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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여성들에게도 역사가 있는가? 어떤 이는 새삼스러운 질문이라며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이야기가 언제나 역사로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여성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성에 ‘대한 담론’은 과할 정도로 많았지만, 여성‘의 역사’는 자발적인 침묵과 타의적인 (주로 남성에 의한) 은폐로 인해 흐릿한 그늘에 가려 있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여성사의 ‘대모’라 불리는 저자는 옛 행정 및 재판 기록, 여성들의 사적 기록과 공적 출판물 등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 여성의 존재를 비로소 볕으로 끌어낸다.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여성‘의’ 이야기, 그 생생한 목소리를 침묵의 저편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이 책은 문인, 음악가, 배우, 연구자, 기자, 여성운동가 등 각자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선명한 족적을 남기려 발버둥 쳤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만든 모자이크다. 여자들의 개인사는 역사가 되지 못하는 이야기 조각일 뿐이지만, 저자는 그 조각들을 가지고 ‘여성사’라는 더 큰 무대를 그려낸다.
👩🏼🏫 저자 소개
미셸 페로
1928년생. 프랑스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로 현재 파리 디드로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노동운동의 역사에 관한 작업을 해왔고 에르네스트 라브루스, 미셸 푸코 등과 함께 연구활동을 했다. 여성의 역사와 젠더 출현의 문제 등 여성학 분야의 개척자다. 오늘날에도 활발하게 여성사에 관한 학문활동을 펼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운동의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우리나라 여성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대모 격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여성사 연구 외에도 넓은 학문세계를 구축했으며, 무엇보다 1971년 계량화 작업을 토대로 파업과 경제 주기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국가박사학위 논문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통해 사회사가로 우뚝 섰다. 조르주 뒤비와 함께 『사생활의 역사』(1985~1987) 총서 작업을 주도하면서 페로의 학문세계는 넓고 깊고 섬세해졌다. 이후 여성사 연구에 집중하며 『서구의 여성사』(1991~1992), 『공적 여성들』(1997), 『여성들 혹은 역사의 침묵』(1998) 등을 출간하면서 특히 조르주 상드에 관심을 보였다. 2001년에는 『역사의 그늘』을 통해 감옥의 역사를 선보였다. 2009년에는 기념비적인 역작 『방의 역사』로 프랑스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 목차
편집자 서문
1장 여성: 역사에서 누락된 존재
여성사 연구의 계기 | 역사 속으로 들어온 여성들 | 여성에 대한 담론과 이미지 | 매체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들
2장 여성의 몸
나이에 따른 여자의 삶 | 여성의 외모: 머리카락 | 여성의 성 | 출산과 육아 | 신체의 예속과 속박
3장 여성의 정신세계: 여성의 종교와 교육, 그리고 창작활동
여성과 종교 | 이단과 마녀 | 지식으로의 접근 | 여성의 창작활동: 글쓰기 | 예술가로서의 삶
4장 여성과 일
농민 | 가사노동 | 여성 노동자 | 3차 산업의 새로운 직종: 회사원, 교사, 간호사 등 | 배우
5장 시민으로서의 여성
여성의 공간적 변천사: 이동 반경의 확대 | 여성들의 역사적 활약 | 여성의 단체활동 | 페미니즘
오늘날의 현황
주
📖 책 속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거듭한 메로빙거 왕조의 잔인한 왕비들이나 르네상스 시대 자유분방한 연애로 이름을 날린 여자들, 혹은 유명한 화류계 인사 정도는 되어야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즉, 여자들은 독실한 성녀가 되거나 떠들썩한 파문을 일으켜야만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 p.19
“대다수의 여성은 말년에 자기 물건을 정리하면서 자신이 쓴 편지들을 분류한 뒤 연애 편지들을 깔끔하게 불태운다. 특히 해당 편지의 내용으로 인해 체면이 깎일 것이라면 더더욱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과 좌절감, 과거의 가슴 아픈 순간들을 담고 있는 일기들도 모두 폐기한다. 감추고 없애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심하고 문외한 이들의 호기심에 노출되어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 p.42
“여성은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는 사회적 예속에 대해 일각에서 반발의 움직임이 일어났다.버지니아 울프가 현실을 꿰뚫어본 대로 “우리가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이 우리를 입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르주 상드는 자서전 앞부분에 자기소개를 하듯 장난스레 신체 치수를 적어놓고, 예쁜 축에는 끼지 못한다고 자조하며 자신은 거울 앞에서 지체할 시간에 다른 할 일이 더 많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린 시절의 상드는 제국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함께 머물던 마드리드 대저택 안의 전신 거울에 자신의 벗은 몸을 비춰봐야 했다고 한다.”
--- p.72~73
“여성이라면 응당 책 읽는 데 정신이 팔리면 안 될 것이요, 손에 펜을 들어서도 안 된다. (…) 남자라면 응당 검과 펜을 들어야 하며, 여자라면 바늘과 실패를 들어야 한다. 남자에겐 헤라클레스의 곤봉이, 여자에겐 옴팔레의 물레가 쥐어져야 하고, 남자는 기술을 생산해내는 자요 여자는 마음에 감정을 품은 자다. (…) 여자로서 문인이 되고 재능을 쌓고 예인이 되는 것은 화류계 여자에게나 허용되며, (…) 여류 시인이란 해괴한 생각과 기이한 문학적 역량을 가진 괴기한 존재로서, 여성 군주가 괴상한 정치 괴물인 것과 비슷하다.”
--- p.143
“바시키르체프의 일기를 보면 당시 전문적인 아티스트를 꿈꾸던 젊은 여성이 어떤 일상을 살며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또 세간의 편견에만 치중하며 딸을 결혼시키기에 급급했던 가족들과는 어떤 마찰을 겪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래도 바시키르체프는 쥘리앙 아카데미 안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이곳에서만큼은 동료 간의 평등한 분위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작업실에 들어가면 모든 게 사라진다. 그곳에서는 이름도 가족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 우리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만 존재하며 예술과 마주한다.” 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교육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고, 남성 우월주의에 휩싸여 여학생들을 깔보는 교수들도 없지 않았다.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무시하며, 굉장히 특출한 실력을 보여줄 때만 만족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에 대해 말할 때도 그건 남자나 할 일이라는 식의 언급을 할 때가 있다. 이런 감각이나 기질은 남자만 타고난다는 것이다.””
--- p.159
“대학에서도 여성들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특히 파리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1930년대 소르본대학에서는 게르만어를 전공한 여성 학자 준비에브 비앙키를 교수 임용에서 탈락시켰는데, 심지어 함께 경합이 붙었던 남자 교수보다 우월한 실력이었음에도 임용에서 배제됐다. 여자는 목소리가 작아 대규모 계단식 강당의 강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 p.202
“남녀의 공적 활동에 대한 인식 차는 어휘에서도 드러난다. 대외적으로 공적 활동을 하는 남자를 이르는 ‘공인homme publique’이란 표현은 명예로운 호칭인 반면, 바깥으로 나도는 여자를 이르는 ‘만인의 여자femme publique’란 표현은 사창가나 거리의 여자를 가리키는 수치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탐험가’를 의미하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문물이 발견되던 근대(1850~1940)의 ‘남자 탐험가aventurier’는 영웅이었지만 ‘여자 탐험가aventuriere’는 우려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밖으로 나도는 것, 특히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걱정했으며, 일부 호텔은 위상이 떨어지지 않도록 여자들의 투숙 자체를 거부했다.”
--- p.215~216
🖋 출판사 서평
여성사의 ‘대모’라 불리는 사학자가 다시 써내려간 여성의 역사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계속되고 있었던 주체적 성 혁명을 재발견하다
- 여성의 외모와 신체, 성적 욕망에 대한 인식은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가
- 창작이나 정치 분야가 여성에게 그토록 폐쇄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최근까지의 성 혁명은 근대화의 결과일 뿐일까, 아니면 여성의 투쟁이 얻어낸 결실일까
기록을 남기지 못한 여자들, 기록이 된 여자들
여자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눈에 띄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주로 인물의 대외적 활약상에 관심을 두었는데, 여성들은 집 안에서 가사활동에 전념했던 탓에 세간의 주목을 받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스스로 흔적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흔적이 하찮다고 여긴 탓이다. 여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아주 독실한 성녀가 되거나 떠들썩한 파문을 일으킴으로써 기록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18~19세기에 이르러 여성 작가의 등장으로 여성의 전기나 일대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비로소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사’라는 학문 분야가 태동했다. 사학자 폴 벤과 조르주 뒤비는 폼페이 벽화의 그림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모습과 욕구를 추정했다. 화가 콜레트 드블레는 미켈란젤로 등 여러 유명 화가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여성들에 대한 시선을 연구했다. 그런가 하면 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파리의 고문서를 뒤져 옛 파리에 살던 여성 시민의 삶을 복원해냈다. 대혁명 시기 여성들의 폭동을 연구한 장 니콜라, 그리고 1870~1930년 여성들의 사생활과 부부관계를 분석한 안마리 손도 있다. 또한 아니크 틸리에는 19세기 여성들의 주요 범죄 사례를 통해 그 열악했던 생존 환경을 드러냈다.
몸에 새겨진 여성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최근 들어 ‘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몸에는 역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몸을 살펴보면 성별에 대한 관념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예 중 하나는 머리카락이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신체 중 성적 매력이 집약된 부위로 여겨졌다. 회화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항상 풍성한 머릿결을 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여성의 음울하고 관능적인 모습을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통해 표현했다. 보들레르 또한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넘실대는 바다’에 비유하며 관능미와 황홀감을 읊조렸다. 키르케고르는 머리카락의 매혹적인 위력에서 두려움과 증오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머리카락은 이렇게 유혹과 매력의 도구이면서 원죄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시각도 비슷했다. 성욕이 과한 여성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성관계를 할 때도 남성상위 이외의 체위는 마녀의 체위로 취급받았다. 여성의 신체는 남성을 위한 것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었기에, 결혼 첫날밤은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는 의식이었다. 기독교적인 영향으로 여성은 ‘처녀성’과 정조 관념을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16세기 여성 시인 페르네트 뒤 기예의 관능적인 작품 등, 은폐된 여성의 성생활을 드러내는 자료들은 분명 남아 있다. 1900년 무렵에는 금기시되어왔던 여성의 동성애까지 수면 위로 떠올라, 파리에서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 르네 비비앵, 콜레트 등 여러 여성 문인이 성 정체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애를 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방 안에만 있지 않았다
창작은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사고는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인들은 여자들에게는 조물주의 숨결인 ‘프뉴마pnuema’가 없다고 생각했고, 19세기 말까지도 생리학자들은 여성의 뇌가 남자보다 작고 가벼우며 밀도도 낮다면서 성차의 물리적 근거를 내세웠다. 하지만 여성은 분명 문학, 연극, 회화, 음악 등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조르주 상드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수도원에서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싶었던’ 상드는 ‘곡괭이질’을 하듯 수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그러나 (남성) 평론가들은 상드가 ‘젖소에서 우유를 짜내듯’ 작품을 써낸다고 비판했고, 심지어 남자들이 대필을 해주었을 거라는 망발까지 일삼았다. 이는 여성이 문인으로 활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지만, 그 와중에도 19세기와 20세기에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프랑수아 사강 등 수많은 여성 문인이 여성 문학을 꽃피웠다.
여성들은 예술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점차 집 밖으로 나섰다. 특히 양차 대전을 거치며 전장으로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일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무직, 의료계, 학계에 여성들이 진출했다. 1930년대 소르본대학에서 ‘여자는 목소리가 작아 대규모 강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성 학자 준비에브 비앙키를 교수로 임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자 여성들의 정치 참여도 활발해졌다. 프랑스대혁명을 전후하여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가장 유명한 활동가로는 1791년 여성인권선언을 작성하고 단두대에 올라간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17~19세기 식량 폭동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상인과 정부에 가장 먼저 달려가 목소리를 높인 건 살림을 책임지는 여성들이었다.
이 책이 발견한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는 남성 위주의 오랜 역사 뒤편에서 여성의 혁명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선명히 드러낸다. 단지 그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성별 간 위계에 대한 논쟁이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금 그 혁명은 온전히 완수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랜 분투의 기록이 끝내 살아남아 이 책을 통해 우리와 만났듯이,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는 여성의 역사는 언젠가 다른 여성들을 만나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