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말도 안되는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기록적인 폭우였다.
밤 9시 반 경에 퇴근해 늦은 식사를 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내용은 이랬다.
"기욱후배님 죄송한 맘으로 문자드립니다
남편이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마치고 지난주 7월31일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부고를 알리지 말고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를것을 당부하여
남편 유지를 따라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간의 많은 소중한 인연과 추억들이 있기에 마지막 가는길 함께 하면 좋았겠지만 부디 저희 가족의 마음 이해해 주시고
뒤늦었지만 하늘나라 주님품에서 평안 누리길 함께 기도해주세요
그동안 남편의 회복과 쾌유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신 은혜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에 큰 바윗덩어리가 '쿵'하고 떨어졌다.
한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번갯불에 맞은 듯했다.
어찌 이런 일이.
내가 형님을 찾아뵌 날이 7월 15일이었는데, 그리고 7말8초에 휴가 때문에 산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형님께서는 자신의 깔끔하고 선비 같은 성격대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하나님 품으로 가셨단다.
믿어지지 않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황망함과 인생무상이 내 가슴팍을 파고 들었다.
그렇게 20여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을 정리한 뒤에 형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이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말씀을 안 하셨어도 충분히 그 애절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형님의 유지를 따라 직계가족들만 모여서 조용히 장례를 치르셨다고 했다.
형님 떠나신지 일주 하고도 하루가 지났다.
차근 차근 뒷정리를 하고 계신다 했다.
2-3일내로 아내와 함께 찾아뵙겠다고 했다.
형수님은 아니라고 했다.
마음의 정리가 되면 그때 보자고 했다.
네 부부 여덟 명이서 특히 설악산에 자주 갔었다.
내가 가이드를 맡았다.
세 분의 형님들은 모두 고교 4년 선배들이셨다.
적어도 그 분들껜 형님의 소천을 알려야 한다고 형수님께 말씀드렸고, 형수님도 용인하셨다.
늦은 밤, 엄청난 빗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형님들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말씀드렸다.
형님들은 서로 동창이셨기에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친구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지는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극구 함구하고 계셨고, 일체의 소통을 끊고 계셨기에 사태가 이렇게까지 허망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걸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절친한 친구와의 영원한 별리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였고 충격일 것이었다.
시간이 간다.
인생의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
막을 수 없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식사 한번 더 하자'고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표현하며 살자.
소유와 축성에 천착하지 말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벽을 허무는데 더 노력하자.
광속 같이 흐르는 세월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기에 우리에게 시간이 허락되었을 때 더 의미있고 예쁘게 살자.
그것 뿐이다.
정말로 그렇다.
인생, 그거 별것 아니다.
첫댓글 떠난 분과 친했던 형님들 몇 분.
함께 공원묘역에 가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팔월 중순이나 하순 경에,
형님께 막걸리 한 잔 올리기로 했다.
형님은 특히 설악의 '공룡능선'을 좋아하셨다.
청년기 때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도 했었고, 학업을 마친 뒤에도 10년 이상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었다.
현재 오스트리아엔 당신 명의로 된 집도 한 채 있다.
지금은 임대로 서양인 누군가가 살고 있지만.
그래서 형님은 알프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공룡'을 처음으로 탐방했을 때 형님은 수도 없이 감탄했고 탄성을 쏟아내셨다.
"한국에도 이런 자연이 있었니?"
그 첫 만남 이후로도 '공룡'에 다시 가곤 했었다.
은퇴 후엔 오스트리아로 가서, 당신의 집을 '베이스 캠프' 삼아 광활한 알프스를 샅샅이 탐방하기로 했었다.
이제는 그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길.....
대학생들에게 강의도 잘 하셨고 매사에 어진 남편이자 아빠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