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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지금으로부터 이십 여 년 전, 내가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아버지를 도와 밭에 나무를 심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우리에게 밭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농사짓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동네 부동산 아저씨가 우리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아버지와 아저씨는 방바닥에 지도를 펼쳐놓고는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엄마가 내오는 과일에만 눈독을 들였을 뿐,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때 밭을 사지 않았을까 한다.
밭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아버지가 어디선가 가져온 삽을 한 자루씩 들고 밭으로 같이 걸어갔다.
밭 가장자리에 세워진 트럭 짐칸에 소나무 묘목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저걸 다 심는 다고?”
나는 투덜대며 주말 내내 삽으로 땅을 파야 했다.
“형님은? 형님도 오라고 하지.”
“형은 공부하잖아.”
나보다 10살이 많은 형은 서울대에 다니고 있었다. 형과 나이 차이가 꽤 있는 지라 어려서부터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아버지에게 교육받았다.
자식이 서울로 대학가는 것만 해도 자랑거리였던 시골에서, 형 덕분에 아버지는 어디에 가든 득의양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은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서울대 법대에 다니고 있었다.
형은 일찌감치 군복무를 마치더니 본격적으로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사법고시가 뭔지 알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대단한 시험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 보고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큰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인지, 늦둥이인 나에게 거는 기대감은 거의 없었다. 나는 당시 친구들과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 한 개만 있으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놀 수 있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아버지는 그저 내가 사고나 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아버지가 가져온 묘목은 해송이었다.
내 허리춤 보다 작은 나무가 몇 년 뒷면 크게 자랄 거란다.
“나중에 이 해송들이 멋지게 자라면 너 결혼할 때 한 밑천 해줄게.”
나는 차라리 나무 대신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나 고구마 같은 농작물을 심어서 매해 수확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하필 나무 심을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서야 생각해봤다.
땅이 개발이라도 되면 토지보상비에 나무 값도 더해주는 일도 있다지만, 그 시골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군청의 도시환경 어쩌구하는 과의 과장이었다.
요즘에야 군청에서 가로수나 꽃을 심는 일들은 전부 외주를 주겠지만, 당시에는 공무원들이 군 소유의 토지에 꽃이나 나무를 직접 심고 가꾸었다. 여름철만 되면 길거리에 나무나 꽃을 심던 아버지는 농사꾼보다 더 새카맣게 탔다. 어머니는 자기가 공무원이랑 결혼한 줄 알았는데 농사꾼이랑 결혼했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새참 나온 막걸리 먹고 운전이나 하지 마.”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도시 환경을 가꾸는 일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마 나무가 다 자랄 무렵이면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나무를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 몇 년간 밭에서 자라고 있는 해송 가지에 굵은 철사를 둘둘 말아서 모양을 내기 시작했다. 해송은 쑥쑥 크며 외형이 제법 멋들어졌다. 어느 부잣집 정원에 조경수로 어울릴 듯 했다.
몇 해 더 흘러 나는 어느 지방대를 졸업했다.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정신을 차리고는 서울로 취직하려고 아등바등 공부했다. 간신히 서울에 위치한 어느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시골뜨기가 막연히 품던 상경의 꿈을 마침내 이루자 무척 행복했다. 미리 상경해 있던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 무렵 형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지방 광역시에서 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형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 아마 대여섯 번 이상은 사법고시에 떨어졌던 것 같다. 형의 합격 소식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전화로 들었다. 아버지는 전화기에 대고 울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의 울음 소리였다.
아버지는 모처럼 추석 때 집에 온 형과 나를 데리고 밭에 갔다.
형은 나무에 대한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아버지, 나무가 정말 근사한데요? 저 나무 봐. 꼭 독수리가 날아오르려고 날개를 쫙 펼치는 것 같지 않아?”
“형님은 눈독 들이지 마. 그때 형님은 한 그루도 안 심었잖아. 아버지가 이거 팔면 내 결혼 자금으로 준다고 그랬어. 아버지가 예전에 나무 심을 때 약속했잖아? 내 말 맞지?”
나는 아버지의 확답을 기다리며 말했다.
“형도 이제 다시 결혼해야 하니까...”
아버지가 말끝을 흐렸다.
형은 사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선을 봐서 결혼했다가 얼마 전 이혼했다. 아이는 없었다. 형이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아서 이혼 사유는 나도 부모님도 잘 모른다. 다만 같이 못 살 것 같다는 얘기만 반복했었다.
아버지가 퇴직하기 전에 식을 올리기 위해 빠르게 진행된 결혼이었다. 형의 결혼식은 군에서 가장 큰 예식장에서 열렸었다. 공무원 생활 30년 동안 아버지가 뿌려둔 축의금을 다시 수거하는 자리라 접수데스크를 내게 맡겼다. 하객들로 북적였다. 집에 와서 세어보니 돈 봉투가 600개가 넘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바람에 나는 축의금 명단과 금액을 수첩에 일일이 기록하느라 팔이 아팠다.
아버지는 내심 자신이 은퇴하기 전에 형이 다시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 후로 다시 몇 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35년 공무원직에서 은퇴했고, 나는 아버지 은퇴 직전에 가까스로 결혼했다.
그 사이 밭에 있는 해송은 너무 커버려서 저걸 뽑아서 옮겨 심을 수 있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형은 여전히 지방 광역시에서 판사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재혼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변에 중매 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형이 거절하는 모양새다. 형은 스스로 집안 어른들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 한동안 명절 때에도 일을 핑계로 집에 오지 않았다.
나의 첫 아이 돌잔치에도 형은 식사만 하고 바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첫 손주를 보며 방긋 웃다가 돌아간다는 형의 말을 듣고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머니는 떠나려는 형을 붙잡아 놓고는 바리바리 음식들을 쌌다. 싫다는 형의 손에 보자기로 싼 음식꾸러미를 기어이 쥐어 보냈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밭에 있는 나무를 팔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아버지께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사실 나무 판 돈을 결혼자금으로 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시에도, 지금도, 그깟 나무 팔아봤자 얼마나 받겠어, 라고 생각했다. 내심 그 돈으로 부모님께서 해외여행이나 했으면 바랐다.
“어떻게 된 거에요?”
“며칠 전에 네 형이 아는 사람 통해 팔 수 있다고 연락 왔어. 나무 사진 여러 장 찍어서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지. 그랬더니, 나무가 좋다고 그쪽에서 사겠대.”
그 얘기를 듣고 나는 형이 다른 사람들이랑 교류하지 않고 외톨이처럼 지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러나 형이 조경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내심 찜찜했다.
밭에 있던 해송들이 옮겨지자, 마침내 아버지 카톡 프로필에서 해송 사진이 사라졌다. 나는 그루 당 얼마나 받았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쁨 섞인 목소리에서 나무 값을 제법 두둑이 받았다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 돈으로 어머니랑 놀러 다닐 거라는 말이 반갑게 들렸다.
얼마 후, 형은 변호사 개업을 한다며 판사를 그만 두었다. 공무원으로 은퇴한 아버지는 내심 서운해 했으나 고향 근처의 광역시로 온다는 말에 반색했다. 형은 학교 친구랑 동업하기로 했다. 그 곳에 작은 아파트를 구하고, 며칠 뒤 이삿짐을 보냈다. 그리고 혼자 운전해서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형의 유해는 밭에 남아 있던 두 그루의 해송 밑에 뿌려졌다.
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이 두 그루는 팔고 싶지 않아 남겨 두었다고 했다.
나중에 형이랑 나에게 한 그루씩 줄려고 했단다.
모두 아파트에 사는데 대체 어디에 심는다고.
형과 나는 같이 산 세월보다 떨어져 산 세월이 훨씬 길어서 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어느새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아버지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이제 그만 울라며 아버지를 다그쳤다.
형이 떠나고 몇 년간 아버지는 밭에 농사를 지었다. 감자며, 고구마, 옥수수 등, 심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심었다. 수확할 때가 되면, 아버지는 농사지은 것을 가져다 먹으라고 나를 불렀다. 나는 주말이 되면 아내, 아이와 함께 고향에 가서 같이 농작물을 땄다. 그러다 힘이 들면 형이 잠들어 있는 나무 밑에서 쉬었다. 가끔 형 생각이 나곤 했다. 제 돌 잔치에 한 번 본 큰 아빠를 기억할리 만무하지만, 아이에게는 나무 밑에 큰 아빠가 묻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큰 아빠가 뭐냐고 되물었다. 나는 아빠의 형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아이는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를 따라나섰다.
얼마 전, 아버지가 경찰에서 연락을 받았다. 형이 근무하던 지역 건설업자가 뇌물 혐의로 조사를 받던 와중 그의 수첩에서 형의 이름이 나왔단다. 형의 이름 옆에 ‘나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고, 아들도 이미 죽었으니 그런 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경찰은 혹시 뭐 아는 게 있는 지 묻는 거였다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단다.
며칠 뒤, 아버지는 밭에 남아 있던 해송 두 그루를 베어버렸다.
아이가 여기 있던 나무 어디 갔냐고 내게 묻는다.
그루터기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답하지 못했다.
아이가 그럼 여기 있던 큰 아빠도 같이 간 거냐고 다시 묻는다.
나는 끝내 할 말이 없었다.
형이 밭에 와서 처음 나무들을 봤을 때, 독수리 같다던 그 나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끝-
첫댓글 장남 선호사상이 무척이나 심하게 전해져 내려왔었지요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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