토벌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그들의 약식 재판을 받고 효수(梟首) 된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남긴 비분한 유시(遺詩)는 역사상 수양대군의 왕권찬탈 음모 때 그것을 반대하다 처형당한 성삼문의 시와 궤를 같이 한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 금야숙수 가(今夜宿誰家)리오?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의 목숨 제촉하는데/ 머리를 돌리니 서산 에 해는 비끼었구나/ 황천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 어디서 자고 갈꼬?) 처형장에 서 느긋한 낭만성까지 보이는 이 비장미는 역사상 포은(圃隱)의 <단심가(丹心歌>를 필두로 수많은 변절족의 표상적 노래 이방원의 <하여가(何 如歌)>에 맞선 이 땅의 절 의가(節義歌)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 단심가의 절정에 사육신 성삼문의 고시조「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와 함께 칠언절구 유시는 천추에 남긴 민중의 한을 대변한 <엘레지(挽歌)>였다.14)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았지만 시운 다 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함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 줄것인가.
<운명시 전문>
이 땅에서 봉건 탐학의 정치를 개혁하고 우리 국민의 힘으로 민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동학운동은 파랑새 노래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은 더욱 더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담바고 타령>으로15) 은유화 되던 일제의 침략은 상선에서 군함으로 바뀌며 1894년 이후 그들의 세력은 궁궐로 파고들어 이 땅의 왕좌를 허수아비 자리로 전락시키기 시작했다.
담바고야 담바고야 동래 울산 담바고야 너의 나라 어데 두고 우리 나라 찾아왔나 우리 나라 좋지만 대한제국 살기 좋아 찾아왔소
<울산지방에 유행했던 담보고 타령>
‘타바코 tabacco(포르투칼어)’가 일본에 건너와‘ 다바꼬 タバコ’가 되고 음운의 차이로 우리 나라에선‘담바고’로 口음이 첨가되었고 그 다음 단계 음운 축약이 일어 나 현재 ‘담배’가 된 외래어이다. 담배로 대유법을 써서 장차 그 자본(매판자본)이16) 한반도를 식민지로 병탄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칭 항일민요로 불리우는 민요들은 중의법이나 대유법을 써서 그 뜻을 풍자적으로 숨기고 있었지만 지배계급의 친일적 변절과는 달리 민중은 장차 다가올 일제의 침략과 병탄 야욕을 투시하고 있었다. 몇 개의 민요를 인용하여 그 당대의 실상을 살펴 본다.
① 소련에 속지 말고 소련→속지 미국 믿지 마라 미국→믿지 일본 일어나니 일본→일어나니 조선 사람 조심해라 조선→조심하라
제목은 일종의 시대를 풍자한 조심가 쯤 일종의 두운에 의한 압운(assonance)을17) 밟아가며 국제정세를 피력하고 조선을 경계하였다. 이 국제적 한반도 구도는 100년을 유지해온 터, 식민지 남북분단 시대 최근의 6자회담까지 이어지고 있고 1905년 가쓰 라테프트밀약과 그 다음에 전개된 을사오조약(1905년 11월) 체결 등, 단계적으로 수순을 밟아가며 이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 세력의 음모가 이 4행의 항일민요 속에 여지 없이 축약되어 있다.
② 발 아파 못 신던 미투리 신 고무신 바람에 도망을 간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짚신 장사 김첨지 밥 굶는다
삼대째 내려오던 놋그릇 대롱 양권련 바람에 도망을 간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양권련 연기에 집 떠나간다.
김 잘 매고 베 잘짜는 맏며느리는 양갈보 바람에 도망을 간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정강치마 수통다리 꼴보기 싫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매판자본이 침략해 와서 민족자본이 거덜나고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미투리신, 놋그릇대롱, 베짜는 길쌈은 당시 우리 나라의 전근대적 민족자본을 상징하고 고무신, 양권련, 양갈보(정강치마 수통다리)는 매판자본 일본의 침략을 의미한다. 현재도 외래자본이 이 땅의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악순환은 신식민주의 100년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민중은 아는데 지배계급은 왜 몰랐을까. 모르는게 아니라 상호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민중은 국권 수호 세력이고 당시 지배계급은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운 매국세력이었다.18)
③ 조지로(朝支露) 왜목(倭목)친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쪽바리 등살에 못 살겠네 함경도 원산이 살기는 좋아도 왜놈 등살에 못 살겠네.
<조지로 왜목 친다> 전문
조지로는 남근을 암시하는 중의법인 바 조선과 지나와 러시아를 한자로 썼고 그것을 다시 우리 말 남근의 비속어‘좆’으로 표기하여 남의 나라 침략하는 일제에 대한 반감을 표현했다.19) 1876년 강화도 병자수호조규 이래 인천(제물포) 부산진 원산 3항을 개항하여 그들의 상선 상인(쪽바리)이 들어와 못 살겠다 탄식 하고 있다. 이미 이 땅의 상권이 차츰 일제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역력히 말해주는 민요이다. 당시 이 땅에는 일제의 앞잡이들이 만든 매판자본에 의한 경제단체인 매국노 집단인 일진회(송병준)20) 같은 것이 만들어져 제국주의 침략의 주구가 된 친일 세력이 있었다.
④ 개혁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을 이름이냐 내 수중에 있는 권리 남의 장중(掌中) 넣어 주고 내 국민의 소유권을 남의 인문(咽門) 넣어 주면 이걸 위지(謂之) 개혁이냐 소소백일(昭昭白日) 강림하에 괴기지설(怪奇之說) 너무 마라
<개혁의 속내를 풍자한 괴기지설가>
친일 세력 당시 지배계층에 의하여 협약으로 나라가 넘어가는 괴이한 개혁놀이를 풍자하고 있다. 동학혁명의 3대구호21) 제폭구민 척양척왜 오리정치는 10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정치구호로서 그 이면엔 내 수중의 권리를 남에게 팔아넘기는 매국이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당대 유행한 <新아리랑>도 그 가사 구구절절이 개혁세력= 매국세력임을 풍자한 노래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경제 현실이다.
⑤ 문전의 옥토는 어찌 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인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밭은 헐어서 신작로 나고 집은 헐어서 정거장 되네 (후렴) -------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후렴) ------- 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깨나 매는 놈 부역을 간다 (후렴) -------
상전벽해의 변화 항구, 신작로, 철도 그 눈부신 개혁바람은 개화바람이라는 매국의 왜바람 차츰 나라는 왜놈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1910년 그들의 말마따나 일한합방의 비극은 다가오고 있었다. 1906년 일청전쟁을 배경으로 쓴 신소설 <血의 淚>가 친일파 이인직(李人稙)에 의해 쓰여졌고, 그는 이완용을 도와 한일합방의 공신으로 남작의 작위를 얻었으며, 천재 육당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를 간행 망국의 전야에 <海에게서 소년 에게>라는 괴이한 제목으로「철---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는 신나는 조흥구로 문을 열라고 바다의 입을 빌려 외치었다. <The Ocean> 이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시를 의방한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1908년이면 나라가 망하기 2년전 이미 열린 문 안으로 도적 떼가 무리져 들어와 통감부 치하 궁궐까지 일본의 세력이 점령하고 있는 판국인데, 개화의 물결 새 시대의 물결이 한반도의 잠을 깨우니 어서 문을 열라고 열을 올린 시가 바로 우리 나라 신시의 제1작이었다. 근대화의 촉구 권두시 일까? 망국촉진 친일시 제1작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근대화의 신문학 신시대의 물결이 이 땅을 식민지의 나라로 잠식해 가고 있었다.
3. 한일합방과 한국의 신문학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 거사의 날 하얼빈 역두의 의로운 육혈포 총소리, 한 의인의 총알 심판이 동양의 원수 이토히로부미의 그 음흉한 흉중에 세 방의 총알 세례를 퍼부었을 때 초상집으로 변한 통감부는 그 잘못을 깨우치고 반성하기 보다는 안중근 의사를 깡패(壯漠)으로 비하, 그 저격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당초의 합방개혁을 앞당겨 일찌감치 수순을 밟아 계획보다 빨리 한일합방이라는 범죄적 남의 나라 강도질을 감행했다. 그래도 나라 망했다고 열사들의 자결이 잇따랐고 전남광양 출신 황현의 <절명시>는22) 산하를 우르러 통곡했다. 그러나 그 오열도 잠시 친일 세력들은 총독부의 관저에 의자 하나씩 꿰차고 주구노릇을 시작했다. 현해탄의 연락선은 더욱 바빠지고 친일 지식인 친일 문학인들은 보호색 잘 갖추면서 요로 요로에 숨어 그 매국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2人문단 시대 뭇 신문학가를 대표하여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새시대 주역으로서 계몽문학의 선두에서 이 땅의 신문학을 이끌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은 해외 유학생 <2.8선언문>과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초안한 신문장가들이었 다.23) 1차대전 종료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다. 일견 약소국가의 인권이나 독립을 부추기며 제국들의 식민지 침략정책을 비판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속내는 자국의 인디안 토벌로 18개주에서 50개주를 만들기까지 200여회 전쟁을 벌이고도 그들은 해외 식민지가 없었다. 몬로 대통령은 몬로 독드린을 선포 아메리카 기본 전략인 몬로주의가 선포되기도 했다.24) 해외 식민지가 욕심은 나고 먹으러 갈 틈은 없고 그래서 너희만 먹지 말고 내 먹을 것도 남겨달라는 복잡한 화법이 숨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윌슨의 말을 배경삼아 2?8선언과 기미독립선언을 온건한 입장에서 전개했다. 그러나 온건한 종교계 지도자와는 달리 민중의 투쟁은 가열차 7천명이 구속 되거나 사상을 입은 이른바 커다란 조선폭동으로 번졌다.25) 초안자 최남선은 33인 서명을 거부 말썽이 있었으나 자구 수정을 거쳐 채택되었고 그 난해한 국한문 혼용체 선언문은 방방곡곡에서 낭독되었다. 33인 전원검거, 초안자도 물론 검거되었다. 당당한 항변으로 일관 조선독립 이유를 밝히면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의 부당성을 역설한 만해(萬海) 한용운은 3년형이었으나 눈물 질질 짜며 참회한 최남선은 진짜 서약 그대로 훈방된 후 차츰 친일의 길로 기울기 시작했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만해가 길거리에서 육당을 보고 인사해도 육당은 이미 죽었다고 아는 체 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오히려 쓴웃음을 자아낸다. 총독부의 왜곡 조선사 편찬 편수관이 되어 훈도 이병도와 함께 조국과 조상의 부정과 비하 작업에 일조를 한 그의 고시조 조선주의 운동은 변질을 시작한다. 최초의 논문이라고 하는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 化論(1927))>도 장차 백두산의 정기가 후지산(富士山)으로 옮겨간다는 덜떨어진 아첨은 역시 주구 소질도 천재성임을 입증했을까. 광복후 민족반역자 명단에 올라 구속 수감시 스스로 쓴 참회의 자백서 <자열서(自列書)>는 참회보다는 친일의 변 그것도 문화와 민족과 역사를 학문적으로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그것도 처벌도 받기 전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세력 포용정책’으로 무산되고 그 특별 재판부마저 해산되었으니 가위 이 땅은 친일파의 천국, 그들은 재빨리 시세에 맞추어 반공세력, 친미세력으로 변신하기 마련이었다.27)
다 부서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물은 듯 단단한 속은 알이 알가 하노라
<육당의 <깨어진 벼루의 명>전문>
일찍이 고시조를 집대성한 시조유취를 편찬했고 ≪백팔번뇌(1926)≫라는 현대 시조집을 펴내기도 한 육당, 그의 친일 이력은 화려하였다. 친일족으로 3崔(최 린,?최남선?최재서)가 있었다. 33人의 한 사람인 변절자 최 린보다는 수입이 적었으나 만주제국의 관리를 양성하는 건국대학교수를 지내며 조선사 편수위원회 위원, 중추원 참의, 관동군 군가제정 위원, 조선인불온분자를 흔히 비적이라 비하한 독립군 민족주의자 투항권고문? 청년학생 지원병 권장 연설등으로 전성기엔 갑부 박흥식 같은 이의 수입은 못 미쳐도 다른 문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최상층 관료급 높은 급료로 그 대우는 대단했다 전한다. 그런 속내를 ‘변명의 시’ 로 궁색한 비유를 논한 그의 시조를 들여다보니 가소롭고 ‘지조를 팔아서 돈벌이를 한 사람’치고는 그 해독의 간교함이 매우 파렴치하다. ‘다 부서지는 때’ 라고 전민족을 걸고 넘어지는 것도 야비하고 ‘금이야 갔을 망정’ 을 내세워 ‘벼루 는 벼루로다’ 라고 변명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의 속내가 다 들여다 보여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물은 듯 단단한 속’ 이란 감추어 놓은 지하조직 이중첩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뉘우치기는 커녕 자기의 정당화에 급급한 이 ‘변명의 글’ 은 그 반동성이 너무도 역력하다. 그의 변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938년 일제 말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1920년대 그의 운명은 친일의 길로 급히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일제 말기가 되자 수필체로 쓴 <아세아의 해방><성전의 설문><신의 뜻 그대로의 옛날을 생각함>등 논설을 통해 아시아 대공영을 꿈꾸는 침략전쟁을 미화시키고 있다. 그는 아시아의 중대성을 강조하면서 구미의 식민지 그 악한 질곡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성전의 설문>이란 글에선 성(聖)자의 설문적 관찰을 그 유식한 한자 실력으로 풀이하고 있다. 3개의 요소로 구분되는 耳와 口와 壬(?) 3글자 풀이로써 우로 천성(天 聲)을 듣고 아래로 민의(民意)를 들음을 나타내어, 천성은 곧 정의에 편드는 진리와 양심의 명령으로 현세기의 과제가 되어 있는 아시아의 해방 같은 것이 그의 급선무라 지적했다. 입구(口)자는 진리와 양심의 명하는 바를 실행의 목표로서, 소소(昭昭)히 게출 (揭出)하여 파사현정(破邪顯正), 차악양선(遮惡揚善)의28) 군호를 삼아---소위 대동아 전쟁의 찬양문구를 짜맞추고 있다. 자타가 공인한 그 천재성이 기껏 일본의 침략전쟁 미화라니 신문학의 선각자란 명예를 어디다 얹을 것인가.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1944년 2월 일어판 신시대란 잡지에 발표한 이 글은 그 미화된 성전 속에서 인류의 양심이 피를 흘리고 조선의 죄없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최남선보다 연하인 이광수는 1892년생 그의 문인으로서 문명은 소년(1908)지나 청춘지(1915)에 실험적 단편이나29) 신시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었다. 그는 동경에 유학 조도전대학 영문과에 적을 두고 소위 <무정>이란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을 연재하고 있었다. 진남포와 인천 오가는 연락선 선상에서 담배팔이를 하는 고아(부모가 호열자로 한꺼번에 사망)가 된 아명 보경이 그는 인천에 상륙한 신식 일본문물을 보고 이미 일본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직감했다. 담배팔이로 인생을 허탕칠 것인가. 그는 과감히 밑천 판돈을 모아 구입한 일본어 속기 단기완성 독본으로 일본어를 깨쳐 일진회 유학생에 발탁30) 그 매국집단의 돈으로 일본 명치 중학을 마친다. 한때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오산중 훈도를 지내나 그의 야망은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가에서 그의 출세의 야망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31) 그래서 김성수 재단의 장학금을 얻어 고등교육 유학의 길을 재차 떠난다. 그의 입지전은 소설만큼이나 다기하고 아기자기 하였다. 대학생으로서 신소설가가 되어 자유연애 사상을 주제로 한 계몽소설을 연재, 그의 문명은 대단하였고 석간신문 발매 시간에 맞춘 성급한 독자는 줄을 서서 소설속 비운의 여주인공 ‘영채’의32) 운명에 가슴 조이고 있었다. 그러나 빈곤과 지병인 폐병 악화, 각혈을 하고 실신, 입원했다. 당시 조선인 여의사가 재직했던 우시고메 여의전(女醫專) 부속병원의 여의사 허영숙과의 연애는 그의 운명을 바꾼다.
형식적이나마 민족주의자의 길을 버리고 그 가족들의 반대를 피하여 북경으로 애정도피, 때는 1919년, 조국과 동지의 부름이 그에 2?8선언문을 작성케 했다.33) 우리 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 얼마나 감격적이며 큰 영광인가. 그러나 검거령이 내려 상해로 도피, 거기서 민족의 아버지 안창호를 만나게 되고 친아들보다 극진한 사랑을 받는다. 이 사실을 안 일제는 그 내연의 처 허영숙을 포섭, 이광수 국내 유인책을 썼다. 도산의 권유로 미국행 학문의 길도 있었으나 그는 어째서인지 허영숙을 따라 인천에 상륙후 경시청으로 직행 자진출두 조사받고 서약하고 불기소처분 받 는다.34) 그 다음엔 신혼의 꿈이 깃든 그들의 보금자리로 든다. 이 모든 것은 총독부의 제1호 친일문학가 포섭작전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서서히 친일의 길로 들어선 그는 엉뚱하게 < 해외 유랑청년 선도의 길>35) 같은 아리송한 논고를 쓴다. 그리고 총독부 추천으로 동아일보 객원기자 편집국장에 취임 언론인이자 문학가 이광수의 새로운 변신이 시작된다.
안창호의 감화로 흥사단원이 되었으며 톨스토이를 사숙36) 그 사상의 둘러리로 인도주의라는 도금술을 발휘했고 <재생><개척자><유정><그 여자의 일생><애욕의 피안에서><혁명가의 아내><이차돈의 사><단종애사><원효대사><흙><사랑> 그의 펜대에선 줄줄이 누에의 똥구멍에서 명주실 나오 듯 소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작품은 이런 것들이 아니고 오히려 <지원병 권고 연설>이나 <창씨개명의 변>< 성전축시><친일시>의 걸작을 남긴 것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3?1운동 직후 20 년대에는 은밀하게 위장된 인도주의나 종교소설 연애소설로 ‘조선청년 타락 시키기’ 에 실력을 발휘하다, 대동아전쟁 발발과 저 유명한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시에는 그의 전성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무덤은 어딘가 태평양이 온통 그의 무덤이라고 하리다마는 그는 죽지 않았음에 무덤이 무슨 소용이랴 미아리 공동묘지의 누누한 분묘를 바라보며 내 벗은 외치니라 “묻노라 저 무덤 속에 누운 선배들아 그대들은 무슨 일을 하다가 죽었느냐??고 그때 무덤들은 묵묵하더라 종로 네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아 일생의 노력이 한낱의 죽음을 위한 준비일 때에 그 일생은 바쁜 일생이니라 진주만의 구군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니라
<이광수의 진주만의 구군신 전문>
제2차대전이 유럽에서 독일과 연합군 사이에 마지막 고비를 다투고 있을 때 일본은 유럽 제국과 아시아령 네델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 남) 말레이반도 버마 등 일대를 침략, 고무?주석?석유 등의 강탈을 노렸고, 1940년에는 태평양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 진주만 공격의 공격을 계획했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이었다. 한반도 침략 당시 이미 미.영과 내통도 했고, 상호 불가침도 묵계되어 있어 미.일간 전쟁은 반신반의였지만 그러나 1941년 12월 정식 선전포고도 없이 야마모도이소로구( 山本五五干郞)를 사령관으로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7~8일 양일간 휴일을 즐기고 있 는 무방비 상태의 진주만을 쑥밭을 만들었다. 그 전투에서 90% 전승을 올린 일본은‘ 가미가제(神風) 돌격대’37) 구군신의 죽음을 거국적으로 의도적으로 예찬 추모하여 전 국민의 전의에 새로운 불씨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때 이광수의 선도적 찬양시는 명작이 아니라 웃음거리 허위적 친일시 거짓시 제1작이 아닐 수 없다. 진주만 공격의 전개 상황 자체가 사기극 비슷한 웃음거리로서 침략적 제국주의의 바톤을 미국에 건네주는 전쟁광적 행동이거니와 가미가제 돌격대 폭탄 비행기 비행사의 죽음을 신격화시키는 그들의 전쟁광적 시도는38) 일본 전국민을 마조키스트 국민으로 병신 만드는 웃음거리인 바 거기에 춘원의 졸시가 불쏘시게 노릇을 한 그런 꼴이었다. 선전포고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공, 정박중인 함정 연통 속으로 가미가제 폭탄비행기를 투하하는 그 야만적 발상이라니 인류의 전쟁사상 또 하나의 희화된 광신적 전쟁 범죄의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39) 그런데 식민지 국민의 하질 시인이 일본의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여 터무니 없는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40) 신시대(42.4)에 발표하여 일제에 충성을 보였다. 이것은 일본의 군벌이나 군국주의자들과 다른 그들의 하수인 졸개로서 자신의 민족과 조국엔 엄청난 피해와 매국의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시 내용도 웃질은 아니나 저질이면서도 악의적이어서 축수치고는 가소로운 가식의 충성심이 서푼짜리도 못되는 게 분명하다. 더구나 죄없이 죽은 미아리 공동묘지의 자국민 망령을 불러 질타하며 ‘너희선배들아 무엇하며 죽었느냐’ 꾸짖고 종로 네거리에 오가는 선량한 조선인들을 불러 호통치면서 ‘진주만 구군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사리에도 안 맞고 씨알도 먹혀들어가지 않는 개소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대게 일제의 주구가 되어 친일의 대열에 선 그들의 재능이나 충성심이나 헐값에 팔린 썩은 지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사실이나 이런 가짜들이 주는 혼란을 용인하거나 이런 오점을 그대로 남긴다면 혹자 진주로 착각하고 역사적 악용이 가능하여 청소작업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大詔)를 내리시다 십이월 팔일 해뜰 때 빛나는 소화 육십년
화와이 진주만에 적악(積惡)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지니아 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육 프린스 업 웨일즈 영함대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민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짓밟힌지 2백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宣)하시다.
<이광수의 선전대조 전문 신시대 42.1>
이 시 역시 진주만의 구군신과 같이 태평양전쟁을 명한 천왕의 큰 가르침에 따라 영미 지배하의 아시아 식민지 해방전쟁을 치룬다는 미명하에 그 성은과 성덕을 신년 초의 축수시로 게재하고있다. 내용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반민족적 주구의 개소리 그것이지만 청소하지 않고는 더럽혀진 그 ‘낙서족’들을 용납할 수 없음을 밝힌다. 사실 이런 쓰레기 허접 시 나부랭이보다는 그의 ‘창씨개명의 변’ 같은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평생을 출세지향적 사고로써 빌붙고자 노력한 빈곤한 가정출신 천재의 비극을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제말기 1940년이 되면 일제의 전쟁광적 그 단말마는 극에 달하였다. 그의 야망을 태평양으로 확대하면서 새로운 전쟁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 금지와 창씨개명, 물자동원, 징병징용,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을 궁리를 하였다. 이에 이광수는 적극 동조 선착으로 40년?2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창씨개명의 변인 <創 氏와 나>라는 글을 게재하였다.41) 「내가 香山이라는 씨(氏)를 창설함에 대하여 혹은 면대하여서 서간으로 내 창씨의 동기를 묻는 이가 있다. 대다수는 나의 香山이라는 창씨에 대하여서 비난하지마는 또 그 중에는 찬성하는 이도 있고 창씨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이도 있었다. 오늘 내가 받은 익명인의 편지에는 나의 창씨를 강하게 비난하고 그 동기와 이유를 발표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반드시 이 서간만을 응함만이 아니나 이 때를 당하여 나의 태도에 대하여 일언 할 필요가 있음을 통감한다. 創氏의 동기! 내가 香山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光郞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天皇御名)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天皇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李光洙라는 씨명으로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香山光郞 이 좀더 天皇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內鮮一?!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를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이 아닌가. <創氏와 나의 일부>」 더 이상 들으나마나한 변이지만 평북출신으로서 묘향산(妙香山)에서 향산을 따온 것 이 아니라, 2천 6백년전 天皇의 遠祖 神武天皇께서 즉위한 곳에 있는 산이 香久山이어 서 황송하옵게도 거기서 香山을42) 따고 자기의 본명 光洙에서 光자를 따고 일본식 명인 낭(郞)자를 따서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자기 족보 자기 이름을 버림은 조상과 조국 근본을 버리는 것, 세상의 어느 망나니도 할 짓이 아닌 이 구차한 짓을 하면서 그 못난 주둥이로 더러운 말 늘어놓는 그 꼬락서니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저 변절자란 무엇인가. 대개 이런 쓰레기들인 것이다. 이른바 가짜 사기꾼 계열의 인간 낙오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 쓰레기들이 역사를 오도하고 민족의 운명을 그르치는 오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43) 시로, 논설로, 소설로, 온갖 재주를 다 동원하여 그 씨명과 혈통까지 바꾸고자 광분 하였던 그 반역자도 어이없는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해방 앞에서 쇠운을 맞고 더 이상의 변신을 꾀하지 못한 채 낙백의 시대를 맞는다. <꿈>과44) 같은 조신설화로 연애소설을 농하던 그는 6.25를 맞아 북으로 끌려간 뒤 그 하찮은 잔명을 마감한다.
4. 논고를 마치며 1910년 한일합방에서 1919년 3.1운동 10년간 무단정치 치하 최남선과 이광수로 대표 되는 2인문단시대는 일종의 전초전이자 실험무대였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망국의 치하에서 계몽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한일합방의 합리화와 그의 정착을 위한 내선일체 기반 다지기 그것을 묵과할 수는 없다. 식민통치 무단정치에 대한 항일운동의 새로운 출발과 다짐을 모토로 한 조선인의 독립의지와 인권투쟁과 함께 양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과정에 일어난 항일투쟁의 실천적 운동이 표면화 된 것이 기미년 독립운동이었다.45) 그러나 완전 성공까지는 한계가 있었던, 어떤 의미에선 그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운동이 3.1운동이었다. 우리 민족의 결의와 독립 의지를 만방에 고하고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린 것만도 그 성공이었다.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의 전환, 언론이나 출판에 대한 자유를 얻어낸 것도 성과로 들 수 있다. 1920년대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성과였다. 허지만, 이 성과 는 표면적인 현상일 뿐 총독부의 음모는 이 문화라는 아편을 칼 대신 활용함으로써 병든 문화 병든 문학으로써 새로운 식민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문화정 책의46) 올가미에 걸려든 대표적 문학가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뿌린 씨가 1930년대 말기가 되면 수많은 곁가지들이 자라나 제2 제3의 최와 이가 친일의 충성을 합창하기 시작하였다. 김소운, 주요한, 김기진, 모윤숙, 노천명, 서정주, 이 땅의 문단사에 그 이름도 빛나는 유명한 문사가 줄줄이 성전 축수의 대열에 섰으며 그 실력을 다투었다.47) 졸개들에 의한 친일문학 전성기를 예고하는 이 시점에서 일단락을 짓고 다음날을 기약한다. 거명된 문인들 교과서에서 대접받고 과거사 아무도 시비하지 않은 채 요직 요로에 서 그의 문명(文命) 드날리고 친미와 숭미 반공주의자로서 거칠 것 없는 삶을 영위하였다.
과거사 청산, 요란하였지만 매국노 친일파 재산 부동산 찾기도 중단시키지 못한 상태다. 뿐만아니라, 친일문학 비판자에 대하여 벌떼 같이 일어난 친일문학 옹호자들 48)이 어처구니 없는 반동의 역사 속에서 필발이 부끄러운 후학의 언설은 여기서 끝맺는다. 중단이건 미완이건 간에 정과 사를 가려야 하는 역사적 진실 규명작업은 중단할 수 없는 양심인의 사명임을 재천명하며 미완의 논고를 마친다.
<註> 1)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종국(林鍾國)에 의하여 친일문학론(1978. 평화출판사간)으로 방대한 자료에 의한 친일작가들의 반동적 매국적 친일문학의 전모를 밝힌 바 있다. 2) 일제치하 반민족적 친일문학에 충성을 다한 반동적 작가들이, 반민 특위의 해체와 함께 이승만정부의 친일파 옹호정책에 힘입어 모두 친미주의로 둔갑 반공주의자로 행세했다. 3) 임진왜란 때부터 꿈꾸었던 征韓論은 명치개혁정부의 국론에 의하여 외교와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한반도를 지목, 이등박문 시대에 그 정책이 본격화 되었다. 4) 친일분자, 이인직, 이광수 등은 일본숭상정신에서 일청전쟁, 일한합방 등 일을 한자 앞에 놓았다. 5) 1894년은 민중봉기였던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민족의 내적 모순인 계급모순, 부정부패, 제폭구 민, 척양척왜를 내세운 혁명이 일어난 시기이나, 그것을 악용 일제가 침략의 발판을 삼았다. 6)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배후세력 영미의 비호를 받으며 가쓰라(桂太郞)와 테프트(미국국방상)에 의한 비밀조약으로 한반도 일본 침략을 도왔다. 7) 개화니 개혁이니 하는 말들은 주권이 박약한 나라의 경우, 그를 돕는다는 명분의 강대국에 의해 합법적 침략을 하는 식민지정책의 미사여구 헛된 구호이다. 8)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명치유신 이후 군국주의적 천민자본주의에 의해 내부 모순이 크게 발생하자, 그것의 해소책으로 한반도 침략을 획책했다. 9) 참요(satinical poem)란 어떤 정치적인 징후를 동음이의어나 은유 ? 파자 등을 이용하여 그 성패 나 앞날을 예측케 하는 노래(민요?동요 등). 조선족 건국의 참요인 목자요(木字謠) 같은 것. 10) 혁명의지가 박약한 종족이나 봉건왕조가 길었던 후진국 등은 변화나 혁명을 두려워하는 반동성이 있다. 우리 나라는 비교적 왕조가 길어 혁명에 의해 바뀌는 경우가 드물었다. 11) <가보세>노래는 전봉준이 전주성 함락 후 곧 서울로 향하지 않고 중앙정부의 시간벌기 회유책인 집강소 설치 같은 흥정에 끌려 청군이나 일본군을 끌어들일 시간을 주어 작전상 실패했다는 참요다. 12) 우금치 전투의 참혹상을 서사시로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의 《금강》이라는 서사시가 있다. 신동엽 시인의 기념비가 금강가에 서있다. 13) 보부상은 등짐 매고 다니는 행상 봇짐장수를 말하는데, 최하층 상민이면서, 농민군 대장을 현상금 때문에 밀고한다는 것은 그들의 반동성이나 반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4) 서정시의 갈래중 Elegy는 비가 애도가 만가로 번역되며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나 고귀한 신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칭한다. 여기서는 죽음을 앞둔 비가의 뜻이다. 15) 포루투칼어 tabacco에서 일본어 다바꼬(タバコ)에 バ 탁음이 없는 관계로 우리 나라에선 口음이 첨가 담바고가 되었다가 모음 축약으로 담배가 되었다. 16) 買辦資本은 외국자본과 결탁하여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중간에서 이윤을 착취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질이 좋지 않은 중간상인의 농간이 낀 자본으로 민족자본의 반대이다. 17) 頭韻을 어두에 동일한 음이 오도록 맞추는 압운법인데 그 외에 허리에 맞추면 요운(腰韻) 끝에 맞추면 각운(脚韻) 또는 末韻이라한다. 여기서는 동음보다 비슷한 음이다. 18) 매국노나 매국세력은 입으로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외치지만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는다.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와 같다. 19) 조지로는 비어로 좃으로>좆으로 음이나 한자로 쓰면 朝支露로 써서 조선지나 러시아가 합심하여 쪼바리 왜놈을 끝장내자는 욕소리이다. 20) 一進會는 구한말 친일단체로, 민씨 일파의 박해로 일본에 망명해있던 매국노 송병준(宋秉畯 일본 창씨명 野田平久郞)등이 주축이 되어 철저하게 일본 이익을 위한 합방의 전위부대들이었다. 21) 동학의 구호. 除暴救民, 斥洋斥倭, 汚吏懲治는 100년 동안 이 땅의 민족운동 중심 과제로 현재 진행중이며 이 땅에서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다. 22) 황현은 구한 말 일제 한반도 침략과 조정 농락의 비화를 집대성 梅泉野錄을 저술했고 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비분하여 지식인의 책임감을 탄식하며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했다. 23) 한일합방 후 언론인 문인들 신문학 신학문을 하던 많은 신지식계급이 총독부 산하로 들어앉고 문단에는 20대 전후의 최남선과 이광수가 중심이 된 계몽문학을 이끌었다. 24)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나 몬로 대통령의 몬로주의는 모두 America의 Monroe Doct -rin으로 상호 불간섭을 원칙으로 한 고립주의로서 그것과 유사한 입장이 민족자결주의이다. 25) 3?1운동의 연구가들은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계 인사인 점 등 평화적 건의 정도의 성명서 낭독이었으나 학생과 민중으로 확산되며 대대적인 봉기저항운동이 되었다. 일본은 이것을 조선 폭동이라했다. 26) 일제의 조선사 특히 고조선을 부정하는 일 등 많은 것을 왜곡했는데 최남선은 그 왜곡 조선사 원고에 서명하고 협력함으로써 그의 조선주의 운동을 무색케 했다. 27) 일제치하 악질 매국노 등 많은 친일파가 구명책으로 친미파가 됨은 물론이요, 반공주의자로 변신 보수진영의 일익을 담당 이 나라의 우익정치를 도왔다. 28) 기미독립선언서 국한문 혼용체를 연상시키는 그 한문투 문장은 일제찬양에도 써먹었음을 잘 보여준다. 29) <소년의 비애><어린 벗에게><방황><윤광호><어린 희생> 등 비교적 성장기 자서전적 사소설 형태의 실험적 단편이 실렸다. 그의 본격적인 단편은 <무명>이나 <가실이>다. 30) 그의 출세를 기약한 일본유학의 자금이 매국노 일진회 송병준의 돈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돈의 위력 마력은 인간의 양심을 팔고 살 수 있다. 31) 일본유학하고 귀국 후 이승훈의 천거로 오산 중 훈도를 했다. 인기 절정의 그가 홀연 시베리아 여행을 떠났다. 바이칼 호수에서 엽서를 보냈다 한다. 훗날 그곳이 유정의 배경이 되었다. 32) 무정의 여주인공 구여성의 전형, 신여성 선영이보다 훨씬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광수의 소설적 능력 부족이라고 김동인이 춘원연구에서 비판했다. 33) 우메고시 여전 부속병원에 입원중 알게 된 백의의 천사 허영숙(그는 치료비를 대납했다) 목숨을 건 연서로 구애하여 가정의 만류도 이기고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 그의 본처 백혜순과 이혼했다. 34) 이 일로 배신감을 느낀 안창호는 그 후 이광수와 절연. 사망시 불러 울고 나온 후 석왕사에 은거 돌베개로 참회. 그러나 바로 친일 행각으로 급전환. 그 관계가 지금도 수수께끼다. 35) <해외 유랑 청년 선도의 길>은 경시청의 용서를 받은 후 총독부에 보은키 위해 망명 운운하며 독립운동한다고 떠도는 해외 조선 청년을 총독부가 포섭 은전을 베풀라는 괴이한 글 36) 흔히 사람들은 이광수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를 연결짓는데, 이는 터무니 없으며 일백상통한 점이 전무하다. 다만 그가 위장술이나 도금술로 친일행위 호도책으로 썼다. 37) 역사상 몽고는 육전엔 강하나 해전엔 약했다. 섬나라인 일본을 침공한 몽고 함대 큰 역풍(태풍)을 만나 실패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神風이라 했고 돌격대 명칭으로 삼았다. 38) 가미가제 찬양시는 이광수를 필두로 주요한, 모윤숙, 서정주 등이 걸작(?)을 남겼으며 주요한 전국을 돌며 젊은이들 앞에서 낭독하고 한국인 가미가제 이인석을 찬양했다. 39) 가미가제보다 더 악질적인 행위는 여성근로 정신대로서 그들을 위안부로 변신시켜 병사들 이동과 함께 싣고 다니는 야만적 행위를 했다. 천인공노할 국가적 강간범들이다. 40) 이광수의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香山光郞과 매국노 송병준의 일본식 이름 野田平久郞이 두사람의 이름을 비교한다면 어느것이 더 忠犬형일까? 41) 우리 나라에서 누가 제일 먼저 창씨개명을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송병준보다 이광수가 제1착이었다 한다. 누구 말마따나 친일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42) 씨족사회인 우리는 父系의 姓으로 그 족보가 정해지나 일본은 각자 글자 그대로 姓을 짓는다(창씨한다) 밭가운데서 낳은 놈(田中) 산위에서 낳은 놈(山上) 등등... 43) 변절자는 세상이 변할 때마다 시세에 따라 변한다. 친러파 이완용은 을사년엔 친일파가 되었고 英米 머리털이 노란 원숭이들을 무찔렀다 찬양시를 쓴 친일시인 S씨는 해방 후 친미파가 되었다. 44) 이광수의 불교적 설화(조신설화)로 만든 꿈은 광복 후 쓴 소설이다. 調信은 신라의 세달사 승려로, 김 흔(절의 장사)의 딸에 매혹되어, 꿈속에서 속세의 사랑을 얻었으나 갖은 고초를 겪고 유혹에서 벗어나 법사가 되었다 함 45) 1910~1919년대 이광수나 최남선의 계몽주의는 민족주의라기보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신문학 신문화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조선인을 위함인가? 일본인을 위한 계몽인가? 46) 제국주의의 문화정책이란 문화를 아편이나 욕구불만 해소책으로 사용하는 아편이나 술 엿 같은 타락에 있다. 4S정책, Sex Song Screen Sport가 그것이다. 47) 임종국저 친일문학론에 소개된 친일작품만도 450편이 넘으며 그 일에 종사한 친일작가도 그 편수에 근접한 몇 백 명이다. 해방 후 문필을 계속한 사람도 수 백 명이다. 48) K씨가 서정주의 친일문학을 비판하자 많은 항의 논평이 나왔고 오히려 서정주 찬양의 글이 쏟아져 나왔다. 또 그 문학관에 친일시만이 아니라, 전장군 생일 축하 시가 게재됐는데도 그 묘소에 국화분이 노오란 꽃밭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