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노희태
성경봉독: 이사야 11장 1-9절; 요한일서 3장 7-24절
설교본문: 마태복음 18장 1-10절
설교자: 노희태 강도사
설교제목: 천국을 소유한 어린 아이들
설교대지
1. 어린 아이는 ‘자신을 낮추는 자’입니다.
2. 어린 아이는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3. 어린 아이는 ‘내 형제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도 계급은 존재할까요?” “소수의 권력집단이 존재할까요?” 뜬금없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한번쯤은 해볼법한 질문입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가 계급 사회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꿈에 그리는 이상향으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제부터 시작한 대학생·청년 세미나 주제가 ‘민주주의’였습니다. 그런데 강의 서두(intro)에 제시된 첫 문구가 “불평등이 보편이 된 지금, 시민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라는 문구였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대한민국 헌법 2.11.1)라고 민주주의 헌법은 규정합니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정부나 관료들,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극소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할 정도입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마저 계급 사회가 지배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러한 계급이 지배하는 세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천국(하늘들의 나라/왕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런 질문은 어떻게 보면 ‘계급 사회’라는 일반 세상 속 관점에서는 흔히 해볼법한 질문입니다. 가령 로마 가톨릭 신자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아무래도 ‘예수님-마리아-교황’을 가장 크다고 말하겠죠. 혹은 종교가 아닌 일반 사회에서 이 질문을 해본다면 대기업의 오너(owner)와 같은 사람들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계급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종류의 질문은 항상 유효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 사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신앙적인 비평을 할 수 있어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본문에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뜻밖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한 명을 그들 가운데로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3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상식 밖의 대답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가, 작은가의 문제’ 이전에 더욱 근본적인 문제, ‘천국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을 전복시킨 것입니다.
저는 오늘 바로 이 주제, “너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설교의 중심에 두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천국이란 무엇인가’, 곧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계급 사회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크고, 누가 작은가’라는 문제가 절대시되는 그런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누구의 것인가’, ‘천국에는 누가 들어가느냐’라는 근원적인 문제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어린 아이 한명’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셔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라는 특정 대상을 통해 천국을 소유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의 요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어린 아이는 ‘자신을 낮추는 자’입니다.
둘째, 어린 아이는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셋째, 어린 아이는 ‘내 형제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
1. 어린 아이는 ‘자신을 낮추는 자’입니다.
먼저 어린 아이는 ‘자기 자신을 낮추는 신자 됨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마태복음 18:4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큰 자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진 생각을 옹호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누가 큰가, 작은가?”라는 질문 자체를 전복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답 속에 묘사된 어린 아이의 특징이 이 질문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의 특징이 바로 ‘자기를 낮추는’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목하고 계신 어린 아이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자기 낮춤’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겸손’(humble)입니다. 헬라어에서 ‘겸손’을 뜻하는 이 말(ταπεινόω)은 기본적으로 ‘자기 낮춤’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도덕적인 겸양의 미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동양권에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겸손’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유교(유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교(유학)에서 말하는 ‘겸손’은 삼강오륜(三綱五倫) 등과 같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도리에서 비롯됩니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의 됨됨이를 두고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자고로 아랫사람은 웃어른을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고, ‘겸손’은 이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기초가 됩니다. 물론 세대 간의 갈등이 이슈가 된 현대 사회에서는 유교(유학)가 말하는 ‘겸손’이 거의 상실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는 유교(유학)가 말하는 ‘겸손’을 평가절하(平價切下) 하는 생각들이 더욱 많습니다. 한국 사회의 첨예한 세대 갈등과 관료주의의 병폐 등등의 원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요즘은 ‘겸손’의 가치보다 ‘자기 P·R’이 더욱 가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이런 인간의 덕목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인간의 철학이 만들어 낸 이념적 가치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헬라어로 ‘자기 낮춤’(ταπεινόω)은 인간의 덕목을 뜻하기 보다는 ‘어떤 사람이 처해 있는 어떤 상황 혹은 지위’를 가리킵니다. 원어로 이 말의 뜻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낮춘다’는 능동의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낮춰진’, ‘낮아진’이라는 수동의 의미가 강합니다. 즉, 자기 스스로가 예의를 갖춰 낮아지려 하는 겸양의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있어서 그는 너무도 ‘굴욕적이고, 비굴하고, 하찮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가진 지위에 있어서 그는 너무도 ‘낮고, 초라하고, 비천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쉽게 정리하면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어떤 상황에 있어서 이 말은 ‘굴욕적인’, ‘비굴한’, ‘하찮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을 연상시킵니다.
둘째,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이 말은 ‘낮고’, ‘초라하고’, ‘비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연상시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8:3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의 특징인 ‘자기 낮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어린 아이를 가리켜서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겸양의 미덕을 가진, 도덕적 우수한 인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 아이를 가리켜서 ‘낮고, 초라하고, 비천한 지위에 있는 한 사람’, ‘굴욕적이고, 비굴하고, 하찮은 상황 속에 놓여 있는 한 사람’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가리켜서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신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낮아지는 겸양의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이 사람이 얼마나 낮고, 초라하고, 비천한 자인지를 말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비굴하고, 하찮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말해줍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은 세상에서 패배자(loser)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이 사람은 세상 가운데서 버려진 세상의 찌꺼기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어린 아이를 이토록 비하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실 분이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 속 예수님의 모습은 어린 아이를 비하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로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우리 주님만큼 어린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신 분은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어린 아이는 국가의 인구조사에서도 제외될 만큼 존엄과 가치성이 없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언제나 자기 곁에 두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이토록 낮고 초라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어린 아이가 ‘상징’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가 상징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 곧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자의 정체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낮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수많은 신자들 중에는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이 모두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기 낮춤’은 이 세상 가운데 처해 있는 현실이나 지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신자가 과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낮고, 초라하고, 비천한 존재’로서 인정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현실에서 잘 낫건, 못 낫건 상관없이 우선 우리 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이런 정체성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피조물 중 하나요 전에 하나님을 멀린 떠난 바 있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기 낮춤의 정체성’을 직시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을 알 때,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감사하는 신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신자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모두가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직시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로서의 복된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기를 바랍니다.
2. 어린 아이는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 요지는 “어린 아이는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라는 주제입니다.
마태복음 18:4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의 대답의 요지는 ‘누가 천국에서 큰가, 작은가’의 문제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거룩하신 우리 주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고, 초라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천국에서 큰 자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이 ‘천국에서 큰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결코 제자들과 같이 ‘천국에는 계급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은 ‘천국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본문과 병행하는 다른 복음서의 말씀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두 본문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14 “예수님께서 가라사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가복음 18:16 “예수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 두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이런 자의 것 이니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천국의 소유권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의 소유권, 즉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권은 어린 아이들에게 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예수님의 아이디어는 사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창작하신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부터 이어진 하나님 나라의 소유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히 알려주는 대표적인 본문이 이사야 11장 말씀입니다. 이사야 11장 말씀은 종말에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이룩하실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11:6-9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은 마태복음 18장에서처럼 ‘어린 아이들, 젖 먹는 아이들, 젖 뗀 어린 아이들’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앞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하고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할 모든 구성원들이 이사야 11:1-5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구성원들은 모두 각종 짐승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 예외가 바로 ‘어린 아이들, 젖 먹는 아이들, 젖 뗀 어린 아이들’입니다.
이사야 11장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는 바로 이러한 어린 아이들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각종 짐승들로 묘사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구성원들은 모두 ‘어린 아이들을 중심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포식동물인 이리와 표범이 초식동물인 어린 양과 어린 염소와 함께 거합니다. 그리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로 나아옵니다. 마치 각종 짐승들을 평화롭게 통솔하는 목자처럼, ‘어린 아이’에게로 그들이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8절은 더욱 파격적인 묘사를 보여줍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칩니다.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도 아무런 해됨과 상함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아이’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어떤 위협도, 죽음의 공포도 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갑니다.
이사야 11장에서 묘사된 하나님 나라는 결국 평화와 안식이 절정으로 도래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은 하나 같이 이 ‘어린 아이들을 중심으로’ 어울립니다. 마치 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어린 아이’임을 아는 것처럼, 모든 구성원들이 이 주인을 중심으로 어울려 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이사야 말씀에서 비춰진 어린 아이의 모습은 마치 천국을 소유한 신자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짐승들로 묘사된 이 사람들조차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점점 그들도 어린 아이와 같이 변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입은 성도가 점점 ‘성화’(聖化)되어 가듯이, 이사야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이 점점 어린 아이를 닮아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인 어린 아이를 중심으로 점점 거룩한 사람들로 채워져 갑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천국은 바로 이러한 나라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자들을 중심으로 그 구성원 모두가 점점 ‘성화’(聖化)되어 가는 나라, 바로 이러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때 어린 아이는 ‘천국을 소유한 신자’를 상징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말하지 않고, ‘천국을 소유한 신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가 천국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신자가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요한복음 1:12-13은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줍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말씀은 하나님 자녀인 우리 신자들이 가진 권세(헬. 엑수시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2-13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러한 신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마태복음 18장의 ‘어린 아이’의 표상과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말씀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표현 자체가 함의하는 내용이 겨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만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권세’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 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누릴 모든 권세’를 모두 함의하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런 방식으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는 ‘권세’라는 말(헬. 엑수시아)은 본래 마태복음 28:18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권세’와 동일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28:18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를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권세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러한 권세 안에는 ‘어린 아이들이 가진 천국 소유권’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인 우리가 가진 권세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과 은혜를 말하지만, 이토록 크고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실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무한한 영광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어린 아이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자신의 ‘낮고, 초라하고, 비천한 모습’을 인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이러한 영광스러운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삶은 영원한 고통으로 끝마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고통과 고난이 찾아와도 우리가 결코 좌절하지 않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야말로 천국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에서 참된 위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고통은 없으며, 주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해됨도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소망하는 가운데 잠시 동안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3. 어린 아이는 ‘내 형제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
끝으로 세 번째 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 요지는 “어린 아이는 ‘내 형제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라는 주제입니다.
마태복음 18:5-10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6이하에서는 ‘어린 아이’에서 ‘소자’라는 대상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소자’를 같은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자’라는 사람은 다른 말로 ‘작은 자’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소자’에 대하여 10절에서는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6-9절에서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중죄가 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문단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말이 ‘실족케 하다’(σκανδαλίζω)입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한문으로는 ‘발을 헛디디다’라는 뜻입니다. 대체로 큰 실수를 범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실족케 하다’의 헬라어는 ‘죄로 끌어 들이다’, ‘믿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한 마디로 ‘어린 아이요 소자인 신자를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드는 일’을 가리켜서 ‘실족케 하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실족케 하는 일’을 성도들 사이에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6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내용을 주목해 보십시오. 6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자 맷돌이란 그 당시에 사람으로는 대여섯 사람이 멜 수 있고, 기본적으로 나귀가 메고 돌릴 수 있었던 커더란 맷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커다란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사형 제도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유대 사회에서는 이런 방식의 사형 제도가 당시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런 처사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만큼 심각한 중죄에 해당하는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어떤 죄악보다도 더욱 무거운 중죄에 해당합니다. 어린 아이와 소자로 비유된 신자들을 다시금 ‘죄에 빠지게 만드는 일’은 이처럼 심각하게 여겨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의 수많은 죄목들이 있지만, ‘같은 신자들을 죄에 빠지게 만드는 일’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심판이 뒤따르는 중죄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이토록 끔찍한 사형 제도를 묘사하면서까지 이 문제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5절 말씀에서 ‘소자를 실족케 하는 일’과 정반대에 있는 한 가지 일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일’, 곧 ‘우리와 동일한 신자들을 서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5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이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가진 마태복음 25:40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두 말씀에서는 각각 ‘어린 아이 하나’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표상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5:40에서는 더 세부적인 항목을 거론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네 형제 중에 작은 자’가 아니라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지극히 작은’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ἐλάσσων)는 그야말로 집단의 구성원 모두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사람’, ‘가장 약한 사람’, ‘가장 비천한 사람’, ‘가장 존재감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집단의 최상급에 반하는 최하급에 속한 사람을 가리켜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8:5에 나오는 ‘어린 아이 하나’라고 하는 사람도 결국에는 이에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내 형제 중에서 가장 최하급에 속하는 사람, 신자들의 무리 속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가장 믿음이 연약한 사람. 바로 이 사람을 가리켜서 ‘어린 아이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환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일’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장 믿음이 연약한 사람, 가장 비천한 사람, 가장 소외 받는 사람을 우리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환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모든 신자들이 가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곧 ‘내 형제를, 특별히 내 형제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긍휼의 마음’을 이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이 말씀에서 하고 계십니다.
한 사회 속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철저히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를 우리는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획일화를 거부하는 일반 사회와는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 땅의 교회는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교회 안에 소외당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있어서 알게 모르게 마음 상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를 영접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계속하여 방치해두고 내버려둔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책망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2에 나오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는 어디 있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는 어디 있었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들을 성도 여러분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은 우리 안에 혹여나 소외당하고 외면 받고 있는 성도들이 없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의 연약한 믿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2:5 말씀대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결국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품고 교회 안에 모든 형제, 자매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한 주간을 더욱 힘차고 복되게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