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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마 5:13-20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13-20 / [소금과 빛; 막 9:50, 눅 14:34-35] 너희는 세상을 맛있게 만드는 소금이다. 그런데 만일 너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너희는 아무데도 쓸모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즉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밤에 불을 밝혀 둔 언덕 위의 마을과 같다. 15) 등잔에 불을 밝히고 됫박으로 그 등잔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면 누구나 그 등불을 등잔대 위에 얹어 놓지 않느냐? 16)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17) [율법의 완성]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쓴 책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라 하여 이를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13-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당시 세상은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볼 때 부패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부정과 부패에 물들지 않고 의와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소금보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소금이 한 나라와 민족 안에서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빛은 온 세상 곳곳의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행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20)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눅 4:43). 또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요 10:10).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완전하게라는 말은 ‘플레로오’를 번역한 것으로 ‘충만하다’, ‘가득 채우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으로 살아가며 사랑의 율법이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선별하여 취하거나 버리면 자칫 천국에서 작은 위치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을 훨씬 크게 강조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계 22:19).
적용: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더 맛나게, 더 빛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 큰 조직을 만들거나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크게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제자와 다니시면서 그들을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열두 제자처럼 소금과 빛으로 사는 삶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라 말하지 않고 서로 녹아 버리고 누가 먼저라 말하지 않고 자신을 태워 버리는 삶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소리 소문 없이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 설 교 >
너의 빛을 비추어라
마 5:13-16
주님께서 성도의 본분과 역할을 말씀하시면서 “저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은 참된 성도가 세상에 미칠 선한 영향력(good impact)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란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던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로 불림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이 성도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신분이 바뀐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요, 특별 임무가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 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의 짠맛과 빛의 밝음”이라고 하는 특성을 통하여 교훈하시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본문의 설명
주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빛이다. 이는 산위에 세워진 동네와 같아서 어느 곳에서든지 다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불을 켜서는 등장을 마루 밑에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어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것과 같다. 이처럼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여라.”
성도란 “세상에 선하고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라”고 불림받은 자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성도를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규정하고 그에 합당한 역할을 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2.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1) 빛의 역할: 빛을 생각할 때, 그 빛은 밝음(빛), 열, 힘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빛이란, 어두움을 없애는 밝음의 역할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빛이란 단어 속에는 먼저 부정적으로 “세상은 암흑하다”는 전제를 하고 하는 말입니다. 혹자는 이 세상이 밝고 전혀 추함이 없는 깨끗한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썩어가는 세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캄캄한 세상에서 빛을 비추면 그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 필요한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성도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2) 너희가! : 그런 차원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너희만!”이 곧 세상의 빛이요, 소망이요 구원을 제시할 수 있는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즉 흑암의 세상에 오직 믿는 성도만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성도인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우리만이 세상의 밝음을 제시할 수 있는 소망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을 환기시키시는 말씀인 줄 압니다. 즉 세상이 믿을 수 있는 최종의 집단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3) 반사체로서의 역할: 그러나 이 말씀은 성도인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행동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는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는 신비한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즉 성도의 신분이 어떻게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 땅에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과 관련이 된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그 관계가 설정된 것일까요?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마치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은 받아 반사하여 아름다운 밤하늘을 창출하듯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성도가 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이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이 아들이시며 그 속에는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을 받아드린 자는 참된 하나님의 빛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된 빛을 받아 그 빛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오 구원이심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도가 이러한 성도의 신분에 걸맞게 하나님의 덕을 이 땅에 펼칠 수가 있을까요?
3. 신비한 연합을 통하여
이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였던 사람이 어떻게 되어 예수를 믿어 그와 신비스러운 연합을 이루게 되는 지를 살펴볼 때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성도가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나시며 거듭남 즉 예수를 믿게 되는 신비스러운 과정을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 요 3:3:5-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즉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셔서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백성 된 자만이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변화는 과정은 요 16장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세하게 말씀하시면서 성도가 예수와 신비스럽게 연합되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할 있을 지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 요 16:7-1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말씀들은 중생의 도리를 설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어 거듭나게 하시어 내재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발상하시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진리를 통하여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성도는 내재(內在)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어두움이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빛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갈 5:19-23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도란 썩어가며 냄새나고, 추하고 더러운 어두움의 세상 속에서 그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써, 그 어두움을 사라지게 하는 빛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러한 존재들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4. 빛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에베소서 성도들에게 전달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행동 양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goodness)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진실함(truth)에 있느니라.
고국의 소식 가운데 다음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최근 전월세 가격의 급등세와 관련하여,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사장:이동원 목사, 이하 기윤실)이 몇 몇 기독단체들과 공동으로 8월 26일 숭실대학교에서 ‘전월세대란시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의 포럼을 개최했다.
* 조성찬 박사는 “개인 성도의 차원에서 토지 및 주택 투기를 하지 않고 전월세 동결 및 인상 제한 운동에 동참할 것을, 교회 차원에서 교회가 교회 내 전월세 동결운동 동참자와 무주택 서민을 연결시켜주고 토지 불로소득으로 ‘희년’기금을 조성할 것을, 장기적으로는 토지보유세 인상 정책을 지지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 김회권 교수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구원을 경험한 교회 공동체가 먼저 성서적 진리인 토지공개념운동과 희년사상 운동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 김영철목사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 불로소득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주력해 온 한국교회의 예배당 사용 및 건축에 대한 사고부터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실천적인 대안으로 김 목사는 교회건물의 공동사용 및 통폐합, 학사관 건축, ‘전세자금무이자대출지원’ 등을 제시했다.
이 논의를 주관한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원로)가 8월 28일 주일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먼저 전월세를 동결하거나 깎아주는 등 ‘전월세 인상제한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조선일보 9월 3일자).
이 목사는 이날 ‘인간관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 시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사실 단순하다. 집을 두 채 이상 가지고 있는, 즉 다주택을 보유한 성도들은 전월세를 동결하거나, 오히려 깎아줘야 한다. 주변에서 다 올릴 때 그리스도인이 전월세를 동결하거나 내리는 것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이 올리니까 같이 올려서 이웃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묵상할 필요가 있다. 전월세 인상은 투기바람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이다. 앞으로 그리스도인은 땅 투기, 주택 투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실수요 목적으로만 땅과 주택을 소유할 줄 아는 것이야 말로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이며, 이웃을 끌어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힘든 우리의 이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고 있나요? 속고 속이는 이 세상 속에서 참된 진실과 의로움과 바름으로 이 사회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결 론
빛은 어두움을 노출시켜 밝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headlight의 빛이 어두우면 아주 불편하여 갈아야 하듯이 믿는 다고 하면서도 어두움을 물치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올바른 천국 백성의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심은 흑암의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밝은 빛은 비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우리들에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오심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비추시어 밝은 구원의 세상을 만드시기 위함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창조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것이 진정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방언과 같은 은사를 주시는 것이 주된 사역이 아니라, 말씀으로 역사하시어 성도를 예수와 신비스러운 연합을 갖게 하십니다. 이렇게 변화된 성도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 땅에 실천하여 펼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권면합니다.
*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렇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 가운데서 흠도 없는 자녀로 거듭태어나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세상의 빛으로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지 살피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생각과 의식 속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행동에서 흠없는 주님의 제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어서 모든 영역에서 “착함(goodness), 의로움(righteousness), 진실함(truth)“이 있는 삶을 통하여 주변에 있는 가족과 형제, 그리고 이웃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풍성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맛깔나는 사람
마 5:13-16
주님께서 산상보훈 팔복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 즉 성도의 모습, 특징, 혹은 자격에 대하여 언급하셨다면, 이제 그러한 성도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의 역할을 “저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흔히 성도들이 말하는, “세상의 소금이 됩시다. 혹은 빛이 됩시다!” 라고 외치는 구호가 아닙니다. 이미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성도의 신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즉, 성도란 세상에서 소망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불림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신분이 바뀐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요, 특별 임무가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 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소금이라고 하는 물질의 특징을 생각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빛이라고 하는 존재의 특성을 생각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짠맛과 밝음이라고 하는 특성을 통하여 교훈하시는 주님 특유의 가르침입니다.
이 시간은 그 첫 번째 비유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의 의미
첫째, 세상은 부패한 곳이다: 흔히 세상은 아름답고 선한 곳으로 살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드려다 보고, 살펴볼수록, 또 살아갈수록 세상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우며 썩은 곳인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라고 하실 때, 세상에 대한 관점은 “세상은 부패한 곳”입니다. 즉 세상은 썩고 있고, 냄새나며, 추악하고, 거짓된 곳이라는 전제입니다. 이러한 전제는 노아 때 홍수로 심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지적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과 함께 하지 못하시겠다고 하시며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 창 6:3, 5-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께서 보시는 세상은 부패한 곳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 속에는 기독교인이 이 썩어 냄새나는 부패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원칙과 원리 그리고 방법으로 살아가야하는 지를 교훈합니다.
둘째, 성도는 달라야 한다: 성도는 이러한 세상에서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러한 세상에서 구별하여 선택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성도이지만, 이 세상을 떠나 살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흔히 수도원이나 어떤 특수 종교집단에서는 이 부패한 세상의 속성 때문에 속세를 떠나 독신주의를 고수하고 외부와 차단된 집단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들은 주님께서 하신 “세상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제대로 따르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8복에서 규정한 성품과 도덕적, 윤리적 덕목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는 것이지요. 즉, “너희는!” 이라고 하시는 것은 즉 세상에서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냄새 나는 세상에서 오직 너희들! 기독교인들만이 그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이고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계, 의료계, 법조계 모든 영역이 타락하였습니다. 이젠 종교계까지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여 썩는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유일한 세상의 소망은 교회입니다. 성도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차원이 다른 존재, 독특한 맛이 나는 존재, 구별의식, 집단의식으로 무장된 존재들이 성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죄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성도가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2. 성도의 소금의 역할
주님은 이 점에 있어서 소금이라는 물질을 통하여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소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소금은 한마디로 “짠 맛”을 가진 물질입니다. 주님은 소금의 이 독특한 성질 즉 짠맛으로 성도의 삶의 원리,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구절들을 취합해 보면 그 답변이 나온다고 여겨집니다.
*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 눅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본문의 말씀과 함께 이 두 구절 모두 소금의 특징은 짠 맛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는 짠 소금에서 두 가지 기능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소극적(부정적) 기능입니다: 소금 특유의 맛 즉 짠 맛을 통하여 썩어질 것을 방지하는 기능 즉 부패를 방지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짠 맛은 부패를 방지하고 또 부패하지 않게 합니다.
둘째, 적극적(긍정적) 기능입니다: 소금은 그 특유의 짠 맛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옛날 소금은 돈과 같이 귀중한 물질로 대접받았습니다. 사람의 몸속에 염분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무미건조한 음식을 맛깔나게 합니다. 맛이 없음을 방지하고 나아가 맛이 있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해 줍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을 맛깔나게 살아가도록 해 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신앙 안에는 삶의 의미가 있고, 방법이 있고, 또한 목표가 있습니다. 사명이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항상 제시하고 활기를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통하여 자신의 세상적 쾌락만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이 다 지나가고, 돈이 다 없어지고, 권력을 잃게 되는 순간부터, 그 인생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특히 나이들어 늙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 참으로 추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사망선고를 받으면 절망에 휩싸여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최근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들 중 젊은이들 못지않게 60-70이 넘은 노인들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참된 인생의 맛을 모르고 살아온 자들이 나이들어 인생의 황혼기에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택하게 된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망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슬퍼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시기 까지 하십니다.
* 시 116: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왜냐하면 소금과 같이 맛있는 세상을 살다가, 영원한 영생의 소망을 갖고 떠나는 것이기에 오히려 죽음이 감사요, 축하요, 소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3. 세상의 소금인 성도의 특징
첫째, 차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구별의식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세상의 방법으로 처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임을 의식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누가 보나 보지 않으나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맛깔난 역할을 살아가면서 드러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둘째, 개개인의 회개와 개혁 운동에 집중해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세상의 소금에 대하여 두 가지의 극단적인 입장을 위하여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 적극적 입장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소금과 빛의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하여 집단적으로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여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상대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집단적으로 정치에 간섭을 하려 합니다. 비성경적인 이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그러한 이념이 잘못된 이념과 사상임을 천명하고 나서서 그들을 타파하는 데 압장서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행동은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이 구약 시대가 아니고 자신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정 반대의 입장, 소극적입장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는 세상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교회는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던지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영혼 구원에만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주장은 모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소금역할을 할 것입니까? 집단적이고 단체적인 힘으로 세상 속에서 힘을 과시하고 위협할 것이 아니라, 소금인 성도 개개인이 있는 곳에서 맛 깔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모르드개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이방 나라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맡은 직책은 성문을 파수하는 문지기였습니다. 당시 이 성문을 왕래하는 하만 장군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로 부처 절을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에게 절(아부)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에 줄을 닿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와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아하수에로 왕을 보호하는)함으로 결정적인 나라의 부패를 방지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결정적인 때에 하만 장군을 굴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성경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참고 에스더 2:19-23, 6:1-14).
성도여러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소금 역할을 일부러 하려고 구호는 외치며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있는 곳에서, 있는 직책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노라면 그 성도의 주변에서 냄새가 나고 썩어가는 현상이 그치고 맛깔스러운 현장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와 성도는 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하고, 죄가 무엇인지, 죄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반드시 그러한 반응을 하게 마련입니다. 기독교인은 무조건 공산주의와 독재주의는 반대하고 민주주의고 자본주의이기에 찬성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두 이념 속에는 여전히 부패한 인간의 죄성이 작용하여 나타나고 또한 항상 죄가 상존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 점에 대하여 말합니다.
*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세상은 그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막론하고, 빈부귀천,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항상 거짓되고 부패하기에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우리의 신분을 확인시키시고 그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할 것을 강력하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before God) 진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 보는 삶(회개)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때에야 진정한 맛이 나는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한국 초대 교회에 있었던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한 두 성도가 성도들 앞에서 나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온 교회가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또한 사회 속에서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이 소금역할을 하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요? 주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 소금이 그 맛- 짠맛을 잃으면 어디다 쓸 것입니까? 본문의 말씀에서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결 론
세상을 보십시오. 썩어 냄새하고 부장과 부패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마땅히 소금이어야 할 성도, 교역자, 교회가 그 맛을 잃어 버렸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들을 세상으로부터 당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목사를 알아줍니까? 장로 집사, 권사를 알아줍니까? 부끄러운 시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도의 신분인 소금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자신이 이 소금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개개인이 소금임을 깊이 인식하시어 소금적인 삶을 통하여 그 역겨운 냄새가 그치고 향기 있고 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자신을 항상 깊이 돌아보아 스스로 개혁하는 일을 게으르지 하지 말고, 이 세상 속에서 소금의 맛, 맛깔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눅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소금과 빛으로 살려면
마 5:13-16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소금과 빛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 소금과 빛인 성도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 소금과 빛인 성도
1) 왜 성도가 소금으로 빛으로 나타나야만 하나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즉 성도는 그렇게 되어 지도록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것 같이(창 12:1-3),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가지시고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으로 가지시고 예수 안에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인 우리들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소금/ 빛이라고 설명하십니다.
2 기능 상실한 존재라면?
주님은, ‘나는 너희를 소금과 빛으로 만들었다. 소금이라면 맛을 잃을 수가 없고, 빛이라면 숨겨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소금이요, 빛인 너희는 그 맛이 나도록 되어있고, 빛은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이러한 소금이며 빛인 신분이라고 할찌라도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또한 왜곡되어 지음 받은 목적대로 발휘되지 못할 경우입니다. 그럴 때에는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실, 맛잃은 소금, 그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니며, 그 소금의 유용성은 상실한 것이 됩니다. 결국 그 소금은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신분임을 명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재활용 사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료와 자재들을 재활용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음식 쓰레기와 같이 버리는 것들조차도 어떻게 하면 재활용할 수 있을 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만약 그 신분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다른 용도로 사용 가능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맛을 잃은 소금이 무슨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만, 과학이 발달한 요즘, 맛 잃은 소금으로 그 어떤 분야에서 사용 가능한 경우가 있는 지. 그러나 예수님 당시 맛 잃은 소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존재요, 그저 땅에 버려 밟고 지나가는 추락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어두움 가운데 환히 비치는 전구 빛이 있는데 그 전구에 공급되던 전기가 갑자기 나갔다고 생각합시다. 그 전구는 더 이상 빛이 아닙니다. 빛의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질인 소금과 빛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들 디모데에게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 딤후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교훈의 말씀은 오늘날 사이비 교인들이 많은 시대에 어떤 사람들과 교제하여야 할 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소금이요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힘쓰는 자들과 함께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유감되게도 오늘날 성도이면서도 성도답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이들이 바로 경건의 모양은 내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자기 욕심과 야욕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배신하고 조급하고, 자만하며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제 주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교인입니다. 심지어 교역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맛 잃은 소금이요 빛을 잃은 빛입니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더 이상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는가?
초대 기독교 시대에 융성했던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갑자기 사라진 역사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교회들입니다. 1-3세기 경 이 지역에는 St. Augustine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배출되는 등 기독교 문화권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사에서 이 교회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의 부패상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려 만연되어 이방인들에게 밟혀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우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각 방면에 깊이 관여되어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들리 소금으로 빛으로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려고 힘쓰고 있는 줄 믿고 또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점 역시 없지 않습니다. 왜 교회가 세상의 온갖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는 일을 이들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말합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야 말로 참으로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는 기독교에 대하여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교회와 성도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성도들, 형식적 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진실된 교인들은 숨겨질 수 없고 세상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성도의 삶의 모습은 소금과 같고 빛과 같아서 그들의 존재는 소금처럼 맛이 있고 빛과 같이 등경 위에서 드러나 밝게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라고! 이 점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관리에 힘써야
그러면 과연 소금이요 빛인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그 역할의 잘잘못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적극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 까요?
소금의 경우는 그 맛을 잃으면 소용이 없어서! 주님은 단호하게 더 이상의 사용가치가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맛을 잃으면 안되는 존재, 당연히 소금이면 짠 맛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짠 맛을 잃은 물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닌 것이라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빛의 경우는 어떤까요? 옛날에는 빛은 내기 위해서는 기름과 심지가 필요했습니다. 용기에 기름을 넣고 그 기름에 심지를 담가서 그 심지에 불을 붙여 불을 밝혔습니다. 즉 기름과 심지는 불을 피우기 위한 꼭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당연히 불을 잘 피우기 위하여 이 기름 관리와 심지 관리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기름관리
우선 불을 피우기 위하여 등잔에 필요한 것은 기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 처녀 비유(마 25)에서와 같이 등불에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 마 25:1-4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 마 25: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름이 절대필수입니다. 기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심지가 좋고 길게 늘어뜨려 있더라도 기름이 없으면 불을 지속적으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죽이시고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의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귀한 구원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 요 1:3-5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 1:9-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구원의 진리,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가 믿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하신 긍휼과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 놀라운 구속의 진리를 믿게 하신 성령께서 너희 속에 충만히 거하시기를 사모하고 노력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에게 예수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예수 생명이 우리 속에서 풍성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기름과 같이 지속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날마다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2) 심지 관리
불이 없어서 촛불을 사용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촛불을 오해 사용하다 보면, 심지가 길어져서 연기가 나고, 불꽃이 제대로 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가위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심지를 다듬습니다. 그래서 심지의 불이 제대로 타서 환하게 되는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이 제대로 역할을 하도록 하는 데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심지 관리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대로 불이 환하게 빛나게 하려면기름인 성령 하나님을 사모할 뿐 아니라, 심지인 우리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은 우리 스스로 영적 관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날마다 말씀 묵상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심지를 손질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빛이요, 길입니다. 우리의 거울과 같습니다.
*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생명이신 자신에게 와서 목마르지 말라고 초청하셨습니다.
* 요 6:35,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신실한 성도는 이 귀한 진리를 의식하고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사모하는 일을 귀지 않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긴밀한 접촉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작업이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생명을 공급받는 길이요 이러한 작업을 성실하게 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마틴 로이드 목사는 “ 매일 8복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 고 권면하셨습니다.
둘째,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말씀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정착하도록 자신을 다지는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된 마음은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하려고 충동질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말씀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구체적인 방법을 얻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기도로 당신에게 주어진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음을 기억합시다.
* 막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사도 바울도 권면합니다.
*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자 하는 바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일을 위하여 깨어 항상 기도하라”입니다. 즉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이를 위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여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성령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저 입술만 들썩거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이 일을 위하여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인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관점과 기준에 의하여 적용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작은 예수로써 이 악한 세상에서 빛을 비추며 소금의 맛을 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들이 많이 있을 때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구원의 역사는 우리 개인 속에서, 가정 속에서, 사회와 국가 속에서 풍성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결 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렇게 할 때! 너희가!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는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교인이라고 하는 직분은 세상에서 많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소금과 빛으로서의 신분에 걸 맞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빛은 받아야 합니다. 보름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이 세상에 환하게 빛을 비추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전히 빛을 받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의 주변은 환하게 비쳐지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소금으로서의 맛깔 나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이러한 사역 속에서 전제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희생이라는 요소입니다. 소금이 물에 녹을 때, 초가 녹아질 때, 빛이 발하고 맛이 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진정 겸손과 희생으로 쓰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상황들이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 길이 고통스러운 길이라고 할찌라도 이러한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결코 상급을 잊지 않으십니다.
*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 귀한 영광의 자리에 설 때까지 소금과 빛으로써 한 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율법의 완성자 예수
마 5:17-20
최근에 한국에서는 안철수(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교수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어느 칼럼을 쓰시는 분은 “신기루인가 변화인가!”란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 집안에 살고 있는 식구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잘 모르면서도 그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에 근거하며 쉽게 매도(罵倒)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나사렛 예수만큼 논란이 많이 되었던 사람도 역사상 드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도 그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분입니다. 하나님, 인간, 메시야, 사회 혁명가, 민중 운동가, 종교인, 등등 다양한 명칭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매도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신학계에는 Jesus Seminar 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장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 반의 인생 가운데 3년 반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역 초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사회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언사를 보고 나름대로 평가를 했습니다.
*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러한 평가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도 바울과 같이 가말리엘이라는 스승을 둔 적이 없습니다(행 22:3).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 배우지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학파에 소속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나타나 당시 종교적 의식과 규율과 예식을 파기하고 의도적으로 당시 유명한 율법 선생들을 비난하며 자신의 고유의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하여 매우 신경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무슨 말을 하는지, 소문에 돌고 도는 행위가 사실인지,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니는 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 17-20절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중심 주제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이는 이제까지 살펴 본 팔복의 말씀 중에 “의”을 매우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에 주린 자(6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10절), 그리고 20절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너희의 의가 더 나아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의로움은 어떤 근거에서 정의가 내려지게 됩니까? 유대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본문에서 그 의의 정당성, 정의 그리고 그 근거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17-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9-20절에서 성도와 율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들에서 그 내용이 갖고 있는 중요성입니다. 즉 예수님의 교훈이 구약과 동일함,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교훈과 정면 충동하심의 정당성입니다. 이 시간 앞부분, 즉 예수님의 교훈과 구약의 교훈과의 동일성에 대한 말씀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1. 오해를 불식시키심
사실 산상보훈의 말씀 가운데 8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3인칭으로 말씀하시더니(마 5:3-11), 그 다음은 2인칭으로(12-16), 그 다음은 1인칭으로 말씀하십니다(17-20). 이는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시고 최종적인 말씀을 하시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천국에 들어가지 위하여 즉 구원받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를 가장 권위 있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각 동리마다 회당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율법사들이 날마다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근거는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율법서(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의로운 삶에 대하여 유대사회에 전래되어오고 있는 각종 교훈과 예식과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방법과 판이한 방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을 산상보훈 마지막 부분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러한 예수님에 대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를 오해할뿐만 아니라, 그를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녀와 만나고 그들과 식사를 하는 죄인이요 그들의 친구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율법을 폐지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때, 예수님은 이들이 비난할 만한 행동을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의 진정성을 그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러한 금지된 행위를 율법이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하였고 또한 적용하여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훈을 근거로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라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비난을 들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대하여 비난하는 사실을 의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 지를 밝히 해명하셨습니다.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자가 아니고 도리어 완전하게 하는 역할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는 비난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발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발언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아야 합니다.
2. 구약(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
이 말씀에서 생각하게 되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의 연속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교훈들을 유효한 것으로 보셨는가? 둘째는 율법의 폐지성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을 주장하셨는가? 즉 이 두 문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복음은 구약의 말씀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 주님의 말씀은 율법의 계속인가?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니면, 단절인가? 폐지인가?
주님은 이러한 주제를 한 마디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즉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자가 아니요,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온 자라(17절)고 주장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완전케 한다(plerosai)”는 말입니다. 이 말은 filled(채운다), finished(마치다) fulfilled(완성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완성자, 성취자, 종결자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0계명과 같은 도덕법과 시민들이 생활하면서 적용되는 시민법 즉 민법과 각종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사법 즉 의식법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선지서들은 구약의 예언서들로 선지자들이 율법을 설명하고 가르칠 뿐 아니라, 그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역할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약의 말씀들을 한 마디로 통합하여 보는 시각을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각종 종교적 규례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증언)하는 것이니라.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나름 성경에 정통한 박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지한 자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심이 자신임을 말씀과 행동으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말씀들 즉 율법서와 시가서와 선지서 그리고 역사서들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로써 그 속에는 비유와 모형과 상징 그리고 예언들이 적절하게 담겨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 벧후 1:16-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 그는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하고서(참고 마 17:1-8), 그 놀라운 관경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 때 등장한 인물 즉 모세와 엘리야 즉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즉 더 확실한 예언 즉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의 기록된 말씀 즉 구약의 말씀이 있어서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며 날이 새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즉 깨닫기 까지 주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훈합니다. 즉 구약이 주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인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씀합니다. “구약은 신약을 품고 있고 신약은 구약을 드러낸다.” 성도들은 이 요약된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단절이 아니라 깊이 서로 연관된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입니다.
3.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래서 우리 주님은 구약의 말씀이 폐지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예언된 말씀들이 자신을 통하여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 자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 예로 초대교회 당시 Marcion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예수님은 자비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구약을 폐하고 신약의 말씀들만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신들의 성경인 Marcion Bible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7절의 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버렸습니다. “ I have come not to fulfill the law and the prophets, but to abolish them(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폐하러 왔다)”
주님은 구약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8절은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17절과 18절 사이에는 왜냐하면(gar, because)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이유는 18절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일점일획이라는 말씀은 히브리어 글자의 dagesh, 헬라어의 요드와 같은 아주 작은 글자 한자 한자를 의미합니다. 즉 구약 성경의 그 어느 단어 하나도 버리거나 취소됨이 없이 다 성취될 것이기에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약을 보고 계시는 지(구약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첫째, 주님은 구약성경의 완전성을 믿으셨습니다.
둘째, 주님은 자신이 율법을 성취해야함을 아셨습니다.
셋째, 주님은 그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롬 8:2-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님의 오심은 율법이 요구하시는 바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의롭지 못한 죄인들에게 의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스스로 죄에 대하여 율법이 정한 바 사망을 스스로 취하여서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온전한 의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결 론
이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누구입니까? 정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죄인들이 아닙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신약의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 롬 3:10-12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이룰 능력도 의롭게 될 그 어떤 의지와 능력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만약 육신을 따르면 반드시 육신의 일 즉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이 정한 엄중한 죄에 대한 심판을 스스로 당하시어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길을 완성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시는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신 예수를 믿어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종교적인 교훈과 절차에 따른 예식을 지킴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힘쓸 때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롬 8:5-11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즉 말과 종교적 의식에 참여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하여 참된 의를 드러낼 때 천국에 즉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너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마 5:17-20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지상에서 여론 조사를 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종교인들 중에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천주교인들이 가장 믿을 만하고, 그 다음은 원불교도, 마지막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이들 종교인들 보다 더 많기도 하여 이러한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여러분들이 경험한 기독교인들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라고 평가하시겠습니까?
고위공직자들을 선출할 때 제기 되는 문제는 그들의 날의 삶에 대한 높은 윤리적 행동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공직자 지망생들의 삶들은 다른 세상 서민들의 삶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통 시민들의 삶의 방식을 초월한 타락된 윤리적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아왔음이 밝혀져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봅니다. 만약 이들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뭐 세상이 다 그러니까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유감 되게도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 기독교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말로 신앙양심을 저버린, 말씀의 원리를 무시하는, 그 결과 세속화되어 타락된 저질 종교인들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모여서 요란스러운 콘서트와 같은 집회들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정직과 정의를 위한 양심집단으로서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심한 종교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짓밟히는 한심한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스스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임을 자각하고 신실하게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진정한 성도들이 있음을 믿고 싶습니다. 말씀 속에서 살펴 볼 때,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윤리적 수준은 세상의 윤리적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나는 17-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9-20절에서 성도와 율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들에서 그 내용이 갖고 있는 중요성입니다. 그 중요함은 예수께서 이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시는 모든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훈과 동일할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사역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은 구약의 예언과 교훈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는 율법의 완성자, 종결자, 마침이라고 하셨습니다.
*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제 다루려는 주제는 성도와 율법입니다. 19-20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이 구절, 20절은 상당히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의롭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보다 더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1. 작은 계명 큰 계명
*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주님은 작은 계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 중에서 작은 것, 큰 것을 구별하여 말씀하신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들은 구별을 한 것 같습니다. 어느날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 마 22:35-40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큰 계명 작은 계명을 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 핵심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큰 계명, 작은 계명을 가려가며 그 경중에 따라 지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진정성을 갖고 준수해 갈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사실, 십계명의 구분은 1-4계명이 하나님 사랑, 5-10계명이 이웃 사랑의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약 2:8-10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사실, 예수님 당시 율법사들이 가르친 율법 준수사항 중에 해야 할 항목, 248가지, 해서는 안 될 항목 365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항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고 그들은 이러한 항목을 준수하면 의롭다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시 율법사들의 교육 방식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셨음을 봅니다.
2. 율법주의자들의 의
예수님께서는 20절에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과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가 어느 정도이기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놀랍게도 이들이 얼마나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이들 바리새인들의 행동에 대하여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s)”라는 말은 분리주의자라는 의미입니다.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속인들과 자신들을 구별 지어서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것입니다.
* 눅 18:9-13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기록에서 바리새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당하였고 또한 교만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사실 율법은 금식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일 년에 한번 정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하도록 지나치게 강조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건과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미가 없고 또한 공허한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이들을 추종하여 따르는 서기관들의 종교적 행위를 비판하셨습니다.
3. 주님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주님께서는 이들 종교주의자들에 대하여 참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위선적 종교행위에 대해 가차 없이 지적하시며 비판하셨습니다.
1) 모세의 위치에서 대접받기 좋아하는 집단
* 마 23:1-2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마 23:4-7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2) 구원에 가장 방해되는 집단
* 마 23:13,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 재물을 탐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집단
* 마 23:16-18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4)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실한 위선 집단
* 마 23:23-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마 15:4-9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5) 예수님의 저주받은 집단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저주하셨습니다.
*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집요하게 이들을 비판하시고 저주까지 하셨을까요?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모세를 대신하여 스스로 구원을 베푸는 자 인양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장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사실, 바리새인들의 경건한 행동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위선을 낫낫이 발가벗기셨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거짓입니다. 말로는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합니다. 상당한 믿음이 있고 경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거짓이고 세속적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의로움 보다 너희의 의가 더 나아야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4.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과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경건한 종교인들 보다 더 의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약에서 주님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 렘 31: 33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겔 36:25-28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의 말씀들은 곧 성령의 임재하심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즉 참된 의와 경건은 인간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곧 거듭남의 역사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인 인간은 스스로 참된 경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이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몰두 하십니까?
결 론
우리 모두는 위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를 비판할 정당성이 나에게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이러한 저질의 존재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이런 우리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조하여 사모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 요 14:16-17, 16:13-1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을 사모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이 간곡하게 권면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 악한 세상을 참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한 삶의 모습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니다.
* 롬 12:9, 21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단순한 종교적 행위로서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을 누리는 삶입니다. 아멘
소금과 빛(八福 ⑨)
마태복음 5:13-20 / 한경직 목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루에서 불러서 장차 보이실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장차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삼고 네 이름을 창대(昌大)하게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 이렇게 두 가지로 약속을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약속이 다 이루어진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와 온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첫째는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을 받습니다. 산상보훈(山上寶訓에서 주님께서 여덟 가지 축복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 마음이 가난함으로 천국을 얻게 되고,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게 되고,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배부름을 얻게 되고,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 함을 받게 되고, 마음이 청결함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며,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음으로 온전히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둘째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자신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복의 근원이 되어서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 사람들이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 여러분과 같이 잠깐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둘째 종류의 축복이올시다. 이렇게 먼저 자신이 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복을 주시는지 이 점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이 시간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교훈 하시는 방법은 가장 평범하고 자연계에 있는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깊은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두 가지 실물을 들어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소금과 빛이올시다. 곧 주님 앞에 나와서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소급과 빛이 되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통하여 역시 복을 받게 되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이와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제일 먼저 우리의 염두에 들어오는 생각은,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 매일 있어야 할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물건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소금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 음식의 맛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김장을 담을 수 있으며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생선 같은 음식을 보존할 수 있으며, 소금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시실 제가 듣건대 우리 육체라고 하는 것은 이 혈액 속에 소금이 있어야지 사람의 몸에 소금이 없으면 맥이 없어져서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소금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매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올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참된 구원을 얻은 참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이만큼 필요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올시다.
빛도 역시 그렇습니다. 빛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태양의 빛이 없으면 어떻게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은 고사하고 어떻게 벌레가 살 수 있으며, 어떻게 날 짐승이 살 수 있으며, 어떻게 기는 짐승들이 살 수 있습니까? 햇빛이 없으면 어떻게 풀이 자라며, 어떻게 꽃이 피며, 어떻게 곡식이 장성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어떻게 나무가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지 도무지 캄캄한 밤에 불 없이 어떻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빛은 이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올시다. 마찬가지로 이 캄캄한 세상에 있어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을 얻은 사람은 이만큼 필요합니다. 필수품이올시다. 보배올시다. 지극한 보화입니다.
소금과 빛!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이름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니 이것이 꼭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의 존재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야말로 이 사회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자중 자애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두려워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려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깊은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중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면 두 가지로 이 진리를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소금은 조미제(調味劑)로 씁니다. 맛이 있게 하는 데 사용합니다. 아무리 고량 진미와 산해 진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소금이 없다고 한다면 그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합니다. 소금이 들어가야 음식의 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도 철학이 있고, 문학이 있고, 과학이 있고, 예술이 있고, 모든 문화가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에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면 이 곳에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참된 평화와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의 생활을 알지도 못합니다.
어거스틴이 스스로 고백한 대로『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심령이 당신 안에 돌아와서 안정을 얻을 때까지는 안정을 얻을 수 없었나이다.』라는 말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얻을 때까지는 이 세상의 무엇을 가지고도 탕자가 되지가 먹는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는 이러한 생활이 무엇인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 불신자들의 생활이야말로 겉으로는 호화로운 것 같고 겉으로는 윤택한 것 같지마는 실지로는 무미하고 건조하고 참된 환희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시적 육체의 향락과 오락에 사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소금과 같은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으로 사는 참된 신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금을 제일 중요하게 쓰는 것은 방부제(防腐劑)로 씁니다. 썩는 것을 막는 데 씁니다. 더욱이 우리 한국보다 더운 성지 유대 나라로 말하면 이 소금 없이는 음식을 보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어떤 나라에서나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썩는 것을 막습니다. 음식이 썩을 때에 소금으로 막는 것처럼 이 세상이 썩을 때에 막을 자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임종하게 될 때 그 때의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兵車)와 이스라엘의 마병(馬兵)이 되시는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면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어떤 국민이나 나라 혹은 문화가 망하게 되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있기 전에 먼저 안에서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하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 열 사람이 있었다면 소돔성을 구할 수 있었겠다고 하는 말도 역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썩는 것을 막습니다. 이 사회에 참 신자가 있는 것은 썩은 생선에 소금을 뿌린 것과 같습니다. 짠 소금이면 자연히 썩을 것을 막게 됩니다. 참된 신자의 은연(隱然)한 영적 도덕적 감화력이 이와 같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썩는 사회를 구하는데는 소금과 같은 참된 신자 아니고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한 가지 경고의 구절을 더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면『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쓸 데 없어 밖에 버려 사람의 밟힘이 되리라.』이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자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돈에 사는 어떤 장사하는 사람이 폭리를 얻기 위해서 구브로라고 하는 섬에 가서 많은 소금을 밀수해서 산 속에다 갑자기 곡간을 짓고 그 곡간에다 잘 저축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 목적은 소금 값이 오르게 될 때 내어 팔 목적으로 그렇게 비밀히 간직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급히 곡간을 지었기 때문에 잘 짓지 못하고 또 바닥에 마루도 깔지 않고 땅 위에다 그 소금을 많이 쌓아 두었더니 마침 그 골짜기가 대단히 습해서 그 소금이 다 녹아 버렸다고 합니다. 그 때 소금은 지금처럼 정제한 소금이 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잡것이 많이 섞였는데 그 잡것 섞인 것만 남고 실지 짠맛은 다 없어 졌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이 장사꾼이 크게 실패하고 쓸데없어서 길밖에 버려서 길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되었다는 그런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데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접촉하면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사람의 감화력에 의지해서 믿지 않는 사람의 썩는 생활을 막든지, 그렇지 않으면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의 감화력을 받아서 함께 썩든지, 믿는 사람의 감화력으로 안 믿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안 믿는 사람의 감화를 받아서 함께 죄를 짓든지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슨 쓸데가 잇겠습니까. 밖에 버려서 사람의 밟힘밖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같은 죄라도 예수를 믿던 사람이 그 죄를 지으면 얼마나 사회에서도 희롱거리가 되고 모욕을 당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신문지사이에서도 더 떠듭니다. 맛 잃은 소금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은 훼방을 받습니까? 소금이 되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마는 맛을 잃을까 조심해야 도겠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갑자기 앓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잃어 갑니다. 혹은 기도가 게을러집니다. 혹은 주일날 예배당 출석이 게을러집니다. 혹은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점점 잘 하지 않습니다. 점점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교회와는 멀어집니다. 마지막엔 맛을 잃고 맙니다. 맛을 잃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그 다음 예수 님께서 너희는「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밝힙니다. 빛은 어두운 것을 헤칩니다. 방안에 불을 켜 놓으면 방안에 어둡던 것이 사라집니다. 쫓겨갑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가 한 사람 일어나게 되면 그를 통해서 복음의 빛이 발할 때 어두운 미신, 어두운 풍속, 어두운 사상, 어두운 습관, 어두운 생활이 점점 밝아집니다.
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고 빛나게 합니다. 아침 햇빛이 동방에 솟아 오르게되면 하늘이 빛나고 아름다워 집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빛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참된 신자가 있어서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는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생활이 아름다워지고 명랑하여 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빛은 사실대로 나타냅니다. 흰 것은 희게 나타나고 검은 것은 검게 나타납니다. 먼지는 먼지대로 나타나고 쓰레기는 쓰레기로 나타냅니다. 바른 것은 바른 것으로 나타내고 찌그러진 것은 찌그러진 것으로 나타냅니다. 사람의 얼굴도 빛을 보면 반반한 얼굴은 반반하게 나타나고 얽은 얼굴은 얽은 얼굴로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나타나고 추한 것은 추하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신자가 여기 있어서 복음의 빛을 비칠 때에는 의는 의로, 그러나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그러나 악은 악으로, 정결(淨潔)은 정결로, 그러나 불결은 불결로, 복음의 빛이 있으므로 검은 염소와 흰 면양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좋은 빛을 가지고, 촛불을 가지고 방안에 켜 놓았다가 그 위에다 말을 갔다가 덮어놓았습니다. 자, 덮어놓으면 그런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마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불을 켜 놓은 목적은 방안을 밝히기 위해서 불을 켜 놓았는데 그걸 말로 덮어 씌워? 저런 정신나간 사람이 어디 있노―아마 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실제로 신앙 세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빛을 말로 덮은 사람이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빛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빛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합니다. 마땅히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을 나타내야 하겠건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진리의 빛을 깨달았건만 이것을 마땅히 말해야 할 때에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우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를 이 세상에 둔 것은 산 위에 세운 성처럼 다른 사람이 다 바라보기 위해서 신자를 이 세상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를 사람 앞에서 아노라 하면 나도 이다음 하나님 앞에 가서 그를 아노라 할 것이오 나를 사람 앞에서 알지 못하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 가서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비춰야 됩니다. 빛은 나타내야 됩니다. 아름다운 진리의 빛, 아름다운 생활의 빛을 나타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참으로 이 여덟 가지 축복을 받으면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온 사회, 온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서 그들도 같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