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알아듣는 상황이 마냥 웃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귀가 좀 어두웠다. 종종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말을 이상하게 알아들어서 우리 가족뿐 아니라 친척까지 공유하는 일화를 만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병원 진료에 동행했다. 청력이 떨어진다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했던 공장의 소음이 굉장히 심했으며 그때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버지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점을 한 번도 청력 손상이나 청각장애의 관점에서 생각지 못했다. 인권 교육 물(?) 좀 먹었다고 자부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아버지를 놀렸던 나는… ‘고요 속의 외침’을 보며 자란 <가족 오락관> 키즈였다.
‘고요 속의 외침’은 1985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된 KBS 예능프로그램 <가족 오락관>의 간판 코너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헤드폰을 쓰고 옆 사람이 말한 글자를 전달하는 게임으로, 14년간 장수했다. 이 코너의 오락 요소는 잘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전달 단어가 기상천외한 단어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전달하는 사람은 필사적이지만, 헤드폰을 쓰지 않은 사람들은 포복절도한다. 이 게임은 알음알음 명맥을 이어가다가 tvN 예능 <신서유기>에서 부활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적은 준비물로 ‘확실한’ 웃음이 보장되니 온갖 프로그램과 디지털 콘텐츠에 등장하고, <가족 오락관>의 게임 장면을 매주 업로드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게임이 끝나면 사람들은 원래 주어진 단어를 확인하고 어이없어 하며 웃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게임이 아닌 일상이라면? 기껏 해독하고 전달한 단어가 틀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웃거나 짜증을 내는데, 원래 의미를 가르쳐주지도 않은 채 넘어간다면? 방송이 ‘잘 못 알아듣는다’=‘웃기다, 놀려도 된다’의 도식을 만들어 놓고 헤드폰을 벗고 빠져나가면, 한 번에 명쾌하게 알아듣기 힘든 세계가 현실인 사람은?
2019년 KBS 파일럿 프로그램 <스탠드업>에 출연한 한기명은 자신을 국내 최초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흑인과 성소수자의 자조 개그를 예시로 들며 자신의 장애를 희화화하지만, 선을 분명히 한다. “비장애인이 장애를 소재로 코미디 하는 것을 봤다. 자기 스스로가 아닌 남을 웃음 대상으로 만드는 건 비하다.” 물론 시청자의 감수성이 높아진 만큼 명백한 장애 희화화나 비하는 감소했다(한참 뒤떨어지는 감각으로 비하 개그를 시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만,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미묘’하고 ‘애매’할 때 발생한다. 희화화의 대상은 주로 ‘비가시적인’ 장애다. 특히 ‘정상’적인 범주에 걸쳐 청각장애, 언어장애, 지적장애. 예를 들면 김종민의 난청은 정상 범주보다 조금 낮은 정도이고 방송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조금 모자란 바보’ 정도로 뭉개며 마음 놓고 놀리는 경향이 있다. 정상성 담론에 갇힌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신체의 다양한 차이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시설 등에 수용되거나 활동보조인이 동행하지 않는, 혼자서 일상생활이 가능한 장애인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시선만큼이나, 자신이 보기에 ‘충분히 장애인 같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태도 역시 매우 폭력적이다.
타인의 취약한 점에 집중하고, 다그치고, 비웃고, 놀리는 것은 ‘왕따’ 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는 잘 못 알아듣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웃는 즐거움보다, 적절하게 대처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상대가 계속해서 “예?”라고 되묻는다면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내가 생각지 못한 반응을 보이는 타인을 비웃거나 구박하는 대신, 나 역시 상대의 기준에 맞지 않음을 인지하고 그 간극을 좁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재미와 웃음은 문화적 코드다. 사회와 구성원들의 욕망이나 감수성을 반영한다. 가변적이고, 관습과 제도 속에서 다르게 작동한다. 외국어를 배울 때, 그 나라의 언어로 하는 코미디를 보며 웃는 것이 최후의 관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웃음과 재미는 폭력적이거나 역사적이기도 하다. 인류는 다른 특성의 신체를 전시하고 놀이로 소비하는 ‘프릭쇼(freak show, 기형쇼라고도 번역된다)’를 즐겼고, 사격 연습 삼아 재미 삼아 새를 날려 보내고 쏴 죽였다. 1980년대의 한국에서는 얼굴에 시커먼 칠을 한 채 흑인을 희화화하는 ‘시커먼스’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녀’라는 멸칭이 아무렇지 않게 예능에서 쓰였다. 지금 우리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재미의 기준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타인의 문제 제기를 예민하고 피곤한 것으로 몰아가기보다, 왜 나는 아무렇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를 찌르는데 내 입에서는 술술 넘어가는 웃음의 달콤함. 그게 바로 정작 가진 자는 모른다는, 특권의 맛이다.
첫댓글 헐...한번도 생각못해본 문제다ㅜㅜ고요속의 외침맨날봤는데
헐.. 고요속의외침도
진짜 반성하게된다..
맞네...좋은 글이다..
헐..그러네..
헐.. 전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다...
헐 그러네.. 생각 못함...
와..사실 진짜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다..띵하다..
그러네 난 저거 그냥 하나도 안웃겨서 싫었는데 이런 측면도 있구나.... 옛날에 흥했던 개그중에 요새 나오면 문제될거 많긴하다 갸루상 이런것도 요즘 나오면 문제되겠지?
진짜.. 일상 속에 당연스레 스며있어서 늘 경계하는데도 이렇게 모르고 웃어넘기는 게 많음.. 마지막 문단처럼 진짜 가진 자는 모르는 특권의 맛이라는 거 참 씁쓸하다..
아 나도 저런예능보면 너무너무불쾌해;;
왜 나는 항상 다 웃고나서야 이런 글을 보고 깨닫는걸까.... 진짜 부끄럽다
헐 뭐야 생각지도 못했어 반성합니다…
누군가를 찌르는데 내 입에서는 술술 넘어가는 웃음의 달콤함. 그게 바로 정작 가진 자는 모른다는, 특권의 맛이다.
이부분 진짜 띵하다... 정말 반성하게 돼...ㅜㅜ
나도 웃었었는데 ㅠㅠㅠ 너무 죄송하다 앞으로 이런장면 소비하지 않으려고
반성하게 된다..좀 더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이 되어야지
앞으로 경각심을 갖고 봐야겠다 나 너무 무지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