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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1)
마 6:5-15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5-15 / [기도에 대한 가르침;눅11:2-4] 또 기도할 때 경건한 체하는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큰길 모퉁이와 회당에서 드러나게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6) 그러니 너는 혼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서 너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너의 비밀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7) [주님의 기도]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꾸 되풀이해야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줄로 생각한다. 8) 너희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이미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14) 만일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예수님께서 친히 가장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그 누구도 훼방할 수 없는 하나님 백성만의 특권, 권리, 의무입니다.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던 대로 사람의 칭찬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칭찬받으려는 행위를 경계하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의 응답을 위해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6). 또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해야 응답할 줄 아는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7).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13)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눅 11:1).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을 ‘주기도’ 또는 ‘주의 기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이방인들의 하던 기도와 차별화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모델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대상, 기도의 내용, 송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했고, 빵을 나누었으며, 기도했습니다(행 2:42).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사도들에게 기도를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배운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는 법을 배우면 지금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시리라(14-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이 말씀은 ‘주기도’의 용서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12). 이는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주기도는 당시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의 기도가 아닌 실제적인 삶의 기도로써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적용: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암송 자체보다 적용이 더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이 어떻게 당신의 삶에 실천되었는지를 함께 나누어 봅시다.
유대인들은 누구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기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을까?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문을 그저 달달 외우기만 했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형식적으로 기도했거나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정욕적인 기도를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기도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인지 정욕을 위한 기도인지 생각해야합니다.
< 설 교 >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5-13 / 김상복 목사
어느덧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참 복 받은 나라입니다. 가을이 되면 먹을 것이 많지요. 곡식과 과일이 얼마나 풍성합니까. 이렇게 풍성한 가을에 우리 삶에 영적으로도 풍성한 열매가 많기를 원합니다. 내일부터 1주일간 특별새벽기도를 하게 되는데 우리 모두 올해의 후반기를 기도로 출발합시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기도 중 사랑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런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사랑이기 때문에 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다.”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너무 좋아하다 보니 어느 새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새벽기도 주간에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가족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 를 하시면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힘을 얻어 3년 동안의 공생애를 하셨습니다. 기도로 시작했고 기도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눅5:16).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이니까요. 산에서, 조용한 곳에서,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날마다 기도하심으로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죽음을 통과하셔서 부활의 승리로 여러분과 저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결실의 계절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않고 청청해지는 것처럼 이 계절에 우리의 삶에도 육적인 열매와 영적인 열매가 함께 풍성해지기 원합니다. 우리 삶의 열매가 넉넉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 나를 만나는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큰 축복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이런 식으로는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번 특별새벽기도 동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해서 같이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람직한 기도와 바람직하지 못한 기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기도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5절)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하면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까만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줄 아나! 나는 하루에 5시간씩 기도해.” “나는 40일씩 3번이나 금식기도를 했어.”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대화는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하고 칭찬을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절)고 했으니 오히려 손해지요. 이런 기도는 그저 사람에게 기도 많이 한다는 인정을 받을 뿐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대화입니다.
둘째, 의미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은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7절)고 했습니다. 의미 없는 말,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면 자기 최면에 걸립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같은 말을 반복하면 잔소리가 될 뿐 듣기 싫어집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의미 없이 기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잘 알아듣게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많은 말을 하는 기도입니다. 이방인들은 기도를 오래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그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하신 말씀을 잘 듣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마십시오. 하면 손해일 뿐입니다.
그러면 바람직한 기도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골방기도, 은밀한 기도입니다.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 나와 하나님 단 둘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골방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요? 골방에 들어가라는 것은 하나님과 단 둘이 오순도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주고받으며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기도하는 것을 볼 필요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소곤대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은밀한 일을 남의 집에 가서 일일이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고 나와 하나님 사이의 기도면 족한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리라.” 이 구절의 한국말 성경에 빠진 단어가 있는데, 은밀한 기도를 ‘공개적으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 알도록’ 응답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른 사람들이 “저 분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나봐! 하나님이 도와주시나봐!”하고 다 알도록 하십니다.
오늘 1부 예배 후에 사업하시는 어느 분을 만났습니다. 요즘 사업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이상해요.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잘 안 되고 부도도 나는데 제 회사는 왜 이렇게 잘 되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느끼고,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응답해주십니다.
사람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사람이 도와줄 수 있나요? 참 효과와 열매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해야만 응답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은밀한 기도를 공개적으로 응답해주십니다. 이런 축복을 올 가을에 여러분 모두가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즐겁게 응답해주시고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안 주시려고 애를 쓰는데 또 달라고 매달리고 팔을 비틀어서라도 억지로 한 가지를 더 빼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자식으로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의 필요를 보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 앞에 온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창조자요 위대하신 분이요 거룩하신 분이요 위엄이 크신 분이요 보좌에 계신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감히 접근할 수 있는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했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영적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즉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혁명입니다.
저희가 주일학교 다닐 때 장로님들이 오셔서 기도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장로님이 근엄하게 “저 높~고 높은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하시면 ‘아, 하나님은 무척 멀리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같이 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그 분이 바로 제 아버지이신 것을 믿고 자식이 아버지께 이야기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런 기도를 아버지께서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부른 후 여덟 가지의 기도를 하라 하셨는데, 네 가지씩 두 부류로 나뉩니다. 처음 네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요, 나머지 네 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기도가 이렇게 50대 50인데도 실제 우리가 하는 기도의 99%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좀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하나님의 이름이 내 인생과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이 세계에서 높여지기를 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통치하는 세계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해 제일 먼저 통치해야 될 분야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주가 되셔서 제 인생을 완전히 다스려주시옵소서. 내 인간적인 생각, 육적인 생각을 뿌리 뽑아 하나님의 생각으로 완전히 바꿔주시옵소서. 감정과 언어와 행동을 지배하여 주옵소서. 잘못된 습관과 인격까지도 성령께서 바꿔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면 아내와 자녀들이 생각납니다. “하나님, 제 아내가 있고 딸과 사위와 손주들이 있습니다. 온 집안의 자손들이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받으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고 훌륭한 시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인생만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다른 가족들은 멋대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가족을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 그 손길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평생 하는 모든 일이 주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 교회에서, 내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인생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들이 여러분 가슴마다, 입술마다 있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권세, 영광을 찬미하는 기도입니다. 때로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권능을 묵상하면서 그 이름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하루의 기도가 넉넉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이 여러분 삶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기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의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은 'Our Daily Bread'이므로 ‘오늘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양식은 오늘 것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 날의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필요한 의식주를 공급하여 주옵소서.” “풍성히 허락하시는 것 감사합니다.” 아무리 풍성해도 세 끼밖에 먹을 수 없지요. “내게 있는 것으로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사랑과 나눔과 섬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의 양식이 있으려면 직장이 있어야 하지요. 여러분의 직장이 잘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청와대로부터 여러 정부기관, 대학, 기업체, 언론 단체들의 신우회를 다녀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보통 금요일 12시부터 1시 사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모이는데 자기 회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정부의 신우회는 대통령과 장관을 위해 기도하고 기업체는 사장과 윗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좋은 제품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죠. 우리의 직장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곧 우리가 잘 되는 길입니다.
직장에서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재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에게 능력과 판단력을 주셔서 다른 사람들보다 회사에 큰 유익을 창출해 낼 수 있도록 하옵소서.” 우리의 ‘오늘의 양식’을 제공할 직장에서 일을 잘 해내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구하면서 직장생활이 잘 될 때 여러분이 인정받고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성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죄가 흘러나오면 하나님과 친해지지 못해요.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시는데 내가 공연히 죄의식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고 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를 가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죄가 나타나면 바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속히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걸려도 마음이 무겁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걸려도 내가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생각도 잘 안 되고 결정도 못 내리고 지혜도 부족하고 속만 상합니다. 인생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의 관계가 좋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있어서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것이 사람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마태 5장 44절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증오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너희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인도의 우리사라는 지역에서 1백 명의 그리스도인이 살해당했습니다. 수천명의 집이 불에 탔습니다.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매주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교 극단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불태우고 교인들에게 몽둥이질을 하고 돌을 던지고 죽이기도 합니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슬람에 의해 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핍박을 받는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를 저주하고 이용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들을 축복하고 선을 베풀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친절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십시다.
또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귀에게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란 ‘악한 자’에게서 구원해달라는 말로서, 악한 자는 마귀를 뜻합니다. 악령은 어떤 인간보다도 강합니다. 인간은 사단과 싸워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혈과 육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고 성령의 도움을 구해서 마귀와 싸워 이기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셔서 이 가을을 기도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힘을 얻고 기도로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환경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기본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새벽기도를 통해 올 후반부에는 많은 기도의 열매를 맺고 여러분이 얻은 열매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마 6:5-6 / 김남준목사
I. 본문의 배경
마태복음 6장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마 6:1)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에 이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에 대해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조금 도와주면서 많이 칭찬을 받고 자기를 세우기 위해 구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기도의 외식의 말씀에서는 좀 의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길 어귀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종교인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식은 우리의 구제나 기도 생활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선한 실천에 파고들어 그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외식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좋은 모습이 있을 때,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양한 좋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탁월하심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기도의 외식에 관한 적용은 외식하는 마음이 기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기도와 나뉜 마음
바로 나뉜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될 때에 가장 좋은 기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반대되는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을 외식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으셨습니다.
A.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기도에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께 고정된 영혼의 시선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은 찢어지고, 갈라지고 나뉜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도가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실 성경은 믿음의 정체를 밝히기 보다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 믿음의 정체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어떤 문맥에서 이 유명한 성경의 요절이 등장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광야의 한 사건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주님이 보내신 불 뱀에 물렸습니다. 물리면 온 몸이 불일 듯 열이 나고, 짧은 시간에 절명하는 무서운 독이 있는 뱀이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불쌍한 백성들을 구출할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제시받았습니다. 그것은 지팡이에 구리 뱀을 매달아서 높이 쳐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고, 바라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에 구리 뱀을 엮어 높이 쳐들었을 때 그 그루 뱀을 보는 것과 독사에 물려서 퉁퉁 붓고 불같이 열이 나던 사람들이 회복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인관관계가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치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께서 나으라고 명하셨으면 되었지 왜 보는 사람만 낫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 그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려 그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적인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 지팡이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오로지 거기에만 유일한 치료의 길이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의지하면서 그 구리 뱀을 주시하였을 것입니다. 즉 구리 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리 뱀을 통해서 그들을 치료하시는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께 응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도가 믿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 열렬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쏟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하려면 시간을 내야해. 그리고 환경도 매우 중요하지.” 맞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환경과 시간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해도 저절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적인 요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응시하는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이 어려워도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때가 있고, 여유가 있고 편안하고 염려가 없는 환경인데도 거의 기도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뉘고 찢어질 때 우리의 마음이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눈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사물들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 이런저런 인상들을 남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응시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이런 수많은 인상의 잔상들이 적절히 쓸려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고정된 응시하는 마음이 없을 때 즉,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에는 만나는 사람과 보고 보이는 이런저런 사물들의 수많은 영상들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초점을 흐리고 찢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응시하는 믿음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마음이 기울어지면 우리는 바빠도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위기가 오면 위기 때문에 기도의 파도를 타게 되고, 고요할 때에는 평온하기 때문에 주님을 마음껏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고,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들을 늘 만나셨고 병자들에게 에워 쌓이셨기 때문에 식사하실 틈도 없는 고단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사랑으로 고치고, 무지한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고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늘 그 모든 환경 속에서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환경이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응시하는 믿음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환경을 탓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에 적합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B. 골방에 들어가는 이유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골방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는 바와 같이 골방은 집에서 평소에 쓰지 않는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방입니다. 이 골방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는 ‘은밀함’입니다. 그러한 은밀함은 물리적인 은밀함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과 마음의 은밀한 골방입니다. 기도할 시간, 기도할 장소, 이것이 물리적인 골방이라면, 정신적인 골방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분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형식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의 장소는 형식이지만 이 형식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의 내용을 보관하기에 매우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마치 우리의 생명 유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예민한 장기들, 예로 심장을 하나님께서는 단단한 갈비뼈에 둘러 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신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런 골방이 여러분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직장에 일찍 나가서 하나님께 조용히 간구하고 아뢰는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주님과 독대하는 고요한 시간, 그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주님은 내 마음에 당신의 마음을 부으시고, 나는 주님께 내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교통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 가운데서 이런 기도를 통해 당신의 영적인 생명을 우리의 인간 영혼 안에 부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하는 교회 앞의 표어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이제는 기도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연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분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 교통이 없이 일주일을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건조해지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설교는 지겨운 시간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C. 최고의 예물, 온 마음
하나님께 바칠 최고의 예물은 바로 우리의 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뜻보다는 마음, 그리고 성품과 목숨보다도 더 먼저 주님께 바쳐져야 될 것이 마음입니다. 더욱이 나뉘고 갈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고 단일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도 순수하고 단일하게 될 때에 그분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해도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물같이 쏟는 그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도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온전히 쏟는 그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자기 중심적으로 형성되었던 마음은 물과 같이 녹아 내리고, 그렇게 녹아 내린 마음은 주님 한 분께로 모여 쏟아져 들어갑니다. 곧 형체를 잃어버린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부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틀로 다시 주조되어 나옵니다. 마치 쇠붙이를 강한 불에 녹여 형체를 잃어버리면, 장인이 그 쇳물을 틀 속에 다시 부어, 쇳물이 장인이 원하는 그런 도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그렇게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예전에는 사랑에 눈뜨지 못한 죄인이었던 사람이 그 시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두려워 떨고 한숨만 쉬던 사람이 마음을 쏟아 붓는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들이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 쏟아 부음 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예물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III. 은밀한 중이 계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가 이렇게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도해야 할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과 연관 시켜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기도의 전진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앎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 앞에 장작불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 기도의 불길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은 그 아궁이에 계속 공급되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잘 마르고, 견실한 나무토막이 계속 불 속에 들어갈 때 아궁이는 뜨거운 불길로 이글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가 순간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서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도의 제목들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의 불길은 지푸라기에 붙은 불길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었다면 그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나겠지만,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범죄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전과는 비교될 수 없이 바쁘고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치열한 경쟁사회로 이끕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들, 신앙, 교회 지체들, 이웃, 내 가족 심지어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애쓰지 않으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받아서 죽어갔으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부패를 경험하며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주신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마음을 강하게 먹고 환경과 싸우십시오.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고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환경, 육체의 게으름과 영혼의 싫증 속에서 무너져 가는 여러분들의 기도의 골방을 한번 보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회복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여라! - 단순하게
[마태복음 6장 5-8절]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메시지 성경>
5 또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연극을 하지 마라…
6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 않도록,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라.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솔직하게 그 자리에 있어라. 그러면 초점이 너희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그분의 은혜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위선에 대하여
본문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서도 역시 계속되는 말씀은 ‘위선’과 ‘진실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위선과 진실함이 드러나는 것은 ‘기도의 이유’와 ‘보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에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도도,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며 공적 기도가 그들에게 주는 자기 자랑의 기회를 좋아할 뿐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동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기도가 생활화되어 있어서 ‘회당’에서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거리 어귀’에서도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들이 종교의 벽을 허물고 거룩한 곳뿐 아니라 일상의 세속적인 삶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동기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동기가 변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그들의 경건의 배후에는 ‘교만’이 숨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죠.”
그들은 자신이 얻으려는 것을 얻었기에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적인 태도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여전히 같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하는 이유, 기도하는 이유가 누군가에게 경건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참 무섭죠?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기도와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구제가 위선이었듯이 찬양과 기도도 얼마든지 위선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숨은 동기를 바라보게 될 때.
이렇게 기도하여라
마 6:5-8 / 김병삼 목사
여기에서도 역시 주님은 문제만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참 본질적인 기도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6-7절을 보세요.
먼저 “골방에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방해거리와 마음을 산만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문을 닫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을 의식할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야 하나님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아주 본질적인, 하나님의 본성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 올바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시던 곳을 기억하시나요? 호렙 산에서 그가 양을 치고 있을 때, 그 어떤 사람도 주변에 없을 때 만나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사람들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권위가 있었을까요?
열왕기 상 19장에 엘리야가 탈진하여 로뎀나무 아래 있을 때, 그곳에서 위로를 받고 그가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엘리야를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 소란스럽게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잠잠하게 앉히신 후에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삭개오가 돌 무화과 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부끄러워 나무에 있을 때 만나 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 나무 위는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골방이었습니다.
12년이나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위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녀의 간절함이 어떠했는지 예수님은 당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군중 가운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곳은 아무도 모르는 골방이었습니다.
‘골방’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보이는 곳이 골방입니다.
제가 은혜를 받던 때, 목사로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주변에 평신도들이 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들었던 생각은 이 순간부터 주변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그리고 참 많이 울고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 그 집회 장소가 저에게는 ‘골방’이었습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이 말씀이 이해가 되나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의 이 말씀을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봐 말씀드립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함께하는 기도나 가정기도, 기도회 모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너는” 기도할 때라고 되어 있는데,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기도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기도를 비교해서 말씀하셨다면, 7절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의 기도 방식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특징은 무의미한 수다를 늘어놓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의미 있는 교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절)
인터넷에서 찾은 예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건성으로 흘러나오는 기도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구별하여 들으십니다.
아이들을 넷이나 키운 나와 내 아내는 이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식별하는데 제법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가짜 울음'과 '진짜 울음'으로 구별하여 부릅니다. 가짜 울음은 어린아이들이 잠자다가 뒤척거리면서 칭얼칭얼하며 울어대는 소리입니다. 이러한 울음소리는 별로 크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울음소리를 듣게 될 때 부모들은 즉시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칭얼거리다가 곧 잠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울음은 아주 다릅니다. 이 울음소리는 아주 크고 진지하며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이렇게 울기 시작하면 차라리 우리 둘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러면 어린아이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만족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큰 소리로 울어대기 때문입니다.
부모들도 어린아이들의 진짜 울음소리를 식별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우리의 기도 소리를 얼마나 잘 구별하시겠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응답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심을 품을지라도 그것이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보다 더 나쁘게 여기십니다.
여기에서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단순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입으로는 말하지만, 생각이나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기도가 여기에 속하죠.
존 스토트는 그의 책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 습관에 대해 우리 주님은, 아무 생각 없이 묵주 알을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단어를 암송하거나 ‘공허한 문구들’을 사용하여 마음은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종교 용어들만 늘어놓는 등의 정신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입으로만 하는 모든 기도를 금하신다.
그들이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더 많이 말을 하거나, 기도의 시간을 더 투자하는 양으로 응답을 결정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착각하기 때문이죠.
실제로 여러분의 신앙이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제일 힘들었던 순간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요? 혹시 장로님들의 기도가 아니었나요? 장로님들의 기도시간에 잠이 들면 설교시간도 거의 비몽사몽 간에 지나갑니다.
저희 교회도 이전 강단에 빨간 글씨로 크게 ‘대표기도는 3분 이내에’라고 써 놓은 적이 있습니다. 대표기도는 지금 이 예배시간에 필요한 기도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는 시간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어떤 지방 집회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표기도 하는 분이 얼마나 기도를 오래 하는지 강사 목사님이 나와서 기도 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장로님은 계속 기도하도록 하고 우리는 말씀을 봅시다!”
기도가 중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기도를 하는지 신앙의 의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3천 배를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기는 하나 그것으로 자신이 믿는 신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면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1천 번제를 드리고, 작정하고 새벽예배를 드린다고 우리의 요구를 하나님께 강요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기도가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보이지만,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당신의 가슴 속 깊이 자리를 잡은 이기적인 욕망이 보이기 시작해야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장환 목사님이 쓰신 예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를 조사해보았더니 ‘남편이 예수를 믿으면 자기만을 더 많이 사랑해주며, 자기의 일을 도와주며, 헌금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기만을 사랑하여 외도하지 않으며, 가정에 더욱 더 충실하고,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다.’라는 통계가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제목은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진정으로 남편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이 지옥 가지 않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남편이 믿도록 기도하기 때문에 그 기도는 응답이 더딥니다. 우리의 정욕과 이기적인 생각은 기도의 걸림돌이 됩니다. 올바른 기도로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정말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가 주님 전에 나와 “아버지!”라고 깊은숨을 내쉴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모르실까요? 그러나 그 다음 기도가 무엇 때문인지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
본문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기도의 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가르쳐 드리려고 하지 않나요? 오히려 하나님을 강요하고 있지 않나요? 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하나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때문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므로 그분의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언젠가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진작에 말씀으로 기도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텐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씀에서 벗어난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하는 기도는 허무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원하는 ‘진의’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곁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세상의 유혹에 따라 움직여 살기 때문이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기도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기도와 본질에서 다른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진실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
우리에게 가장 좋은 분,
우리에게 늘 선하신 분,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
그리고 하나님은 권능이 많으신 분,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쓰신 예화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세계 1차 대전 때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치명상을 입은 한 군인이 후송됐습니다. 상처가 너무 심해 치료를 하더라도 금방 죽을 것으로 판단한 그녀는 목사님을 불러오려고 했지만, 그 군인은 자신은 종교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제가 마지막까지 기도를 해드리겠습니다.”
“소용없소, 그런다고 내 맘이 변하진 않소, 당신만 싫증이 날거요.” 군인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이팅게일은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위해 16년 동안이나 기도하고 있답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16년 동안이나 기도했다는 말에 군인은 적잖이 놀랐습니다. 얘기를 들어본즉 자신의 어머니가 일하던 저택의 주인 아들이 신앙을 가질 수 있게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을 계속해서 기도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하던가요?”“최근에 들은 소식으로는 군대에 입대했다고 하더군요.” “혹시 당신 어머님의 이름이 아베타입니까?” 그 군인은 나이팅게일이 16년 동안이나 기도했던 바로 찰스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위한 놀라운 주위의 사랑을 알게 된 찰스는 결국 목사님을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뒤 얼마 뒤에 편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기도를 놓지 마십시오. 말씀을 놓지 마십시오. 전도를 놓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의문이 남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지식도 없고, 아직 하나님이 누구 신지도 모른다면 기도할 수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에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지식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관계하지 않고 만나지 않는데 어떻게 더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토머스 머튼이라는 작가 지망생이 첫 작품을 출판사에 보내놓고 고뇌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과연 내가 이 글을 보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 기도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아닌지,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든 생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기의 원고가 출판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이기적인 생각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예배당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원고가 편집자의 눈에 들어 책으로 출판되기를. 그리고 얼마 후 편집자는 출간을 거부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훗날 머튼은 그 편집자의 현명한 판단을 최고의 응답으로 꼽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머튼은 오랜 방황을 청산하고 수도사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평생에 걸쳐 멋진 작품들을 써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 [기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기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과의 동행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때 부적절한 기도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
이제 기도에 대한 마지막 의문이 남습니다.
정말 기도해야 하는가? 본문 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마라! 그러므로 너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다 아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다음에 ‘주기도문’과 연결된다는 점이죠.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우리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올바른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방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기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했던 우리의 기도가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는 것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을 구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될 때에 작은 힘이나마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소명’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른 것입니다.
신자의 최고 특권은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가장 큰 의무도 기도를 통해 알게 된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분의 일을 기쁨으로 자원하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역에 역으로 말해서 기도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자 자신의 야망, 계획, 욕심에 따라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에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공급받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를 완전히 내어 드리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5-15 / 이동휘 목사
1.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으로 기도가 없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이 없으면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승리와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아말렉이 공격해왔습니다. 이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출17:9)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는 말은 산에 올라가 승리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대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갔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하는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기도하는 팔이 피곤하여 거듭 내려가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 옆에 붙어서 모세의 기도하는 손을 붙들어 올려 해가 지도록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완벽하게 승리했습니다.
(출17:11-14)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B.C.710년경, 앗수르의 산헤립이 18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왕과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대하32:17) (17) 산헤립이 또 편지를 써 보내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욕하고 비방하여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한 것 같이 히스기야의 신들도 그의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하리라 하고
이에 히스기야가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대하32:7-8)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32:20) (20)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한 천사를 보내어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사들을 단칼에 도륙해버렸습니다. 산헤립 홀로 도망하여 자기 왕궁에 숨었지만 자기 아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하32:21) (21)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기도하는 사람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2.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할 때 무엇보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do not be like the hypocrites)고 하셨습니다. 여기 “외식하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아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권위와 기득권 유지에 상당한 타격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서든 올무에 빠지게 해서 로마 당국에 고발조치하여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은 세금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인두세를 로마에 바쳐야 했습니다. 이러한 인두세는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것으로, 당시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도록 했기 때문에 인두세 납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우상숭배에 바치는 것으로 여겨 상당히 저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면 유대인들로부터 극한 반발을 받게 될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 정부에 반역하는 행위로 당장 정치적 고발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 문제는 어찌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원들까지 동원했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헤롯 왕을 지지하며 로마 정부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때문에 세금 문제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는 정반대로, 인두세는 당연히 로마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는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사실상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들을 동원한 것은 예수께서 만약 세금을 로마에 바치지 말라고 하면, 그 즉시 고발 조치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의도를 익히 아시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는 말로 마치 아주 선한 체 가장(假裝)하는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마22:15-18)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들 바리새인들이 교묘한 질문으로써 자기를 흠잡으려는 책동을 가리켜 “외식”이라는 말로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외식하는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이러한 비유도 말씀하셨습니다.
(눅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아주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신들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를, 기도를 이용하여 사람들 앞에 자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멸시하는 세리는 감히 성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 기도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두고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들으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의 기도, 진실로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시었습니다. 기도생활이 올바르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위험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각각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데 대부분 형식화, 관습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과 비슷한 경향의 모하멧 교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수를 찔러 죽이려 뒤쫓아 가고 있는 한 모하멧 신자가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 자리에서 딱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 기도서를 꺼내 펴놓고 무릎을 정중히 꿇고 일사천리로 기도문을 읽어버리고 곧 벌떡 일어나 다시 원수를 추격했던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을 기억하여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마음에 전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생각은 없으면서 입술로만 중얼거린다면 극히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위험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생활, 위선적인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받아서는 안될 잘못된 기도는 먼저, 외식(外飾)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위선적으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꾸며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유창한 웅변조로 열변을 토하면서, 때로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하나님을 향해 호령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인들을 호령하는 것인지 분별이 가지 않는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대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들으라고 웅변을 토하거나 호령하거나 설교하는 듯한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위선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 기도시간에 어느 성도가 강단에 올라 대표기도하는데, 성도들 중 어느 누가 “오늘 대표기도는 나 들으라고 한 기도구나.” 라고 판단된다면, 이미 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정직하고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옆구리 찌르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기도를 듣고 ‘나 들으라고 한 기도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올바른 기도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대표기도는 성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기도 시간에는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아무리 유창하고 화려하고 논리 정연하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참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은밀한 중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긴 밤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오 나의 주님!” 이 한 마디였고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도 내용은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오 나의 주님!” 만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한 기도에는 많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진실한 기도에는 소리가 클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진실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 진실은 소리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마디일지라도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원하시고 들으십니다.
3. 예수께서 이렇게 외식하는 기도, 위선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만, 너희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골방”은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진솔하고 깊은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라는 말씀은 잠시일지라도,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시간, 그 기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서 오로지 진실되고 정직한 마음과 영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그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들으시며 그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 것입니다. B.C.850년경, 엘리사 선지자가 자주 활동하던 갈멜 산에서 약 40km 떨어진 수넴이라는 곳에 남편 덕에 부유하게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수넴 여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항상 이곳을 지나는 엘리사를 보고 자기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라며 간절히 권하고 정성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의 간절한 초청에 지날 때마다 극진한 음식대접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이 여인이 남편에게 말합니다. “이곳을 지나실 때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식사하시는 이 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분을 위해 옥상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어 침대와 탁자와 의자와 등을 들여놓고 오실 때마다 쉬어 가게 합시다.” 그래서 남편은 흔쾌히 승낙하고, 엘리사로 하여금 조용히 쉴 수 있도록 옥상에, 그리고 편하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용하시도록 그 집의 내실을 통하지 않고 밖으로 통한 계단을 만들어 곧장 옥상 방을 사용하도록 배려했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침대와 성경 연구에 도움에 되도록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밤에라도 불편이 없도록 등잔까지 마련해 드렸습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엘리사를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어느 곳 하나 빈 구석이 없이 섬세하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사람에게 봉사했습니다. 수넴 여인의 이같은 주밀한 대접을 받은 엘리사가 하루는 수넴 여인을 불러 묻습니다. “네가 우리에게 이처럼 하나님 섬기듯이 봉사하는데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수넴 여인은 “나는 세상의 무슨 권력을 통해 도움을 구할 만한 문제도 없고, 선지자를 대접한 것이 무슨 대가를 바라고 행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저 마음 편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엘리사가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라며 그래도 뭔가 보답하고자 하니까, 마침 사환 게하시가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며 그 여인의 가정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다시 여인을 불러 “1년 후에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축복했습니다. 이 여인은 “괜찮습니다. 다 늙어빠진 저희 부부에게 아들을 갖게 된다는 것은 헛된 소망일뿐입니다.”며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1년이 지나니까 수넴 여인이 잉태하여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왕하4:14-17) 수넴 여인은 남편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만족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 늙도록 자식 하나 없다는 것이 마음에 늘 눌리는 한 가지 아쉬움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가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아들이 두서너 살이 되어 한창 부모에게 재롱을 피워 수넴 여인의 가정에 웃음이 떠날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밭에 나가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 놀다가 갑자기 아이가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면서 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심상치 않아 급히 사환을 불러 아이를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미 품에 안겨 낮까지 앓다가 아무런 병명도 모르고, 어떻게 손도 써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수넴 여인은 사랑하는 아들이 죽자 곧 아들을 옥상 선지자 엘리사가 사용하던 방으로 옮겨 침대에 눕혀 두고 문을 닫고 남편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은 사실을 감추고, 엘리사를 만나고 돌아올테니까 아무 걱정 말라며 40km나 떨어진 갈렐 산으로 달려갑니다. 수넴 여인의 이러한 행동은 엘리사를 통해 아이가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또한 반드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죽은 아들을 살리는 길이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엘리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과 함께 엘리사가 집에 돌아와 보니 정말 아이가 자기 침대에 죽은 상태로 뉘어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점점 아이 몸이 따뜻해지더니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습니다. 아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습니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갔을 때,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눕혀 놓은 엘리사의 침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외부의 방해를 막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위하여 문을 닫고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엘리사가 “문을 닫고”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온 힘을 기도에 집중했는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엘리사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정해진 주문(呪文)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그야말로 그들의 신들마저 질릴 정도로 주문을 외우는 것을 말합니다. B.C.870년경, 엘리야 선지자는 나라 민족 전체를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했습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이 땅에 내리지 아니하리라.”(왕상17:1) 과연 엘리야의 말대로 3년 동안 북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가 내리 3년 가뭄으로 황폐해졌습니다. 엘리야는 3년 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합을 만났습니다. 이 때 아합 왕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가 왔느냐?”(왕상18:16)며 원수를 잘 만난 듯이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왕상18:18)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며, 나라 민족의 고통과 경제의 황폐화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가증스러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라며 그 원인을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숭배의 헛됨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갈멜산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데려 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우상숭배자들과 대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아합 왕이 우상 숭배자들 850명을 갈멜산에 불러 모으고 엘리야와 한 판 승부에 들어갔습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렇지 못하면 모조리 죽이도록 하는 생명을 건 승부였습니다. 먼저 우상숭배자들이 아침부터 한낮이 다 되도록 목이 터져라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표적이나 응답이 없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빗대서 조롱조로 폭로합니다. “더 큰소리로 불러라.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느냐!” 그러자 바알 숭배자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숭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기까지 자기들 몸을 찌르며 발악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왕상18:27-28)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번제단을 쌓아 번제물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물통 넷을 가득 채워 가져다가 단 주위에 물이 가득하게 흐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왕상18:36,37)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딱 한 번 이렇게 간단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18:38) 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대 승리였습니다. 과연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증명해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하나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기손 시냇가로 끌고가 모조리 처단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아합과 악독하기 그지없는 이세벨의 우상숭배 강요로 하나님과 우상숭배 사이에서 주저주저하고 있던 백성들 앞에서 환희에 찬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은 이방인의 기도방법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진실된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65:24)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히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이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전부터 그 간구하는 자의 삶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모두 알고 계셔서 그 기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이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지니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 필요를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황폐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맑은 물로 씻고,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 새롭게 하시고 잃었던 축복을 회복하도록 해주시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겔36:37-38) (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있어야 될 것들을 모두 아시지만, 그래도 이루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깊고 진솔한 교제를 통해 생명이 넘치며,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의 기도
마 6:5-8 / 이윤재 목사
이번 주로 100일동안 계속된 기도를 마쳤습니다. 3월 초에 시작된 기도가 마치고 6월이 시작되었습니다. 6월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절기 일 뿐 아니라 교회력으로는 성령 강림절이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120명이 모여 기도하다 성령이 임했고 그 결과 위대한 사도행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우리 자신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 어느 조용한 미국 마을에 어느날 나이트 클럽이 들어왔습니다. 나이트 클럽이 들어오자 교인들이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한 마을에 나쁜 문화가 들어와 사람들을 문란하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이트클럽이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이트 클럽이 장사가 안되더니 결국 망했습니다. 화가 난 사장은 곧 교회를 향해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판사가 양측을 불렀습니다. 먼저 나이트 클럽 사장에게 물었습니다. “왜 소송했습니까?” 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것은 다른 것 때문이겠습니까? 교회가 망하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랬더니 교인들이 말합니다. “아니, 판사님, 말도 안됩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은 맞지만 기도한다고 나이트클럽이 망합니까? 다른 이유 때문에 망한 거예요. 기도 핑계대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몇 주후에 판사가 양측을 불러 놓고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은 나이트클럽, 믿음 있슴. 기도해놓고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은 교회, 믿음없슴”.
어떻습니까? 가끔 우리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실컿 기도해놓고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기도한다고 그렇게 됩니까? 그것은 기도안해도 될 일이예요”. 기도안하는 불신자들은 오히려 기도의 능력을 믿는 데 교인들은 정작 기도해놓고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번 100일 기간에도 교인중에 그런 분이 있습니다. 어디를 여행하는 데 차가 삐끗하다가 가드레일을 받고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는 데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야, 이번에 무슨 일 없었어?” 걱정할까봐 말 안하고 있었는 데 어머니가 전화해서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야, 이상하게 내가 불안해서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했다. 다행이구나. 하나님이 도우셨다” 하더랍니다. 이 세상에 우연한 일이 있습니까? 우연한 일 없습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아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은혜는 기도하는 은혜요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축복입니다. 100일 기도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그러나 100일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기도의 훈련과 습관화를 통해 그 이후에도 계속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100기도 이후에도 계속 기도하겠습니까?
계속적인 기도를 위하여 기도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산상수훈에는 네 가지 기도가 나타납니다. 순서대로 말하면 먼저 마6:5-8절, 은밀히 기도하라. 골방기도입니다. 다음, 마6:9-15,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입니다. 6:16-18, 금식기도입니다. 영적인 기도입니. 마지막으로 마7:7-12, 구하라. 주실 것이요. 부르짖는 간구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보실까요?
마6:5-8 마6:9-15 6:16-18 마7:7-12
은밀히 기도하라 이렇게 기도하라 금식으로 기도하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음의 기도 주의 뜻대로 기도 목숨걸고 기도 부르짖어 기도
교제 거룩 싸움 간구
commuincation consecration combat cry
마5장에서 7장까지의 짧은 예수님 말씀에서 이렇게 네 가지 기도가 나타나다니 놀랍습니다. 이 기도를 이 순서로 하겠습니다.
1. 오늘 마6:5-8, 마음의 기도
2. 다음 주 마7:7-12 부르짖는 기도
3. 세 번째 주 마6:9-15, 주기도
4. 마지막, 마6:16-18, 금식 기도
이번 6월에 성령의 은혜안에 산상수훈에 나타난 네 가지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적 생활이 더 풍성해 지기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 은밀한 기도, 마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첫 번째 기도가 6절 보시겠습니까?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이 가르친 첫 번째 기도는 은밀한 기도입니다. 골방기도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드리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기도를 가장 먼저 가르쳤을까요? 유대인의 기도에 대한 성찰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에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성전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사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 여기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성전”입니다. 과거 성전에 있던 시절, 유대인은 아무데서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고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다가 성전이 무너지자 그 장소는 가정과 회당으로 이어졌습니다. 5절 보실까요? 마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렇게 기도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다 보니까 기도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하고, 얼굴을 무릎에 넣기도 하고 했지만 주로는 서로 손을 벌리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기도하다 보니 기도할 때 무슨 옷을 입고 하느냐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입는 옷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탈리트”라고 합니다. 제가 지난번 이스라엘에 가서 한 벌 사왔습니다. 보시다 싶이 크기가 가로 1.5미터, 세로 0.6미터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로 된 천입니다. 주로 무명이나 모로 만듭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마다 이것을 어깨를 두르고 기도합니다. 이미 민15:37-41절에는 이 기도복에 히브리어로 “찌찌드”라고 하는 옷술을 달도록 규정하고 있는 데 이것이 “옷술”입니다. 그런데 이 “옷술”은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다섯 번 매듭하고 여덟 가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5 다하기 8하면 13입니다. “옷술”이라는 “찌찌드”를 히브리어를 수로 표시하면 600입니다. 그리고 여기다 13하면 613이 됩니다. 그런데 이 613은 구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의 수입니다. 옷술이 네 귀퉁이에 매달리는 것은 동서남북 전 세상을 의미하고 색깔이 청색인 것은 하늘 곧 영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올이 모두 613개인 것은 구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 색깔이 둘 있습니다. 까만색은 하지 말라는 율법수 365줄입니다. 하얀색은 하라는 말씀 248개입니다. 그 숫자를 실의 올 수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이 옷을 입으면 그 자체로 율법 전체를 몸에 두르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옷에 신경쓸 뿐 아니라 무슨 내용으로 어떻게 기도할 것이냐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기도책입니다. 주후 6세기 이후에 편집된 “시두르 테필라”라는 책입니다. 뜻은 글자 그대로 기도 책이란 뜻입니다. 이 책에는 유대인이 1년간 드릴 모든 공중 기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안식일마다, 모든 절기마다, 그리고 매일 드리는 기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이면 이 책을 읽습니다. 그러니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기도복을 입고 기도책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문을 읽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5절 말씀의 배경입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그림이 보이십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문제는 그 기도가 하나님앞에서 드리는 기도인지 사람앞에서 드리는 기도인지 혼동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하나님께만 기도하려고 애쓰지만 공중석상이고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기도가 때로 형식이 되고 예식이 될 때가 있습니다. 마6: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조심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유대인이 기도할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은 형식주의의 함정입니다. 기도의 형식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앞에서는 기도하지 말고 개인적으로만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앞에서 기도할 수 있지만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고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기도자 테오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그것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 소리를 크게 하고 적게 하는 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우선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야 합니다. 시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찾는 것이 기도입니다. 종이 상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같이, 여종이 주모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같이, 젖뗀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같이 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기도를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느냐입니다. 내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만 기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모든 종교가 기도합니다. 문제는 누구를 대상으로 기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부처앞에서 천배, 3천배 절합니다. 달마대사는 벽을 보고 8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성철스님은 해인사에서 35년간을 두문불출하고 앉아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기도가 누구를 향했느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회당에 가면 그 강대상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네가 지금 누구앞에 있는지 알아라“. 누구앞에 있습니까?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마음 중심으로
기도는 하나님앞에 설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마6:6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에 “은밀하다”는 말이 두 번 나오고 “골방”이란 말이 한 번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골방”은 꼭 눈에 보이는 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집에는 골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골방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은 조용하고 작은 방을 말하는 데 이 방은 눈에 보이는 방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방을 말합니다. 몇 년전 어느 교회 목사 취임식에 갔더니 권면을 맡은 목사님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목사에게는 세 가지 방이 있어야 하고 세 가지 방이 없어야 한답니다. 있어야 할 방은 책방, 골방, 심방입니다. 책방에서 성경읽고 골방에서 기도하고 심방을 통해 성도를 만납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방 하나를 더 이야기했습니다. 사방입니다. 죽는 방입니다. 그런가 하면 없어야 방도 있답니다. 안방, 다방, 노래방이랍니다. 안방은 필요하지만 안방에만 틀어 밖혀 있으면 안됩니다. 다방에 가서 쓸데 없는 사람만나서는 안됩니다. 스트레스푼다고 노래방 가서는 안됩니다. 요즘은 가지 말아야 할 방이 더 생겼습니다. P.C방, 채팅방, 안마방, 소주방, 찜질방은 여러분 마음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골방”은 공간의 방이 아니라 마음의 골방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앞에 서는 것이지만 마음중심으로 서야 합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26:9절입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기도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합니다. 영성가 리챠드 포스터는 이것을 “마음 중심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마음 중심의 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할 수 없을 만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에게 있어야 할 것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지금 있는 것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름답고 멋진 말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지금 기도하는 줄도 모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신도 헌신예배가 있었답니다. 부동산중개소를 하는 여신도회장이 하도 바쁘게 사는 나머지 그 날이 여신도 헌신예배인지도 모르고 나왔습니다. 들어보니까 헌신예배라 놀라서 갑자기 단상에 올라가 사회를 봅니다. 간신히 묵도를 마치고 찬송을 부르는 시간입니다. 이때 여신도 회장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같이 112동 1003호를 부르겠습니다”. 평소에 기도는 안하고 부동산만 하다 와서 찬송가를 아파트 홋수로 착각한 것입니다. 다음에 여신도 총무가 기도를 시작하는 데 뭔가 부시럭 부기럭합니다. 깨알같이 써온 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더듬거리고 읽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 날아갔습니다” 합니다. 교인들이 눈을 뜨고 보니까 뒤에 있던 선풍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간 것입니다. 그때 예배도 날아가고 기도도 날아가고 은혜도 날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마음의 중심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써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쓰는 과정에서 준비가 되고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대표기도할 분은 주보에 자기 이름이 나왔으면 적어도 일 주일 전부터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쓴 유명한 이 엠. 바운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중기도는 짧을수록 좋고 개인기도는 길수록 좋다”. 쓰지 않고 더듬거리는 것보다 써서 잘 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쓰나 안 쓰나 그 속에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마음의 기도는 진심의 기도입니다. 마음에 없이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듬거리더라도 진심으로 하는 기도가 낫습니다. 마음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마음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라”. 마음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들으신다.
예수님이 가르친 마음의 기도의 세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들으시고 아버지가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6절을 볼까요?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합니까?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저희 집에 전기가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아무리 만져도 안됩니다. 저는 전기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신학과 나왔습니다. 그래서 전기과를 나온 사람을 오라고 해서 스위치를 만지게 했더니 금방 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제가 단상에 있을 때 저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저는 그가 전기 고칠 때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피장파장입니다. 스위치가 그렇게 중요한지 처음 알았습니다. 스위치가 고장나니까 일체 전기가 안 들어옵니다. 그가 간 후에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스위치가 전기를 가져왔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스위치는 전기가 들어오게 하는 통로였습니다. 스위치는 전기 자체가 아니라 전구를 동력원과 연결시켜 주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위치가 없었다면 전기도 안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스위치가 전기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스위치가 기도라고 믿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원천은 전기자체에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 자체가 능력은 아닙니다. 기도는 하늘의 능력을 끌어오는 영적 스위치입니다.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했습니다.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열심히 기도하는 나보다 열심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의 열심을 믿는 것보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언제나 기도할 때 초조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혹시 못 주면 어떻습니까? 사65:24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의 말이 마치기 전에 내가 들으리라”. 여러분은 이 말씀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풍성한 아버지입니다. 그는 언제나 줄 수 있는 풍성한 아버지요 언제나 주려고 준비하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여러분은 언제나 받게 되어 있습니다.
7-8절도 보실까요? 마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에 “중언부언”이란 말이 나옵니다. 중언부언은 “많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유대인들의 기도의 단점은 길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모네 에스레”라는 기도입니다. 이 말은 “18”을 의미하는 데 기도의 가짓수가 18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기도처럼 가정에서 회당에서 예배가 마칠 때마다 드리는 데 주기도문의 18배 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기도문의 18배나 긴 기도를 매일 하니 얼마나 길겠습니까? 문제는 길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길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7-8절의 키워드는 “듣는다”는 말입니다. 마6:7,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말을 줄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쓴 유명한 이 엠. 바운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중기도는 짧을수록 좋고 개인기도는 길수록 좋다”. 내가 말할 수 있지만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서론으로 하는 말입니다. 내 말이 본론이 아닙니다. 내 말은 하나님의 말을 듣기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고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기도를 내 말만 하고 마는 것으로 아느냐 내가 말한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에 따라 기도가 달라집니다. 내 맑만 하는 것을 주문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듣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주문이 염불입니다. 어릴 때 스님들이 염불하는 것 많이 보았는 데 그들은 자기 말만 하고 맙니다. 염불한 후 조용히 침묵하며 무엇인가 듣는 스님들이 없습니다.
우리도 내 말은 너무 길게 하고 하나님의 말은 안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듣든 말든 열심히 쏟아붓고 때가 되면 일어납니다. 일종의 최후 통첩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사업 어려워요. 알았죠?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 다음에 봐요. 끝”. “하나님, 내 아들 장가가야 해요. 알았죠? 며느리감 찾아 놓으세요. 지금 버스 떠나요. 끝”. 이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자기 말만 하고 안 듣는 것, 이것을 성경을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기도는 인간이 어떻게 기도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어떻게 들으셨는가를 보여준다”.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듣고 나중에는 내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묵상”이라고 합니다. 시19:14,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님의 눈에 들게 하소서”. 묵상은 내 말을 하나님께 쏟아붓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기도입니다. 리쳐드 포스터는 그 묵상의 기도를 몇 단계로 추천합니다. 첫째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정하라. 둘째 성경을 펴고 짧은 본문을 여러번 읽으라. 성경을 많이 그리고 빨리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화하며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성경을 읽을 때 분석하거나 연구하지 말고 단순하게 받아들이라. 프란시스 드 살레의 말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분석하기 위해 읽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읽을 때 그것을 묵상이라고 한다”. 필립 얀시는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말했습니다. “묵상은 성경을 사용하기 위해 읽지 않고 수용하기 위해 읽는 것이다”. 성경을 수용하는 것, 마음에 담는 것,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이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수용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옥토로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흙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수용성, 잘 받아들이고, 부식성, 잘 썩고, 흡수성, 잘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납니다. 내가 길고 하고 짧게 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듣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그랬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하루 24시간 기도했답니다. 교인 하나가 물었습니다. “수녀님,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아서 24시간이나 기도합니까?” 테레사가 말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요“. ”그러면 하나님도 말씀을 많이 합니까?" 테레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듣지요”.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기도는 내가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고 가장 좋은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음성을 내가 듣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한번만 서는 것이 아니라 평생 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 너희는 은밀히 기도하라. 골방에서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들으시리라“.
주의 기도, 나의 기도
마 6:5-13 / 이병일 목사
예수님은 산상설교 중에서 유대인의 자선, 금식 그리고 기도에 대하여 비판과 함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해마다 지키는 신년축제(Rosh Hashana)는 열흘간 계속되는데, 그 마지막 날은 대 속죄일(Yom Kipper)이라고 합니다. 새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먼저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하느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기도와 구제에 전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에는 의무적으로 금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신앙생활의 3대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제(선행)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기도는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그리고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바른 관계(즉 자기부인)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을 기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샴마이 학파) 랍비들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완전히 사악한 사람의 이름은 죽음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하는데, 그들의 이름은 아무 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신년 축제 기간 동안에 열심히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년축제는 의로운 사람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보상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자칫 형식적이거나 위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월요일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목요일에 내려왔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금식일에 병든 유대인이 음식을 먹게 해 달라는 허락을 얻기 위하여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건강이 더 나빠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랍비의 집에 들어갔을 때 랍비가 점심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극 자기가 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랍비님, 저는 아픈 사람인데. 오늘 제가 금식해야 합니까?” 랍비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물론 당신은 금식해야 합니다.” 그 유대인은 그냥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결국 용기를 내서 다시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랍비님, 랍비님은 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저에게 금식하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까?” 랍비는 웃으며 “나는 랍비에게 물을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라고 말하면서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바보는 너무 많은 질문을 한다.” 입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성전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고, 회당은 성서를 공부하는 곳이었으며, 기도는 매일 집에서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듯 하거나 남들에게 나의 의로운 행동을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점점 거리와 회당과 성전으로 나와서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따라가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빈말을 계속하는 것을 이방인들의 기도의 특징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 바알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1열왕 18:26)라고 외쳤습니다. 헬라인들은 기도할 때에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많은 신들의 명칭을 동원해서 기도함으로써 신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신에 대한 이름에 많은 수식어를 붙여서 반복하는 것은 이슬람교나 힌두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이 죄를 소멸하는 불과 같다고 여깁니다. 우리의 언어적 표현으로는 그것을 공염불이라고 하죠. 위선자는 자기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말을 많이 하고 빈말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거죠. 종교적 행위의 형식화와 외식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라베누 하코데쉬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께 자주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라베누는 “옳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왜 옳지 않은가?” “사람은 하느님과 너무 친해져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라베누는 다시 황제를 방문했습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오! 능력 많으신 황제여, 평안하소서!” 라고 소리쳤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가면서 다시 “오! 능력 많으신 황제여, 평안하소서!”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화를 내면서 “웬 야단이냐? 분명 너는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 것이지?” 라고 말했습니다. 라베누는 대답했습니다. “오 황제시여, 한갓 피와 살을 가진 황제께서 너무 자주 인사하는 데 대해 싫증을 느끼시는데 하물며 왕 중의 왕께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의 기도”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모임에서 수시로 주의 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성서마당을 통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오해하기 쉬운 부분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번역상의 문제인데, 아직도 잘못 외우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에서는 주격 조사 이가 처소격 조사 에로 오해되어 “나라에”로 잘못 읽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의”를 생략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수정하는 길은 “당신의” 혹은 “하느님의”를 “나라” 앞에 번역하고, 주격 조사 “이”를 “가”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라”는 ‘통치, 지배’를 뜻하는데, 이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의 다스림입니다. “이름”, “뜻” 앞에도 “당신의”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번역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에서 “오늘”은 ‘하루 24시간’을 의미합니다. 자칫 우리는 “오늘의 시대, 최근의 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정확한 의미는 바로 “오늘, 혹은 지금”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용할”은 “필요한, 존재에 필수적인, 오늘을 위한, 다음날을 위한” 등의 의미로써 생존을 위하여 절박하게 요구되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심 같이”에서 죄는 죄이면서 동시에 빚이 될 수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빚도 경제적인 빚뿐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짐을 지고 있는 것, 다른 사람이나 생명들에게 빚진 자로 사는 삶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죄라고 하거나 빚이라고 하거나 우리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대개”라는 말은 원래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 ... 때문이다”(hoti)의 의미입니다. 이말은 “대체로”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 하느님께 간구한 이유, 즉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의 실현, 일용할 양식, 죄의 사함, 시험과 악에서의 보호를 간구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하느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신앙의 총괄적 고백이며 찬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남성입니다. 여성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하느님의 이름이나 성별이 남성이 아니라 통성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의 기도를 드릴 때에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서 드리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를 드릴 때에 위선적이지 않게, 중언부언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유대교 랍비들이나 세례자 요한처럼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여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이제는 하나의 주문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경계했던 중언부언에 해당하는 기도,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도의 의미를 잘 모르고, 간절함이 없이, 삶에 대한 성찰 없이 드리는 기도는 공염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랍비가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하기 전에 온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각 종교에는 일정한 기도문이나 주문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주의 기도나 성모송을 낭송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쉐마를 외우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최제우는 21자 주문을 만들어서 그것을 정성으로 외우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모든 일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하느님의 영기가 지금 저에게 크게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를 체득할 수 있고 하느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저절로 깨달아진다.> 불교에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민족종교에서는 천부경(天符經)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삶에서 자주 사용하는 주문(呪文)이 있습니까? 그 주문은 때로는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한 6개월 동안 2-3시간 정도 잠자면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책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좋아서 그랬습니다. 대학(신학과)에 다닐 때에 한 주에 네 다섯 권의 책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거의 잠을 자지 않았는데, 아침에 학교에 갈 때에 ‘잠을 너무 많이 잤어, 이정도면 충분해’ 하면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겁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그렇게 적응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위기 상황이라든가 징크스를 벗어나기 위한 주문이 있을 것인데, 그 때에는 간절한 마음이 그 주문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그 마음, 그 열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은 어떠하든지 그 중심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기도하거나 주의 기도를 드릴 때에는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마음을 모아서 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와 공염불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마음,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심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방향과 목적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느냐? 기도의 목적과 방향이 나를 향하여, 나의 욕망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도의 목적과 방향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을 때에 진정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거나 너무 흔한 것의 존재를 자주 망각하게 됩니다. 주의 기도도 너무 자주 외우기 때문에 그 뜻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여 삶을 성찰하게 하는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의 기도에 있는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는 삶을 살면서, 때가 되면 열심히 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를 말할 때에 “---한 사람은 주의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 라고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요즘에 인터넷에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라는 제목으로 조회 수가 많은 글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점이 많습니다. 인용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위의 글에서처럼 우리는 때때로 주의 기도를 나의 기도로 바꾸어 생각합니다. 입으로는 주의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현실과 타협하거나 부패한 현실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진정한 마음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드립시다. 기도는 입으로 나오지만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리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평안하십시오. 다가오는 한 주간의 삶에서 부딪히는 관계들 속에서 당당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가는 그 곳,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그 곳에 우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진지하고 신실한 삶은 그 자체로써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이며,
우리가 입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성실한 우리 삶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과 거룩한 영의 역사와 소통하심이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는 당신의 모든 아들딸들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당신의 기도도 응답될 수 있다(1)
마 6:5-13 / 민경설목사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만 가지를 받았다 해도 누릴 수 없습니다. 성도의 특권은 ‘기도’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그렇습니다. 기도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하늘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유일하게 하늘을 움직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특권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렵다면, 힘들다면, 미래가 불투명하다면 기도를 하십시오.
우선 일반적인 기도의 원리를 알아보겠습니다.“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첫 번째, 기도에는 자격이 있습니다.기도를 안하는 이유는 기도의 자격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기도할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땅에 있지만 해답은 하늘, 즉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는 계십니다. 내가 있는 어느 곳이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한 이유가 바로 문제가 땅에 있지만 그 해답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체적인 기도의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외식하는 기도를 피해야 합니다.“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5)
‘외식’이라는 말은 ‘위선자, 연기자, 가면을 쓴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꾸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기도는 절대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람을 인식하면 안됩니다. 대표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두의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과 일대일의 통로를 열어야 합니다.
두 번째, 골방기도를 해야 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골방기도는 물리적으로 차단된 곳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세상과 차단된 기도를 의미합니다. 은혜를 받고 기도를 하면 골방기도가 됩니다. 나의 감정, 기분, 느낌에서 벗어나야 골방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때에나 말씀을 듣고 나서 골방기도가 쉬워집니다.
세 번째, 하나님 뜻대로 구했다면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많이 기도 할수록 좋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다면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승자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당신의 기도도 응답될 수 있다(2)
민경설 목사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 문명은 도전과 응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인생에서 늘 도전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도전이 오는 것 자체보다 도전에 대해서 어떻게 응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응전하면 복되고 긍정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응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전할 때 어떠한 상황에도 축복과 승리하게 됩니다. 복된 응전은 심령의 은혜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평을 했기 때문입니다. 불평을 하는 것은 은혜의 단비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알고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불평이 아닌 복된 응전을 할 때 축복이 옵니다. 심령 속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어떠할 때 은혜의 단비가 옵니까? 바로 기도할 때 입니다. 세상이 어려워도 내 심령만 잘 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5-26) 무엇으로 은혜를 꾸어주겠습니까? 남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은혜를 꾸어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꾸어줄 때 하나님은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할 때 응답이 됩니까?
첫 번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무엇을 기도하더라도 기도한 목적이 내 욕망이나 꿈, 성공을 위한 것이면 안됩니다. 기도가 응답이 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구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된다, 잘라졌다,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즉, 기도할 때 기도가 응답이 되면 누가봐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가나안 땅에 못갔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누가 나를 거룩하게 나타낼 수 있는가?’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두 번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하나님의 지배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위대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하며 삶의 자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세 번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하늘은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지옥은 마귀의 뜻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되고, 마귀의 뜻을 따르면 지옥이 됩니다. 세상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전도입니다. 전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나라와 권세와 영광
마 6:5-13 / 박조준 목사
우리는 그 동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일 아침마다 한 구절씩 생각하며 기도했습니 다.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에 오늘 아침 주기도의 마지막 절을 생각하기 전에 그 동안에 생각한 것을 한번 더듬고 지나가는 것이 좇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세계 인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인구가 이 추세로 증가되고 과학이 현재의 비율로 발전하게 되면 세계의 형편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 지구 는 곧 인구 과잉 상태가 될 것이고 자원들은 고갈 상태가 될 것입니다. 전대 미문의 식량 부족 상태가 일어날 것이고, 오염 분자들은 우리의 폐 속에 침투하고, 우리의 시력이 더욱 약화되고, 우리 몸에는 독물이 투입되고, 기상에는 변화를 일으키며, 환경은 폐허되고 말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한층 더 심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 나며 공갈의 목적으로 핵무기까지 사용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사회학자는 말했 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대로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필요 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긍지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을 때 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 나 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 첫 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인간이 긍지를 잃어버린 상태, 그래 서 자기 격하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적인 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자부심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자부심에는 두 가지가 있 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자부심입니다. 나 혼자서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는 자세입니다. 이 런 자세는 자기 파괴적인 오만입니다. 겸손의 정반대입니다. 성경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 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 인 자부심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일깨우셨던 창조적인 확신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강 한 긍지와 확신감이 있으면서도 감사와 감격 그리고 겸손한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 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말했습니 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자부심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긍정적인 자부심과 확신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위엄과 긍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자부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는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죄가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함께 동행하므로 장차 우리가 얼마나 위 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나를 따르라. 네가 장차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 고 하셨습니다. 지금 은 고기를 낚는 어부에 불과하지만 장차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놀라운 일을 하게 될 것을 내 다보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네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고 하 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 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을 것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구속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자존심이 고무되고 유지 될 때 문자 그대로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재를 보시지 않으시고 장래를 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은 우리를 겸손한 자리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겸손해지지 않는 한 참된 그 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가 완전히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 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이 계속 배워야 하는 학생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 히려 모든 배움의 과정을 아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신앙 생활을 한 지 오랜 사람, 교회의 책임을 지고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 생활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넘어집니다. 좀 서툴러도 앞으로 나아가면 넘어지 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기술이 능해도 나아가지 아니하면 얼마 안 가서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 는 언제나 해석의 오류에 빠질 수가 있고, 우리의 판단이 완전치 못하며 아직도 우리의 지성이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사실 건전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만이 나는 불완전하다.
내 생활 중에 어떤 부분은 변화해야만 한다 고 시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문 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한 사람들은 내가 틀렸다 , 나는 아직도 더 배워야 해 , 내가 내 자신의 생각에만 집착했지 하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 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겸손이 없이는 심령의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 도는 우리에게 닥치는 여섯 가지 부정적인 요소를 치유하는 주님의 적극적인 방안입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 열등감을 해소시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열등감이 해소 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부정적인 자세로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 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영광스럽습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위대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을 개발할 의무가 우리 하나 하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 어떤 계획, 어떤 비결을 갖고 계시며 그것이 모든 인간을 포용 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명예로운 봉사의 기회는 다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기회가 주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만큼 작은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봉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의 모든 좌절감에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3.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는 모든 인류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인 우 리에게 위대한 꿈, 고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을 나 자신에 게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안해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처참한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만큼 우리 심령에 파괴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은 우리의 열등감만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불안감도 치유해 주십니다.
4.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시고. 이 기도는 우리가 품고 있는 원한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도 잘못 하고 상대방도 잘못을 범합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납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원한이라는 부정적인 감 정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실 식량 문제도 아니요, 공해 문제도 아니고 죄의 문 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시 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무슨 죄라도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때 하나 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5.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이 세상은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재난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무서운 유혹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 나 우리에게 삶의 정렬이 있을 때 욥처럼 시련을 이길 수 있고, 요셉처럼 유혹을 이길 수가 있 는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이 되고 통과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말씀은 우리를 공포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Gerald Gampolsky 박사는 이 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두 가지 감정은 사랑과 미움이 아니고 사랑과 두려움이 라 고.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시 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주기도는 우리의 열등감, 좌절감, 죄의식, 불안감, 원한 그리고 공포심을 몰아내고 그 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님으로 모실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제 주기도문의 마지막 말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찾아보았으면 합 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땅을 찬양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늘과 땅의 왕권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있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 나님께 모든 인류 역사의 운명을 지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모든 인간이 그 앞에서 정복당하여 무릎을 꿇게 될 것을 확신합니까? 빌립보서 2장 9절 이하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 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 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경외와 환희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이 하나님이 우 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는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고 따라서 마지막날 우리를 헤아리실 통치자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만물이 다 그의 힘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 심령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넘치는 존경심이 솟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 그 리고 행동이 그리스도인다워지려고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가 환희와 찬양으로 끝을 맺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인간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안 계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 인격의 완전함과 위엄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대함에 대하여 가 슴 벅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권세와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인간 의 행복을 위하여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께는 우리가 찬양 드리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일을 소홀히 할 때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게 되며 하나님의 기쁨을 빼앗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찬양을 기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호산나 를 부르며 찬양 했습니다.그때 바리새 사람 가운데는 예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대하여 주심에 있어서 우리가 그의 선하심과 위대하심과 은혜로 우심과 자비하심의 영광을 이해할 때에야만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샘이 솟아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인 우리와의 관계는 아주 큰 비밀입니 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사랑을 맛본 사람밖에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신비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이와 비슷한 관계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 게 조용히 와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 부모가 그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부모의 마음은 활짝 열려집니다. 부모는 자녀가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볼 때 크게 감동이 됩니다. 그래서 그 부모 는 그 자녀에게 이전보다 더 훨씬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게 됩니다. 이것은 부모가 그 자녀에게 받은 찬양과 존경에 대해서 감격해서 베푸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와 부모 사이에 는 축복 위에 축복을 주는 상호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와 함께 하는 성도의 교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십니다. 언제나 그의 자녀인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게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축복은 자손 만대에 이르고 형벌은 삼사대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보답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찬양과 사랑과 감사를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서 기도의 종결을 지으실 때 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고 기도하라 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은 완전 무결하고, 탁월하고, 숭고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인격과 성품에 가히 비교할 수 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놀라운 것은 아버지께서 겸손히 몸을 굽혀서 그의 참 형상을 진지하 고 철저하게 갈망하는 영혼에게 그의 영광의 일부를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시인 다윗은 그의 내적인 열망을 시편 17편 15절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했습니 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리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에는 모든 영광과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이 영원히 존재합니 다. 우리에게서 조그마한 선행, 고결한 충동, 생각의 관대함 혹시 칭찬 받을 만한 속성이 있다 면 그것은 전혀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의 인격과 그 성품이 원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는 말씀으로 기도를 끝마친 것이 조금도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은 항상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베푸시는 축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 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롭습니다. 그 축복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받을 수도 없습니 다. 쉬임없이 우리에게 계속 축복이 쏟아집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을 때도 하나님은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그의 형들은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중단된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나 조건이 하나님의 축복 의 줄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집에서 총무 일을 보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 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고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요셉에게 임하는 축복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무 한하신 축복으로부터 공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이처럼 무한하신 축복을 받았습니까? 단순하지만 진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처지와 형편에 이르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에게는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때 하나 님의 마음이 얼마나 버젓하고 흐뭇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옛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 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날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날입니다. 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한 날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날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감격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영광과 그 인격 을 반영하는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끼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축복이 우리 모두 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과 하나님의 응답
마 6:5-8 / 인명진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 신 말씀입니다. 7절 말씀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는 말씀은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될 수 있 는 대로 많이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그 말씀을 따르기가 어려웠을 텐데 이 말 저 말 하지 말고 짧게 하라 는 이 말씀은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8절 말씀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 참으로 고마 운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가까이 사는 사람도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남편은 아내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는 부모가 부모는 자 녀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진심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세세히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다 아신다면 기 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신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말 저런 말 하지 만 다 아신다면 일부러 아뢸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기도하기를 힘쓰지 못하 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고마운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 기도하지 않아서 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내 모든 간구를 알고 계시다고 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6장 32절에 보면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 니라 그러므로 구태여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쁘고 분주한 우리에게 왜 기도하라 기도하라 하는 것일까요? 제가 지난주에도 평생을 살아가면 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안 해도 되는가 헷갈 리고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듭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6장 9절에 있습니다.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니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9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아시니까 기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6장 32절 말씀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아시니까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33절 말씀 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생각하는 내게 필요한 것, 꼭 이루어져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 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필요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같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어도 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뜻을 들어주시라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 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듯이 우리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아 무리 내 뜻대로 살기위해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날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하였습니까? 여러분의 뜻대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뜻대로 살아 보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 고 맞추어 갈 때 우리 인생이 평탄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내 뜻대로 사 는 인생은 고달프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을 거슬러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자전거가 바람을 등에 지고 달릴 때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등에 지고 살 때 우리 인생이 행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 힘들고 어 려운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 살겠다는 고집대로 인생을 살기 때문 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살아갈 때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것입니다. 옛말 에도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하다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 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쓸 데 없는 기도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 인지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포기하 고 하나님의 뜻에 맡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나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에 맡기기 위해서 기도하 는 것입니다. 잘난 척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그 인생은 고달프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님의 뜻을 거슬러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 기도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근에 많은 가전제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능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아무리 편리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에게 잘 배우고 설명서를 잘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가 지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편안한 여행을 하려면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여행과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여행 할 때도 그 나라의 기후는 어떤지 사전에 다 알고 준비하고 가야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먼저 다녀온 사 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준비를 해야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 르는 인생길을 가면서 준비하지 않고 안내를 받지 않고 무작정 간다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 다. 바쁘다고 귀찮다고 무턱대고 아무 생각 없이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대해서 잘 아시는 하나님께 설명을 듣고 길을 떠나야 합니다. 바쁘다고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인생길을 가는 사 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가이드인 하나님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길을 물어보고 귀를 기울 여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면서 왜 주시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 리의 큰 착각은 내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내가 필요하 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다. 나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 님께서는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 고 하는가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 음성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조용합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때문 에 무척 시끄럽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 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귀를 기울여서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입 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니 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는 쓸데없는 기도이며 불필요한 기도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 창세기 40장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 이 감옥에서 자신의 모든 억울한 사정을 아시는 주님께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 니다. 감옥에서 나가는 것이 요셉이 필요한 것이었고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두신 뜻은 총리대신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꿈 꿀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빨리 감옥에서 나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요셉 이 총리대신이 되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요셉과 하나님의 뜻이 달랐습니다. 요셉이 자기가 원하는 것 을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응답하시지 않 으신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것이 요셉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셉의 기도를 들어주셨 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는 있었을 것이지만 다시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던지 평범한 인생을 살았 을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른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로가 꿈 꿀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내 뜻대로 함부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잘못 기도한 것 이 이루어지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감옥에서 내보내달라는 요셉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요셉은 절대 로 총리대신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경솔히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 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요셉에게 가졌던 것처럼 우리들 모두에게도 근사한 계획을 멋진 플랜을 가 지고 계실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와 축복의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는 하나 님의 그런 계획을 모른 채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내 고집대로 살려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무 시하고 그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든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멋진 계획을 가지고 풍 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뜻 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경솔하 게 섣부르게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무엇을 먹고 입을까 그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요셉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것처럼 요셉에게 아름다운 위대하고 큰 뜻을 가졌던 것처럼 여러분을 향 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십 시오.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뜻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시길 바 랍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2)
마 6:5-15 / 이응효 목사
세계 모든 종교인들은 나름대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엎드려 절하며 기도합니다.
유대교도들도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 그들이 통곡의 벽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교 스님들도 동안거, 하안거라고 하여 일 년에 두 번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고, 매일 새벽에 예불을 드린 후 기도하고, 일반 불교도들도 절을 찾아 오랜 시간 기도합니다.
차마고도 라는 다큐맨터리에 나온 것 처럼 라마교도들도 나름대로 무릎이 닮도록 기도합니다.
힌두교도들도 매일 아침 그들의 사당에 가서 기도하고 붉은 점을 찍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기도를 잘 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바로 기독교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모든 종교의 신들은 헛것이요 저들이 섬기는 우상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헛된 것들이요 저들이 기도하는 기도는 응답 받을 수 없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신데도 기독교인들이 이런 하나님께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떠합니까?
신문에 보니 밴쿠버 올림픽 빙상에서 5000미터 은메달 10000미터 금메달을 딴 이승훈 선수는 가족들이 모두 창신성결교회에 출석하는데 할머니 이갑진권사님은 매주 토요일 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하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담임목사인 이승복목사는 이승훈선수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젊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두 개를 딴 이정수선수는 4대째 신앙집안으로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하늘나라에 황금종이 울린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자체가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첫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였고,= 하나님의 명예,
두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였으며,=하나님의 백성구원
세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안식
이것은 우리들이 기도할 때 우선적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42:8절에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 생의 진정한 풍요함과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세가지 필수적인 것을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1)먹고 살아야 할 양식 2)용서로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 3)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관심이 전인적이며, 포괄적이라는 것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하나님은 땅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육신의 양식을 의미하지만, 영의 양식 즉 생명의 말씀도 구하라는 뜻도 됩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사치와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4: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시어 우리들이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16:18절>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너무나 잘 아시고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십시오. 오늘 필요한 지혜 오늘 필요한 건강 오늘 필요한 사람들, 오늘 필요한 물질, 오늘 필요한 평안, 오늘 필요한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렇지만 이 기도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1)기도의 책임
주옵소서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지만 우리들은 기도의 책임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그런 세세한 일까지 신경을 쓰실 수 있겠는가? 라고 합니다.
창세기28:20절에 야곱은 이렇게 기도합니다.“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이 땅에서 93년 8개월 5일을 살면서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George Maller)는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니 반드시 지키심을 믿고 날마다 이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야 감사의 자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도 감사하셨습니다.
로버트 번스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있는데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먹을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먹을 것도 주시고 먹을 수 있는 능력도 주시니 감사합니다.”
2)노동의 책임
공중에 나는 새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도 깊이 땅속에 뿌리를 박고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잠언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3)구제와 선교의 책임
우리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어 가지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에베소서4:28절 “너희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
이기주의자는 정신적 영적인 불구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는 자가 되라고 본을 보여 양육하여야합니다.
옛날에 어떤 분은 “너희 지갑 끈을 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기도문을 외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본문에 죄 라는 단어는 부채들 혹은 빚들이란 단어로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빚지면 괴롭습니다.
은행에서 토지 가옥 증권 등에 가압류하여 꼼짝 달싹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채업자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며칠 전 일억을 사채로 얻어 쓴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가 빚진 분의 소유인 시가 60억 상당의 부동산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빚진 분은 원통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빚지면 마음에 무거운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악의 빚진 자들입니다.
김석균씨가 지은 복음성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1. 먹물로 칠한 내 육신을 주님이 희게 하셨네.
십자가 보혈 증거 하라고 주님이 살리셨네.
2. 평생 갚아도 빚진 자 되어 주님의 빚진 자 되어
주님 가신 길 택하였건만 눈물만 솟구치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욱 마다 모두 죄 뿐입니다.>
영원히 갚을 길 없는 빚/ 도저히 지불 불가능 상태/ 주님의 생명의 피로 갚아주심/ 갈보리 그 보혈의 능력으로 다 갚아주심/ 오! 보혈의 능력/
사해주셨다는 말의 원어는 <쓸리하> <나사> <키페르>라고 되어 있는데
1. 제거해 주셨다. (이사야38:17절) 수술해 버리고 쓰레기 버리듯 버렸다는 뜻이고,
2. 덮어 버리셨다. (시82:5절) 페인트 칠하듯 덭어 버리셨다는 뜻이며,
3. 기억하지 않으신다. (이사야 43:25절) 하나님의 기억에 없다는 뜻이고,
4. 원 상태로 회복시키셨다.(이사야44:22절) 처음 창조 때 처럼 완전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목욕한 자들로서(요13:6~8절) 우리의 과거 현제 미래의 모든 죄는 용서함 받았지만 목욕한 자들도 매일 발을 씻는 것처럼 매일의 삶속에 죄와 실수와 허물들을 고백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요한일서1:9절)
그래야 하나님과 막히지 않고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단 한 가지 전제가 따라 붙습니다.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일만 탈란트 즉 갚을 수 없는 나의 빚을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뉴욕주에 살고 있던 로즈웰 멕킨타이어 라는 젊은이가 징집되어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병대에 소속되어 전투에 출전하였는데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다 잡혀 군법회의에서 총살 언도를 받았습니다.
로즈웰이 사형을 기다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링컨대통령에게 눈물의 탄원서를 보내었습니다. 대통령은 군대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뉴욕주 제3기병대에 복귀하여 제대할 때 까지 성실히 군 복무한다는 조건으로 탈영한 엄청난 범죄로부터 사면한다.”라고 사면을 허락하여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링컨의 얼굴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 표구로 만들어 걸어두고 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갚을 길 없는 용서를 받았으니 마땅히 내 이웃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다음에 본문 14,15절에 다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고 하시어 기도 응답에는 반드시 용서가 필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직후 독일은 민심이 흉흉하였습니다. 어느 농촌마을의 농장에 무장한 강도들이 들어와 총으로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달아났습니다. 순찰차가 총성을 듣고 달려와 보니 가족들 가운데 맏아들이 다행히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강도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맏아들은 살아서 사업가로 성공하였습니다. 20년 후 가족들을 살해한 건달들 중 한 명이 복역기간을 끝내었지만 그를 맞이할 가족들이나 후견인이 없다는 이유로 당국은 그를 출소시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맏아들은 후견인을 자청하여 청원서를 보내어 그 사람을 출소시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저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저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덕 얼렌드슨 이란 분은 3년 전 전셋집을 떠나 이사하려할 때 그 집을 망가뜨렸다고 집주인이 고소를 하여 법원에 불려 다니면서 억울하게 돈을 물어주어야 했습니다. 그 후 그 집주인에 대한 기억이 날 때 마다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그에게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하고 그 파괴적인 미움을 버릴 깨 비로소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우리 이웃과 화목하여야 합니다. 이웃의 허물이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는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한 마귀의 유혹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마귀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1)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이란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것이므로 죄 사함 받은 후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곧장 전날에 범했던 죄 속으로 떨어져 고민하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천하장사 삼손과 성군 다윗도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고, 솔로몬도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심지어 마귀는 주님도 유혹하였습니다.
시험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적 의미의 시험 이것을 희랍어로 토기마죠 라고 합니다.
즉 테스트 혹은 트레이닝 이라고 하는데 이 시험은 성숙을 위한 시험입니다.
김연아선수나 모태범 이승훈 같은 선수들은 국내에서도 여러 시험을 거쳐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험은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실력 향상과 성숙을 위한 것이므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다음 파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희랍어로 페이라죠 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emptation 이라고 하는 유혹입니다.
F.B 마이어는 “하나님은 우리를 오르게 하기 위해 시험하시지만 사탄은 우리를 내려가게 하기 위해 시험한다.”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요한일서2:15~16절에는 사탄의 세 가지 무기가 나오는데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 인생을 망치고 비참한 최후를 하게 되었습니다. 롯의 부인, 아간, 게하시, 가룟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돈을 사랑하는 약점을 이용하여 넘어뜨렸습니다. 삼손, 다윗, 솔로몬은 이성을 통해 유혹하여 넘어뜨렸습니다.
시험은 나를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잠재된 욕심 미움 시기 질투 원망 분노 등에 불을 지르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시험은 세상의 환경을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유혹하는 장소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들 사업상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그런 장소에 들어가 덧에 걸려들고 맙니다.
시험은 사람을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동창회 모임에 가서 친구 잘못 만나 춤바람 난 주부들, 교회 안에서 사람을 통해 마귀는 시험하여 믿음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주차장에서 주차문제로 혈압 올라 교회 안 나온다고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식당에서 집사가 새치기 한다고 하면서 시험 들어 교회 안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보고 시험에 든 것입니다.
2)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 교역자들이 매일 오후 예배실을 돌며 기도할 때 드리는 두 번 째 기도가 10분 동안 사탄을 대적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너무 중요한 기도입니다.
지난 1일 대전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집단 폭행 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5일에는 대전의 또 다른 중학교에서 여중생들이 같은 반 친구를 5시간 동안 도심 속을 끌고 다니며 집단 폭행하고 옷까지 벗기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자 아이들의 심성이 포악하여져 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어 타락시킵니다.
중학교 졸업식에서 선배들이 졸업생들을 위협하고 폭행하면서 남녀 학생들의 옷을 강제로 모두 벗게 하고 바닥에 굴리고 기어 다니게 한 영상이 인터넷에 실려 대통령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근절을 지시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다가옵니다.
악한 사탄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드려야만 합니다.
1)이 세상은 시험으로 가득 찬 세상이고 악한 마귀의 권세아래 있습니다.(엡6:12절)
2)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3)시험들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거부해야 합니다.
4)언제나 매일 성경으로 묵상하고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5)나를 의지하지 말고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온 마음을 다하여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고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4.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늘나라와 세상나라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신하시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영광이 나타날 것임을 확신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아버지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다시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영원하신 주님의 나라가 도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땅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면 됩니다.
은혜의 보좌로 인도하는 기도
마 6:5-8 / 이정선 목사
한 여자가 달밤에 장독대 위에 죽을 한 그릇 퍼 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돼서 물었습니다. “여보, 다른 사람들은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한다는데, 당신은 왜 죽을 퍼 놓고 기도를 하나요?” 그랬더니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잖아요?”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지속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쁘고 시간이 없는 가운데서도 성경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적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삶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성장할 수가 없어요.
말씀이 영적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적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음식물 섭취를 잘 해도 사람이 살아 있으려면 숨을 쉬어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말하는데, 숨 쉬는 것을 멈추거나 또는 힘들다고 숨 쉬는 것을 쉬었다가 하겠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필요할 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기도에 대한 개념이 바로 잡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정한수를 떠 놓고 비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죽기 살기로 기도하다가도 살 만해지면 기도를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르는 아이가 저에게 와서 아빠라고 부르면서 학교 등록금을 내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기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기도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히 4:15-16).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막혀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막혀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것도 일 년에 딱 한 차례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 있는 인간의 죽음 대신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갑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법궤 뚜껑에 피를 뿌립니다. 그 법궤 뚜껑을 속죄소 혹은 시은좌라고 불렀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곳, 또는 은혜를 베푸시는 보좌라는 뜻입니다. 그 시은좌 앞에 나아가는 것은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라도 해서 겨우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체휼하시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연약하셨기 때문에 우리 죄인들을 완벽하게 대표하실 수가 있고, 또한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완벽하게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대제사장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통하기만 하면 은혜의 보좌 앞에 우리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위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특권입니다.
시골에 사는 무지랭이 백성이 왕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런데 왕이 백성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 아무 때라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왕을 만나러 올 수 있는 신분증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왕을 만나서 꼭 무슨 청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왕과 만나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 아닙니까? 기도를 마치 의무처럼 생각한다면, 기도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특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대제사장 역할을 하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기도의 중보자가 되시는지 봅시다. 먼저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신단 말이에요.
요한복음 16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 구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을 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죄 때문이라고 했는데, 요한일서 2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대언자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변호사라는 뜻입니다. 제가 한 10년 전에 여기 뉴질랜드에서 재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새벽기도 갔다오다가 자동차 사고를 냈는데 경찰에서 재판에 회부를 했어요. 그래서 재판에 나오라고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 마디에 형량이 왔다갔다 할 판인데, 우리 수준의 영어로 재판을 받는 것이 보통 불리한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재판 시작하기 전에 좀 일찍 가서 서성거리고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는 자기가 변호사라고 하면서 저에게 변호사가 있느냐고 묻더군요. 없다고 하니까 자기가 내 변호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국선변호인 같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사정 얘기와 사고 난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판 도중에 저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그 사람이 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변호를 하는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한테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서 있기만 하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가 있단 말이에요. 그분이 누구인가 하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변호하실 것 같아요? ‘내가 이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죗값은 이미 치렀으니 그를 받아 주십시오.’ 이러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변호사를 앞세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예요. 그러니 기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겠지요?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기도하는 올바른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사람들이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족들과 함게 외식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앞으로는 절대로 외식하지 않고 집에서만 밥을 먹기로 작정했다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기도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당이나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예를 드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그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역시 바리새인들이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하겠지요. 그러다보면 바리새인들은 기도 시간이 되면 일부러 밖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은 기도를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도입니다. 결국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기도할 때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중에 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골방이라는 말을 찾아낼 수 있는데, 우리 각자가 기도의 골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집도 작고 방도 없는데 또 따로 기도하는 골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과 조용히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기도라고 해서 물론 기도는 비밀리에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누구한테 자랑할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로부터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골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표시가 나게 마련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경건하지 않은 척 살 수도 없습니다. 속으로는 경건하고 겉으로는 경건하지 않은 척 멋대로 사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속으로 경건한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도 경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모습인 것이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경건함으로 사람들의 칭찬과 관심을 끌려고 하면 그 순간 그 경건은 경건이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니까요.
또 주님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한 말 또 하고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는 한 번 한 말은 다시는 반복해서 하면 안 된다는 뜻일까요?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간절히 기도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같은 말로 반복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이란 마음에 없는 말을 형식적으로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성경에는 babbling 하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babbling이란 어린 아이가 옹알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쓸데없는 또는 의미 없는 말을 쏟아내는 것이지요. 또 다른 성경은 meaningless repetition을 하지 말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babbling이나 같은 의미가 되겠군요.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서만 실컷 떠들고 끝내버리면 그것을 기도라고 하기도 곤란하겠네요.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간구하시다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를 마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체로 기도는 내 뜻을 아뢰고 주장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기도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의 삶에서 기도가 끊어지는 것은 호흡을 멈추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고, 기도생활에 좀 더 열심을 내도록 합시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 기도할 수 있도록 힘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마 6:9~13 / 이수영목사
1.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주의를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눅4:43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도제목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이토록 소중합니까? 주기도문은 주님이 친히 가르쳐주실 만큼 기도의 본질이요, 신앙인의 목표가 되는 정금같은 기도문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간구하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2.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좋은 소식, good news, 복음(福音)이기 때문입니다.
1) 왜 하나님 나라가 복음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인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바,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산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합격하고 입학을 앞둔 때였습니다. 겨울이었는데, 광나루 역앞에서 마을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합격은 하였는데 등록금은 없고, 대구 촌놈이라 서울생활이 낯설고 막막하고, 무엇보다 ‘이제 목회 어떻게 하나’ 하는 영적인 부담감이 어깨를 꽉 누르고 있었습니다. 배도 고프고요.. 그런데 그 때 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찬송 하나가 울려 나왔습니다. 통합찬송가 541장입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예루살렘 새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주가 내게 부탁하신 모든 사역 마친 후 예비하신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빛난 하늘 그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눈물이 철철 흐르는데, 지나 가는 사람들은 힐끗 힐끗 쳐다보고.. 쳐다보든지 말든지. 중요한 것은 눈에는 눈물인데 마음에는 한량없는 기쁨이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미쳤나 하지요. 조용필의 노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아 웃고있지만 눈물이 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아 울고 있지만 기뻐죽겠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평지에서 전하셨다 해서 평지수훈이라고 전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눅6:20-2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린 자도 복이 있다. 이제 우는 자도 복이 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해도 복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주님의 이 말씀은 아멘입니다. “가난하냐 슬퍼하지 마라, 아프냐 울지마라, 배고프냐, 죽고 싶으냐, 사람들이 너를 소외시키느냐 그래도 힘을 내라 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지 않느냐. 세상 나라는 갖지 못해도 하나님의 나라가를 너희들의 것이 아니냐. ”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서 하나님의 얼굴 빛, 그 은혜의 빛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희락입니다. 위로부터 유쾌하게 하시는 기쁨입니다. 이것을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해야 괴로운 세상에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면 삶이 참 행복해집니다. 도(道) 통한 사람 같이 됩니다. 삶의 일체의 비결을 알고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 담대하게 외칠수 있는 초인이 됩니다. 사도바울의 말이지요 빌4:12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삶의 모습입니다. 달인의 경지.
우리가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존경하는 선조들의 삶이 다 이러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만, 믿음의 사람들로 거명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모든 분들의 삶에 대하여 히브리기자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분들의 현실은 참 볼품없었다는 것입니다. 눈물과 피땀 투성이, 도무지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히11:36이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분들의 삶은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당한 그런 처참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이 천사도 흠모할 만큼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어지는 말씀, 히11:14절 이하,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한 성,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늘 소망하며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 나라가 그들 삶의 궁극적인 소망의 닻이 되어서 노도 풍랑이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좌초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달려간 결과! 하늘의 별과 같은 찬란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하고 체험하였던 그 하나님의 나라, 제게도 맛보게 하신바 그 눈물 가운데 내 영혼에 새기어 주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의 빛 때문에 지금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 뿐입니까?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그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3.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 두 번째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만 제대로 된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가치관은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영적인 가치가 아니라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는 육체적 well-being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돈이 신이고 권력이 하늘이라’ 사람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강화도 모녀 살해사건을 보면서 참 이 세상 가치관을 다시 한번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웃 아주머니 아니었습니까?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졸지에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된 어린 것들 데리고 농사지으며 살아가는데 그 부인을 죽였습니다. 그 딸도 죽였습니다. 남편 잃고 슬피 우는 장례식도 가까이에서 봤을 텐데, 인간 이하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무엇 때문에! 보험금이 탐이 나서, 나이트 가서 진탕하게 마시고 놀고 즐기고 싶어서... 그 그릇된 가치관 때문이 아닙니까? 이것은 도덕성 상실이라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안됩니다. 영혼의 부재입니다. 영혼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4세기 기독교수도승 작가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에 대하여 서술한 바 있습니다. 이분에 의하며, 그 세가지 영역은 탐욕적인 영역, 감정적인 정신적인 영역인데, 이 각 세 영역에 다시 세 가지 악습을 연결시켰습니다. 탐욕적인 영역에는 음식, 섹스, 소유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안에 더 많이 집어 넣어야 만족하는 욕망입니다. 감정적인 영역은 슬픔, 화, 그리고 아케디아(권태, 나태함)입니다. 이것은 제어할 수 없는 공격성으로 나타납니다. 이 공격성이 때로 힘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하면 절망과 괴로움이 되어 자신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은 명예욕, 질투심, 그리고 오만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자만이라 했습니다. 자만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신을 높이 올려놓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비천한 모습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위치에너지를 분노로 표출하고, 절망하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어둠의 권세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내면세계입니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요? 이 세상 가치관 대로 살아가면 필경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그 죽음의 길입니다.
이러한 육체의 생각은 노도 풍랑과 같습니다. 우는 두루 삼킬자를 사자의 울음소리같이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따라가면 그 생은 파멸과 불행입니다. 이 파멸을 피하고 제대로 되고 가치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기도하는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내 심령 깊은 곳에 하나님이 거하시므로 세상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공간, 지성소가 형성되고 또 굳게 설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내면의 지성소는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한 아홉 가지 악습이 자리잡지 못하는 절대공간입니다. 안세름 그륀은 이 내면의 공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일상적인 문제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쉴 수 있는데, 이곳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들을 사람들의 권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초자아로부터, 죄의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나의 모든 행동이 상대화되며 나를 지배하는 절대적 권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만이 있는 내면의 공간,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보람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릇된 가치관에 사로잡히면 개인 뿐만 아니라 한 나라도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최근 금강산 관광객 총격사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사나움입니다. 사납습니다.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무력시위 아닙니까? 수틀리면 지금까지 호의도 아랑곳없이 하루 아침에 이빨을 드러내는 야수성과 무정함아닙니까? 또 일본 정부에 의해 자행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의 도발행위는 무엇을 말합니까? 36년동안 이름 뺏아가고 말뺏아가고 동녀들 성 노리개로, 국가의 기반인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짓밟고 망가뜨린 그 일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반성은 커녕 군국주의의 망령을 되살려서 그 기만과 사기행위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이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거짓된 역사관을 심어주어서 자기들과 같은 거짓말쟁이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주려하는 실로 패역한 위정자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최고의 가치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저 경제대국이면 되고 군사대국이면 되고....이것은 잘 먹고 잘 살면되고, 권력있으면 되고 하는 개인적 가치관이 집단화된 모습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를 모르면 사람 이하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세상 나라의 야수성과 야만성을 사기꾼 행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거저 이 사회를 개탄할 것이 아니라, 매번 분개하면서 그냥 억울해 하거나 저 나라를 저주만 할 것이 아니라 절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이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알게 하소서. 주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4.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구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나의 내면에 절대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 현실 사회와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의 역사에 있습니다. 그 근거는 10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말씀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헬라어 표현은 단순과거수동태입니다. 이것은 신적수동태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문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념이 대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나의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하나님 나라로 화하도다” 무엇입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노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정자의 각성과 지혜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그릇일 뿐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에 불과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하십니다.
누가 저 북녘땅에 복음이 전하여지고, 저들 닫혀지고 완악한 마음문을 열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누가 저 거짓되고 위선된 위정자들, 일본의 후한무치한 정치인들로부터 그 백성들을 바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갈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역사입니다. K.Barth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영만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나라의 근사치에 조차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이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는 것은 육을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ㅍㅍㅍ.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누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본문은 그것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말씀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땅은 바클레이에 의하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결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 현실로서의 땅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그 뜻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하여 윌리엄 바클레이는 세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패배적 순종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지적 순종입니다. ‘나는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마지막 세 번째는 즐거운 순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오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하나님의 지혜의 완전함과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함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모든 경우에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더욱 즐거운 순종이 필요합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을 능가하는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고 그 뜻은 언제나 그 은혜와 그 사랑안에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23편 말씀과 유비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정의, 평화, 기쁨을 최우선의 가치로 알고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이 배고프고 두렵고 죽겠다 싶을 만큼 곤고한 삶이라 해도, 이 가치관대로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실 것이다. 영원히 하나님의 집 그 나라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분의 뜻은 언제나 은총과 사랑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자, 그에게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고, 그를 통하여 이 땅 어두운 모든 곳에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야 말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 줄 알고, 그 나라를 반드시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들 되시기 소원합니다.
그래서 항상 나의 삶이 어떤 배고프고 서글픈 현실이라 해도 신령한 기쁨을 힘입어 살아가며 내가 속한 가정과 이 사회와 나라와 북한과 일본, 그리고 지구촌 온 누리에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는 신정통치, 하나님의 유토피아가 실현되고 회복되는 놀라운 일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증언하고 이를 실천하는 복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