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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움직이는 것, 변화되는 것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의 ‘색깔?’ ‘특징?’ ‘강도?’는 부족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듯합니다. 그래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특징 중에 우세한 측면 하나를 고르라면 아마도 ‘역동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말 많이 들어왔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장시킵니다. 사랑은 한곳에 안주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너무나도 당연히 폐쇄적이어서는 안 되며 적극적인 개방형에 다분히 외부 지향적, 다시 말해서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개방성과는 달리 우리 인간 안에는 한곳에 안주하고 정착하려는 습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는 어찌 보면 오늘 우리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복음서 안에서 보여준 다양한 모습 안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잠시나마 지상천국을 맛보았던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일종의 정주 본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7장 4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고요하고 평온해서 천국 같은 산 정상, 아무런 스트레스도 상처도 없는 산 정상에 우리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영성의 높은 산에 도달한 다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사 인간 세상으로 하산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밑에서 아옹다옹 티격태격 살아가는 부족한 인간들에게도 산 정상에서의 맛을 느끼도록 초대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나자렛의 청년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부단히 변화하십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십니다. 그 과정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변모 사건입니다. 언젠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변화와 성장은 완결될 것입니다. 변모의 끝은 아버지 뜻에 완벽히 순명하는 대사건인 십자가 죽음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살다가 세상 떠나는 것 별로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나 성장도 없이 평생토록 지지리도 못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절대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작은 것 하나 양보 못하고 ‘찌질이’ ‘쫌생이’처럼 살아가는 것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내면 안에 감추어진 이 엄청난 가능성의 보화들을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세상 떠나는 것 결코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변화와 성장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바라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부단히 삶의 지평을 넓혀나가 한그루 큰 나무, 큰 인물로 자리 잡을 것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동료 인간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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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9.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하바1,12-2,4 마태17,14ㄴ-20
믿음의 의인(義人)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주님과의 관계도 깊어져 좋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 안에 있고 모든 답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집중하여 답을 찾아내는 것이 기도와 믿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의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아버지와 독서의 하바쿡 예언자는 믿음의 모범입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의 아버지의 기도가 참으로 간절합니다.
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 없이는 믿음도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자비송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곤궁을 잘 아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로다.“
주님의 탄식은 그대로 오늘 날 세대에도 해당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삶 역시 저절로 비뚤어져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마귀는 나갔고 바로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아이 아버지의 믿음에 구마이적으로 응답하신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제자들과 주님의 문답 내용이 참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약한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 약함에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약한 믿음에 좌절할 것은 없습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원천이신 주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하바쿡 예언자가 '기도의 사람'의 모범입니다.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
그분께서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내 하소연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보리라.“
깨어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는 하바쿡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가 간절하고 절실할 때 주님은 당신의 적절한 때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새삼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뻔뻔스러워 교만한 자들의 정신은 바르지 않습니다.
겸손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바릅니다.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의 정신이 그러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성실함으로 삽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깨어 주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며 삽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하고 약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우리 모두 '믿음의 의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을 찾는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니, 당신 이름 아는 이들이 당신을 신뢰하나이다."(시편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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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하바쿡 1,12 ― 2,4
복음 마태 17,14ㄴ-20
제게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펜을 구입한다는 것이지요. 연필이나 볼펜, 또는 사인펜을 바꿔서 글을 쓰면 글이 잘 써지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구입한 펜이 하나 가득입니다. 몇 년을 써도 다 못 쓸 정도의 많은 펜을 가지고 있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것 하나. 그렇다면 펜을 바꿨다고 해서 글 내용이 좋아졌고, 글씨체가 더 좋아졌을까요?
당연히 외적인 것 하나 바뀌었다고 완전하게 바뀔 수가 없습니다. 본질이 변해야 진정으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펜 하나 바꾸는 것보다는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열린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보다는 계속해서 외적인 것만 바꾸려는 것, 그래서 진정한 변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인 것만을 바꾸려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 역시 외적인 환경으로 생각하기에 남 탓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외적인 환경 변화 등으로 좋은 길, 즉 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얻을 수 없으며, 내가 원하는 모습을 한낱 꿈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근본적인 변화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 주님께 굳은 믿음을 두는 삶입니다. 이 믿음의 변화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간질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믿음이 매우 약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말을 하지요. 마치 주님의 제자 탓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보면, 굳은 믿음을 갖고 환자를 데리고 와서 치유의 은사를 받는 경우가 많았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 탓보다도 아버지인 자신의 믿음 부족함이 치유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내 자신의 믿음입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이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믿음이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로 내 안에서 또 하나의 기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적당주의자가 되지 말라.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휴그 왈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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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차동엽, ‘천금 말씨’ 중에서)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 여류 화가는 심혈을 기울여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한 평론가가 작품을 돌아보더니 이렇게 평했다. “당신 작품엔 재능이 번득이고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가 부족하군요.”
화가는 평론가의 칭찬은 다 잊고 “깊이가 부족하다.”라는 말에 마음이 걸렸다. 그래서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잡념에 사로잡혔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이내 술과 약물에 빠졌다. 결국 비관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그림을 전부 찢고 139미터 절벽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평론가는 분명히 격려와 비평을 균형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화가는 “깊이가 부족하군요.”라는 지적만 새겨 들었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칭찬 끝에 달린 어떤 한 단어가 우리 귀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꼬투리를 잡고 자신을 쥐어짠다.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일은 점점 더 꼬인다. 그러니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 반대 경우도 있다.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에서 생의 전환을 맞이하는 횡재 말이다. 영화 ‘대부’의 주연 알 파치노는 명배우로서 전성기를 보내던 40대 중반, 한 영화의 흥행 참패로 실의에 젖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은 노래 ‘마이 웨이’의 가사에서 재기할 힘을 얻었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고, 예외 없이 끝까지 해냈지……. 그리고 그보다 더, 그보다 훨씬 흐뭇한 건,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이 대목을 듣는 순간, 알 파치노는 ‘내 길을 가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이후 그는 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이 바라던 삶을 찾아갔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 말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일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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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간 토요일>(2014. 8. 9. 토)(마태 17,14ㄴ-20)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어떤 사람이 마귀 들린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마태 17,15-18).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이 말씀만 보면 제자들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었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사도로 뽑힐 때 마귀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셨을 때(마태 10,5-15),
많은 마귀를 쫓아냈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마르 6,13).
이미 많은 마귀를 쫓아냈었던 제자들인데,
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는 상태로 바뀌어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게 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처음에는 '믿음으로' 마귀를 쫓아냈지만,
나중에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들의 권한과 능력만으로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마귀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마귀들은 예수님의 이름에는 굴복했지만
제자들에게는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제자들의 권한과 능력은 모두 예수님께서 주신 것인데,
아주 주신 것이 아니라 위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권한과 능력은 예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효력이 있고,
연결이 끊어지면 효력도 사라집니다.
(그때에는 그랬던 제자들이었는데,
나중에 그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데,
왜 내가 믿는 대로, 기도한 대로 안 되는 것일까?
내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안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대부분 사도들이나 성인들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살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기를 바랄 뿐인데,
그런 작은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큰 일'을 겪을 때에는 절망하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는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 되기도 하고, 과제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믿어야 제대로 된 믿음인가?
우선 믿음의 모범이신 성모님의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천사는 성모님에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37).
이 말은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에서
'불가능한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뜻하고,
동정녀가 아기를 잉태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
어머니로서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는 일까지 모두 가리킵니다.
그 일들은 성모님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모님은 그 일들을 하시는 하느님의 협조자였습니다.
(동정녀이신 성모님은
천사를 만나기 전에는 아기 잉태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천사를 만난 뒤에 아기 잉태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믿고 순종하고 응답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일의 협조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을 믿어라." 라는 뜻이 됩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믿고 청할 뿐입니다.
또 '기도'는 하느님께 명령하는 일이 아니라, 간청하는 일입니다.
어떤 일의 결정권은 주님이신 하느님에게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망과 다른 결정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고 바라는 대로 안 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소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주시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바라는 대로 안 된다고 해서
"내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라고 자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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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8월 9일 나치스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숨진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곧 에디트 슈타인을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성인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이 시성 결정은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녀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 이미 뛰어난 철학자였다는 점과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독일계 유다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시성 이듬해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며, 그녀의 삶과 죽음이 오늘 이 시대의 중요한 징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녀는 철학자로서 진리를 타협 없이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추구만이 유일한 기도’였던 그녀는 각고의 노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만이 참된 진리이시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리를 찾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도 찾지 못하고, 영원한 삶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도달할 수 없고, 그의 가슴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삶의 근원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또한 유다인이자 가르멜회의 수녀로서 ‘유다인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고통과 악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받아 안았습니다. 유다인의 대속죄일(욤키푸르)이 그녀가 태어난 날이라는 사실은 하느님의 섭리인 듯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그녀의 마지막 시기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일치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데, 세상의 악과 고통이 진리와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데 살아 있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성녀의 순교일인 오늘,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위대함이며, 진리는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안에서만 그 모두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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