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2일 (목) 촬영.
수원역 AK백화점 앞 버스정류장입니다. 이 곳에서 720-2번 버스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상현사거리를 가려구요. 상현사거리 인근에는 조광조 선생의 가족 묘역과 심곡서원이 있습니다.
조광조선생의 가족묘 앞에서 내려 길을 건너 묘역으로 왔습니다. 묘역의 전경입니다.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소학동자"로 널리 알려진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움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종장(우두머리) 김종직의
학통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치가로서는 사림파를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하면서 관직에 발을 들였습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폭군 연산군에 의해
무너진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사림파를 이끌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자치주의와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향촌을 유교 이념으로 교화하기 위해
"상호부조"를 내세운 "여씨향약"(향약 : 향촌 공동체 규약)을 팔도에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폄과 동시에 신진사류(사림파)를 이끌면서 훈구대신의 부패를 질타하고,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위훈삭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강한 반발과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훈구파에 의하여 전라도 능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선조 연간에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고 영의정에 추증하였습니다.
시호는 "문정"이며 문집으로 "정암집"을 남겼습니다. -현지 안내문-
임금님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섬겨 사랑하듯 하였노라.
백성걱정 돌보기를 식구걱정 돌보듯 하였노라.
밝은 태양 대지를 환히 밝혀주니 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비쳐지네. (클릭해서 크게 보세요)
조광조의 신도비입니다.
신도비 전면에는 "문정공 조선"이란 글자까지만 새기고 나머지 "생신도비명"글자는 뒷면에 새겼습니다.
신도비 전액 글자는 "문정공 조선생 신도비명"입니다.
신도비의 규모는 총높이 약 311cm, 비신의 높이 244cm, 폭 93cm, 두께 34cm입니다.
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이전액을 썼습니다. 1585년(선조18)에 건립했습니다
신도비의 받침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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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의 좌측으로 올라 갔습니다. 좌측으로 올라 가며 처음 만난 묘는,
조광조의 조모 의령 남씨(조부 충손의 후처)의 묘입니다.
의령 남씨의 묘 건너편에는 남편의 묘가 첫번째 부인의 묘와 함께 있고 위쪽에는 조광조의 묘가 있습니다.
의령 남씨의 묘 후경입니다.
묘역 앞은 아파트 건물들이 병풍처럼 들어섰네요.
묘역의 제일 위에 있는 조광조 선생의 묘입니다.
조광조 선생의 묘 후경.
조광조 선생의 묘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이씨(李氏)와의 합장묘이며, 원형의 봉분입니다.
봉분 중앙에 묘표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상석 좌우로 문인석, 망주석이 한 쌍씩 배치돼 있습니다.
비좌와 월두형의 비신으로 된 묘표(墓表)는 봉분 중앙에 세워져 있으며
장방형 비좌의 4면에는 국화문 및 안상과 상부에 복련문이 수려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백색 대리석으로 된 비신 앞면에 종5열로 묘주인 조광조의 주요 관직과 부인인 정경부인 이씨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묘소 입구에 있는 신도비와 같은 양식입니다. -출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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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선생의 묘의 망주석과 문인석 뒤로 조모(조부 충손의 후처) 의령 남씨의 묘가 보이네요.
문인석.
조광조 선생의 묘 바로 아래에 있는 증조부 조육과 증조모 구성 이씨의 합장 묘입니다.
묘표가 봉분에 묻힌 증조부 조육과 증조모 구성 이씨의 합장묘.
조광조 선생의 조부 조충손과 조모 온양 정씨의 쌍분입니다.
위로 조광조 선생의 묘가 보이는군요.
조광조의 부 조원강과 모 여흥 민씨의 합장묘입니다.
형 조영조와 형수 동래 정씨의 합장묘.
아들 조용과 며느리 경주 이씨의 합장묘.
묘역 답사를 마치고 바로 위에 있는 심곡서원도 갔었습니다.
심곡서원 가는 길.
심곡서원의 원경입니다.
심곡서원의 주차장은 동네 사람들의 주차장이 된 것 같네요.
사람들은 없는데 주차장에 차는 가득 합니다.
심곡서원 오른쪽의 연못입니다.
바깥쪽에서 본 동재이고요.
외삼문입니다.
심곡서원 / 사적 제530호. 지정일 2015년.
심곡서원은 조선 중기 조선 중종 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였으며, 효종은 "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여 심곡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사당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심곡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사당)가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강당 안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담긴 서원의 규약 등이 걸려 있다.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심곡서원은 최초 사당을 중심으로 제향기능을 강조하며 지어졌으며,
이후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편에 재사를 두는 전당후재의 모습을 보였고, 심곡서원도가 그려진 시기에
앞서서 전재후당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음을 옛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현지 설명문-
강당입니다.
강당 내부에 걸린 편액들입니다.
강당문을 통해 본 외삼문입니다.
동무(거인재)와
서무(유의재)
서무에서 본 강당과 동무.
강당 뒤에 있는 사당으로 들어 가는 문인 내삼문
강당과 사당 사이에 있는 서고 장서각입니다.
장서각의 현판.
사당.
사당으로 들어 가는 내삼문에 걸린 심곡서원 현판입니다.
사액이란 글자가 새겨 있습니다.
강당과 동재.
사당.
사우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당의 뒷모습.
새로 지은 치사제란 건물입니다.
내려 가며 다시 본 사우.
동재와 강당.
동재와 강당.
동재와 강당.
동재.
동재
심곡서원을 나가기 전 다시 살펴본 강당입니다. 기둥이 민흘림 기둥입니다.
민흘림 기둥은 아래쪽이 넓고 위쪽으로 가면서 가늘어지는 기둥을 말합니다.
이 현판은 외삼문에 걸린 현판입니다. 외삼문과 내삼문에 걸린 현판이 같은 글씨체일까요?
내삼문(왼편)과 외삼문(오른편)에 걸린 심곡서원 현판.
2013년 3월 19일 촬영.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에 있는 애우당입니다.
기묘사화시 조광조 선생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자리에 세운 적려유허추모비가 있는 곳 입니다.
애우당과 초당 그리고 영정각과 비각 등이 있습니다.
조광조 선생은 중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문신이였으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에 의해 제거됩니다.
1519년 11월 15일 시작된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한 모함이었습니다.
조광조는 다음날 죽이려고 했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적극적인 만류로 능주로 귀양을 오기는 했지만
결국은 한달여 만인 12월 10일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정암 선생의 유허추모비입니다.
조광조 선생에겐 특별한 제자 두 분이 있었습니다. 조광조 선생과는 6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18살에 조광조를 찾아와 제자가 된 양팽손 선생과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 선생 입니다.
양팽손 선생은 이곳 능주 출신입니다.
조광조 선생의 구명을 위하여 상소를 하다 파직되여 고향으로 돌아와 조 선생의 벗이 되어 죽음을 지켰으며
1년 후 시신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분입니다.
양산보 선생도 조광조 선생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로 나가기 직전이었으나
조광조 선생이 유배지로 갈때 마차를 따라 유배지까지 함께와서 사약을 받고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약관 17세 때의 이 일로 양산보 선생은 정계에 나서기도 전에 은퇴하고 소쇄원을 만들었답니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 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절명시-
12월 20일 금부도사가 왔습니다. 선생은 절명시를 남기고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3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약을 마셨습니다. 38세였습니다.
1544년(인종원년) 사면복권. 1610년(광해2년) 문묘배향
적려란 귀양지,유배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양팽손 선생은 심곡서원에 배향되여 있습니다
오늘도 늦은 점심은 지동시장에 있는 정육식당에서 먹었습니다.특수부위(살치 등)와 등심 그리고 서비스로
준 차돌박이로...
요건 등심.
맛 있겠죠.
4명이서 7만원어치 정도 먹었어요. 그래도 너무 많아서 차돌박이는 남겨 왔네요. 싸죠? 진짜 한우예요
근에 54.000원입니다. 담에는 안심이나 토시살로 ㅎㅎㅎ
차돌박이는 고기도 아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