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들으면, 드넓은 요동벌판을 거침없이 달리는 불패의 고구려 기병대가 떠오른다.
이러한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그는 한반도에 마음을 두었다. 요동은 기후가 한랭하여 농업생산력이 낮았다. 또 혈통이 다른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살았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雪上加霜으로 선비족 등이 위세를 부리며 ‘5호16국’의 시대를 열었다. 고구려의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왕은 한반도 남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한 그 땅을 차지하고 싶어 했다. 벼가 재배되고 말이 통하는 남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백제가 왕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왕은 싸우고 또 싸워 한강 이북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광개토대왕이란 영예로운 이름도 그 사실에서 유래하였다.
왕은 평양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였고, 그 뜻을 받든 아들 장수왕은 아예 새 수도로 삼았다. 큰 땅덩어리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은 왕의 새 국가전략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대왕이 내린 결정이 타당하였다.
놀랍게도 왕은 칼만큼이나 붓을 좋아하였다. 시조 주몽을 ‘천제의 아들’로 내세우며, 고구려인의 자존감을 키운 것도 그였다. 왕릉마다 비석을 세워 역사의식도 강화했다. 왕릉을 지킬 수묘인들도 피지배 종족들 중에서 골고루 뽑았다.
고구려가 천하의 지배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광개토대왕은 정복군주 이상이었다.
그는 역사적 통찰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새 역사를 열었다.
“왕이 악한 무리를 제거하자 백성들은 생업에 힘써 평안을 누렸다. 나라는 부강해졌고, 곡식이 잘 여물었다.”(‘광개토대왕비문’)
혹시, 북한이 남한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가 광개토대왕과 같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