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호모 섹슈얼 마지막 강의를 하겠다.
어릴적 옹녀박사 동네의 미장원에 여자+여자 부부가 살았다.
소문이 자자한데다가
옹녀박사가 원래 폭넓은 교양을 쌓을 소질이 있었는지라
기억이 지금도 난다.
또라이...같다는 느낌.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를 쭈~욱 읽어보는 동안
호모나 레즈비언의 문제는
어제오늘, 또는 샌프란시스코만의 문제는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진지하게 인간의 면모를 성찰해 보기 바란다.
마지막 펌글과 사진 몇장으로
시리즈를 마친다...
과연 동성애는 그리스인들의 전매특허인가? (펌글)
로마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로부터 종교, 철학, 건축 및 오만 잡다한 것들을 계승해서 발전시켰는데 동성애는 예외였다. 로마인들은 동성애를 '그리스인의 사랑'이라고 부르면서 터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가 그리스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위에서 일본의 사례를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과 그리스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은 국가와 민족들은 자신들은 동성애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유태인과 기독교인들, 무슬림들은 신이 금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한국 역시 강력한 유교적 영향 아래 동성애란 한민족과는 애초부터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짐바브웨의 무가베(Rovert Mugave) 대통령과 같은 많은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 역시 동성애는 '비자연적, 비아프리카적 그리고 서구 식민지 사람의 수입품'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남색은 고대 이집트의 군대 내에서 상호단결과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여성을 배제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유럽의 노르만인(人) 등 전투적 부족에서도 이와 같은 남색 경향을 종종 발견되었다. 19세기 중엽 아프리카에서도 여성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성의 충동들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전사들 사이에서 친교와 충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줄루 왕 샤카의 유명한 용사들 사이에서도 성안에서 교전이 벌어지기 전 격려의 차원에서 젊은 남자들에게 동성애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럽에서도 중세시대 동안 금기시 되던 동성애 역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점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되살리려던 르네상스 운동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있다.
한국의 동성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존재해 온 동성애자의 삶이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랑에 대한 기록으로 화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을 살펴보면(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외양이 잘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하자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몇몇 향가에서 드러나는 낭도(화랑을 수행하는 수행인)들의 화랑에 대한 사랑은 존경심을 넘어 사모의 감정에 가깝다.
득오라는 낭도가 죽지라는 화랑에게 바친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제목 그대로 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로서, 많은 학자들이 늘 같이 생활하고 행동하는 화랑도에서 동성간의 성행위와 사랑은 꽤 빈번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본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고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한국에서 역사적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또는 성적소수자)는 아마 신라 제 36대왕 혜공왕(758-780,재위 765-780)이라고 한다. 그는 경덕왕의 적자이며,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는 마지막 임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가 초기에 섭정했다고 한다. 평소 여자같이 행동하고 옷 입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후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의 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신라 원성왕 대의 미소년 묘정은 출중한 외모 덕분에 신라 고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후에는 당의 황실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남첩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몽고 공주출신의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에 잠겨 있다가 자제위라는 궁정 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다, 그 중 후궁 익비와 사통한 홍륜에게 죽임을 당한다. 왕이 궁정에서 여러 귀족 미남 청년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고, 평소에도 여자 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에는, 동성애의 감정을 기록한 것은 고려시대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미소년인 정소년과 관리인 시적 자아가 같이 그네를 타고 즐기며,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둘이서 손잡고 소풍을 가고 싶다고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동성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유랑예인 집단 남사당과 그 외 승방과 머슴사이에서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의 사랑 얘기는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유교적 도덕관념이 한국에서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요한 장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로 공자 ,맹자 생전은 물론이려니와 유교의 경전 격인 사서오경 어느 부분애도 동성애를 비난하는 내용은 없으며, 유학을 하는 선비들 사이에서 동성애적 감정은 일종의 사치이자, 유행 정도의 취급을 받았을 뿐이지 절대로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제시하는 자료들만 보고 있으면 동성애(및 동성연애)는 생각보다 여러 문화권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행위며 마치 질병이나 죄악처럼 취급되거나 터부로서 금기 시 될 필요 없는 일종의 성적취향 정도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동성애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약한 이미지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중장기병들, 줄루 족의 전사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동성애자 혹은 공공연히 동성연애를 행했던 것이다.
첫댓글 어쩌~라고..^^
헤헤....
공부끝~ ? 시원섭섭...
충전이 필요한겨?
복잡...기냥 생긴대로 살뀨.애낳면서......하리순가 허는 그여자?를 봐도 속이 시끄런디....
성자야 잘 봤다...이제 끝났냐?
그렁가봐....
마리 로랑생이구먼..이해는 안되지만 일종의 성적 취향이겠지..근디 난 이쁜 여자보면 좋던디..ㅋㅋ
나도 이쁜 여자보면 시기보다는 기분이 좋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