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대학교 재학시절 리포트로 제출한
글제목 "내 아버지의 인물연구"입니다.
자녀를 두고 계신분들 한번 재미로 읽어보세요.
1. 선정 이유
내가 인물연구의 대상으로 아버지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내가 모르고 하지못하는 배울 것 들이
너무도 많다. 나는 누가 내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아버지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어렸을때만 해도 존경해야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역사속
또는 세계의 위대한 사람쯤이어야만 되는줄 알았었다.
하지만 중학교때였던가 현 金大中 大統領의 옥중서신(獄中書信)
이라는 책을 읽고 나의 이런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한달에 한번밖에 보낼수 없는 1장의 엽서 가장 윗머리에는"존경하는
당신께" 또는 "사랑하는 아들 ○○에게"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걸 읽은 후에야 '존경'이라는 말은 위인에게만 보낼수 있다는
나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또다른 예로 올해 메이저리그 홈런왕을 다투었던 시카고컵스팀의
새미소사가 다른팀 라이벌 마크맥과이어를 존경한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사전상 "존경"이라는 단어는
"높은공경함"이라고 나와 있다.
난 내가 언제부터 아버지를 존경해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 군대 그것도 훈련소에서부터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도덕이나 예절을 교육시켜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건 아마도 훈련소에선 항상 받고만 살았던 사랑,
늘 옆에서 지켜보며 쏟으신 정성과 관심들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늘 가까이 있는 태양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말이다.
2. 아버지의 삶
아버지는 1946년 음력 10월 21일생 全南 구례군 문척면에서
당시 가난한 소작농이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너무도 가난한 생활 때문에 그 당시 교육공무원이셨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학교를 간신히 다닐 수 있었고 또 모두들
그랬던 것처럼 못먹고 못입고 못살던 시절을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그런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평소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공부했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시는데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말씀을 하실때마다 "아버지만 고생하셨나?"라는
왠지 모를 거부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음이
아마도 이제는 나도 어린나이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공부에 욕심이 대단히 많으신 분이다.
그때 동네의 모든 친구들이 구례읍에 있는 농업고등학교를 갈 때,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싸우고 또 친척들을 설득해 도움을 받아
전남의 명문고인 20살나이에 順天高等學校에 입학하게 되었다(1965년도).
돈도없고 논이라고 해보았자 반달같은 산다랑이 논 3마지기 뿐 이였다는
데 그나마도 할아버가 뼈빠지게 남의집 머슴살이 해서 구입한 산다랑이
논 1마지기를 팔아 가지고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셨다고 한다.
자칫 잘못 했다가는 평생을 남의 땅만 파먹고
살게 될것이라는 신세가 될 것 같아 강다짐을 하시고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邁進)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대학까지 갈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여섯 동생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시겠다던 아버지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다들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
부모님에 대한 원망?
아마 그러한 마음도 없진 않았을 것이지만
당장 먹고 살일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9급 공무원시험에 응시하여
지방9급 행정직과 동시에 9급 국가공무원시험을 합격하신 것이
그때 아버지 나이 23살 이었다(1968년도).
아버지가 23살 나이에 8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을 무렵,
난 내나이 20살에 무엇을 했을까를 생각해볼 때
내가 아버지께 참으로 큰 죄를 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가끔 아버지는 내게 장난삼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 나이때는 너를 낳았다.이놈아!"라고.
아버지가 공무원에 처음 지방직 공무원으로 임용된 곳이
같은 전남 구례군내 면사무소였고,
거기서 동네사람의 소개로
지금의 어머니를 알게돼 결혼까지 하게 됐다.(1970년도)
나도 이제는 다 컸다고 가끔 어머니가
그때의 얘기를 들려주시고는
하는데, 명문고를 나왔고 공무원정도되면 실력도 있고
집안도 괜찮을줄 알았는데 시집와서 집을 보고는
놀라 자빠질뻔 했고, 집까지 따라왔던 지금의 외가집 식구들은
속았다며 한바탕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하긴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방 두칸인데,
한칸은 신혼살림 차리고 다른 한 칸에 나머지 식구 8명이
생활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공무원에 임용되어 8개월 쯤 지나서 또 9급 국가행정직
발령이 행자부(옛날에는 총무처)로부터 임용통지서가 와서
면사무소를 그만두시고 현재의 직장인 철도청(鐵道廳)에
들어가시게 되었다.(1969년도).
그 뒤 아버지 내외는 順天을 지나서 여수(麗水)가는 중간지인
덕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며 공부를 하겠다는
3쨋동생(1955년생)을 신혼살림 하는 집으로 오게하여 아버지의
모교인 순천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거기서 열차로 순천까지 통학을 하면서 다니셨다.
그 작은 아버지는 전남 도경찰청에서
고위급으로 승진하시어 간부로 근무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때 셋째 작은아버지외 큰고모
그리고 막내 작은아버지등
모든 식구들을 뒷바라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부하기 싫다는 동생들까지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고,
공부에 관심이 있고 하고자하는 동생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적은 월급에 셋방살이를 하면서
온 집안 식구들을 돌보자니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
갈등(葛藤)과 알력(軋轢)이
남모르게 많으셨다고 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생각은
아들인 형과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항상 옆에서 조언(助言)과 격려는 해주셨을 지언정
자식의 길에 대해 강요를 하셨던 적이
한번도 없으셨던 아버지였다.
어렸을 때 그렇게 어렵고 무서워 보이던 아버지였는데
그 아버지가 내게 원하는 길을 가게 하셨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른다.
난 어렸을 때 같은반 친구들이
생일잔치 한다고 할 때가 가장 부러웠다.
내게는 생일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또 집에서도 그렇게 신경도 써주지 않았을 뿐더러
아버지 생신 때도
아침에 미역국만 끓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에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집에서는 매달 시골로 학비며 생활비를 보내기 때문에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그런 생활을 아버지는 공무원 생활을 시작 할 때부터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근 15년간을 계속 하셔야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뭐하셨길래
아버지가 대신 그런짐을 짊어져야만 했던것일까?
어렸을때는 아버지가 그렇게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우리집 먹을 것도 없는데
굳이 동생들 학비며 용돈 하나하나를 챙겨주시는
아버지를 볼 때 마다
삼촌, 고모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역시 내가 "어리긴 어렸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삼촌, 고모들이
이제는 모두들 잘돼서
아버지에게는 물론 조카인 나에게까지
신경 써주고 잘해 주시는 것을 보면,
가족이란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고
설령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내가 이렇게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3. 아버지에게 배워야 할 점
아버지에게는 내가 배우고
또 고쳐야 할 점이 너무도 많다.
아버지처럼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법만을 알아도
나는 큰 지식을 얻은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아버지도 완벽한 사람이 아닌 이상
단점이나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아버지는 내게 있어서 행동으로서
교육을 실천하시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폭력을 쓰신적이 한 번도 없다.
어머니에게는 물론이고 내가 기억하기에
초등학교 입학후론
아버지께 단 한차례도 맞은적이 없다.
하긴 어렸을때만 해도
아버지 말씀 한마디가 무서웠기 때문에
굳이 매를 드실 필요도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또 아버지는 노름을 안하신다.
남들이 흔히들 하는 속칭 '고스톱'이라는 것도 모르신다.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와
말다툼 하시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끔 친척들이나 친구들끼리 모인자리에서
오랬동안 화투를 치시고 계시는 것을 보시는 아버지는
몹시도 지루하게 느끼면서 못마땅해 하신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인간관계에서 노름은
必要惡이라고도 하는데 노름을 않하신 것은 물론이고
담배도 피우시지 않고 땐스춤도 추지도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그 누구와도 사람을 잘 사귀고 잘 따르시는 것을 보며는
꼭 통속적인 놀이들을 즐겨야만 하는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모든 숙부님들도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다.
물론 나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담배를 피움으로 해서 안좋은 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시며
선택을 내게 맡기신적은 있지만,
아버지가 내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강요하신적은 없었다.
그리고 또 아버지는 사치를 모르신다.
실제로 아버지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용돈은 물론이고
모든 돈은 어머니가 관리하는데,
아버지는 시집와서 없는 살림, 적은 월급으로
지금처럼이라도 살수있는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가끔씩 어머니께 말씀하시곤 한다.
말씀을 들어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만도 한다.
난 지금까지 아버지께 배운 것도 많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배우고 따라야 할것들이 많이 있다.
아버지는 내게 직접적으로 무엇을 가르쳐 주신적은 없다.
하지만 나로하여금 아버지를 따라가게 만드는 아버지야말로
진정한 교육자가 아닌가 싶다.
4. 결어
어렸을 때 모두 잘되신 아버지 친구분들을 볼때마다
"왜 아버지는 말단공무원으로 시작해서
평생 공무원생활만
하시는걸까"라는 생각을 많이했다.
아버지가 능력이 없어서일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서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먹고싶은 것을 못먹고 입고싶은것 못입을때의 기분처럼
자기의 꿈을 이루고자 했을 때,
그리고 그꿈을 접어야할 때의 기분이란
아마 참담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 꿈을 자식에게라도
펼쳐보고 싶으신 마음이 있으실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런 내색을 절대 안하셨다.
내가 군대가고 대학에 들어와서야
아버지는 내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셨다고 말씀하셨다.
난 참 아버지의 교육철학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언제 한번 아버지와 함께 진지한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버지는 내게 말보다는
실천으로써 모든 것을 가르쳐 오셨다.
내가 아버지와 같을순 없겠지만,
내가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는 것도,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아버지의 실천하는 교육속에서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많은 교육을 받게 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가정교육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따돌림,
흔히 말하는 "왕따"라는 것이 악성종양처럼
번져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가정에서는
혹시 내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한다고들 한다.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따돌림시키지 말고
그런 아이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같이 친하게
지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나는 교육에 있어서 가정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모두 잘못되는 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잘 되기는 힘들고,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꼭 성공하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나쁘게 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물질적인 면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가정교육이라든가 어른에 대한 공경,
부모들의 언행과 태도 등을 의미한다.
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바라는 교육보다는
일생생활의 실천하는 교육속에서
자식으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동안
내게 약한모습을 보이신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있어서 항상 인생의 교과서이자
스승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얼마전 술을 드신후
"한 10년 정도만 젊어졌으면 좋으련만" '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이제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이 핑 돌았던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시며
자기를 희생하고 부모를 위해,
동생들을 위해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험한 길을 걸어오신 내 아버지가
난 한없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