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도 부모가 있고, 전경도 부모가 있지 않습니까. 내 자식만은 안 다쳐야 하는데, 그게 부모 마음이죠. 모두 귀한 자식들입니다. 부모들 가슴에 상처 주는 일 없도록 서로 절대 다쳐선 안 됩니다.”
청와대와 경찰이 촛불집회에 대해 잇따라 강경진압 방침을 재확인했던 지난달 30일. 대학에 입학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외아들을 경찰 폭력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고 강경대 군의 부모를 찾았다. 만나자마자 ‘다쳐선 안 된다’며 몇 번이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지난 두 달여간은 아픈 경험을 다시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경대 엄마가 힘들어 했죠. 경찰한테 맞아 앞니 모두가 ‘나가’ 버렸는데…. 다시 경대 일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봐 걱정 많이 하지요.”
고 강경대 군의 부친 강민조(67) 씨가 부인 이덕순(60) 씨를 다독이며 말한다. 이덕순 씨는 강경대 군 사망 사건이 일어난 지난 91년 ‘법정소란죄’로 재판정에 선 강민조 씨의 공판 참석을 막는 전경으로부터 얼굴을 방패로 찍혔다. 아들의 죽음과 남편의 감옥행에 절규하던 이 씨에게 날라든 전경 방패는 지금도 쉽게 기억에서 꺼내기 힘든 일이다.
“경찰 폭력이라고 하면 치가 떨리죠. 지금도 하루같이 그 때 생각이 납니다. 이번에 쇠고기 촛불집회 현장에 가서도 ‘아들 같은 사람들이 다치면 어떡하나’하는 생각과 함께 ‘전경들이 나한테 달려오면 또 어떡하지’하고 불안해했죠.”
강민조 씨는 아들의 죽음 이후 지금까지 경찰폭력 피해 부모들의 모임 등에 참석하며 활발히 사회참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3일에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사회원로 100인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지난 18년 동안 큰 집회는 안 나가본 적이 없다. 그 사이 ‘새파랗게 젊은 전경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다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덕순 씨는 그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았지만 쇠고기 촛불집회를 TV로 보다 ‘앉아 있을 수만 없어서’ 강민조 씨와 몇차례 서울시청 앞을 찾았다고 한다.
“학생들을 보면서 얼마나 기특하던지 모르겠더라구요. 마냥 어리광만 부릴 것 같은 나이인데도 말도 잘하고 표현력도 좋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경대가 죽기 전까지 ‘안일’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아들로 인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며 이 씨가 덧붙인다. 그러면서 “경대가 살았더라면 아마 직장 다니다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겠냐”며 웃어보인다.
“촛불집회에 가면 어떻게 알아보고 ‘경대 부모님 오셨냐’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 하나 기억을 못하니 미안하더라구요.”
다시 경찰의 폭력 진압 이야기로 돌아갔다. 안타까운 심경이 묻어나는 말들이 이어진다.
“위에서 시키니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유난히 폭력적인 전경들이 있더라구요. 내 경험상 시위대는 절대 먼저 집단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요. 평화적인 집회를 보장하란 이야기를 전경들도 이해는 할텐데….”
강민조 씨는 ‘치고 받는 시위가 아니라 웃으면서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어미니 이 씨는 몇 번이고 ‘부모 마음’을 강조한다. “전경도 대한민국 국민이잖아요. 이성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자식들은 시위대건 전경이건 안전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새 정부 이야기가 나오자 강민조 씨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어청수 경찰청장은 혹시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함부로 진압 명령을 내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조금이라고 생각해 봤는지도….”(강민조 씨)
강민조 씨는 특히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전날 ‘불법 과격시위 같은 집회는 공동체 이익을 갉아먹는 해충과도 같다’라고 한 발언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촛불집회에 한번이라도 나와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자기 생각만 가지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조중동 보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것 아닙니까.”
이덕순 씨가 말을 받는다.
“광우병은 벼락 맞을 확률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벼락 맞을 확률에 안전하다고 말하는 대통령도 포함 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안전한 식품을 먹고 싶다는 게 국민들, 특히 주부들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젠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도 지났잖아요. 그걸 옛날식으로 국민들한테 강요하려고만 들려니… 후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네요.”
*뒷이야기=고 강경대 군의 아버지 강민조 씨는 아들이 죽은 지난 91년 4월 이후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평범한 사업가에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일을 하면서 민주화유공자 특별법 제정,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 전면에 나선 투사가 됐다. 한편으론 ‘강경대한방무료진료소’를 열고 해마다 경대의 생일 때 경로잔치를 열었다. 지역감정을 없애자는 운동도 벌였다.
어머니 이덕순 씨는 경대가 죽은 후 광주로 내려가 98년까지 ‘경민회관’이란 식당을 운영하면서 해마다 5월이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거두는, 광주 운동판의 대모역할을 했다.
지난 94년 5월의 어느날 늦은 저녁 경민회관을 찾았을 때, 이사 오기 전 서울 집의 경대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경민회관 2층 방에 어머니가 자리를 펴주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다시 찾은 집에서도 그 때 봤던 경대 방이 그대로 옮겨져 왔다. 경대가 쓰던 책상 위 경대의 영정만 조금 더 커졌을 뿐이었다.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흰머리가 많이 늘어난 어미니 이 씨는 오는 사람마다 ‘거둬 먹이기’ 바쁘다. 94년도에는 난생 처음 전라도식 생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번엔 강민조 씨의 고향 영광에서 올라온 오디차와 쑥떡을 쉴새없이 권했다.
경대의 누나 강선미 씨는 지난해 결혼을 했다. 이달이 출산 예정일이다. 촛불집회를 지켜보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경대가 태어난 지 37년만에 새 식구가 들어온다는 생각에 강민조 씨와 이덕순 씨는 살짝 들떠 있었다.
첫댓글 자식의 존구함을 무엇으로 말하리까??님의 아픔들에 무슨 말로도 위로 될런지..... 하지만 이젠 정치 일선에서 그만 나타 나심히...부모님들로 인해 너무나 많은 정치인들이 놈현, 대중 그 조무라기 세력들이 이용 했습니다. 고인의 넋을 위해서라도 이젠 그만 쉬소서!
경찰관도 다처서는 않되지.
군인도 경찰도 고생이 많네요..두달여간 촛불시위로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될일을 어떤 한사람때문에 서로 힘들게 고생하면서 다치신분들 누가 그들을 그리 싸우게 만들엇나 촛불시위 참가하는 시민들 전.의경님들 고생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