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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23년 전 사우디 어디쯤의 면세점에서 수동카메라 FE2를 구입하셨다. 당시 가격으로 바디와 렌즈, 필터, 스트로보 등을 모두 포함해서 백 만원을 훌쩍 넘겼다는 FE2의 일습을 물려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꿈쩍도 않으시다가 "그럼 빌려주세요." 라고 이야기하자 선선히 장비들을 내 주신다.
20년 넘게 애지중지하시면서 그야말로 끌어안고 계시던 카메라다. 설명서는(분명히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을)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각각의 렌즈에 대한 보증서와 보관용 상자까지 지니고 계실 정도로 아끼시던 카메라고, 지금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전 모친께서 직장 동료들과, 혹은 이모들과 여행을 다니실 때 가져가겠다고 하실 때도 절대로 건네주시지 않았던 카메라기도 하다. 달라는 말에는 내주시기 아까웠으나 빌려 달라는 이야기에는 오냐, 어차피 네게 물려줄 카메라니 빌려 간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물려받아 열심히 찍어봐라 하는 심사로 주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죽 케이스는 여기저기가 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졌고 스트랩에도 손때가 잔뜩 묻었다. 니콘에서 새로 출시된 스트로보의 모델 넘버가 sb-800인데 아버지께서 넘겨주신 녀석의 모델 넘버는 sb-18이다.
명불허전. 명기는 과연 명기였다. 이미 단종된 지 오래인 이 녀석은 분명 만들어진 것도 족히 20년이 넘었음이 당연하련만 요즘 나도는 dslr과 견주어도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구석이 없다. ISO 선택이나 셔터 스피드 설정 링은 그렇다 치더라도 셀프 타이머와 노출 보정, 심도 미리보기에 다중노출, 후속 모델인 FM2에도 없다는 조리개 우선 모드까지를 지원하는 이 작은 기계를 놓고 나는 며칠을 감탄했다.
일주일만에 서른 여섯장의 필름을 모두 소비하고 드디어 첫 롤을 인화했다. 태어나서 처음 다뤄보는 수동카메라였다. 내가 맡긴 사진을 찾아 들고 봉투를 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 네 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진이 전부 현상되어 나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개중 몇 장의 사진은 마음에 들기까지 한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감격스러웠다. 첫 수동카메라, 첫 필름, 첫 사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저지른 실수가 있고, 구도를 잡는데 실패해 망친 사진도 여럿이다. 동호대교 상단에서 큰 맘먹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눈앞을 지나쳐가던 트럭 덕분에 절반만 살린 사진도 있고, 렌즈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어색해진 사진도 있었다. 그래도, 첫 롤이다.
첫 롤 치고는 그래도 훌륭했다고 위안 삼아본다. 135mm 렌즈로 찍은 거리의 풍경이 쨍하게 가슴에 와서 박힌다. 언젠가는, 분명히 좋은 사진이 나오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거기 어울릴 좋은 글도 나와주겠지. 첫 롤을 현상한 밤, 정녕 오늘은 뿌듯하다.
사족: 사촌오빠가 재미있을 거라며 넘겨준 흑백 네거티브 필름을 장전했다. 지인과의 약속이 있는 내일도 분명 요 며칠 내가 그랬던 것처럼 FE2를 들고 거리로 나서겠지. 두번째 롤에서는 어떤 사진이 나와줄지, 다시 한번 가슴이 두근거린다. |
첫댓글 엇...제주변에도 글쓰시는 분들이 사진을 많이 좋아하시더라구요..사진과 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나요.ㅋ
옛날 생각나네요.. FM2 처음 들고 다니던 그 시절....^^ 님과 비슷했죠 ^^
어렸을때 집에 있던 카메라 한대. 그시절만해도 카메라가 별로 없던시절.. 호기심에 부모님몰래 들고나왔다가 부셔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날 바짝 긴장하고 보냈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