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할 일도 없이 거실을 휘젓고 다니는 호윤. 휘리릭 쇼파를 향해 구르다 보면 쇼파 밑에 퀘퀘묶은 먼지에 쌓인 시윤의 흔적인 만년필 한 자루가 보였고 TV화면 쪽으로 구르다보면 3년 전 여름 휴가에서 승안과 같이 찍은 수영복 차림의 사진이 당당히 액자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체질상 뒷구르기는 하지 못해서 앞구르기를 할라치면 또 고개를 드는 게 귀찮아서 좌우로 굴러다닐 뿐이다.
그러다가 뭔가가 발끝, 손끝에 걸리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그것을 날려버려서 어머니의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한껏 들을 수 있었다.
"장호윤! 물건을 정리하지, 왜 던져! 엄마 맞았잖아!"
"그럼 문 닫고 있어!"
"안방에 에어컨 없잖아!"
"누나 방 써!"
"이게! 조용히 안해? 집중이 안되잖아!"
작가라는 복잡미묘, 어쩌면 저 자신에게는 다행일 지도 모르는 직업을 가진 어머니.
자신과는 다르게 개방적인 사고를 지니고 계셔서 왠만한 거에 화를 내시지는 않는다. 단지 집안 일에 짜증을 낼 뿐이다.
저번에 한 번 TV에서 동성애자, 그들을 파헤쳐보자, 이런 식의 다큐멘터리를, 잘 보지 않던 TV채널 편성표까지 찾아보며 챙겨보던 엄마의 모습에 내심 안심까지 했던 호윤이다.
"네, 네, 열심히 써서 나의 일용할 양식을 생산해주세요."
"말이 뭐 그래!"
"열심히 하라고, 엄마 진짜 소리 좀 지르지마, 옆집에서 얼마나 시끄럽겠어."
그 록큰롤 여자가 말이야,
궁시렁궁시렁 혼잣말을 해대는 두 모자. 결국 서로에게 신경을 돌린 채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려놓은 어머니는 인상을 구겨가고 있고, 호윤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다.
이 무료함, 그리고 한가함.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후다닥, 방문을 닫는 어머니의 행동을 본 호윤은 한숨을 폭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딱딱한 마루바닥을 한참이나 굴러다녀서인지 허리를 피자 우드득 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얼마 전 부터 고장나서 나오는 건 하얀 줄과 빛 밖에 없는 인터폰을 예의상 확인해주고는 도어락 버튼을 하나 누른다.
"누구세요."
"아, 저 옆집에 사는 오번은이라고 합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어제 봤던 록큰롤 여자는 그 어디에도 없고 청순 가련하게 생긴 여자만이 호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에 손에 들린 미확인 물체.
호윤은 잠시동안 넋이 나간 것을 느끼며 살짝 입을 연다.
당황해 하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제 그 분 맞으세요? 혹시 누구랑 같이 사세요?"
"아, 어제는 제가 지방 공연이 있어서 피곤해서 그런 거였어요, 놀라셨나봐요."
아예, 아주 놀랍습니다. 화장법에 따라 달라지는 게 여자 얼굴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호윤, 용건을 간단히 말해주세요, 라고 말을 하니, 번은은 살며시 눈을 접어보인다.
이럴 땐 가슴이라도 뛰어줬으면 좋으련만 미련하게도 잠잠한 심장이다.
혹시 너 살기가 귀찮은거니? 피를 빨리 공급하기 귀찮은 거니? 근데 왜 형 앞에서는 그렇게 피를 내뿜어 주고 싶은 거니?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알 수 없는 마음에 변화에 마음 껏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번은을 바라본다.
"이사 떡이요, 제가 어제 월급을 받아서요, 제가 밤마나 시끄러웠던 것도 사과할 겸 해서요. 여기, 시루떡이예요."
은박에 쌓여있던 미확인 그 물체는 호윤이 그렇게나 받아먹고 싶어하던 이사떡이였다.
순간적으로 환하게 펴진 호윤의 인상. 얼른 시루떡을 받아드는 호윤. 아유 별 걸, 이라는 아줌마식 인사치례를 한다.
그런 호윤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호호, 작게 웃음 짓는 번은.
"그럼 저는 이만. 이웃끼리 자주 만나 뵈요."
"네, 안녕히 가세요. 떡 잘 먹을 게요."
서로 몇 번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문을 닫은 호윤.
요근래 볼 수 없었던 호의적인 태도를 내비친다.
"엄마! 떡 먹어!"
"왠 떡인데? 누구 왔었어?"
"옆 집에 락큰롤 하는 여자 있잖아. 어제 월급 받아서 이사 떡 돌리고 있데."
"아, 그래? 아들, 접시 가지고 와. 컵이랑 우유도."
어느 새 식탁에 자리 잡은 어머니는 줄줄이 호윤에게 일을 시키고 호윤은 네네, 익숙하게 그릇을 꺼내고 우유를 꺼낸다.
무료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은 시루떡 두 덩이.
야금야금 잘도 먹는 두 모자.
딩동-
또다시 초인종이 울리고, 입 안 가득 시루떡을 채워넣었던 호윤은 또다시 빛의 속도로 방안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인기피증도 아니고 말이야.
"누구세요!"
웅얼이는 소리가 나올까, 얼른 씹어 삼키고는 문을 열어보는 호윤.
그 앞에는 청순미를 물씬 풍겨대는 번은이 서있었다.
"뭐 용건이라도 더 있으세요?"
"저, 그게, 떡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네?"
"1층 부터 돌렸더니, 제가 먹을 게 없어서...... 밥도 없고, 배도 고프고 해서, 그런데 떡은 하나도 없고, 그래도 이웃은 사촌인데.... 혹시 벌써 다 드셨나요?"
불쌍하고 애처로운 눈망울.
"엄마! 집에 밥 있어?"
"어! 있어! 누군데?"
"옆집 사는 사람!"
"들어오시라고 해!"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낼름 발을 들이민 번은.
하얀 원피스에 안 어울리는 삼선 슬리퍼. 그리고 쥐색 빛 아저씨 양말. 이 조화 안되는 여자는 뭔가, 고심하다가 번은이 이미 거실을 향해 발을 뻗은 것도 감지 하지 못한 호윤이다.
첫댓글 근데 이거 동성맞나요..?? 번은이가 여자가 아닌데 쥔공이 착각하는건가요..?ㅜ 헉;; 그렇다면 쥔공이 공이 된다는 건가?!?!? ㅜㅜ 수가 좋은데..
하하 동성 맞습니다!! 번은이도 여자구요, 그냥 중간 사이에 끼어서 나름 의미있을 역할이랍니다. 쥔공은 수.........쪽으로 갈듯 하구요^^
낄낄낄,,, 근데 주인공이 수가 되는게 저로서도 재미잇어요 ㅋㅋ
ㅎ저도 그런거 좋아하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