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을 만든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연출하고 데인 드한이 빛나는 연기를 선보인 독일과 미국 합작 영화 '더 큐어'(2017, 124분)가 넷플릭스에 올라와 다시 보게 됐다. 상당히 난해하고 그로테스크한 데다 열린 구조여서 보는 이에 따라 천양지차 다른 감상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버빈스키가 시각적 이미지, 장식적 효과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뭘 얘기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불평이 적지 않았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 알려드릴 것이 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1924)에 감명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이다. '마의 산'은 스위스의 폐결핵 요양소를 무대로 1차 세계대전 전에 내적으로 열병을 앓고 있는 서구의 정신 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풍부한 성찰과 반어로써 표현했으며 연금술과 신화를 끌어들여 상징적이고 정교하게 구성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물론, 영화는 한참 뒤처졌다. 중간에 주제의식을 대사로 잠깐 언급하긴 한다. 하지만 살짝 드러내는 정도에 그쳤다. 주인공 록하트(드한)가 모든 환자들이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하인리히 폴머 박사(제이슨 아이작슨)의 진실을 폭로했을 때다. 처음 록하트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환자들이 일어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작품은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가 너무 다른 작품이다. 두고두고 보며 의미를 곱씹었으면 한다.
원제는 'A Cure for Wellness'로 한글 제목을 부정관사에서 정관사로 바꾼 이유가 궁금해지긴 한다. '일종의 치유법'이 아니라 '그 치료법'이 된다.
버빈스키 감독은 "건강을 위한 치료란 표면적인 뜻 말고도 건강한 사람을 위한 치료라는 중의적인 뜻을 갖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언젠가 우연히 영화 시작 20분이 지날 무렵부터 본 적이 있다. 록하트가 자동차를 타고 이 고색창연한 건물을 떠나면서 담장 위의 소녀 한나(미아 고스)를 돌아 올려다 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첫 장면부터 지켜볼 수 있었다. 몇 년 전에 봤을 때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장면들, 대사들, 루드비히 판 베토벤 작품들이 눈에 들어 오고 귀에 속속 박혔다.
영화 줄거리는 단순하다. 록하트가 속한 금융회사 임원들은 회계 부정의 책임을 펨브록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그를 데려오라며 야심만만한 록하트를 파견한다. 알프스의 요양원으로 그를 태워다주는 택시 기사가 요상한 얘기를 한다. "그곳에 올라간 이들은 많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펨브록을 만나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려다 한나를 올려다 보며 기사도 "예쁜 소녀네" 말하는 순간, 숲에서 사슴이 튀어나와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묶이게 된 록하트는 의문의 소녀와 가까워지고 이곳에 숨겨진 비밀들에 하나씩 눈뜨게 된다. 끔찍한 일을 당한다.
모든 것이 이중적이다. 부유한 데다 행복해 보이기만 했던 이들이 마셔대던 물은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게 만드는 독성 물질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들은 너무 좋다며 이 요양원을 떠나려 하지 않는데 실은 폴머 박사의 달콤한 거짓말에 놀아난 것이었다. 300년을 이어 온 비밀이 모두 드러나고, 록하트는 한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시설을 빠져나간다. 그런데 록하트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해서 이 영화의 결말을 놓고 많은 논란에 빠지게 된다. 록하트가 거짓을 얘기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관객에게 록하트의 앞니 하나를 빼는 장면을 보여줬는데 마지막 장면, 괴이한 웃음을 지을 때 보면 이가 모두 멀쩡한 것도 이상하다.
우리가 인생의 진실이라고 믿고 맹목적으로 추구해 온 삶을 원초적으로,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본다. '마의 산'을 읽어보면 그 메시지를 더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뱀의 발. 왜 장어일까? 폴머 박사의 끔찍한 짓에 등장하는데 우리는 귄터 그라스 원작 '양철북'에서 이미 장어떼를 본 적이 있다. 유럽인들이 왜 장어를 이렇게 혐오하는지 궁금하다.
둘째, 베토벤 교향곡 1번과 2번, 4번, 5번, 6번이 긴요하게 쓰이는데 모두 2악장이다. 왜 음악감독 벤저민 월피시는 공교롭게도 모두 2악장을 썼을까 궁금해진다.
셋째, 구순 노모를 요양원에 모신 지 2년이 돼 간다. 해서 이 영화는 특별히 불편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살인을 용납하도록 서서히 만드는 것이 요양원이란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넷째, 어떤 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알프스라고 감탄하는데 컴퓨터 그래픽(CG)이다. 4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는데 2600만 달러밖에 거둬들이지 못해 감독은 긴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CG 작업에 너무 많은 돈을 쓴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