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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자살이다."
1980년 12월 2일 오후
알베르 카뮈의 말을 가슴에 품고, 프랑스 문학계 사상 최고의 이슈메이커
로맹 가리는 38구경 권총을 자신의 입에 쑤셔넣은 채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의 나이 66세.. 그의 죽음 이후 펼쳐질 문학계의 엄청난 파장을 뒤로한 채,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화약 연기 속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무명이었을 뿐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진 작가 로맹 가리
로맹 가리 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살고,
죽음 이후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킨 작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가리의 인생사는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환상적인 느낌과는 다른,
한 남자로써, 남편으로써,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써 그가 살았던 삶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대신하지 못할 '희극(혹은 비극)적인'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소설 보다 더욱 소설같고,
드라마, 영화보다 더욱 영화같았던 그의 삶.
그 속에는 한 천재작가의 지독히 외롭고 고독한..
스스로 '광대'를 자청한 초라한 인간의 짙은 페이소스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1914년 5월 8일, 모스크바
아리따운 한 여인이 황량한 러시아 땅에서 새 생명을 출산합니다.
여인은 이제 갓 세상의 빛을 본 그 아이의 이름을 자신의 두번째 남편의 성을 따 '로맹 카체프'라고 이름 짓습니다.
로맹 카체프의 정신적 지주이자 여신이었던 그의 어머니, 니나 카체프
그녀는 자신의 둘째 남편, 카체프의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아니,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카체프의 아버지에 대한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떠한 아픔인지 모를 이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채 1942년, 암으로 사망할 때 까지도..
변변찮은 연극 배우였던 니나의 형편은 아들 카체프가 태어나면서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조연, 단역 가릴 것 없이 들어오는 어떤 배역이라도 맡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유태인' 이란 태생은 러시아 차르 정권 앞에서 떳떳히 고개들지 못하는 '태생의 족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까지 터지고, 급진적인 변화를 두려워하던 니나는 아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납니다.
1917년 3월. 니나와 카체프 모자는 가축용 화물칸에 몸을 숨기고 모스크바를 벗어나 빌나에 도착합니다.
(빌나라는 도시는 당시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습니다)
이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이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유태인에 대한 차별과 깊은 증오가 존재했죠.
따라서 니나 모자는 자신들의 태생을 철저히 숨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외적인 모습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니나가 아들에게 보내는 사랑은 그야말로 헌신적이었습니다.
자신은 밥 한끼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도 아들 카체프만은 꼭꼭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였고,
아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어떤 수단을 불사하고서라도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아들을 위해 헌신했던 니나는 서른 다섯 살의 나이에 머릿칼이 벌써 희끗희끗해 질 정도였습니다.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식탁 맞은 편에 앉아 가끔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들때면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을 담기에는 세상이 너무 작은 것 처럼 느껴진다.
- <새벽의 약속> 中 -
1922년 니나와 카체프 모자는 또 다시 길을 떠납니다.
로맹 가리가 평생을 살면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출생지'로 인정한 나라 폴란드로..
(결코 풍족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습니다)
니나는 언제, 어디서부터 피어 났는지 모르지만 프랑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니나에게 희망이자 구원이자 안식처이자 귀족들의 땅이었죠.
이러한 어머니의 프랑스에 대한 동경은 자연스레 아들 카체프에게 까지 이어지고,
니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카체프의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합쳐져
비로소 1935년 7월 14일, 카체프는 자신 인생의 영광과 비극의 땅,
프랑스 시민으로 귀화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1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가 장래에 대해 선택한 최초의 길은 의외로 법대생 이었습니다.
프랑스 법과 대학에 입학하고, 사춘기 시절 일찍이 문학에 눈 뜬 욕구를 키워 틈틈히 소설을 짓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로맹 가리(카체프)의 비공식적인 첫 단편 소설 <죽은 자들의 포도주>가 완성되고
그는 곧 프랑스 월간 문예 잡지 [엔에르에프] 지에 응모합니다.
하지만 기대에 부푼 그에게 돌아온 반응은 "다음 기회에 다시 응모하길.." 이라는 실망스러운 평이었죠.
인생 최초의 '좌절'을 맛보며 실망감을 뒤로한 채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엔에르에프]지의 주소로 A4 용지 20장에 달하는 장문의 서신이 날라옵니다.
비록 문체는 서툴고 허술했지만 그의 그로테스크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크게 감화된
잡지사 관계자 중 한명이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감상평을 보내 왔던 것이죠.
훗날, 프랑스 문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위대한 작가에게 보낸 첫 비평이었습니다.
정성스러운 감상평으로 인해 자신에게 분명히 '작가적 재능'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 카체프는 소설 창작에 박차를 가하고,
파리 법대로 학교를 옮긴 그 해에 쓴 단편 <소나기>를 프랑스 문예 잡지 [그랭구아르]지에 응모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우파의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던 잡지였지만 문학을 받아들이는 스펙트럼은 정치적 성향과 사상을 초월했습니다.
작가가 어떤 성향을 띄고 있는지, 또 과거의 그 어떤 경력도 상관하지 않았던 이 잡지는 카체프 처럼 아무런 배경도, 경험도 없는
초짜 작가가 글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잡지였죠. 그리고.. <소나기>는 단편 응모전에 채택됩니다.
작품의 당선으로 인해 당시로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던 1000프랑을 상금 까지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카체프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정통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장교에도 임관되지 못한 채,
그는 프랑스 령의 아프리카 어느 부근의 비행 중대로 배치됩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전쟁의 정세도 전해 듣지 못하는 따분하디 따분한 이 외딴 곳에서
카체프는 틈틈히 환상적인 경치를 배경으로 글을 쓰기 시작 합니다.
이 무렵 프랑스는 독일군의 막강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고.. 정세는 독일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죠.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한참이 지나서야 카체프가 배치된 비행 중대로 소식이 날아오고,
"각자 알아서 몸을 피신하기 바란다" 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긴 채 2차 세계대전 속의 프랑스는 힘을 잃었습니다.
카체프는 이 사실을 도저히 믿지 못합니다.
자신이, 그리고 어머니가 그토록 꿈꿔 왔던 꿈의 나라, 프랑스가 이렇게 맥없이 패배해선 안 됐습니다.
프랑스는 비록 무너지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했고, 자존심만은 버리지 않는 나라가 그의 상상 속의 프랑스였습니다.
굴욕적인 느낌을 맛 본 카체프는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모집 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땅,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자신의 평생 필명으로 사용하는 '가리' 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되죠.
러시아어로 '태워버려라' 라는 뜻의 Gary를 변형해 Gari로.. 로맹 카체프는 로맹 가리로 태어나게 됩니다.
천상 예술가였던 가리는 행동보다는 꿈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았고,
예술가적인 감수성은 군대라는 엄격한 원칙의 상징과는 크게 어긋났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실패하거나 남에게 미루었던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같이 철저한 책임감은 그가 평생의 제2의 아버지로 생각했던 드골 장군의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어쨌건 지독한 전쟁은 드디어 막이 내리고,
가리는 전쟁 기간 동안 훌륭한 임무 수행으로 인해
드골 장군에게 해방 무공 훈장까지 수여받습니다.
그리고.. 작가로써 그가 첫발을 내딛었던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가 전쟁 속에서 써내려 간 <유럽의 교육>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작품이 이때 출판된 것이죠.
<유럽의 교육>은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신예 작가에게 느낄 수 있는 참신한 느낌과 더불어 세계 대전에 참가해서
훈장까지 수여한 그의 사생활은 작품과 작가를 더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레지스탕스 문학의 제1열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놀라운 발견 로맹 가리" - [몽드 일뤼스트레] -
"거침 없는 연극적 상상력과 뛰어난 구성 감각은 신예 작가의 작품을 놀라우리만치 빛나게 해준다" - [라 르뷔드 파리] -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신예 작가의 폭발적인 데뷔" - [르 페이] -
"그는 보통 신인이 아니다. 단번에 그토록 완벽한 경지에 도달 하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할 만한 일이다" -[오피니언] -
전쟁 후, 책을 인쇄할 종이가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된 프랑스에서 이 작품은 실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은 1년 만에 8만 부라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고,
프랑스 문학계의 거장 알베르 카뮈도 이 작품에 크게 감동받아 가리에게 직접 '감사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죠.
이윽고 소설이 출판된 1945년 가을, 본 작품으로 가리는 프랑스 비평가 상까지 수상하며 그 영광의 절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루 아침에 프랑스 문학계의 천재 작가 반열에 등극한 로맹 가리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편견이 두려워,
혹은 자신의 배고프고 아픈 기억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서
<유럽의 교육> 발행인에게 '내가 러시아인 임을 숨겨 달라' 고 부탁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의 제2의 어머니이자 아내 레슬리 를 만나게 됩니다.
1942년 전쟁 기간 동안에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던 여자 레슬리.
그녀는 가리가 어린 시절 프랑스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것처럼,
혁명의 나라 러시아의 이미지에 크게 고취하고 매료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여자였습니다.
가리보다 7살 연상이었던 레슬리는 [보그]지 기자였고 얼마 있어 로맹 가리와 결혼하게 되죠.
가리는 첫 장편 소설의 대성공과 무공 훈장 덕택에 불가리아에서 프랑스 외교관 직을 맡게 됩니다.
전쟁 참전 용사가 수행하기에는 '프랑스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한 외교직은 더없이 적합한 직책이었지만,
가리 특유의 예술가적 기질은 외무부 생활 처럼 정적이고 단체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는 '글' 이었습니다.
그의 두번째 작품은 <튤립>이었습니다.
서기 3000년의 미래에서 낡은 고문서를 찾아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평단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지만, 낯선 블랙 코미디를 독자들은 차갑게 외면합니다.
이 후 발표한 <커다란 탈의실>은 평단과 대중들 모두 외면하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작품의 실패는 가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던 그에게 이런 반응들은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이 때부터 로맹 가리는 그의 인생을 평생 따라다니는 우울중과 자살 충동이라는 암흑과 조우하게 됩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가리와 그의 부인 레슬리는 엄격한 중앙 행정실의 일정과 따분한 관료 생활에 지치고
소설의 잇따른 실패로 금전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뭔가 커다란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맹 가리와 레슬리는 스위스를 거쳐 거대한 공룡, 미국이란 대도시에 상륙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그가 맡았던 직책은 언론담당 공보관이었습니다.
뛰어난 순발력과 언변, 글재주가 있어야하는 이 직책을 로맹 가리는 완벽하게 수행합니다.
그리고.. 공화당원 멤버와 붙어서 완전히 상대방을 녹다운 시켰던 한 의회로 인해 그는 슈퍼스타로 거듭나게 됩니다.
공화당원 멤버 : "의장님. 의장님은 저희에게 프랑스 대변인이 나온다고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달 전부터 프랑스에 정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저기 계시는 저 분 께서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맹 가리 : "의장님. 죄송하지만 방금 질문하신 분께 이 말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이천 살 된 프랑스 대변인이 삼백 살 된 미국 청중에게 말할 때는
이런 저런 정부가 아니라 스무 세기에 걸친 문명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대중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대응하는 세력들에게 언제나 환상적인 언변으로 반격했습니다.
현지 분위기를 통해 대중들의 심리를 즉각즉각 파악해 대중들을 선동했고,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이 날아오면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가는 반격으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옷 차림새와 말투, 머리 모양, 특유의 제스츄어까지
그는 완벽히 하나의 '스타일'을 창출해내며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천재적인 능력'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대중을 요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극도의 드골주의자이자 너무나 깊숙히 대중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던 이 프랑스 대변인을 유엔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미운 털이 박혀버린 가리를 그들은 "러시아어 억양이 섞여있는 영어 발음을 사용한다" 라는 이유를 대며 그를 불신하기에 이릅니다.
유엔에서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스탈린과 아무 어려움 없이 능숙한 러시아어로 의사소통 하는 모습 또한 그들에게 좋게 보일리 만무했죠.
이런 유엔 외교관들 사이에서의 미움 뿐만 아니라 가리는 정작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조차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가 추진하고 있던 유럽방위 공동체 프로젝트는 '깊숙한 민족주의'가 스며들어 있던 프랑스 의회 때문에 무산 될 위기에 처할 정도였죠.
가리는 프랑스 정책의 부조리와 유엔의 공허한 놀음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의 우울증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로맹 가리의 이러한 내적 불안감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기쁨은 그의 아내 레슬리를 통해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처음 집필한 책 <야생의 강에 꽃 핀 사랑>이 실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것이었죠.
"매우 뛰어난 인물 묘사 재능이 엿보이고,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문체를 가지고 있다" -[타임]지-
"심리를 파악하는 날카로운 감각과 예민한 감수성이 작품 전체에서 살아 숨쉰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지-
레슬리의 성공은 로맹 가리가 <유럽의 교육>으로 인해 얻었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과 미국 비평가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었고, 대중들은 이 여류 작가의 작품에 열광했습니다.
급기야 책이 발매된 그 해, 이 작품은 로맹 가리가 그토록 바라던 영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리는 결코 레슬리를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가리..
레슬리가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쓴 이 작품을 그가 보기에는
그저 '피나는 노력의 결과' 였을 뿐이었습니다. 레슬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리에게는 레슬리를 향한 질투심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 하나 자신을 앞섰던 것이 상업적인 성공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성공은 그들 부부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줬으니까요)
그러나 비극은 타인들에 의해 찾아왔죠.
선천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레슬리의 성격이 발단이었습니다.
작품의 큰 성공으로 인해 그들의 집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수많은 취재 인파와 팬들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레슬리는 전혀 마다하지 않고 매번 그들과 이야기하길 좋아했고 그들을 집으로 맞이했습니다.
이로인해 로맹 가리는 고질적인 우울증에 덧붙혀 극심한 대인 기피증, 인간 혐오증까지 생기기 시작했죠.
이런 치열한 내적 투쟁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고, 이윽고 로맹 가리는 인생 최고의 걸작 <하늘의 뿌리> 를 탄생시킵니다.
<하늘의 뿌리>는 호평 일색이었던 그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 과는 다르게 평단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게 됩니다.
"구성상의 트릭으로 독자의 즐거움을 망쳐놓았다" -[르 뷜탱 드 파리]-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마땅한 비범한 작품이다" -[르 피가로]-
"천재적 재능을 자만한 허영심에 가득한 작품이다" -[르 뷜탱 드 파리]-
"이전에는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재능과 독창성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르 몽드]-
"이 작품을 끝까지 읽으려면 지겨운 반복에서 오는 피곤함을 이겨내야 한다" -[프랑스 디망슈]-
"다양한 목소리가 깊숙한 곳에서 다양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더 없이 강렬한 교향악 같은 소설" -[레누벨 리테레르]-
"가리는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장차 프랑스 문학의 찬란한 미래이다." -[카르푸르]-
<하늘의 뿌리> 초판의 구성상의 오류, 문법적인 오류는 나중에 나오는 판본들로 인해
대부분 수정됐지만 '올바르지 못한 프랑스 어'를 쓴다는 비판은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족쇄로 남았습니다.
문체를 중요시 여기는 프랑스 문학에서 이 부분은 치명적이었고, 나아가 가리의 태생도 조금씩 의심을 하기에 이르죠..
어쨌건 이런 극과 극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프랑스 내에서 3개월 만에 무려 10만 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맹 가리는 1956년 이 작품으로 인해 콩쿠르 상을 수상하기에 이릅니다. 작가 인생 절정의 시기였습니다.
로맹 가리, 그의 인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인 1959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59년 가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 여배우 진 세버그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이름인데요.
바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혁명적인 작품 <네멋대로 해라>의 히로인이 진 세버그입니다.
가리는 레슬리에게는 없던 청순함과 섹스어필한 면모, 천진난만함을 진에게 느끼게되고,
진 역시 제임스 딘과 말론 브란도에게 느꼈던 동경의 감정을 로맹 가리에게서 느끼게되며..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진 세버그는 17살이라는 나이에 오토 프레밍거라는 기획자에 의해 발굴된 철저하게 만들어진 연기자 였습니다.
프레밍거는 너무나도 가혹한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그녀를 조련하고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학대하며
그녀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었고, 외모와는 달리 내성적인 성격의 진은 그의 꼭두각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영화의 재앙 중 하나 <잔 다르크>에서 진이 보여줬던 연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준비'가 안 된 시점에서 그녀가 보여줬던 모습은 그녀의 연기 인생 커리어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죠.
프랑수아즈 사강이 19세 때 썼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슬픔이여 안녕>에서 보내줬던 연기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누벨바그계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만큼은 그녀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견하게 되죠.
이런 계기로 인해 그녀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하게 되고
영화의 구성과 내용, 촬영 기법 뿐 아니라 촬영 현장까지도 너무나도 혁명적이었던
이 작품을 찍으며 진 세버그는 영화라는 매체에 진정으로 눈을 뜨고,
진정한 재미를 느끼며 비로소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녀는 유럽을 너무나도 사랑한 미국 여배우였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로 인해 진은 프랑스에서 영화만큼이나 돌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고,
콩쿠르 상 수상작 <하늘의 뿌리> 이 후, 자신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을 출간한 로맹 가리 역시 커다란 성공을 누리게 됩니다.
<새벽의 약속>은 이미 진과 깊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완성했던 작품이었지만,
언론에서 그 둘 사이를 파헤치려 하면 할 수록 진과 가리는 둘 사이를 부인합니다.
가리의 부인 레슬리가 이러한 진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건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진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가리가 진에게 빠지기엔 레슬리가 가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나도 어머어마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가리는 레슬리가 곁에 없으면 제대로 글을 쓸 수 없었고, 그가 외교적 업적을 쌓는데에는 레슬리의 공이 굉장히 컷습니다.
레슬리는 가리가 결코 자신을 떠날 수 없을 거라는 굳은 생각을 갖고 있었죠.
먼저 이혼을 한 건 진 세버그 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프랑수아 모뢰이와 이혼하고,
1961년 봄, 진과 가리는 동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레슬리는 자신이 아니면 가리를 '견뎌 낼 수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성질 부리고, 언제는 몇 주 동안이나 방 안에서 꼼짝도 안하고,
지독한 의처증에 세상에 혐오를 느끼는 염세주의자였던 가리를 감내할 수 있는 여자는 결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비록 가리가 자신을 떠나 진과 동거를 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 올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전형적인 백치미를 풍기는 금발의 진에게 이런 인내심과 헌신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의 성격은 너무나 나긋하고 순종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타고난 외모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진은 자신을 치장하는데 인색했고,
항상 가리만 보며..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기에 이릅니다.
가리의 성격적 결함들이 둘 사이를 갈라 놓기에는 진이 가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위대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마침내 가리의 성격마저 조금씩 변화시키기에 이르고
그녀 앞에서 가리는 진을 평생 사랑할 것을 다짐합니다. (실제로 이 다짐은 그가 죽을 때 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진이 임신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레슬리는 이혼 합의서에 싸인을 하기에 이릅니다.
공적인 자리인 외교관 직에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이혼한
가리의 경력은 관직의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결국 가리는 외교관 직을 사퇴하기에 이르죠.
그리고 가리는 전 부인 레슬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을 준비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무기, 펜으로 <레이디 L> 이라는 소설을 레슬리를 위해 쓰죠.
후에 이 작품은 헐리우드 MGM사가 가리에게 10만 달러에 판권을 구입해 영화 제작에 이르고
소피아 로렌 등 유명무실한 당시 헐리우드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했지만 평단의 반응은 그저 그랬습니다.
밍숭맹숭한 이 영화가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재밌는(유일한) 사실은 이 영화의 조감독을 바로.. 레슬리가 맡았다는 사실 이죠.
<레이디 L>로 인해 영화라는 세계와 처음 조우하게 된 가리는 얼마 안있어
콩쿠르 상 수상작 <하늘의 뿌리>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20세기 폭스사의 제안을 받게됩니다.
영화라는 세계에 점차 매력을 느껴가고 있던 가리는 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하늘의 뿌리>는 굉장한 규모의 대작이었는데요.
우리에게 <말타의 매>라는 느와르 불후의 명작을 만든 인물로 알려진 존 휴스턴이 제작을 하기로 결정했고,
전설적인 영화 <시민케인>의 오손 웰즈등 재능과 인기를 겸비한 헐리우드 스타들이 캐스팅 되었습니다.
가리는 헐리우드 스타 작가 대릴 제넉과 함께 각본 작업을 하게 되고.. 몇개월이 지나 드디어 영화는 개봉하게 됩니다
1958년 10월 15일
뉴욕에서 <하늘의 뿌리> 시사회가 열리는 날
로맹 가리는 격분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자신이 참여한 시나리오 부분은 하나도 반영이 안 된 채 헐리우드 상업 시스템에 찌든
대릴 제넉의 각색만이 스며들어 영화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포스터에서 자신의 이름은 "대릴 제넉의 대 서사시" 라는 글 밑에 아주 조그맣게 적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관한 열정은 수그러 들지 않았고 이 아픔으로 인해 그는 커다란 교훈을 얻습니다.
다시 뛰어든 가리는 존 포드, 대릴 제넉 등과 함께 헐리우드 시스템을 익혀가며 작업을 하기에 이릅니다.
재넉 : "대체 이 책상 위의 바나나는 뭔가, 가리? 항상 시나리오 작업할 때 마다 먹지도 않을 것을 뭣하러 매번 올려놓는거지?"
가리 : "잊지 않으려고."
재넉 : "뭘?"
가리 : "난 매번 함정에 빠지고 말아. 당신이 고릴라라는 걸 매번 잊어 버리지. 그래서 내가 누구와 일하는지 항상 잊지 않으려고 바나나를 놓아두는 거야."
진과 결혼한 이후로 가리는 매번 그녀의 촬영장을 같이 다니며 끊임없이 격려해 주었습니다.
눈부신 외모와 새침한 이미지와는 달리 진은 너무나 내성적이었고 평소 자신을 꾸미는데 인색했죠.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했고 살아있고 고통 받는 모든 것에 연민을 느끼던 성격 탓에
어린 시절 자신의 집을 히피와 유랑자들에게 개방하기도 하였고, 길거리에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코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NAACP라는 유색 인종의 지휘 향상을 위한 인권운동단체에 가입해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진에게 곁에 항상 같이 있어주던 가리는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터 폰다, 워렌 비티 등 헐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공연한 로버트 로슨 감독의 <릴리스>에서
그녀는 정신분열증 환자 역할과 동시에 팜므파탈 연기를 가히 완벽하게 해내며 평단의 굉장한 찬사를 불러 일으킵니다.
비록 작품이 별 볼 일 없어서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진 못했지만
"형편없는 작품이 진 세버그의 엄청난 연기를 방해하고 있다" 라는 평까지 얻을 정도로
그녀의 배우 인생으로써 확고한 위치를 정립하게 해 준 작품이었죠.
그리고.. 이 무렵, 가리는 그 유명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게 됩니다.
진의 촬영 현장을 같이 다니다가 그들 부부는 촬영장소였던 스페인 마요르카에 몇개월 간 머물게 되고,
그 곳에서 가리는 외교관 시절 딱 한 번 가본 경험이 있는 페루의 해변을 떠올리게 됩니다.
남미의 그 곳에서 죽은 새 수 천 마리가 널려 있는 광활하고 황량한 해변의 이미지를 그는 결코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 마요르카에 머물었던 몇개월 동안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소설이 풍기는 이미지가 너무 노골적이고 초현실적이어서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됐을 때 외설로 분류되기도 했었는데요.
이런 평을 떠나서 이 작품은 로맹 가리의 인생에서 그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영어로 번역되어 1964년 미국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고 본 작품을 영화화 했기 때문이었죠. 아내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영화의 제작자이자 작가이자 감독이었던 로맹 가리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영화 촬영에 들어갑니다.
영화에 관해선 철저하게 프로 의식에 젖어 있던 가리는 아내이자 주인공이었던 진에게 혹독한 주문을 요구하죠.
끊임없이 그녀에게 '환상의 이미지'에 관한 주입을 하게되고, 여자의 수치심마저 찢어놓으며 너무나도 적나라한 촬영을 합니다.
로맹 가리에 의해 오토 프레밍거에게 달아날 수 있었던 진은 가리와의 작업으로 인해 하며 또다시 과거에 느꼈던 정신적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화 제작이 끝났지만 진은 결코 수치심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녀에게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너무나 심한 굴욕을 주었고,
결국 시사회 자리에서 그녀는 상영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울면서 뛰쳐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영화의 수위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마저도 검열 위원회에서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렸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자살 충동을 유발시킬 위험이 있다' 라는 이유로 영화를 꽁꽁 묶어둡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최초로 X등급 판정 을 내리고되고,
스웨덴, 독일 등 극소수의 몇몇 나라에서 정도만 개봉이 되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죠.
너무 과격한 수위와 초현실적인 이미지 때문에 예술과 외설의 경계선에서
그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애매하게 걸쳐있어 비록 평단의 반응은 좋지않았지만
그들이 만장일치로 엄지 손가락을 들어줬던 부분은 바로 주인공 진 세버그의 연기였습니다.
<릴리스>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던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 선을 또다시 극복하며
그녀의 영화 인생 사상 가장 '위대한' 연기를 보여줬다는 극찬을 전문가들에게 들으며
이 영화는 다시금 그녀가 헐리우드에 진출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가리가 프랑스 정보부 장관 조르주 고르스의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때 외교관이었던 그가 비서실에서 장관의 조수로 일하는 모습이 언뜻 생각하면 상상이 안 가지만
가리의 진짜 목적은 자신의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검열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공직을 수행하면서 로맹 가리는 프랑스 검열 제도 철폐를 위해 투쟁을 하기도 했죠.
그리고...... 그 유명한 프랑스 68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계대전 후, 프랑스 깊숙히 뿌리박혀 있던 제국주의적 성향.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프랑스에서는 학생 혁명이 일어납니다.
의외로 위력이 강했지만 점차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던 이 학생 운동은 노동자들이 가담하며
실로 굉장한 기세로 번져 나가서 급기야 권위의 상징인 드골주의자들을 몰아내기에 이릅니다.
68혁명 이후 프랑스는 각계 분야의 혁신을 통해 커다란 여권 성장을 이루어내게 되죠.
골수 드골주의자 였던 로맹 가리
하지만 그가 68혁명 때 보여준 행보는 예상 외 였습니다.
프랑스 의회가 학생들을 탄압하자 학생들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고 급기야 장관 비서직 사의를 표명합니다.
그가 드골주의자 였음에도 혁명 세력의 편에 섰던 이유는
지독히도 정치가들을 혐오하는 특유의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좌파, 우파의 이분법 적으로 가를 수 없었던 것이었죠.
좌파건 우파건 상관 없이 그는 항상 소수자의 편에 섰습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비상업적인 영화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하게 상업적인 헐리우드로 다시금 진출한 진 세버그는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난 이 무렵,
여러 헐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백인 아메리카의 부르주아적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같이 다녔던 가리였지만
누구보다도 헐리우드의 시스템을 잘 알고 증오했던 그는 헐리우드의 동행에 반대합니다.
가리는 진이 한심한 헐리우드 상업 영화에 분칠을 하고 나오는 걸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가리의 눈에 진의 투쟁은 단순히 유명세를 타기 위한 '쇼' 로 밖에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진이 투쟁의 선두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부각시켰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장 열렬하게 투쟁에 가담했지만 그녀는 항상 언론에 노출될 때면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뒤에 서있었고,
결코 '스타성'을 앞세운 홍보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이러한 반대투쟁을 이용하지 않았죠.
가린다고 하여 가려지지 않았던 눈부신 외모와 존재감 때문에 많은이들에게 신분이 노출된 진은
어쩔 수 없이 언론에 공개될 수 밖에 없었고, 매일 수많은 인파속에 그녀의 남편 로맹 가리는
자신에게 까지 찾아오는 '테러의 위협'과 취재 인파 속에서
그 예전 레슬리에게 느꼈던 끔찍한 인간 혐오증을 또 다시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둘은 진이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면 할수록, 투쟁에 참여하면 할수록 멀어지게 되고...
......둘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진이 투쟁에 지원했던 지원금은 흑인 과격 단체에 지원되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흑인 과격 단체에 대한 행동에 대해 극심한 증오를 느끼는 상태에서
그들의 배후에 헐리우드 스타 진 세버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진 세버그 죽이기' 공작을 펼칩니다.
미국 정부가 메스컴을 통해 그녀를 죽인 수단은 너무나도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진의 뱃속에 두번째 아기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았던 [뉴스위크]지는
1970년 8월 17일 그녀의 실명을 그대로 기재하며 진 세버그가 불법 시위를 하는동안 마약에 빠지고
흑인 과격 단체 '검은 표범들' 중 한 명과 추잡한 섹스를 하며 가진 아이라는 악질적이고 근거없는 기사를 냅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빠집니다.
이로 인해 진이 받았던 충격은 하루에도 자살 시도를 수십 번 할 만큼 비극적인 것이었고,
정신이상자 증세까지 보이며 미국 메스컴은 스타, 아니 한 여자의 삶을 완전히 나락으로 추락시켜 버렸죠.
이러한 극심한 신경과민 증세와 정신이상 증세 속에 출산한 아이의 건강은 너무나도 허약했고
인큐베이터 속에서 겨우겨우 그 생명을 이어가다가 결국에는.. 세상의 빛을 본지 이틀만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로맹 가리는 헐리우드에 경멸을 느끼고 나아가 미국 사회에 분노합니다.
하나의 고귀한 생명에 대해 그들의 끔찍한 공작이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죠.
그는 자신의 유일한, 가장 강력한 무기 '펜'으로 그들과 맞서 싸웁니다.
그 해 8월 28일 프랑스 잡지 [프랑스 수아르]지에 <거대한 칼>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니나 하르트 가리라는 이름을 가진 비극적인 이 아이의 묘비에는
그 어떤 치장도 없이 이 말만 묘비에 덩그러니 적혀 있습니다.
Nina Haart Gari
1970. 8. 23 ~ 25
로맹 가리는 그의 마지막 영화 <킬>을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전편의 흥행 참패를 잊고 다시 제작하는 이 영화 역시 주인공은 진 세버그 였습니다.
비록 이혼한 상태였으나 진은 가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고,
가리역시 영화촬영이 없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그녀의 옆에서 위로해주며
그녀가 비극적인 일을 점차 잊게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전편에서 시적 재능과 독창적인 표현에 그로테스크한 울림을 받았던 로맹 가리의
두번째 영화를 보기위해 관계자들은 시사회 장에 몰려들고......
시사회가 끝나고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단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쓰레기'라고......
전작의 독창성은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이 작품을 많은 비평가들은 신랄하게 비난했고,
성공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이름이 없었다면 개봉조차 못했을 엉망진창 이 영화는
그들의 눈에 너무나 어설픈 느와르 B급 영화로 보였습니다.
한 잡지에서는 "극도로 저속한 시궁창같은 영화. 완벽한 실패작" 이라는 최악의 평을 받습니다.
로맹 가리의 열렬한 팬이었던 한 프랑스 작가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하죠.
"내가 숭배하는 소설가가 쓰레기같은 영화로 자신의 이미지와 명성을 더럽히고 있다" -앙리 샤피에-
가리의 인생은 철저하게 내리막으로 치닫습니다.
'나이를 먹어 가는 것'에 대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반감을 갖고있던 가리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을 보며 우울증에 빠지기 일수였고,
항상 내 몸 어딘가가 아프다는 이상한 과대 망상증까지 보이게 됩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그는 '글'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더더욱 정력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한 그는
1972년 <유로파>를 발표하고 이듬해 <마법사들>이라는 작품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욕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68혁명을 겪은 젊은 피들에게 가리는 '고리타분하고 없어져야 할 드골주의자' 일 뿐이었고,
주름이 깊고 폭삭 늙어버린 중년의 남자에게 새로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때 '천재'라는 평까지 받으며 콩쿠르 상까지 수상했던 작가의 말년치고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프랑스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온 신예가 혜성처럼 등단했던 시기였죠.
에밀 아자르란 이름의 이 정체불명의 작가는 데뷔작 <그로 칼랭>을 1974년에 발표하며,
파격적인 문체와 신선한 발상의 전환, 독특한 시선 등으로 평단에서 돌풍을 일으키게 되죠.
로맹 가리의 작품은 고리타분한 작품이라며 데뷔 때부터 끊임없이 가리의 작품을 비난해 온
평론가 중 한 명 이었던 마티외 갈레는 신예 작가의 파격적인 작품에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
"쿠쟁, 자넨 왜 하필이면 정겨운 동물을 다 제쳐두고 비단뱀을 키우나?"
"비단뱀들도 아주 정겨워요. 본성적으로 사교적이죠. 칭칭 감기잖아요."
- <그로 칼랭> 中 -
데뷔작품 한 편으로 인해 아자르는
'새로운 심리 문학'의 창시자 라는 말까지 들으며 프랑스 문학계의 혁명적 존재로 부각됩니다.
이러한 신예작가의 돌풍을 보고 가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의 데뷔시절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그 어떤 것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죠.
로맹 가리는 평단과 대중들의 싸늘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작가 활동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75년 <이 선 너머에서 당신의 티켓은 유효하지 않습니다>라는 긴 제목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죠.
60 넘은 노인이 주인공으로, 성기능이 감퇴하며 점차 행복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내용의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에밀 아자르의 <그로 칼랭>과 비교되며 로맹 가리는 완전히 '고물'로 취급되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었죠.
평단은 로맹 가리의 이 작품을 그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로 인해 로맹 가리는 성불구자, 문학적 능력이 감퇴한 노망난 노인 등등의 악질적인 소문이 퍼집니다.
결국 이런 비난의 여론도 로맹 가리의 당시 프랑스 문학계에서의 위치만큼이나 급격히 사그러들고
언론은 에밀 아자르의 정체에 대해 무한한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에밀 아자르가 데뷔작을 내놓을 때 내건 조건이 절대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너무나도 혁신적인 작품은 미스테리한 작가의 존재에 끝없는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는 현재 프랑스 문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가명이라는 설 까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신인이 썼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체나 구성이 너무나 노련했기 때문이죠)
허나 이런 혼란은 에밀 아자르가 얼굴을 공개하면서 순식간에 불식시키게 됩니다.
<그로 칼랭>을 출판했던 출판사 메르퀴르의 편집장 두 명이 아자르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파리 제네바의 변두리 건물에서 에밀 아자르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기존의 유명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로 작품 속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똑같은 보헤미안 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메르퀴르의 편집장이 아자르와 만나기 전 상상했던 그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그들은 혹시나 우리 앞에 아자르 라고 앉아있는 이 청년이 자신들을 속이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
그들이 <그로 칼랭>을 읽으면서 궁금해했던 많은 부분과, 문법적인 부분들, 내용상 연결부분 등등
수많은 질문을 했지만 그때마다 아자르는 칼같이 완벽하게 대답하며 그들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죠.
에밀 아자르의 실체에 관한 논란은 이렇게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리고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두번째 원고를 메르퀴르 출판사에 보내어 오게 되고,
이 작품은 그야말로 프랑스 문학계를 단 번에 뒤흔들어 놓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 유명한 <자기 앞의 생>입니다.
평단은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렸지만 대체로 '걸작' 이라는 평이 압도적이었고,
이 작품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인종 차별적' 이라는 문학 외적인 요소와
'어지러운 스타일' 이라는 아자르 특유의 문체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였을 뿐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완성도는 만장일치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 작품이 읽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죠.
<자기 앞의 생>이라는 이 놀라운 작품으로 인해
결국 1975년 그 해 콩쿠르 상 수상자는 에밀 아자르에게 돌아갔습니다.
로맹 가리는 이 어린 친구의 활약에 위기감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티를 내는 법은 없었습니다.
기자 : "이번 콩쿠르 상 수상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맹 가리 : "<그로 칼랭> 은 괜찮게 읽었습니다만, <자기 앞의 생>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밀 아자르의 태생에서 충격적인 한 부분이 밝혀지며
사태는 로맹 가리에게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옛부터 가리의 열혈 팬이자 비평가에 의해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조카임이 밝혀졌던 것이죠.
이 사실로 인해 언론계와 출판계는 그무렵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로맹 가리의 소설 <이 선 너머에서 당신의 티켓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홍보'를 위해 그가
의도적으로 이런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하고 그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조카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노망난 파렴치한 노인이라는 말을 듣게되죠.
이런 반감은 대중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몇 주 째 베스트 셀러 1위를 지킬 때,
로맹 가리의 <이 선 너머에서 당신의 티켓은 유효하지 않습니다>는 10위 권에도 겨우 턱걸이하며 상대적 참패를 맛봅니다.
문학계에서 가리의 비극은 이듬해 <여인의 빛>이라는 새 작품을 출간하며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그의 전 부인 진 세버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던 이 작품은 평단의 가혹한 혹평을 받게 됩니다.
조카 에밀 아자르의 문체를 '표절'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늙은이가 장사가 안 되니깐 이제는 어린 조카의 스타일까지 담습한다' 라는 악평을 받게 되죠.
무능력하고 겨우 조카나 질투하는 파렴치하고 한심한 삼촌의 모습이라는 인신공격성 비난까지...
그들이 보기에 로맹 가리의 노쇠와 그의 조카이자 프랑스 문학계의 희망, 에밀 아자르의 참신함은 너무나 큰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의 절정의 비극은...... 1979년 9월 8일에 일어납니다.
1979년 9월 8일
실종 8일째였던 금발의 헐리우드 스타가
파리 변두리의 흰색 승용차 뒷 좌석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누벨바그 혁명의 상징이자 한없이 연약하고 순수했던 여자.
로맹 가리의 평생의 사랑...... 진 세버그 였습니다.
그의 나이 41살.. 천사같은 영혼을 가졌던 한 여인은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녀의 죽음에는 너무나도 의문이 많았습니다.
부검을 했음에도 뚜렷하고 명백한 죽음의 원인은 나오지 않았죠.
한쪽에서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해 죽었다는 소리도 있었고
한쪽에서는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죽었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증거'가 없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너무나도 큰 슬픔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는 진 세버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은 FBI 라는 주장을 합니다.
흑인 과격 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진을 못마땅하게 여겨 악질적인 기사와 소문을 내보내고,
그로 인해 극심한 정신 착란 증세로 그녀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예전의 대중을 휘어잡던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
날카로운 독기를 가진 글을 보여주기에는 그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같은 그의 주장을 그저 '노망'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진의 죽음 이후 가리는 눈에 띄게 쇠약해 집니다.
이 무렵 에밀 아자르는 약 120만부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기록한 <자기 앞의 생> 이후
<솔로몬 왕의 고뇌> 라는 연애소설을 1979년 가을에 출간하며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러한 조카의 성공과는 반대로 로맹 가리가 1980년에 출간한 <연>은 조그만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잊혀지게 되죠..
아자르는 점점 상업적인 스타가 되어 갑니다. 마치 가리가 젊었을 적 누렸던 그모습처럼......
점점 우울증이 심화되고..
자신의 희망을 잃어버린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자살로 마감하게 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소지했던 38구경 권총을 입 안에 넣은 채, 방아쇠를 당겨서......
로맹 가리..
본명 로맹 카체프..
러시아 태생의 이 남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걸 다 겪은 생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느꼈고,
추위와 배고픔을 느꼈고,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느꼈고,
뜨겁고 격정적인 사랑을 느꼈고,
커다란 상업적인 성공을 느꼈고,
불운과 타락, 조소와 멸시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한가지는....... 이 세상에 대한 경멸의 표출 이었습니다.
1981년 6월의 어느날..
프랑스 문학계, 전 세계 문학계는 충격과 경악에 휩싸입니다.
프랑스의 한 잡지에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이라는 괴상한 제목의 텍스트가 실리게 됩니다.
약 42 페이지 분량의 이 글은 실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글 중간중간에는 에밀 아자르의 <그로 칼랭>과 <자기 앞의 생> <솔로몬 왕의 고뇌>등의 원고사진이 찍혀있었고,
그 원문 원고의 필체는....... 누가 봐도 명백히 로맹 가리의 필체였습니다.
아무튼 독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진실을 꼭 밝히고 싶다.
그리고 또한 내가 했던 이 모험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문학사 전반에 걸쳐 유례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단 한 사람이란, 시인 오시앙을 만들어낸 맥퍼슨을 말한다.
19세기 초, 맥퍼슨이 오시앙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시들은 유럽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었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였습니다.
68혁명 이후, 가리에게 박혀있던 '고리타분한 드골주의자' 라는 편견때문에
대중들이나 평단은 더이상 그를 순수하게 '작품'으로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가리는 '재밌는 게임'이자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에밀 아자르 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시나리오는 치밀했습니다.
진과 이혼 후, <유로파> 와 <마법사들> 의 집필과 동시에 <그로 칼랭>을 집필하던 가리는
<그로 칼랭>을 완성 시킨 후, 마요르카에서 친분을 맺었던 사업가 피에르 미쇼에게
자신이 잘 아는 재능있는 신예 작가라고 소개한 '에밀 아자르'의 원고를 건내주고 출판을 부탁합니다.
덧붙여 에밀 아자르는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려해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아자르란 이름으로 가리가 쓴 <그로 칼랭>은 평단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점차 언론의 관심 속에서 더 이상 에밀 아자르의 정체를 숨기기 힘들었던 가리는
자신의 조카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로 변장시킵니다.
이 변장술은 실로 완벽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폴은 완벽히 에밀 아자르가 됐고,
그가 예상했던 이상으로 폴은 에밀 아자르의 역할을 200% 이상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자신의 완벽한 시나리오로 모두를 속이는 데 성공 합니다.
그가 그토록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던 영화의 시나리오와는 달리 실제 세계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누구도 에밀 아자르의 파격적인 작품이 구닥다리의 상징, 로맹 가리의 작품이었음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가리의 열혈 팬으로 인해 폴이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은 탄로났지만,
그 사실은 오히려 가리의 시나리오를 더더욱 맛깔스럽게 해주는 조미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이 텍스트는 그의 죽음 약 8개월 전에 작성 되었던 것이었고
폴을 제외한 자신의 이런 비밀을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 로베르 갈라메르와 가리의 마지막 변호사에게 보내어 졌습니다.
"이 서류의 발표 날짜는 로베르 갈라메르와 내 아들과 합의해 결정할 것이다" 라는 말을 동봉한 채......
프랑스 문학계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각성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로맹 가리는 총이 아니라 그들의 편견에 의해 죽음을 맞이 했다고 말합니다.
가리가 1949년 발표한 <커다란 탈의실>의 한 구절을 그 누구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습니다.
"들키지 않는 것, 그것은 위대한 예술이다"
한 시기를 갖고 놀았던 대담한 남자.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도려냈습니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그 날까지
끝까지 품위와 센스와 유머 감각을 잊지 않았던 로맹 가리..
깊은 여운을 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는 문학계의 영원한 별이 되었습니다......
한바탕 잘 놀았소. 고마웠소. 그럼 안녕히......
긴긴 글이 끝이 났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별로 없겠죠? ^^;
학창시절 때 <자기 앞의 생>을 너무나 인상깊게 봐서 작가가 참 궁금했는데..
작가의 실체를 알게 된 건 그 후로 한참 뒤였어요.
여기저기서 조각조각난 단편들로만 알다가
작년 도미니크 보나가 쓴 <로맹 가리> 란 책을 통해서 비로소 합쳐지게 됐죠.
사실 로맹 가리란 이름은 제게 작가로서 다가오기에 앞서
<네 멋대로 해라> 여주인공의 남편으로 먼저 알기도 했었습니다..
자서전 격인 이 책을 통해서 로맹 가리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에밀 아자르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또다른 재미를 느끼고 너무 감동 받아서 이제서야 책 찾아보며 글을 썼는데
많은 이들이 재밌게 읽으셨을지...☞☜ 못난 글을 탓해주시긔...ㅠㅠ
글 중간중간에 나오는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소설들에 대한 감상은 일부러 생략했습니다
천마디 말 보다도 직접 읽고 느끼는 그 감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할테니...
(다른 책은 몰라도 <자기 앞의 생>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사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 였다는 사실은 그가 죽은 후 유서를 통해서 밝혀졌지만
글에서는 그냥 이야기적인 반전(?)을 위해서 사실과는 다르게 약간 변형시켜 봤습니다
사실 유서에서도 시원스레 밝혀지진 않았구요.
명백히 밝혀진 시점은 가리가 죽고 7개월 뒤, 폴이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고백에서 였습니다.
이 후, 며칠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텍스트가 공개되면서 모든게 확실해지구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구요..ㅠㅠ
사실 두 편으로 나눠서 올릴려다가
이렇게 올리면 보시는 분들이 너무 짜증날 것 같아서
엄청난 스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통짜로 올립니다.. 미친 스압..ㅠㅠㅠㅠㅠ
요즘 대선때문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 잠시나마 짜증나는 일들 잊으셨으면 좋겠네요 ^^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두고두고 볼게요~ 스크랩 해가요~^^
진짜 좋아요ㅠㅠㅠㅠ '자기앞의 생'이라는 책을 읽고도 로맹가리가 누군지 몰랐는데 님 덕분에 잘 알게 되었어요ㅠㅠㅠㅠ 저도 멜로 스크랩해갑니다!!
로맹가리에 대해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