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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urse 6
제 6강연
Rumi said: These words are for the sake of those who need words to understand.
But as for those who understand without words, what use have they for speech?
The heavens and earth are words to them, sent forth themselves from the Word of God. Whoever hears a whisper, what need have they for shouting and screaming?
이 것은 이해를 위해 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말 없이 이해하는 자들에게 언어가 무슨 소용 있나요?
천국과 지상이 그들에겐 말씀이니 신의 말씀을 그들 앞에 두노라. [코란 36: 82]
속삭임을 듣는 자에게 고함과 비명이 무슨 소용 있으랴?
An Arabic speaking poet once came into the presence of a king.
Now the king was a Turk, and did not even know Persian.
The poet had composed in his honor some brilliant verses in Arabic, and had brought these with him.
When the king had taken his seat on the throne and the courtiers were all present and duly stationed, commanders and ministers each in their place, the poet rose to his feet and began to recite his poem.
At every passage deserving applause the king nodded his head, while at every passage provoking astonishment he looked amazed.
Similarly, he responded to every passage expressing submission.
The courtiers were astounded.
어느 날 아라비아 시인이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왕은 터키인으로 페르시아어도 알지도 못했지요.
시인은 그를 위해 아랍어로 눈부신 싯구를 지어 그에게 받쳤습니다. 왕이 왕좌에 자리하였을 때 조신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고 지휘관 대신들도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지요.
갈채를 받을 만한 매 구절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움을 야기하는 매 구절마다 그는 감탄한 듯 보였지요.
매 구절마다 그는 공손히 응답하였습니다.
조신(朝臣)들은 몹시 놀라워했습니다.
“Our king did not know a word of Arabic,” they murmured amongst themselves.
“How is it that he nodded his head so correctly?
He must have known Arabic all these years and kept it hidden from us.
If we have ever uttered incivilities in Arabic, then woe is us!”
『왕은 아랍어를 모르셨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그간 아랍어를 알고도 우리에게 그 사실을 숨기신 것이야.
아랍어로 무례한 말을 퍼뜨렸다면, 화를 입을 지도몰라!』
Now the king had a favorite slave.
So the courtiers assembled together and gave the slave a horse, a mule, and a sum of money, and they promised to give him this much again.
“Just find out whether or not the king knows Arabic,” they said to him.
“If he does not, how was it that he nodded just at the right places?
Was it a miracle? Was it divine inspiration?”
왕이 총애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조신들은 함께 모여 신하에게 말 한 필, 노새 한 필과 거액의 돈을 주며 다시 그만큼 주기로 약속하였어요.
『왕이 아랍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봐 주시오』 그에게 말했습니다.
『모른다면 어떻게 정확한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는가? 기적이었단 말인가? 신의 영감이란 말인가?』
Finally one day the slave found his opportunity.
The king was out hunting, and the slave perceived that he was in a good mood, since the hunt had gone well.
So he asked the king point blank.
The king burst out laughing.
마침내 어느 날 신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왕은 사냥을 다녀왔고, 사냥이 잘 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는 것을 신하는 알아차렸다.
왕이 기분이 좋은 걸 알고서 신하는 왕에게 노골적으로 물었다.
왕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By God, I don’t know Arabic,” he said. “As for nodding and applauding, I knew of course what the poet’s object was in composing that poem, and so I nodded and applauded.”
So it was realized that the root of the matter was the purpose desired; the poem itself was merely the branch of that purpose.
If it had not been for that purpose, the poet would never have composed that poem.
『하늘에 맹세코 난 아랍어를 모르네』 그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보낸 것은, 시인이 무엇을 위해 그 시를 썼는지 알았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 쳤지』
그 시가 욕망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걸 알았지요.
시인은 단지 그 목적에서 시를 쓴 겁니다. 그런 목적이 없었다면
시인은 절대 그런 시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요.
If our real purpose is kept in view, duality vanishes.
Duality shows the branches, but the root is one.
It is the same with Sufi sheikhs.
Although to outward appearance they have various styles of teaching and differ widely in their social standing, even in their action and words, yet from the standpoint of their purpose they all have one goal, namely the quest for God.
본 목적이 지켜진다면 이원성은 사라진다. 이원성은 가지를 나타내지만, 뿌리는 하나입니다. 수피 세이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외형이라도 다양한 방식의 가르침과 범위가 다른 사회적 신분 심지어 행동과 말,게다가 목적에 따른 견해에서 볼 때, 모두가 하나의 목적인 신을 추구하고 있지요.
Take the case of the wind. When it blows through a house it lifts the edges of the carpet, and the rugs flap and move about.
It whisks sticks and straws into the air, ruffles the surface of the pool until it looks like a coat of mail, sets trees and twigs and leaves a-dancing.
All those conditions appear distinct and different, yet from the standpoint of the object, the root and reality, they are one thing—the movement of the wind.
바람의 경우를 들어봅시다. 바람이 집을 강타하면 카펫 끝자락을 들어올리며, 담요는 펄럭이며 이리 저리 움직입니다.
막대기와 지푸라기를 공중에 날려보내고, 연못 수면은 쇠사슬 갑옷처럼 동요하며, 나무와 가지들을 춤추게 하며, 꺼진 불과 땔감에 반쯤 남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일으킵니다.
이 모든 조건이 뚜렷이 달라 보이지만, 대상의 관점과 본질과 실체는 모두 하나입니다. 바람이 움직인 것이지요.
Someone said: “I have neglected that true purpose.”
Rumi replied: When this thought enters a person’s mind and they criticize themself, saying,
“What am I about, and why do I do these things?” When this happens, it is a sure proof that God loves them and cares for them. “Love continues so long as reprimands continue,” said the poet. We may reprimand our friends, but we never reprimand a stranger.
누군가 말했다 『나는 진짜 목적을 간과 했어요』
루미가 대답했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 들어와 그들은 스스로 비판하며 말했어요.
『나는 뭘 위해, 왜 이것을 하려 했던가?』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신의 사랑과 관심이 증명됩니다.
『질책과 사랑은 함께 지속된다.』라고 시인이 말했습니다.
친구는 꾸짖지만 결코 낯선 자는 꾸짖지 않습니다.
Now there are levels of reprimand.
When a person is stung by it and sees the truth in it, that is a sign that God loves them and cares for them.
But if the reprimand flies by that person without causing any pain at all, then this is no sign of love.
When a carpet is beaten to get rid of the dust, intelligent people do not call that a reprimand.
But if a woman beats her own darling child, then that is called a reprimand and is a proof of her love.
Therefore, as long as you find pain and regret within yourself, that is a proof of God’s love and guidance.
질책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사람이 질책에 자극 받아 내면의 진리를 볼 때, 그것이 신의 사랑과 보살핌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질책이 고통 없이 사라진다면, 그건 사랑의 징표가 아닙니다. 먼지를 털기 위해 담요를 두드릴 때,
총명한 사람은 그걸 질책이라 하지 않지요.
허나 여자가 사랑스런 자식을 때리면 질책이라고 합니다.
그건 그녀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당신이 내면에서 고통을 느끼고 후회하는 한,
그건 신이 사랑하고 인도한다는 증거입니다
If you find fault in your brother or sister, the fault you see in them is within yourself.
The true Sufi is like a mirror where you see your own image, for “The believer is a mirror of their fellow believers.”
Get rid of those faults in yourself, because what bothers you in them bothers you in yourself.
당신이 동생이나 누이의 결점을 본다면, 그들에게서 보이는 결점은 자기 내면에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피교도는 거울과 같습니다. 스스로를 비추지요.
『신자는 동료 신자의 거울이다』 라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떨쳐 버려야 하리.
그들로 인한 근심은 당신 내면의 근심이니까요.
An elephant was led to a well to drink.
Seeing itself in the water, it shied away.
It thought it was shying away from another elephant.
It did not realize it was shying away from its own self.
코끼리는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로 왔다.
물속에 있는 자신을 보고, 도망쳤다.
다른 코끼리를 피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자기자신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All evil qualities—oppression, hatred, envy, greed, mercilessness, pride—when they are within yourself, they bring no pain.
When you see them in another, then you shy away and feel the pain.
We feel no disgust at our own scab and abscess.
We will dip our infected hand into our food and lick our fingers without turning in the least bit squeamish.
But if we see a tiny abscess or half a scratch on another’s hand, we shy away from that person’s food and have no stomach for it whatsoever.
Evil qualities are just like scabs and abscesses; when they are within us they cause no pain, but when we see them even to a small degree in another, then we feel pain and disgust.
모든 나쁜 성품들 억압,미움,시기 탐욕,무정,자만 그것들은 자신 안에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걸 보면 고통을 느껴 멀리 피하게 됩니다.
제 몸의 옴,종기는 혐오스럽지 않지요.
감염된 손으로 음식을 집고 조금도 거북함 없이 손가락을 핥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 손에 작은 종기나 생채기만 봐도, 그 사람 음식을 피하며 조금도 먹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나쁜 성품이란 옴이나 종기 같아서, 자신에게 있을 땐 고통이 없으나, 다른 이에게서 조금만 봐도 고통과 혐오감을 느끼게 됩니다.
Just as you shy away from your brother or sister, so you should excuse them for shying away from you.
The pain you feel comes from those faults, and they see the same faults.
The seeker of truth is a mirror for their neighbors.
But those who cannot feel the sting of truth are not mirrors to anyone but themselves.
당신이 형제나 자매로부터도 회피함이 것처럼,
당신을 회피하는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그 결점들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고통은 과실을 인식할 때 생기니
그도 같은 과실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신자는 동료 신자의 거울이니라』 이는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신앙이 없는 자가 신자의 거울이니라』 라고 말하지 않았지요. 신앙이 없는 자는 거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닦지 않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지요.
A certain king was sitting, dejected, on the bank of a river.
The generals were nervous and afraid of him.
His face would not clear up no matter what they tried.
Now he had a jester whom he treated as a great favorite.
The generals promised the jester a certain sum of money if he could make the king laugh. So the jester approached the king, but despite all his efforts the king would not so much as look at him.
The king kept staring into the river and did not lift his head at all.
어느 왕이 낙담한 채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를 겁내며 무서워했지요.
어떻게 해도 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어요.
그가 매우 총애하는 어릿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웃게 만든다면 얼마간의 돈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광대는 왕에게 다가가 모든 노력을 다 했으나,
왕은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어요.
왕은 계속 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죠.
“What do you see in the water?” the jester asked the king.
『물 속에 뭐가 있습니까? 』 광대가 왕에게 물었죠.
“I see the husband of an unfaithful wife,” the king replied.
『 바람난 아내의 남편을 보고 있지.
(계속 나를 괴롭히는 오쟁이를 보고 있지)』 왕은 대답했어요.
“King of the world,” the jester said, “your slave is also not blind.”
『세상의 왕이여, 당신의 하인도 눈이 멀진 않았어요』
광대의 말이었다.
So it is in your own case.
If you see something in your fellow that pains you, after all they also are not blind.
They see exactly what you see.
경우에 따른 겁니다. 당신 자신의 경우도 같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동료에서도 본다면 결국 그들도 장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보는 걸 정확히 보지요.
In God’s presence two I’s cannot exist.
You cannot know your self and God’s Self; either die before God, or God will die before you so that duality will not remain.
But as for God’s dying, that is both impossible and inconceivable, for God is the Living, the Immortal.
So gracious is He that if it were at all possible He would die for your sake.
Since that is not possible, then you must die so that God can reveal Itself to you, and duality can vanish.
신 앞에 내가 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 신의 본성을 알 수 없지요.
신 앞에 죽거나 신이 당신 앞에 죽으니,
그 이원성은 존속하지 못합니다.
허나 신의 죽음은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지요.
신은 생명이자 불멸입니다.
은혜로써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신은 당신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당신이 죽어야 하지요.
그래야 신 자신이 당신께 모습을 보여 이원성이 소멸됩니다.
Tie two birds together, and despite their familiarity and the fact that their two wings have been changed to four, they will not fly.
That is because duality exists.
But let one bird give up its life and the other—even though tied to the first—will fly, because duality has vanished.
새 두 마리를 함께 묶어 두어 보면, 그들이 교우관계에 있고,
날개가 둘에서 넷으로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날지 않아요. 이원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마리가 삶을 체념하면, 다른 한 마리에 묶여있대도 날아갑니다. 이원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이토록 태양은 자비로우니,
기꺼이 박쥐 앞에 죽겠으나 그건 불가능하니,
태양이 말하지요.
『박쥐여 내 자비는 우주이니, 친절을 베풀어 다오.
네가 죽는 것은 가능하니, 그리하면 내 영광의 빛과 함께 하여
박쥐의 무리에서 변하여 오프 산 가까운 곳의 시모그가 되리라.
(전설의 새) 』
Shams-i-Tabriz was a servant of God who had the power to sacrifice himself for the sake of a friend.
He prayed to God for that friend, but God did not accept his petition.
“I do not want you to help him,” came a voice. Shams, that son of the Sun [Shams-i-Tabriz means literally Sun of Tabriz,] persisted and would not cease his requests, saying, “O God, you have implanted this desire for him, and it will not leave me.”
샴시 타브리즈는 신의 신하로서 친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있었어요. 그는 친구를 위해 신에게 기도했으나 신은
그의 청원을 거부하였죠. 『그를 돕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어요. 신의 신하가 고집스레 부탁을 거두지 않고 말했죠.
『신이여 당신이 이 요구를 그에게 심었으니 저버리지 마세요』
Finally a voice came saying, “Do you desire that this should come to pass?
Then sacrifice your self, and become nothing.
Do not wait, and leave this world behind.”
“Lord,” Shams answered, “I am content.”
So he did; he gambled away his life for the sake of that Friend, and his desire was accomplished.
결국 목소리가 들렸지요.
『이 일이 일어나길 바라느냐? 그럼 네 자신을 희생하라.
무로 돌아가라. 기다리지 말고 이 세상을 떠나라』
『신이여, 기쁩니다』 샴이 답했어요.
그는 그렇게 했어요.
친구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 걸은 것입니다.
[The friend in this story is Rumi himself.
Shams was chased away by jealous followers of Rumi, but Rumi sent for Shams and Shams eventually returned. It is said that those jealous followers, including one of Rumi’s own sons, later murdered Shams. Rumi’s search for the missing Shams, only to find the One he sought for within himself, is the source of many of Rumi’s poems.]
[이 이야기에 나오는 친구는 루미 자신입니다.
샘스는 질투하는 루미의 추종자들에게 쫓겼지만,
루미는 샴스를 불렀고, 결국 샴스는 돌아왔다.
루미의 아들 중 한 명을 포함한 질투심 많은 추종자들이 나중에
샴스를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사라진 샴을 찾아 헤매던 루미의
행방은 루미의 많은 시의 근원이다.]
If a servant of God can possess such grace as to sacrifice his life, of which one day’s portion is worth the life of all the world from first to last, does not the Source of that grace also possess this love?
It would be absurd to think otherwise.
But since it is not possible for God to pass away, at least you can.
신의 신하가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자비를 가질 수 있다면,
그 하루는 세상의 일생의 처음부터 끝과 맞먹으니, 자비의 근원은 이 사랑 또한 소유하고 있겠지요?
달리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요. 신이 죽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니 당신이 죽어야 살아남을 수 있지요.
A fool came and sat in a seat above one of the great saints.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to the saints whether such a person is above or below the lamp?
If the lamp wants to be on high, it does not desire that for its own sake.
Its purpose is for the benefit of others, so they can enjoy their share of the light.
Wherever the lamp may be, whether below or above, it is still the lamp of the Eternal Sun.
If the saint seeks worldly rank and office, it is for this purpose: They desire to snare those
worldlings, who do not have the vision to see their true elevation, with a trap of worldly rank.
Through this they may find their way to the higher worlds, and fall into the trap of divine grace.
한 어리석은 자가 위대한 성인 뒤에 앉았습니다.
성인에게 있어 그런 사람이 뒤에 있든 등불 아래 있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등불이 높이 걸려 있길 바란 건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지요.
그들이 빛을 즐기고 나누기 위한 것이지요.
등불이 어디에 있든 아래든 위든 영원한 태양의 등불입니다.
성인이 세상의 위계를 구한다면 이 목적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속세의 함정을 원합니다. 진정한 진보를 보지 못하는 이에게 속세의 계급이란 덫을 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높은 세상을 위한 그들의 방식을 찾다
성인의 은혜의 덫에 걸립니다.
In this same way, the Prophet, Mohammed did not conquer Mecca and the surrounding lands because he was in need of them.
He conquered in order to give life and grant light to all people.
“This is a hand accustomed to give, it is not accustomed to take.”
The saints beguile people in order to bestow gifts on them, not to take anything away.
이와 같이 예언자 모하메드는 (평화가 함께 하길) 메카와 주변 땅들을 정복하지 않았지요.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빛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복했지요.
『이 손은 가져가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 익숙한 손이다』
성인은 선물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속일 뿐 어떤 것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People only listen to the outward significance of the saints’ words.
They say, “We’ve heard plenty of this.
Our hearts are stuffed full of words of this kind.”
God says, “God forbid that you should be full of them!
You are full of your own whisperings and vain conceits.
You are full of illusion and greed. Nay, you are full of cursing.”
인간은 오직 성인의 외적인 말의 의미에 만 귀를 기울입니다.
『이 얘기는 이미 많이 들었어요. 우리 가슴은 그 말로 가득 차 있지요』
이때 그들은 저희의 마음이 굳었나이다 라고 대답하나 신은 그들의 불신을 저주하셨네 [코란 2: 88] 불신자들은 말하겠죠.
『저희의 마음은 그런 말씀들로 굳었나이다.
그 말씀들로 채워져 있어요』
지고의 신이 답했지요 『신은 그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금할 것이다! 그들은 속삭임과 헛된 자만으로 가득하며,
악마의 의심과 부정 저주로 가득하도다』
f only they were empty of such ravings! Then they would be open to receive these words. But they are not open to receive them. God has set a seal upon their ears and eyes and hearts. Their eyes see things the opposite of what they are; they hear wisdom as gibberish and raving. Their hearts have been transformed into a home of self-love and vanity.
A winter’s tangle of dark shapes and pride has possessed them. Their hearts are hardened with ice and frost.
허나 신은 그들의 불신을 저주했죠 [코란 2: 88] 그런 헛소리로 그들은 비어있겠죠. 그러면 그들은 말씀을 받으려 열릴 겁니다.
그들이 자격 있을 때 자격이 없다 해도 이 말씀들을 받을 것입니다.
신은 그들 귀와 눈,마음을 봉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진실과 다른 것을 봅니다. 요셉을 늑대로 보지요. 그들의 귀는 진실과 다른 것을 들어요. 코란의 가르침과 지혜를 횡설수설 헛소리로 간주하지요.
그들의 마음은 밀담과 헛된 자만이 세든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겨울의 어둠의 모습과 허망한 자만의 혼돈은 그들을 소유하였죠. 얼음과 서리와 함께 얼어버렸어요.
“God has set a seal on their hearts
And their hearing,
And on their eyes is a covering.”
"신은 그들의 마음,
그리고 그들의 청력을
봉인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 에는 덮개를 씌웠다."
[코란 2: 7]
How likely is it that such people could be full of these true words?
They have never caught so much as a whiff of them.
They have never tasted a drop in all their lives—neither they nor those they worship, nor their miserable household.
God shows a pitcher to everyone. To some It shows the pitcher full of water, and they drink until they are sated. But to some God shows it empty.
What thanks can someone give for an empty pitcher?
Only those, whom God shows the pitcher full, find thanks for this gift.
이런 사람들이 어찌 진실된 말들로 가득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입김만큼도 잡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 평생 한 방울도 맛보지 못했지요.
그들도, 그들이 숭배 하는 이들도, 그들의 불쌍한 가정부도.
신은 한 주전자 가득 모두에게 보이지요.
어떤 이들에겐 물이 한 주전자 가득 보여 질리게 마십니다.
어떤 이들에게 신은 빈 주전자를 보이지요.
빈 주전자에 어떤 감사를 표할 수 있을까요?
오직 신이 가득 찬 주전자를 보인 이들만 선물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