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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김길조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7․8券(國權回復團)
解題-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과 활동
1. 들어가며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7․8券(이하
<<자료집>>)은 國史編纂委員會에서 서울地方檢察
廳에 보관되어 오던 일제강점하의 독립운동관계 재판기록 가운데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
된 秘密結社인 朝鮮國權回復團에 관한 조사기록을 정리․번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자료
집>>은 尹相泰등 국권회복단 관련피고들에 대한 大邱地方法院檢事局과 豫審掛判事의 訊問調査
기록으로,
訊問現場에서 速記한 亂草로 씌어져 있는 것을 번역하여 二冊으로 나누어 편찬한 것이
다.
<<자료집>>의 편찬되기
이전까지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흐름이 비밀결사의 형태로 진행
되어 왔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었으나, 비밀결사의 조직년도와 활동, 각
비밀결사들 간의 관련
성 등에 관하여서는 그 구체적인 실상이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朝鮮國權回復團의 경우에
는 1910년대
최대의 무장투쟁단체인 大韓光復會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단체라는 점에서 주목되
기도 했지만, 1910년대 국내단체의 하나로 소략하게
언급되었거나 대한광복회의 선행조직의 하나
로 지적1)되었던 정도에 그쳤다. 또한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성시기를 1915년으로 상정하거나,
大東
靑年團의 표면단체로 규정하고 대한광복회와 상호 협력하던 조직으로 파악하여 朴尙鎭을 그 중심
인물로 제시하는 등의 연구2)가
진행되어 왔었다.
그런데 이 <<자료집>>의 발간으로 그동안 불분명했던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성시기가
1915년
보다 앞선 1913년이라는 것, 중심인물이 박상진이 아니라 윤상태, 徐相日, 李始榮등의 대구를 중
심으로 한 중산층 이상의
사회적 명사들이라는 점과 그 밖의 활동상황 등에 구체적인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3)
이와 같은 연구의 혼선이 있었던 데에는
먼저 조선국권회복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거의 없었던 점과 조선국권회복단과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점, 중심인물들의 활동이 서로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비밀결
사가 철저한 비밀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었기에, 일제에 의해 밝혀진 일부의 사례를 제외하
고는 그 자세한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에서 불분명했던 부분을 <<자료집>>을 통하여 확인하고 1910
년대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갖는 역사적 위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4)
1) 趙東杰, 1984,
<大韓光復會의 結成과 그 先行組織>, <<韓國學論叢>> 6.
2) 權大雄, 1988, <朝鮮國權回復團硏究>, <<民族文化論叢>>
9.
3) 강영심, 1990, <朝鮮國權回復團의 結成과 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4) 이 글을 작성하는 데에는 강영심의 연구가 큰
도움이 되었다.
2.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성과 중심인물
종래의 연구에서 조동걸은 일제측 史料인
<獨立運動에 關한 件>(大正8年6月20日騷密第
4452號)과 <朝鮮國權回復團中央摠部事件(일명
안일암사건)>(慶北警察部, <<高等警察要史>>)를
토대로 하여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성시기를 1915년 1월
15일(음력)에 안일암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로 대한광복회의 선행조직이었으며, 그 중심인물이 박상진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권대웅은
조
선국권회복단의 구성원 분석에 초점을 맞춰 논지를 전개하면서 동단을 대동청년단의 표면단체로
규정하고 대한광복회와 상호 협력하던
조직으로 파악하여 박상진을 그 중심인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료집>>의 조선국권회복단에 관한 검찰조서,
재판기록에 의한 검토 결과는 동단의
결성시기가 이보다 2년 정도 빠른 1913년 1월 15일(음력)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국권회복단의
중
심인물도 박상진이 아닌 윤상태․서상일․이시영․鄭雲馹․洪宙一등으로 한말 대구지역의 계몽
운동단체였던 達城親睦會의 회원들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달성친목회는 1909년 대
구의 정운일, 催丙圭등이 발기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지방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친목을
도모
하고, 또 실업 및 교육의 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계몽운동단체였다.5)
<<자료집>>을 면밀히 분석한
강영심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국권회복단은 윤상태, 徐相日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1913년 1월
15일(음력) 達城郡壽城面大
明洞의 安逸庵에서 정월대보름의 詩會를 가장해 모인 윤상태․서상일․이시영․鄭雲馹․洪宙一
등과 국권회복을
위한 결사체 조직을 협의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성초기에는 국내에서의 단세 확장, 해외운동세력과의 연계 및 지원,
궁극
적으로는 독립쟁취란 목표를 정하였다. 또한 국권을 회복할 것, 단군의 위패 앞에 목적 수행을 기
도할 것, 단원은 임의탈퇴엄금,
비밀누설 엄금 및 위반시 단죄 등의 내용을 적은 서약서를 작성하
고 각기 연서한 후 단군위패 앞에서 독립투쟁에 진력할 것을 맹세하는 등
강력한 투쟁조직으로서
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1914년 1월 15일 안일암에서 연례회합을 갖고 조직구성을 구체화하였다. 본부격인
중앙총부와
지부로 편제하여 중앙총부를 대구에 두고 總領휘하에 외교부장 서상일․교통부장 이시영, 朴永
模․기밀부장 홍주일․문서부장
徐丙龍, 李永局․권유부장 鄭舜永․결사대장 黃炳基, 마산지부장
에 安廓을 각각 선임하였다. 지부가 설치된 곳은 마산뿐이지만 그 외 지역에는
대구에 大弓商會․
香山商會등을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기구조직을 완비한 후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기에 앞서 단원확보를 위한
방법으로 종교조직
을 적극 활용하기로 협의하고 천도교는 홍주일, 기독교는 정순영이, 불교측은 서상일․서병룡 등
이 단원규합에
앞장섰다.
5) 국사편찬위원회,
1988,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7(국권회복단 1), 118면
이와 같이 조선국권회복단의 중심인물에는
박상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전 연구에서 박
상진을 조선국권회복단의 중심인물로 파악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
다. 먼저 1010년대 비밀결사의 활동 방식의 유사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
상진은 1912년
尙德泰商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정보 연락과 재정 기지로 활용하였다. 조선국권
회복단의 서상일 또한 대궁상회를 통해 왜관의 향산상회․부산의
白山商會와 연결되어 있었다.
1910년대 일체의 정치적 자유가 억압된 무단통치 상황 속에서 이들은 모두 ‘곡물상’이라는 외피를
통해
일제의 감시의 눈을 속이고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들 가운데 박상진은 이후 대
한광복회를 조직하여 두드러진 할동을 전개한 반면,
조선국권회복단의 경우 그 활동 양태가 잘 드
러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박상진을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자로 파악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15년 4~6월 경 국권회복단의 정운일․김재열 등이 대구의 대부호 최준명․최병규 등
을 대상으로 군자금모집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하지만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조직이 발각될 위기
에 처하게 되자, 단 내부에서 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어
정운일․김재열을 비롯하여 의
병출신 의 김규, 황병기, 정순영, 이시영 등이 단을 이탈하였다. 단을 이탈한 이들은 박상진이 중
심이
되어 조직한 대한광복회와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국권회복단과 대동청년단에 함께 적을
두고 있는 인사로는 윤상태, 서상일, 申相泰,
南亨佑, 朴永模, 安熙濟, 朴重華등이 있다. 이 이외에
도 卞相泰, 尹昌基등의 인사가 양 단체에 깊은 관련을 맺고 활동하였다. 이렇게
조선국권회복단
의 인물들과 대한광복회, 대동청년단의 활동인물들이 상호 교차하는 과정에서 연구자의 혼선이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영심은 서상일의 국내와 국외를 망라하는 폭넓은 활동에 주목하여 그가 조선국권회복
단의 중심인물이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동단의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서상일과 윤상태
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서상일은 대구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신학문을 이수한 후 달성친목회를
이끌며 구국계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재정적인 능력을 갖춘
자산가이
면서 항일의식을 겸비한 윤상태를 영입하면서 단의 기초를 다졌으며, 1914년 초 의병출신인 김
규․황병기 외 무장투쟁적
성향이 강한 홍주일․김재열 등을 합세시킨 뒤에 달성친목회의 기존
조직기반을 적극 활용하면서 단세를 확장시켰던 것이다.6) 그는 윤상태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大弓商會를 경영하였으며, 이 상회는 국권회복단의 중요한 활동 거점이었다. 그는 국권회복단 결
성 이후부터
외교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국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계를 맺고 있어 독립운동자금
조달 및 국외에서의 통신연락도 도맡아 했다. 그의 동생
徐相漢은 일본 유학 중인 1928년 4월 28
일 왕세자 李根이 일본의 梨本宮女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고 폭탄을 투척한
‘皇太子結婚反對爆彈
事件’으로 7년 실형을 언도 받은 애국지사였다. 또한 그의 형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바 있어 서
상일이
독립투쟁정신이 투철한 집안 출신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조선국권회복단중
앙총부사건’ 이후 1920년대 동아일보 기자 및
대구지국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문예지 <<農村>>도
발간하였다. 그런데
그는 동아일보에 관여하면서 점차 자치운동 쪽으로 경주되다가 1930년대에 이
6) 강영심, 2001, <국내민족운동>,
<<한국사 47>>, 국사편찬위원회, 147~148면.
르면 자치권 획득을 주장하는 자치론자로
변절하는 한계를 보여준다.7) 1945년 8․15 광복 후에
는 宋鎭禹․張德秀등과 함께 韓國民主黨을 창립하여 총무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에는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의원으로 활약하였고,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가책임제 개헌안을 발기하여
최초의 개헌안을
제기했다. 1950년대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1956년 進步黨창당에
참가하여 간부가 되었으며, 1960년에는 社會大衆黨을
창당하였다.8)
윤상태는 김해 출신으로서 대한제국 정부에서 거제군수로 재임 중 1905년 흉작으로 인해 도민
이 곤궁해 하는 것을
보고 이를 구휼코자 상사의 허가없이 관유물인 驛屯糧을 빈민에게 제공하였
다가, 이 일로 1906년 군수직에서 파면까지 당하였다. 그후
1911년 경남 高靈에서 日新學校를 설
립하여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조선국권회복단에 참가하여 總領에 선임되
어
동단을 이끌었다. 그는 서상일의 대궁상회, 尹翰炳의 香山商會, 安熙濟의 白山商會의 경영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1917년 비밀결사 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3․1운동 당시
에는 동단의 卞相泰․金觀濟로 하여금 경남 일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케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의 영향으로 국외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는 단원들의 군자금 모연을 통해 이에 필요한 독
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1919년 4월 張錫英,
金應燮, 曺肯燮이 주관하여 파리강화회
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 영문으로 번역케 하였으며, 김응섭․南亨祐가 이를 휴대하고
상
해로 건너 갈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3.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
<<자료집>>을 통하여 새롭게 확인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초기의 활동으로는
講遊園懇親會란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달성친목회와 더불어 동단의 표면단체로 활용하여 단세를 확대시켜 나갔던
것과 군자금 모집 활동이
있다.
강유원간친회는 조선국권회복단의 표면단체의 성격을 가진 조직으로서 1913년 3월에 서병룡․
홍주일․윤창기 등이 발기하여
조직하였다. 명목은 대구의 청년들이 학식 있는 사람에게 학술강의
를 받고 지식개발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으나, 독립운동가들과 기맥을 통하고
해외유학생 및 조선
내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항일사상을 고취시켜 이들을 단결시키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이를 위
해 매주 1회씩
집회를 열고 학술 강의를 통한 지식계발, 체육활동을 통한 신체단련을 도모해 독립
운동역군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회원수가
40~50명에 달했던 점으로 미루어 활
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달성친목회가
중견인사들의 단체였다면 강유원간친회는 혈기
왕성한 청년들의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양 단체는 1915년
홍주일․이시영․정운일․김재
열 등이 대구의 부호 徐祐淳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모집활동아 발각난 이후 그해 4월에 강유원간
친회가
해산당하였고, 9월에는 달성친목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였다.
7) 박찬승, 1989, <일제하의 자치운동과
그 성격>, <<역사와 현실>> 2호, 169~219면.
8) 국가보훈처, 1986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1,
145~146면.
조선국권회복단은 또한 만주나 노령 등
해외 동지에게 군대양성과 무기구입을 위한 군자금 조
달을 통한 독립군 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서상일의 대궁상회나, 윤상태의 향산상회,
서상호의 미곡
상(통영) 등이 연락 거점 및 재정조달의 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 이외에도 원산의 元興商會에는
윤창기가, 부산의
백산상회에는 남형우, 마산의 원동상회에는 마산지부원 이형재가 각각 관계되
어 있었다. 1910년대에는 무단통치와 회사령 등으로 민족기업이
성장 할 수 없었던 때였으므로 곡
물상과 같이 농업과 밀접한 상점을 경영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었다. 또한 곡물상이란 교역권이
광
범위하여 자금의 위장 송달이 가능하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므로 연락거점으로의 위장도 쉽다
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시영은
대구에서 포목상을 경영하였는데 국권회복단 결성 이후 윤상
태의 후원으로 사회의 신용을 얻어 그 규모가 커지자, 1914년 겨울 장사에
실패했다는 핑계로 상
점을 동단 단원인 윤창기에게 양도하고 많은 자금을 거두어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조달키 위해 만
주지역으로 가기도
하였다. 이때 이시영과 거래관계에 있던 고령부호 李徑외 다수의 재산가가 손
해를 입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915년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모집활동이 실패하고, 강유원간친회와 달성
친목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면서 단 내부에서는 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어 갔
다. 이에 무력투쟁적 성향의 인사들이 단을 이탈하여 대한광복회와
합류하면서 단세가 약해졌다.
이후 사태를 관망하면서 단세를 보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3․1운동
발발 이후의 활동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수 있다. 먼저 임시정부를 지원하
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과 선전활동을 들 수 있다.
군자금 모집은 서상일과 김재열이 담당하였
다. 이들은 서상호, 김유경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남형우와 김응섭으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전
달하게 하였다. 서상일은 임시정부 선포문과 강령 등이 담긴 선전문을 이를 전달받아 경상도 일대
동지들을 통해 배포하는 한편 통영의
서상호에게 배포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외교적인 방법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전달하는 한편, 국내외에도
배
포하여 조선민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천명코자 한 것이다. 윤상태는 청원서를 월탄면의 유생 張
錫英에게 작성을 의뢰하였으며, 작성된
청원서는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되는 김응섭이 짐을 묶는
새끼처럼 꼬아 이를 반출하였다. 이 청원서는 상해에서 번역․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
으며 아울러 국내의 각지에도 배포하여 독립의지를 고취할 수 있었다.
셋째로
경상남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3․1운동의 확산을 주도한 일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의 활
동지역을 중심으로 마산지역은 지부장인 안확을 중심으로
하고, 신상태․변상태는 통영과 창원지
역에서 3․1운동의 확산을 주도하였다. 이 가운데 1919년 4월 3일 변상태가 주도한 창원군
진전면
의 시위는 인근의 진동․진북면민까지 가세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컸으며,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8
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하였다. 진동․진북․진전면민 함께 의거한 ‘三鎭義擧’는 수원․선
천․수안의가와 함께 4대 의거로 일컬어질 만큼 규모가 컸던
투쟁이었다.
4. 나오며
이상 <<자료집>>을 통하여 조선국권회복단은
중심인물이 박상진 아닌 대구․경북지역의 계
몽단체였던 달성친목회의 인사들로서,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명사에 의해 조직된 단체였음이
밝
혀졌다. 그리고 표면단체로 강유원간친회를 구성하여 청년들의 독립의식 함양에 노력하고 있었음
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조직의
결성 시기도 1915년이 아닌 이보다 2년 정도 빠른 1913년 1월
15일(음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0년대 경상도 일대의 계몽주의적인 중산층과 의병적 성향이 강한 인사들
을 중심으로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것이다. 대구를
거점으로 결성되었지만 점차 경북
서남부와 경남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던 조직이다. 활동도 계몽활동과 상업활동이나 무력에 의한 군
자금
조달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단은 후자가 주류를 이룬 상황 속에서 노선상의 갈등이
표면화하자 의병계열이 이탈함으로써 무장투쟁적인
측면은 약화되고 점차 계몽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
조선국권회복단의 이념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지만 독립실현의
당면과제를 해결키 위해 민족의
聖祖인 단군을 奉祀하는 대종교의식을 빌어 단원의 일체감을 형성코자 하였다. 즉 단군교가 새롭
게
태어났다는 重光속에서 단군이 세운 조국의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대종교적 민족의식을 국
권회복단의 강령처럼 받들고
있었다.
(정리 : 이주환, 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