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고당(感古堂)
위치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감고당(感古堂)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조선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생가이자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면서 지키던 묘막이었다.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본래 한성부 안국방 37번지(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37-1번지 일대)에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에 특별히 내려 준 건물과 1687년(숙종 13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러나 안국동의 감고당은 후일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여주 능현리로 일부 시설물이 옮겨졌고, 간판 역시 여주의 민유중 묘막에 옮겨졌다.
당시 건물로 현재 전하는 건물은 27평이며 나머지 건물은 해방 이후 복원되었다. 이후 민유중 가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면서 묘막을 지켰으며, 1851년 9월 25일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여기서 태어났다. 이후 민치록은 1858년에 사망했으나 민자영(명성황후의 어린 시절 이름)은 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어머니 한산 이씨와 감고당에서 계속 거주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고 6.25 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으나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복원공사가 시작,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다.
인현왕후와 명성왕후가 살던 곳 '감고당'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16.02.01. 15:37
글 : 최홍대(chdspeed)
서울 안국동에 가면 '감고당길'이라는 공간이 있다. 데이트코스로 많이 알려진 유명한 길도 많지만 '감고당길' 자체는 아직도 낯설다. 왜 '감고당길'이라고 불렀을까. 안국역에서 나오면 가로수 사이로 일방통행길이 있는데 옆에는 돌담이 있어서 돌담길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곳이 '감고당길'이라고 불리우는 데에는 조선시대 숙종이 왕비인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해 지어준 '감고당(感古堂)'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감고당터에 대한 설명만 읽어볼 수 있을 뿐 감고당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 감고당은 어디로 갔을까.
운현궁 앞에 있던 감고당은 2004년 경기 여주로 옮겨져 다시 복원되었다. 그럼데 궁금해진다. 왜 여주일까? 여주는 바로 명성왕후가 살았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해 지어주었다는 감고당이 여주로 옮겨진 까닭은 인현왕후 집안은 여흥 민씨로 그 후손에 명성왕후가 있다. 두 명의 왕비가 살았던 유서 깊은 건물이 감고당인 셈이다.
남편이 부인의 친정을 위해 건물을 지어준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공간이다.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장희빈과의 알력다툼에서 밀려난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왕후 자리에 오르기까지 6년동안 이곳에 기거하면서 하루하루 비통한 마음을 다스렸다.
감고당이라는 이름이 달달하게 느껴진다. 창경궁의 침전들의 이름을 보면 환경전, 경춘전, 가효당, 통명전, 장춘각, 어휘당, 체원합, 연희당, 연경당, 연춘헌 등 일반 백성이 접근하기에 무척 위엄 있고 딱딱하게 느껴지는데 반해 감고당은 이웃마을 양반집 아낙네가 거주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감고당에 있는 건물은 집안의 여성들의 공간으로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채, 남자 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인 사랑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중문채,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인 행랑채가 있다.
여주에서 태어나 한양으로 간 명성왕후는 감고당에서 거주하면서 살다가 1866년 2월 25일 초간택에 들어간다. 2월 29일에 재간택에서 민치록의 딸을 뽑아 3월 6일 삼간택에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명성왕후다. 세 번의 간택은 모두 한양 창덕궁 중희당에서 치렀고 혼례의 마지막 절차인 동뢰연 역시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신랑이 될 사람도 처가로 가서 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왕실의 혼례는 처가에 나가지 않고 신부가 될사람이 별궁에 머물면서 납채 등의 절차와 동뢰연을 치루면서 혼례가 마무리된다.
숙종이 사랑했던 여자와 고종이 사랑했던 여자가 모두 살았던 감고당은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눈물과 비극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폐비가 된다는 것은 비참한 것을 넘어서 친정까지 모두 몰락시킬만큼 큰 사건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다가 왕후 자리에 오른 명성왕후 역시 그 끝은 비극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숙종은 변덕이 심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숙종은 요화당에 들러 그 집이 숙안, 숙명, 숙휘, 숙정 네 공주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밝히면서 '요화당'이라는 시를 남긴다.
'앉아서 옛날의 현포문을 바라보노라.
홀연히 난새와 봉황이 아름다운 난간에
거처하는 것을 생각하노니
가문 사람에 대한 특별한 예우는 천고를 뒤어넘누나
이 모든 것이 선왕의 세상에 다시없는 은혜로다.'
감성이 넘쳤던 인물 숙종때문에 인현왕후의 눈물이 마를 날이 있었을까.
가정교육이 잘 되었으며 현모양처였지만 계략가였던 장희빈에게 밀려 이곳에 왔던 인현왕후를 위해 지었을지도 모르는 노래는 민요로 전해진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으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참 간단하고 쉬운 가사인데 명확하게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법이 없으며 오래두고 볼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잠깐의 즐거움으로 끝날 사람도 있는 법이다. 권력은 불과 10년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명성왕후는 인현왕후와 같은 여흥 민씨로 어릴 때부터 역사와 학문을 즐겨 배웠다. 그녀의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인현왕후보다는 장희빈 스타일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여진다. 제자리에서 남편인 숙종을 조용하게 보필하던 인현왕후와 달리 자신의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위세가 당당했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기 위해 세를 모으고 명분 또한 확보했다.
감고당은 두 명의 왕비를 배출했지만 이 어찌 영광만 있겠는가. 8년을 감고당에서 살았던 명성왕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암살을 당했는데 그녀의 암살은 외국의 공사관에게 알려졌고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그 내용을 전달받고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일찍이 학문을 배우면서 당당했던 명성왕후의 평가는 명과 암이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나 대부분 외국인들은 명성왕후를 영리하고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있는 여성이라 평하고 있다.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라는 사람은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분이었다"고 적고 있다.
일반 백성들은 왕후자리에 오르는 것을 명예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오르는 순간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흐름에 휘말리게 된다. 감고당은 경기 여주시 능현동 469-1에서 만나볼 수 있다.
명성황후 생가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