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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시간:2009.08.17
815하면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1945/8/15, 일제 식민치하로부터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과 1948/8/15,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이 수립된 건국절이 그것입니다. 한때 일부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815를 광복절이라 하지말고 건국절로 부르자는 운동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국절은 그 단어조차 생경한 만큼 815는 역시 광복절이 맞습니다. 일제 강점의 암흑기에서 국권을 되찾아 광명의 세계로 나온 만큼 光(빛)이 復(되찾음)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어릴 적 여름방학 중에도 특별히 등교하여 815 기념식을 거행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뙤약볕 속에서 장시간 교장선생님과 유지 분들의 훈화를 듣노라면 여기저기서 더위 먹은 동무들이 픽픽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815가 과연 이토록 경축할만한 기념일인지는 의문이 생깁니다.
일제치하에서 피압박 설움을 당했던 조상님들께는 당연히 경축일이겠지만 세월이 지난 오늘날 우리 후손들의 입장에선 경축보다 자조나 한탄이 생기는 건 저 혼자만의 소회일까요?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울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더욱이 815 해방이 우리의 자력에 의한 진정한 독립이 아니고, 세계2차 대전 후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른 타력에 의한 자연뽕(?)이었다는 사실과 신탁통치라는 미명하에 남은 미국, 북은 소련이 차지하게 된 통한의 국토분단을 상기하면 그 오욕의 역사가 오직 의분으로만 남습니다. 5년 후 625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도 그렇지만 오늘 날, 북한의 핵무장으로 비롯된 민족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면 전혀 광복절을 경축하고픈 기분이 안 생깁니다. 대신 과거를 상기하여 다시는 이런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선 안 된다는 냉정한 성찰이 생길 뿐입니다. 저에겐 815가 경축할 광복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815가 반성이 필요한 애통절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1910년 합방 후 우리의 우국지사들께서 황량한 만주 벌판을 누비며 풍찬노숙, 발분망식, 와신상담,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중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내외로 활발한 애국 활동을 펼쳤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상해임시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의 격을 갖추었을까요? 나라를 구성하는 요건 ( 영토, 주권, 법률 제정권, 경제권, 행정 집행권,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물리적 강제력, 뭐 그런 것 등등, )아 택도 없었습니다. 그냥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적 결사체 정도였습니다. 오늘 날의 반테러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보자면 상해임시정부를 < 상해애국집단 >으로 정의해야 맞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봅니다. 저는 지난 날 직접 임시정부 유적지를 견학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건물은 협소하고 유물은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협소함이나 초라함은 소박함이고, 그것이 뭔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정부라는 표현을 붙이기에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국무에 임하는 책상이 겨우 몇개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광복이니 독립이니 하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아닙니다. 회갑의 나이인 제가 그러 할진데 젊은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말을 맞게 하자면 광복은 해방, 독립은 국권회복이었습니다. 따라서 독립을 기념함도 광복을 기념함도 다 맞지않습니다. 기념이란 표현은 이런 데 붙일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써야 맞습니다. 바로 애국충절들입니다. 김구, 안창호, 신채호, 한용운, 안중근, 윤봉길, 이준, 김좌진 등 지사, 의사 열사 분들을 기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그 분들의 숭고한 애국심에 머리를 숙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안 독립기념관도 개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의. 안을 제시하자면 < 애국지사숭모관 >이나 <현충관 >이 어떨까요? 광복이든 독립이든 결코 대한민국의 백성이 한마음으로 기념해야 할 만한 진정한 가치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일찍 페달을 돌려 여의도로 향하면서 이란 객쩍은 감상에 빠지긴 했습니다만 오늘의 랠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815를 경축하고 기념하기 위한 우리 모임의 뜻깊은 축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달뜬 마음으로 경쾌하게 페달을 밟습니다. 집에서 여의도 왕복 약 60km, 본 라이딩 약 120km, 오늘 하루 도합 180km를 달려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 동안의 연습부족이 마음에 켕겼습니다. 개인사정으로 최근 두달 동안 전체 마일리지가 200km 안될만큼 도통 자전거를 못탄 탓에 완주가 어려울 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기초 체력이 턱없이 약한 터에 연습까지 부족하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의도 집결지까지 여러분의 뒤를 따라 그다지 힘들지 않게 무난히 달렸습니다.
여의도 공원에 다수의 선배님들을 비롯하여 총 170명의 자전거 대군단이 집결하였습니다. 이름 하여 잔차독립군입니다. 지기님의 주의 사항과 당부의 말씀을 경청 후 7시 정각에 출발하였습니다. 운영진 여러분은 최고사령관들이고 선두와 안전요원들은 지휘관이자 장군들입니다. 조장님들은 중대장들입니다.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갖춰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은 군졸입니다. 차량에서 지원하는 분들은 군자금을 대는 지주, 즉 숨은 애국자들입니다. 촬영하시는 분들은 종군기자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씩씩하게 천안을 향해 행군합니다. 우리는 오늘 성전을 치룰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조국을 우리가 지키겠다는 열의를 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폭염을 견디며 두 바퀴를 굴려 먼 길을 가는 것은 애국선열들처럼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뛰어나가기 위한 철석같은 의지를 다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기어코 커다란 승리를 거두고 만천하에 힘찬 승전고를 울리게 될 것입니다.
저와 집사람은 5조에 편성되었습니다. 열 다섯 분 중, 아홉이 낯선 분들입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 곧바로 우린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비유지만 마을에선 집안을 따지고, 면 소재지 모임에선 사는 마을을 묻고, 군 단위에 가면 면을 따지고, 도청 소재지에선 군 . 서울에선 출신 도에 관심을 갖습니다. 외국에 나가 코리언을 만나면 고향 사람 만난 듯 반가운 것이 사실입니다. 생물은 유유상종이라 공유하는 정서가 많을수록 쉽게 친구가 됩니다. 우리는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자전거민족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부가 온통 알록달록 형형색색이고, 혈관에는 녹색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끼리는 만나는 즉시 같은 종이라는 걸 쉽게 알아봅니다. 광활한 우주의 어딘가에서 지구인을 대한듯, 눈길만 한번 주고받아도 대번에 형제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 뵌, 여러분께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을 전합니다.
올 여름이 좀 서늘하다싶더니 한번 견뎌 보겠냐는 듯 늦더위가 엄청납니다. 오늘의 라이딩은 復한 光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이런 暴光은 노 땡큐! 입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아무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땡볕이 통째로 등판에 쏟아집니다. 무더운 햇볕의 압박이 배낭을 다섯개, 열개 진것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빛은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앞에도 있습니다. 더위를 잔뜩 머금은 거대한 태양광이 장벽처럼 자전거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전진했습니다. 170명 전원이 웰던까진 아니더라도 미디움 가까운 상태로 구워졌을 것입니다. 한 바퀴 한 바퀴 페달을 돌리는 수도 없는 반복 행위가 시지프스의 고난에 비길 정도였습니다. 잠시 잠깐 지나가는 가로수나 건물 등의 그림자가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문득 지나간 한 조각 짙은 그늘이 그리워집니다. 그러나 지나간 것들이 고맙고 기특합니다. 왜냐하면 어김없이 새로 눈앞에 다가오는 멋진 풍경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선두를 따라가기 위해 속도를 높이느라 때로 헉헉거리기도 하지만 7 ~ 8십 년 전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피도 아닙니다.
내심 우려했던 바와 달리 안양, 오산 지나 평택을 향해 달리는 동안 컨디션이 쾌조여서 무난히 완주하리라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겠습니까? 잠시 후, 다리가 총체적인 근육경련에 휘말리게 될지? 왼 다리, 오른 다리, 종아리, 허벅지 가릴 것 없이 족부 전역에 쥐들이 출몰, 온통 난장판입니다. 기초 체력이 약한데다 그간의 연습 부족이 이토록 쥐를 창궐케 한 것입니다. 점심 식사 장소를 불과 십여 분 앞 둔 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추고 후미로 쳐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쉬고 난 다음, 기어 비를 몇단 낮추어 서행하는 후미를 따라가노라니 통증을 참을 만 했습니다. 점심 식사 동안 경련 부위를 압박하고 마사지와 찬물 찜질 등 나름대로 필요한 처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점심 식사 후 마지막 휴게소로 가는 도중, 끝내 써포터스의 이삭줍기(?) 구원을 받아야했습니다. 천천히 달리는 건 가능했지만 팀을 따라붙는 속도를 내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풀잎처럼 맥없이 쓰러진 낙오병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번 랠리 중 한 여성분께서 계속 [ 야옹, 야옹! 야옹! ] 했습니다. 옆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종아리에 쥐가 나타났거든요. 그 쥐를 쫓으려고 고양이 소릴 내는 거예요. 호호호! "
물론 그 분께선 무난히 쥐를 퇴치하고 완주에 성공했으리라 믿습니다.
점심으로 든 설렁탕이 보통의 맛과 현저히 달라서 써빙하는 주인장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 무엇을 우려내었기에 국물 맛이 이렇게 비상합니까? "
소가 지나간 냇물을 퍼다 국물을 끓여도 이 보단 맛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명분의 국물에 맹물을 잔뜩 희석하여 백 명의 음식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형편없는 음식을 제공하고 돈을 울궈내는 것은 포켓 속 현찰을 소매치기 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날강도지요. 피로가 주식이고, 시장이 부식이어서 반 남짓 먹긴 했지만 안일옥이라는 상호가 안일감옥처럼 느껴졌습니다. 정말이지 음식 솜씨가 감방만도 못 하다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약을 한 운영진을 탓할 순 없습니다. 100명의 인원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을 갖춘 대형식당을 시골지방의 길가에서 찾기가 보통 어려웠겠습니까?
지원 차량에 탑승, 천안으로 향하면서 자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랠리에 대한 준비가 소홀한 것이 오히려 낙으로 변했다싶었습니다. 말하자면 無備有樂입니다. 연습을 안 한 준비 부족이 냉방이 쌩쌩한 자동차 안에서 2 ~ 3십분 동안이나 편하게 쉬는 즐거움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 휴게 지점에서 트럭에 실은 자전거를 내렸습니다. 독립군이 이렇게 약해 빠져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침 00님께서 스프레이 파스를 주신 바람에 온 다리를 그걸로 범벅을 시켰습니다. 아~참! 전해질 보충약도 한 알 복용했습니다. 그 덕인지 천안 지나 터널을 통과해 기념관까지 무사히 완주했습니다. 물론 출력을 충분히 내진 못했습니다. 근육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줄곧 낮은 기어비로 페달링 했습니다. 기념관에 도착 후 운영진에서 제공한 얼음 수박을 허겁지겁 먹어치웠습니다. 충분한 수분섭취는 쥐내림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아직도 천안까지 되돌아 갈 길이 십여 킬로 더 남았기에 그에 대비가 필요했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기념 촬영 후 서둘러 귀로에 나섰습니다. 서두에 기념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만 민족이 영원히 기념할 만한 진정한 날로 성스러운 31절이 있습니다. 이번 랠리에서 독립기념관 지근거리에 소재한 유관순열사 유적지가 있는 만세사건의 성지, 병천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부대는 한낱 쫄병의 사정에 연연하지 않는 법입니다. 묵묵히 5조 대열에 포지션을 잡았습니다. 저는 최종 목적지인 천안의 전철역까지 끝까지 가겠다는 일념이 왜놈들을 혼내겠다는 안중근 의사의 신념만큼이나 확고하였습니다. 휴식으로 다리 형편이 괜찮은 듯하여 팀 전체의 속도에 맞춰 무심코 출력을 높이노라니 불과 몇백 미터 안가 온 다리가 마비될 듯 다사 경련이 생겼습니다. 도로아미타불! 도저히 더 이상 페달을 돌릴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길가에 멈춰 지원차량을 기다렸으나 좀처럼 보이질 않고, 대신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00님이셨습니다. 가냘픈 제 다리를 거꾸로 들고 장시간 쥐 퇴치를 해주셨습니다. 한참 동안 두드리고, 주무르고, 폈다 굽혔다! 를 반복하는 동안 마침내 몸에서 악령이 빠져나가듯, 쥐가 잠잠해졌습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다리를 살살 달래는 저속 주행으로 간신히 터널을 통과 천안시내에 이르렀습니다. 정녕 00님의 구원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번 랠리의 장렬한 전사자로 그 이름이 국립묘지의 비석에 새겨졌을 것입니다.
천안시내에서 모두 먼저 가시고, 혼자 뒤처져 더듬이 잃은 개미처럼 정처없이 헤매던 중 이번엔 00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길 안내는 물론, 경사로마다 어김없이 지친 제등을 밀어주신 것입니다. 00님의 그 힘찬 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업힐이 마치 구름 위의 산책처럼 편안했습니다. 저는 번개에 나가서 수도 없이 폭탄이 된바 있으나 남이 등을 밀어준 경험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대책 없이 낙오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저를 구해주신 첫 번째의 00님, 두 번째의 00님, 세 번째의 00님은 제 생명의 은인들이십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 이번 랠리는 독립군 전쟁과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역에 도착하여 한 많은 라이딩을 종료하였습니다. 힘든 장거리 라이딩을 많이 해보았지만 이번처럼 악전고투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친 저를 대신하여 00님께서 트럭 위에 자전거를 올려주고, 00님께서 서둘러 냉음료를 마시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전우를 챙기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같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나가 도저히 적을 향해 총을 못 쏠 것 같아도 교전 중 옆에서 전우가 흉탄에 쓰러지면 그 다음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편이라는 건 너무나 소중한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여의도의 주신정에서 수원팀을 제외한 전원이 함께 식사를 들었습니다. 군대 생활 이후 가장 많은 대식구와 동시에 식사를 한 것 같습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같은 류의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외롭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보증합니다. 저는 비록 천학비재이지만 자전거와 함께 하는 동안은 친구가 없어 쓸쓸하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귀로에 이웃인 00님 차량 편을 이용한 바람에 당초 예기한 180km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도중 점프한 약 10km와 여의도에서 집까지 30 km를 차감한 140km만 달린 셈입니다.
워낙 덥고, 워낙 멀고, 워낙 힘든 라이딩이였기에 사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분들이 몇 분 계셨다고 합니다.
[ 내년 815 랠리는 참가를 재고해야겠다. ]
집사람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듣고, 제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 애 낳는 고통과, 자전거 타는 고통은 그 다음 날 잊어버린다.]
즐겁기만한 쾌락이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양질의 고통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선이 아닐까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 말씀하신 분들께선 더 열광적으로 다음 815 랠리에 동참케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번 랠리를 기획하고 준비하신 운영진 여러분과 모두의 안녕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신 선두 및 안전요원, 그리고 지원하신 분들과 촬영하신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 인사 올리면서 불비한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