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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과 이혼
마 5:27-37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 5:27-37 / [간음하지 말라] 모세의 율법에 ㄱ)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다. (ㄱ. 출20:14(참,신5:18)) 28)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속에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그러므로 만일 네 오른눈이 음욕을 일으키게 하거든 빼내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이 못쓰게 되더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낫다. 30) 또 만일 네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이 못 쓰게 되더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31) [이혼하지 말라;마19:9,막10:11-12,눅16:18] 또 모세의 율법에 ㄴ)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그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였다. (ㄴ. 신24:1) 3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행을 저지른 일도 없는데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요, 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 역시 간음을 하는 것이다. 33) [맹세하지 말라] 또 모세의 율법에 ㄷ) `거짓 맹세를 하지 말며, 주께 맹세를 하였거든 그것을 다 지키라'고 하였다. (ㄷ. 레19:12,민30:2(참조,신23:21)) 3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맹세도 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도성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 37) 다만 너희는 `예, 하겠습니다' 또는 `아니오, 하지 않겠습니다'라고만 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보다 엄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관련한 두 가지 주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27-32) 간음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예민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옛 사람에게 말한 간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간음에 대한 새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의 관점에서 다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육체의 간음을 죄로 인정했다면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도 죄로 인정하십니다. 육체의 간음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마음의 간음은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음을 행했다고 하는 것은 타인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가 더욱 자신에게 좀 더 세밀하고 엄격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죄에 대해 엄격하여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면 빼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이 실족하게 하면 찍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한 눈 없이, 한 팔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과 두 팔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이 시대는 무분별한 이혼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의 말씀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막 10:9).
맹세하지 말라(33-37) 예수님은 “헛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과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말씀을 언급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배경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레 19:12). 헛 맹세를 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 신뢰를 잃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음을 받게 합니다. 이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34).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떤 계획이나 목표 등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맹세한 것을 내 의지만 가지고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옳은 것에 대해서는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적용: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당신의 신앙과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오늘날 간통법이 폐지되면서 성을 개인의 자유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이 영적 문제임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성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켜야 합니다. 성도의 음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는 악행입니다. 즉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죄입니다.
< 설 교 >
우리 부부는 행복합니다
마 5:27-30 / 박상훈 목사
어떤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세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 세 남자 모두를 내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사랑했습니다."
아내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 남편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첫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내가 어릴 적에 옆집에 살던 오빠였습니다. 내가 두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서 공부하던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로 사랑한 남자는 지금의 내 남편이 된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이 세 남자 모두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나는 비록 짧은 삶을 살다가지만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서 한없이 서럽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사랑했던 세 남자는 모두가 남편인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일평생토록 한 남자인 자기만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의 아내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하루는 영국의 유명한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기자들과 함께 회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자 가운데 한 사람이 불쑥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는 어떠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그 질문은 이러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렇게 골치 아픈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또 사시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할 것입니다. 또다시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처칠의 아내는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을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의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위해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두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한 남자에 여러 명의 여자를 만드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반대로 한 여자에 여러 명의 남자를 만드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남자를 만드신 것도 아니고, 두 여자를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남자에 한 여자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남자는 자기의 아내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자기의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요, 가정의 천국을 이루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지 말고 남자는 자기의 아내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아내는 자기의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부부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정은 천국처럼 날마다 매 순간마다 행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27절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둘째로, 28절입니다. 예수님은 제7계명의 참뜻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셋째로, 29∼30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부로서, 우리의 아내를, 우리의 남편을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7절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본문 끝 부분에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그렇게 들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 들어왔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간음치 말라."
이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일곱 번째로 분명하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에 자기들의 유전도 전혀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무엇이 잘못이었습니까? 우리는 28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어볼 때,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대한 해석을 잘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마음으로 음욕을 품든지 말든지 그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와 결과에만 치중을 했습니다. 그것만 문제시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계명을 피상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해석은 그 당시 사람들을 성적인 방종 상태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욕을 다스려야 되는데, 그 음욕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결국 음욕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욕을 이루기 위해 아주 손쉬운 하나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이혼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혼을 아주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혼을 하면서도 전혀 마음 속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무안을 주었을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가 요리를 하다가 음식을 태웠을 경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만든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남자들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별의별 사유를 붙여서 아내를 내버렸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 한 장만 써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 뒤에 남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와 합법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겠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혼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9:9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런데 그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마19:10의 말씀입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이혼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그런 말을 할 정도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이혼을 쉽게 생각했는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러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아마도 그 여인은 그런 말로서 자기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감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여인은 남자로부터 다섯 번씩이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혼을 다섯 번씩이나 했으니까 얼마나 이혼이 지긋지긋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아예 결혼도 포기하고 남의 첩으로 얹혀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은 그 당시 사람들을 성적인 방종 상태로 몰고 가서, 도덕적으로 문란한 세상을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을 가리켜서 몇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말씀하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바른 의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권세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요1: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 장차 우리 모두를 심판하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명의 참뜻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8절 중반부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 품은 음욕 자체를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여자 보기를 아예 돌같이 하라는 뜻입니까? 여자 앞에서는 눈꺼풀을 땅에 내려 깔고서 땅만 보며 지나가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3:25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들 마음 속에는 음욕이 불일 듯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자기들은 간음죄를 저지르지도 않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이 성전에서 했던 기도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마음에는 음욕이 불일 듯 일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자기들은 계명을 잘 지키는 자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만일 다른 사람이 눈으로 드러나는 간음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가차없었습니다.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8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사람들은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여러분! 이 가련한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했던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입을 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의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의는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우리도 역시 다 간음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리와 같이 애통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혀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없는 의가 있습니다. 그들보다는 더 나은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입니다. 온전한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천국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옷 입고 사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짝지어주신 우리의 아내를, 우리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부부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우리의 아내와 남편을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29∼30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부잣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크고도 으리으리한 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집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공부도 잘하고 열심히 살면, 너도 이 다음에 이런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아들은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잠시 뒤에 그들은 다 낡아서 허물어져 가는 가난한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집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얘야, 네가 공부도 안 하고 되는 대로 살면, 너도 이런 집에서 살는지 모른다."
아들은 알겠다는 듯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교육시킬 때 때로는 당근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채찍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천국의 영화로움을 말씀하시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또 때로는 지옥의 끔찍한 광경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지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말씀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컨대 오른눈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고 해서 빼내버리고, 그 다음에 왼눈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고 해서 빼내버렸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두 눈이 없다고 해서 그 다음에는 실족케 할 일이 전연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오른손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찍어내 버리고 왼손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찍어내 버리면, 모르긴 해도 병원은 손 자르는 사람들로 붐비게 될 것입니다. 또 오른발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오른발을 찍어내 버리고 왼발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찍어내 버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손과 발도 없는 두루뭉실한 모습이 다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으로 품는 것인데 손과 눈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빼내버린다면 심장을 빼내든지 허파를 빼든지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문자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두 눈으로 여자를 보면서 두 손을 가지고 여자를 범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육체적인 음행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눈으로만 여자를 보고서 한 손으로만 범했다는 것은 실질적인 육체적 접촉 없이 마음으로 음행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우리의 배필에게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도 다른 여자, 다른 남자에게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내 아내만, 내 남편만을 온 마음을 다하여 극진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오른눈은 계속해서 그들을 실족케 했건만 그들은 그것을 빼내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오른손이 계속해서 그들을 실족케 했건만 그들은 그것을 찍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몽땅 다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온몸은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가, 우리의 남편이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짝지어주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아내, 가장 훌륭한 남편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이 내게 짝지어주신 내 남편, 내 아내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부부입니까?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어지는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0년 12월, 6·25 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어쩔 수 없이 국군 버스를 타고서 국군 장병들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또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늘 빛 바랜 가족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난 밤이면 그는 꿈속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를 보고 환하게 웃는 듯 했습니다.
하루는 간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큰일났습니다!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망가라고 문 열어 주었지. 생각해 보시오. 다 나은 사람을 돈이 없다고 해서 붙들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빨리 가서 땅이라도 파야지. 그래야 그의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을 것 아니오?"
그는 자기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도 북쪽에서 자기를 대신해 자기의 가족들을 돌보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 초에 그는 미국에 있는 어느 친척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그의 아내와 그의 사랑하는 다섯 자녀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지상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런 애절한 편지를 띄웠습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 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끝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홀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듯 육체의 하나됨보다는 마음이 하나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끝내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자녀들을 보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성탄을 알리는 새벽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거들랑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주시오."
과연 그는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그의 아내만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내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남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이와 같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맹세를 신념으로 삼지말라
마 5:33-37 / 유영설 목사
1. 사람 사는 세상에 진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 맹세한 것을 천국 갈 때까지 지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맹세가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녹취, 공증을 하고, 소유권 등기를 하는 등 맹세한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어떻게 맹세를 하였을까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약과 약속은 반드시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맹세는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서원하면 이행하는 것을 더디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고 더디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신 23:21). 이삭과 아비멜렉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 :12) 이상과 같이 맹세는 중요한 삶의 약속이요 질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쟁이 있을 때마다 맹세를 함으로 분쟁을 가라앉히고 서로 신뢰하도록 했습니다.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이 정직하다는 것, 거짓되지 않다는 것, 약속을 꼭 지킨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맹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2. 신약성경에서는 맹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보면 맹세 자체를 금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맹세보다는 사실대로 말해서 정죄를 면하라”(약 5:12)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그의 맹세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맹세의 성격을 보면 먼저 목숨까지 걸고 한 맹세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사명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길이란 걸 모르고 피상적으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둘째로 자기 의지를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강하고 용기 있는 기분파였습니다. 전후좌우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의지만 믿고 맹세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지는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의지는 과대평가했습니다. 혼자 잘난 사람, 자기 일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가 알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은 부족하고 못난 사람입니다. 넷째, 베드로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버릴 것으로 단정하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비난하는 것도 맹세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비난합니다. 맹세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실천하기는 쉬워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3.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가 모든 관계와 질서를 지키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신약에서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맹세가 좋게 할 때는 매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신뢰의 수단과 방법이고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인간관계 형성 등 긍정적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이런 맹세를 나쁘게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예배에서는 거룩한 하늘 백성이었으나 생활현장으로 돌아가면 위선과 거짓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맹세하면 사람들이 믿어주니까 실제보다 부풀려서 맹세함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온 습관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위선적인 맹세를 단호! 히 거부하라는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헛되고 거짓된 맹세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땅으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당신의 보좌로 삼으신 하나님은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고 통치하시고 계시고 때문에 땅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임금의 성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의 고향이며, 지향점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곳입니다.
4. 미쉬나(Mishna)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미쉬나는 랍비들의 교훈집으로 많은 랍비가 토라를 계속해서 가르치고 연구하고 토라의 내용을 사람들이 실천할 수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들이 계속 연구하고 토론하다 보니까 설명이 늘어서 방대해졌습니다. 이 책에 맹세를 연구한 부분이 있는데 예루살렘으로(by) 맹세하면 구속력이 없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맹세하면 구속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맹세가 어떤 경우에 거짓말이 되고 안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정도로 전락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맹세를 금한 이유는 맹세가 남용되고 거짓 맹세가 많아져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 맹세를 금하셨습니다. 맹세보다는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 槿求募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신념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맹세가 습관이 되지 않도록 해야 말아야 합니다. 언행이 일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맹세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맹세가 필요하지 않도록 정직하고 올바른 원칙이 서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맹세를 해야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다면 불신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 혹은 아니오의 정직성
마 5:33-37 / 옥한흠 목사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터지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교회 개척 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거액의 채권을 위조해서 시장에 유통시키다가 구속을 당하는 기가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 경찰청장이 학력을 날조했다가 3일 만에 옷을 벗는 웃지 못할 일이 우리 눈 앞에 벌어졌습니다. 대학 입시에 내신성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자 학교마다 내신성적을 부풀려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학교의 내신성적은 88%가 전부 엉터리라는 기사까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에는 다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우려를 금치 못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낍니다.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가, 다음 세대를 키우는 교육가들이, 그리고 이 사회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 사람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인격으로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과연 내다 볼 수 있는지, 우리에게 장래가 있는지 의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 가까운 몇 분들과 조용히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분이 자기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아들은 믿음도 좋고 똑똑합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청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지 이삼 년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와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더랍니다. 그 아버지는 제가 알기로는 상당한 애국자입니다. 하도 의아해서 아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이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 한 마디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탄식과 좌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눈에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교회가 이 책임을 벗을 수 있습니까? 교회 지도자가 이 책임을 벗고 손을 털 수 있습니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교회,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는 천만인이 넘는다고 지금까지 떠벌리며 자랑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목사를 믿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 다 드러난 이야기이지만 목사의 정직도는 승려보다도 못하고 매스컴의 아나운서보다도 뒤떨어진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래 가지고 이 나라가 정직해질까요? 투명해질까요? 한국 교회가 내어 놓는 수치나 통계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교회가 이렇게 어두우니 나라가 어떻게 앞이 보이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설교를 해야 하는 저 자신도 쥐구멍이 있으면 차라리 들어가서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을 놓고, 내 힘으로 도무지 바꿀 수도 없는 이 암담한 현실을 놓고 차라리 어딘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만큼 우리 나라가 도덕적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 긍정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 초대 시절, 지금부터 칠팔 십년 전, 아니 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 하면 세상이 그래도 정직하다고 믿어주었습니다. 왕 도둑놈 같은 양심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 믿으면 정직한 사람이 된다고 천하가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다릅니다. 어쩌다가 유별나게 정직한 사람이 보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손해를 보고 욕을 먹어도 절대 거짓말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버티는 사람이 어쩌다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놀랍니다. 또 마음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수근수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네." 스스로 놀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사회의 빛이라고 해야 될 교회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데서는 안 믿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이 사회의 모든 불신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보다도 교회의 지도자가 더 나은 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맞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두려운지요? 부끄러운지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정직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서 얼굴을 돌리실지 모릅니다. 촛대를 옮기실 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 사람에게 짓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리면, 촛대만 덩그러니 화려하게 서 있지 불꽃이 꺼져 버린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않아도 한국 교회는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듣기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설교하기가 매우 힘든 말씀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르고 우리의 부끄러운 곳을 노출시키는 말씀이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 말씀 듣고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직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새로워져서 우리의 입술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가 앞이 보이는 사회가 될 수 있고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뛸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편 6절 7절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 이하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 거짓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자는 사탄의 자손이요, 사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마치 자기 무기인 양 자기의 전공인 양 사용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짓말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가 없습니다.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거짓말을 예사로 합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하고 제사 지낼 때는 굉장히 정직하고 거룩한 백성인 것처럼 보였지만 성전 밖으로 나오면 지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맹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맹세에 대한 말씀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맹세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맹세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꼭 중요하고 심각한 어떤 문제를 놓고 약속을 할 때 사람들이 이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서로가 의심이 가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맹세를 해서 서로의 마음을 안심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서로가 신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놓고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하는 것을 다투어야 되는 어려운 분쟁이 생길 때에는 맹세를 통해서 그 분쟁을 잠재우고 서로를 신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이 정직하다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 약속을 꼭 지킨다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서 맹세함으로서 사람들에게 확인을 시켜주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의심 반 또 우려 반 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저녁에 데리고 나가서 하늘에 있는 별을 가리키시면서 "아브라함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느냐? 못 세지? 내가 너의 후손을 이처럼 많게 하겠다."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사람이 보기에는 구름 잡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잘 믿지 못할까 싶어 맹세를 하시려고 하는데 자기보다 높은 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걸어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 말대로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 하나님이 맹세하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맹세를 들었어요. 이렇게 맹세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몇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맹세할 때에는 꼭 여호와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리고 여호와의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할 때는 반드시 지켜라. 안 지키면 내가 그 대신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맹세할 때는 망령되이 맹세하면 안 되고 헛되이 맹세하면 안되고 일상 생활에서 함부로 습관적으로 맹세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할 때는 하나님 외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나라 사람들은 중요한 일에 맹세를 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의 사건을 가상으로 만드시고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며칠간 집을 비우기 위해서 이웃 사람에게 자기 가축을 부탁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여행을 가려면 가축을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여행을 떠났는데 그분이 여행을 떠난 후에 그만 이상하게 그 가축 중의 양 몇 마리가 죽어 버렸습니다. 남의 양을 맡았던 그 이웃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이 죽어버렸습니다. 자기가 죽인 것도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참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이웃 간에 큰 분쟁이 생길 수 있고 좋았던 우정이 한 순간에 깨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을 가정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맡았던 이웃이 정말로 그 양을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면 주인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내가 맹세합니다. 나는 절대로 양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맹세를 듣는 주인은 반드시 그 말을 그대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상청구를 하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만큼 맹세라는 것은 좋게 이용할 때에는 서로 신뢰할 수 있고 서로 약속을 지키게 하는데 순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맹세를 이제 악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맹세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준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자기의 어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혹은 약간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맹세를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세를 함부로 하는데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게 좀 겁이 났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되고 안 지키면 하나님이 그 값을 찾는다고 하시니 그것이 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피하고 맹세하려다 보니 하나님보다 높지는 못하지만 하나님보다 조금 낮고 그러나 상당히 커 보이는 것을 전부 끌어내어 맹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어떤 사람은 '내가 하늘을 걸고 맹세하노니'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땅을 걸고 맹세하노니' 또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을 걸고 내가 맹세한다. 나는 반드시 약속 지킨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내 머리를 걸고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고 머리로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거짓말이 다분히 섞인 맹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정직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것 저것 아무것이나 끌어다가 맹세를 하는 버릇들이 많았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사회가 믿을 수 없는 사회요, 타락한 사회였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21세기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자기를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맹세 비슷한 것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거래를 하다가 필요 없는 말을 합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을 왜 합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한 수 더 떠서 "저는 사랑의교회 집사입니다." 하기도 합니다. 옷 로비 사건이 한참 세상을 떠들썩할 때 보니까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판 맹세입니다. 자기가 거짓말 안 한다는 것, 자기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든지 과장해서 보이려고 하는 속마음이 그 속에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예예, 아니오 아니오
마 5:33-37 / 김명혁 목사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84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란 종교개혁의 3대 모토를 내 세웠습니다. 그 후 존 칼빈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또 하나의 모토를 내 세우므로 종교개혁 운동을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교회는 항상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때문에 교회의 개혁과 부흥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야말로 개혁과 부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앙의 개혁 못지 않게 삶의 개혁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삶의 개혁 중에서 말의 개혁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말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이지만 말은 또한 마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말을 진실하게 할 때에 마음도 진실하게 되고 말을 착하게 할 때에 마음도 착하게 됩니다.
야고보서3:2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의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와 사회는 말을 믿을 수 없는 나라와 사회로 바뀌어졌습니다. 정치가들의 말은 물론 종교인들의 말도 믿기 어려운 참담한 사회로 변했습니다. 오늘 아침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말의 현주소와 실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솔직하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큰 소리로 장담하는 사람도 아니고 빙빙 돌려가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솔직하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1, 큰 소리로 장담하며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맹세는 자신을 과신하는 데서 옵니다. 자기를 지나치게 믿는 데서 옵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로 장담하며 맹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이렇게 큰 소리로 장담하던 베드로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때에도 큰 소리로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2). 긍정하는 일이든지 부정하는 일이든지 너무 큰 소리로 장담하며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과신하는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대화가운데서 "절대로"란 말과 "죽어도"란 말을 자주 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하면서도 "절대로" "죽어도"란 말을 씁니다. "나는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내 생명과 내 물질을 전부 다 바치겠습니다"라는 과장된 말을 자주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크고 과장된 말을 쉽게 내 뱉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처럼. 예수님은 그와 같은 장담이나 맹세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도 진실도 착함도 사랑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을 믿을 수 있습니까? 솔로몬을 믿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를 믿을 수 있습니까? 도마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엘리야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다 거짓되고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 사람 자신에 대해서 장담을 할 수 있으며 맹세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윗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시39:4,5). 없는 것 같은 인생, 허사뿐인 인생이 어떻게 자기자신에 대해서 장담을 할 수 있으며 맹세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과신하고 자기의 내일을 장담하는 한 부자를 바라보시면서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던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자신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그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달려가는 것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야고보도 맹세하지 말라고 분부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5:12).
오늘 아침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장담하며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우리의 장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큰 소리로 장담하며 맹세할 때 우리는 실수와 잘못을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담하지 말고 맹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문자 그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 말씀은 지나친 말, 꾸민 말, 돌려대는 말,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무서운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정의하면서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마귀는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고 그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저주를 받았고 아담과 하와도 저주를 받아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지금 새벽마다 예레미아서를 읽고 읽는데 거짓말을 퍼뜨리는 죄를 엄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퍼뜨린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 하냐나가 그 해 칠월에 죽었더라"(렘28:17).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죄목은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마지막 날 유황으로 타는 지옥 불에 던지울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라"(계21:8).
성경은 거짓말을 무서운 죄악으로 규정하며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제 9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두 주전에 손봉호 박사님이 설교한대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보다 몇 백배나 거짓말을 잘합니다. 유교적 전통 때문이고 세속주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잘 하고 이웃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잘 합니다.
거짓말은 첫째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과 죄와 질병과 약함을 숨기는 것입니다. 잘못을 하고도 안 한 것처럼 죄를 짓고도 안 지은 것처럼 하고 병에 걸리고도 안 걸린 것처럼 약함이 많으면서도 약함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 놓으라고 분부합니다.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내 놓고 회개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였나이다"(시32:2,3,5).
거짓말은 둘째 이웃에 대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해서 위증과 무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 9계명은 이웃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신19:18은 이웃에게 거짓을 말한 사람을 처벌하라고 했습니다.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19:18). 영락교회의 어떤 집사님과 할렐루야 교회의 어떤 집사님은 담임목사에 대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퍼뜨려왔습니다. 조그만 잘못을 침소봉대하여 큰 잘못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려왔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거짓말을 금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은 패망하느니라"라고 잠언21:28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퍼뜨린 자는 하냐나처럼 죽습니다. 자신을 숨기는 거짓말이나 남을 해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4:25). 행복보다 진실을 귀하게 여기고 예절보다 정직을 귀하게 여기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예, 아니오 아니오 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예는 예라 아니오는 아니오라 하라"는 말입니다. Yes와 No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말을 분명하고 단순하고 정직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모호하지 않게 분명하게 하고 말을 복잡하지 않게 단순하게 하고 말을 거짓된지 않게 정직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빙빙 돌려서 모호하고 복잡하고 거짓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소박하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너무 큰 말을 하지도 말고 너무 장담하는 말도 하지 말고 너무 쎈 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4:15에 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말하며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물론 인사도 인색하게 하고 위로의 말과 격려의 말도 인색하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을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장담하고 맹세하던 베드로가 디베랴 바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회개하면서 말을 적게 했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란 간단한 말만 했습니다. 욥이 고난 중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바라보며 회개했을 때 욥은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말을 적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입술의 죄를 제단의 숯불로 태움을 받은 후 메시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오늘 아침 우리들의 말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장된 맹세의 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빙빙 들려서 하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분명하고 단순하고 정직한 말을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이사야는 자기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입술을 정결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단의 숯불로 태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입술에서 과장된 말과 거짓된 말을 제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대신 정직한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에게는 주님의 도를 전하게 하시고 주님께는 찬양을 올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입술을 정하게 하시옵소서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이다"(시 51:12). "내 입술을 열러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14,15).
우리는 진실합니다
마 5:33-37 / 박상훈 목사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닭고기를 사기 위해서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때마침 정육점 주인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머니는 정육점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만 닭고기가 조금 필요해서 그런데 살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듣고 정육점 주인은 냉장고로 갔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다 팔고 딱 한 마리의 닭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은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 닭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3kg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것보다도 조금 더 큰 것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인은 알겠다는 듯이 그 닭을 들고서 다시금 냉장고로 돌아갔습니다. 주인은 냉장고 문을 열고서 그 닭을 집어넣고 다른 닭을 끄집어내는 듯 하면서 똑같은 닭을 다시금 끄집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닭은 딱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똑같은 닭을 다시금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닭인데도 4kg이 나왔습니다. 주인이 자기의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서 무게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서 아주머니는 그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싸달라고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돈을 지불하고 가게문을 나서더니 갑자기 뒤돌아서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무래도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금 전에 달았던 것 마저 싸 주세요."
그러니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하루는 어떤 어린 아이가 중요한 재판에서 증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는 어린 아이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계속해서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아주 침착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또박또박 대답을 잘했습니다. 변호사는 어린 아이의 입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아이에게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얘야, 너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아버지가 너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미리 다 가르쳐 주셨지? 어때 그렇지?"
어린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린 아이를 또 다시 다그쳤습니다.
"얘야, 여기는 법정이란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네가 솔직하게 대답해야 된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너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된다고 가르쳐 주셨는지 어디 한 번 솔직하게 말해보아라."
그러자 어린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증언할 때 변호사 아저씨가 제 말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가 그럴지라도 정신만 잘 차리고 언제나 진실된 말만 하면 매번 똑같은 말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자기의 거짓말이 들통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탄로날 때는 어쩔 수없이 대가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숨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21:27과 22:15의 말씀을 읽어보면, 거짓말을 하는 자와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까? 그들은 진실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되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거짓될 뿐 아니고 다른 사람들조차도 거짓되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거짓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진리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늘 충만해서 우리의 생각, 말, 행동 등 우리의 삶 자체가 언제나 진실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거짓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이따금씩 맹세를 하셨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난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22:17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냥 말씀하지 않으시고 맹세를 하셨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더욱 북돋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맹세까지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약속은 본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맹세를 하실 뿐만 아니고 우리에게 맹세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컨대 신6:13을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모든 경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맹세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맹세는 제한적입니다. 맹세는 언제 하는 것입니까? 꼭 필요한 때, 중요한 경우에만 맹세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출22:10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기르는 가축을 옆집 사람에게 잠시 맡겨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출타한 사이에 짐승들이 와서 가축들 몇 마리를 물어가 버렸습니다. 또는 몇 마리의 가축들이 병들어 갑자기 죽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경우에 주인의 가축을 잠시 맡았던 이웃 사람은 자기가 가축을 훔치지 않았고, 또 자기가 가축에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뚜렷한 흔적이 증거로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는 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이웃 사람은 자기가 가축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무조건 그 맹세를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주인은 이웃 사람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6:16에 보면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째, 맹세는 지극히 엄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맹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왕에게 맹세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14:22의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종 엘리에셀에게 맹세를 시킬 때도 역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맺을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간에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31장을 보면 야곱과 라반이 미스바에서 돌무더기를 세워놓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서로간에 언약을 맺었습니다. 또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언약을 맺을 때도 역시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서로 간에 맹세했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엄숙합니다.
셋째,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신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만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욕될 수밖에 없습니다. 레19:12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만일 맹세를 지키지 아니하면 증인되신 하나님이 친히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맹세는 해로울 지라도 변치 않고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 11장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입다는 소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맹세를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제 손에 붙여 주시면 제가 이기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저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저를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그 뒤 그는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그가 이기고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먼저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까?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러니 입다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는 자기가 맹세한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헤롯 임금이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면서 헤롯의 마음을 즐겁게 했습니다. 헤롯은 그 딸에게 맹세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내가 다 주겠노라."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서 소반에 담아 헤로디아의 딸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일단 발하면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언제 맹세하는 것입니까? 맹세는 중요한 때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한적입니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맹세는 어떻게 합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맹세는 지극히 엄숙한 것입니다.
셋째, 맹세하고 나면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증인되신 하나님이 친히 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모두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백성들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토대로 살펴볼 때,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맹세의 첫째 원칙을 무시했습니다.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발해서는 안됩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헛 맹세를 하지 말고"라고 가르쳤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하는 맹세가 헛된 맹세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맹세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옳은 것은 그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단순히 아니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에 따라서 일상적인 말에까지 맹세를 덧붙여서 말하기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베드로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어떤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계집종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 소리에 베드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문쪽으로 나갔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칠 속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번 계집종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합세해서 베드로를 몰아세웠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왜냐하면 너의 말소리가 너를 표명하고 있지 않느냐?"
베드로는 너무나 다급해진 나머지 이번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위해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것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맹세를 너무나도 쉽게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맹세의 둘째 원칙도 어겼습니다. 맹세는 본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하늘로도 맹세를 하고, 땅으로도 맹세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맹세를 했습니다. 자기 머리로 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대로 성전으로 맹세를 하기도 하고, 또는 성전의 제단으로 맹세를 하기도 하고,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좋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맹세의 엄숙성을 완전히 손상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맹세를 하면서도 진지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쉽게 맹세를 하는 지경에 이르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맹세의 셋째 원칙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맹세를 하면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변치 말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는 것은 지켜야 되고, 그 외에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33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들의 강조점은 "주께"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그 외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일없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하늘로, 땅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천지는 언젠가는 폐하여질 날이 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가피한 경우에나 사정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천지가 폐하여질 수 있는 것처럼 천지를 두고 한 맹세도 폐하여질 수 있다고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그 좋은 실례가 마23:16-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큰 것으로 맹세하는데도 지키지 않아도 일없다고 가르치고, 더 작은 것으로 맹세하는데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그들은 잘못 가르쳤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강요하고, 자기들에게 별반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식적입니까? 이런 의를 가지고 어찌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율법의 수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34절 중반부입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기에 대한 맹세도 거부하고, 법정에서의 선서나 심지어는 결혼식에서의 서약조차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도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맹세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5:17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따라서 예수님이 맹세 자체를 죄악시하면서 모든 맹세를 금하셨다고는 우리가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실제로 예수님도 맹세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 그러면 그렇다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여라!"
만일 예수님이 맹세 자체를 금하셨다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맹세하라고 말하는 가야바를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언급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여러 번 맹세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맹세 자체를 죄악시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 식의 잘못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맹세의 모든 원칙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편법으로 자기들의 편한 대로 백성들에게 잘못된 맹세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실례를 오늘 본문에서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34절하-35절 말씀입니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여기서 발등상은 발을 올려놓는 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기차를 탄다든지 비행기를 타면 좌석에 발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발등상입니다. 35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여기에 기록된 "큰 임금"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특정한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큰 임금"은 만왕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6절 말씀입니다.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염색약이 발달해서 흰 머리카락은 얼마든지 검게 물들일 수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빨갛게 물들일 수 있고, 노랗게 물들일 수도 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흰 터럭은 노인을 상징하는 것이고, 검은 터럭은 젊은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수명은 자기가 임의로 단축하고 늘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되고, 그 외에 다른 것들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7절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일상적인 대화에 쓸데없이 맹세하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그 동기가 불순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다닐 때 들고 다닐 가방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방을 사기 위해서 잠시 가방가게에 들렀습니다. 이것저것을 살펴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주인에게 그 가방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목사님을 보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 실례지만 혹시 목사님이 아니십니까?"
목사님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그러자 주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애교를 떨었습니다.
"제가 딱 보니까 알겠는데요, 뭐! 목소리도 부드러우시고 인품도 아주 훌륭해 보이시는 데요.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저의 주변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 가게 주인은 목사님에게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목사님에게까지 이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27,000원에 파는 건데 7,000원은 관두시고 원가인 20,000원만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은 순진했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분 좋게 가방을 사들고 왔습니다.
며칠 뒤에 어떤 모임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목사님도 똑같은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친구 목사님에게 자기가 며칠 전에 아주 싸게 그 가방을 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목사님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진한 사람 다 보겠네! 자네는 장사꾼이 본전에 판다고 말하는 것이 공인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깜빡했구먼. 나는 똑같은 가방을 15,000원 주고 샀는데?"
그러면서 친구 목사님은 소위 말하는 3대 거짓말이 무엇인지 다시금 목사님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 장사꾼이 본전에 팔든지 밑지고 판다는 것일세. 둘째, 노처녀가 시집 안간다는 것일세. 셋째, 나이 드신 분이 얼른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일세."
요즘 그런 것은 거짓으로 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거짓으로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으로 거짓의 어두움을 몰아내야 될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위선이 난무하는 이런 세상에서 진실되게 산다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손해를 감수해야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더 큰 것을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늘 성령으로 충만해서 모든 거짓된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맹세
마 5:33-37 / 이정선 목사
우리가 살면서 참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경우 중 하나는 아무도 나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을 때입니다. 특히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훨씬 더 많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어서 종종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합니다. 참 슬픈 일이지요. 또 결백을 입증하지 못해서 죄없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누명을 벗고 풀려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백이 입증되었다 한들 이미 죽은 목숨을 되살릴 길이 없고, 흘러가버린 세월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진실과 결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목숨과 명예, 그리고 수많은 세월을 빼앗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건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인정받지 못하면 명예를 잃게 되기 때문에 그 잃을지도 모르는 명예를 담보로 해서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고 주장하고 선언하는 것이 맹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거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이 쉽게 명예나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맹세를 하면 그 하는 말이 좀더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맹세를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맹세가 남발되다 보면 그렇기도 하겠지요. 또 명예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맹세를 해도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보다 더 진실하고 권위있는 대상을 찾아서 그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진실을 보증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는데, 이 번역은 상당히 다른 의미로 읽혀지기 쉽습니다. ‘망령되다’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은 문제지요. 원래 이 세 번째 계명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잘못 부르거나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하고 맹세를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 속상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니까 사람들이 믿어준단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만 대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남발되고 잘못 사용되겠어요? 나중에는 매우 악하게 사용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곤란한 입장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군사정권 시절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학생운동하는 여학생을 잡아와서 심문을 하면서 성고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혐의를 받은 경찰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교회 집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즉 이것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기독교,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 경찰관은 성고문한 사실이 인정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었단 말이죠. 바로 이런 경우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세 번째 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언급하시는데,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맹세,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한 세 번째 계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율법 자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율법에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한 규범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민 30:2). 이것은 하나님께 약속을 했거나 또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과 약속을 했을 경우 마땅히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우습게 본다는 뜻 아니겠어요?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면서 하나님을 보증인으로 세웠는데 그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약속의 보증인이 된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즉 구약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또 그것을 지키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 계명을 확장 해석하시면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맹세는 매우 불완전하고 거짓된 것일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요? 예수님이 붙잡혀 재판을 받고 능욕을 당하시던 밤, 주님이 걱정되어 거기까지 몰래 따라 들어갔던 베드로는 사람들 틈에 끼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나가던 사람이 “당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저 예수의 한패거리 아냐?” 하는 것입니다. 기겁을 해서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얼른 다른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의 한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그랬는데도 조금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이 친구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것 보니까 예수의 패거리인 게 분명해.” 이러는 겁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했어요. 저주했다는 것은 만약 자기가 예수의 패거리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성질이 좀 급하고 앞뒤 재지 않는 신중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성품이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처한 상황이 급하다 보니까 이렇게 악한 맹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라고 다를 게 있겠어요? 정말 억울함을 풀 길이 없어서 맹세를 할 수는 있을진대, 누구나 이렇게 맹세를 할 수 있다면 정말 억울한 경우라 하더라도 누가 그 맹세를 믿어줄 수 있겠어요? 물론 거짓 맹세하는 것과 진실한 맹세는 차이가 있고 잘 살펴보면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거짓 맹세와 진실한 맹세가 구별될 수 있다면 뭐하러 굳이 맹세를 합니까? 맹세 아니라도 거짓인지 진실인지 구별이 되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사람이나 몹쓸 짓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얼굴 들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할 게 아닙니까?
재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서로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고 우기니까, 조사를 하고 수사를 해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밝혀내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계속하니까 수집된 증거를 근거로 해서 누가 가짜 맹세를 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말을 진짜처럼 잘하느냐에 따라서 그 판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겠네요.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를 늘 체험하면서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만 불리해도 쉽게 거짓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모자라서 맹세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를 해도 하나님의 이름까지 팔아서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화가 나시겠어요?
맹세는 뭔가를 걸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걸어야 할 것이 마땅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럼 하늘을 걸고 하는 것은 괜찮을까요? 우리가 종종 ‘하늘에 맹세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에 하늘에 걸고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어 맹세를 하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땅을 걸 수도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땅에 발을 걸치고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곳이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땅도 결국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이 거하는 성,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책임 아래 있는 거룩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걸고 맹세하면 되겠군요. 그래서 자신의 머리를 걸고 맹세하면 괜찮을까요? 자신의 머리를 건다는 것은 명예, 심지어는 목숨을 건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머리를 걸고 맹세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내 머리라 할지라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머리카락을 희거나 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관할에 속한 것이라는 말이죠. 내 머리, 내 목숨이라 할지라도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소유권보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소유권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까 설령 내 머리를 걸고 맹세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에 근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했습니다. 우리가 맹세를 하는 것까지는 뭐 상관없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권위를 우리의 가치없고 불안정한 맹세에 빌려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습니까?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이처럼 맹세 자체를 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맹세를 하고 삽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심지어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도 있어가지고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여 그것을 암송하곤 했었습니다. 법정에 가면 선서를 한다거나 결혼식에서 서약을 하는 것이 모두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지금도 일체의 서약을 거부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규범과 법질서를 위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도 시민권을 얻으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법과 질서를 지키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감옥에 가는 것을 불사하면서까지 모든 서약을 거부하는 것은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겠군요.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가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옳은 것이면 그냥 옳다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됩니다. 거기서 지나는 것, 즉 맹세를 하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게 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는 것이다, 즉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집사인데 어떻게 성고문 같은 악한 일을 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악하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입니까? 거짓말을 하더라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면 됐지 왜 하나님을 거짓말하게 만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설령 진실을 말하는 경우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면서까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자꾸 아니라고 강조하는 경우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인 수가 많습니다.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위장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거창하게 맹세씩이나 하면서 사실을 부풀리고 거짓을 감추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맹세를 했다고 지키고 맹세를 하지 않은 약속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작은 약속에도 성실하고 말 한 마디라도 정직하게 행할 때, 우리의 말이 권위를 갖게 되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빙자해서 정직하지 못한 우리의 마음이 정직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직함이 인정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