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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
마 5:38-48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38-48 / [보복하지 말라;눅6:29-30] 또 모세의 율법에 ㄹ)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고 하였다. (ㄹ. 글자대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출 21:24(참조, 레 24:20, 신 19:21))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43) [원수를 사랑하라;눅6:27-28,32-36] 또 모세의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ㅁ) 미덕이 되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ㅁ. 헬라어 원문은 `상을 받겠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자와 원수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38-42)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구절에 대해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는 행위를 금하시며 부정하십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고 악이 순환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동사들을 살펴보면 “돌려 대라”(39), “가지게 하라”(40), “동행하라”(41), “거절하지 말라”(42)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가 많은 세상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가며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내 권리를 최대한 내려놓거나 때로는 포기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질 때 세상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이 이 가르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43-48) 성경에서 가장 순종하기 힘든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심지어 원수까지도 품고 기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게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에게만 문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도 사랑과 문안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아 가진 이웃에 대한 개념은 단순한 이웃을 뛰어 넘어 모든 인류를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온전함이란 바로 이런 사랑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은 이웃 상실입니다. 관계와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적용: 우리를 박해하는 자, 우리와 원수처럼 지내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있으며 또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나누어봅시다.
세상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을 미덕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준에서 그 정도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삶의 기준은 너무나 파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은 결코 영광스럽기만 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함께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길을 갈 때 우리 역시 다른 이를 구원의 길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 5:38-42 /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지금까지 산상수훈 말씀을 묵상하며 특징적인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화법이죠. 산상수훈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상식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늘나라의 법을 따라야 할 새로운 규칙을 말씀하십니다.
■ 어떤 사모님의 간증입니다. / 그분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소망은 빨리 시집가서 집을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어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보다 고통이 훨씬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신앙이 깊어져서 성령님이 그 고통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출타하고 사모님이 잠깐 외출했을 때 시어머니가 냉장고에서 1000mL 우유를 꺼내 다 마시고 설사를 했습니다. 사모님이 집에 와 보니까 시어머니가 온통 오물에 범벅이 되어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모님의 입에서 짜증 대신에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과 같이 /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 내겐 주밖에 없네.” 그 찬송을 하며 종일 오물 청소를 했습니다. 그때 몸은 힘들었지만, 성령님이 시어머니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산상수훈은 자연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성령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도전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크게 두 개의 대지로 나눠봤습니다.
하나는 “원수를 대하는 태도” 다른 하나는, “무리한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복수!’
오늘 본문 38절을 읽으며 떠오르는 단어가 아닐까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율법에서 규정한 것이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복수’로 이해한다면 율법을 조금 오해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의 주제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복수’입니다. 사실 많은 영화 중의 중요한 모티브도 복수극이지요. 어쩌면 복수에 대하여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논리, 그리고 악인이 심판받는다는 사필귀정의 원리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복수는 절대로 그냥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복수 역시 누군가에게 받은 원한을 갚는 것이라면, ‘복수’는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됩니다. 더욱이 복수한 자들이 안고 살아야 심적 부담과 죄의식 역시 복수의 후유증이기도 합니다.
사실 율법은 이렇게 통쾌한 복수를 하라고 규정한 법이 아닙니다. 당시 근동지방의 법이 소위 발하는 ‘보복법’을 허용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와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조폭 영화의 보복의 사슬 같은 것이죠.
폭력에 의한 보복은 절대로 만족과 해결이 없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는 법칙은 바로 이러한 과잉 보복을 금지한 법입니다.
본래의 정신은 한 대 맞은 사람은 한 대 때려서 보복하라는 보복법이 아니라 한 대 맞은 사람이 두 대 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법은 개인들에게 행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이 법은 한 대 맞은 사람에게 때린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법이 아니라 개인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을 찾아가서 그 분쟁을 해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이 법칙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정당하게 보상하도록 한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도 하소연할 곳 없이 그대로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법입니다. 절대 보복을 용납하거나 폭력을 부추기는 악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법을 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잘못 사용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들어준 이 법이 본래의 의도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법으로 악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강자의 처지에서는 그냥 잊고 용서해주라는 말입니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고아와 과부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무력감이나 피해의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식의 피해자로 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수를 포기함으로써 용서와 사랑을 실천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복수를 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가치가 훼손된 것은 어떻게 하지요? 복수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사도 바울 역시 복수는 하나님의 비즈니스라고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복수를 하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감동받고 변화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더 이용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죄로 도대체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밸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밸도 없이 살아라.”
사실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온갖 능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제목의 어떤 목사님의 글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아직 목회자가 되기 전 남편은 사업을 하고 있었고 거래하던 대리점 사장이 부도를 내고 도망가 3억을 손해 보게 되었답니다. 그 절망의 나락에서 남편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삶의 절망의 나락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남편을 생각하게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답니다. “주님!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 저는 따뜻한 집도 있어요. 저에게는 아직 너무 많아요. 주님이 분을 품고 잠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매일 밤 분을 품었어요.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을 벗어 주라 하셨는데, 저는 그에게 빼앗긴 것 때문에 어떻게 다시 빼앗아 오나 매일 궁리했어요. 매시간 그를 저주하고 미워했어요. 그러나 이젠 됐어요. 남편을 예수 믿게 해준 것으로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그 이튿날 우리 매장 근처 다방에서 대리점 사장을 만났다. 그 또한 우리에게 빚진 죄인이어서 초췌한 얼굴을 깊이 숙이고 교도소로 가는 것이 편하니 어서 보내 달라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3억의 부도 수표를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찢었다.
“3억의 부도 수표에서 자유하세요. 당신은 우리에게 빚이 없어요. 이 돈이 당신에게 빚이었다고 생각되거든 나중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갚으세요. 우리는 하나님께 이 돈을 받았으니 당신은 하나님께 갚으세요.”
그때까지 나는 몰랐다. 주님께서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지 주님은 그 사람을 3억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부부를 3억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이었다.
무리한 요구에 대한 우리의 태도
오늘 본문 39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몇 가지의 주제로 나뉩니다. 모두가 무리한 일들, 혹은 억울한 일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제시합니다.
결국,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방법은 하나입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나서서 베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식이 용돈을 달라고 하면 강도 만난 기분으로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국, 줄 것인데도 잔소리를 하면서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빼앗기지 말고 기분 좋게 주십시오.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라.’ 했으니 더 얹어서 넉넉히 주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주며’ 그랬으니 잔소리하지 말고 그냥 주십시오. 이왕 줄 것이면 빼앗기지 말고 주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39절)
유대 랍비의 가르침에 보면 뺨을 때리는 것은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모욕을 받았을 때, 복수나 분노로 대하지 말고 왼편 뺨까지 돌려댈 만큼 여유로 대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유심히 보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른뺨을 때리려면 어떤 손을 써야 할까요? “상대방의 왼손”이죠? 그러면 때리는 사람이 왜 왼손으로 때릴까요? 불편한데.
‘오른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상대방이 ‘오른손 등’으로 때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한 뺨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의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중상과 모략입니다. 그때 참을 수 없어서 우리의 분노를 표출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저 누구에게 변명하려고 얼굴이 새파래져 되어 흥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냐고!” 그렇게 넘어가 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 억울한 소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억울함이라는 것이 누구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고, 나 자신이 절대로 기준이 될 수 없다면, 그렇게 모욕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식.
둘째,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절)
이 말씀은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통으로 짠 속옷과 길이가 약 2미터 폭이 약 1미터 쯤 되는 모포형의 ‘히마티온’이라는 겉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속옷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지고 있던 옷이고, 겉옷은 낮에는 옷으로 걸치고, 밤에는 모포처럼 깔고 자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속옷은 빚값으로 빼앗아도 되지만, 겉옷은 빼앗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에 보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즉 겉옷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권리, 마치 집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듯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겉옷을 내어주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까지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최소한의 권리,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도 포기하라는 말이죠.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가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여러분은 어떤 말이 떠오르시나요?
“바보같이!”
우리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권리조차도 주장하지 마라!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감동을 주는 말은 사랑하는 이에게 듣는 이런 말이 아닐까요? “너만 믿어준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난 견딜 수 있어.”
셋째,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1절)
이 말씀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지쳐서 십자가를 질 힘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로마병정 중의 하나가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지라고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재수 없는 일인가요?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창을 들이대고 가자고 하면 가야 합니다. 짐을 운반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힘을 가지고 우리를 누르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할 때, 분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십 리를 가라는 것입니다.
■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원수는 때로 축복의 가면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사모님의 아들이 군대에 갔습니다. 양주군 신암리는 제가 군목으로 근무하던 곳이기도 하지요. 초년병시절 아들을 면회하러 군에 갔습니다. 씩씩하게 보이던 아들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사실은 저 너무 힘들어서 괴로워요. 저보다 한 달 먼저 들어온 상관이 저를 얼마나 못살게 구는 지 한 번 붙고 말 거예요. 매일 연병장을 뛰고 자기에게 와서 보고한 뒤 밥을 먹으래요. 제가 천식이 있어서 아침 일찍 뛰는 것이 고통스럽고 다 뛰고 가면 시간이 끝나서 밥을 못 먹어요.”
아픔 마음에 엄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상관이 아무래도 자기가 졸병일 때에 비해 네가 편해 보여서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연병장을 더 잘 돌아라. 괴로워하며 억지로 돌지 말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돌아라. 다 돌거든 상관에게 고맙다고 해라. 어쨌든 많은 사람 중에 너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고마운 것이 아니냐. 그 어떤 것보다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이잖니?”
그러던 어느 날 아들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에서야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연병장을 뛰면서 때로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날로 단번에 끝장을 낼 생각마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 군장을 하고 구보를 하면서 저는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구보 때는 천식으로 숨이 막혀 뛰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히 다 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관을 통하여 저의 지병인 천식을 다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상관이 매우 고마워서 고맙다고 경례를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부터는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저 스스로 뛰겠습니다. 어머니께 이 기쁨을 ‘할렐루야!’ 소리쳐 보내 드립니다. 어머니! 제 목소리 들리면 기뻐해 주세요.
본문 41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와 “억지로 …가게 하거든”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함께 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문맥상 “억지로 …가게 하거든” 다음에 생략된 말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제 생각에는 “기꺼이 혹은 기쁨으로”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다른 기준입니다.
이왕 내가 견뎌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합시다.
넷째,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2절)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누가 너를 억울하게 이용하거든, 종의 삶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아라. 똑같이 갚아 주는 것은 이제 그만하여라. 너그럽게 살아라.”
■ 권석 PD가 쓴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라는 책에 보면 연예계의 재미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세밑의 방송국은 유난히 바쁘다. 연말 시상식 시즌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고질병’이란 표현이 딱 맞는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고 있으면서도 손대지 못하는 명이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방속국마다 시원하게 밝힐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이젠 공공연한 비밀이 됐지만, 수상자는 자신이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시상식장에 나타난다.
수상식에 대한 보안이 중요하다 해도 상 받는 사람이 없는 시상식을 만들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에둘러 암시해 준다.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뭐 이런 식이다.
대 놓고 묻지는 못하겠고 간접적으로 확인하려는 부류도 있다. 후보가 누구누구냐고 묻는다. 명단을 불러주면 그중에서 상 받을 것 같은 유력 후보자가 참석하느냐고 다시 물어온다. 그가 참석한다면 자기 쪽이 못 받는 거란 계산이다. 결국, 경쟁 후보자가 불참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수상을 확신하고 출연을 약속한다.
그런데 시상식 당일 일이 터졌다. 배우 A가 생방송 직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작가가 매니저에게 연락해보니 방송국 근처 공원을 차로 빙빙 돌고 있단다. 그러면서 대상 수상 여부를 알려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떼쓰기 시작했다. 결국, “시상식 이후에도 저랑 좋은 얼굴로 계속 볼 거예요.” 하고 수상을 암시해주고 방송국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또 일이 생겼다. 스튜디오에 안 나타나는 거다. 배우 B가 나타난 것에 불안을 느낀 그는 대상을 못 타는 것 아니냐며 방송국 지하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마지막 광고가 끝나기 직전 배우 A가 드디어 스튜디오에 올라왔다. 물론 수상 사실을 확인받은 다음이다.
그리고는 대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도 이런 꼼수가 남아 있으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다. 그 후로 작가와의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절대로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알면서도 손해 좀 봐줘라! 누군가 손해 보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말이죠. 누군가 손해를 본다면 풀려질 일입니다.
위의 예화와 관계해서 유명한 김기덕 감독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칸 영화제에 작품을 내고 최종 심사를 남겨놓았는데 유명한 임권택 감독의 작품과 함께 경쟁 부분에 올라가게 되었답니다. 최종심사 발표 전에 수상작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우회적으로 연락이 온답니다. 이번 시상식에 참석해 주세요.”
그렇게 연락을 받고 참석을 했고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객석에서 정장을 입고 자신을 축하해 주는 임권택 감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틀림없이 수상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후배를 축하해 주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그렇게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답니다.
“나 같았으면, 하늘 같은 선배도 존경하는 사람이 수상하는 자리도 아닌데, 내 친구와 후배를 위해 남아서 축하해 줄 수 있었을까?”
그의 삶에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는 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누군가를 원수로 삼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이웃으로 만들 것이냐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원수’와 ‘사랑’이라는 말이 함께 나옵니다.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먼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많은 정의가 가능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상황,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절대 지치지 않고 후원해주며, 절대 믿음을 잃지 않고, 절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을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과 연관시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사랑한다면….
제가 이 설교를 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할 자격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초대교부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존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13장 7절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소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가치 없는 자라도 끊임없이 바로잡아주고 공급해주고 돌보아주는 것이다.”
소망을 버린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은 바라는 것이고, 원수일지라도 죄에 빠진 사람이 복음을 믿게 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어진 관계에서 회복될 것을 바랍니다. 나의 죄를 거듭 용서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끊임없는 용서의 은혜가 임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문제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마땅히 드러나야 할 것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진노와 심판을 미뤄주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을 낳습니다. 사실 믿음보다 사랑이 더욱 소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뭐라 물었습니까?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믿음도 소중하지만, 더 깊은 믿음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의 의미가 이토록 퇴색되었습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가볍게 하고 사랑이란 이름을 빌려 잘못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개를 사랑한 주인이 우유가 좋다는 말을 듣고 개의 머리를 잡고 우유를 먹였습니다. 개가 싫다고 고개를 흔들어도 주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개의 머리를 더욱 꼭 붙잡고 우유를 먹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유 컵이 땅에 떨어져 우유가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까 개가 땅에 흩어진 우유를 핥아먹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개가 싫어했던 것은 ‘우유’가 아니라 ‘우유를 먹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랑해도 방법이 틀리면 구속이 됩니다. 부모의 사랑 중에는 그런 사랑이 많습니다. 이제 바르고 현명한 사랑 법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이 있는 곳을 밝게 만드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도 달라졌고, 요한도 달라졌고, 세리와 창녀도 다 달라졌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계셨던 나사렛도 달라졌고, 갈릴리도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 예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반경을 바꾸는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복수는 짧고 용서는 길다
마 5:38-42 / 이정선 목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의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복수입니다. 무협영화나 서부영화의 내용은 주로 복수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악당들에게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이 수많은 난관을 겪고 고된 훈련을 마친 후 악당들을 쳐부수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다는 줄거리, 우리가 자주 보는 레퍼토리입니다.
주인공이 악당들을 물리치고 통쾌하게 복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시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억울하게 당한 약자가 강자를 물리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복수의 테마는 궁극적으로 악인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필귀정의 가치와 결합되어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또 어쩌면 우리 자신이 그 복수의 스토리 속에 몰입되어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복수하려는 사람에게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공감대의 형성입니다. 사회적인 악의 제거라는 측면에서도 사람들은 복수하는 사람을 응원하게 됩니다. 또 개인이 당한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동정심에 의해서도 복수는 정당성을 인정받습니다.
이처럼 복수는 독자나 관객에게 감동이나 쾌감을 주기 때문에 매우 인기 있는 주제가 됩니다. 요즘 복수 시리즈 영화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15년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넣어주는 군만두만 먹으며 복수를 위해 이를 가는 오대수의 이야기 ‘올드보이’가 세계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어린이를 유괴해서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1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는 금자씨는 그동안 자기를 교화하려고 교도소에 찾아오던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금자씨의 복수 이야기는 따로 있지만, 살인범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금자씨가 살인범의 하수인이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행색으로 사는 전도사에게 날리는 “너나 잘하세요.” 이 한 마디 역시 통쾌한 복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일견 이러한 우리의 인지상정을 잘 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났을 경우의 규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 21:22-25).
보복법이라고 이해되는 이 법은 매우 타당성 있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복수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과 용서의 정신에서 먼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얼핏 들으면 예수께서 옛 율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사회적 악을 응징하고 개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것이라지만, 결국 복수라는 또 다른 폭력과 악을 허용하는 수준 낮은 보복법을 폐지하시고 사랑과 용서에 근거한 더 수준 높은 계명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러나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소위 보복법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복법이라고 잘못 알려진 이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 더욱이 보복을 보장하는 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또 그 폭력은 점점 증가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한 명이 라이벌 폭력배 집단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맞은 쪽에서 각목을 들고 떼거리로 몰려가서 라이벌 집단의 깡패 몇 명 갈비뼈를 부서뜨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예상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칼부림이 일어나고 한두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면전이 벌어지겠지요. 이처럼 폭력은 결코 더 작은 폭력에 의해 만족되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법칙은 바로 이러한 과잉보복을 금지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은 사람은 한 대 때려서 보복하라는 보복법이 아니라, 한 대 맞은 사람이 두 대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법칙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이 법은 한 대 맞은 사람에게 때린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법이 아닙니다. 개인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을 찾아가서 그 분쟁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닭 한 마리의 손실이 생겼을 경우 재판관은 이 법칙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닭 한 마리로 보상하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힘없는 사람이 닭 한 마리 빼앗기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이 그대로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닭 한 마리 손실이 생겼는데 힘 있는 자가 와서 닭 대신 소 한 마리를 뺏어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 법입니까? 그러니까 이 법은 보복을 용납하고 폭력을 부추기는 악법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법이 그 당시에 보복법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이 법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당한 일에 개인적으로 그만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았으면 꼭 한 대를 때려야 하는 것이 율법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딱딱하고 인정머리 없는 법이 아니에요. 고아와 과부를 배려하고 나그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 얼마나 많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선하고 거룩한 법입니다.
내가 닭 한 마리를 잃어버렸어도 상대방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서 배상시키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못할 일을 당했어도 그것 가지고 재판정에 가기보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려는 것이 율법을 올바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선생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선한 율법을 악한 법으로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단 말이지요.
이제 주님께서는 참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치도록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뺨 한 대 맞았으면 나도 상대방 뺨을 한 대 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고소해가지고 속옷을 빼앗아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십니다. 또 억지로 5리를 같이 가게 하면 10리라도 같이 가 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체에 관한 손상이나 재산상의 손해, 또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 즉 모든 피해와 손해에 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겠다고 싸우기보다 양보하고 차라리 손해를 보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또 나쁜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도둑을 맞는다거나 이렇게 피해를 입을 때도 많아요. 그럴 때면 우리는 자연히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복수를 해야 속에 응어리진 한이 풀릴 것 같지요. 또 복수해야 할 대상은 그렇게 악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자녀들 많습니다.
그러나 복수라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는 파괴행위일 뿐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범에게 살해된 아이들의 부모를 불러 모아 살인범을 죽이게 합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슬픔은 살인범을 살해하는 잔인한 새로운 범죄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인범을 살해해도 이미 죽어버린 아이들은 살아오지 않고, 그 부모들만 살인범이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들은 복수를 했다는 쾌감보다 살인을 했다는 부담 속에 평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수가 갖는 한계입니다.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무력감이나 피해의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식의 피해자로 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수를 포기함으로써 용서와 사랑을 실천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복수를 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가치가 훼손된 것은 어떻게 하지요? 복수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사도 바울 역시 복수는 하나님의 비즈니스라고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복수를 하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감동받고 변화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더 이용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죄로 도대체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밸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밸도 없이 살아라. 사실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온갖 능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바보처럼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와 규범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가치와 규범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와 대립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우리가 당했던 모욕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찬란한 영광과 풍성한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그리스도인,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솔직히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저는 혹시 여러분 중에 복수를 꿈꾸는 분이 계실까 염려됩니다. 과거에 억울하게 당한 일을 복수하지 못해서 아직까지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사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미움과 분노가 아직도 여러분의 영혼을 찌르고 아프게 합니까? 아무리 잊으려 해도 고통의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 주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수는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복수의 망령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차라리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십시오.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기를 찌른 자들의 용서를 기원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복수는 허망하지만, 용서와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복수로는 승리할 수 없지만, 용서로써 우리는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
마 5:38-42 / 이정선 목사
이 세상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작용하는 원리는 “give and take”입니다. 내가 할 만큼 하고 또 그에 따른 권리도 당당하게 찾아먹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올바로 못하면 사회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을 게을러서 또는 하기 싫어서 안 한 사람에게는 합당한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힘이 부쳐서 못하는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체제는 적자생존, 혹은 약자도태의 원리가 작동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남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제 할 일을 누구보다 잘하는 것이 미덕으로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못하고 뒤쳐지는 사람은 삼등 인생 취급을 당하기 쉽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자기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는 것도 능력의 표현방식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남의 밥그릇 뺏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는 매우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의 밥그릇을 뺏어오는 사람은 엄청나게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즉 한 마디로 하면 손해보고는 못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은 매우 타당하고 공평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요청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give and take”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법칙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원리에 맞는 법칙을 따르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새로운 질서와 법칙을 새로 제시하고 계시는 걸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백성에게 주셨던 이 율법이 선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말입니까?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 율법대로 행하면 거룩함과 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은 의롭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별로 선해 보이지 않는 이 규칙을 율법에 두셨을까요?
사람들이 흔히 보복법이라고 부르는 이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 더욱이 보복을 보장하는 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또 그 폭력은 점점 증가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한 명이 라이벌 폭력배 집단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맞은 쪽에서 각목을 들고 떼거리로 몰려가서 라이벌 집단의 깡패 몇 명 갈비뼈를 부서뜨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예상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칼부림이 일어나고 한두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면전이 벌어지겠지요.
폭력은 결코 더 작은 폭력에 의해 만족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두 대 얻어맞은 사람이 한 대 때리고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어이 자기가 맞은 것보다 더 많이, 그래서 세 대나 네 대를 때려야만 분이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 대 때렸다가 네 대 얻어맞은 놈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겠지요. 이제 여섯 대나 여덟 대를 때려야만 그 분이 풀릴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법칙은 바로 이러한 과잉보복을 금지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은 사람은 한 대 때려서 보복하라는 보복법이 아니라 한 대 맞은 사람이 두 대 때리지 말라는 과잉보복 금지법이 되겠군요.
오늘날 이 세계를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의 다툼에서부터 국제적인 분쟁에 이르기까지 이 과잉보복 금지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폭력과 파괴가 자행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합니다. 그러면 며칠 후 자살폭탄이 터져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전투기를 보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폭격합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은 언제나 끝이 날까요? 9.11 테러나 이라크 침공 같은 가공할 만한 폭력과 파괴행위 역시 보복을 주고받으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져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법칙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이 법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한 대 맞았다고 그 때린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개인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을 찾아가서 그 분쟁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닭 한 마리의 손실이 생겼을 경우 재판관은 이 법칙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닭 한 마리로 보상하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힘없는 사람이 닭 한 마리 빼앗기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이 그대로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닭 한 마리 손실이 생겼는데 힘 있는 자가 와서 닭 대신 소 한 마리를 뺏어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 법입니까? 그러니까 이 법은 보복을 용납하고 폭력을 부추기는 악법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법이 그 당시에 보복법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이 법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당한 일에 개인적으로 그만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았으면 꼭 한 대를 때려야 하는 것이 율법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딱딱하고 인정머리 없는 법이 아니에요. 고아와 과부를 배려하고 나그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 얼마나 많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선하고 거룩한 법입니다.
내가 닭 한 마리를 잃어버렸어도 상대방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서 배상시키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못할 일을 당했어도 그것 가지고 재판정에 가기보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려는 것이 율법을 올바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선생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율법을 악한 법으로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단 말이지요.
이제 주님께서는 참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치도록 돌려 대라는 것입니다. 뺨 한 대 맞았으면 나도 상대방 뺨을 한 대 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설령 상대방이 아주 악한 사람이어서 내가 부당하게 피해를 당했더라도 그 악인과 싸우지 않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누가 우리를 고소해가지고 속옷을 빼앗아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십니다. 글쎄요, 누가 우리 팬티 같은 속옷을 뺏으려고 고소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속옷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속옷이 아니고 그냥 옷입니다. 그리고 겉옷은 그 위에 걸치는 외투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성경에 속옷을 벗었다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속옷을 벗은 것이 아니에요.
또 억지로 5리를 같이 가게 하면 10리라도 같이 가 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체에 관한 손상이나 재산상의 손해, 또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 즉 모든 피해와 손해에 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겠다고 싸우기보다 양보하고 차라리 손해를 보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또 나쁜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도둑을 맞는다거나 이렇게 피해를 입을 때도 많아요. 그럴 때면 우리는 자연히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복수를 해야 속에 응어리진 한이 풀릴 것 같지요. 또 복수해야 할 대상은 그렇게 악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자녀들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지요. “복수는 나의 것!”
그러나 복수라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는 파괴행위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내 이빨을 뽑았다고 칩시다. 복수한다고 내가 그 사람의 이빨을 뽑으면 내 이빨이 새로 납니까? 내 눈을 뽑았다고 상대방 눈을 뽑으면 내 눈이 새로 생기나요? 눈 없는 사람만 하나 더 늘어날 뿐입니다. 우리 집 유리창을 깼다고 나도 몽둥이 들고 가서 그 집 유리창을 두들겨 깨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속이라도 시원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차라리 용서하고 사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복수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끝내 복수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사냥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들판에서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들판에 화장실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왕 체면에 아무데서나 일을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마침 근처에 동굴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옳지 됐다! 하고 들어갔겠지요?
그런데 그 동굴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이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수 갚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칼을 들고 사울의 곁에 가만히 다가가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나간 후에 뒤따라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러면서 그 옷자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보고 사울이 통곡을 하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다윗 사냥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도 다윗 사냥을 나선 사울이 그 군대와 함께 진을 치고 밤에 잠을 잡니다. 다윗이 용사 아비새를 데리고 진으로 숨어들어갔는데 아무도 잠을 깨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비새가 말합니다. “이제야말로 당신의 원수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내가 창으로 찔러서 땅에 박아버리겠습니다. 두 번 찌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머리 곁 땅에 꽂혀 있는 창을 빼들고 또 왕의 물통을 챙겨가지고 조용히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큰 소리로 왕을 불렀습니다. “왕이여,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잡아 죽이러 오셨습니까?”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돌아갑니다.
성경은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합니다. 뭐, 다윗처럼 훌륭한 사람은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또 우리가 복수를 하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감동받고 변화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더 이용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죄로 도대체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벨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벨도 없이 살아라. 사실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온갖 능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바보처럼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비즈니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우리가 원수에게 뺨을 맞고 재산도 빼앗기고 심지어는 일신상의 자유마저 구속당하는 수가 있지만, 우리가 원수를 갚는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오히려 악과 폭력이 증가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우리가 당했던 모욕과 슬픔은 하나님께서 찬란한 영광과 풍성한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그리스도인,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솔직히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이후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여기 모인 숫자만큼 늘었다고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요?
십리를 동행하라
마 5:38-42 / 정언용 목사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롭게 길을 가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문둥병환자 같은 사람이 마주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 적선을 구합니다. "좀 도와주세요" 톨스토이는 얼른 호주머니를 뒤져보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돈이 한푼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큰 죄라도 지은 듯한 표정으로 걸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형제여, 내 지금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거든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순간 걸인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아닙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에게 돈은 주지 않았지만 당신은 지금 더 크고 소중한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나보고 "형제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오늘 당신에게서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서서 갑니다.
이 순간 톨스토이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물질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구나! 물질을 베푸는 것도 선행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을 마음을 베푸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가 이렇게 피곤해지고 어려워진 것은 물질적 빈곤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질이 없어서 피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물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의 삶을 대하느냐! 에 따라서 인간은 행복하게 살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요즘 시중에 나온 책들을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97%는 그들의 성공비결은 바로 이 마음자세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고 나의 삶의 목표를 가지며 나의 삶의 가치를 두느냐! 에 따라서 우리는 성공한 삶을 살수도 있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자세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천국을 살수도 있고 지옥을 살수도 있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고 교회 일에 봉사하느냐! 에 따라서 우리는 기쁨으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일할 수도 있고 억지로 끌려가는 기분으로 일할 수도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서 삶의 자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하면 억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팔자소관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운명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을 포기하면서 그저 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갑니다. 시간과 물질을 아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소유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모두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TV를 보면 흔히 부부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시집와서 아이 낳고 빨래해주고 밥해주면서 살다보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딴 짓을 하고 다녀요! 내가 이 집에 식모인줄 아십니까! 내가 이 집의 밥풀 떼기인 줄 아십니까? 내가 다른 곳에 가서 이렇게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훨씬 더 호강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남편대로 질세라 "나는 뭐 별다르게 살아온 줄 아십니까! 나도 할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당신하고 새끼들 먹여 살리느라고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알기나 합니까! 누군들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아! 당신은 남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알기나 해서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구먼! 나도 이 집에서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어! 당신이 식모처럼 살았다면 나는 이 집에 머슴처럼 살은 것은 왜 몰라!"하면서 싸웁니다.
여러분 우리가 똑같은 삶을 사는데 왜 이렇게 억지로 삽니까? 한 집에서 살면서 한사람은 식모로 살고 한 사람은 머슴으로 살면서 그 집이 행복하겠습니까? 결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데 이혼하지 않고 살았다고 해서 과연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딱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개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매사에 피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일종의 형벌의식에서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혹 예배에 빠지면 하나님께 매맞을까봐! 벌받을까봐! 저주를 받을까봐! 하는 생각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감기만 걸려도 내가 혹시 하나님께 벌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복음의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잘못된 생각에 갇히면 사람은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머슴과 식모처럼 시키는 일만합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니 무슨 기쁨이 있으며 행복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잘 키우면 그 대가가 내게 돌아오겠지. 나중에 늙으면 효도를 받으면서 생활하겠지!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나도 사랑을 그만큼 받아야지!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투자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내가 투자한 것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삶의 태도를 갖고 생활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항상 받으려는 마음으로 가득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으려는 마음으로 가득치 있습니다. 칭찬 받으려는 마음 때문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아주 허영적인 사람도 되고 위선적인 사람도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큰 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예 가겠습니다" 대답은 선뜻 해놓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둘째아들은 "싫습니다."하고 거절하거든요. 아버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둘째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이 둘은 모두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작은아들은 처음부터 일하기 싫다고 거절했고 큰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고 나중에 뉘우치는 마음으로 일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볼 때면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겠습니다"하고 두말없이 일하러 간 사람, 아마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런 사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거나 혹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서 책임감이 없습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니 자신의 자리가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다가 보니까 이런 곳까지 흘러온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일이 수동적입니다. 끌려가는 느낌입니다.
이제 앞으로 21세기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점점 직장 생활하는 것을 보세요. 재택 근무가 많아집니다. 집에서 근무하는 것입니다. 출근이 없어요. 옛날처럼 시간이 되면 출근했다가 시간이 되면 칼같이 퇴근하는 그런 직장의 개념으로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출근해서 하루종일 담배만 피우고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시간 때우기 식의 직장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제 21세기는 점점 자율의 시대에 들어갑니다. 어떤 일을 억지로 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스스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을 가지고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틀에 박힌 생각을 가지고는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창조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아들처럼 일하기 싫거나 억지로 일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일하느냐! 가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일하는 자세입니다
내게 일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오늘도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나에게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회사에도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마음속에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신바람을 일으키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은 억지로 하는 마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시간 때우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코를 꿰였다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즐거울 뿐입니다. 고마울 뿐입니다. 감사할 뿐이에요. 그런 마음이 있으니 자율적으로 일할 수밖에는 없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때로는 이 말씀이 너무나 높은 윤리적 규범이라서 "아이고 그런 말씀들은 예수님에게나 맞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거기까지 갈 수 있나!" 하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아야 나중에라도 올라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쳐다보지 못할 나무는 올라가도 말라는 옛말이 있는데 그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쳐다보아야 올라갈 것 아닙니까? 만약에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아닙니까!
분명히 예수님의 윤리는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격이 아주 높아서 우리가 실천하기에는 분명히 너무도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내주어라. 오리 길을 가자고 하면 십리 길을 동행해 주어라. - 이러한 말씀들이 요즘 시대에 통하는 말입니까? 요새는 내 것 뺏기지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의 것도 갈취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무서운 세상인데 어떻게 달라고 하지 않은 것까지 남에게 줄 수가 있습니까!
이 두 마음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빼앗기는 생활과 주는 생활입니다. 둘 다 남에게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빼앗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늘 내가 빼앗겼다는 느낌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기분으로 내가 가족에게든 이웃에게든 빼앗겼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왕에 남에게 다 준 것. 주었다는 느낌으로 생각을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다릅니다. 하나는 억지로 당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발적으로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너희는 적극적인 마음의 태도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능동적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바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이것은 억지로 해서는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모르는데 같이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거절하기가 마땅치 않아서 오리 길을 길 안내했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한 것입니다.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입니다.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리를 가서 보니까 이 사람이 마지막까지 길을 잘 찾을지 몰라서 마음에 걱정이 들어서 "제가 마지막까지 길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했습니다. 이때부터는 자발적인 마음입니다. 능동적인 마음입니다.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자신이 선택을 해서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고 강요당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발단은 억지로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기보다는 억지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거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했는데 이제는 자발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제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은 가정적으로 상당히 넉넉한 집안입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참으로 절약하면서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불평이 없고 매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친구의 그런 생활태도에는 어릴 때부터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주신 교훈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어머니는 절대로 용돈을 그냥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을 해야 준 것입니다. 밭에 나가서 얼마 안 되는 땅이더라도 꼭 괭이나 호미를 들고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해야 용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점점 커서 성장을 하니까 자신의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를 안 다음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되고 또 일을 해도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용돈만을 요구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요즘 미국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좀 떨어진 교외에 있는 "록 오브 오번"이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이 교회는 교회 출석을 하면 돈을 줍니다. 연 4주째 연속 교회출석을 하면 50달러를 주고 가족이나 친구를 데려오면 75달러를 줍니다.
이 교회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원래 "퍼스트 크리스천 쳐어치"였던 이 교회는 신도수가 불과 14명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대부분 50대 이상이었습니다. 이제 이 교회는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빌 크리튼 이라는 목사님이 이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발상의 전환을 했습니다. 전통적이고 의례적인 형식을 탈피하여서 재밋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재미있는 곳이다 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헌금을 내도록 하기보다는 "교회에 나가니까 돈을 주더라"하는 마음으로 바뀌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돈 싫어하시는 분 있습니까? 이러한 그린튼 목사님의 생각은 적중했다고 합니다. 불과 14명이던 교인들이 이제 60명의 교인으로 성장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돈을 받는 재미로 교회에 나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과 6명을 제외하고는 자발적인 신앙인으로 바뀌어서 돈을 받지 않고도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분이 전도대상자 명단도 안내고 그러면 한번 돈을 줘보는 방법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이제는 마음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는 억지로 하고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서 자발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는데 이 남자가 하도 따라다니면서 결혼해 달라고 조르는 통에 엉겁결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백발이 성성한데도 "내가 할 일 없어서 이 남자와 결혼한 줄 압니까? 하도 귀찮게 따라다니니까 결혼한 것이지요. 그런데 내 꼴이 이래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자신은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되고 또 주가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불행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든, 봐주고 했든, 동냥결혼을 했든 일단 했으면 그 다음에는 자신이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억지의 단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제 결혼해서 안되면 바꿔나가든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한평생 살면서 이런 내꼴이 무슨 꼴입니까?"하는 마음으로 살면 그 사람의 불행은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동기전환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나중에는 즐거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바뀔 때 우리는 십리를 동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는데 십리를 동행하려면 얼마나 고역입니까? 아직도 갈길 이 멀은 것 같고 짜증이 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빼앗겼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일을 하며, 기쁨으로 일을 하며, 적극적인 마음으로 일을 한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신앙의 힘은 자율적인 단계에 이르게 될 때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태도를 바꾸라고 권고하십니다.
억지로 끌려온 느낌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 억지의 마음에서 자율적인 마음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보상을 바라면서 피동적으로 일하던 모습에서 값없이 십자가의 은혜를 주신 예수님처럼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억지로 오리를 따라오셨다고 한다면 이제는 자율적으로 십리를 동행해 줄 수 있는 희생적인 헌신의 자세로 삶의 모습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리까지 가자고 할 때 십리를 동행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태도를 바꾸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그럽게 삽시다
마 5:38-42 / 또 모세의 율법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고 하였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너그럽다 / 잠언 19:6 상반절에는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라고 하였다. 마음이 너그럽고 아량이 있는 자에게 사람들은 은혜를 구하려 몰려온다. 너그러운 사람이 사람을 얻는 법이다. ‘너그러운 사람’이란 히브리어 ‘나디브’인데 ‘관대한’, ‘고관’, ‘귀인’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아량이 있고 권세를 가진 자에게 많은 사람이 은혜를 구한다는 말이다. 너그럽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구할 리 없다. 지위가 낮은 자에게 은혜를 구할 리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 너그럽고 권세와 지위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음이 좁은 부자에게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모인다. 사람들이 모이고 따르는 이유 가운데 돈보다 우선 되는 것은 사람의 너그러움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받아 줄 아량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우시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는 뜻이다. 너그러운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너그럽기 때문에 변수가 생긴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관대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특히 인간관계에서, 너그러움은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이고, 그 배려는 희생, 희생은 곧 손해라는 인식을 가질지도 모른다.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낼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는 것,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 상대에게 똑같이 대갚음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행동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오히려 이득이다. 상대가 뽀족하게 다가와도 둥글게 받아주면 찔릴 곳이 없다. 그러면 상대의 뽀족함이 점점 뭉특함으로 변해간다.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뭉툭해지다가 둥글게 변해간다. 결국 주변에 둥근 사람들이 많아진다. 둥근 사람들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둥근 사람들끼리 있으면 행복한 일이 가득하다. 재미와 즐거움, 기대감, 열정 등 온갖 긍정적인 감정들이 뇌를 사로잡는다. 그러기에 상대의 뽀족함에 똑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사람마다 또 상황마다 뽀족함이 뭉특함으로 변하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마음은 가져보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득을 챙길 기회이다.
■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의 글 / 그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였다. 어느 해 날이 몹시도 가물었다. 그래서 그는 양수기로 물을 퍼서 자기 논에 어느 정도 물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아침 일찍 자기 논에 가보니까 물이 많이 줄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웃 논 임자가 논둑을 터놓아서 말도 없이 그쪽 논으로 물을 빼내 가버린 까닭이었다. 그는 몹시도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른 척하고 참았다. 그는 또 다시금 양수기를 동원해서 자기 논에 물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웃 논 임자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항의를 했다. 물론 이웃 논 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웃 논 임자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워치만 니의 마음속에 기쁨이 없었다. 자기가 분명히 틀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이웃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도 하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함이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꼭 정당한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느냐?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러한 음성을 듣고서 그는 깊이 생각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양수기를 준비해서 먼저 이웃 논으로 갔다. 그리고 여러 시간 동안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에 충분히 채워 주었다. 그 뒤에 그는 양수기를 자기 논으로 옮겨서 자기 논에도 물을 채웠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 임자는 마음에 큰 감동하게 되었다. 그때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웃 논 임자와 그의 온 가족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다. 함께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악한 자를 악으로 대적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선대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라,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을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따라서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를 미워했거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누가 알겠는가? /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어지고, 이가 부러지고, 갈빗대가 부러지며,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도 이를 갈며 분해하지도 않고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령이 충만하여 무릎을 꿇고 도리어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여유있는 마음으로 저들을 대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옆에 서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변화를 받기 시작해서 나중에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 이러한 행위가 자기 자신도 위대한 순교자로 하나님 앞에 큰 상을 받을 뿐 아니라 핍박하였던 사울(Saul)을 대사도 바울(Paul)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수록 더 위대한 성도가 되게 하고 더 큰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에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❶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 ❷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 ❸ 예수님의 가르치심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한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나 또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금도 나와 우리를 선대하고 계신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라도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자. 그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승리로운 삶을 살았으면 한다.
1.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
38절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잘 알려진 말로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이 법을 라틴어로는 전통적으로 lex talionis, 곧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번역이 되지만, 이것을 보상법이라는 말로 번역해 보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만큼 보상해 주어야 하고, 내가 피해를 받은 만큼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해 보았다.
그러면 보상법,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敎父)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이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오히려 잔인할 뻔하셨다.”
보상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계명의 배후에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보상법의 근본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보상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보상법의 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보상법이 세 곳에 있다.
출 21:22-25 /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를 가진 여인을 밀쳐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곳은 다친데가 없다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배상액은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결정한다. 23) 하지만 다른 사고가 생겼을 경우,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몇 가지로 깨달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을 누구에게 주셨는가?
22절 끝부분에 보면, ‘재판장의 판결을 쫓아낼 것이니라’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보상법은 우리 개개인이 이 원리를 적용하도록 주신 말씀은 결코 아니다.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신 말씀이다. 재판장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원리로 주신 것이 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다. 왜 그럴까?
창세기 4:23-24에서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뽐내면서 했던 말이다.
창 4:23-24 / 라멕이 그의 두 아내에게 말하였다. ‘내 아내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어보게나.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에 귀기울여 보게나, 누구도 나와 겨루지 못하리라. 아무도 나 라멕과 싸워 이기지 못하리라. 내게 상처 입혔다고 나는 사람을 죽였다네. 나를 쳤다고 젊은 것 죽여 버렸다네. 24) 가인을 죽이면 그 대신 일곱 사람을 죽여 앙갚음한다지만 나 라멕을 죽인다면 일흔일곱 사람을 죽여 앙갚음하리라.’
라멕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누구든지 자기를 해하면 자기는 그에게 칠십 칠 배로 갚아주겠다는 뜻이다. 인간의 복수심이 바로 그렇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한마디 욕을 먹었다고 해서 한 마디만 해주면 직성이 풀릴까? 두 마디, 세 마디 해야 갚은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심이다. 만일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허용치 않으셨다. 반드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2. 재판장은 판결을 내릴 때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할까?
반드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 이상도 안 되고 그 이하도 안 된다.
예컨대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해 보자.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되겠는가? ‘이는 이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재판장이 ‘이는 눈으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이 내 눈을 상하게 했다. 그러면 재판장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려야 내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재판장이 ‘눈은 이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내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는가?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주신 것이다.
3. 이 법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 즉시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내 눈도 저렇게 상하게 되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내 이도 저렇게 부러지겠구나!’ 그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이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원리이다.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셨고, 재판장은 반드시 이 원리에 따라 판결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웃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상법, 곧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했다. 아울러 그들은 그 당시 사람들을 잘못 가르쳤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
38절 /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이 말씀의 끝부분에서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긍정적인 차원이 아닌 부정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이렇게 들어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무엇일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 자체가 잘못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을 있는 그대로 압축을 해놓은 것이다. 말씀 자체는 전연 잘못이 없다. 그러나 3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저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다.
39절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나? 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다. 아울러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우선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보상법을 잘못 적용했다. 본시 보상법은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신 말씀이다. 개인은 사사로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다. 반드시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사사로이 대적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얼마나 원통하게 생각했을까?
그런데 로마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헤롯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헤롯은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인 헤롯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분개했을까?
급기야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인에게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 바로 열심당이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군인들에 대해서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다. 로마 군인들이 당하고 가만히 있었을까? 로마 군인들은 즉시 보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조장되었다. 사회는 점차로 질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보상법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바로 보상법이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것을 망각하고,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라고 가르침으로 개인이 복수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복수심을 조장시켰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다. 원수를 갚으라고 하신 말씀도 없다. 오히려 신명기 32:35에 ‘보수는 내 것이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에게 선대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다.
레 19:18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 25:21 /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악한 자를 대적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 대신 미움을 심어주었다. 용서 대신에 복수를 심어주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악해졌겠는가? 예수님은 그 세대를 가리켜서 여러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이런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3. 예수님의 가르치심
마 5:39-42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분이다.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보상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권세로서 보상법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셨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재판장에게 판결의 원리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개인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악한 자를 대적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원수라도 사랑해 주어야 한다.
곧이어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보상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네 가지 실례를 들어서 일깨워주셨다.
1. 39절 하 /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예컨대 제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뺨을 때렸다. 이때 오른편 뺨을 때리기가 쉽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왼편 뺨을 때리기가 쉽겠는가? 내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릴 수밖에 없다. 불편하다. 세게 칠 수도 없다. 왼편 뺨이 훨씬 쉽게 세게 때릴 수 있다. 그런데 유대나라에서는 손등으로 남의 뺨을 치는 것은 인격을 이중적으로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오른 뺨을 때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격 모독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른편 뺨을 맞느냐 왼편 뺨을 맞느냐,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나 이유 없이 맞았다 하더라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다른 편을 때리도록 허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 40절 /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매우 귀할 때였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중에 잠을 잘 때 덮고 자는 담요와 이불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겉옷을 전당 잡더라도 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다. 그만큼 겉옷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누가 재판을 해서 값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 때문에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말고 더 값나가는 겉옷까지 주어버리라는 것이다. 빼앗기는 삶을 살지 말고, 주면서 살라는 것이다. 관대한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다.
3. 41절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그 당시에는 이러한 법이 있었다. 로마의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킬 수 있었다. 오리에 해당하는 거리만큼은 임의로 동행케 하고 그 이상을 넘으면 대가를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온다.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계속 쓰러지셨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게 했다. 바로 그 법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라고 하셨다. 역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4. 42절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내가 가진 물질이라고 해서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누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누가 내게 속옷을 달라고 하면 그에게 겉옷까지 주고 나는 발가벗고 살라는 뜻일까? 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해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월급봉투째 다 주고, 나와 내 가족은 한 달 내내 굶고 살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돈이 필요해서 친구에게 가서 돈을 꾸려고 할 때, 이 말씀을 인용하라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나쁘게 이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시는 것이다.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하고서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지겠는가? 사람들은 누가 자기의 오른편 뺨을 치면 돌려댈 생각을 하지 않고 왼편 뺨을 치려고 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주기는커녕 그 사람의 겉옷을 빼앗으려고 했다. 누가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고 했다. 그만큼 세상이 악해졌다. 그러니 그런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예수님 의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가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라도 대적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승리로운 삶을 살 수가 있다.
■ 【 6·25 동란 때였다. 어떤 남자 집사님이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인민군은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 그리고는 그를 앞장세워 걷게 했다. 그는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지고서 걸어갔다. 뒤에서는 인민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서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 사람과 십리까지라도 가 주어라.’ 정말 자신의 처지가 이와 같았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별반 순종해서 산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될는지도 모르니까 그에게 문득 ‘한 번 마지막으로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앞에 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마음도 편해지고 오히려 짐도 가볍게 느껴지게 되었다. 한 오리쯤 갔을 때였다. 인민군은 그를 불러 세웠다. ‘동무! 수고했소. 이제 짐을 내려놓으시오.’ 그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좀 더 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동무, 빨리 가시오! 사실은 내가 여기 와서 동무를 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는데 동무가 친절하게 하니까 그럴 수가 없구려. 그러니 어서 빨리 가시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아날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악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선으로만이 악을 이길 수가 있다. 빼앗기면서 살지 말고 주면서 살자. 억울하게 당하면서 살지 말고 기쁘게 친절을 베풀면서 살자. 인색하게 살지 말고 너그럽게 살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족하고 허물이 크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 주신다. 우리를 언제나 선대해 주신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 이웃에게 늘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자.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마음에 담으면 좋은 실례 / ❶ ‘남의 잘못을 탓하지 말라! 남의 단점을 보지도 말라. 나의 단점을 변호하지 말라! 나의 단점을 고치기에 힘쓰라! 경남 양산에 있는 사찰인 통도사(通度寺) 경내의 오래된 기둥 곳곳에 붙어 있는 검은 나무판에 쓰인 경구 중 하나이다.
남을 책망하고 탓하기는 쉬우나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이 어렵고, 어렵게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어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변명을 하기 쉬우니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깨우쳐서 고쳐가는 습관이 스스로를 성장하게 된다.
중국 춘추시대 초(楚) 장왕의 일화에서 기인한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말이 있다. 장왕이 나라의 큰 난을 평정한 후 공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신하들을 아끼던 장왕은 자신의 후궁들에게 이 연회의 시중을 들게 했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연회장의 촛불들이 일순간에 꺼졌다. 칠흑 같은 그믐이라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순간 한 여인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틈타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고, 자신이 그 자의 갓 끈을 뜯어두었으니, 장왕께서는 어서 불을 켜서 그 무엄한 자를 벌해 달라는 고변이었다. 자신의 후궁을 희롱한 무엄한 신하가 괘씸하고, 자신의 위엄이 희롱당한 것 같은 노여움에 빠져 들기가 쉬운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장왕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자리는 내가 아끼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만든 자리이니 이 자리의 모든 신하는 내 명을 들으라.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갓의 갓끈을 모두 자르라. 지금 일어난 일은 이 유흥의 자리에 후궁들을 들게 한 나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이니 나의 불찰이다. 또한 오늘의 실수는 그런 이유로 불문에 부치려 하니 그대는 그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라오.” 장왕은 먼저 후궁들을 달래서 연회장에서 내보낸 후 그곳에 함께한 모든 신하들이 갓끈을 자른 뒤에 연회장의 불을 켜도록 했으니 누가 그랬는지 확인할 수 없었고, 자칫하면 연회가 깨지고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는 상황이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왕의 여인을 희롱한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한 역모에 해당하는 불경죄로 죄인은 물론 온 가문이 능지처참을 당할 수 있는 중죄였지만, 장왕은 신하들을 치하하는 연회 자리를 훼손하지 않고 그렇게 보존했다. 그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 일이 자신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임을 인정했다. 장왕이 자존감(自尊感)과 자긍심(自矜心)의 균형이 튼튼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힌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분노하지 않으며,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더 이상 자의적인 확대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뒤 초나라는 진나라와 나라의 존폐가 달린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전쟁에서 초나라가 밀려서 장왕이 적장의 칼에 목이 잘릴 위기에 처했을 때 바람처럼 장왕 곁으로 달려와 온몸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서 장왕과 초나라를 구한 장수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왕은 그를 불러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 쥐고 공로를 치하했다. 그 장수는 장왕의 손을 풀고 물러나 장왕에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큰 절을 올렸다. “폐하! 소신이 몇 해 전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소신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제야 그날의 불경에 대해 사죄를 올립니다. 소신은 그날 이후 새롭게 얻은 목숨을 폐하의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고, 오늘 이 전장에서 그 목숨을 폐하를 위해 바칠 각오로 싸웠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커다란 성은에 오늘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어 소신은 다행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왕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그 신하를 끌어안아 일으켜 다독였다. 결국 장왕이 그날 밤 연회에서 베풀었던 배려심이 장왕과 초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갓끈을 자르는 연회’라는 뜻이니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우친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❷ 선비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선비가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려다 봉변을 당했다. 부잣집 아들이 진주 한 알을 갖고 놀다가 잃어버리자 선비가 그만 도둑으로 몰리고 말았다. 사실 선비는 진주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다. 마당에 있던 거위가 날름 삼켜버리는 걸 봤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꽁꽁 묶인 채 헛간에 갇혀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이튿날 아침, 선비를 관아로 끌고 가기 위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때 선비가 거위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거위 똥을 잘 살펴보시오.’ 하인들이 거위 똥을 뒤적이자 잃어버린 진주가 나타났다. 부자는 깜짝 놀라며 선비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비가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면 당신들은 당장 거위 배를 갈랐겠죠. 거위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하룻밤 고생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사사건건 화를 내거나 자기 몫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속 좁은 인물’이라고 한다. 반대로 이야기 속의 선비처럼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넓은 인물’이라고 한다. 역사상 큰일을 이뤄낸 위인 중에는 이처럼 마음이 넓은 인물이 많다. 마음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받아들일 그릇이 크다는 뜻이다.
양보한다고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마음이 넓어 여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처럼 하룻밤의 고생은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나 속이 좁은 사람은 여유가 없다. 만일 여러분이 선비처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선 마음의 여유부터 가져보라.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잠시 생각할 시간부터 마련해야 한다.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올지, 그 감정을 참고 너그럽게 행동했을 때는 어떤 결과가 올지를 함께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다. 너그러운 행동을 할 때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얻을수록 여러분의 마음도 점점 넓어지지 않을까?
❸ 너그럽게 마음 쓰면 몸도 보답 받는다 / 하루를 보내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남을 용서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밝은 내일을 맞이하자. 이렇게 감사와 용서의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건강에도 좋다. 미국의 건강·의료 사이트 ‘헬스닷컴(Health.com)’이 너그러운 태도가 건강에 좋은 이유 3가지를 소개했다. ◆ 혈압을 낮춘다 / 남을 돕는 행동을 하면 심혈관 건강에도 좋다는 연구가 있다. ‘정신생리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돕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혈압이 낮고, 특히 동맥혈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을 돕는 사람들은 그만큼 되돌려 받는 것도 많다. ◆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 찰스 디킨슨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크루지처럼 구두쇠로 생활하면 지갑은 두둑해지지만, 건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공공과학도서관저널(PLOS One)’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인색하게 행동하면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흥정 게임을 시키고 신체 변화를 측정한 결과, 동료에게 돈을 꿔주는 데 인색한 사람들은 심장 박동 수와 스트레스 수치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기분을 좋게 한다 = 돈을 주는 것은 받는 것만큼이나 좋다는 연구가 있다.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100달러를 얻었을 때나 자발적으로 기부를 했을 때에나 기쁨과 관련된 뇌의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말에는 구세군 냄비나 아니면 다른 기부처에 소액이라도 도움을 주면 어떨까.
마 7:12 /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진정한 율법의 가르침이요, 예언서의 정신이다.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
마 5:38-42 / 박봉수목사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공동체 안에 태어나 공동체 안에서 살다가 공동체 안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한문에서는 이런 사람의 사회적 특성을 생각해서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람다움은 바로 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기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성실히 잘 지키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자기의 도리와 규범을 윤리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움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지켜야 할 규범을 잘 지킬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자기의 도리와 규범을 우리는 기독교 윤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안에서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의 기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자기의 도리와 규범을 지키라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38절에 나오는 법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입니다. 이 법은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 즉 동해 보상법이라고 알려진 법입니다. 동일한 대가로 보상을 하라는 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39절 이하에 나오는 법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오리로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 이 법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으로 도와주라는 법입니다.
이 두 법을 비교해 보면 너무도 달라서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해 보상법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법을 따라야 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동해 보상법을 살펴보겠습니다. 38절 말씀의 원문인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출 21:2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벌금을 낼 사람이 누구며 동해 보상법으로 갚아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해자입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걸맞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뺨을 맞은 사람, 송사를 당한 사람, 강요를 당한 사람, 도움을 청한 사람 즉 피해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피해자는 가해자를 사랑으로 용서하고 도와달라고 청을 받았으면 사랑으로 도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해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피해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법은 상충되어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이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해 보상법은 가해자가 지켜가야 할 법인데 비해, 사랑의 법은 피해자가 지켜가야 할 법이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교회생활을 잘하는 부부가 부부싸움을 합니다.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부싸움하면서도 말씀대로 합니다.
남편이 먼저 시비를 겁니다.
"여보 분명히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말씀했는데 당신은 왜 사사건건 남편 말에 토를 달고 대들고 반대하느냐고?"
아내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말씀하셨는데 자기 밖에 모르고 그렇게 이기적이냐고?"
이 부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거꾸로 적용한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이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아내가 들어야 할 말씀만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있고, 반대로 아내는 아내가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남편이 들어야 할 말씀만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남편이 자기가 들어야 할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아내도 자기가 들어야 할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이 부부는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거꾸로 말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둘이서 말다툼을 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한 사람이 상대방 뺨을 때리게 됐습니다. 싸움이 커졌습니다. 그 때 서로 말씀을 들이대며 시비를 겁니다.
뺨을 때린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 오른 뺨을 맞았으니까 이제 왼 뺨을 내어 놓이시오. 성경에 오른 뺨을 맞았으면 왼 뺨을 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뺨을 맞은 사람이 말합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오른 뺨을 맞았으니 당신도 오른 뺨을 내어 놓이시오. 성경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말처럼 오른 뺨에는 오른 뺨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가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보상을 하고, 피해를 입었으면 용서하고... 가해를 입힌 사람이 상대방에게 용서를 강요한다든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상대방의 보상을 강요하는 것은 세상의 윤리일지 모르지만 기독교 윤리는 아닌 것입니다.
2. 악을 선으로 이기라
39절 이하를 보면 악한 자를 만나서 피해를 보았을 때 대처하는 구체적인 사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뺨을 맞았을 때입니다.
본문을 보면 악한 자에게 오른 편 뺨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든 가족들 앞에서든 가리지 않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뺨을 후려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른 편 뺨을 맞았습니다. 보편적으로 뺨을 맞을 때 왼편 뺨을 맞게 되어있습니다. 오른 편 뺨을 맞게 될 때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때리는 사람이 왼 손잡이일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른 손잡이가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린 경우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를 상정해 볼 때 손등으로 뺨을 맞았을 확률이 큽니다.
악한 자에게 그것도 손등으로 뺨을 맞았습니다. 이것은 맞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과 수치를 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럴 때 다른 편 뺨 그러니까 왼편 뺨도 돌려 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서서 싸우거나 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때리더라도 가만히 맞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때론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사 53:7을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면서도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을 다물고 흐트러짐이 없이 그 모욕과 수치를 다 당할 때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때 입을 열고 변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똑 같은 사람으로 치부되면서 악에게 지고 맙니다.
둘째, 송사를 당했을 때입니다.
악한 자가 소송을 걸어서 속옷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속옷이 무엇입니까? 겉옷 안에 받쳐있는 옷을 말합니다. 흔히 under wear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남성용으로 말할 때 런닝, 팬티, 내복 같은 것들입니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옷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속옷 한 벌 빼앗자고 소송을 걸고 재판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 얼마나 치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치사한 일을 당했을 때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차라리 요구하지 않은 겉옷까지 다 내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 26장을 보면 이삭이 우물 문제로 그랄 사람들과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는데 그 때 그랄 사람들이 자기 우물이라고 생떼를 씁니다. 이삭이 싸우지 않고 그냥 주고 물러납니다. 다른 곳에서 또 우물을 팠는데 또 쫓아와서 그 우물도 자기들 것이라고 생떼를 씁니다. 또 물러났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팠는데 또 물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저들이 물러섰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그 우물이 풍성해서 거기서 큰복을 누렸습니다. 바로 이 우물이 브엘세바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때로는 치사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억지를 부리고 말도 안되는 강짜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휘말리면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그냥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브엘세바의 축복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셋째, 오리를 가지고 강요받았을 때입니다.
본문을 보면 악한 자가 와서 부당하게 오리를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구레네 시몬이 로마 군병에게 억지로 주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던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게 오리를 가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가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럴 때 십리까지도 가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부당한 의무를 강요받을 때가 있습니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속이 상합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가 남을 위해 봉사할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강제된 상황이라기 보다는 봉사할 기회요 오히려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을 베풀라
42절을 보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을 만났을 경우입니다.
여기서 먼저 네게 구하는 자와 네게 꾸고자 하는 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내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도움으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도움을 구하는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도움 구하는 일이 하나의 직업화되는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타러 가다보면 출입구에 도움을 구하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분들은 거의 매일 만나게 됩니다. 외면하고 지날 때 오늘 본문 말씀이 무겁게 마음을 누릅니다.
또 저 같은 경우 도움을 청하는 편지와 E-mail을 셀 수 없이 많이 받습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분들입니다. 읽어보면 정말 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제게만 보낸 게 아니고 때론 전국 중견교회 목회자에게 다 보냈습니다. 모른 척 하자니 본문 말씀이 무겁게 마음을 누릅니다.
이런 일들을 겪다보면 시대적인 흐름이 이렇다고 핑계를 대면서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일에 익숙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비를 베푸는 일에 마음이 굳게 닫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거절하지 않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을 다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돕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도와야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도우라고 보내신 사람인지 여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선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경우 악기 연주를 하는데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 때 찬송가를 부르면 몇 푼 적선을 하고, 다른 노래를 부르면 적선을 하지 않고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도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시고...
둘째, 사랑의 의지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정이 생겨나고 그 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도 몰래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연애 중인 남녀 사이에 이런 일들이 생겨납니다.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이런 사랑을 에로스나 필레오 또는 스토르게 라고 대상에 따라 다르게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대상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서 정이 솟구쳐 오르고 돕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의지로 사랑하는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내게 도우라고 보내신 사람들에게 의지적인 사랑의 손길을 펴서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 윤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 몇 가지를 제시해 줍니다.
우선 자기의 도리를 지켜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적절히 보상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남에게 피해를 입었으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억울한 일, 부당한 일, 기막힌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펴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마땅해 해야 할 도리와 규범을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게 하옵소서.
화목과 관용
마 5:39 / 이성희 목사
잠언 19:6-7(P.931),마태복음 5:39-42(P.6)
서론
문예부흥이라 일컫는 ‘르네상스’는 이태리 메디치가의 공헌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메디치가는 이태리의 명문가로서 학식도 재물도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르네상스가 가능하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피렌체의 현명한 지도자 피에로 소데리니는 미켈란젤로라는 젊은 화가를 볼테라 추기경에게 추천하여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인자하게 대해주신다면 그 재능으로 보아 그는 불가능한 일도 해낼 것입니다. 친절과 애정을 가지고 너그러이 대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업적을 이룰 것입니다.’ 당시에 이름도 없던 미켈란젤로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므로 미켈란젤로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 등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너그러움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은 관용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관용은 인간의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관용’(tolerance)이란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원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전쟁의 결과로 16세기에 생겨난 말입니다.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를,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을 관용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은 아주 치열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다시 역 종교개혁인 ‘카운터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가톨릭 교인들에게 이교로부터 받는 박해보다 더 심한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프랑스는 1598년 ‘낭트칙령’으로 갈등이 끝나고 서로 관용하기로 했습니다. 독일은 가톨릭과 루터교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조약’으로 갈등의 끝을 고했습니다. 유럽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30년 종교전쟁은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런 오랜 과정들을 통하여 신구교가 서로 관용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2008년 예일대학교 법대 교수인 에이미 추아 교수는 ‘제국의 미래’(Day of Empire)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800년 전 몽골을 대비하여 미국의 미래를 예측한 책입니다. 유목민인 몽골인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말 타는 재주 외에는 특별한 기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술과 지식을 가진 중국인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활용하여 역사상 가장 방대한 국토를 가진 초강대국을 형성하였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세계 각국의 유능한 인재를 포용하고 활용하므로 역사상 초강대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나라의 중요한 핵심 공통점은 ‘관용’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용은 그 자체가 엄청난 힘입니다.
야고보서 3:17에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관용이란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란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셔야 너그러워지고, 관용하게 됩니다.
관용이란 사랑과 용서와 이해와 인내와 자비와 온유, 이 모든 것들을 모아놓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입어야 관용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누구나 관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 관용을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습니다.
잠언 19:6 상반절에는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라고 합니다. 마음이 너그럽고 아량이 있는 자에게 사람들은 은혜를 구하려 몰려옵니다. 너그러운 사람이 사람을 얻는 법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이란 히브리어 ‘나디브’인데 ‘관대한’, ‘고관’, ‘귀인’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아량이 있고 권세를 가진 자에게 많은 사람이 은혜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너그럽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구할 리 없습니다. 지위가 낮은 자에게 은혜를 구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너그럽고 권세와 지위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좁은 부자에게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모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따르는 이유 가운데 돈보다 우선 되는 것은 사람의 너그러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받아 줄 아량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이 한 없이 너그러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용하심은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 길이 참으십니다. 용납하지 못하실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사야 55:1에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용하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다 오라고 하십니다. 돈이 없어도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하실 때 노아의 방주에 8사람이 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못 타게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타락하여 방주에 탈 자격이 없었던 것이지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은 아닙니다. 방주의 문이 열려 있었지만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홍수로 멸망하실 것을 비웃고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다 구원받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잃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합니다. 아직도 천국의 문은 닫히지 않은 문입니다.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끝까지 기다리다 친히 닫으신 것처럼 끝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용입니다.
유대교 문화의 식사습관은 아주 엄격합니다. 식사는 유대인 그네들의 가족, 공동체, 민족 내부 구성원과 외부인을 구분하는 자리입니다. 그들의 회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뉴욕에서 저의 형님 댁 가까이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보려고 갔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제가 목사라고 신분을 밝혀도 유대인이 아니니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일상적 식사에서는 이방인이나 나그네는 배제되었습니다. 식사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별한 정결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식사한 무리의 공통점은 모두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매춘부, 좀도둑, 세금 징수원, 채무자, 혼혈인, 부랑자, 이방인 등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거룩한 무리들의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용하심을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관용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9에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있었던 한 여인을 보세요. 예수님께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기름을 붓고, 눈물로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죄 많은 여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여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의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을 용납하시고, 관용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4:24에는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받아주셨습니다.
아이들과 시각장애인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했고, 시각장애인들이 소리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오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으니 속히 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예수님의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용입니다.
소설가 최인호의 ‘상도’에는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작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하지만 큰 장사는 결국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 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장사도 크게 해야 합니다. 사람을 얻는 장사를 해야 합니다. 이런 장사를 해야 프로입니다. 장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사람을 얻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4:4-5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관용해야 하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관용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용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되세요. 관용은 화목의 뿌리입니다. 너그러우면 사람을 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용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세요. 이것이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길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길입니다.
둘째,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친구가 많습니다.
잠언 19:6 하반절에는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합니다. 하반절은 상반절의 설명입니다. 관용적이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선물 주기를 좋아하고, 그런 자에게 친구가 많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화목하길 원하십니까? 우선 마음이 너그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에 있거나, 더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입니다.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독일 격언에는 “선물을 보지 말고 선물 주는 손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물은 그 자체보다 주는 사람의 마음을 봐야 선물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선물이지만 큰마음을 담아 주는 선물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20:35에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등입니다. 주면 절대 손해 보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왜 주라고 합니까? 왜 선물을 주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선물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선물이란 대가가 없는 것입니다.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공짜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모두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리하게 하셨고, 그것을 가지고 누리게 하셨습니다. 해, 달, 나무, 바람, 비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공짜로 주신 것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야고보서 1:17에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선물을 친히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영원하시고 풍성하신 산타크로스이십니다.
‘선물’이란 ‘분에 넘치는 호의’라는 뜻의 ‘카리스’ 즉 은혜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카리스마타’입니다. ‘은사’란 은혜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매일 끝도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시몬이란 사람이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다가 책망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에 펠라기우스와 오랜 논쟁을 했습니다. 펠라기우스가 행위를 강조하여 인간의 구원이 행위와 의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방편이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선한 것들이 모두 자신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라지토’(largitor) 즉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한 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에 비해 볼 때 어떤 선물도 참 가치 있는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 주기를 좋아 하신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선물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선물이 별거 아니라도 다 받는데 내가 받지 못하면 섭섭한 것이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원을 얻게 선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는 “선물을 준 사람에게 답하는 최고의 감사 인사는 받은 선물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물은 감사하므로 받아, 즐길 줄 알고, 그리고 받은 만큼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친구가 생깁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쌀독을 열어야 인심이 생기고, 광을 열어 나눠줘야 인심이 생기고, 주면 모이고, 주면 더 가까워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줄 때 가까워지고 보람을 느끼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안과병원 원장이신 김선태목사님이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란 책을 쓰셨습니다. 그 분은 정말 땅을 잃은 분이고, 하늘을 얻은 분이십니다. 이 책의 출판기념회를 할 때에 제가 서평을 하였는데 한 줄을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김선태목사님 만큼 손으로 베풀기를 즐겨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항상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줍니다. 그래서 항상 주고 난 빈손 같지만 마르지 않는 샘처럼 날마다 넘칩니다. 이것이 그 분 속에 간직된 신비입니다.”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6:18에는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선한 사업을 많이 합시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합시다. 그리고 너그러운 사람 됩시다. 이것이 성경이 권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입니다. 화목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결론
어느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사람과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을 잠시 본 적이 있습니다. 지리산 아래 산골 화개면의 어느 슈퍼마켓에 시인인 전직 교사와 미술교사 출신의 부부가 살면서 동네에서 유일한 마켓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두 사람이 똑같이 퍼주기를 좋아해서 뭐든지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먹습니다. 남편이 산에 가서 아주 귀한 버섯 하나를 따 가지고 왔는데 동네 아저씨에게 주면서 몸에 좋으니 다려서 먹으라고 줘버립니다. 아내도 퍼주기를 좋아하니 프로그램의 PD가 물어봅니다. “퍼주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그 때 아내는 주저하지도 않고 대답합니다. “사람이 남죠.” 산골의 작은 슈퍼마켓이지만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사람들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을 얻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삶을 제대로 살 줄 알고, 삶을 즐기고 있는 부부였습니다.
이런 인심은 절대 모자라지 않는 삶을 삽니다. 주면 없어져야 하는데 없어지기는커녕 더 많아집니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삶의 역설입니다.
소박한 인심 가운데 삶의 진리가 있습니다. 너그러움이란 성경적 품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인색한 깍쟁이가 아니라 너그러운 젠틀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관용하므로 많은 사람을 얻읍시다. 선물 주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됩시다. 그리하여 화목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