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통계에 잡히는 행복, 잡히지 않는 행복
중앙일보 입력 2023.04.14 01:02
한국은 점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매해 또는 한두 해 별 변화 없어 보이는 주변 환경에 아쉬워하지만, 10년 20년을 묶어서 보면 어느새 우리가 바라던 변화가 우리 삶의 속에 들어와 있음을 보게 된다. 지난달 발표된 통계청의 『2022 한국의 사회지표』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강과 수명에서 큰 향상이 있었다. 지난 20년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76세에서 83.6세로 7세 이상 늘었다. 남자는 72.3세에서 80.6세로 8세 넘게, 여자는 79.7세에서 86.6세로 7세 가까이 늘었다. 이 숫자는 이제 ‘100세 시대’가 곧 현실로 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평균수명이 느는 것은 세계 공통현상이지만, 지난 반세기에 특히 한국인의 수명이 빠르게 늘어 이제 일본인 다음으로 긴 삶을 누리게 되었다. 수명이 는다는 것은 의료서비스뿐 아니라 섭생 환경이 개선되고, 삶의 무게에 덜 지치고 있음을 뜻한다. 지난 20년간 일자리 만족도, 공공체육시설 수는 거의 배로 늘고 미세먼지 농도는 거의 반으로 줄었다. 도로교통사고 사망률이 10만명당 21.8명에서 5.6명으로 크게 줄고, 범죄율 역시 10만명당 3869건에서 2960건으로 줄었다. 교원 1인당 학생 수도, 학생들의 전반적 학교생활 만족도도 지난 10년간 좋아졌다.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지표 변화 한국인의 생활 환경 약진 보여줘 저성장 시대 행복도 높이기 위해 수치에 안 나오는 삶의 질 높여야 |
그동안 지구촌 인류가 누리는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됐지만, 한국인의 삶이 꾸준히 그리고 상대적으로 빠르게 향상된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 성공의 결과였다. 1인당 명목 GDP는 지난 20년간 1만2000달러에서 3만2000달러로 증가했다. 경제적 진보가 우리 사회 곳곳에 파급효과를 내면서 삶의 질을 지속해서 향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의 생활환경, 사회지표가 빠르게 개선되리라 확신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이미 세계경제성장률을 밑돌고, 이대로 가면 그 격차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구는 줄 뿐만 아니라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한국인의 중위연령은 1970년 18.5세에서 2022년 45세로 높아졌다. 1980년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중위연령은 세계전체인구의 중위연령보다 낮았다. 이런 인구배당이 당시 고속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2022년 세계전체인구의 중위연령은 30.2세인데 비해 한국인의 중위 인구는 이보다 14세나 높아졌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 가속해 2060년이 되면 한국인의 중위연령이 61세에 달하게 된다. 인구의 절반이 지금의 은퇴연령보다 늙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20년간 합계출산율은 절반으로 떨어져 0.78로 세계 최저, 인류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독서인구는 60%에서 45%로 떨어지고 연간 1인당 읽는 책도 7.3권으로 절반으로 줄었다. 지난 10년간 대인 신뢰도와 기부참여율 모두 큰 폭으로 떨어졌고, 타인의 의견 존중, 표현의 자유, 장애인 고용률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소득대비 주택가격은 지난 11년간 4.3배에서 6.7배로 높아졌다.
선진국과 비교한 우리 국민의 상대적 행복도 역시 여전히 매우 낮다.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발표된 UN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2022년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스스로 매긴 주관적 행복도 점수는 10점 만점에 5.95점으로, 세계 57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에서는 35위였다. 선진국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사기죄, 위증죄, 무고죄가 만연해 있다. 레가툼연구소가 세계 167개국을 대상으로 한 『국가번영지수 2021』에 의하면 개인 간 상호신뢰, 제도·기관 신뢰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자본은 우리나라가 147위로 이웃 대만 21위, 중국 54위보다 훨씬 낮은 저개발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편으로는 경제성장률의 빠른 하락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성장 없이도 국민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보상·유인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 꺼져가는 역동성을 회복하고 경제의 생산성을 높여나가야 한다. 후자를 위해서는 우리나라 정책과 제도의 목표가 좀 더 우리 사회의 공정, 질서, 신뢰를 제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공공부문 대혁신이 필요하다. 최근에 나오는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행복은 고전파경제학이나 신자유주의에서 중시하는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주위의 배려, 사회적 연대를 통해 증진된다는 것이다. 수명이 점점 길어지는 한국인들이 더 좋은 삶을 누리고, 더 좋은 사회를 차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배려심, 사회적 자본, 정신의 근육을 키우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해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가만이 아닌, 우리 국민 모두의 몫이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