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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16장)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묵상 / 요한복음 16:16-24)
◆ 십자가 죽음과 부활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목요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내일, 곧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신다. 이미 이러한 과정을 잘 아는 우리에게는 '조금 있으면'이란 이 말씀이 어려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23)
여기서 말씀하신 그 날이란, 바로 부활하신 이후다. 부활 사건은 제자들에게 말을 잃게 했다.
십자가 사건에 놀라서 모두 도망치고 숨었던 제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이 말 속에는 그동안 믿어왔던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들어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제자들의 의심과 좌절도 크게 나무랄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이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제자들이 할 말을 잃은 것은 당연하다. 부활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임을 확정하는 사건이다. 부활하신 분 앞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맞느냐, 구약에서 예언된 그 메시야가 맞느냐'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소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예'라고 대답할 지경이다. 예수님 앞에서 내 생각, 내 의견은 모두 의미 없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말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말했다. '당신이 아십니다.'(요 21:15).
예수님의 부활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만일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당할 위기에 처했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붙들 사실은 '예수님 부활하셨다'이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인 이상, 나의 구원도 확실하고, 천국도 확실하고, 나의 믿음도 헛되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모든 종교, 철학들은 모두 그럴싸할지라도, 결국은 헛소리이고, 그것을 믿는 것은 구름을 육지로 생각하고 뛰어내린 격이다. 모두 산산조각 날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선생 노릇하며 자기 의견을 진리인 양 내세우며, 제법 그럴싸하여 사람들에게 박수받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고 싶다. 그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 네가 확인해 봤어? 엉?
진리는 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진리 운운한단 말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스승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가소롭다.
불교 승으로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던 성철은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살아평생 미친 말로 남녀의 무리를 속여...'
이것이 양심적인 고백이다.
◆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대로 주시겠다는 이 말씀은 마치 숫자를 내 마음대로 써넣으면 그대로 지급하겠다는 백지 수표와 같다. 이 수표 밑에 예수님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백지 수표는 아무에게나 주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 없이 멋대로 산 사람이 기도 잠깐 하고는 왜 응답이 없느냐고 따질 때 나는 웃음이 나온다. 그 백지 수표를 왜 당신이 쓰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이 약속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특권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필요를 구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어떤 때는 '예수님의 권위'를 의미한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네거리에 서서 교통질서를 잡고, 교통 법규 위반한 운전사에게 딱지를 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국가가 부여한 권위 때문이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때나 무슨 봉사를 할 때, 또는 세례를 줄 때, '예수의 이름'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권위이며, 주님의 대리인으로서의 행동이다. 따라서 내가 으스대거나, 드러나면 안 되고, 오직 예수께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런데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권위보다는 은총의 보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 보증을 서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 은총의 보증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곧 나에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시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이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공식처럼 된 것은 비록 후대에 만든 전통이지만, 귀하고 좋은 전통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공식화되어서 의례적으로만 사용하면 안 된다.
한번은 어떤 사람에게 주기도문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말도 안 된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다만, 그것을 공식처럼 덧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기도 끝 부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다'고 붙이든 붙이지 않든 간에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예외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형제들끼리 짧은 돌림 기도할 때는 매 기도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하지 않고 맨 끝 사람만이 그런 멘트함으로써 기도를 마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런 멘트가 없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명이 빠진 수표는 휴지에 불과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은 기도는 모두 공허하다.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 감히 내 이름으로 무엇을 부탁할 수 없을 때,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가! 은행에서 내가 수표를 내밀 때, 내 행색이 어떤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로지 그 수표 밑에 있는 서명만 보고 지급한다. 나는 어려운 기도를 할 때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압력을 가한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은 제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기쁨이 충만해진다.
하나는 기도가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 친밀감에서 오는 기쁨이다. 그런데 후자가 훨씬 더 기쁘다.
부활하신 주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것저것을 행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요 16:16-24 /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작성자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