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서울은 1983년 12월 22일 창단식을 거행하고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대한민국의 프로축구단 가운데 다섯 번째로 출범하였다. 창단 연고지는 충청도를 배정 받았으며 마스코트는 황소를 선정하였다. 당시 럭키금성그룹은 프로축구단을 창단하기 위해 기획조정실이 주축이 되어 1982년부터 면밀한 준비 작업을 했으며[3]서울특별시를 창단 연고지로 하여 출범할 계획이었지만[4] 당시 대한축구협회 수퍼리그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충청도를 연고지로 배정하였다.
창단 첫 시즌에는 리그 8개 구단 중 7위에 그쳤지만 이듬해 1985 시즌에는 타이 출신 피아퐁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축구대제전 수퍼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구단 역사상 첫 번째 정규리그 트로피를 얻게 되었다.
1990년 도시지역연고제 시행과 함께 충청도에서 서울로 연고를 이전하여 동대문 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해 한국프로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 특히 1990 시즌 우승은 한국 프로축구사에서 최초 서울 연고지 프로축구단의 우승으로 기록되고 있다. 1991년 모기업의 사명 변경과 함께 LG 치타스로 구단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5]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과 맞물려 서울 축구전용구장 건설과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청와대의 지침을 받은 프로축구연맹에 의해 강행된[6]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인하여 당시 서울 연고 3팀중 마지막까지 서울 연고 고수를 강력히 희망하였지만[7]1996년 연고지를 서울에서 안양으로 강압적인 연고 이전을 당하면서 구단 공식 명칭을 안양 LG 치타스로 변경했다. 그 후 2000시즌 최용수 선수의 대활약으로 K리그에서 우승을 하여 구단 통산 세 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2004년 안양 LG 치타스는 축구인과 축구팬들의 찬반 논란 속에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구단 공식 명칭을 FC 서울로 변경하였다. [8] 현재 FC 서울은 다시 서울로 연고복귀를 하며 흥행, 성적면에서 대체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K리그 최고의 인기구단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2004년 LG그룹과 GS그룹이 분리되면서 FC 서울을 운영하던 산하 계열사인 LG스포츠 또한 GS그룹으로 분리되어 6월 1일 스포츠 법인의 이름을 (주)GS스포츠로 변경, GS그룹이 운영하게 되었다.
2005시즌 제 6대 이장수 감독이 취임하였으며 박주영 선수의 돌풍으로 한 시즌 최다 관중인 45만 8605명을 기록했다. 2006시즌 FC 서울은 정규리그와 FA컵 우승은 하지 못하였으나 K리그의 리그컵 대회인 삼성 하우젠컵 2006에서 우승을 하여 구단 역사상 첫 리그컵 우승 트로피를 얻었다. FC 서울은 2006 시즌에 통합순위 4위에 올라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어웨이 경기로 벌어진 성남과의 경기에서 0:1로 패배해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하였다.
-위키백과 펌-
fc서울 역사에 대해 검색을 해봤는데요.
뭐 일단 처음시작이 서울이 아닌건 확실히 맞는데요.
위에 내용 보면,
충청도>>서울>>안양>>다시 서울
이렇게 되있는데요.
연고이전 자체를 욕하는건 뭐 욕먹는다 치더라도
뭐라더라, "안양의 역사를 뺏어간 서울(?)"
이런식으로 말이 나오는데, 위에 위키백과가 맞다면, 이런 주장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요?
애초에 안양 이전에 충청도에서 시작한 팀이고 비록 연고이전을 겪었지만,
팀 명칭만 바뀐것 아닌가요?
왜 서울의 역사가 2004년? 부터 라는 말이 생기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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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재창단이라고 했나요?? 저기 위에는 연고복귀라고 적혀있는데.. 구단 홈피에도 재창단이라고 나와있는건가요?
네 그렇죠. 몇몇 사람들이 안양 이전의 역사는 연고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데 소수지만 분명 연고의식을 가진 팬들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서울도 안양때보다 관중이 많기 때문에 서울 이전의 역사를 부정할 수 있죠
서포터즈 세대가 처음 보기 시작한게 안양 즈음이라 그렇겠죠... 저도 83년 슈퍼리그 시작할때 유공 응원했던걸로 기억 하네요.. 이유야 서울팀 이라서죠.... 서울토박이 집안이라 어릴때 고교야구 보면서도 타지역 고등학교 응원하면 어르신들한테 혼나고 그랬답니다.
그게 좀 억울한게 서울에서 쫒겨날 때는 여기 저기 경기하러 다니던 유랑구단의 기억이 생생해서 별로 논란이 안됐는데 서울로 돌아올땐 서포터즈가 자리잡던 시기라 뒤지게 욕먹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