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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만 보이는 것들
구자룡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의 경우
Ⅰ 무엇엔가 미친다는 것
1992년 어느 날. 월북작가인 이태준의 작품을 텍스트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느라 작가의 고향인 철원을 헤매고 청계천 헌책방을 뒤질 때의 일이다.
북한의 한 고철수집소에서 이태준을 만났다. 사진으로만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상허 선생이 아니십니까’하는 인사에 빙긋이 웃으며 내 손을 잡은 그의 얼굴은 90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소설을 연구하며 궁금했던 점을 몇 가지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일하러 가야 한다며 일어서는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꿈속에서 상허 이태준 선생을 만난 것이다.
마침, 한국전쟁 직후 남로당의 몰락과 함께 비판을 받은 상허 이태준이 숙청되어 함경도 어디론가 파쇄공으로 쫓겨갔다는, 어느 탈북자의 증언을 잡지에서 읽은 직후였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고철수집소에 있는 그를 만났을 것이다. 연구를 하다 보니 그의 사진을 봤고, 그런 이미지가 꿈속에 그대로 나타났으리라.
동료 연구자들과 한담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나를 ‘이태준에 미쳤다’고 했다. 맞다. 그때 분명 미쳤었다. 이태준이라는 작가에 미쳐 있었다. 미쳐 있으니 꿈속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미친 덕에 이듬해 <이태준 소설의 창작기법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20여 년 전에 내가 경험한 ‘미친’ 모습을 이번에 다시 만났다.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이란 부제가 붙은, <진달래꽃, 김소월>이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시인 김소월 그리고 그의 시에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만들어내지 못할 자료집이다. 내가 이태준에 미친 3년의 결과가 박사학위 논문이었는 데에 비해, 구자룡 시인의 60년 미친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문학을 알고 그리고 김소월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시인 구자룡과 김소월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의 엮은이, 즉 김소월 컬렉터인 구자룡이 누구인가.
일찍이 정한모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중·교교 국어교사로 30년을 재직하면서 시집 <깊은구지 세탁소>를 비롯한 25권의 시집과 여섯 권의 수필집, 동화 혹은 문학연구서 십여 권을 집필했고 일흔이 넘은 요즘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인이다. 20여 년 전, 국어교사로 재직할 당시 부천 지역의 여러 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늘날의 ‘복사골문학회’를 만든 장본인이자, 부천의 문학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 여러 모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경기도 특히 부천시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천 문학의 대부’이다. 부천이 고향은 아니지만 그만큼 부천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부천이 자랑하는 시인 수주 변영로를 기념하는 여러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가 하면, 잡지 창간호 수집부터 시작하여 그간 장서 5만여 권을 모아 ‘부천문학도서관’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김소월 컬렉션을 출간했다. ‘컬렉션’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연구서나 작품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김소월과 관련된 온갖 자료를 모아 소개하는 책이다.
사진1 -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 <진달래꽃, 김소월> 표지
책의 머리글에서 구 시인은 김소월과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숙제를 하기 위해 김소월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베껴간 일, 그런 그를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해 준 담임 선생, 대학시절 1학년생의 개인 시화전에 ‘죽은 김소월이 돌아온 것 같다’는 혹평을 해 준 영문학 교수, 그 후 우연히 접하게 된 소월의 후손에 관한 잡지 기사 등이 바로 구 시인을 김소월에게 연결시켜 준 필연 같은 사건들이었단다.
그렇게 시작한 소월 시집 모으기가 단순한 시집만이 아니라, 소월 시를 수록한 학교 교재들로 넓혀졌고, 나아가 소월이란 이름 혹은 소월의 시 한 구절이 등장하는 온갖 물품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시집, 소설집, 문예지, 잡지, 초중고 교과서, 대학교재, 신문, 음반, 영화포스터, 행사 현수막, 하다못해 소월 시 한 구절이 적힌 우산에 이르기까지……
381쪽에 이르는 이 자료집을 보고 있노라면 이태준을 연구하며 ‘미쳤다’는 소리를 듣던 필자의 경우는 참으로 하찮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구 시인은 김소월에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많은, 다양한 자료들을 어찌 구하겠는가.
구 시인이 대상으로 삼은 김소월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사족이 될 것이다. 그만큼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김소월을 모르는 이는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대학 연구실에서는 그의 생애와 시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제대로 모아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학술적으로 김소월과 그의 시를 연구하는 학자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단순히 취미로 책을 모으는 수집가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자료의 오류까지…… 두꺼운 안경 넘어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김소월이란 시인을 알고 그의 시를 달달 외운다한들 고서점을 뒤지며 어찌 책 속에 숨어 있는, 두꺼운 책 어느 한 쪽에 수록된 그의 이름과 시를 찾아낸단 말인가.
더구나 구 시인은 아날로그 세대이다. 그렇기에 인터넷의 검색 기능을 사용할 줄 모른다. 오로지 발로 찾아낸 것들이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미쳤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기에 그의 눈이 찾아낸 것이리라.
Ⅲ <진달래꽃, 김소월>의 구성
이제 자료집 안으로 들어가 보자.
본격적인 자료를 제시하기 전에 우선 구 시인은 자료집의 첫머리에 김소월의 뿌리를 밝힌다. 바로 소월의 족보이다.
사진2 - 김소월 가계도
<공주김씨 곽산파 세보>에 따르면 김소월은 곽산파의 19대 손이다. 김소월 자료집을 묶으며 이런 뿌리를 먼저 제시하는 구 시인의 의도가 참 멋지다. 어느 날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엄연히 한국인으로서 뿌리가 있는,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참으로 진지한 접근이다.
다음으로 서울 남산에 있는 소월시비 사진을 제시한 후, 소월이 스승 김억에게 보냈다는 친필 편지를 수록하고, 2012년에 관광문화예술 관련 학부 명칭을 <김소월대학>으로 바꾼 배재대학교의 홈페이지 사진을 소개해 놓았다.
네 점의 자료 사진 배열만으로도 자료를 대하는 구 시인의 자세가 보인다.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를 설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내일을 설계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1. 전체 4부와 부록으로 구성된 <진달래꽃, 김소월>에는, 자료목록에 따르면 1,210 점의 김소월 관련 자료가 사진으로 묶여 있다. 말이 1,210 점이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들까지 하나하나 다 포함한다면 1,500여 점이 훌쩍 넘을 것이다.
자료집의 제1부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에는 1925년부터 2014년까지 간행된 <진달래꽃>의 이본(異本)과 시감상집, 연구서, 산문집 등 총 600 종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김소월이란 시인의 이름 혹은 그의 시 제목이 책 제목이 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간 간행된 김소월 시집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에 제시한 자료가 김소월의 첫 작품, 흔히 말하는 데뷔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첫 시집도 아니다. 듣도보도 못한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사진3 ― 박귀송 작 <김소월추도시>
김소월추도시(金素月追悼詩)
내 오래간만에 조선에 와
불현 듯 그대의 죽음을 듣다.―
그대 나를 모르고, 내 그대를 아다.
아아 그러나 내 그대의 얼골을 모르노라.
아아 三十年前, 이 땅에 봄빛이와서
그대 꽃동산에 뚜렷이 태여낫엇고
아아 三十年後, 이땅에 가을이와서
그대 落葉우에 외로히 돌아갓도다.
영원히 그대는 가다.
아아 그러나, ―그대 오히려 世上에 잇어
이나라의 <노래>를 듣고, <山川>을 보고,
아름다운 이나라의 색이 될진저.
내 그대를 못잊어,
고요히 그대의 詩를 읊어보다.
<먼後日 당신 나무리면
무척 생각다 잊엇노라>
1935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시는, 평양 출신의 일본 유학생으로만 알려진 박귀송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김소월 작가론이나 작품론 어느 글에서도 소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문예미학적 가치를 차치하고라도 우선 당시 소월을 추모한 시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게다가 소월시 연구자들에게도 생소한, 이런 시를 발굴해 낸 구 시인의 꼼꼼함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사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아니 사진 한 장만으로도 문예지의 한 꼭지를 장식할 기사이다. 여기에 구 시인이 알고 있을 설명이 붙는다면 학계에 ‘새로운 자료 발굴’을 알리는 깜짝 놀랄 글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구 시인은 그런 허명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여 이렇게 조용히 한데 묶어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이어 시집 <진달래꽃>의 초판, 신문에 실린 시집 광고, 영인본으로만 볼 수 있다는 1925년판 <진달래꽃>, 시집 <소월시초(素月詩抄)>와 잡지의 광고, 1939년판 <진달래꽃> 등 해방 전에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들이 연대순으로 소개된다. 또한 김소월의 시 작품이 수록된 여러 시집, 예컨대 1926년의 <조선시인선집>, 1936년의 <조선명작선집>, 1938년의 <현대 조선문학 시집>…… 등이 그것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해방 후 처음으로 김소월의 시가 수록된 교과서이다.
사진4 ― 김소월의 시가 처음으로 수록된 교과서. 1948년
1948년 1월 20일 조선교학도서에서 발행한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중등국어>가 바로 그것이다. 이 교과서에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수록되어 있단다.
이 1부에는 재미있는 자료도 있다. 1950년 2월 1일에 숭문사에서 <소월시집 진달래꽃>을 발간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51년에도 이 시집을 계속 간행했다.
사진5 ― 1951년 3월 5일에 발간된 숭문사 판 <소월시집 진달래꽃>
전쟁 중에 발간된 <소월시집 진달래꽃>의 판권에는 ‘군검열필(軍檢閱畢)’이란 글이 인쇄되어 있다. 바로 전쟁 중이었기에 군이 출판물까지 검열을 했다는 증거 자료가 된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시집은 후에 또 출간을 하면서 판권의 인쇄와 발행일이 잘못 인쇄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인쇄일은 4284년 11월 19일(필자 주 - 檀紀이다)인데 발행일은 4287년 11월 21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정확한 발행연도가 4284년인지 아니면 4287년인지는 모르나(필자 생각에는 4287년-1954년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4284년이 정확한 것이라면 서기 1951년 11월이고 이 때에는 위의 자료와 마찬가지로 ‘군검열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오자 탈자까지 이 자료집은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것이 1955년에 발행한 정음사판 <소월시집>인데 여기에는 발행연도 1955년에서 5 글자 하나가 빠진 채 195년 인쇄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속해서 1부에서는 시집 제목과 판권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시집, 소월의 아들 판권인지가 붙은 시집에 이어 정비석의 소설 <산유화> 책 표지가 소개된다.
사진6 ― 정비석의 소설 <산유화>가 연재되었던 잡지 <여원>의 표지(우)와 소설 표지(좌)
1950년대 후반 대중적 사랑을 많이 받고 있던 소설가 정비석은 <여원>으로부터 연재소설 집필을 부탁받는데 마침 새로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을 받은 때였단다. 소설의 소재를 찾던 그는 소월의 시 <산유화>를 읽고는 대학교수와 여학생 제자 둘의 삼각관계를 생각해 내고,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연애편지에 소월의 시를 여러 차례 인용한다. 연재소설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왔고,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 출간됨과 동시에 영화화까지 기획되었단다. 당시의 사회 통념과 맞물려 교수와 제자의 불륜이 소재가 된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결국 1957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을 불러왔다고 한다.
여기에 수록된 소월시집 자료들을 보면 19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우리 출판계의 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다. 잘 팔리는 책이라면 동일한 내용임에도 표지만 바꾸거나 아니면 시집 제목만 바꾸어 재출판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목격된다. 게다가 문을 닫게 된 출판사가 시집의 판형을 넘겨 제목과 내용 그리고 판형까지 동일한 시집이 출판사 이름만 바뀌어 출간된 예도 있다.
사진7 ― 1966년 혜명출판사에서 발행한 동일한 내용에 다른 제목의 시집
그만큼 당대 독서대중들에게 김소월이란 시인이 팔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우리 출판계가 열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소월시집의 99%가 저자 혹은 판권자의 인지도 없는 무단복제품이라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2. 자료집의 2부 첫머리에서 구 시인은 이렇게 토로한다.
어느 책인들 김소월의 작품과 이야기가 없을까마는 그래도 책 속에 숨어있는 소월을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 권의 시집 분량을 묶을 만한 편 수가 숨어있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달랑 한 편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열 편이든 한 편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책 속에 담긴 소월의 시는 우리 마음속에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소월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구 시인은 2부의 소제목을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라 했는지 모른다. 2부에는 독서대중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책 속에 숨어 있는 김소월의 시와 소월의 시세계를 풀어낸 글이 수록된 200여 점의 자료가 실려있다.
1950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작고시인선>, 1952년 향음사에서 출간한 <현대시감상>부터 시작하여 6, 7, 8, 90년대를 거쳐 2014년에 출간된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까지의 여러 시집과 시 감상 해설서에 연구서들. 그것뿐이 아니다. 1984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소명여중 학생들이 자필로 베낀 소월시가 포함된 작은 시집들까지 자료로 묶여 있다.
이들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2부 첫머리에 제시한 구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많은 책들 속에서 어떻게 소월의 시 혹은 소월의 시를 해설한 글들을 다 찾아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물론 책의 목차를 보면 수록된 시와 글의 제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 시인이 찾아낸 자료들은 단순히 목차에 나오는 소월만이 아니다. 긴 해설의 어느 부분에 인용된 소월의 시까지 찾아냈다. 그러니 ‘열 편이든 한 편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 시인이 찾아낸 책 속에 담긴 소월의 시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2부 첫장에 이런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사진8 ― 1959년 출간된 잡지 <진달래> 표지
1959년 7월 국제문화사에서 창간한 잡지 <진달래>의 표지 사진이다. 우선 ‘진달래’가 눈에 들어와 김소월의 시 제목을 사용했기에 김소월 자료로 분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잡지의 내용을 보면 김동리와 박목월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 글에서 소월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잡지 창간호를 수집한 구 시인이 아니라면 찾아내기 힘든 김소월 자료일 것이다.
2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이 이런 것들이다. 시 한 편, 시 한 구절 혹은 소월시의 어휘 몇 개가 포함되어 있는 글을 찾아내 그 책의 표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 자료들 중 압권은 박목월의 짧은 글이다.
1958년 1월 20일 범조사에서 출간한 박목월 감상집 <토요일의 밤하늘>에는 ‘생활(生活)의 시상(詩想)’이란 묶음이 있는데, 여기에 <소월(素月)의 시(詩)>란 박목월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素月의 詩
素月의 詩는 눈물겨웁다.
그러나, 素月은 눈물겨운 人間이 아니었으리라.
冷酷한 人間 안에 번지는 눈물, 그것만이 눈물겨운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경우, 이 글이 수록된 묶음이나 책의 제목 어디에도 ‘소월’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구 시인은 이런 자료를 찾아 소개한다. 더구나 이제껏 소월을 소재로 한 어느 글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구 시인이 발굴한 자료이다.
이런 자료들은 또 어떠한가.
사진9 ― 대입예비고사 수험서와 각 대학 입시 문제
1969년 선명문화사에서 출간된 대학입학 예비고사 수험서 <국어정복>이다. 이 책 28쪽에 기출문제로 61년 서울대, 63년 연대, 64, 69년 이화여대에서 출제한 문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소월 시와 관련한 국어문제들이다.
이는 국어교사 출신이 아니었다면 쉽게 생각지 못할 소월시 자료이다. 사실 구 시인이 수집한 중·교교 국어과목 학습용 소월시 문제들은 이것만이 아니다. 예비고사, 본고사, 학력고사, 수학능력시험까지 혹은 어느 중·고교의 중간·기말고사에 이르기까지 소월시와 관련된 문제들은 보이는 대로 모아온 구 시인이다.
3. 자료집의 3부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란 부제를 달고 초중고 교과서, 대학교재, 문학지에 수록된 소월시와 소월시 감상 또는 해설과 평론, 그리고 소월문학상, 소월청소년문학상, 소월 청소년 시화전 수상 작품집을 수록하고 있다.
3부 첫머리에서 구 시인은 한탄을 하고 있다. ‘대학수능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김소월을 모르는 이 시대의 아이들을 보면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다.
사진10, 11 ― 소월시를 수록하고 있는 중고교 교과서(위)와 대학 교재(아래)
그렇다. 대학입학시험이 종합적 사고력을 판단하겠다는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면서 중고교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 소월의 시가 수록되는 횟수가 점차 줄더니 7차교육과정 이후 수시로 개편되면서는 이제 더욱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소월을 모르고 자란다.
물론 소월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문학을 논하는 자리 특히 현대시를 설명하며 어찌 소월을 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중요한 문학사,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한 시인을 모른다? 결국 문화자본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4. 자료집의 4부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란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 외에 영화, 연극, 음악, 미술, 가요, 가곡, 시낭송 등 각종 행사에 나타난 소월의 문학세계와 그 밖의 삶의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12 ― 소월시를 소재로 한 각종 영화 포스터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화 포스터이다. 김소월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월이 쓴 소설을 각색한 것도 아니다. 그저 소월의 시 한 편, 아니 시 한 구절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만큼 소월의 시는 우리 문화 깊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7, 1962, 1964년에 제작되어 개봉한 영화의 포스터를 어디서 구했을까. 그 시절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은 것도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에서 있었다는 ‘김소월 시 낭송회’ 현수막과 사진까지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 시인의 활동 범위가 이제 국제적이다.
그런가 하면, 언론에 보도된 소월 관련 기사, 광고 문구에 사용된 소월시의 한 구절, 이발소에 걸린 그림, 소월관련 행사의 현수막, 소월시 구절이 인쇄된 책갈피, LP판, 녹음테이프, 씨디 자켓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참 시시하고 소소한 것들이지만 김소월과 다 연결되는 물품들이다.
이런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문화가 아니라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김소월을 만나게 된다. 평소에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것을, 새삼 ‘아, 그랬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5. 자료집의 부록으로는 수록한 모든 자료 그리고 책의 발간과는 별도로 11월 14일 부천시청역 전시실에 전시할 자료 총 목록을 조목조목, 시시콜콜 정리해 제시하고 있다. 목록만으로는 정확하게 1,210점.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 이면에는 더 많은 자료들이 목록 없이 전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예비고사나 학력고사 시절 출제된 입시문제나 문제집의 자료들은 그 양에 비해 자료집에 사진 한 장만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 사진으로 소개하지 않은 자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실로 놀라울 뿐이다.
사실 그간 김소월과 소월시를 텍스트로 하는 연구논문, 연구서 등은 수없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진달래꽃, 김소월>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시론이나 해설서가 아니다. 오로지 김소월과 소월시와 관련된 자료들을 제시할 뿐이다. 따라서 서지학적으로는 김소월과 소월시와 관련한 최초의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자료집을 보며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소월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종심(從心)의 구 시인이 마치 지학(志學)의 소년처럼 해맑아진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흥을 돋우며 해주던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자료의 소개만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고, 그 이면에 들어 있을, 구 시인이 들려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다. 구 시인을 알고 있고, 그와 소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라면 ‘아, 이게 그 자료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설명 없이 제시된 사진자료만으로는 자료를 수집하며 느꼈을 구 시인의 재미를 그리고 흥분을 독자는 알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2014년 11월 14일부터 7호선 전철 부천시청역 갤러리에서 구자룡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을 추억 하다>가 열리며 자료 1000여 점이 전시된단다. 그리고 2차 작업으로 내년쯤에 이 자료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해설서를 준비하고 있단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렵게 수집한 귀한 자료들이 더 빛을 발할 것이리라 기대한다.
Ⅳ 미쳐야만 보이는 것들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인, <진달래꽃, 김소월>을 덮으며 문득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바로 판권에 붙어 있는 인지이다.
사진13 ― <진달래꽃, 김소월>의 판권표시. 사진은 100번째 책이다.
판권을 나타내는 인지로 엮은이의 도장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내용인 즉,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 권 한 권의 책에 일련번호를 넣어 소장가치를 높이고자 했단다.
엮은이 구자룡 시인의 의도가 참 반갑다. 김소월과 소월시를 좋아한 것을 넘어 그렇게 모은 자료를 묶은 자료집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구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이런 책, 이런 자료집 한 권쯤 소유하고픈 욕망이 생기지 않을까.
어느 고전음악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고전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토벤에 매료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귀가 뚫리면 베토벤은 시시해진다. 좀 더 심오하고 오묘한 곡들을 찾아 들으면서는 정말이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유행가 가락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헨델, 하이든, 슈베르트, 쇼팽, 차이코프스키, 브라암스……를 듣다가 결국에는 다시 베토벤을 들으며 ‘맞아. 이게 클래식이야.’라 외친다. 클래식 - 그 처음과 끝은 베토벤이다.
그만큼 베토벤의 위대함을 역설한 말이지만 그의 말에서 베토벤 대신 김소월의 이름을 넣어 한국의 현대시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 소년소녀 시절, 떨어지는 낙엽에 가슴 아파하고, 부는 바람에도 가슴 설레던 시절, 김소월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고 시인을 꿈꾼다. 그렇게 시작한 문학은 좀 더 어려운 작품, 심오한 뜻이 담긴 시를 찾게 만든다.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를 읽으며 김소월을 폄하하고, 정지용, 김기림, 서정주, 김춘수……의 시를 읽다가 결국 다시 김소월로 돌아온다. 한국의 현대시 - 그 처음과 끝은 김소월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김소월과 관련된 자료들을 우리는 얼마나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모아두고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을까. 어느 도서관에서 어느 기념관에서 구자룡 컬렉션 <진달래꽃, 김소월> 만한 소월 관련 자료를 갖추고 있을까.
알다시피 구자룡은 문학연구가가 아니다. 서지학자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 시인 구자룡이 어느 도서관 어느 기념관에서도 하지 못한 자료들을 모아두었다. 오로지 김소월과의 인연만으로, 김소월이 좋아, 소월시가 좋아 시작한 자료수집은 문학연구가나 서지학자의 영역을 훌쩍 넘어 ‘김소월학’이라 해도 좋을 체계적인 자료집 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일은 미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인 구자룡은 미쳤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분명 시인 구자룡은 미쳤다.
김소월이란 시인에 미쳤고, 소월시에 미쳤다.
미쳐도 참 단단히 미쳤다.
그런데, 그렇게 김소월에 미친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