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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헌에 대한 주석의 위험성을 보여주고자 “사기「조선열전」의 재검토” 시리즈 중 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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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에서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의 영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으며,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기「조선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한무제의 군대와 위만조선의 전쟁을 살펴보자. 내용을 잘 살펴보면 통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통설에서는 위만조선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기「조선열전」말고 도대체 어느 문헌을 보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우선 사기「조선열전」에 나온 전쟁기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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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天子募罪人擊朝鮮.”
(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게 하였다. )
[2]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 좌장군의 부하인 다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 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
[3]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 서군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
[4]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 [위]산이 돌아 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을 주살하였다. )
[5] “使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得以從事. ...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 天子. 天子誅遂.”
(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 좌장군 휘 하에 명하여 곧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 )
[6]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 한음․왕협․로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로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
[7]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 攻吏.”
( 원봉 3년(B.C.108)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 으나,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기가 또 [한에] 반하여 다시 군 리들을 공격하였다. )
[8] “左將軍使 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 로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
[9] “封參爲澅淸侯, 陰爲萩苴侯, 唊爲平州侯, 長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涅陽侯.”
( 삼을 봉하여 홰청후로, 음은 추저후, 협은 평주후, 장은 기후로 삼았으며, 최는 아버지 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 )
[10]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市. 樓船將軍 ... 當誅, 贖爲庶人.”
( 좌장군을 불러 들여 [그가] 오자,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 로 기시하였다. 누선장군도 ... 주살함이 마땅하나 벌금을 내고 서인으로 삼았다. )
[11]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 , 乃反 見疑. 荀 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는 나라의 험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番禹)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 서 열후된 사람이 없었다. )
[이하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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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를 일고해보면 도대체 한무제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위만조선의 화친파가 한나라와 협상하면서 주전파를 제거하고 항복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적인 전쟁에서는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이기지 못했으며, 전쟁을 지휘했던 장수들은 모두 벌을 받고 있다. 공격을 주도했던 좌장군은 기시의 형을 당했으며, 그나마 화친을 주도했던 누선장군만 참형을 면하였다.
또한 한무제의 전체적인 전쟁의 진행은 위만조선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화친을 추진하여 한나라의 편을 들도록 시도하였다. [4], [5]에서 보듯이 화친을 실패한 자들을 모두 주살한데서도 알 수 있다.
마침내는 화친파를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을 종식하게 되었다. 즉 위만조선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8]의 4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만조선의 항복 후 [9]에서 보듯 한나라는 화친파를 주도한 자들에게 제후를 임명한다. 그것은 토착세력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처음 설치했다는 군현은 토착세력과의 소통을 위한 몇몇의 관리들만이 존재한 문서상의 군현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기의 다른 부분을 보면 군을 설치했거나 장성을 쌓았거나 실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그 명칭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9]에서 보듯이 위만조선의 귀족들에게 봉한 후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사군의 설치에 대해서는 그저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 뿐이다.
연나라가 동호를 공략하고 설치한 군에 대해서도 5개 군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 위만조선의 영역에 4군을 설치하였다면 그 명칭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4군의 명칭이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한서이다. 기원후 시기인 후한대에 와서야 4군의 명칭이 나타난다. 한서「지리지」에는 그나마 낙랑군과 현도군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어느 시점의 상황을 나타낸 것인지 위치가 어디인지 불명확하다. 단지 후세의 학자들만이 부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갑론을박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약간 벗어나는 것이지만, 중국 문헌이나 문헌에 붙은 주석을 사용할 때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사군 중 기록에 없는 임둔군과 진번군에 대해서는 한서「무제기(武帝紀)」에 대한 안사고(顔師古, 당나라 사람, 581〜645년)의 주석에 나타난다. 참고로 다음에 그 내용을 실어본다.
“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 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 治霅縣, 去長 安七千六百四十四里, 十五縣. “
( 신찬이 말하기를『무릉서』에 이르면, 임둔군은 동이현을 다스렸으며 장안으로부터 거리가 6천 백 삼십 팔리가 떨어져 있으며 15개의 현이 있다. 진번군은 삽현을 다스렸으며 장안으로부터 칠천 육백 사십 사리가 떨어져있고 15개의 현이 있다. )
통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후한서「군국지」에 낙랑군까지의 거리를 5000리라고 하였으니 진번군은 낙랑군의 남쪽에 임둔군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그러나『무릉서』의 이 거리가 확실한 것인가? 다음에 이 기록의 허구를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 臣瓚曰, 茂陵書, 象郡治臨저, 去長安萬七千五百里. ”
( 신찬이 말하기를『무릉서』에 이르면, 상군의 치소는 임저이며 장안으로부터 거리가 1만 7천 오백리이다. )
여기서 상군은 베트남 북부지역으로 후대에 일남군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다.
전한 시기에 1천리는 지금 거리로 498.6km이다. 그러므로 17500리는 8725.5km가 된다. 중국 장안에서부터 이 거리라면 지금의 호주에 해당한다. 굴곡지수를 사용하더라도 잘해야 인도네시아를 넘어선다.
뭐 입맛에 맞는 문헌만을 사용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 통설의 특징이지만.
갑자기 수백년이 지난후 나타나는 새로운 기록은 거의 대부분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기록을 엄격하게 고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 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침공에 대해, 실제 사건이 일어난지 600년 가까이 지나서 삼국지《위략》에 갑자기 나타난 진개의 고조선 2000리 공격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곳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는 통설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통설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대동강유역의 나라였다. 대동강유역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했다는데, 나머지 3군은 대동강유역과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 설치되었다. 굳이 위만조선의 멸망과 관계없이 설치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역시 통설의 허구를 드러낸다.
그러다보니 통설의 한줄기는 주장한다. 위만조선이 나중에 요동지방을 일부 차지하였다고. 또 어떤 주장은 천산산맥까지 위만조선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현도군을 압록강유역에, 임둔군․진번군을 한반도에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문헌을 보더라도 이것을 입증할만한 증거는 없다. 그저 꿰맞추기 위한 주장일 뿐이다.
다음에는 위만조선의 최후에 대해 살펴보자.
史記「建元以來侯者年表」와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살펴보면, [7]의 내용은 원봉 3년(B.C. 108년)의 사건이고, 성기를 제거한 [8]의 내용은 원봉 4년(B.C. 107년)의 사건이다.
또한 漢書「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진번군, 임둔군도 포함)은 B.C. 108년에 설치되었고, 현도군은 B.C. 107년에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낙랑군이 설치된(비록 문헌상이지만) B.C. 108년에는 아직 왕험성은 성기가 점령하고 있던 상태였다. 즉, 낙랑군은 왕험성과는 무관하게 설치된 것이다. 낙랑군 조선현을 왕험성에 설치하였다는 통설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통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렇게 신봉하는 중국문헌의 고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위만조선과 한사군에 관련된 통설은 사기「조선열전」만 제대로 분석해 보아도 허구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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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사군 문제에 대해서는 몇년 전 김용만 선생님이 연재하시던 미완성 글(김선생님이 주로 5~7세기 쪽을 연구하고 계셔서 고조선 쪽까지 본격적으로 들어가진 못하시는듯 합니다만..)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이 한사군의 명칭은 이미 [사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다만 통설과는 전혀 다른 이름(획청, 추저, 기, 온양, 평주)으로 나오는데, 그게 바로 고대의 별님이 지적하신바와 같이 토착세력이 투항하고 나서 세워진 것입니다. 확실히 통설과는 달리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긴 하지요. // 이건 사소한 것인데, 남월 지역에 설치된 상(象)군을 요즘에는 베트남 북부 지역이 아니라 광서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따라서 베트남
북부의 최남단에 있었던, 즉 참파와 접한 일남군은 전혀 다른 지역입니다). 물론 중국은 상군을 아직도 베트남 북부에 설치된 것으로 주장합니다만... 베트남도 이런 문제가 있어온 것을 보면, 우리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하여튼 광서성이면 거리에 대한 기록은 더욱 비논리적이 되겠군요.
기원전 107년까지 왕험성이 함락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에는 조법종 교수가 거론한 근거가 다소 무리가 있더군요. 조법종 교수에 대한 반론은 역사자료실에 올린 258번 글의 논문을 참조하시면 좋으실 듯 합니다. 물론 반론이 나왔다고 하여 조법종 교수의 왕험성은 낙랑군이 관련없다는 지적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의미있는 지적으로 저는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에는 남월을 평정하고 9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군명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확대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적하신 논문은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월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지만, 그 기록도 한사군과 같이 좀 과장된 것은 아닙니까. 또한 한사군처럼 이후의 문헌에 그 9군의 명칭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베트남은 남월이 기원전 111년(고조선이 멸망하기 몇년 전이죠) 전한 무제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 당나라 때까지 1000여 년 넘게 중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물론 상당히 긴 시간이기에 이것을 단순히 '중국 치하'로만 볼 것인지도 좀 의문이긴 한데, 아무튼 7군 내지 9군(제가 알기로 원래 7군이 설치되었는데 나중에 군을 좀 개편하는 과정에서 9군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에 대한 기록은 고조선에 비해 자세한 편이라 과장으로 보긴 어려울 겁니다. 다만 베트남도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