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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와의 대화
지난 4반세기 동안 나는 마이크를 피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 나는 확성장치 사용을 거부합니다. 말을 하면 한 장소가 생겨난다고 봅니다. 장소는 뭔가 귀중한 것인데도, 빠른 교통기관, 표준화된 계획 방식, 영사 스크린, 확성기 등이 만들어낸 균질한 공간 탓에 상당히 많이 말살돼버렸습니다. 11
학자에게는 머리의 습성만큼이나 가슴의 습성 또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에 뿌리를 둔 내적 감각기관의 수련을 옛날에 썼던 아스케시스라는 그리스어로 지칭하면서 마음의 비판적 습성에 없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꼬박 천년 동안 교회는 연구와 성찰이라는 균형 잡힌 전통을 길렀습니다. ... 오늘날 고등 지식 추구에서 마음이 습성과 그 미덕을 기르는 일은 그리 중시되지 않습니다. ... 저는 비판적 배움과 금욕적 배움 사이에 상호보완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대학교가 현재의 비판적 전문적 학문 분야에 부여한 것과 동일한 지위를 금욕적 이론과 방법, 학문 분야에 되찾아주고 싶습니다." 아스케시스는 통찰이 갖추어야 할 바탕을 마련해 준다. 아스케시스가 없으면 통찰은 약탈적, 아전인수적, 편파적이 되고, 마지막에는 냉혹해진다. 아스케시스에 바탕을 둔 통찰, 중세시대에 지성이라 부르던 저 정신적 영적 이해가 일리치 글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18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연구를 시작하던 초기에 학교가 표면적으로 내건 기회의 균등이라는 목표를 학교 스스로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이런 행위는 교육을 독점하여 대다수의 능력 밖으로 가격을 높여 버림으로서 이루어졌다. <학교 없는 사회>에서 그는 학교교육을 소비자 사회의 기초를 만드는 의례행위로 보았다. 원래 학교school의 어원인 그리스어 숄레schole는 여유롭다는 뜻이며, 일리치에 따르면 진정한 배움은 자유민만이 여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적이고 강요된 의례행위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순적이다. 21
<학교 없는 사회>의 마지막 장인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부활에서 일리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형제 이야기를 풀이한다. 미리 내다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은 프로메테우스는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와 지상의 인간에게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메테우스는 사실을 문제로 바꿔놓았고, 필연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운명에 항거했다. 돌이켜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는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헤시오도스와 후대 그리스 작가들에 의해 멍청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충고를 거부하고 판도라와 혼인했다. 판도라는 삶의 온갖 고통과 악이 든 상자를 열어 모두 빠져나가게 했다. 그리고 뚜껑을 닫았을 때 상자 안에는 오직 희망 하나만 남았다. ...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자연-환경을 거역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은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 오늘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고 전적으로 인공으로 이루어지는 환경을 건설하고자 하지만, 거기에 맞도록 자기 자신을 계속 고쳐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에서만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일반적으로 희망은 자연의 선의를 신뢰하는 믿음을 뜻하는 반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기대는 사람의 계획과 통제에 따른 결과에 기댄다는 뜻이다. " 23
일리치는 개발을 존립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 규정하고, 현재 각기 나름의 상황에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대로 된 대안도 없이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했다. ..."부유한 나라는 이제 친절하게도 교통제증, 병원 감금, 교실이라는 구속복을 가난한 나라에게 입혀주면서 그것을 국제적 합의에 따라 개발이라 부르고 있다. " 24
일리치는 도구tools라는 말을 선택했는데, 흔히 쓰이는 추사적 용어인 기술보다 좀더 소박한 용어인데다가 논지를 더 잘 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치나 고속도로나 보건체제 등이 모두 똑같이 도구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 말을 썼다. 그는 도구는 두 가지 분수령을 통과한다고 했다. 첫째 분수령에 이르면 도두가 생산적이 되고, 둘째에 이르면 반생산적이 되어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변한다고 보았다. 28
일리치는 정책적 선택을 정치적으로 좌파-우파라는 축선으로 표시한다고 할 때, 그 축선을 공생과 극단적 독점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제도적 선택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축선으로 보완하지 않는다면 여러 폭적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공생의 도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율적, 창의적 교류와 개인의 상호의존 속에서 실현되는 개개인의 자유를 촉진하는 반면, 극단적 독점은 그것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29
실제로 일리치는 사회가 도구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소름끼치는 종말이 오리라고 드러내놓고 예언하고 있다. ... "안정, 변화, 전통 간의 균형은 깨졌으며, 사회는 공유된 기억 속에 내리고 있던 뿌리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혁신을 위한 방향감각도 상실해 버렸다. ... 무제한의 변화속도는 정당한 공동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 인위적 노후화는 규범적 과거로 이어지는 모든 다리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30
17세기 초에 이르러 새로운 합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즉 사람은 사회에 부적합한 상태로 태어나며, "교육"을 받지 않으면 그 상태 그대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생존을 위한 필수 역량의 반대를 뜻하게 되었고,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형성하는 사실에 대한 평이한 지식과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이라기보다 하나의 과정을 뜻하게 되었다. 교육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생산되어야 하는 무형의 상품을 뜻하게 됐으며, ... 마치 원죄를 타고나듯 아둔함을 타고나는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급선무는 사회의 눈으로 볼 때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이다. 34
교육은 전문화된 기관에서 아껴가며 제공함으로써 공급이 부족한 상태로 유지된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이겠지만 ... 학교가 사회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정말로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희소성은 확실성의전형으로, 우리가 열성적으로 믿음으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태를 유지한다. 35
서양의 근대화란 표준어가 토착어를 길들이고 식민지화하는 과정이라고 서술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모어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모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 ... "세계 전역에서 산업화되지 않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다수의 언어를 구사한다." 41
그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모든 역할 이전의 인간, 우연을 제외하고는 성적 구별이 부여되지 않 인간이라는 관념은 아주 현대에 와서 생겼음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전의 사회는 모두 비대칭적이며서 상호보완적인 남녀의 두 영역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전통사회에서 칼 폴라니는 현대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시장관계가 문화와 풍습이라는 토양으로부터 뽑혀나왔다는 말로 묘사했는데, 이를 인류학적으로 표현하면 성별이라는 보호막으로부터 성의 지배로 바뀐 변화로 정의할 수 있다. 43
성별은 남자와 여자의 온갖 차이에 앞선 인간의 동질성을 공유한다는 오늘날의 사상를 부정한다. 이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의 경험이 삶의 기능을 이루는 세계관에 속한다. 내가 어느 쪽에 있든 내가 손닿을 수 없는 뭔가가 오로지 상대 성별의 말과 외양과 행동에 나타나는 것으로만 알 수 있는 뭔가 있다. 44
성차별이라는 주장이 일단 존재하게 되면 여자들 대부분이 남자와의 무한 경쟁에 노출되기 때문에 이전보다 나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별이 지배하는 조건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집단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한다. 상호의존 덕분에 투쟁과 착취와 상대방을 짓밟는 행위에 한계가 그어지는 것이다. 토착 문화는 성별 간의 휴전이며, 때로는 잔인한 휴전 상태에 있기도 하다. ... 희소성이 지배하는 조건에서는 전쟁을 계속하도록 강요당하며 여자 개개인에게 언젠가 새로운 형태의 짓밟힘이 강요된다. 성별이 지배하는 조건에서 여자는 종속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 45
일리치는 순전히 경제 중심의 사회란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여성은 바로 이 전제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상처를 입기 때문에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적 범주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서게 됐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권주의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기존 범주 내에서 합법적으로 조작된 평등을 택함으로써 마찰 없는 무한경쟁의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는 일에 매진하게 됐다. 46
낱말이 분리되는 경우에는 일찍이 8세기에도 간간이 있었지만,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다른 수많은 변화와 아울러 하나의 일반적 관행이 됐다. 각 장에 제목과 부제가 붙었고, 인용 표시가 들어갔으며, 문단, 난외주석, 차례 찾아보기 등이 모두 추가로 생겨났다. 책은 이제 글읽기 뿐 아니라 참고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50
일리치는 컴퓨터를 이 새 시대의 뿌리 은유라 부른다. 그가 말하는 평민 문자문화라는 개념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페르드낭 드 소쉬르는 언어를 하나의 기호체제로 보았고, 앨런 튜링은 만능기계를 꿈꾸었으며, 노버트 위너는 인공두뇌학이라는 용어를 만들너냈고, 에이빈 슈뢰딩거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우는 크기의 유니백이라는 이름의 컴퓨터가 있다는 사실이 1950년대에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훨씬 이전에 인간의 유전자까지도 이진수 기반의 암호로 이루어져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아 맞췄다. ... 20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지류가 흘러들어 일리치가 1980년대 중반에 깨달았던 흐름이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홍수가 됐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 위그는 일리치가 비판적 기술이라 부른 것을 위한 자리를 철학 안에 마련했다. 그는 기술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부터 이어내려 온 신체적 약점을 위한 치료법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기술을 치료 활동으로 보는 절제된 관점 덕분에 그는 그 적용에 분명한 한계를 둘 수 있었다. 52-53
인공두뇌를 모형으로 삼는 세계, 컴퓨터를 감각 지각의 뿌리 은유로 삼는 세계는 위험하며, 그 한가운데에 텍스트 기반의 문자문화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동안만 의미가 있다. 56
원형의 물은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게 해준다. 세례의 물은 거룩한 축복을 가져온다. 망각의 강 레테의 물은 죽은 자들의 발에서 기억을 씻어내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물로 운반해가고, 그곳에서는 방랑시인들이 그들의 기억을 건져낸다. 그러나 일리치는 관리의 강도가 일정 한도를 넘어서면 이러한 연관성이 끊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 20세기의 물을 변신시켜 원형의 물과는 섞을 수 없는 액체로 만들어 버렸다. 58
행성 지구, 전 세계적 굶주림, 생명에 대한 위협 등에 대한 생태학 담론이 띄는 추상적 모습을 대립시켰다. 이들은 얼래스테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이 다루는 주제를 반영하며, 덕은 형태가 잡힌 관습으로서 풍습이 형성되고도 그 풍습이 적용되는 영역이 제한되어 있는 곳에서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덕이 전통적으로 노동, 수공예, 주거, 고통 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런 행위를 지탱해주는 것은 추상적 지구, 환경, 체제가 아니라 바론 이런 행위의 흔적으로 풍요로워진 그 흙이다. ... 흙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59
그는 의미의 조건으로서 제한을, 또 경험의 표현으로서 고난을 지속적으로 거듭거듭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이러한 제한이 본래부터 구체적인 존재에 내재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농경이 토양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처럼 도구는 신체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가면 환부가 넓어지고 깊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천벌이 기다리고 있다. 60
나는 인간과 동물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병들게 만드는 독, 방사능, 상품 및 서비스의 홍수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능력이 있는 어떠한 통제 복합체도 상상할 수 없다. 이 세계로부터 빠져나갈 길은 없다. 나는 창조되었던 모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가공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공포가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 책임은 이제 하나의 망상이다. 그 같은 세계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갖가지 기술의 조합, 환경 보호, 그리고 이들 기술의 결과에 적응하는 것으로 압축되며, ... 61
생명이라는 말은 지구상의 생명에 대해 말할 대나 잉태와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생겨난다는 등으로 말할 때 실체가 있는 명사로 쓰인다. 환자의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나 그들 생명의 질을 저울질하는 생명윤리학자도 같은 의미로 이 낱말을 사용한다. 이처럼 철저히 새로운 담론 속에서 생명은 인격과의 연관성을 잃고 궁극의 자원이 된다고 일리치는 말한다. ... 일리치에 따르면 생명은 새로운 광신 행위의 구심점이다. ...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숭배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인간의 손 안에 놓인 우주에 대해 말한다. 그와 같은 담론 속에서 생명은 역설적인 하나의 몸짓을 통해 숭앙받고 조작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유대-그리스도교에서는 피조물이라는 부분을 특히 역설하면서 피조물과 하느님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강조했다. ... 생명은 이러한 차이를 녹여내는 일원론적이고도 균질한 과정의 표시이다. ... 한 사람의 인간인 예수는 신이기도 하다는 계시는 심오한 반전을 거쳤다. 하느님이 자신을 선물로 준 것이 생명인데, 이 생명이 공허한 실체가 되었고 이제 그것으로부터 새로이 수많은 가상의 신을 불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65
1. 교육은 만들어진 신화다.
(첫학교)거기서 나를 지진아로 판단하더라. 나로서는 무척 잘된 일이었다. 2년 동안 할머니 댁 서재에서 소설책을 읽으며 일곱 살 악동이 호기심을 느낄 만한 온갖 것들을 사전에서 뒤져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70
기획이라는 낱말을 나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사전을 뒤져보았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사전에 오른 낱말이다. 인적자원고 드렇다. 인간을 어떻게 인적자원으로 만든단 말인가? 72
나는 학교라는 제도를 폐지한다는 뜻으로 학교교육의 탈피라는 말을 사용했다. 학교 자체를 없애려 한 게 아니다. 75
신학을 공부하며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둔 주제는 교회학이었다. 교회학은 교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특별한 공동체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서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라든가 법따위가 아닌 사회 현상을 연구하려 한 최초의 시도인 셈이다. 76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이라는 절차 때문에 멍청해지는 것을, 혼자 힘으로 배울 수 없다는 말을 직접 듣고는 무능과 무기력에 빠져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학교교육은 소비사회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는 일정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배움을 조각조각 잘라 양으로 잴 수있다거나, 배움을 얻으려면 어떤 과정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믿게 만든다. 77
고유의 특권이 결여된 상태에다 사람들 스스로 짊어지는 차별을 섞어 넣은 것 의무적인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학교는 개인이 자의에 따라 배우고자 하는 구체적인 과제를 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러나 학교가 의무적이 되면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얼빠진 사람, 배운 사람, 정신적으로 우쭐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79
점점 더 다른 형태의 의무적 학습이 현대 사회에 제도로 자리 잡게 되리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학습은 법 때문이 아니라 다른 책략 때문에 의무적이 된다는 것이다. 에를 들면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고 있다고 믿게 하거나, 강제로 연수교육에 참석하게 하거나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교류가 잘 되게 준비하는 방법이라든가, ... 놀이하는 방법 등을 배우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81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뭔가를 배워웠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교육의 획득이라는 것과 서로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교육을 희소성이 전재된 상태에서 배우는 것으로 즉 지식이라 불리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은 희소하다는 전제 하에 배우는 것으로 정의하게 됐다. 82
2. 세계속의 증인 역할
어떤 사람이 슈마허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한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참 아름다운 답변이었다. 코르 교수님, 교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건 제가 읽고 있는 슈마허의 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완벽하고 세련됩니다. 그러나 코르는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보다시피 슈마허처럼 정말로 영리한 사람과 나같은 사람은 서로 차이가 있지요. 슈마허는 모든 걸 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거든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 95
생쥐형 동물은 물리적인 이유 때문에 2.5 - 25세티미터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하곤 했다. 코끼리 크기로 자라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사회와 사회의 여러 측면 역시 좁은 범위의 크기 한도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형태와 크기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96
대부분은 다중언어를 어린이, 부모, 국가, 교육자가 부딪히는 문제점으로 다루거나, 아니면 특수한 상황에서 제2,제3의 언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특권으로서 많은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다루었다. 이는 호모 모놀링귀스 에스트 homo monolinguis est 라는 가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제 전체가 국민국가의 탄생과 관련하여 정말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105
나는 사람들에게 남아메리카로 떠날 경우 견유학파의 냉소적인 시각으로 가야한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다. ... 헬렌은 어느 페루 여인과 함께 6년 동안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111
당신은 이 부분을 나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당신은 190년대에 쓴 사라져가는 성직자라는 글에서 믿음의 신비를 세상에 알리려면 교회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철저히 삼가야 한다고 했다.
그랬다. 25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교회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사용하여 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황이라 해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현재와 현 시대의 확실성을 바탕으로 굳건히 세워진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이렇다. 최선이 어떤 면에서 최악으로 바뀌는 타락의 힘은 너무나도 강하다. 그래서 우리 중 몇몇 사람은 교회라는 맥락을 벗어나 스스로 철저히 무력해짐으로써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언할 사명을 띄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18
3. 파국적 단절
원제의 convivial(공생을 위한 도구, tools for convivial, com 함께, vivial 살다) 그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 낱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산업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미래 사회에 대한 이론을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규모와 한계를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계는 어떤 한계 내에서만 노예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기계는 새로운 종류의 농노제도로 이어진다. 교육은 어떤 한계 내에서만 사람들을 인공의 환경 속에 맞춰 넣을 수 있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세상 모든 곳이 학교나 병동 내지 감옥이 된다. 123
나는 우리가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분명히 해두고자 했다. 나는 주장한다. 전문 언어학자의 생각과는 달리 ,서로 진정하고 대화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없는 소통 - . ... 도구가 일정한 강도 이상으로 성장하면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꺾어버리게 되는데, ... 나는 반생산성이라는 개념을 세우고자 했다. 125
나는 도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가 사회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도구가 하는 말을 사회가 하나의 객관적 사실, 즉 하나의 확실성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를 분석하는 작업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126
인류학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대체로 공간을 3차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걷는 것을 3차원 좌표로 표현되는 한 지점으로부터 3차원 좌표로 표현되는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훨씬 나중에 와서야 가능해진 개념이다. 인간이 걸을 때 이동력을 행사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운송 관련 책자에서 아주 흔히 보듯 발을 자력 이동을 위한 기계로 취급하는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 그러니 기술에 대한 내 생각은 기술이 무엇을 말하는가에서 기술이 필연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쪽으로 점점 더 옮겨가고 있다. .... 자신이 이동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스스로를 3차원 직교좌표 공간 속에 두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경험과 현실감각을 직교좌표 공간 내로 제한한다. ... 나는 장 폴 사르트르의 표현을 고수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한 것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 나에게 행한 것에 대해 나는 영원히 책임을 느끼게 될 거이다.' 3차원 직교좌표 공간 속으로 한정되지 않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129
소위 발전의 이점은 원래 의도된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하는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131
그때 나는 뭔가 크고 상징적인 사건이 월스트리트의 붕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억명의 사람들이 그저 머리를 쓰고 자신의 감각을 믿은 덕분에 그렇게 됐다 .이제 우리는 산업과 정부가 하는 일 대부분을 사람들이 나름의 목적을 위해 오용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133
토착 스파임의 시공간 즉 우리의 확실성과 저쪽 세계의 확실성 사이를 오가는 나그네가 되기 위해서였다. - 스파임은 아인슈타인이 공간space과 시간time을 합쳐 만든 낱말로 시공간spime을 나타낸다. 이반일리치는 토착 언어와 그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 및 전통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토착 스파임 vernacular spime이라는 표현을 썼다. 137
나는 공적인 자리에서 점점 더 입을 다물게 됐는데, 매우 신중하게 전통적인 의미의 낱말을 고른다 해도 내 할아버지가 아셨던 개념을 나타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우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념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41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 국가 내의 주체가 될 때, 즉 하나의 생명이 국민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우리는 의료 관리가 사람을 인격체가 아니라 출생 이전부터 뇌사 이후까지 관리가 가능한 구성체로 다루게 될 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논의할 것이다. 142
나는 특정 사물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특정 낱말을 입에 올린다든가 특정 감정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도 거부하며 살아간다. 나는 파멸을 가져오지 않는 원자폭탄에 대해 명상하는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143
이중적 인간으로 행동하거나 이중적 인생을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데 있어 우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시대의 경제적 인간으로 행동하면서 특정 직업을 수행하고 그럼으로써 마음에 상처를 입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144
4. 어둠 속의 촛불이 되라.
11세기까지 십자가 위의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제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심장이 찔려 피가 흘러나오고 있으면서도 살아 있으며, 태양을 머리에 쓰고 있다. 그가 확실히 살아 있다는 것을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아이콘 내지 표의 문자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신체가 아니다. 9세기에 들어 차츰 의복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알몸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신체로 묘사된다. 심장에서 피가 흐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본다. 12세기 말에 이르면 그는 죽은 사람으로 표현된다. 고개가 기울어지고 신체는 고통을 당한다. 온갖 수단을 사용해 육체적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수난이 손과 발에 성흔으로 새겨질 정도였던, 그리스도교에는 그에 해당하는 낱말조차 제대로 없었던 새로운 것 - 연민 - 을 이 아시시의 성인이 느끼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54
<의학의 응보>의 주요 논지는 우리 사호에서 의료화가 고강도로 일어나서 진단과 치료 모두를 의학이 독점한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의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배운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와 의학의 관계가 내 생전에 두 개의 커다란 분수령을 넘어갔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57
로버트 쿠걸만은 기장에 관해 굉장한 연구를 내놓았다. 19세기 말에 유래한 어떤 관념이 전쟁 동안 금속을 연구한 록히드 항공사에 의해 스트레스로 탈바꿈했다. 의사들은 스트레스라는 관념을 금방 받아들였다. 전쟁이 시작됐던 1941년에는 의학에 그런 개념이 없었다. 1945년에 이르렀을 때 스트레스는 의학에서 다루는 주요 질환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159
5. 오만의 마지막 미개척지대
경제학자들, 행정가들 보수가 지불되지 않은 활동을 파악하여 그 질과 경제에 대한 기여도를 향상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 한족에서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활동, ... 상품을 뭔가 쓸모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노동력의 투입을 요구하면서도 보수는 지급되지 않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활동이 있는데, 이 두 가지 활동을 경제학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나로서는 아주 중요해보였다. 173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잘 보여주었듯 나의 필요는 그것을 타인의 것으로 간주한 다음 나도 하고 말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린다. 르네 지라르는 이를 모방 욕망이라 부르는데, 이것을 통해 욕망이 필요로, 상품에 대한 필요로, 제품에 대한 필요로 탈바꿈하게 되며, 이렇게 필요로 탈바꿈하고 나면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182
현대 사회 속에서 필요는 잘게 부수어져 있다. 개별적으로는 충족될 수 없으며, 당신이 경험하지 못하는 충족이 무엇으로 성립되는지를 알려주는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서만 충족이 가능하다. 184
나는 순례여행을 떠난다. 나는 순례의 끝에 도달하려는 욕구를 지닌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서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이 12세기에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여행한 어느 순례자의 경험이었다. 186
굶주린 사람들을 칼로리라는 관점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체제 관리자가 된다. 우리는 생명선을 끌고 켤 힘을 지니고 있다고 느끼는, 또는 적어도 그 힘을 지녀야만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된다. 187
6. 이중의 게토
만일 성별이 내가 사용하는 의미 그대로의 성별로 존재했다면, ... 남녀를 따지지 않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법 내지 종교 개념이다. 법 내지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에게는 이런 저런 종류의 성차이가 있을 수 있다. ... 반면 성별은 문화적으로 결정된다. 성별은 남성은 한쪽 방식의 존재에 속하고 여성은 다른 쪽 방식의 존재에 속한다고 정의한다. 성별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 지 못한다. 200
우리는 경제적 중성이라는 게토 속에 갇혔으며, 이 때문에 나는 저 다름이라는 감각을 거의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동시에 경제적으로 규정된 성이 가져다주는 상대적 위안과 그 안이한 무관심과 천박함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210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오로지 19세기 중반에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나는 당신을 비롯하여 여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에만 그 대상을 욕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시작한다. 욕망은 그것이 더이상 내가 꿈꾸는 대상이 아니게 될 대, 타인이 나름의 필요를 표현하는 것을 흉내 내면서 그에 따라 나의 필요가 구체화될 때 모방적이 된다. 212
엘리 알레비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완전히 새로 생겨난 개념이라는 점을 올바로 이해한 최초의 인물이다. ... 유럽의 사상은 벤섬에 이르러 얼마간의 단절이 있었음을 강하게 논증했다. 이 단절은 깊이 탐구된 적이 없는데 그것은 그 이후에 생각되고 논의될 수 있었던 것들이 그 이전이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논의한다 해도 부도덕하다고 간주되었었기 때문이다. 216
이동성은 뿌리가 없는 상태와는 다르며 사물이 일정한 지평 속에서 실체적으로 존재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 지평은 우리가 그 사물에 속할 수 있게 해준 다는 뜻으로 요약된다. 이동성은 우리 인격의 핵심이 되는 어떤 환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 환상을 당신은 낭만적 착각이라고 보고 있다.
옛적에 에트루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은 도시를 세우고자 할 때 시계 바늘이 가상의 공간을 다라 한 바퀴 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랑을 그렸다. 그렇게 그린 고랑은 하늘과 땅, 안과 밖, 지평선과 땅이 만나는 자리를 나타내는 상징이 됐다. 이러한 만남은 언제나 모두 제각기 하나의 혼인, 거룩한 혼인으로 이해됐다.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비대칭적 상호보완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어울리지만 똑같지는 않은 둘이 모인 하나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의식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 219
7. 사랑이라는 가면
개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레볼루시오revolutio인데 바퀴처럼 회전한다는 뜻이다. 첫째는 낙원으로 돌아간다는 관념, 즉 창조된 순간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관념이다. ... 두번째 형태의 회복은 주기적인 것으로 매년 봄 세계가 초록으로 바뀌는 것을 가리킨다. ... 천천히 다른 방향에서 내 앞에 앉아 혁명에 대해 또 오늘 회복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며 스스로 헌신하고 있던 젊은이들에 대해 나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됐다. ... 이런 관념은 어디서 오는가? ... 그가 그토록 놀라워 한 이 확실성은 바로 세계와 타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봉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는 관념이었다. 234 - 236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 빅뱅은 지금일 수도 있다. 나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내 미래를 다른 누구에게도 보험으로 맡길 수 없다. ... 교회도 여기에 포함된다. 교회는 크게 보아 덕을 위한, 그리스도교의 덕을 위한, 사랑을 위한 ... 생존을 위한 하나의 보험회사이다. 241
8. 분수령을 따라 걷는다.
만유의 균형은 바뀌었지만 인간의 신체는 낙원에 맞게 만들어진 그대로 였다. 역으로 말하면 ... 신을 신어야 하는 신체로, 추위를 타기 때문에 실을 잣고 베를 짜고 옷을 만들어야 하는 신체로 바뀐 것이다. ...기술은 인간이 생태학적 개입, 즉 죄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을 부분적으로나마 되찾ㅇ는 행동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하느님이 창조 때 인간에게 준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교 사상이 시작된 이후 첫 1,200년 동안 명시적으로 도구에 대해 다룬 것은 위그가 기술과학이라 이름붙인 관념이 유일하며, 여기에서 그는 기술을 하나의 치료로 보고 있다. 247
나는 우리가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도구가 우리의 지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일정 수에 다다르도록 만들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249
중세초기 행은 문자의 일렬횡대였다. 낱말 사이에 공백이 없었다는 말이다 ... 문자의 범벅 안에서 낱말을 찾아낸 후 다음 낱말 사이에 실제의 침묵, 즉 귀로 들을 수 있는 빈칸을 하나하나 끼워 넣지 않으면 읽을 수가 없다. 253
위그는 쪽page에 대해 말할 때 파기나pagina가 포도밭을 또는 더 정확히 말해 포도밭 속에서 걸을 때 따라가게 되는 시렁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 여전히 그는 쪽에서 낱말을 빨아들인다. 말 그대로 입과 입술을 동원한 구두활동이다. 여전히 그는 쪽 사이를 걸으며 글 읽기를 하나의 순례로 생각한다. 257
젊은이들을 훈련시킬 때 언제나 평균을 추구하도록 ,모든 관념의 평균 허용치를 추구하도록 하는 데에는 뭔가 너무나 슬픈 느낌이 있다. 이러한 정신적 우유부단은 중도 내지 메소테스, 즉 중용이라는 이상, 도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분별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나는 분수령을 따라 걸어가며 왼쪽과 오른쪽이 심오하게 다르고 대단히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다. 265
9. 질료가 제거된 세대
현재까지 나는 컴퓨터로 작성된 책을 모두 구별해낼 수 있다. ... 내적 흐름에 다라 쓴 문장이 아니야. 마치 강의 한 부분을 떼어낸 다음, 기우면 맞을 것 같아 보이는 다른 부분에 그 조각을 옮겨 붙이는 식으로 재구성한 것 같았다. 275
10. 사람 손안의 우주
두려움과 나는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따라서 선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존을 원하는 것에 대한 관리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살아 있음이 아니라 생존을 강조하는 것이다. 1960년대에 에리히 프롬은 내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낱말로는 생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289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 그것은 감각적이고 의미 있는 낱말과 분명하고 뚜렷한 관념으로 생각하고 반추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생각한다. 내일이 올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러저러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러저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 우리는 철저히 무력하며, 우리가 대화에 관여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자신의 무력함과 모두의 무력함을 즐거이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우정의 싹을 키워나갈 길을 찾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310
책임이라는 말은 제대로 먹혀든다. 만일 지혜로운 사람이 내게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어떻든 나에게 뭔가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다는 말이고, 따라서 내 행동에 따라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느낌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책임은 새로운 종교성을 세우기 위한 이상적 기초다. 자신의 이름 아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관리하기 쉽고 지배하기 쉽게 만드는 그런 종교성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 있자고, 누리자고, 모든 고통과 모든 불행과 함께 이 순간 허락돼 있는 살아 있음을 의식적으로, 의례적으로, 공개적으로 즐기자고 말한다. ... 해독제인 것 같다.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