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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 42 유대인의 준비일 ( 하 )
3] 다 이루었다. 말씀 : 전윤근목사www.nujunbi.org 늦은비 교회 (요 19: 17-42)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력으로 7월 10일( 어제 9월 25일 2004년) 속죄일(Yom Kippur 욤 키푸어)은 큰 절기이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속죄일을 살펴보고, 또 예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떻게 성취될 것이며 또 교회와 속죄일과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예언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 유대인들의 속죄일과 교회
지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그리고 염소 머리 위에 안수하고 죄를 넘기는 제사도 없다. 그러나 교회가 휴거되어 올라간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7년 환난으로 들어가 적 그리스도가 처음 3년 반동안은 성전을 짓게하고 제사도 드릴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속죄일은 스스로 괴롭게 함으로 죄를 회개하는 날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한다. 이 두 가지 율법을 범하면 그들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속죄일의 율법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크게 깨닫게 되어 은혜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임을 깨닫게 된다. 유대인들은 속죄일 전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24시간 동안 죄를 회개한다. 이날 속죄일 저녁부터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는 유대인들로 가득찬다. 그들은 24시간동안 밤새도록 금식하고 회개한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아에 이불까지 싸들고 자리를 잡는다
본교회 홈 페이지를 열면 예루살렘 통곡의 벽 실시간 모습이 24시간 비쳐지는데 9월 24일 해 질때부터 유대인들이 어떻게 속죄절을 지키는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의 죄를 다 속죄 하셨기에 교회가 지키게 되는 절기는 속죄절이 없고 마지막 절기인 나팔절에 주님 앞에 모이게 되는 것만 남아있다. 속죄일은 교회가 아닌 유대인들을 통해서 성취하게 될 것이다.
예언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에게 속죄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으로 성취된다. 예수께서 감람산에 지상 재림하실 때 그들이 통곡하고 회개하여 속죄함을 받게 되는 날 속죄일이 성취될 것이다. 먼저 스가랴 선지자가 이것을 예언하고 있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구원자가 시온에 오실 때 그들의 속죄가 이루어져 구원받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롬 11:26-27)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지상 재림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바라보고 그때에 그를 믿게 된다. 결국 이날이 그들에게는 속죄일이 된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그를 메시아로 믿지 않을 자가 없게 된다. 이때 이미 휴거된 자들은 주님과 함께 감람산으로 같이 내려와 이 광경을 다 보게 될 것이다. 이날에 예루살렘이 비로서 정결케 되어 속죄함을 받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이날에 예루살렘에서 우상 숭배와 거짓 선지자가 다 제거될 것이다.
(슥 13:1-6)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 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둘째: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일
우리들에게는 속죄일이 따로 없다. 왜 그럴까? 모든 죗값이 청산 (Paid in full)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완전하게 속죄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챤에게는 속죄일이 없다.
(히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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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섬기는 성도들은 주님과의 교제가 중요한다. 그래서 이 깊은 영적 교통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고백한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과 날마다 성령안에서 동행하다가 마지막 나팔이 불어오는 날 공중으로 들림받아 휴거되어 올라가 주님과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속죄일 없이 공중으로 들림받아 올라가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는가를 살펴보자. 우리가 예배 드릴 때 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그 중에 특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라고 고백하는 내용 중에 세가지 사건 즉
1. 십자가에 못박히심 2. 죽으심 3. 장사지내심의 예수님이 겪으신 사건들이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9: 17-42절 말씀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우리가 단지 역사적인 측면뿐 아니라 교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때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가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동시에 왜 이 사건이 발생했는가를 깨닫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고 하늘나라의 영생을 누리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건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진리가 복음의 내용인 것을 증거하였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 3-4)
1. 십자가에 못박히심 (요 19: 17-27)
빌라도가 예수님을 제사장에 넘겨주고 로마의 병정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십자가의 사건에 대하여 로마의 정치인이며 철인인 시세로는 논평했다. “이는 모든 형벌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처벌이었다. 로마의 시민 시체 곁에 아니 그의 생각이나 눈이나 귀 곁에라도 조금도 가까이 접근치 못하게 하라”.
십자가의 처형은 원래 페르시아의 페니칸(Phoenican)에서 시작되었다. 로마가 이를 특별하게 사용하였는데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 처형을 집행치 않는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 당시에 십자가 사건은 가장 최악의 따돌림과 거절, 부끄러움, 수치, 고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반대로 바꿔놓으셨다. 그래서 지금 십자가는 영광과 승리의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멜 깁슨의 십자가 고난의 영화를 통해 처형 장면을 보았지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보자
1) 십자가를 지심
이는 죄책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셧는데도 불구하고 재판석에서 형틀까지 1마일 되는 십자가의 길 (Via Delarosa)을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다
2) 십자가 위에 패를 부침
패는 죄목을 적은 판이다.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다. 유대인들의 대 제사장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요청했으나 빌라도는 거절했다. 아람어(Aramaic), 헬라어 그리고 라틴말로 썼는데 당시 모든 사람이 만나는 곳에 써붙였다. 당시 히브리어는 종교언어였고 헬라어는 철학의 언어였으며, 라틴어는 법률의 언어였다. 결국 세상의 종교, 철학, 법률이 총동원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 못박았다
3)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히 13: 11-130
4) 골고다란 말은 히브리 말로 해골이란 뜻이며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부른다
5) 다른 두 사람 강도 사이에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예수님을 더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사야 53: 12절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6)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기간은 유월절 명절기간이라 많은 순례자들이 이 사건을 목격했다
7) 로마군대-백부장 하나가 네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처형을 집행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네 깃을 나누어 취했다. 이는 시편 22: 18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이다. “내 겉 옷을 나누며 속 옷을 제비 뽑나이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짐승으로 취급했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 쌌으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12)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3)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21)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16) 그러므로 인간이 예수님을 거절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다.
8) 주위의 4 여인 -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실 때 그 주위에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주님 곁에 머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모친,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모친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모친을 돌보도록 책임을 성실하게 지셨다.
2.. 죽으심 (요19: 28-30)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면서 말씀에 예언된 모든 것을 이루시려고 온전하게 콘트롤 하셨다. 시편 69:21절에 예언된 말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를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28) 하셨다. 그는 육체적 고난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장시간 동안 하나님의 진노와 흑암의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였다. 흑암, 목마름, 고립 이 세가지를 합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슴을 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다 이루었다’의 말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가 다 이루졌다는 말이다. 즉 구약의 모형과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 이 말은 당시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사용했던 말인데 그것을 성경적으로 풀이해보면 주님이 하신 “다 이루었다”의 말씀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1) 종이 주인에게 일을 끝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요17:4)
2) 제사장이 희생재물을 점검한 뒤 흠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할 때
예수님은 과연 흠없는 어린 양이셨다
3) 예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속죄하시기 위해 그리신 작품의 완성이다. 이 십자가의 죽으심 때문에 하나님이 쓰신 구속의 작품이 비로서 완성되었다. 이 십자가의 죽으심 때문에 하나님의 제정하신 구약의 의식과 예언을 이해하게된다
4) 비지니즈를 하는 상인이 은행에서 빌린 부채를 다 갚은 뒤에 “모든 빚을 다 청산했다 paid in full”이라는 서류를 받았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로운 요청을 다 이루셨다
결국 모든 죄의 빚은 다 청산되었다. 구약의 희생은 죄를 없이하지는 못했으며 다만 가릴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죄를 지고가셨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이다. 여기에서 그의 죽으심은 여러가지 상징으로 선포되고 있다. 그 내용을 몇가지만 살펴보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 1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10: 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 24)
이와같이 요한복음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난 그의 죽으심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서의 섭리이다. 예수님은 자진해서 자기의 목숨을 드리셨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곳에서 밝혀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20)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 45)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 2)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눅9: 31)
3. 장사지내심 (요 19: 31-42)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위하여 두개의 구룹에 속한 사람들이 개입되었다.. 먼저는 로마의 병정들과 (요19: 31-37) 유대인 메시아닉 성도들(요 19: 38-42)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에게 명령을 받은 지시대로 행하지 않은 일과 명령에 없는 일을 행한 일이다. 즉 다리를 꺾으라는 일은 하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일은 행하였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1-34)
이 두가지 일은 다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 사건들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출애굽기 12:46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고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의 옆구리를 찌르는 일은 스가랴 12:10절에 예언된대로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예언적으로 예수님의 지상 재림때 또 성취될 것이다. 또 이 말씀은 계시록에도 나온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1:7)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를 보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이땅에 오셨던 것(요일 1: 1-4)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짜 육신의 죽음을 맛본것이 판명되었다. 요한이 이 복음을 기록했던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예수님은 진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피와 물에는 몇가지 영적인 뜻이 있다. 피는 우리들의 의(Justification)를 말하고 있으며 물은 성화(Sanctification)를 말하고 있다. 피는 우리들의 죄에 대한 죄책(Guilty)을 해결해주고 있으며 물은 죄의 더러워진 얼룩(Stain)을 씻어준다. 요한은 요한 1서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게하는 성령과 물과 피의 세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6-8)
성령은 오순절과 관계가 있으며 물은 그의 세례와 그리고 피는 그의 십자가의의 죽으심을 각각 말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과 피를 보고 그 증거가 참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내리는 일을 마친 뒤 부터는 믿는 성도들이 그의 시체를 다루었다. 성경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이 후부터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루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셉과 니고데모와같은 고위층 인사를 통해 그의 장사를 적절한 장소에 준비케 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장사를 책임진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가 궁금하다.
먼저 그는 부자였다(마27:57). 그리고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다(막15: 43) 나아가서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눅23: 50) 그리고 그는 불의한 자들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였다(눅23: 51) 뿐만 아니라 그는 메시아닉 유대인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재림신앙의 소유자였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 43)
니고데모와 요셉은 구약의 메시아닉 예언을 잘아는 자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달리심과 죽으심과 장사지내심의 사건을 통해 말씀의 성취를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고 알았기 때문에 유월절 기간중 돌아가실 것을 알고 장사를 미리 준비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오후 3시에 잡기때문에 그의 죽으심이 오후 3시임을 알았을 것이다. 또 이사야 53장 9절을 통해 부자의 묘에 장사지내심을 알았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주목할 일은 그들이 평소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몰래 숨어서 은휘하다가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실때 그의 죽으심을 알고 그때부터는 숨기지 아니하고 담대히 나타난 점이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찬란할 때보다 어쩌면 가장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소망이 다 사라지고 꿈이 다 깨어진 모습같이 어둡고 캄캄하게 보이는 시간에 나타나 이제 더이상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신분을 밝혔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십자가 주변에는 여자들 외에 오직 요한 한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끝까지 남아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1. 십자가에 달리심과 2. 죽으심과 3. 장사지내심을 통하여 “새 피조물”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기에 부활후 승천하셔서 지금은 안식하고 계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
이제 안식 후 첫날이 동트기 시작하였다.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공중재림 하실 때에 같이 하늘로 들림받아 올라가는 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4: 1) 마라나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손과 발에 큰 못이 박히셨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다.
머리에서도, 양손과 발에서도, 또 옆구리에서도 피가 계속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여러 시간 많은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는 물과 피를 다 흘리셨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하실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고 그 일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우지 않으신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리신 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것이 다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이사야 53: 9는 그가 부자와 함께 묻히겠다고 예언했고 그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 27).
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다(눅 24: 44).
또 그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었다(요 5: 39).
이처럼 성경은 어떤 사건을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그것이 성취되었다. 성경의 이러한 성격, 즉 예언의 성취라는 성격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한 증언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놀라운 내용과 성격을 깨닫고 성경을 다 믿자.
셋째, 우리는 인간의 의식(儀式)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자.
세상의 장례식들은 거창하다. 왕의 장례식이나 대통령의 장례식은 화려하고 거창하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장례식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실상 다 헛되고 큰 가치가 없다.
* 전 1: 2 -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사 40: 6, 8 –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런 의식과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중요한 내용은 구원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런 거창한 장례식이 없어도 복된 자이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거창한 장례식을 한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고 그의 영혼의 죽은 후 상태는 지극히 불행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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