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휴식’과 ‘예수님의 안식’을 구분해야 합니다.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강론>
(2025. 2. 8. 토)(마르 6,30-34)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은 우리를 온갖 짐과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기쁨,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의 뜻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을
줄 것이고, 너희의 짐을 없애서 가벼움을 줄 것이다.”입니다.
2)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는 말씀은,
외딴곳으로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안식’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휴식’이 아니라,
영적인 힘의 재충전을 가리키는 ‘안식’입니다.>
3)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예수님도 제자들도 원래의 계획과는 다르게 쉬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도 제자들도
몰려든 사람들도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몰려든 사람들은, 참된 안식을 찾아서 예수님께 온
사람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영혼의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따로 떨어져서 쉰 것은 아니고,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영적인 힘’을 재충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외딴곳에서 쉬는 일’을 ‘피정’이라고
표현하는데, ‘피정’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피정 지도자의 강의도 듣고,
고해성사도 보고, 미사와 기도를 드리면서
영적인 힘을 재충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3) 예수님은 쉬시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도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새 힘’을 얻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 자신의 방식대로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4)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런데 사실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편).”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시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떠나 있었고,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가엾게
여기셔서 구원하려고 오신 ‘참 목자’이신 분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5)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라는 말을 그 당시의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은 목자 직무를 수행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수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밭을 파괴하고, 내 몫을 짓밟았다.
그들은 내 탐스러운 몫을 폐허의 광야로 만들었다. 그들이
내 몫을 폐허로 만들자, 폐허가 된 그곳이 나를 향해
통곡한다. 온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도,
그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예레 12,10-11).”
<나쁜 목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노여움과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가 직무를 잘못 수행하면 그 직무를 정지시켜야 합니다.
성전이(교회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면?>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