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비늘 산비늘
최재우
아침 일찍 가을 산을 오른다. 귓전으로 스치는 바람이 쌀쌀하다. 거친 숨이 입김 되어 코끝에서 흩어진다. 누가 가을을 상실의 계절이라했던가? 낙엽을 떨구는 가지들이 쓸쓸해 보인다. 하늘로 돌아가고 있다.
오솔길에 낙엽이 수북하다.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길이 점점 가팔라진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산을 오르는 내내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다. 오르고 또 오르는 일만이 우선 급한 일이다. 대개 산은 꼭대기가 있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기를 한동안, 뭔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휑하니 뚫린다. 정상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갑자기 닥쳤을 때, 더욱 감동적이다. 저 아래 풍경을 보노라니, 너무도 상쾌하다. 바다 같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전에도 가끔 이 산을 올랐지만, 지금 같은 모습은 처음이다.
물이 반짝이고 있다. 아스라이 먼데 있는 물은 그냥 푸르스름한 물빛인데, 저 아래 가까이 있는 물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반짝거리고 있다. 하얀 고기떼가 물 위에 떠 있는 거 같다. 아하 ! 저런 모습을 윤슬이라고 하는구나. 얼마 전쯤이다. 친구가 대청호 물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며, ‘윤슬’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물이 햇빛이나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이란다. 그때 처음 윤슬이라는 말을 알았다.
윤슬과 같은 의미로 물비늘이라는 말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비늘!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말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쯤이다. 장마가 갓 끝나고, 무논에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을 때다. 물살을 가르며 허둥대는 고기를 아버지가 가슴으로 잡으셨다. 그때 퍼덕이던 물고기의 비늘을 본 적이 있다. 하얀 몸통에 촘촘히 박힌 비늘이 여름 햇볕에 반짝였다. 아버지 팔뚝만큼 큰 고기였다. 지금 저 아래로 보이는 윤슬을 보노라니, 그때 아버지 고기가 생각났다.
한참 동안 호수의 물비늘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마당바위로 올라가 본다. 아! 거기에는 또 다른 가을의 비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들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높고 낮은 산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호수로 내려온 낮은 산들은 긴 손을 물에 담그고 있다. 계절이 산이라는 캔버스에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빨갛고, 노랗고, 푸른... 총천연색이다.
스무살 남짓 대학생 때, 설악산으로 답사를 간 적이 있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울긋불긋 단풍길이다. 천길 낭떠러지에 걸린 금강굴에서 내려다본 천불동 계곡은, 그야말로 불타오르는 단풍의 거대한 용광로였다.
오십여 년 전에 보았던 단풍이, 지금 이 자리에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 저 같은 풍경을 이르는 말이 뭐가 있을까? 를 생각해본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면, 햇빛을 받는 오색찬란한 가을 산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사람들은 이름을 통해서 어떤 모습을 마음속에 떠 올린다. 산이 있으면 물이 있고, 물이 있으니까 거기 산이 있는 것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을 물비늘이라고 하듯이, 오색 단풍으로 반짝이는 저 산 모습을 산비늘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모자이크 같은 낙엽들이 산의 비늘로 보였다.
원래 말이라는 것은, 처음 누군가 말하고,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사색이 보태지면서, 하나의 의미로 굳어지는 것이리라. 어느 시인은 ‘꽃’이라고 하니, 내게로 와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고 하였다. 윤슬이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윤슬은 그저 낱말의 배열에 불과할 뿐이다. 물비늘의 상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물비늘은 모습이 감감한 어떤 말일 뿐이다.
대청호에 너르게 펼쳐진 물비늘을 보고, 산비늘이란 말도 생각해보면서 한참을 서성였다.
갑자기 한바탕 바람이 분다. 호수도, 산도 흔들린다.
저 아래로 굽어보니, 큰 고기 한 마리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큰 초록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찬란한 비늘을 퍼득이며 휘익 산을 타 넘고 있었다.
따갑지 않은 가을 햇살은 내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첫댓글 한바탕 바람이 분다. 호수도, 산도 흔들린다.
저 아래로 굽어보니, 큰 고기 한 마리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큰 초록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찬란한 비늘을 퍼득이며 휘익 산을 타 넘고 있었다.
한바탕 바람이 분다. 호수도, 산도 흔들린다.
저 아래로 굽어보니, 큰 고기 한 마리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큰 초록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찬란한 비늘을 퍼득이며 휘익 산을 타 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을 물비늘이라고 하듯이, 오색 단풍으로 반짝이는 저 산 모습을 산비늘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모자이크 같은 낙엽들이 산의 비늘로 보였다.
산비늘, 아름다운 낱말을 빗으셨습니다. 다음에 저도 사용하여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