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와 화목하고
마 5:21-26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1)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 5:21-26 / [화내지 말라] 모세의 율법에는 ㄴ) `만일 네가 사람을 죽이면 너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조문이 있다. (ㄴ. 출 20:13(참조,신 5:17)) 22) 그러나 나는 이 조문에 덧붙여 말한다. 까닭없이 형제에게 화내는 자는 심판받을 것이며, 어리석다고 욕하는 자는 법정에 끌려갈 것이며, 형제를 저주하는 자는 지옥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만일 네가 성전 제단 앞에 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네게 원한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제물을 제단 앞에 그대로 두고 가서 그에게 사과하고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라. 25) 너를 고소하려는 사람과 법정에 갈 때에는 길에서 얼른 그와 타협하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 너는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26) 그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렇게 되면 너는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사람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21-22) 옛 사람은 계명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중 여덟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때 말하는 살인은 사람의 생명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8계명을 달리 해석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게 욕설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율법을 또 다른 차원의 복음으로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내면, 즉 마음속 깊은 중심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품은 생각만으로도 이미 상대를 살인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십니다. 말로도 얼마든지 살인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언어폭력과 언어살인을 연계하여 사람에 대한 악감을 품지 않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언어가 타락한 시대입니다. 온갖 악성 댓글과 욕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23-26) 예수님은 마음의 정결을 강조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예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물을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창 4:5). 하나님은 가인이 드린 제물보다 먼저 가인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2). 가인은 동생을 죽일 정도로 이미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린 제물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형제에 대한 원망과 시기와 질투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적용: 살고 죽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습니다. 모세처럼 분노하여 자신에게 큰 충격이 되었거나 사람을 잃게 되었던 경험을 나누어 보세요.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충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 성령충만함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 없이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성령을 외면한 채 십자가만 바라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함께 경험할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전부의 삶에 있어 율법이 완성되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그리고 큰 일
마 5:21-26, 38-48 / 김삼환 목사
지난 해 12월 달부터 우리나라 극장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 가운데 레미제라블이라고 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지금 두 달도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500만 이상이 관람을 했습니다. 대단한 감동을 주고 있고, 많은 교인들도 보신 것 같습니다. 저도 앞으로 가서 한번 꼭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1985년부터 지금 약 한 40년 가까이 이 뮤지컬을 한 곳에서 40년을 계속 뮤지컬로 상영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40년 동안 한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데도 그치지 않고 관람객이 끊임없이 모여오는 것, 레미제라블입니다. 우리 레미제라블은 우리가 전체 가운데 잘 기억할 수 있는 것 여기에 주인공 장발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장발장은 어렵고, 가난한 가정에 너무 배가 고프고, 여동생하고 가정이 모두 이런 아주 어려운 직장생활하면서 어렵게 사는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 먹다가 붙잡혀 감옥에 가게 됩니다. 성격이난폭해집니다. 강퍅해집니다.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계속 탈옥하려고 힘쓰면, 힘쓰고 하면 할수록 그의 형기는 늘어나게 됩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만기가 되어 출소한 다음에는 아무도 받아줄 이 없는 냉대하고, 멸시천대하고, 갈 데도 올 데도 없는 때에 누가 교회에 소개해서 성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날 밤 사랑받고, 대접받고, 잘 먹고, 좋은 곳에 잠을 자지만 이 나쁜 성품을 고치지 못하고 그곳에서 은쟁반을 신부님의 은쟁반을 훔쳐가지고 나오다가 헌병에게 들킵니다. 붙잡혀서 묶여서 현장으로 갑니다. “신부님 이놈 알죠?” “아이고 알고말고요” “어젯밤에 여기자고 갔죠?” “그럼요.” “이놈이 훔쳐 나온 것 보십시오. 은쟁반 여기 거죠?” “그럼요.” “어젯밤에 훔친 것 맞죠?” “그거 아닙니다. 내가 어젯밤에 선물로 준 것입니다. 자네, 내가 촛대까지 주었는데 촛대는 왜 안 가지고 갔어?” 이 장발장이 처음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그 신부님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 처음 받아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도 용서할 수 없는, 하나도 덮어주지 않는, 어떠한 손길도 없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이 런 분이 있구나. 그는 결심합니다. 돌아섭니다. 변화됩니다. 시장이 됩니다. 사업도 크게 합니다. 신부가 준 그 사랑, 예수의 사랑으로 변화된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신 이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감사하며 사회에 그 이후로 끊임없는 이 약자들, 자기 공장안에 딸 하나 데리고 살아가는 해고된 엄마가 그 딸을 고치려고 머리를 팔고 보석을 다, 머리를 자릅니다. 그래서 윤락가에 들어갑니다. 윤락가에 들어가서 남자들을 싸워서 또 감옥에 집어넣을 때 장발장은 끝까지 그 사람을 살려냅니다.
수십 년 동안 장발장은 옛날에 나쁜 놈인 것을 아는 형사 한 사람이 베나드 입니까? 누구입니까? 이 자베르라고 하는 청년이 끊임없이 뒤를 추적하지만 그 사람도 장발장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용서해 줍니다. 죽일 수 있지만 봐주고 사랑해 주면서 형사도 나중에 이야, 정말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우리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잘사는 세상, 더 행복한 세상, 더 부유하고 건강하고 대한민국, 우리의 가정, 우리의 기업, 우리는 모두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그리고 큰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과학적으로 우리는 풍요를 누린다 할지라도 우리마음에 사랑과 평화가 없으면, 우리가 덮어주고, 배려하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이 사회는 절대로 좋아질 수 없습니다.
레미제라블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증오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투쟁과 싸움과 분열과 끊임없는 우리 이기주의의 정욕과 욕심을 가지고는 더 좋은 나라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백배 좋아졌지만 우리가 좋아지고 있습니까? 천배 만 배 발전했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입니까? 증오심이 더 많아졌고, 갈등이 더 많아졌고, 분열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화해하고, 품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해 주고, 덮어주고, 긍휼히 여기고,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나보고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주는 사람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겉옷을 가지려고 하는 분에게 속옷까지 내어줄 수 있는 이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좋아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속는 것입니다. 함정인 것입니다.
미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싸움과 분쟁, 살인, 시기, 질투, 비난, 헐뜯고 욕하고 대립하는 것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왜 이런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인 것입니다. 아담 이브가 범죄 한 다음 하나님 앞에 지음을 받은 그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는 순간 아담과 이브는 부부간에 분쟁합니다. 남편이 아내보고 너 죽으라고 말합니다.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 때문이라고 말하면 가정은 무너집니다. 그다음에 아들, 가인과 아벨, "너 때문이다" 라고 말하니 형제간에 살인이 일어납니다. 형제간에 우애 무너집니다. "너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국가 무너집니다. 너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인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인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이렇게 나와 너 사이를 모두 분쟁하게 하고 분열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는 이 요소가 바로 죄의 바이러스인 것입니다. 이 죄를 용서함 받기 전에는 우리는 참 평화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잘살면 평화가 온다, 지위가 높아지면 평화가 온다, 우리나라 보십시오. 제일 잘사는 분 형제간에 싸우
고, 부모 자녀 간에 싸웁니다. 한 곳만 아닙니다. 제일 잘사는 분들이 생명 걸고 싸웁니다. 가나한 분들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몇 십조 몇 백조를 가지면 안 싸울 것 같은데 싸우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쟁은 우리 안에는 죄가 분쟁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안 싸울 수 있습니다. 부유해도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주의 샬롬(shalom)이 있는 모든 성도는 참 평화를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우리는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하지만 유대인들, 기독교의 인사법은 샬롬(shalom) 입니다. 샬롬(shalom)이라는 이 말은 히브리말로 쉴람에서 왔습니다. 쉴람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쉴람이라는 이 말의 뜻은 뭐냐 하면 "누가 나를 향하여 대신 지불해 준다"는 뜻입니다. ‘내 빚을 대신 지불해준다, 내 죗값을 대신 갚아준다’는 뜻이 쉴람 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게 샬롬(shalom) 입니다. 평화입니다. 평안입니다.
그래서 샬롬(shalom)은 평안, 행복, 기쁨은 노력에서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죄를, 죄의 값을 누군가 지불해 줘야 됩니다. 죄는 본인이 이 죗값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본인의 선이나 의나 노력이나 힘으로, 공로로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지불이 되고, 용서가 되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안 죽게 되고, 예수님이 용서해 주심으로 내가 용서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 샬롬(shalom), 행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죄가 용서받을 때에 주어지는 일입니다. 죄를 두고는 어떠한 사람도 인류역사에 평화, 샬롬(shalom)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무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애써도 이 샬롬(shalom)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내 죄사함 받고, 용서함 받고, 하나님 주신 은혜가 샬롬(shalom)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번 일어나서 우리 찬송 410장 이 찬송을 부르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고 하는 이유가 다 나옵니다. 불러보시면 깨닫게 됩니다. 1절은 성가대에서, 2절은 여성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여성, 3절은 남성, 4절은 다 같이, 그렇게 착각하지 마시고 잘 들어 놓으셨다가 후렴은 다 같이 부릅니다.
1절 성가대에서 지휘자에 의해서 화음으로 4부로 멋지게 한번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2 주 십자가 지심으로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 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3 나 주님께 영광돌려 참 평화가 넘치도다 주 하나님 은혜로써 이 평화 누리도다 (후렴)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그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3절만 했습니다. 이따 한번 부르겠습니다.
평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평화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군사력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물질이 제 아무리 우주 같은 재산을, 금은보화를 가졌을지라도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편한 것은 있습니다. 편한 것이 평화가 아닙니다. 평안이 아닙니다. 돈 가지고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침대에 누웠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 아닙니다. 수천만 불짜리 집은 얻을 수 있지만 그 안에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멋진 결혼식 할 수 있지만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 잘 굴러가지만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를 안타도, 걸어가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감옥에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가난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시험이나 환난이나 고난이나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주신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고, 내안에 있는 이 평안, 참 샬롬, 내가 영원히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땅에서도 좀 더 편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평안이 없이 편하려고 하면 평안도 없고 편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 이 평안을 얻으려고 주님께 나아와, 십자가 앞에 나아와 기도하면 오늘도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참 평안 내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악한 세상, 이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도 내 마음은 언제나 편한 것입니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마음이 맘이 늘 평안해 맘이 늘 평안해
1972년 6월 8일 사이공 40키로 외곽에 미국이 월남에다가 폭격을 막 월맹에다가 폭격을 했습니다. 그때에 한 집에서 폭격을 맞고, 소리 지르고, 울부짖고 뛰어나오는 소녀가 있었는데 9살난 킴폭 이라고 하는 소녀입니다. 옷에 불이 붙었습니다. 막 뛰쳐나옵니다. “엄마 엄마 나 살려줘. 엄마 나 살려줘.” 막 소리 지르며 뛰어나오는 것을 미국기자가 찍고 이것이 전 세계를 감동하는 퓰리처상에 1등을 했습니다.
이 소녀는 그 이후에 캐나다로 가서 토론토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수술을 몇 십번 합니다. 온 몸에 파편에 다 박혔고, 그 폭격이 무슨 폭격인지 여성으로의 모든 생명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땀 한 방울 나지도 않고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워서 고통 속에 잠 못 자고 가렵고 아프고, 아무리 수술해도 끝도 없고, 그러니까 계속 미국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계속 미국 욕만 하는 것입니다. 20세 되던 어느 날 목사님이 이곳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킴폭 에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으세요. 예수님 믿고 구원 얻으세요.” 구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이 킴폭 에서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 샬롬(shalom)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보혈의 은혜,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피가 킴폭의 몸을 쓰다듬으면서 이 마음에 모든 아픔이 사라지면서 하나하나 미워하려야 미워해지지 않습니다.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샬롬(shalom)이, 쉴람이 오니까 세상이 전부 나쁜 놈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창문을 여니까 하늘이 저렇게 좋은 것을 처음 알게 되고, 꽃이 피는 것을 보니 세상에 저렇게 꽃도 아름답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이 너무너무 좋고, 사람이 이렇게 귀할 수가 없고, 미움이 지배하니 전부 미움 밖에 없었는데, 속상하고 증오하니까 전부다 악한 세상이었는데, 주님을 모시고 나니, 환경을 바꾼 것 아닙니다. 좋은 침대 바꾸고, 좋아진 것 전혀 아닌데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밥맛이 좋아집니다. 회복이 됩니다.
땀 안 나온다는 땀이 나오기 시작하고, 몸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성으로서의 변화가 일어나서, 몸의 균형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여성이 되면서 그러니까 또 사랑하고 하게 되고, 좋은 남편도 만들어지고, 그 안에 애기도 들어오게 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현대의학으로 치료 하고, 아무리 돈을 들여도 이 마음에 미움을 가지고 있는 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약을 준 아니고, 돈을 준 것도 아니고, 길을 열어준 것도 아닌 데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의 보혈을 연결 짓고, 십자가 붙잡으면서 이 마음에는 사랑이 살아나게 되고, 기쁨이 살아나게 되고, 미국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너 예수 믿어라. 너 나라 예수믿어라” 그래서 행복하게 잘살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많은 사람들은 좀 더 좋은 대학에, 좀 더 좋은 직장, 좀 더 예쁜 사람과 좀 더 좋은 집에서는 좋은 자동차 전부 이런, 좀 더 좋고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아닙니다. 샬롬(shalom)이 없는 한 아무리 올라가도, 아무리 가져도, 어디에 가도 행복 없습니다. 기쁨 없습니다. 샬롬(shalom)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으려면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샬롬(shalom)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하나님을 떠나면 절대로 샬롬(shalom)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샬롬(shalom)을 이 세상에서 구하려고 하면 방황하는 인생, 방탕 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고난 받아 우리에게 샬롬(shalom)을 주시고 이 샬롬(shalom)은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하고 만나는, 장발장을 만나는 분이 다 샬롬(shalom)이 연결돼서 이 샬롬(shalom)이 온 수많은 그 빈민가, 레미제라블이라는 말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시궁창 같은, 쓰레기 같은 비참한 곳에 사는 모든 분들에게 이 장발장의 신부가 준 사랑이 신부의 것이 아니고, 장발장이 준 사랑이 장발장의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우리가 받아서 이것이 씨앗이 되어 우리가정에 열매가 맺게 하고, 우리 사회와 나라와 대한민국에 열매가 맺게되는 줄로 믿습니다.
복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샬롬(shalom)이 있는 자입니다. 샬롬(shalom)은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 허물을 덮어줍니다. 하나 됩니다. 긍휼을 베풉니다. 주님이 주신 샬롬(shalom)이 없는 사람은 가면 갈수록 더 갈등하고, 더 미워하고, 더 편 가르고, 사회가 끊임없이 더 조각조각 유리알처럼 끊어지고, 깨어지고, 상처만 남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살면서 부모자녀 간에 더 단결되고, 가정 몇 십 백, 백배 가정이 더 많이 무너졌고, 범죄 더 많이 늘어나고 있고, 자살 더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샬롬(shalom)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피 흘리신 손이 우리 모두에게 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왜 그 앞에 나왔습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승리자인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십자가 위에 피 흘려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도 마지막에 용서해 주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주님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나폴레옹이 말한 대로 나는 칼과 총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이 외로운 센터 헤르나 섬에 갇혀 있지만 예수님은 손에 아무 무기도 갖지 아니하시고 사랑 하나만 가지시고 온 세계를 정복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큰 힘 사랑의 힘인 줄로 믿습니다.
참 승리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용서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참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참 길이 열리기를 원하십니까?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남편을 사랑하십시오. 미운 사람을 여러분의 주변에 하나도 없도록 만드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시오.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친구를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부부간에도 사랑해야 될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부부간에 나와서 미워하고 예배드리면 예배가 상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는 교회 와서 부부간에 나누어 앉는 것이 좋고, 낮 예배는 같이 앉는 것이 좋습니다. 옆에 같이 앉는 게 좋습니다. 새벽기도는 고백하는 시간이니까 비밀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의 비밀을 옆에서 들으면 안 됩니다. 남편의 비밀을 들을 필요 없습니다. 멀찍이 앉아서 스스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낮에는 예배드리는 시간이니까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같이 앉아있는 자리가 더 좋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같이 예배드리십시오. 같이 걸어가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너 누구하고 만약에 불화한 일이 있거든 교회 오다가도 고속도로에서 유턴해 돌아가라. 그분하고 화해하고 예배드리는 게 낫지 그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먼저가 아니고 화해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은 좋은 사람도, 사랑해야 할 사람도 원수 만드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원수 아닌 것도 원수를 자꾸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원수도 사랑해서 이 땅에 원수가 미운 사람도 친구로 만들고, 적도 내동지로 만드는 능력이 샬롬(shalom)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거하면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일을 하려고 하면, 큰 복을 받으려고 하면 화목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는 사람,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기까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주시되 성령이 주시는 최고의 은사가, 만 가지 은사 가운데 가장 귀한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은사 받아도 그것은 넷째 다섯째입니다. 최고의 은사 받으려면 사랑의 은사 받기를 바랍니다. 사랑에 능력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 불쌍한 여인이 병도 고침을 받고, 새사람이 되고, 땀이 안 나오던 것이 땀이 나오고, 생리가 없던 사람이 생리가 생기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몸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장발장 보십시오. 삶에 기적이, 전과자가 시장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모두 다음에는 한번 장발장 보러 가십시다.
우리나라에 참 지금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이 어려운 문제가 너무 우리나라가 감정적이고, 극한 대립하고, 너무 분열된 이 문화가 이제는 고칠 때가 됐습니다. 이제는 여기에서 벗어날 때가 됐습니다. 우리가 몰랐을 때 그렇게 살았습니다. 왜? 우리는 세계에 이만큼 성장한 나라입니다. 10째 가는 나라가 이런 나라는 없습니다. 100째 정도일 때 하든지 200째 있을 때 하던 짓을 이제는 고쳐야 됩니다. 부끄러운 것은 전 세계 분열된 나라가 분단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딱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해도, 허리 잘라진 것만 해도 원통한데 우리끼리도 국회, 정치, 경제, 하여튼 학교, 노조, 어느 분야든지 생명 걸고 싸웁니다. 너 죽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계 들어 보십시오. 2010년 고소고발 건이 우리나라에서 얼마 일어나느냐? 51만4,895건이 일어났습니다. 고소하는 것입니다. 너 저놈 나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1억3천만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1년 동안에 고소고발이 얼마냐 9,200건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구로 말하면 15만건이 돼야 되는 데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냐 말입니다. 150만건이 일본에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는 51만건 입니다.
경찰이 조사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배 아파 못 삽니다. 다 저놈 죽여라는 것입니다. 전부 투서입니다. 고소고발입니다. 그러니 경찰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아무리 많아도 경찰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끼리 왜 이럽니까? 여기서만 싸우는 게 아닙니다. 세계에 나가서도 대판으로 싸웁니다. 아프리카나 유럽이나 남미나 어디 가도, 이제 우리 멈출 때가 됐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함께 잠깐 사는 세상, 우리 자손들에게 샬롬(shalom)을 물려주는 우리 세대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샬롬(shalom) 좀 만드십시다.
이 배후에는 한국교회가 또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대한민국을 갈기갈기 찢어져놓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복 받는 지도자를 내가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일 하는데. 저는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 여성 대통령 다 좋지만 한 가지 좀 걱정되는 것이 아무래도 여성은 약간 마음이 약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보니까 참 고마운 것은 전에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사형언도 받은 미문화원 방화범 배후조종, 그분은 사형을 받은 것입니다. 다 이렇게 품는 것을 보고 아버지 시대 때 그 모든 것을 품는 구나, 호남에 있는 모든 분들도, 호남 영남 다 같이 가야 됩니다. 이 좁은 나라 나누면 안 됩니다. 아멘도 안 하네. 모두 같이 가야 됩니다.
이제는 이제부터는 그러면 안 됩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다해도 하나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화평해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요한일서 3장10절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마귀에게 속하고” 이유 없습니다. 사랑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전서 4장 8절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 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멋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이사야 52장 7절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고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아름다운 발걸음,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평화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자에게는 집에 복이 있을 것입니다. 회사로 가면 회사에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다, 최고의 축복받은 분들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신구약성경에 가장 위대한 사람 다윗은 인물이 뛰어난 것 아닙니다. 가문이 뛰어난 것 아닙니다. 어느 면으로 그는 이 세상에 제일 밑바닥에 있었지만 다윗은 사랑의 사람, 용서의 사람, 어떤 원수도 용서해 줍니다.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미워합니까? 죽이려고 3천명의 군인을, 특수부대를 데리고 다윗을 찾아다닙니다. 그 좁은 나라에 다윗을 포위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는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깊은 굴속에 숨어있는데 사울이 다윗을 찾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아무 데나 볼 수 없으니까 굴속으로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여러분 그 뒤에 다윗이 앉아있었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 않습니까? 그 밑에 신하가 “죽이십시다. 하나님 주신 찬스입니다. 스트라이크가 왔습니다. 기회입니다.”
여러분, 남을 욕하는 것은 기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악마가 주는 기회입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이라도 해를 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 하나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뒤에 옷자락만 벱니다. 사울이 볼 일 보고 밑으로 내려갈 때 “왕이시여, 왕이 조금 전에 내 굴에 오셨습니다. 옷자락을 보십시오. 내가 옷자락을 자르고 왕의 생명을 건들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너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구나. 나는 내가 살려고 너를 안 죽였는데, 너는 원수까지도 너 앞에 온 원수까지도 살려주었으니 나는 그런 사람을 처음 봤다”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원수를 봐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 너는 앞으로 왕이 될 것이고, 너는 잘 될 것이다.” 사울이 그 다음에 또 다윗을 포위합니다. 26장입니다. 하일라산에 숨어있는데 사울 왕이 3천명을 거느리고 또 수색을 합니다. 얼마나 피곤한지 3천명 하고 모두 나가떨어집니다. 정신없이 밤낮으로 산악을 돌고 오르내리고 하니 견뎌날 수 있겠습니까? 나가 떨어져 잡니다.
그때에 다윗이 그 위에 있으니까 아비새를 데리고 직접 내려가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이 가지고 있던 창과 물병을 들고 올라옵니다. 그러고 사울에게 욕하는 게 아닙니다. 참모총장, 경호실장 에게 말합니다. “너, 아브넬아. 내가 조금 전에 너 임금님 있는데 갔다 왔다. 임금님의 창이 있나 봐라. 물병이 있나 봐라. 임금님은 피곤해 주무실 수 있지만 야 이놈아, 너가 인간이냐? 금님이 잘못하면 죽을 수 있었지 않냐. 내가 그냥 올라왔으니까 그렇지 어떻게 될 뻔 했냐. 너 이거 가져가라” 그러고 던져 줍니다. 다윗, 그래서 해 큰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다윗에 대해서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도 중요한데, 다윗의 이 사랑의 스토리, 용서의 스토리를 크게 밑에 까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여러분, 미운 사람 용서해 줍니까? 큰일 하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도 이것 못하면 그 사람 바보입니다. 아무리 높아도 용서 못하면 그것은 바보입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나의 원수를 없이 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품어 안고, “내 잘못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그것은 장발장입니다. 그것은 다윗입니다.
저는 잘한 것 하나 없는데 한 가지 이야기 하나만 간단하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의 일생에 어떤 분들은 목회가 제일 어려움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내 생애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이겁니다.
제가 명성교회를 개척하고 나올 때 있던 곳에서 10년 동안 내가 미사리 쪽에서 목회를 했는데, 그곳에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올 때 저는 비참하게 나왔습니다. 거지 되어 나왔습니다. 나는 그곳에 10년동안 있는 동안 나를 가장 괴롭히고 마음 아프게 했던 분이 있습니다. 하룻밤에 잠도 5번, 6번 깨어나고, 잠도 자지 못하고, 10가지, 20가지 병이되어서 빼빼 마르고, 나는 살 수 없는 위기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지나다가 거기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오는데 주님이 내게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리어카를 끌고 나오는데, “야, 김 목사. 너 그냥 나가지 말고 그 사람하고 화해하고 나가라” 감동이 왔습니다. 내 발걸음을 주님이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것은 안 되는데요. 그것은 안 됩니다. 나 그 사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원수 갚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축복할 터이니 너 용서하고 나가라. 용서해라.” 특별계시 받았냐? 아니 그냥 들은 것입니다. 그냥 제가 여러분 또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천둥 쳤냐 그게 아닙니다.
그냥 그래서 딱 리어카 두고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라세요. 그래서 얼마나 주님 보내서 왔으니까 “아이고, 그동안 내가 너무 잘못, 다 나 때문입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 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기도 해 주고 왔습니다.
여러분, 나올 때에 내가 나를 보면서 너 큰일 했다, 큰일 했다. 너 참 잘했다. 그러고 그다음에 목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생하는 것 참는 것 이것은 쉽습니다. 원수를 향하여 가서 “내 잘못했습니다.” 하고 고개 숙이는 것이 이것은 죽어도 못합니다. 이게 제일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게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를 죽이려고 하는 분에게 가서 “내 잘못했습니다” 말하는 게 이게 제일 어렵습니다.
이것 못합니다. 그러나 하고 나면 그다음 일은 큰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어려울 것 없습니다. 그거 통과하고 나면 다합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이 큰일, 어려운 일, 여러분 장발장 같이 감당하시고, 킴폭 같이 그 소녀가 용서하면서 자기가 복 받는, 자기 몸이 소생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샬롬(shalom)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샬롬(shalom)이 필요한 때입니다.
화목한 성도가 됩시다
마태복음 5:21-26 / 김정호 목사(번동교회)
미국의 시인이자 퓰리처 상을 수상한 카 샌드버그(Carl Sandburg)는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인생의 동전이다. 시간은 네가 가진 유일한 동전이고 그 동전을 어디에 쓸지는 너만이 결정할 수 있다. 너 대신 타인이 그 동전을 써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루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하루가 23시간이고, 어떤 이에게는 25시간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24시간이라는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과 미래가 달라집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계획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10분의 계획이 2시간을 절약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계획에는 목표가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끝내야겠다는 정확한 시간이 들어가면 더욱 더 좋습니다. 조지 버나드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가 찾아서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찾아다닐 것이다.”
며칠 전에는 부모와 형을 연탄가스로 살인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보험금 40억을 타기 위해서입니다. 자식도, 부모도, 형제도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가족도 믿을 수 없으니 누구를 믿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국가, 지역, 민족, 교회, 가정, 개인적으로 싸움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싸움과 분쟁은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합니다. 싸우면서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한 국가와 교회와 가정은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은 무엇보다 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구정 명절을 맞아서 여러분 모두가 화목하기를 바라고 어느 곳에서든지 화목케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노하지 맙시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본질적 차원에서 율법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살인의 근원은 분노이며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지만 분노는 곧 살인인 것입니다. 분노는 어디에서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서 분노는 사라져야 합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분노는 인격적인 차원을 넘어 신앙적인 차원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분노는 불신앙이며 습관성입니다. 분노하는 습관이 반복되면 분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데도 크게 분노하여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의를 깨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인들은 말만 잘하고 행동은 안 해.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뜰 거야.” 이런 말을 듣습니다. 왜 기독교가 ‘말쟁이 종교’가 되어버렸을까요? 기독교 지도자들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이성과 지성이 발달하고 자꾸 논리적이고 이성적, 지성적 설교를 하다 보니 듣는 사람들도 덩달아 이성의 기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굉장히 높은 수준의 신앙이라고 착각들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성과 지성이 발달하면 그것이 믿음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하게 합니다. 자꾸 따지고 회의하고 의심하고 결국에는 포기하게 합니다. 그냥 믿으면 될 것을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원어에 맞추어 보고 무슨 學에 대입해 보고 무슨 설에 비추어 보고 하다보면 점점 이상해지다가 나중에는 ‘믿지 못하겠다’ ‘신은 없다’로 결론이 납니다. 어느 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름조차도 복잡한 사람)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변증법을 정형화한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말장난을 하기 시작하더니 기독교 진리를 엄청 복잡하고 괴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변적 해석은 기독교에 대해 따분하게 느끼던 사람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보이지 않는 한 흐름을 형성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할 것 없이 그저 ‘실천’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종교인데 기독교가 학문적인 연구와 논의와 사변에 빠져 ‘학문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는 공부한 것을 한 가지라도 ‘실천’해야 말쟁이 종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노하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의 이익과 명예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우선이 되고 먼저가 되면 반드시 분노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분노는 믿음과 사랑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병리적인 현상입니다. 분노는 버리고 고쳐야 할 중대한 병입니다. 분노의 병을 고쳐야 살고 행복해집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분노를 잘 하면, 교인 중 한 사람이라도 분노를 잘 하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분노를 잘 하면 모든 행복과 평화와 은혜와 건강한 분위기는 깨지게 됩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은 못 견디고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전도하기도 어려운데 우리의 분노로 교인이 교회를 떠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현상입니까? 이제 모든 분노를 다 버리고 화목하게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욕하지 맙시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하였습니다. 형제를 모욕하게 되면 법정에 설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라가’는 텅 빈, 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하다는 뜻입니다.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 때 쓰이는 욕입니다.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욕입니다.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주는 욕입니다. 인격과 신앙이 부족하면 입에서 욕이 나옵니다. 장난이고 친근감의 표시로 욕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가까울수록 더욱 예의를 지키며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좋은 관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의료 선교사로 반세기를 보낸 슈바이처 박사가 노벨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탔습니다. 이 위대한 성자를 보기 위해 각국의 기자가 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차가 멈추자 기자들이 특실 칸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하지만 슈바이처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소리쳤습니다. “1등 칸으로 가 보십시다!” 하지만 1등 칸에도 슈바이처는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다시 2등 칸으로 갔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투덜거리며 말했습니다. “혹시 다음 열차 아냐?”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혹시나 하고 3등 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3등 칸 안에는 사진을 통해서 많이 봤던 백발의 슈바이처 박사가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어떻게 3등 칸에 타셨습니까?” 슈바이처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 기차에는 4등 칸이 없더라고요.” 이 위대한 성자는 후세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봉사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닫는 사람일 거라는 점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은 그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끝없이 낮아져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결코 남을 헐뜯거나 상처를 주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내 욕심을 채우고 내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상처를 주고 거짓말을 하고 욕을 하고 저주를 하게 됩니다. 남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자기에게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법정에 서게 되고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남을 욕하고 저주하면 자신이 더러워지고 인격이 땅에 떨어지고 신앙은 파괴됩니다. 사람 노릇이 아니며 어디서든지 사람대접 못 받습니다. 누구를 향해서도 욕하지 맙시다. 욕은 생각도 말고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합시다. 욕을 안 할 뿐만 아니라 남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성도가 됩시다. 화목하게 살고 모든 사람을 화목하게 만듭시다. 지옥 백성이 아닌 천국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원망하지 맙시다
본문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본문의 말씀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성전에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르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 성도들은 지체 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일방적으로, 까닭 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힘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인 관계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십자가 신앙이 아닌 몽둥이 신앙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중요하며 가치 있는 것인지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화목한 관계가 예배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웃과의 불화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예배가 드려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는 마땅히 성도와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보이는 화목입니다. 때로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성경을 많이 읽는데, 봉사를 많이 하는데, 직분을 받았는데 화목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화와 불평과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너무 미워서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지면서 화가 나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나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울을 하나 샀는데 불량품이라며 바꾸러 왔습니다. “이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 내 얼굴이 미워도 너무 밉게 보여. 바꿔 줘” 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개그 소재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미워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거울이 불량품이 아니고 진짜 내가 미워도 너무 미운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사람을 붙여 주심으로 나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게 하셨습니다.(마5:5) 어떤 사람이 나에게 들어와 걸림이 되면 얼른 내 영을 진단해 보세요. 그 사람은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청진기이고 엑스레이입니다. 내 영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부분의 걸림이 다른 사람을 통해 투영이 되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의 꼴 보기 싫은 말이나 행동이나 습관이 사실은 나의 것입니다. 내가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워 보이면 얼른 축복기도를 해주고 어떤 사람이 싫다면 선물이라도 주어서 좋아지도록 하고 어떤 사람이 말을 많이 해서 시끄럽다면 내 말수를 줄이고 어떤 사람의 실수가 거슬린다면 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애쓰고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올 때 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면 마귀가 역사하여서 그 사람이 우상이 되고 결국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내 영을 비추어주고 진단해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부모, 자식, 형제, 가족, 성도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좀 불편한 사람은 없습니까? 분명히 풀고 화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원망 받을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누구를 원망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면 내가 불행해 집니다. 원망하지 말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도가 됩시다. 원망을 버리고 감사할 때 화목한 성도가 됩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경우에도 노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언제나 화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마 5:21-26 / 이윤재 목사
오늘은 어버이주일,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떨어져 예배드리다 함께 예배드리니 참 좋습니다. 가족끼리 모여 오손 도손 사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이 “사랑과 용서”입니다. 경남 창원지방법원에 천종호판사가 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습니다. 천판사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가난한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끌려온 비행청소년들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번 영상을 보시겠습니까?(영상).
어떻습니까? 짧은 영상에 나타난 어머니와 아들사이에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술먹고 아들을 때리고 아들은 어릴 때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느 부모와 자녀가 한번도 상처를 주고 받지 않고 삽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자녀만 상처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상처받고 삽니다. 어머니가 술먹고 아들을 때려서 잘못했지만 어머니도 얼마나 상처를 받고 삽니까? 어머니의 상처는 아들에게 이어지고 아들의 상처는 어머니에게 아프게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떠올려야 할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과 용서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사랑하고 용서합니까?
살인하지 말라
문제는 용서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이 문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살인하지 말라” 했을 제자들은 아마 마음으로 안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중 살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인을 쉽게 합니까? 만명중 한 명이나 할까요? 10만명당 한명 할까요? 살인은 극소수입니다. 저도 안했고 여려분도 아마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음의 말씀을 하자 제자들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22절,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처음에 “살인”이야기 할 때 “나는 아니야” 했던 사람들이 “라가, 미련한 놈”하니까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라가”는 히브리말로 “바보, 천치”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다른 사람에게 “바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한번도 “바보”란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점잖게 앉아 계시지만 저는 많이 했습니다. 동생들이 많아 어릴 때 동생들에게 많이 했습니다. “천지, 바보, 멍충이, 미련한 놈”, 일본말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빠가”라고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살인 이야기를 하시다가 언어 문제로 화제를 바꾸시는 것입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살인이라도 생긴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살인의 외적 행위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살인의 내적 동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말 한 마디가 살인은 아니지만 이미 그속에 사람을 죽이는 독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만 사람만 죽이지 않으면 살인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입으로는 화를 퍼붓고 마음으로는 몇 번이라도 사람을 죽였으면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다만 말을 조금 거칠게 했을 뿐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사람에게 욕설만 퍼부어도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죄는 네 단계를 통해 나타납니다. 먼저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얼굴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말로 나타나고 마지막에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말로 나타나면 이미 다 된 것입니다. 말로 욕설을 퍼붓고 악담, 저주가 나타나면 이미 살인이 시작된 것입니다.
충격적인 영상이 있습니다. 대전 한밭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실험한 것입니다. 양파 50개씩을 둘로 나눠 각각 다른 방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각 다른 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클래식음악입니다. 다음은 욕설 녹음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15일동안 계속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15일 후에 비교해 보았습니다. 보시죠(영상).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비록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발육이 다릅니다. 식물이 이렇다면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문제는 분노입니다
문제는 분노입니다. 예수님이 살인이야기 하면서 “라가, 미련한 놈”한 것은 살인의 배후에 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살인입니다. “분노가 살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통찰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심리학자이며 상담가인 미국의 헨리 브란트 박사는 그가 상담한 사람의 문제의 80-90%가 분노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현대로 갈수록 이 분노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에 의하면 분노는 사람을 망치는 가장 큰 흉기입니다. 사람이 분노할 때 위장의 점막은 충혈 되고 운동이 증가되며 위산분비가 많아져서 마침내 위, 장출혈과 궤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대장염의 96%가 분노 때문이라고 합니다. 분노는 혈관을 갑자기 수축시켜 혈압을 올리므로 뇌출혈등의 위험을 가중시킵니다.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존 헌터라는 학자는 어느날 학회에 나가 무슨 발표를 했는 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학설을 공격하자 너무나 분해서 반격을 하려다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원인은 분노로 인한 심장혈관의 순환장애였습니다.
분노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합니다. 분노는 남을 괴롭게 하기 전에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방울뱀은 극도로 화가 나면 제 몸부터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분노가 그렇습니다. 분노는 남을 향해 퍼붓지만 언제나 손해는 자기가 먼저 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잠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운전시비끝에 상대방 차량을 부숩니다.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 말에 격분하여 여자 친구 차를 들이 받습니다.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몸에 불을 지릅니다. 자기보고 어머니가 창피하다고 했다고 집에 불을 지릅니다. 남을 괴롭히기 전에 나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단편 중에 "93"이란 단편이 있습니다. 큰배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의 선창에는 수송용 대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움직이다 보니 대포를 묶었던 쇠사슬이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습니다. 그러니 대포들이 여기 저기 굴러다닙니다. 선원들이 필사적으로 선창가로 내려가 제멋대로 굴러 다니는 대포를 붙잡습니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위험은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남에게 쏘려는 대포가 배안에 굴러다니면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있는 적이 더 무섭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가장 대포가 분노라는 대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가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 다스려야 할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말합니다. 잠16:32, “마음을 다시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자보다 나으니라".
그러면 왜 우리는 분노합니까? 왜 사람들은 분노심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분노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 때문에 내 뜻을 이루지 못해서 화가 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때문에 내 일생이 망가졌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누구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인의 경우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습니다. 때가 되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때 가인이 안색이 변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성경으로 보면 “가인이 화를 내며 심히 못 마땅해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아벨 때문에 자기가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벨만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 제물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은 같습니까? 인격이 다르듯이 하나님앞에서 선 존재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습니까?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다고 아벨의 제사를 받습니까?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모두 개별적입니다.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이렇게 안 살았을텐데”. “우리 부모가 날 잘 가르쳤으면 이렇게 안되었을텐데”. 나이 50, 60이 되어도 부모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못된 것이 조상의 죄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잘못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남의 탓입니다. 강영우는 부모 죽고 눈 멀고 갈데 없어 맹아원까지 갔어도 미국에서 박사되고 백악관에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조승희는 수재들만 가는 콜롬비아 공대 들어갔지만 총기난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누구 때문에 불행한 것 아닙니다. 부모때문에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탓 그만 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람들앞에 나타나기를 좋아하고 우쭐하고 영웅심리로 가득한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어도 싫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100% 만족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나를 내가 지었습니까? 내 기질, 혈액형, 성향, 성격, 내가 만든 것입니까? 아니잖습니까? 잠16:4입니다.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각자 목적에 맞게 지음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뜻이 있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11: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내 멍에”를 원문의 의미로 풀면 “너 자신에게 딱 맞는 멍에”입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멍에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개성과 인간성에 딱 맞는 멍에를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멍에가 가볍고 쉬운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기질, 성격, 혈액형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장점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나의 단점을 통해서도 일합니다. 그러니 내가 나 때문에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화를 낼 그 시간에 더 잘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서 화가 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중에 그런 분이 많습니다. 부부는 가시나무새처럼 늘 붙어 있기 때문에 다툴 기회도 많습니다. 왜 부부싸움하는지 아십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부부는 죽을라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라고 싸운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잘 살아 보려고 하니까 다투는 것입니다. 부부의 문재는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부부의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부부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그러나 사랑할 줄 몰라 이혼한다”. 결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사랑을 배워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에서 어떤 사람을 배워갈까요?
두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과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프롬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을 성숙한 사랑,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을 유아적인 사랑이라 불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숙한 사랑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한 사랑이고 미숙한 사랑은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입니다.
미숙한 사랑 성숙한 사랑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
부부가 분노하고 다투는 원인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할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랑이 아니라 미숙한 사랑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 말을 안 들어주고 자기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때문에 화내고 다툽니다. 이것은 여자보다 남자가 조금 더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나이들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딸, 돈, 친구, 그리고 찜질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나이들어 필요한 것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누라, 아내, 집사람, 애엄마, 와이프가 필요합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가 됩니다. 더 미숙해집니다. 그러니 집에서 남편들을 많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남자들에 대해 아내들은 말로 상처를 많이 줍니다. 대개 화를 잘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뒤끝이 없어요”. 며칠전에도 한 분이 자기는 자주 화가 내지만 뒤끝이 없어서 금방 풀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엽총도 뒤끝이 없어요“. 그렇습니다. 미사일도 뒤끝이 없고 원자탄도 뒤끝이 없습니다. 한방이면 끝납니다. 뒤끝없다는 말을 자랑하지 마세요. 이미 분노가 폭발하여 상대방에게 상처준 다음에 뒤끝이 없다면 무엇 합니까?
예배가 해답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노에서 한 단계 더 나갑니다. 23절입니다.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번에는 예수님은 예배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 예수님은 갑자기 예배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살인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 다음엔 분노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노가 살인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분노와 예배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분노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화목입니다. 26절 보실까요? 마5:26,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이 예배를 말하면서 동시에 “화목”을 말씀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좌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뤘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폴 밀러란 사람이 참 잘 말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분노하고 화내고 다투고 싸울 수 밖에 없는 데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은혜받는 것입니다. 많이 받아야 많이 줍니다. “그 사랑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장 파울 리히터란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도 은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받아 먼저 우리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렇게 계속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차고 넘처 용서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예배하고 용서하기 위해 에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예배하고 사랑하기 위해 예배합니다. 예배는 내가 사랑받는 통로면서 또한 남을 사랑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23절,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어느 교회 장로님이 노회일로 주일날 다른 교회를 방문했답니다. 마침 예배시간에 성찬식이 있었는 데 자리에 앉아 보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장로님이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자리로 떨어져 성찬을 받았습니다. 예배후에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왜 오늘 옆 자리에 계신 장로님과 성찬을 하지 않았습니까?”. 장로님이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그 사람과 예전에 돈 거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직하지 않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멀리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앉아서 성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면 그 분이 가롯 유다보다 못합니까?” 이것이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옆 자리에 앉을까 봐 신경이 쓰여 집니까? 예배는 바로 그 나쁜 감정을 은혜로 치유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적대심을 용서로 바꿔줍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과 용서로 살아가겠습니까?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것이 우리가 가정에서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살아가는 산상수훈의 원리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
마 5:21-26 / 양인순 목사
스티븐 코비는『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책에서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책의 핵심은 ‘중요한 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지 못하면 많은 혼란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일을 해도 정말 중요한 것을 성취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십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사랑에 대해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십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살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가운데 6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창조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가장 무서운 범죄 중의 하나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살인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범죄이기에 살인자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1절에 보시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이것은 구약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진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후에 덧붙인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계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는 살인을 한 일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라고 여겼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십니다. 당시 율법의 견해로는 살인을 하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보다 훨씬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살인을 해석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해석이 바로 22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예수님은 살인이라는 죄의 결과보다 마음의 태도와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의 문자나 형식에 매여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에 자기들은 의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형제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 살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자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가 받는 사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화를 내면 살인자가 받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헬라어에서 '화를 낸다'는 표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dumos)’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orge)’입니다. ‘두모스’는 기분이 나쁠 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빨리 화가 사그라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오르게’는 화를 마음에 담아 두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르게’에 해당합니다. 한 번 화가 나면 그것을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은 화가 분노가 되고, 증오와 미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도록 분노의 감정을 품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에 분을 품으면 마귀가 틈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면 더 큰 미움과 증오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분노의 감정을 마음에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은 관계 속에서 빨리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분노가 점점 확대되어 자신의 인생을 불사르고,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에게 분을 내는 행위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분을 품는 것은 결국 살인죄에 해당하는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을 이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라가’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라가’는 ‘머리가 텅 빈 멍청이’라는 의미를 가진 욕설로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격모독이라는 행위로 발전합니다.
세 번째로,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련한 놈’이란 의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정죄를 넘어서 종교적으로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련한 놈’이란 ‘라가’라는 말보다 더 심한 욕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영역인 심판권까지 남용한 죄를 범한 것으로 영혼의 살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런 모든 것들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형벌로 심판 받게 되고, 공회에 잡혀가고,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점층법적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 죄의 엄중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22절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들로써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화를 내고 분을 품습니까? 그리고 형제, 자매들에 대하여 인격적인 모욕을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남에 대하여 정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해석대로 하면 우리는 엄청난 살인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매일 법정에 불려가 재판을 받아야 하고, 지옥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랑의 사도 요한을 통해 주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분을 내지 않습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 늘 보는 사람, 바로 가장 잘 알고,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분을 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형제에 대하여 분을 내고, 인격적인 모욕을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종교적으로 정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자격미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아멘!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형제에게 분노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예배 이전에 먼저 할 일은 바로 서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우리 안에 형제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나 인격적인 모독, 종교적인 정죄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의를 배격하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저하게 자기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의에 빠졌고, 자기 의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보다 율법의 바른 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느냐에 중심을 두십니다. 결과보다는 마음의 동기와 태도를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자기의 노력과 행위로는 결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선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한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습니다. 예수님 없는 인간의 의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뿐입니다. 내가 너보다 믿음이 좋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느냐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계속해서 용서와 긍휼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 양 같은 존재로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어리석은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순간순간 분노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피해자라고 여기지만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쌍방과실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잘못보다는 상대방의 잘못을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방에 대하여 뭔가 내 마음에 못마땅한 것이 있을 때 화를 내거나 분을 품습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들면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불만이 있기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도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접근하는 방법이 다르고, 믿음의 표현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면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서로의 견해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면 그것은 독선입니다. 자기 아집입니다. 내 생각이나 견해가 소중하면 상대방의 의견이나 견해도 똑같이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 보다는 낫다는 자만심이 화를 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인 이유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인데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남을 미워했습니다. 때로는 화를 내고, 분을 품었습니다. 우리는 들은 이렇게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사는데, 너희들은 왜 그 모양이냐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으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분을 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 앞에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같이 미련하고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더욱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낮출 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또한 우리들이 용서의 삶을 살지 못하면 계속해서 화를 내고 분을 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우리들이 아무리 사랑을 외쳐도 나에 대하여 잘못한 사람, 아픔을 준 사람, 상처를 준 사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진정한 예배자로 살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주님의 사랑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해야 할 사람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분을 품고, 인격적으로 모욕을 준다면 그것은 예수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를 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한다는 것, 용서를 통해 화해를 이룬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용서에 대해서 배우고,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런데 막상 내가 삶 속에서 실천하려면 어렵습니다.
평생 ‘용서와 사랑’에 대해서 연구하고 책을 쓴 풀러 신학교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루이스 스메즈(Lewis B. Smedes)의 체험담입니다.
그는 어느 날 한 경찰관이 뚜렷한 이유 없이 자기 아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분노에 쌓였습니다. 그 경찰관에 대한 분노 때문에 며칠을 집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습니다. 어느 순간 그 경찰관을 용서하지 않으면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재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그 경찰관을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제는 그를 다 용서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후로 루이스 교수는 경찰관을 용서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순찰차를 타고 가는 그 경찰관을 보는 순간 분노가 갑자기 치밀어 올랐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란 루이스 교수는 다시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두 번째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 용서보다는 두 번째 용서가 조금 쉬웠습니다. 이제는 그 경찰관을 다 용서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경찰관이 난폭한 행동으로 해임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복음보다 더 기쁜 소식으로 들렸습니다. 마치 자기가 보복을 한 것처럼 달콤했습니다. 그 때 비로소 루이스 교수는 다시 한 번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다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용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용서는 단 한 번의 기도나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물론 용서하기 위해서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용서의 감정과 느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결단의 용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분노나 미움, 적개심의 감정을 동정과 긍휼과 사랑의 감정으로 바꾸는 것을 “정서적 용서”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머리로 용서해야지 라고 결단한다고 해서, 용서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루이스 교수처럼 다시 그 사람을 보거나 유사한 행동을 하면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솟구칩니다. 용서하기로 결단하기는 쉬워도, 그 마음의 감정과 정서까지 바꾸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머리와 가슴은 그만큼 거리가 멉니다.
2005년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김근태 씨는 그를 고문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를 용서하고 대화합을 했다고 신문에서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는 10여 차례 대공분실에 끌려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라디오 대담 프로에서 이근안 씨가 무릎 끓고 사죄한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 흔쾌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진실한 참회가 있느냐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말이 “용서는 신의 영역이구나” 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자를 향하여 더 진실하게 용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신적인 영역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고통과 상처를 내려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진정한 용서의 삶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율법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하셨습니다. 살인의 결과보다 마음의 동기와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를 향하여 분을 품고, 인격적인 모욕을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정죄하는 것이 바로 더 무서운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려다가도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용서의 삶, 화해의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 예배는 형식이요 가식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까지의 용서는 머나먼 거리임을 알았습니다. 교육 이론에 의하면 새롭게 배운 지식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 지식의 내용을 이백 번쯤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내게 상처와 모욕감을 준 사람을 용서하며,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기나긴 사랑에로의 여정입니다. 어쩌면 용서는 하나님의 영역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용서에로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너희를 사랑으로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용서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멀지만 한 번, 두 번 계속 반복하면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집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흐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찬양 사역자로 일하시는 최용덕 씨가 있습니다. 이 분이 한번은 후배하고 아주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결국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저를 전도했는데, 내가 저보다 더 나은데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후배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며 나에게 어떤 선배님이신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선배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하세요. 그래서 두 사람은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최용덕 씨는 눈물로 찬양을 지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의 가사입니다. < 오늘 나는> 이란 복음송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짓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 주님께 맡긴 채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화해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사랑할 때는 온 우주를 다 담아내지만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사로잡으면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옹졸한 모습입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이기심, 나의 교만함 때문에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내가 먼저 용서를 선포하고, 내가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는 화해자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예배자입니까
마 5:21-26 / 오정호 목사
인생은 관계입니다(Life is relationship). 관계(關係)에서 실패하면 인생의 한 부분을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부를 실패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나 많은 부를 소유해도, 부부(夫婦)간의 관계, 부자(父子)간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그 인생은 깨어진 인생이 됩니다. 그 관계가 금이 가면 삶에 금이 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복 주심을 바탕으로 ‘관계 회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산상수훈(山上垂訓/마태복음 5~7장)은 천국시민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 천국 백성된 우리들은 적어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나은 의(義)가 있어야 함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의는 기본으로 하고, ‘삶의 의’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삶으로 반드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7禍章)에서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일곱 번이나 “화(禍)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십니다(마 23:13, 15, 16, 23, 25, 27 ,29).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義)는 ‘겉꾸밈의 의’였습니다. 그들의 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의로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웃의 행복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한 단계 더 높으려면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야 됩니다. “이 일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하냐?” 는 질문에서 “이 일이 나의 의로운 생활에 도움이 되는가?”로 바꾸어야 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느냐?”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어떻게 생각하실까”란 차원 높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의가 결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아질 수가 없으며,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3단계와 인간관계를 세우는 2단계를 통해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기 위한 삶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참 예배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반듯합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Ⅰ.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3단계
1. 분노(21-22절).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21-22절). 사람들은 결과를 보지만 주님은 먼저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보십니다. 우리는 출발과 과정이 모두 좋아야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특히 화병(火病)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아예 그 근본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분노가 계속 쌓여 나중에 폭발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4:26~27). 분(憤)이 발전하면 죄를 짓고 나중에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마음의 분노는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고 말씀 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분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사단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분을 품는 것은 사단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은 것과 똑같습니다.
2. 욕설(22절)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22절). 마음의 분노가 있으면 입술로 표현됩니다. 표현되는 것은 다시 주워 담기가 너무 힘듭니다. 우리가 인간관계 가운데서 많이 상처받는 이유는 말 때문입니다. “라가”라는 말처럼 비하하는 말,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말들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3. 저주하는 마음(22절)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하리라”(22절). 욕은 속에 있는 분노가 튀어나오는 것인데, 저주는 심층에 쌓이는 것을 말합니다. 적어도 ‘라가’라 하는 말로 욕하는 사람보다는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강도가 더욱 센 표현입니다. 상대를 저주하는 마음이 가슴에 꽉 자리 잡게 되면, 저주 받는 사람, 저주 하는 사람이 동시에 그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Ⅱ. 인간관계를 세우는 2단계(참된 예배자로 서라)
1. 형제와 화목하라 - 먼저 가서!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3-24절). 대적들이 아닌 가까이 있는 형제 곧, 가족이나 믿음의 동료들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게 하는 은혜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생각을 무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존재인 우리는 생각한 연후에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예배보다 형제 화목이 우선이란 말은 우리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배를 정성 다하여 드리기에 앞서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시간적인 면과 태도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가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꺾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예배당 안에 있는 종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하게 삶으로 반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됩니다.
2. 원수와 화해하라 - 급히! (25절)
“너를 송사(訟事)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화해)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25절). 원수 곧, 교회 밖의 대적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시간을 놓치지 말고 급히 화해하란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재판관도 있지만 화해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은 양심의 재판관이 우리에게 중한 벌을 내립니다.
최근 보상비 분배 때문에 ‘무너지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산신도시 개발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유산 분배없이 토지주가 작고한 일부토지의 경우 상속권자들의 동의서가 있어야 보상비가 지급되지만 형제간 서로 많은 금액을 차지하기 위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해 시행사측의 공탁등 강제집행 대상이 되는 등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변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부모의 막대한 보상비 수령에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보상지역 마을에 주말이면 최근 들어 고급차량을 탄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왕래가 뜸했던 자손들이 주말마다 찾아와 지극한 효도를 하는 등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는 전언입니다.」가족이 원수가 되는 형국입니다. 가족간의 우애와 미덕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돈과 탐욕에 휘둘리는 이 시대의 모습은 결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뉴욕의 WTC(World Trade Center)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진 9.11일 일어난 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쳤을 때 그날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삶을 정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순간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희생자들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필사적으로 하려고 했던 것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거듭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합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딸도 정말 사랑합니다. 그 애 좀 잘 돌 봐줘요.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합니다.”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동일하게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하지 못하는 걸까요? 평소에 함께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에 사랑의 말과 사랑의 손길을 나누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합시다.
명절(名節)은 인간관계의 회복의 기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파괴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명절을 맞이하기 전에 미리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적어도 베풀어야 되겠다는 마음, 나를 존중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화목이 싹틉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한국 교회의 병폐 중 하나는 이원론(二元論)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불일치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수반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윤리를 동반한 믿음이어야지, 관계가 깨어진 믿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예배는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참 예배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되 결코 이웃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중심을 새롭게 세웁시다. 예배와 삶의 일치를 도모합시다.
우리 믿음의 가족들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분노, 욕설, 저주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서의 은혜를 체험합시다. 성령께서 화목케 하는 은혜를 주셨을 때에 시간과 태도에서 주도권을 잡아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급히’ 원수와 화해하는 ‘화목의 통로’로, ‘참된 예배자’로 우리 자신을 세웁시다.
먼저 가서 할 일
마 5:21-26 / 김경년 목사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크고 한 마리는 작았는데, 그 주인은 지혜로운 사람인지라 금붕어에게 먹이를 조금씩 주었습니다. 한번은 큰 금붕어가 ‘저 작은 금붕어가 없으면 내가 배부르게 많이 먹을 수 있을 텐데, 저 놈 때문에 내가 배고파서 못살겠다.’ 생각하고 그 작은 금붕어를 물어 죽였습니다. 이제 주인이 주는 먹이를 자기 혼자 배불리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작은 고기가 죽어서 썩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썩은 물고기에서 심한 냄새와 악취와 독이 품어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물을 먹은 큰 금붕어도 얼마 못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남을 낮추면 내가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또한 남을 죽이면 내가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깍아 내리면 내가 높아지는 줄 아는데 오히려 동반추락입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높고 깊은 내용의 말씀을 하셨지만 때로는 아주 평범하고 실제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평범하고 쉽고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첫째 형제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했고 둘째 형제에게 욕을 하지 말라고 말씀했고 셋째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형제를 위한 것 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손해는 자기가 보는 것입니다. 형제를 욕하면 결국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면 자기 손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라고 했습니다.
즉 구약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살인하지 않으면 다 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본문 22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심판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살인의 원인은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화를 내고 분을 품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화를 냅니다. 우리가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거나 손해를 당할 때 우리는 쉽게 화를 냅니다. 이성을 잃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를 잘 내며 잘 떠드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남의 차가 내 앞을 가로지른다고 화를 내며 욕을 퍼 붓기도 합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길가에서 화를 내며 욕을 퍼 붓기도 합니다. 자식이 조금 잘못할 때 부모가 화를 내고, 부모가 조금 잘못할 때 자식이 화를 내고, 남편이 조금 잘못할 때 아내가 화를 내고, 아내가 조금 잘못할 때 남편이 화를 냅니다. 시장에서도 화를 내고. 식당 안에서도 화를 내고. 목욕탕 안에서도 화를 냅니다.
예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재판을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어느 도시, 어느 성을 가든지 거기에는 7명의 장로로 구성된 지방 재판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그 지방 재판소에서 받는 심판을 말합니다.
신명기 16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각 성마다 7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하나의 지방 재판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만약 형제를 향해서 분노하는 사람마다 이런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형제를 향해서 분노한다고 해서 지방 재판소에 끌려가서 심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향해서 마음 속에 분노를 품기만 해도 이러한 재판소에 가서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노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라고 말씀을 한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분노함이 이미 화살을 당긴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고 했습니다.
일본의 어떤 과학자가 사람을 화를 내게 만든다음 사람의 체내에 있는 액체를 뽑아 짐승에게 투여했더니 그 짐승이 죽었다는 재미있는 연구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만큼 노하면 무서운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에게 분을 품고 있다가 그 독이 온 몸과 얼굴에 나타났고 그래서 살인죄를 범했고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5-7).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인간은 모두 별 차이 없는 별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분노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나 화가 나고 분노를 품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인정할 때 분노가 좀 사그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분노가 좀 사그라질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무시와 멸시와 적대를 당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분을 품지도 않으셨고 입을 열지도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욕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 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분노가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욕이 됩니다. 여기 라가라는 말은 속이 텅 빈 놈, 쓸모 없는 놈, 별 볼일 없는 놈 이란 뜻입니다. 남을 멸시하는 말입니다.
또 여기 미련한 놈이란 말은 말 그대로 미련한 놈이란 말입니다. 즉 어리석은 놈, 바보 같은 놈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증오와 멸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욕들을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욕을 하는 것은 결국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범한 것이 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형제나 이웃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할 뿐 아니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까지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예 살인죄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즉 남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비웃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명예를 살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설하는 사람들은 공회에 잡혀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공회라는 것은 70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최고 법정을 뜻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판결하는 재판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생명은 고작해 봤자 100년 미만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명예라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100년 못지 않은 육신을 죽이는 살인보다도 영원한 사람의 이름, 그 명예를 살인하게 되는 것이 더 큰 살인이 된다고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라가라 하는 사람은 바로 살인 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남의 명예를 살인하고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도 얼마나 큰 죄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명심하고서 결코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믿음위에 온전히 거하여만 할 것이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남의 명예를 높여주고 남의 권위를 인정하고 남의 인격을 높여 줄 수 있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또 이런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지옥불이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게헨나”(Gehenna)를 말합니다.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뜻합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가면 거기에 힌놈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은 쓰레기를 불태우는 불길이 하늘을 향해 항상 치솟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가장 흉악한 범죄자를 처리할 때 그 불 속에 집어넣는 일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어린 아이들을 잡아서 우상신 앞에 바칠 때 그 골짜기에다 아이들을 갖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에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항상 하늘을 향해서 치솟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힌놈의 골짜기, 게헨나를 바라보면서 지옥을 설교하셨던 것입니다. “이 범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저와 같을 것이다”
지옥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형제를 향해서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마다 바로 그 게헨나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 골짜기에 가서 태움을 받아야 할 그런 범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께서 경고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말을 조심할 것을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나 욕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 했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이 온 몸을 어거하고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자꾸 욕을 하면 몸도 욕하는 몸이 되고 사람도 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입에 재갈을 먹여 온 몸을 어거하라"(약3:3) 고 했습니다. 결국 욕하는 말을 삼가고 금하라고 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입으로 형제를 욕할 때 결국 형제와 불화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불화했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불화했습니다. 아니 유대인들이 유대인들과도 불화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역사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형제와 이웃은 본래 사랑과 화목의 대상이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미움과 불화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미워했고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고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랍 사람을 미워하고 파키스탄 사람이 인도사람을 미워하며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을 미워하고 우리나라가 북한 사람들을 미워하여 서로 관계가 불편한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한 집안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미워하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미워하여 불화한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로 미워하고 서로 불화하다가 형제와 이웃과 부모와 자식을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시기도 했고 이방인 여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도 했고 로마 군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도 했고 세리와 창기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 가든지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했습니까? 형제와의 불화를 풀고 화목을 이룰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제와의 화목을 이룰 때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때문입니다. 화목을 이루려면 적극적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발로 찾아가고 손으로 악수를 해야 합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없습니다. 예배가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곳이 가정이든지 교회이든지 나라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미움과 욕과 불화가 있는 곳에는 지옥이 임하고 용서와 감사와 화목이 있는 곳에는 천국이 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서와 감사와 화목을 조금씩 실천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합니까? 형제와 이웃을 향한 욕이 입에서 튀어나옵니까?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는 길입니다.
분을 삭이고 용서와 너그러운 마음을 품도록 하십시다. 욕을 하는 대신 감사와 칭찬의 말을 하도록 하십시다.
불화를 풀고 발로 찾아가서 손으로 악수하며 교제와 화목을 이루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제와 화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게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하십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화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기를 넘기면 넘길수록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푸시기 바랍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목숨이 붙어 있을 때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화해할 시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사역자 가운데 최용덕씨가 있습니다. 이분은 많은 찬양을 작곡 작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후배하고 아주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결국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저를 전도했는데 내가 저보다 더 나은데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후배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며 나에게 어떤 선배님이신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선배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하세요. 그래서 두 사람은 화해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최용덕씨는 눈물로 찬양을 지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의 가사입니다. (오늘 나는)
1절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짓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미길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수 없는 이 마음 주님께 맡긴채로
2절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 마음 주님께 맡긴 채로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
마 5:21-26 / 박기완 목사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끼어 들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분노가 생기죠....
분노(憤怒)가 무엇인지 사전을 찾아보니까... '분하여 몹시 성을 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생기지만 참고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욕을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창문을 열고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욕을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차를 막아 세워 놓고는 한 바탕 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여자인 경우에는 "집에서 밥이나 하라!"고 욕을 해서... 어떤 초보 여성 운전자가 뒤에 그렇게 써 붙였답니다. "밥하고 나왔음!"
운전을 하는데도 사람들은 자주자주 분노를 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분을 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세히 살펴보시면.. 주님은 분을 내는 것과 살인을 하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죽이지 않는 이상 자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살인죄를 엄하게 다루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 분의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목구비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본성의 많은 점을 우리에게 이양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는 자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9:6절 말씀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살인을 엄하게 다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나 청중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나는 살인을 한 일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은 귀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앞 부분에는 반드시 "가라사대"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신적인 권위를 가리킵니다.
본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은 바로 "가라사대"와 같은 뜻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굉장한 선언입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웠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배웠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제 이 계명에 들어있는 참 뜻을 너희에게 설명해 주겠다!" 그런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을 주시고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그 분이 직접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계명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이제 밝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지금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가 받는 사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면 살인자가 받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는 욕설을 하는 자는 살인자가 받는 공회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향해서 미련한 놈이라고 모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화를 잘 냅니다. 욕을 하는가하면 분을 발합니다... 너무 흔히 있는 일이라서 죄라고 여겨지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살인죄와 같은 것이다....
헬라어에서 '화를 낸다'는 표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라는 말입니다. '두모스'는 가랑잎이 활활 타다가도 금방 꺼지는 것처럼... 기분이 나쁠 때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끈 화를 냈다가 스르르... 하고 그 화가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르게' 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한번 화를 냈다 하면 그 화를 마음에 담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쌓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분노를 마음에 쌓아가면서 그 분노가 증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마음에 꼬옥 저장이 되고.. 계속해서 쌓여지는 집니다. 마음에 이런 바탕이 깔려있으니 그 사람을 대할 때 좋은 시각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말을 해도 험악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마음에 분노가 쌓여있기 때문에.. 그를 대할 때마다 좋은 것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가'라는 욕설을 하게 됩니다. '라가'라는 말은 "이 머리 빈 깡통아!" 그런 뜻입니다
"이 꼴통!" "이 무식한 놈!" "이 곰탱이!" 이런 말입니다. 이런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에 미움이 섞여 있다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말이 좋게 안 나가는 것입니다. 말로써 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머리 빈 깡통아!... 곰탱이처럼 미련한 놈아!" 그러면서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자체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향해서 마음 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살인하는 행위요, 형제를 향해서 말속에 분노를 담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먼저 주시하십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서 피를 흘려야 살인인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에 칼을 들기 전에 벌써 분을 품고... 마음 속에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살인한 자와 똑같이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역대상 28:9절에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6:2절에서도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그랬습니다.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지... 나는 의롭다!"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있으면... 하나님은 벌써 살인한 사람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15절 말씀에는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단 말입니까?....
멀리 있어도 우리의 생각을 통찰하시고...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읽으시는 그 하나님의 눈을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분노가 생기지 않습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 늘 보는 사람... 이런 형제에게 분노가 생깁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분노를 가진 자는 예배드릴 자격도 없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23절 말씀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그랬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형제에게 분노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으면 나도 너를 용서치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분노부터 먼저 해결하고 예배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 그 차체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노가 우리의 마음에 있다면... 예배가 예배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겠습니까?...
1. 자기의 의를 배격하라!
첫째로, 자기의 의를 철저히 배격해야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자기 혼자서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어야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나의 의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절 말씀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그의 의를 의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마27:35).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요, 불의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용서받은 죄인이요,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분노가 생기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저 사람에 대해서 뭔가 내 마음에 못마땅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 앞에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의롭단 말입니까?.. 다 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분노가 생기는 것은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자만심... "최소한 나는 이 정도면 됐지!" 라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하고 더 낮아져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의 환경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분노는 가라앉게 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14절에서...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 주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신다" 그러셨습니다.
마태복음 18:35절에서는 용서할 때 중심으로 용서하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6:37절에 보면, 비판할 일이 있음에도... 정죄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친히 모든 인간을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고(롬3:25), 우리에게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5:18).
우리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화목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아군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찾아오도록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야 합니다. 제일 아름다운 만남은 서로 찾아가다가 중간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2. 말을 조심하라!
둘째로, 분노했을 때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언 15:1절 말씀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그랬습니다.
대부분 분노가 걷잡을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과격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가 났을 때 더욱 냉정해져야 하고 우리의 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말을 적게 하고... 입을 다문 채로 참는 것이 낫습니다.
화가 났을 때 욕설을 퍼붓거나 기물을 파괴하는 방법 등은 결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심을 믿고 좀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만나도 잘 인내하고 용서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9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분노의 감정이 들끓을 때마다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3.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
셋째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화가 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을 더디게 만들어 줍니다.
잠언 16:32절 말씀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랬습니다.
또 잠언 14:29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1:19∼20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그랬습니다.
어떻게 성내기를 더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져서 절제의 고삐로 분노의 감정을 꽉 묶을 때 성을 내더라도 더디 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분노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우리의 감정을 분노의 노예로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뿐아니라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분노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갈5:22∼23).
4.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
넷째는, 문제를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용서의 복음, 화해의 복음, 능력의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의 분노의 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 분노의 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무디 목사님이 미국의 중서부의 한 도시에서 큰 전도집회를 열었습니다.
집회에 앞서서 며칠 전에 도착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일제히 조간신문에 "교만한 전도자 무디" 라고 헤드라인 타이틀로 나왔다고 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바쁘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들이 화가 나서 악평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무디의 참모들이 분노를 발하며 목사님 앞에 신문을 가지고 와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신문기사를 쭉 읽어보시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들 사람 잘못 봤구만, 나는 이 신문기사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해.... 나는 훨씬 더 교만하다고... 이 정도면 잘 썼구만!"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겸손하라고 준 신호이니 더 기도하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성령이 충만한 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며, 누구를 비웃으며, 누구에게 화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한나가 원통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풀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갖히게 됐을 때.... 찬양과 기도로 마음의 분노를 풀었습니다.
괴로울 때...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찬양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노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참 해방을 주십니다.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한나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찬송과 기도를 드릴 때,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려졌습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들까지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분노가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분노를 살인죄와 똑같이 취급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까?...
삭이지 못하는 분노....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분노.... 마음의 밑바닥에 쌓여있는 분노...
그 모든 미움과 분노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하고 받아주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하십시오...
그래서 오해와 미움과 분노 대신에....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충만해서... 우리의 예배가 주님께 상달되고... 평안이 넘치며..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 속의 살인
마 5:21-26 / 이정선 목사
어떤 사람들, 특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위나 말씀은 자기들이 알고 지키는 율법의 조항들과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바쳐서 지켜야 할 율법인데, 그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반대를 하게 되겠지요. 이것이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일반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율법이나 선지자, 즉 모세나 선지자들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치 자기들이 기준인 것처럼 행세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된 율법을 완전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율법이 불완전해서 그것을 완전케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완전케 한다는 말은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이 완전하게 그 역할과 의도가 성취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중요한 하나의 언어습관, 혹은 사용법을 발견할 수 있군요. 그것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모세나 선지자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듣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마 7:29).
이러한 언어의 사용이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라고 더 확신하게 되었겠지요. 서기관들이 권위를 갖는 것은 율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권위는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명을 소지한 사람이 왕의 권위를 갖지 않습니까? 아무리 불만이 있고 못마땅해도 “어명이요!” 하면서 그 노란 족자를 착 펼치면 누구나 그 앞에 바짝 엎드리지 않던가요?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이라는 권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이라는 권위를 잘 써먹고 있었습니다. 어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누구나 자기 앞에 엎드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썩 좋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자기 것도 아닌 권위를 가지고 마치 자기 것처럼 잘 써먹었단 말이죠. 사실 서기관들의 실패는 율법을 존중하고 율법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자기들의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율법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들이 다 존경을 받아먹은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얼마나 거만하고 겉치레에 치중했는가 하면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긴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하게 걸으며 허세를 부렸습니다. 교만하고 권위를 내세우고 대접받기를 좋아했어요.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막 12:38-39)고 하셨어요.
어쨌든 서기관들이 율법의 권위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백성을 가르친 것에 비해 주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것이 옳다... 율법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건 잘못되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다. 이것이 옳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이런 식입니다. 왕의 권위는 어명이 적힌 종이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어명의 권위가 왕의 권위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왕은 어명보다 더 높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명을 전달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명을 발하는 왕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듣기에는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 높으신 서기관 나으리들이 말하는 방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높으신 서기관들은 얼마나 열이 받겠어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한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을 봅시다. 먼저 살인에 대한 계명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즉 옛날 모세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계명에 의하면,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 즉 재판을 받게 된다고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 십계명의 여섯 번째 조항을 보면 그냥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 살인하면 재판을 받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살인자에 대한 재판을 언급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은 도피성으로 피난을 갑니다. 피해자의 직접적인 복수가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가족이 그 살인자를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의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면 그런 사람을 보호하는 성이 있었는데, 그리로 도망쳐서 숨어 있다가 정당하게 재판을 받아 진실을 밝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살인하면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살인에 대한 죄값은 사형입니다. 그래서 살인하면 사형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율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만일 그 율법을 어겼다면 죽음이라는 죄값을 받는 것이 너희가 알고 있는 율법 아니냐? 그런데 내가 말한다.” 즉 살인에 대한 율법을 완전케 하시겠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여야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율법인데, 주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살인하는 것은 똑같다는 거예요. 분노를 품는 것은 즉 살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분노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체계는 우리의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우리의 생각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상범이라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 사상체계가 그 사회에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제로 그 사상 자체를 금지하는 법을 일부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형사에 관한 법은 우리의 행위를 다룰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다면 법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고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한 상태만 가지고는 죄가 성립이 되지 않고 벌을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마음 속으로 죽이기로 하고 미워하고 화를 냈어도 실제로는 그 대상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행위만을 통제하는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영혼이 정결케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율법을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만 한정시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내신 하나님 자신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내가 준 율법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주님 말씀이 이거 아니에요?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으로 보면 형제를 미워하고 그에 대해서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죄도 되지 않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미 살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피를 흘리고 치고 박고 싸우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라는 계명이란 말이지요.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공회에 잡힌다는 것 역시 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살인죄라는 것이지요. 라가라는 말은 바보, 멍청이라는 뜻입니다. 또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바보 멍청이라는 말은 우리 기준으로 보면 욕도 아닙니다. 사실 그만큼 우리의 언어 속에 심한 욕설이 많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참 우리 한국 사람들은 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욕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는 뜻 아닙니까? 뭐 예쁘고 좋아서 욕한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욕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증오요 분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실제로 칼로 형제를 찔러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에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이 그렇다는데,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논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분노나 증오, 범죄를 감추고 얼마든지 눈에 보이는 선행과 종교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는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곱게 치장하고 화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요.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칭찬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방법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안 통한다는 거예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 드리는 것 중단하고 먼저 가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한 후에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형제에게 못할 짓 해놓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안 받으시겠다는 거예요. 그런 제사 백번 드려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못할 짓 해놓고, 형제를 증오하고 그에게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 즉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하는 죄를 저질러 놓고, 즉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종교적인 의무,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외면의 형식과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완전케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업현장에서 사용자가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것이 흔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큰 공장을 운영하면서 어린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원망들을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교회에 가면 장로요, 재정위원장, 선교위원장 같은 중요한 직책도 많이 맡고 헌금도 많이 하고, 그래서 존경도 많이 받겠지요? 믿음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에 갇혀서 속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기준으로 재고 적용하면서 그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자와 길에 함께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는 말씀은 그나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군요. 길에 함께 있다는 것은 시비를 가리기 위해 법정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 9:27).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이지요. 오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마음 속으로 살인하고 있는 죄를 깨닫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칼로 찌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몰라서 구원을 얻지 못했었다면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분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형제 자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음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거짓과 미움의 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숨어서 죄악을 즐기는 안전한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음 속의 살인이 얼마든지 용납되고 허락되지만, 우리 주님이 완전케 하시는 율법에 의하면 마음 속의 살인이나 마음 밖의 살인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의 시민들은 마음 밖의 살인만 저지르지 않으면 모범시민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 속의 살인까지 저지르지 않아야만 하나님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기준에 맞추어 놓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에 따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먼저 할 일 먼저하라
마 5:21-26 / 곽선희 목사
어렸을 때 시간이 있을 때 마다 할아버지를 붙들고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할아버지도 밑천이 없어서 가끔 보면 이야기 한 것을 또 하고, 또 하셨습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가 시작이 되면, 나는 중도에 그것은 들은 것인데, 다른 것을 들려달라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니 할아버지 말씀이 좋은 이야기는 들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 의가 좋은 두 형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이가 좋아서 그 의가 좋기로 소문난 두 형제가 있었는데, 어떤 날 둘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발에 채이는 돌을 보니, 특별한 돌 같이 보여서 그것을 동생이 주워서 보았더니 금덩어리였습니다. 주먹만한 금덩어리를 얻었습니다. 이 노다지를 얻고 그는 너무 좋아서 기뻐 할 때 형님이 “그것 나 좀 보자.” 형님이 들고 이리 저리 만져보면서 하는 말이 “자, 이만하면 우리는 이제 고생은 면한 것 같다. 어쩌면 우리 둘 다 한 평생 먹고 살만큼 재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랬습니다. 동생이 불안해서 “그거 나좀 봅시다.” 동생에게 넘어갔습니다. 좀 있다 형이 “나 좀 보자” 이 금덩어리는 동생에게 왔다. 형에게 왔다 했습니다. 가다가 강을 만났습니다. 나루를 건너게 될 때에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형이 그 금덩어리를 물 속에 덤벙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펄쩍 뛰면서 “아니! 그건 내가 주워서 내 것인데, 왜 형이 물에다 던지냐고……” 그 때 형이 말했습니다. “그 금덩어리가 내 손에 있을 때에는 욕심이 생기고, 네 손에 있을 때에는 미움이 생기더라. 우리 둘이 생각하고 볼 때마다 서로 사랑했는데, 그 금덩어리가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물에 넣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화목이 좋은 줄은 압니다. 그러나 화목을 깨뜨리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화목하지 못합니까? 무엇이 작용해서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싸워야 합니까? 불화의 원인을 진실하게 정직하게 과감하게 물 속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어야 비로소 참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를 그대로 놔두고 악수한다고 화해가 됩니까? 같이 간다고 화해가 됩니까? 아니 한평생을 같이 살아도 그것은 남남입니다. 화해는 없습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말씀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부보다 화목이 먼저다.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를 만들었고, 온 세계를 어지럽혔습니다만, 지금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이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변증법적 유물론은 진화론에 근거합니다. 다윈의 진화론, 그는 동물의 생활 속에서 이 철학을 발견했습니다. 동물로부터 배우고 사회로 옮겨서 사람도 마찬가지 동물이다. 결국 사회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뭐, 간단합니다. 이 원리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세상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존 경쟁입니다. Struggle for existence.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모두는 살기 위해 싸운다. 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 아니 죽여야 내가 산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 입니까? 내가 살기 위해 저를 죽여야 하고, 어쩌면 저가 죽어줘야 내가 산다. 이런 이론입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데, 그 주인은 지혜로운 사람이라서 금붕어에게 먹이를 많이 주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주었는데, 이 큰 금붕어가 생각하길, ‘저 작은 금붕어가 없으면 내가 배부르게 먹을텐데……저 놈과 나눠 먹으니 내가 배고파서 못살겠다.’ 그래서 어느날 큰 금붕어가 작은 금붕어를 물어죽였습니다. 이제는 주인이 주는 먹이를 자기 혼자서 먹을 것이라고 했는데, 작은 물고기가 죽어서 썪었습니다. 썪어서 냄새를 발하고 독을 발했습니다. 그 물을 먹고 큰 물고기도 죽고 말았습니다. 저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남을 낮추면, 내가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을 하곤 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남편을 깎아 내리면, 내가 올라갑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애들이 공부를 좀 잘 못하면, 용케 네 아빠 닮았다. 이럽니다. 또 아버지는 네 엄마를 닮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가는 줄로 알고 있는데, 동반자살입니다. 같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미워도, 고와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올려야 합니다. 남편을 높여야 아내도 올라갑니다. 아내를 높여야 남편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교육의 기본입니다. 상대방을 높이면 다같이 올라갑니다. 깎아내리면, 다 끝나고 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가 살아야 내가 산다고… 제가 간혹 북녘땅에 갈 때마다 사람들은 묘한 심정으로 저를 대합니다. 저는 주러갔고, 저들은 받지 않습니까? 여하튼 많거나 적거나 나는 주는 사람이고 저는 받는 사람입니다. 조금 부끄러워 합니다. “무엇하러 또 오셨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한마디 합니다. “무슨 대단한 성자가 되어서 당신들을 도우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게 아닙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망해야 살 줄 알지만, 나는 다릅니다. 당신이 살아야 우리도 삽니다. 당신들을 살려야 나도 삽니다. 그래서 나 살자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해보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를 살리고야 내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먼저 화목하라. 이것 프로토스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프로토스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First라고 합니다. 첫째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가 문제가 아니고 그 속성적으로 근본이요, 먼저 첫 번째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보다 최우선, 그런 의미의 첫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무엇보다 먼저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먼저. 기도하는 것 보다 먼저. 예배하는 것보다 먼저. 화목하라. 화목이 먼저입니다. 화목이 없는 예배, 화목 없는 제사, 화목이 없는 기도. 소용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화목의 근본 뜻을 생각해봅시다. 화목을 대단한 선행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화목이라는 것은 기본입니다. 화목을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목은 존재의 의식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성경에 ‘형제를’ 이라고 했습니다. 아델포스. 형제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의 별명이 형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다 형제, 자매. 아래 위도 없습니다. 남자 여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형제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모두가 형제로 정해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형제란 무엇입니까? 한 아버지가 있고,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입니다. 한 아버지의 한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이것은 숙명적인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형제가 된 것입니다. 무슨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고 나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형제라는 뿌리가 형제를 만든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형제입니다. 그래서 기쁨도 하나요, 또 형제이지 때문에 슬픔도 하나요. 저가 살면 나도 살고 저가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저가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이것은 숙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기에, 똑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형제라는 말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젊은 신학자였던 본 훼퍼의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형제가 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얼마 가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들려지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잘 들어두십시오. 형제와 불화해서 이제 형제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안 듣기로 결심했습니다. 멀지 않아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93세가 된 유명한 교수 피터 드러커가 말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첫 성품, 첫 속성,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그 기쁨을 내가 함께 하는 것이, 이것이 지도자의 제 1조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면, 근본 운명이 빗나가는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할 때에 나는 벌써 자녀가 아닙니다. 형제 관계가 깨질 때에 하나님 앞에 나는 벌써 하나님의 자녀됨을 상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은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하면 깨지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말했습니다. 분노하고, 라가라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보통 있는 일입니다. 미친놈이라고도 하고, 망할 자식이라고도하고 문둥아라고도 합니다. 편히 쓰는 말 같은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말이 축복이 되고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내 귀에 들리는 대로 행하리라.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니라. 말조심해야 합니다. 한 순간의 말, 그 말 그대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아무 생각없이 한 부당한 말 한마디가 하늘 안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를 낸다. 그래서 내가 심판 주가 되는 것이요.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이요. 나는 형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높은 위치에 서서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라가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 말입니다. 이것은 이제 너는 구제불능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너는 선한 일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요즘 말로 말하면, 배냇병신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고치지 못할 영영 구제불능이라고 말을 하는 욕설입니다. 이것은 절망하는 욕설입니다. 이것은 인격살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흔하게 쓰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축복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지혜에 반대가 미련함입니다. 미련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이제 끝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의 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명예 살인행위입니다. 명예 살인행위. 그래서 이렇게 상대방을 심판해 버릴 때, 형제를 심판할 때 오늘 성경은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지옥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살인행위니, 사람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명예를 죽이고, 인격을 죽이고, 운명을 죽여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돌아섰는데, 뒤를 보니 이 사람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상태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남을 원망하는 것도 죄이지만, 원망을 듣는 것도 죄입니다. 이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잘했다고 하겠지요. 아닙니다. 나는 정당하다고 하겠지요. 정당하고, 안하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가 마음 아파하고 있는 한 당신을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에 주시는 주제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얼마나 귀하게 말씀하십니까?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는 분들의 선교수기가 기록 된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 이런 설교가 있습니다. 만일 누구를 미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마치 유리벽에 쌓인 것과 같다. 유리벽이니 볼 수는 있어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예배할 수는 있어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을 듣는 동안은 내 마음에 아무 주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기도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화목하고 와서 드리라. 아주 구체적이고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이 먼저니까. 제사보다 먼저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제는 제물은 놔두고 가라. 기다리라가 아닙니다. 가라입니다. 우리는 화평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저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지. 저가 찾아오면, 맞아주지. 그런 정도로 의가 된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아주 적극적입니다. 너는 가라. 가서 화목하고,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4장 50절에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여러분, 더욱이 우리 부인들은 잘 아십니다. 뻣뻣한 김치, 배추라도, 소금을 한 번 치면, 부들부들 해집니다. 교만한 것도 소금을 치면 겸손해집니다. 소금이 부드럽게 합니다. 온유하게 하고 고르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소금의 본질은 잃지 않으나, 소금의 형체는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본질의 변화는 없으나. 소금은 간 곳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에 화목한 것입니다. 여러분, 화목하려면 많은 손해가 오고, 형제가 없어져야 합니다. 나란 존재가 없어져야 합니다. 내 명예고 뭐고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화목할 수 있고, 또 하나.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는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구약에 돌아가보면, 야곱이 에서와 불화하였습니다. 따져 말하면 야곱은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정당하게 거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잘못을 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안됩니다. 그는 20년 동안 헤어져 원수로 지내다가 압복강변에서 기도하고, 압복강변을 건너가서 자기 형님과 20년만에 만납니다. 원수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만납니다. 끌어안고 입을 맞출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보니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형님과 화해할 때에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제사 예배 기도 다 중요하지만, 아닙니다. 이보다 먼저 화목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할 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라. 그리고 예배하라. 그리고 찬송하라. 화목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해방
마 5:21-26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 제가 이렇게 메시지를, 이 마태복음 서를 특별히 5장을 말씀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 신학적인 배경으로도 그렇고 할말이 참 많아요. 그런데 그것을 한시간에 뭔가 이걸 한시간도 아니죠. 짧은 시간에 매듭을 지어 나갈려니까 이 잘 안될 뿐 아니고 참 어려워요. 그래서 자연적으로 나도 모르게 시리즈로 '1, 2, 3' 나가다가 뭐 사무실에서 들어보니까, '오늘은 3이라 2라!' 그러고 뭐 우리 카세트 테이프를 찾는 사람들은, '3을 주세요, 2를 주세요!' 이러면서 그런다 그래요.
그래서 오늘 또 이렇게 말씀을 들고 보면서 마태복음 이 5장의 '사상수훈!' 가장 귀중한 삶을 건드리는 겁니다. 삶을 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실 때에 자칫 우리가 받아드리면 뭐로 빠지느냐 하면, 율법으로 빠져요. 이 설명이 율법으로 빠져서, 이 설명이 하나하나 이렇게 시간을 두고 설명을 하자 그러면 또 뭔가 복음을 설명해 주어야 되고, 또 율법으로 이어지는 이 부분을 설명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개괄적으로 여러분들이 좀 마음을 담고 이해를 하셔야 될 것은, 오늘 여기에 나온 메시지는 뭐냐하면, 믿는 사람들은 이미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해방을 받아도 그냥 해방이 아니고 완전한 해방을 이미 다 받았어요.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이미 우리의 실존을, 존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는 소금이요! 너희는' 뭐라 그랬습니까? '빛이다!' 그랬죠. 그런데 이 소금과 빛으로 사는 삶은 살면서 이 땅에서 굉장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향을 주도록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 영향을 주도록 되어 있는데, 그 영향은 내가 그 영향이 나가도록 만들어 내고 발버둥치면서 그렇게 뭔가 수단으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고, 그 영향은 되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소금이 들어가는 곳마다 거기에는 짠맛이 나오게 되고, 부패가 방지되고, 되어지는 것이지, 소금이 뭔가 발버둥치면서 그렇게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다! 그런 배경이 아니거든요. 이미 여러분들에게 '너희는 소금이요. 너희는 빛이요!' 그러면 가는 곳마다 뭐가 되어야 됩니까? '빛이 비추어지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지는 것이다!' 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그 되어지는 속에서 제일 복잡한 것이 뭐냐하면, 사회성이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간과 인간 문제, 이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취급을 하는 문제에서 제일 먼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 이게 나와요. 그런데 지금현재 이 마태복음서가 유대인들을 향해서 배경을 두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 되어지는 문제, 이 문제가 그냥 겉으로 나오는 문제로 이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되어지는 문제가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원천적인 문제, 이것이 바로 통일이 되어야 되고, 이것이 바로 이루어 져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신앙생활 되어진다!' 그럴 때에 간단하게 내 개인, 내 자신에게 기도응답이 실제로 안 오면, 신앙생활 내가 가는 곳마다 신앙생활은 되어진다기보다도 그것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 됩니다. 기도응답으로 내게 되어지고 내게 일이 이루어 지게되면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저절로 나를 통해서 나오게 되어있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에, '저 사람은 참 신기하네 뭔가 있다!' 이게 나와야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그것이 바로 뭐라 그러느냐? 전도라 그랬습니다. 전도라 그럴 때에 말 잘 해 가지고 설득해서 뭐 데려온다! 그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게 되면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저 신기하다! 저 사람 뭐가 있다!' 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갔을 때에 요셉이 들어가는 곳마다 맡은 것마다 그대로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대로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보디발이 보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봤다!' 이게 전도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가 잘못 이해되면 뭔가 내가 하려고 애를 쓰고 그러다 보니까 뭐냐? 잘못하면 외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남을 사랑하라 그러니까 막 다른 사람 붙들고 '헤∼' 웃고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속으로는 '죽일 놈!' 이러면서 겉으로는 막 웃고 그걸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여러 가지 많은 말로 표현될 수 있지만, '살인하지 말라!' 는 그 말속에 다 표현이 되더라 구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배경이 안 될 때에 그게 뭐냐하면,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나오거든요. 대인관계가 다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고 하는 것은, 내가 저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저 사람의 대해서 내가 미워하고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대인관계가 다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인간관계 다 무너지고 진짜 삶의 관계가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뭐냐하면, '살인하지 말라!' 그래서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살인하지 말라!' 겉으로 나오는 것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고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랬습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뭐 살인하지 말고 남에게 잘 대해주고 뭐 이렇게...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상대방을 향했을 때에 미워하지 않고, 상대방을 향해서 사랑하게 되면 대인관계가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마찬가지거든요. '뭐 고부간에 어떻다! 또 부모자식간에 어떻다!' 사랑하게 되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다 해결되는데, 이것이 바꾸어서 미워하게 되고 뭐 이상하게 되면 거기서 모든 문제가 생기거든요. 여기에 다른 말이 나오는데, 뭐 우리말이 아니고 '라가라' 하는 말은 이건 뭐 '골이 비었다!' 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흔히 뭐냐하면, 골이 비면 골속에, 원래 이 머릿속에 골이 가득 차야 되는데 이게 비었다! 그러면 뭐가 찹니까? 이걸 가지고 우리는 '밥통이라!' 그러죠. 머릿속에 골이 차야 되는데, 밥으로 가득 차있다! 이겁니다. 이건 뭐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것이죠. '바보라!'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한 마디로 말해서 똑같은 이야기예요.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런 말은 똑같은 하나의 그저 같은 말을 여러 모양으로 이렇게 변경을 시켜나가는 그런 언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내가 상대방을 그러니까 '무시한다! 미련하게 생각한다!' 또 뭐라 할까, '멸시한다!' 이런 문제까지 다 들어가는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귀히 여기게 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는 대인 관계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안 되게 될 때에 모든 문제가 무너지게 돼요.
그래서 그 자칫 우리 성도들에게 뭐가 올 수 있느냐 하면, 자꾸 '율법주의, 율법주의!' 하는 그런 배경이 뭐냐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이것이 저절로 율법주의 적인 삶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 삶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판단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판단하게 되는 그런 과정에서 '아, 저래서 되느냐!' 멸시가 나오고 이렇게 되면, 그 삶에 있어서 축복이 안 나오고 저주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혹시 여러분들이 뭔가 사람을 만나고 인간을 대하고 그럴 때에 뭐냐하면, 그 사람의 못난 점, 못 된 점, 잘못 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벌써 '잘못 되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치유의 배경에서는 '이런 사람은 이미 정신병이 심각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판하지 말라' 그런 말이 안 있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가면 그 말이 나오게 됩니다 만은, 이런 면에서 오늘 중요한 것은, 문제는 그렇게 상대방이 존경 스럽고, 상대방이 사랑스럽고, 상대방이 그렇게 귀하게 보여질 수 있는 배경은 인간 세상에 어떤 법으로도, 어떤 마음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간단하게 말씀했어요. 이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나오는 것이 8복중에 중심으로 된 것입니다.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 그 다음에 긍휼이 여기는 자! 중심에서부터 이 변화가 오지 아니하면 다음 문제는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사실상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 전체를 쭉 이해를 해 나가고 설명을 해 나갈 때에 13절 보면 그런 말씀이 있죠.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빛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그 다음에 20절 말씀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다 해석을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무슨 말씀이 있느냐! 44절에, 5장 44절 말씀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니 '뭘 하지 마라! 어떻게 하라! 어떻게 하라!' 다 말하지만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이 말씀이 전체 다 해석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 원수를 어떻게 하라 구요? 사랑하면 원수가 됩니까, 안됩니까? 될 수가 없어요. 사랑하면 원수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하게 되면 여기에 나오는 뭐 여러 가지로 많은 말씀이 있죠. 뭐 '라가라' 한다던가 이런 문제도 나오고, 그 다음에 뭐 송사 하는 자 어떻고, 그 다음에 오리를 가지 않는 사람 10리를 가고, 뭐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을 돌려대고, 그걸 뭐 여러 가지 설명을 할 것이 없어요. 이걸 자꾸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뭐가 옵니까? 율법적이 되어 버려요.
우리도 모르게 '뭐하지 마라! 뭐하지 마라!' 간단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데 이 땅에 어떤 법으로도 원수를 사랑하는 법이 있어요? 세상에 없어요. 왜? 옆에 가면 소름이 끼치는데 무슨 사랑을 합니까? 아니 부부간도 이상합니다. 갑자기 미워질 때는, 좋다가도 미워질 때는 이상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사랑하는 감정이 없어요.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요 인간 마음은 변화 무쌍합니다. 여러분 여기 뭐 이렇게 앉아 있지만 어떻게 변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사람 변화는 예측이 안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자들 변화는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고요. 그것은 뭐, 워낙 그랬으면 역사에 여자의 마음을 뭐, 여자를 뭐라 그랬습니까? '갈대다!' 그랬는데... 그런데 남자는 요즘 보니까 여자들 보다 더해...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어떤 사람의 마음도, 어떤 사람도 이게 성경이 지금 여기 말씀하는,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는 이 황금 율을 지켜낼 수가 없어요. 이게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같다가 대어 놓으면요. 뭐가 나오느냐? 이 땅에 것으로는, 이 땅에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율법으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5장을 설명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뭘 설명을 하느냐 하면요, 인간의 행위로, 인간의 것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자인하고,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인하고, 다시 어디로 돌아와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가 5장의 역사다!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이 산상수훈에서 뭘 하라하라! 이 문제를 강조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하게되면, 그 다음에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변화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내가 용서를 받았고, 내가 과거 문제가 해결되었고, 내가 지금 현재 응답 받고 나면 무슨 문제가 오느냐?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신 것이 있잖아요. 100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평생 갚아도 안 되는데, 주인이 불러 가지고 그 종에게 '100 데나리온을 내가 탕감해 주마!' 그랬단 말이죠. 그러다가 주인이 탕감해 주니까, 너무 기뻐서 돌아오다가 이 주인이 자기한테 50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을 붙잡고 옥에 끌고 갔더라! 그러니까 다시 붙들고 그 종에게 '내가 너에게 이렇게 했는데 네가 그럴 수 있느냐!' 옥에 가두었다! 악한 종이다! 그런 표현이 성경에 안 나와 있습니까!
무슨 문제냐 하면요.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엄청난... 일평생 갚아도, 아니 두고두고 갚아도 해결될 수 없는 내 인간에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버렸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를 해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 힘으로는 상상도 못할 어디로?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감사가 나오죠. 감사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구원받은 내가... 내가 옛날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 고통에 눌리면서 찌들렸던 사람을 보게 될 때에 그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그 사람이 내게 이상한 일을 하고, 내게 어떤 이상한 일을 할 때에, '저 사람 꼭 나 같다!' 이게 들어와야 될 것 아닙니까! '옛날에 나 같구나! 옛날에 내가 복음 없을 때에 꼭 저 짓 했는데...' 꼭 자기 같다! 이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에, 저 사람도 구원받게 되면 해결되겠구나!
여러분 여기에 성경에서 오늘 말씀한 것은, '원수를 사랑한다!' 그럴 때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큰사랑과 축복을 지금 내가 누려지지 않고, 누리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 그 의로 말미암아 내가 해방을 받아도 조금만 받은 것이 아니고 완벽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그 대인관계에 있어서 나는 점점 시간이 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점점, 점점 시간이 가면서, '세상이 참 복잡하구나! 더 어렵구나! 더 힘들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껴요. 그리고 특별히 교회 안에는 하다하다 안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상한 성격을 가진 분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 들어와 가지고 '아, 이 교회는 참 좋구나!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구나!' 이런 것은 참 잘못입니다. 참 좋은 교회일수록 이상한 사람이 많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송현교회 오신 여러분들이 '아, 송현교회 참 좋구나!' 그러다가 혹시 이상한 사람보고도, '좋으니까 저런 사람이 들어왔구나!' 여러분 좋으니까 여러분들 안 오셨습니까! 여러분도 좋으니까 안 오셨습니까! 이게 이해가 되어요. 그러면 뭘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 사람이 꼭 내가 옛날에 그리스도 모를 때와 같구나! 이게 이해가 되어버리면 뭐가 나옵니까? 여기에서 참 용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긍휼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자비가 나갈 수 있습니다.
흔히 그런 이야기를 안 합니까!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안다!' 그러는데 아파 보지 못하면 죽었다가 깨어도 아픈 사람의 심정을 모릅니다. 제가 이번에 호흡이 이렇게 좀 곤란해지면서 무슨 느낌이 드느냐 하면, 사람이 호흡이 이 곤란해지니까, 답답하니까, 이 폐쇄공포증이 오면서, 우울증도 여러 가지 아닙니까! 폐쇄 공포증도 일종의 우울증이 됩니다. 이런 것이 들어오더라 구요. 들어올 때에 내가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우리 집 사람이 알레르기 철이 되면 목이 조여지니까, 호흡이 가파 가지고 심지어는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렇게 고통을 당했거든요. 그럴 때 내 마음에 먼저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내가 그런 증상을 조금 느껴보면서, '지금까지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구나!' 싶더라 구요. 내가 그런 어떤 답답한 그런 증세를 못 느꼈다 그러면 이 생각이 안 올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을 들을 때에 건강한 사람은 전혀 느낌이 없어요.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에 좀 아파 본 사람은 대번 고개를 끄덕입니다. '진짜로 맞다!' 그럴 겁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은 이야기할 겁니다. 그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불러서는 시원하지가 않아요. '주 예수 그리스도!' 답답하면 이게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때는 신앙보다도 어떤 면에서 자기가 죽을 지경이니까, 신앙보다도... 그래서 류 목사님이 어떤 소리를 했느냐 하면, 아파 가지고 막 고통스러워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고 막 기도하는 것은, '그건 신음소리지 기도가 아니다!' 그러더라 구요.
하나님께 우리는 긍휼을 입어서 사는 존재이지, 우리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내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산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아파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아, 내가 박 목사 믿음이 있구나!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 받는구나!' 아닙니다. 무조건 적인 은혜입니다. 무조건 적인 긍휼입니다. 여러분 하는 일, 하는 짓 보면요, 은혜 받을 대상이 못 돼요. 뭐 교회 나오면서 꾸미고 나오니까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 열어놓고 보면요 옆에 가면 냄새도 맡기 싫을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가 오기 시작하면 나를 알게 되고 비로소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더라도 뭐가 보이느냐? '저게 꼭 옛날에 나 같네' 한번 받아합시다. "저것이 꼭 옛날에 나 같구나!" 해결 다 되는 겁니다. 이게! 여기서 마태복음 5장에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이 다 나오게 됩니다. 이 문제 설명이 한마디로 뭐냐? 원수를 사랑하는 그 배경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 한마디로!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말이에요. 전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
그 다음에 이제는 여러분과 제가 전도자입니다. 그러기에 전도자로서 우리가 이제는 좀 마음을 넓혀야 되겠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쭉 지금까지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뭐라고 했느냐 전문화, 또 세계화, 복음화! 그랬습니다. '전문화, 세계화, 복음화!' 나는 그 신앙생활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참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게, 우리에게 축복해 주셨다! 할 때마다 감사함을 드립니다 만은,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그렇게 복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데서 받는 게 아닙니다. 은혜로 받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복을 주실 때에 뭘 보고 복을 주셨느냐? 다른 게 아니더라 구요. 딱 한가지뿐입니다. '내가 전문적으로 뭘 잘하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 그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세계화! 그럴 때에 세계를 전부다 품는 어떤 너그러운 것, 그것가지고 복을 받는다! 그 말도 아니더라 구요.
그러면 뭐냐? 복음화라는 것이 바로 되어야 됩니다. 이 복음화라는 것이 이게 어떤 것이냐 하면, 나는 복음화! 그럴 때에 예수 잘 믿는다! 기도 많이 한다! 그런 배경보다도 한마디로 여러분 설명을 드린다면 한번 받아합시다. "삶에 복음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게 복음화입니다. 그리고 자칫 이 복음화만 강조가 될 때에 뭐가 오느냐 하면, 외골수 되어 버립니다. 특별히 그 우리 종교인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이런 문제 아닙니까? 외골수 돼요. 이것이 외골수가 되는 것도 그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배경이 설명이 조금 나와야 됩니다 만은, 시간이 없어서 다 못하겠고 그 설명을 좀 든다 그러면, 이것도 정신적인 배경도 좀 나옵니다.
외골시 된다! 그럴 때에, 그런데 이것이 열심히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오는데, 한국교회가 열심히 하면서도 망하는 배경도 됩니다. 외골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설명을 내가 못 하겠고요, 뭘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전문화! 뭘 내가 막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세계화! 그 다음에 복음화! 그런데 여러분 세계 적으로, 그 다음에 성경 역사에 복을 받은 사람, 하나님이 들어서 쓰신 일꾼들은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이스라엘에 모세 같은 경우, 그 다음에 우리 요셉 같은 경우, 그 다음에 뭐 사무엘 같은 경우를, 들어서 볼 수 안 있습니까!
모세 같은 경우 여러분 그 왕궁에 들어가서 최고의 학문을 비롯해서, 무예를 비롯해서, 못하는 것이 없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학문을 통해서, 그 교육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중요한 것이 모세가 어릴 때에 누구 손에 컸습니까? 자기의 친어머니에게 유모로, 그러니까 왕궁에 들어갔지만 친어머니인 유모가 모세를 길렀습니다. 여러분 모세를 키울 때에 유모가, 자기 어머니가 그냥 키웠겠어요? 자기 민족에 대해서 깊이 뿌리를 심었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의 역사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젖을 먹이면서 한을 가지고, 이걸 한이라 그러면 좀 이상한데,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중요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드리고 싶으냐 하면요, 오늘 기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방향을 딱 맞춘다! 그럴 때에 여러분 지금 어떤 사람이 뭘 하던지 하나님의 방향만 딱 맞추면 됩니다. 그런데 이 방향 맞춘다는 사실이 말은 쉽지만 잘 안 되어요. 힘들어요. 저는 어릴 때에 어머니를 통해서 나는 지독한 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종교 교육이라고 그러면 뭐 종교교육이 되겠고, 우리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교육 속에서 한가지 뭐냐하면, 지금도 나도 모르게 몸에 벤 것이 어느 자리에 딱 가면, 앉든지, 서든지, 어디 가든지 눈부터 먼저 감습니다. 일단 기도합니다. 자동차에 앉아도 기도합니다. 어디 집에 가서 앉아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하면 불안해 져요. 불안한 것 보다고 뭔가 다른 게 시작이 안됩니다. 바쁘면 잠시 눈을 잠깐이라도 감았다가 떠야 일이 진행이 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게 내게 심어진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무슨 문제가 딱 생겼다. 하나님이 지금 이걸 인도하시고 지금 나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역사가 어릴 때부터 딱 심어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많은 지식을 배웠다! 많은 일들을 감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 흔히 뭐냐? '내게 사상이 되게 하옵시고, 내게 뭐가 되게 하옵소서!' 그게 사상이 되게 하옵소서가 아니고, 벌써 그것이 내 안에 뿌리를 딱 내려놓는 이걸 가지고 '믿음의 뿌리라!' 그럽니다. 뿌리를 내려놓으면 어떤 사건이 딱 닥치면 '아,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어떤 일이 딱 닥치면, '이렇게 되는 구나!' 뭐가 됩니까? 자기도 모르게 판단과 결정, 모든 것이 이 방향으로, 이 역사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더라!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간단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방향 맞춰라!' 뭐 방향은... 실컷 다른 짓 해놓고 '주여, 이 방향이 맞습니까!' 이런 게 아닙니다. 뭔가 뿌리를 딱 내려놓아야 돼요. 그래서 이 뿌리가 흔들려지지 안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서 여러분 메시지를 매주 들을 때마다, 간단합니다.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딱 듣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한 주간 기도제목이 딱 생겨졌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뿌리가 내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씀 딱 들을 때에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뭔가 이 제목이 안 잡혀지게되면 한 주간 아무리 뭐 '방향 맞춘다!' 입으로 고함을 질러도 안됩니다. 돌아가지도 않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뭐 '기도응답!' 제목이 잡혀지지도 안 했는데 무슨 기도응답이 나옵니까!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나도 모르게 딱 기도제목이 잡혀 있습니다. '아, 이것 기도해야 되겠구나! 아 이것이구나!' 그것도 뭐 막 잡기 위해서 연구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딱 저절로 됩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그 다음날 월요일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 기도가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나 사건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그 기도가 나가는 그 방향을 따라서 결정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도, 사상도, 결정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뭘 깨닫게 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완벽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면서 해방도, 뭐 완전한 해방을 제가 말씀하는데, 이것이 되어지는 만큼 완전히 해방됩니다. 사람의 감정과 느낌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가 세워지게 되는 그런 순간, 순간 이루어지는 것! '전도를 잘한다! 못한다!'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이 되어지게 될 때에,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한가지는 뭐냐하면요, 우리 성도들이 특별히 그 신앙 생활하다 보면 너무 기도만 하고, 그 다음에 너무 성경만 보고 이렇게 하다보면, 세상 사람들 속에 너무 섞이지를 못해요. 아는 게 그것뿐이니까! 그래서 좀 여러분 아실 것은 우리가 전도하는 그런 어떤 사실 속에서 좀 들어가게 될 때에, 뭔가 현재의 내가 놓여진 상황과 일들에 대해서 부단히 현실을, 현재를 파악하고 듣고, 깨닫고 하는 이런 실질적인 좀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마 우리 오늘 그 한 주간 살면서... 남자들은 너무 또 이게 반대가 되어 있어요. 신문에 매어 달리는 수가 많아요. 남자들은 그 대신에 좀 열심 있는 성도들은, 여 성도들은 남자들이 신문 보는 게 그렇게 미워요. 눈만 떴다 그러면 신문 들고 앉았거든요. 이것을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의 뿌리를 내려놓고, 그 다음에 여러분 이 땅에 돌아가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 이야기가 무엇인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요즘 그 정치 속에서 이념 논쟁이 일어나고, '색깔 논쟁이다!' 하면서 참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재미있는 그런 반응들을 많이 봐요. 목사님들 모여 가지고도 그렇고, 또 이런 어떤 평신도들 속에서도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색깔논쟁을 하는데 반응을 따라서 반응이 다양하게 나와요. '야, 저렇게 세대에 따라서 젊은 세대하고 나이든 세대하고, 그 다음에 조금 더 노인 층하고 세대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구나!' 젊은 사람들 세대는 색깔논쟁에서 별로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아요. 차라리 어떤 면에서 '좌경파다!' 그러면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보수적인데, 여러분 보수세력이, '대구가 보수세력이다!' 그러는데, 아마 여러분들이 이게 잘 이해가 안 되면, 사회적인 이런 것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이런 뭔가 통용되는 언어조차도 잘 이해가 안 되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뭐가? 복음의 뿌리가 내려져 있어야 정확한 판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정확한 이해가 나올 수 있어요. 여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이웃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런 어떤 이야기나 그런 사건 속에서 뿌리를 내릴 만큼, 복음의 뿌리를 내리는 만큼 그것이 전부 뭐냐? 전도화!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나도 모르게 메시지를 통해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제가 오늘 복음의 뿌리를 내리게 되면 받아합시다. "과거는 모두 메시지다!" 좋으면 좋은 만큼, 나쁘면 나쁜 만큼, 어려웠던 것은 어려운 것으로, 고통은 고통으로, 심지어 병은 병으로, 내 지난 과거는 전부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는 만큼 뭐가 됩니까? 메시지화 되어서 나가게 됩니다. 이게 전부 사람 살리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한다. 전도한다.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완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 받고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 바탕 속에서 조금만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 받는 현실을 갖게 되면 여러분과 제가 가는 곳에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완벽한 해방정도가 아니고 이것은 날아다니고 싶은 아니 나는 지금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할 정도로 이런 해방과 기쁨과 자유와 충만한 역사 속에 서게되어 있습니다. 이 축복으로 여러분 얼굴을 바꾸어 놓고 여러분 삶을 바꾸어 놓고 여러분 분위기와 환경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그 지난번에 우리 그 주일 저녁입니까, 성가대 색깔... 그런 분들이 이제 앉아서, 나는 여기서 앉아서 이렇게 보면서, 옛날에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나일루이에 갔을 때에 3,000명이 그런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완전히 흑암 천지더라 구요. 표정도 잘 볼 수 없고, 오히려 뭐랄까 좀 그런 생각이 들더라 구요. 그러면서 참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어쨌든, 색깔이 노랗든 간에 '이 은혜 주신 것 감사하구나!' 그 다음에 여러분 아실 것은 나도 모르게 복음을 통해서, 얼굴 표정이 어떻냐에 다라서 분위기와 환경과 심지어는 마음까지 달라져버리더라 구요. 그래서 아마 우리 교회 들어올 때에 새 신자들이 어떤 심정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그런데 별로 그렇게 희망적인 그런 어떤 이야기는 안 하더라 구요.
아마 그 배경에 있어서 '뭐가 어떻다, 어떻다!' 이전에 나는 한번 다시 뭘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복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정말로 우리에게 자유가 만끽될 수 있다, 그러면 가정생활도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생활이라는 것도 말할 것도 없죠. 그러면 여기서 모든 나오는 부부생활이나, 그 다음에 이웃문제나, 사회생활이나 이런 모든 문제는 하나, 하나가 전부 완벽한 응답으로 역사 되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기로 작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 일에, 그래서 이 일로 통해서 세계복음화에 여러분과 제가 쓰임 받도록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축복과 역사가 한 주간도 체험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완전한 해방(2)
마 5:21-26 / 박지온 목사
지난주에 말씀 제목을 "완전한 해방" 이라고 해서 첫 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마태복음 5장을 진행을 시켜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끝을 맺고 지나가려고 해도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할말이 너무 많은데 그것도 이 마태복음 5장에서 그 한 구절, 한 구절 그대로 말하게 되면 율법적인 그런 문제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 배경이 복음이 깊이 설명이 되지 아니하면 본문에 나온 말씀들이 이해는커녕 또다시 우리들이 이상한 그런 율법 배경에 빠지게 되는 그런 문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믿는 복음은 완전한 해방입니다. 그 뭐 조금 남았다가 아니고 완전한 해방! 그리고 완전한 생명! 생명도 반 죽어있는 생명이 아니고 반 죽었던지, 살았던지 생명은 완전한 겁니다. 살았으면 살은 것이고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생명이 반 살았다!' 이것은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단 여기에 오셨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뭐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서 눈이 조금 열렸다! 뭐 신기하던지 확실하던지, 생명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지, 반 생명은 아니거든요. 받아합시다. "나는 완전한 생명이다!" '완전한 생명이다!' 완전한 생명은 그 바탕이 완전한 해방입니다. 이 사실들이 우리가 갖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문제거든요. 이것을 구체적으로 좀 우리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복음 생명! 말하자면 '복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그 큰 배경이 뭐냐하면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뭐 우리나라, 우리 또 교회 배경에서는 신비주의 배경이다! 그러는데 지금 신비주의 배경보다도, 신비주의 배경도 역시 율법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에 대해서 이 산상 보훈이 나갑니다 만은 이 산상 보훈, 특별히 바리새인의 배경이 강장 중심적인 배경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 율법은 얼마나 심각한 결말을, 심각한 결론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모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율법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지금 율법주의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똑같이 지금 이 배경에서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만 떴다! 뭐 잘하던지, 못하던지 율법배경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지금 복음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큰 배경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해 주고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너무 좋고 너무 확실하지만 성경에서 로마서에 말씀이 그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너무 선한 것이지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율법에 빠지고, 율법에 빠진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율법을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복음, 복음 그렇지만은, 완전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율법을 나도 모르게 주장하도록... 뭐 율법을 말하고, 율법에 메이도록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바로 율법문제 시비에 중요한 배경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율법은 너무 완벽하잖아요. 그리고 너무 좋은 겁니다. 성경에 나온 말씀이죠. 그런데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느냐? 율법에 메여있는 이상 큰 재난과 재앙들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재앙이 면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막말로 해서 구원은 받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율법에 빠져 있는 한 가정과 개인에 재앙과 재난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결과라는 것이 이것이 엄청난 문제요. 어려운 그런 문제들이 다가 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결국 율법을 주장하다가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놓쳤습니까? 그리스도를 놓쳤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구원받았다!' 구원이라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누리지 못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에 고통을 당하는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까 구원받았으나 구원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완전한 해방에 대한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참 그리스도의 축복과 은혜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배경이 이 누리지 못하는 그런 배경이거든요.
이것이 그런데 그냥 지나가는 말이 되겠습니다 만은,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려고 그럴 때에 이 배경이 상당히 많은 설명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이것이 안 나오게 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영적 문제나 지옥이나 저주, 사단 권세에 대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이것이 이해가 되고, 인지가 되고, 알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사실이 가슴에 확인되지 않을 때 오는 것이 뭐냐하면, 이런 사실들이 희미해져 버립니다. 영적 문제도 희미해져 버리고 저주와 재앙과 재난의 문제가 희미해져버려요.
분명히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드러나게 되고, 또 확인 되게 되고 그렇게 되는 만큼 뭐가 되느냐? 해결이 되는데, 그것이 안 되게 될 때에 희미해져 버리고 속는다 이 말입니다. 사단의 역사 속에, 귀신의 역사 속에 속아 버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것이 중세교회였고, 중세교회가 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니까 결국 어떤 경우가 생겼느냐 하면, 중세 그 흑암의 세계가 덮였던 그런 사실적인 문제가 오죠.
그 다음에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것이 천주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천주교, 천주교!' 그럴 때에 천주교가 보통단체가 아닙니다. 왜? 개혁자들은 일찍이 제가 늘 말씀하죠. 개혁자들은 일찍이 적 그리스도라고 단정을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배경이 뭐냐하면, 복음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세계를 완전히 종교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종교로 바꾼다는 것은 우상의 배경입니다. 이렇게 지금 바꾸어 나가고 있는 사실들을 볼 수 가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완전해방에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한 해방! 그럴 때에 왜 그러면 우리도 모르게 이런 율법적인 배경이 유대인들만 빠졌던 배경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가 그리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바로 여기에 신, 불신간에 전부 여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교회 온다! 그러면 착한 일한다는 것이 우리도 모르게 이 낙인이 되어 있어요. 딱 그게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악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어떻게 하느냐? 어떤 종교단체에 기부를 자기도 모르게 해 놓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이렇게 하면 혹시라도 좋은데 갈까...' 하는 이게 종교배경이거든요. 그런 어떤 마음들이 전부 뭡니까? 이것이 율법 배경입니다. 그런 배경이 되어져서 신, 불신간에 여기에 완전히 절여있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고 이것이 세계를 속이는 사단의 가장 확실한 전략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사단은 종교를 만들어서 복음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종교를 만들어 가지고 복음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해방이 도대체 뭐냐? 좀 부분적인 해석이 되겠습니다 만은, 이제 시간이 가는 데로 제가 아마 여기 2번, 3번까지 나올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가 이 문제만큼이라도 확실히 붙잡아야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축복과 역사, 그리스도 얼마나 완벽한 축복과 은혜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고 누리면 되는데, 우리가 이 사실을 얼마나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잘 알고 있는 귀중한 말씀이요. 또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완벽한 해방을 얻고 구원의 이 축복과 은혜를 받게 되느냐? 과거, 현재, 미래 완벽한 해방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 과거가 완벽하게 해방됩니다. 해결이 됩니다. 해결되어야 해방이 된다! 이겁니다. 과거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거기서부터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잖아요. 그 다음에 현재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 다음에 미래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렇게 해야 완벽한 해결이 되어요.
그러면 여러분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 과거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의 과거문제가, 우리의 과거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 말이 창세기 3장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가 영접했을 때에 내 과거가 어디에서 오늘에 이런 불행과 이런 어려움의 문제가 있었느냐? 아담 때부터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내가 오늘 이 문제 했기 때문에, 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재앙과 어려움이 있다!' 그 말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여러분과 제가 이미 벌써 태어나기 전, 우리는 그런 운명과 그런 뭔가 불신 세계에서 말하는 운명 그대로 아닙니까! 빠져 있다는 사실이 뭐냐하면, 아담의 후예! 이것은 해결이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담의 후손으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요, 이게 완전 죽음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아담의 후손으로 아니고, 누구의 후손으로? 여인의 후손으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셨습니다. 오셔 가지고 왜 아담의 후손으로 안 되느냐? 아담의 과거가 우리 해결이 안 되면 안 되느냐? 그 말이 뭐냐하면 아담이 바로 누구의 손에 들어가 버렸습니까?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로 통해서 완전히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와 재앙과 죽음이 이 땅에 왔습니다. 이 아담의 문제를 아무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누구라 구요? 예수라 그랬습니다. 예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무덤까지 내려가셔서 부활하시고, '다 이루었다!' 바로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그랬습니다.
예수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담의 저주와 죽음과 아담의 고통과 아담의 멸망을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그 분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담의 저주와 아담의 모든 고통을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문제입니다. 과거의 문제, 여러분과 제가 갖고 있던 과거의 문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이 축복이 사실상 근원적인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 해결을 우리는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받아합시다. "원죄 해결하셨다!" 이걸 가지고 원죄라 그럽니다. 원죄라는 것은 내가 짖고, 안 짖고 이것과 상관없이 벌써 여러분이 타고나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행동과 행위와 상관이 없어요. 이것은 아무도 해결이 안됩니다.
여기서 따라오는 것이 뭐냐하면요. 여러분 이 원죄와 같이 따라오는 것이 조상 죄라던가, 이런 모든 것들이 저절로 따라오는 겁니다. 여기서 따라 나오는 것이 우리의 체질이나 우리의 모든 것이 같이 따라오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지금 내가 노력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이상 그 다음에 문제는 모든 것이 저주와 죽음과 고통과 불행에서부터 해방 받을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바로 원죄입니다. 이 원죄는 그리스도 아니면 해결이 안됩니다.
왜입니까? 사단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단의 권세를 꺾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통해서 완벽하게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원죄해결 끝났어요!"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끝난 이것이, 그것이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끝남과 동시에, 원죄해결이 끝남과 동시에 여러분과 제게 성경에 뭐라 그랬냐 하면요, 약속했습니다. 이 끝남과 동시에 사망에서 어디로? '생명으로' 어떻게 했어요? '옮겼느니라!' 완성해 버렸습니다. 과거문제가 엄청난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오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요. 악한 흑암의 세력이 거두어 지고, 다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우리 마음에 평안과 안식과 기쁨이 임하게 되어있습니다. 바로 원죄 해결이 이루어지는, 과거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에 지금 여러분과 제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그 말씀 배경에는 뭡니까? 지금 하나님의 누구입니까? 자녀라! 이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 지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죄가 해결이 안 되었을 때는 지금 사단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불신자들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세계입니다. 지금 사단의 자녀로 산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너희 아비 마귀!'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요. 지금 사단에게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 지금 자유와 행복과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해방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지금 해방 받고 있는 상황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러분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와져야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믿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를 때마다 이 사실을 누리는 겁니다.
여러분 죄가 있다, 없다! 이전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 속에서 먹고 마시고 죄 속에서 타락된 그런 체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과거 문제입니다. 그런데 과거가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완전히 해결되었고, 완전히 해방되었고 죽음과 멸망에서부터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라! 누구의 다스림 속에?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현재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누구라 그럽니까? 하나님의 자녀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메시지를 듣는 동안에 Remnant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 가서 Remnant 집회를 하는데, 이 Remnant 집회를 하는 동안에 이 아이가 일어나 가지고 자꾸 돌아다니는 겁니다. 너무 이 마약에 취했었고 그랬기 때문에, 메시지를 못 들어 가지고 잠시도 못 견뎌요. 나도 그걸 봤거든요. 그런데 막 일어나 돌아다니고, 그리고 뭐 부모가 앉혀 놓으면 조금 앉아 있다가 목사님 축도 마치고 나면, 벌써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 정도입니다. 이 가만히 못 있어요. 이런 아이가 한 2년, 3년 지났는데 참 놀라운 것은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Remnant 집회에 왔다갔다하고 그랬는데 해결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뭐라 그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돌아다니는 Remnant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안에서 다 해결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 돌아다녀도 상관없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어떤 일들과 어떤 문제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능력이 너무 놀랍다! 그러면서 그 표현을 제가 그 표현대로 지금 표현을 잘 못하겠습니다 만은, 느끼는 것은 참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 그 능력이 그냥 우리가 '능력 있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현장에서 사실을 볼수록 뭘 느끼느냐? 참 우리가 우리 입으로 말로표현 안 되는 그 축복과 역사가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실제로, 사실로 죽음과 멸망에서 해방시켰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이 사실로 우리의 삶에 생활에 적용되는 실제를 볼 때마다 감격하게 되고, 놀라게 되고, 또 마음에 이제는 그 그리스도만 있으면 해방 받고 해결될 수 있는데, 이 그리스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축복된 역사를 보게 된다고 많이 강조하는 것을 봤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느끼는 것은 산업선교에 대한 것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은, 자꾸 산업선교를 강조하는 배경이 뭐냐하면, 흑암 경제! 사람이 돈 벌고 사는 모든 이런 경제들이 전부 흑암으로, 무속으로 흘러가니까! 이 산업 인들이 복음이 안 되면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이런 것으로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지난 과거 완전 해방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그분의 이름 하나로 이 사실이 현재에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완성되었죠.
그러면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앞으로 미래입니다. 현재는 그렇다 치고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내게 보장되느냐? 상당히 문제가 뭐냐하면, 우리가 좋은 일을 당하면 불안이 와요. 우리 율법 속에 있을 때에 보통 왜 오느냐 하면, 이 좋은 일이 지속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옵니다. 좋은 일이 있다! 이 문제가, '좋은 일이 지금 왔는데, 이게 얼마나 지속이 될 것인가?'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불안이거든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여러분 지금 하나님 앞에 축복하고, 축복을 받고, 축복을 누리는 이 삶은 앞으로 계속해서 완벽하게 보장이 되어있습니다.
그 보장이 되어있는 증거로 누구를 보내주셨어요? 성령입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천국 갈 것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내게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나를, 아무리 이상한 사람도,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도 성령께서 나를 확실하게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천국에 인도합니다. 믿습니까? 성질 더러운 사람 많아요. 우선 나부터도 더럽지만은, 여러분 중에는 나보다 더 더러운 사람도 있어요. 받아합시다. "그래도 천국 갈 수 있다! 그래도 확실하게 천국 간다!" 왜입니까?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 말속에 무슨 말이냐?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과 제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엄청난 축복으로 약속이 되어졌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여러분 지금 현재 그릇들도 좁아 터져 가지고 우리가 보는 것은 눈앞에 밖에 못 보잖아요. 그런데도 세계 복음화라 그래놓으니 이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그러니 뭐 생활 속에 날마다 갈등이 올 수밖에 없죠. 왜? 앞에 밖에 못 보는 사람들에게 세계를 맡겨놓았으니까! 이건 뭐 세계에 눌려 가지고 찡겨죽을 판이라! 받아합시다. "그래도 미래는 확실하다!" 왜입니까? 성령의 인도 받게 되어있습니다.
왜? 성령께서는 우리 좁아터진 성질에 못 이겨 가지고 세계 복음화 못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된 이 약속을 성령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성격 때문에 이루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성령께서 일을 이루어 가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여러 가지 모든 문제나 교회 여러 가지 사건이 있을 때에, 옛날에 뭐 교회에 문제가 있으며 '아, 큰일이다!' 자꾸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을 더러 막 그래가지고 기도해도 뭐 내가 해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요즘은 내가 우리 집에서 너무 핀잔을 받을 정도로 편안해졌습니다 만은...
그러나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요. 지금은 내가 아무리 이상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교회가 이상하다할지라도 세계 복음화에 중앙에 세워놓은 송현교회라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바꾸실 것입니다. 누가 합니까?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 가정이 문제와 상황과 사건들이 있습니다. 뭐 이렇게 해서 될 것이냐? 받아합시다. "이래도 세계 복음화 한다!" 이래도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막 이래도 되느냐? 그래도 됩니다. 왜? 성령께서 자녀들이, 그 이상한 그 자녀들을 바꾸지 못하는 약한 분이 아닙니다. 세계 복음화 될 때까지 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약속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전히 약속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완전한 해방과 더불어 완전한 축복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다만 한가지 이제는 여러분과 제게 뭐만 남아 있습니까? 기다리면 됩니다. 기다리면 돼요. 너무 기다리지 못해서 늘 바로 이루어지기 직전에 낙심하고, 늘 그렇게 하는데 또 기다리고 기다려요. 특별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 가지고 실컷 기다려 가지고 바로 이루어지기 직전에 한발 물러서는 이런 불행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이 축복과 역사, 과거와 현재와 미래! 완벽한 해방을 주시고 해방과 함께 완벽한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약속을 확실히 붙잡고 이 시간에 내 연약함을 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능력과 권세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승리하시고 해방 받았다는 경우가 아니고, 그 해방의 축복을 누리는 감사와 찬송으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보다 더 먼저 할 일
마 5:21-26 / 김동호 목사
추석명절을 앞두고 벌써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3,000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부모친지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우리 민족만의 특이한 미풍양속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예배를 마치고 추석기간 동안 선교지 일로 출국해야 하기 때문에, 지난주일 밤에 미리 어른들을 찾아뵙고 형제들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과 가문에서 자란 덕택에, 집안에서 종교적인 갈등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지만, 많은 교우들 중에는 집안의 대소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종교적 갈등이나 신앙적인 아픔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차례(茶禮)를 지내야 하고, 기일(忌日)이 되면 제사를 지내야 하는 가정에서는 그 어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교회의 어느 권사님 가정은, 조금 과장(誇張)하면 1년 52주 내내 조상제사를 지내던 철저한 유교가정이었습니다. 그런 가정이 예수를 믿고 개종하였는데, 1년에 수십 차례 지내던 제사는 중단했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십 번 지내던 그 제사를, 일대일 대응 예배로 다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사님이 개종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당연히 제사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독교를 믿지 못할 이유도 없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사문제는 그 권사님과 가정의 중대사였습니다. 결국 그 권사님이 예수 믿기로 작정하면서, 수십 번의 제사대신에 돌아가신 어른들을 추모(追慕)하는 ‘추모예식(배)’를 일대일(一對一) 대응 식으로 맞바꾼 것입니다.
그 권사님 가정 때문에, 갑작스럽게 고생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목사입니다. 주일마다 오시면, “목사님, 이번 주에는 우리 집안의 누구누구의 기일입니다”는 말씀이 인사말씀이었습니다. 그 분이 개종한 후 몇 해 동안은 1년 내내 그 가정의 추모예식(배)을 인도해야만 했습니다. 생각만 해 보십시오. 그 일이 쉬운 일이겠는지…. 저는 목회하면서 1년에 38번 장례를 인도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38번의 장례 중에, 8번은 연속해서 그것도 월요일 장례를 인도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그해에 저는 적잖은 목회적인 갈등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장례가 산 자를 위한 목회사역이지만, 내가 산 자를 위한 목사인가? 죽은 자를 위한 목사인가?” 고민이 생길만큼 장례가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우들 중에는, 이와 같은 가정의 신앙적인 갈등의 문제가 있거나 가족간의 풀지 못한 아픔이 있을 때에 몇 가지 대응하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영적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영적전투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앙과 문화, 삶의 가치를 영적전투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는 식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소위 믿음이 좋다는 분들 중에, 이와 같은 전투적인 입장을 가지고 문제를 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싸워야할 영적인 대적들이 늘 많은가 봅니다.
영적인 전투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순교형’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 제사 문제로 인해 순교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승훈(李承薰)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가 제일먼저 부딪힌 문제가 제사문제입니다. 이승훈을 통해서 전해진 천주교는 처음부터 조상숭배를 반대하는 순교적인 신앙을 낳았습니다. 순교(殉敎)는 어느 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진 지, 수백 년이 된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더 이상 의 ‘순교’는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순교는 기독교의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 전혀 다른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인 상황과 대치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매우 대립적인 역사적 정황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과거역사에 80여 년 동안 이와 같은 순교적인 박해사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1815년 박해, 1819년 박해, 1827, 1839년 박해, 1866년 대원군 때까지).
회피형이 있습니다. 신앙은 포기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신앙적인 갈등의 문제로 부딪히기 싫어서, 그 갈등의 현장과 만남을 회피하는 형입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가족모임이나 집안의 대소사에 잘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 통하지 않는 가족들이나 사람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소극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의 신앙을 가진 분들은, 집안에서 아예 제쳐놓은 식구처럼 여김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타협형’도 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신앙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좋게 한다는 식의 신앙은 말은 쉽지만, 그것을 바른 신앙적인 자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신앙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거나, 혼합형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입니다. 요즘 쓰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종교다원주의적(宗敎多元主義)인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협적인 신앙은, 궁극적인 신앙의 기준과 진리를 상대화시켜버릴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도 이런 타협형의 신앙이 있었고, 이런 식의 신앙은 후기현대 사회(post-modernism)를 거치면서 요즘 더 많이 팽배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한국의 로마천주교회에서는 1939년 12월 18일 교황 피우스 12세(Pius Ⅻ)의 교서에 따라서, 한국의 유교적인 조상숭배제사는 종교적인 우상숭배가 아니라, 한국인의 시민적인 의식(市民的 儀式, civil rite)이라고 규정하면서, 조상숭배제사를 허용했습니다. 제사를 단순하게 조상에 대한 효의 표시로 간주한 것입니다. 결국, 로마천주교회는 한국의 80여 년 동안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였던 萬여 명의 순교자의 죽음을 스스로 헛된 죽음이라고 규정하고 만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통치 하에서는 신사참배도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의 시민적인 의식이라고 허용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국개신교회도 신사참배 때문에 순교한 신앙인들도 있었지만, 장로교회가 앞장서서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며, 기독교교리와 모순 되지 않는 하나의 애국적인 국가의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솔선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한국교회가 가졌던 공식적인 타협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신앙은 ‘복음적인 입장’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은 이원론적인 시각의 ‘전투적인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문제를 피해가는 소극적인 ‘회피형’의 신앙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가하다는 식의 ‘타협적인 신앙’ 또한 아닙니다.
복음적인 신앙이 무엇이냐 할 때,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선순위(優先順位)’의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신 말씀도 오늘 본문과도 일맥상통하는 동일한 말씀입니다(마 6, 33). 본문의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의 유대종교는 ‘제사종교’입니다. 그런 유대종교적인 상황 하에서 주신 말씀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제단에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 23-24).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복음적인 신앙과 삶은 우선순위(優先順位)의 문제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안의 삶의 갈등과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종교적인 의식(儀式)이나, 교리적인 믿음의 문제로 풀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의 방식’으로 내가 직접 상대방과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복음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 어떻게 갈등과 문제가 전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갈등과 아픔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과 아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선순위가 바릅니까? 내가 추구하는 목적 때문에, 비록 그것이 선하고 바른 목적이라 하더라도, 혹 그것의 우선순위 바르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게 있는 삶의 갈등문제, 내 삶 속에 얽히고 꼬인 문제를 풀 때, 매우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나의 우선순위가 옳은가 옳지 못한가가 내가 복음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못한 비복음적인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삶의 아픔과 갈등, 염려와 근심걱정거리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상관없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기 삶의 문제와 갈등, 아픔이 있을 때 그 문제를 풀어가는 우선순위가 바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은, ‘목적’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복음은 ‘선한 목적’과 ‘바른 우선순위의 과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반드시 선하고 바른 과정을 거쳐서’ ‘선한 목적’ 곧 ‘하나님의 뜻’(God"s Will)을 이루는 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이 복음적인 신앙과 삶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내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마 6, 10).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우선순위’라는 과정의 문제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은 선하고 좋습니다. 목적이 나쁜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에 앞서는 ‘우선순위’라는 과정이 무시되거나 잘못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럴 때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낱 비복음적인 나쁜 열매를 거둘 뿐입니다(마 7, 15-20).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물드림이 어떻게 나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예물드림보다 앞서서 예물을 드리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예물 드리는 사람이, 형제간의 화목하지 못한 일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예물드림의 ‘제사의식’과 ‘종교적인 행위’가 형제간의 화목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죄의 방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리적인 신앙이나, 종교적인 제사나 기도나 예배행위로 형제간의 화목하지 못한 갈등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그 반목과 불화의 문제는 가져온 예물을 그냥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직접 만나서 자기 자신이 직접 그 불화(不和)한 문제를 상대방과 직접 서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그 후에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화목의 예물을 기뻐 받으신다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 23). 즉, 우리가 형제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생명과 삶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간곡하게 당부하신 것이 아닙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 34). 이것은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온 인류에게, 지금 예수를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두에게 최종적으로 주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이며, 지상계명(地上誡命)입니다.
조상숭배 제사문제와 복음적인 신앙의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조상숭배의 제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궁극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신앙을 지키는 것이 선하고 바르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우선순위의 과정을 무시한 일방적인 제사거부행위는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전투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를 푸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그 문제 때문에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가정이나 가족은 더구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바른 자세일까요?
제사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의 문제는 가족들의 제사행위를 긍정하느냐, 긍정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상숭배제사(祖上崇拜祭祀)라는 의식을 통해서 ‘효(孝)’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불신가족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가족들을 인정해 주는 일입니다. 제사를 긍정하고 인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사에 동참하면서, 절을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부모나 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은 부모나 조상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산 부모님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절도 하고 공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숭배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제사지내는 가족들을 정죄하는 일은 극히 삼가 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 힘들고 어려운 제사와 관련된 가사 일을 가족으로서 함께 돕는 일도 정죄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신가족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 가족들이 너무 융통성이 없고, 까다롭기만 하다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열심히 도와주고, 할일은 다 하고, 제사 때에는 자리를 정중하게 피하거나, 제사상 앞에 서서 절을 하는 순서가 되면, 절을 하는 대신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며 추모하는 의미에서 머리를 숙여 가정과 가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만 지키겠다는 신앙목적 때문에, 가족들의 이교적인 풍습이나 신앙을 정죄한다든지, 그 어렵고 힘든 가사 일조차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 이전에, 보다 더 중요한 천하보다 귀한 가족들의 생명과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진리를 지키면서도 사랑해야 할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일에는 힘껏 헌신하고, 지켜야 할 진리에는 양보하지 않는 복음적인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적인 신앙은,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보다 내가 잃어버리기 쉬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회복하는 데 관심을 가집니다.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정이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사람을 잃어버리는 형식적인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보다는 사람을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가치와 인간가치가 더 중요한 복음의 본질입니다. 제단에 나아가 예물 드림보다 더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서 화해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가족들이나 이웃들과 화해하고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또 나로 인해서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가족과 가까운 형제가 있다면, 기도하고 예배하고 예물 드리는 나의 종교적인 열심보다, 먼저 직접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 그의 아픔을 회복을 시켜주는 복음적인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향 부모님과 가족들을 꼭 찾아뵙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불신자이든 가족들이 불신자이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찾아뵙고 함께 가족들과 사랑으로 정을 나누어야 합니다. 혹, 부모님과 형제들 간의 갈등이나 아픔이 있다면, 모여서 예배드리기 전에, 혹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다른 가족들이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화목하는 기회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관계회복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마음부터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용서하고 기다리면, 그 사람은 그 죄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요 20, 23).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영 잃어버리고 말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사람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사건이 없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선물을 준비하여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
마 5:21-26 / 옥한흠 목사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참 놀라운 말씀을 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느끼는 것을 여러분도 똑같이 느끼실 것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번 다시 읽고 싶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굉장한 부담감을 주고 어떻게 보면 우리 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당시의 제자들이나 청중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죽이지 않는 이상 자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살인죄를 엄하게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기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입니다. 이목구비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본성의 많은 점을 우리에게 이양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면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습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대치하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즉 살인을 하면 그 사람이 자기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살인을 엄하게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나 청중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는 생각들을 다 가지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나는 살인을 한 일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굉장한 선언입니다. "너희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웠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정도로 배웠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제 이 계명에 들어있는 참 뜻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바 대로,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가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당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계명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이제 밝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수준의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지금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시면 참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그리고는 공회, 지옥 불 등의 말이 이어서 나옵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가 받는 사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면 살인자가 받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는 욕설을 하는 자는 살인자가 받는 공회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고 모독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살인자는 지옥에 간다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갖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헬라어에 화를 낸다는 표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라는 말입니다. 두모스는 가랑잎이 활활 타다가도 금방 꺼지는 것처럼 기분이 나쁠 때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끈 화를 냈다가 자기도 모르게 금방 그 화가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성격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르게 쪽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한번 화를 냈다 하면 그 화를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쌓아가는 것입니다. 분노를 마음에 쌓아가면서 그 분노가 증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증오로 바뀌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해서 말이 험하게 나옵니다. 그를 대할 때마다 좋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고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에 대할 때마다 말이 좋게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라가'라는 욕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가'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 머리 빈 깡통아!'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련한 놈'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곰보다도 못한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인격을 짓밟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에 미움이 섞여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말이 좋게 안 나가는 것입니다. 말로써 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 머리가 빈 깡통아. 곰처럼 미련한 놈아.' 하면서 깔아 뭉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마음 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살인하는 행위요, 형제를 향해서 말 속에 분노를 담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행동 전에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먼저 주시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서 피를 흘려야 살인인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에 칼을 들기 전에 벌써 마음에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살인한 자와 똑같이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라고 역대상 28장 9절에 분명히 명시하셨고, 잠언 16장 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있으면 하나님은 벌써 살인한 사람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 15절에는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입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눈을 피할 것입니까? 멀리 있어도 우리 생각을 통찰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눈을 누가 피할 것입니까?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분노를 쌓아놓고 있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규정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면서 무릎을 꿇고 "아멘." 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 속에 들어 있는 이 중요한 뜻을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합니다.
분노가 살인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또 자주 봅니다. 미국의 문화를 흔히 분노의 문화라고 일컫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화를 잘 냅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앞뒤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잘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총을 들고 나가는 것 아닙니까? 다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총을 들고 나가서 난사를 함으로써 1년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살인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은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저 자신도 가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깜짝 놀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고 우리 가슴에 아픔을 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러브 호텔 문제입니다. 나라의 장래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공무원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히 어느 곳에다가 러브 호텔을 허가해 줍니까? 차를 타고 오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막 가슴을 치고 싶어집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산자락 밑에 초막집이 있어도 마음이 차지 아니할 텐데 러브 호텔이 서 있다니 말입니다. 학생들이 날마다 우글거리는 학교 주변에 러브 호텔이 줄줄이 서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허가해 준 공무원들에 대해 솔직히 분노하고 있고 그들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고 살인자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가 러브 호텔을 보면 저도 모르게 무슨 말이 불쑥 나오는지 아십니까? "불이나 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는 제가 놀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밤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객실 50개에 한 100명이 둘씩 둘씩 다 들어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거기에 불이 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오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수십 명을 죽이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 옳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화를 내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이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저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런 교훈 앞에 초연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유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또 한번 당혹감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욕하는 사람, 형제를 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형제라고 합니다.
맥스 루카도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기독교 저술가는,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눈을 뜨고 보아야 하고 살을 비비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분노하기 쉽고 욕하기 쉽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상처주기 쉬운 사람들을 일컬어서 '꼼짝 없이 매인 사람들'이라는 재치 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꼼짝 없이 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임 병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임 병의 증세는 무엇입니까? 자꾸 짜증이 나고 화를 잘 내고 속에 쌓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돈에 팔촌도 안 되는 모르는 사람 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들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때문에 짜증이 자주 납니다. 화가 자꾸 치밀어 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 자꾸만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숨기고 쳐다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오늘날 약 80% 정도의 부부가, 마음에 숨겨놓고 쌓아놓고 있는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상담가는 자기를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 부부나 개인을 놓고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고 감을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답니다. 그럴 때면 마음 속에 가만히 숨겨 놓고 있는 분노가 있는지를 한번 체크해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80%가 적중을 한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의 뿌리가 그 분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삭이지 못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마다 가끔 치밀어 오르는 화가 있습니다. 자식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루에 몇 번씩 아내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몇 번씩 남편과 자녀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에 쌓여 있는 분노가 나중에 증오의 감정과 뒤섞여서 결국은 어떤 사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감정,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이것은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죽입니다.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형제와 화목사는 사람
마 5:21-26 / 김명혁 목사
오늘은 "복 있는 사람"이란 주제를 가지고 열 한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형제와 화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높고 깊은 내용의 말씀을 하셨지만 때로는 아주 평범하고 실제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평범하고 쉽고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첫째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했고 둘째 욕을 하지 말라고 말씀했고 셋째 삐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지 말고 형제에게 욕을 하지 말고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와 이웃은 본래 사랑과 화목의 대상인데 가인이후 미움과 불화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미워했고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고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랍 사람을 미워하고 파키스탄 사람이 인도사람을 미워하며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과 불화하고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불화하고 있습니다. 아니 한 집안에서 부모가 자식과 불화하고 남편이 아내와 불화하고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 불화하다가 형제와 이웃과 부모와 자식을 죽이기도 합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형제와 화목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화목하는 사람의 예물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형제와 연합하고 화목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와 불화하니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만들어 주시면서 형제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분부했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고 도적질 하지 말라고 했고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했고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문자적으로 너무 형식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문자적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나 다른 여자의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으면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 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계명의 본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다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간음하지 않으면 다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도적질하지 않으면 다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복 있는 사람 즉 천국 백성의 삶의 기준은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 즉 천국 백성의 삶의 기준은 내적이고 영적이고 동기적인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구약에서는 살인하지 않으면 다 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부터는 부정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첫째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와 이웃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살인의 원인은 분노입니다. 부부가 서로 화를 내고 분을 품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빈 라덴이 미국에 대해서 분을 품다가 엄청난 살인을 저질렀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분을 품다가 엄청난 살인을 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와 이웃에 대한 부당한 분노를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화를 냅니다. 우리가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거나 손해를 당할 때 우리는 쉽게 화를 냅니다. 이성을 잃고 떠들면서 욕을 하기도 합니다. 남의 차가 내 앞을 가로지른다고 화를 내며 욕을 퍼 붓기도 합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길가에서 화를 내며 욕을 퍼 붓기도 합니다. 자식이 조금 잘못할 때 부모가 화를 내고, 부모가 조금 잘못할 때 자식이 화를 내고, 남편이 조금 잘못할 때 아내가 화를 내고, 아내가 조금 잘못할 때 남편이 화를 냅니다. 시장에서도 화를 내고. 식당 안에서도 화를 내고. 목욕탕 안에서도 화를 냅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를 잘 내며 잘 떠드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노를 품는 자는 이미 제 6계명을 범했다는 말씀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심판대신 칭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분은 죄를 짓게 만들고 분은 몸 속에 독을 퍼뜨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고 분부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에게 분을 품고 있다가 그 독이 온 몸과 얼굴에 나타났고 그래서 살인 죄를 범했고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5-7).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인간은 모두 별 차이 없는 별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분노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나 화가 나고 분노를 품게 될 것입니다. 미국도 잘못한 것이 많다고 인정할 때 분노가 좀 사그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분노가 좀 사그라질 것입니다. 예수님 만큼 무시와 멸시와 적대를 당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분을 품지도 않으셨고 입을 열지도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그분을 바라보며 형제나 이웃을 향해서 분을 품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2 둘째 형제에게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분노가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욕이 됩니다. 여기 라가라는 말은 텅 빈 놈, 쓸모 없는 놈, 별 볼일 없는 놈 이란 뜻입니다. 멸시의 태도를 들어내는 말입니다. 여기 미련한 놈이란 말은 말 그대로 미련한 놈이란 말이고 어리석은 놈이란 말이고 바보란 말입니다. 증오와 .멸시의 태도를 들어내는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주 쓰는 욕 가운데 개 자식이란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욕들을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심한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을 자꾸 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범한 것이 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형제나 이웃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할 뿐 아니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까지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말을 조심할 것을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나 욕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 했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이 온 몸을 어거하고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자꾸 욕을 하면 몸도 욕하는 몸이 되고 사람도 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입에 재갈을 먹여 온 몸을 어거하라"(약3:3) 고 했습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약3:6)고도 경고했습니다. 혀를 길들이지 않으면 악이 계속해서 솟아나오고 죽이는 독이 계속해서 솟아나온다고도 했습니다(약3:8). 결국 욕하는 말을 삼가고 금하라고 했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형제에게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욕을 하지 않는 대신 감사하는 말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일곱 집사들을 칭찬했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이 디모데를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감사의 말과 격려의 말과 칭찬의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복을 명하십니다. 욕하는 말은 사람을 죽이고 칭찬의 말은 사람을 살립니다. 지난 주일 저녁 허기정 목사님이 자기가 젊었을 때 들은 한 마디 칭찬의 말이 지금도 자기를 격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수미씨는 카라얀이 자기를 칭찬한 말 한 마디가 자기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를 칭찬한 적이 있는데 그 칭찬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형제에게 욕을 하는 대신 감사의 말과 칭찬의 말을 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3 셋째 형제와 삐지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입에 욕을 담을 때 그것은 형제와 삐지게 만들고 형제와 불화하게 만듭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불화했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불화했습니다. 아니 유대인들이 유대인들과도 불화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역사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 드린 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시기도 했고 이방인 여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도 했고 로마 군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도 했고 세리와 창기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사마리아에 보내시기도 했고 베드로를 가이사랴에 보내시기도 했고 사도 바울을 마게도냐와 로마로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 가든지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했습니까? 형제와의 불화를 풀고 화목을 이룰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제와의 화목을 이룰 때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때문입니다. 화목을 이루려면 적극적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발로 찾아가고 손으로 악수를 해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그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며 복음을 전했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축복과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빌립이 가사 광야로 달려가서 에디오피아 내시와 교제의 악수를 하며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하고 에디오피아 복음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만나 교제의 악수를 하며 그를 위해서 기도했을 때 그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이방 복음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니니아가 사울을 만나자 "형제 사울이여"라고 말하며 화목의 인사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와 교제의 악수를 하며 복음을 전했을 때 그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처음에는 미워하고 싫어하고 불화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화평의 사람으로 화목의 사람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교제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없습니다. 예배가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곳이 가정이든지 교회이든지 나라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미움과 욕과 불화가 있는 곳에는 지옥이 임하고 용서와 감사와 화목이 있는 곳에는 천국이 임합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서와 감사와 화목을 조금씩 실천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합니까? 형제와 이웃을 향한 욕이 입에서 튀어나옵니까?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는 길입니다. 분을 삭이고 용서와 너그러운 마음을 품도록 하십시다. 욕을 하는 대신 감사와 칭찬의 말을 하도록 하십시다. 불화를 풀고 발로 찾아가서 손으로 악수하며 교제와 화목을 이루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