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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1강-3 (2012.06.28)
40-2 黄蘗의 佛法은 簡單(황벽불법간단)하다
1-4 雜草가 茂盛(잡초무성)하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그렇게 너에게 친절을 베풀었건만,
更來這裏(갱래자리)하야, 다시 나한테까지 와가지고서
問有過無過(문유과무과)아? 허물이 있느냐? 허물이 없느냐? 나한테 무슨 허물이 있느냐? 라고 이렇게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 그랬습니다.
師於言下(사어언하)에 大悟(대오)라.
그 말에 言下에 大悟입니다. 그 말에 그만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줄을 그으라고 했습니다. 노파심절. 후려친 것이 아무에게나 때리지 않는다 말입니다. 정말 자네야말로 앞으로 크게 깨달아 가지고, 큰 나무가 돼가지고 온 천하 중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울 그런 큰 재목이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가르쳤는데 되도 않게 너는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 말에 그만 크게 깨달아 버렸습니다. 그 말에...
그 다음에 중요한 말입니다.
元來黄蘗佛法(원래황벽불법)이 無多子(무다자)니다.
원래황벽스님의 불법이 無多子 = 많지 않다 = 별 것 아니구나ㆍ아무 것도 것 아니구나ㆍ간단하구나. 제목을 “간단하다.” 이랬지요?
黄蘗佛法이 簡單하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우리는 지금 목이 터져 라고 설명하지만, 황벽스님은 몽둥이가지고 후려치는 겁니다. 그것도 노인이 쉽지는 않겠지만, 黄蘗佛法이 簡單하구나. 黄蘗佛法無多子.
유명한 말입니다. 黄蘗佛法이 無多子. 황벽스님의 불법이 참 간단하구나.
사실 진짜 살아있는 불법은요? 승속이 문제 되는 것도 아니고ㆍ남녀노소가 문제 되는 것도 아니고ㆍ구참 선달이 문제 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살아있는 진정한 생명 그 자체. 살아있는 진정한 생명 그 차이에, 그 사실에 눈 뜨는 것. 살아있는 생명에 눈 뜨는 것. 아! 바로 이거구나! 바로 이거구나! 내가 밥 먹고 옷 입고 부르면 대답하고 말하고 보고 듣고, 배고프면 밥 찾아먹고 피곤하면 잠자려고 하는 바로 그 당체ㆍ그 주인공. 그것이 온 우주의 핵심입니다. 온 우주의 핵심이면서 나의 참 생명이고, 그것이 진정 불법입니다.
진짜불법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동안 경전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불법하고는 전혀 다른데, 간단하고 뭔가 생명력이 넘치는 알 듯 알듯 하잖아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바로 이렇게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가운데 꽉 차 있으니까요. 이 가운데 꽉 차 있는 겁니다.
내 온몸, 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꽉 차 있는 겁니다. 이 교실에 꽉 차 있고 아니, 이 우주 공간에 꽉 차 있는 그 생명력. 그것이 진짜불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불법. 黄蘗佛法無多子라. 아~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군. 너무 쉽구나! 그러니까
大愚搊住云這尿牀鬼子(대우추주운자요상귀자)야,
대우스님이 있다가, 밀쳐버리면서 야, 이 오줌싸개야, 這尿牀鬼子는 오줌싸개, 牀에다 오줌 싼 귀신. 이런 말이거든요. 牀에다 오줌 싼 귀신. 이것이 우리나라도 옛날에 우리 어릴 때도 많이 있던 예인데요. 오줌 싸면 키를 씌워서 이웃집에 소금 얻으러 보내잖아요. 야, 이 오줌싸개 어린놈아.
適來道有過無過(적래도유과무과)러니, 방금 와 가지고 말하기를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소리하더니
如今에 却道(여금각도), 지금에 바로 금방 너 뭐라고?
黄蘗佛法이 無多子라고? 황벽 불법이 너무 간단하다고?
無多子라는 말은 시시하다ㆍ별 것 아니다. 이 뜻입니다.
“황벽불법 시시하다고” 라고 말하니
儞見箇什麼道理(이견개심마도리)오?
너는 도대체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하늘같은 황벽스님 불법이 시시하다.” 고 그런 표현을 하느냐?
速道速道(속도속도)하라, 빨리 말해 봐라ㆍ빨리 말해 봐라.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네가 말해라. 말입니다. 速道速道하라. 이것 선방에서 잘 쓰는 말입니다. 농담 삼아도 이렇게 말할 때 선방에서는 速道速道하라. 이런 데서 따가지고 그런 소리 잘합니다. 빨리 일러라.
그러니까 이 임제스님이
師於大愚脅下(사어대우협하)에, 대우스님의 옆구리에다가
築三拳(축삼권)한대, 주먹을 그냥 죽어라고 세 번 쥐어박아 버렸어요.
築三拳이라는 말이 주먹을 가지고 옆구리에다가 그냥 갈비뼈가 부러지든지 늑막염이 걸리든지 말든지 세 번 죽어라고 쥐어박아 버려요. 야~ 근사하잖아요. 자기는 황벽스님한테 세 번 물으러 갔다가 세 번 되게 얻어터지고, 그 보복을 대우스님한테 와서 주먹으로 그냥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아 버려요. 야~ 정말 이것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요? 불법이 다르잖아요.
그 동안 우리가 불교공부 했던 것 싹~ 내려놔야 돼요.
그런 선입견 가지고는 이 임제록 뭔지 몰라요. 아~ 참, 다른 불교네요.
딴 세계 불교입니다. 그런데 이 불교가 그렇게 좋다고 아까도 소개했지만, 우리나라 큰스님들은 전부 임제스님의 이런 물이 나한테 튀었다. 나는 이런 임제스님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자랑자랑 하는 겁니다.
임제스님의 이런 피가 나에게 없으면 이것은 내가 불자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불법에 대해서는 또 다른 눈을 떠야 됩니다.
이것이 금방 우리 가슴에 와 닿든지 안 닿든 지는 평생 과제로 놔두고, ‘야~ 이런 불법이 있구나! 그것참 근사한 불법이다.’ 그래서 이것 한 번 맛보려고 이 더운 여름에 한 번 가부좌하고 틀고 앉아 보는 겁니다.
‘야~ 이것 도대체 무슨 도린가?ㆍ무슨 도린가?’
세 번 쥐어박았어요. 그러니까 대우스님이 임제스님을 밀쳐버렸어요.
大愚托開云(대우타개운), 하는 것은 밀쳐버리는 겁니다.
이놈을 확 밀쳐버리고는
汝師黄蘗(여사황벽)이요 非于我事(비간아사)니라.
너는 황벽스님이 너의 스승이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그런데 나하고는 관계없다. 나한테 와서 깨달지만 사실은 네가 깨닫기 까지는 황벽스님한테서 세 번 되게 얻어터진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친절하게 너를 가르쳤다. 바로 그것이 원동력이 돼서 여기 와서 눈을... 나는 다 익은 홍시를 네가 들고 왔는데, 다 익은 홍시를 슬쩍 스치기만 해도 툭 터진 것이다. 그 동안 홍시가 다 영글어버렸어. 나한테 오기까지, 그 홍시가 영글기까지는 사실은 전부 황벽스님 덕택이야. 그런데 마지막에 와가지고 바람만 불어도 홍시가 터질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한 두 마디 일러준 것, 나하고는 관계없다. 너의 스승은 너를 홍시로 영글게 한 그 인연은 바로 황벽스님이다. 황벽스님이 너의 스승이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임제스님의 공부인연ㆍ행장.
어째서 임제스님이 그렇게 유명하게 됐는가? 어째서 임제스님이 그런 큰 선지식이 됐는가? 불교라고 하는 2600년의 길고 긴 산맥 중에서 그 끝 모를 높이의 산을 형성한 그런 큰스님이 됐는가? 라고 하는 그 연유가 바로 여기에, 방금 말씀드린 이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간에 일어나서 우왕좌왕 해봐야 괜히 시간만 가고 그대로 연달아서 두 시간 해버리고 말겠습니다.
이 行錄은 이렇게 아주 맛있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쭉~~ 이어지는데, 또 다른 기회에 정말 제대로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임제록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인연이 되는 씨앗을 심는 기회다. 라고 우리가 이번에는 그렇게 생각합시다. 이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다시 11쪽으로 넘어가서 三度發問 三度被打 그랬지요? 거의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雜草(잡초)가 茂盛(무성)하다. 제가 제목을 그렇게 했는데요.
1-4 雜草가 茂盛하다.
有座主問 三乘十二分敎가 豈不是明佛性가
師云 荒草不曾鋤로다
主云 佛豈賺人也리오
師云 佛在什麽處오
主無語어늘 師云 對常侍前하야 擬瞞老僧이로다
速退速退하라 妨他別人請問이니라
有座主問(유좌주문), 座主라고 하는 것은 강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경전을 강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늘 그 법회가 아직도 계속됩니다. 上堂. 첫 법회요. 부주 왕상시라고 하는 도지사쯤 되는 사람이 법회를 마련했습니다. 큰 광장에다가 했는데요. 그런데 어떤 강사가 떡 나왔습니다.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가 豈不是明佛性(기불시명불성)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三乘. 그리고 十二分敎, 8만 대장경. 그것이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부 불성을 설명한 것이다 이 겁니다.
우리 인간의 참 생명자리를 설명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師云,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荒草不曾鋤(황초부증서)로다. 거친 풀을 호미질을 아직 아니했구나.
풀만 무성하게 자랐지, 그 풀을 하나도 누가 뽑아주지 않았구나.
기껏 三乘十二分敎. 그것이 부처님의 설법인 냥 이렇게 매달려 있으니, 아까 와 같이 그렇게 공부해온, 그렇게 살아온 임제스님 눈에 비친 이 강사가 정말 풀만 거칠게, 잡초만 무성하였지 호미질을 한 번도 아니해준 상태다. 표현도 참~ 근사하잖아요. 표현이 아주 멋지잖아요. 이것이 선사들의 표현 방법입니다. 이것을 가지고도 화두니 뭐니 할 것 없습니다. 그냥 알아먹잖아요. 그러니까
主云, 좌주가 말하기를
佛豈賺人也(불기잠인야)리오?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겠는가?
師云, 佛在什麽處(불재삼마처)오?
그러면 네가 말하는 부처는 어디에 있느냐?
佛在什麽處오? 아~~! 좋은 말입니다. 부처님이 어느 곳에 있느냐?
“부처님ㆍ부처님.” 우리 모두가 자나 깨나 “부처님ㆍ부처님.” 하고 떠들어 대는데, 도대체 그 부처가 어디 있느냐? 佛在什麽處오?
主無語(주무어)어늘, 座主가, 강사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대답 못하지요.
여러분도 아마 제가 묻지 않아도 ‘야~ 부처가 어디 있는가?’
물을까봐 겁나지요? (대중들 : 하하하하하하) 바로 거기에 있네요.
웃을 줄 아는 그 사실. 그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부처 아니고는 달리 딴 부처 없습니다. 웃을 줄 아는 그 사실. 야~ 부처가 들어있지 않고는 어찌 그렇게 웃을 줄 알아요? 부처가 들어있지 않고는 어떻게 사람을 미워할 줄 압니까? 부처가 들어있지 않고는 좋은 것을 보고 욕심낼 줄 어찌 알아요?
부처가 들어있지 않고는 슬픔을 당했을 때, 펑펑 목 놓아 울 줄 어떻게 압니까? 그것 다 부처가 하는 짓입니다. 정말 살아있는 부처가 하는 짓입니다.
희로애락에 대한 온갖 표현들. 전부 부처가 하는 짓입니다.
여기 佛在什麽處오? 그런데 이 座主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상. 눈에 보이는 모습만가지고 이렇게 끄달리고 사니까ㆍ 끄달리고 사니까 진짜 우리자신은 잊어버려요. 눈에 보이는 가짜만가지고 너니ㆍ나니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가짜만가지고... 그것은 마치 금으로 만든 부처님을 보고는 “아~ 불상 잘 생겼다ㆍ부처님 참 잘 생겼다ㆍ부처님 영험 있겠다.” 그것이 도둑놈은요? 불상을 안 봅니다. 금을 봅니다.
도둑놈이 진짜 안목 있지요. ‘저 법당에서 저 신도님들이 빨리 나가야 내가 금을 훔칠텐데...’ 불상 안 봅니다. 금만 보는 겁니다. 우리도 금을 봐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요? 이렇게 역사적인 현실ㆍ현상적인 모습ㆍ눈에 보이는 이런 차별 상.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 너니ㆍ나니 하고, 잘 났다ㆍ못 났다. 옳다ㆍ그르다. 나이가 몇 살이다. 남자다ㆍ여자다. 스님이다ㆍ신도다. 이 분별 평생 하다가 볼일 다 보는 겁니다. 불상이 영험이 있다. 어디 가면 불상이 잘 생겼다. 이것 가지고 볼일 다 보는 겁니다. 도둑놈은 금을 노리고 있는데... 진짜 우리는 우리의 참 면목. 부처라고 하는 참 면목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불교는요?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삽니다. 세상사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부처님은, 불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실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실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출렁거리는 물결. 숱한 탐 진 치 3독과 8만4천 번뇌의 바람에 출렁거리는 물결. 세상은 물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불교는 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물결 아무리 높이치고 흙탕물을 일으키더라도 물입니다. 불교의 안목에서 보면 물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 물은 흘러갈 때도 있고, 멈춰있을 때도 있고, 빠를 때도 있고, 느릴 때도 있고, 혹은 흙탕물일 때도 있고, 혹은 뭐를 밀 때도 있고요. 그것문제 삼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니까요. 그런데 물이라고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주 평등합니다. 승속이 평등하고ㆍ남녀가 평등하고ㆍ노소가 평등하고ㆍ유식 무식이 평등하고ㆍ있고 없음이 평등하고 동일해요.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고요.
그런데 물결이, 파도가 물이 되는데 시간이 걸립니까? 안 걸립니까?
시간 안 걸립니다. 바로 물입니다. 물결그대로 물입니다. 우리는 중생 그대로 부처입니다. 以本智求佛智로다. 본래의 지혜로써 부처의 지혜를 보는 겁니다. 중생소견에서, 중생에서 부처를 보는 것이지, 중생 떠나서 부처 못 봅니다. 물결에서 물보는 겁니다. 불상에서 금보는 것이지, 불상 제쳐놓고 금 따로 없습니다. 불상그대로 금이라니까요. 불상뿐입니까? 무슨 코끼리도 만들고, 뭐 생선도 만들고 별별, 반지도 만들고 비녀도 만들고 온갖 귀걸이 목걸이 다 만들지요. 그런데 귀걸이 목걸이로 볼 것이 아니라 금을 봐야 됩니다. 도둑놈은 금보고 훔치지 그것이 귀걸이다 목걸이다 보고 훔치는 것이 아닙니다. 금이 진실입니다. 금이...
그렇듯이 우리의 본 생명 = 참 생명 = 부처자리. 바로 그것이 우리의 참 생명입니다. 이 임제록은 그것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엉뚱하게 밖으로 이렇게 드러난 것ㆍ차별된 것ㆍ눈에 보이는 것, 이것이 우선 쉬우니까요.
또 그것보고 시시비비 하고 분별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동안 그것만 자꾸 치다꺼리하면서 살아온 것이 익숙해가지고 업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모른 겁니다. 그러니 여기 좌주도,
“부처가 어디 있느냐?” 부처보고 물었는데, “부처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처보고 물었는데 아무 대답 못하는 겁니다. 우리 살아 왔듯이 너무 부처 아닌, 금 아닌 불상. 물 아닌 물결에만 우리가 정신을 빼앗기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 隨處作主. 여기 아주 표지에 隨處作主立處皆眞ㆍ隨處作主立處皆眞. 여러 수십 번 써 놨네요. 좌주 아무 말이 없어서
師云, 對常侍前(대상시전)하야, 常侍 = 왕상시 = 도시사.
지금이야 대통령이라도 별것 아니지만, 민주화 사회가 돼가지고 사람 개개인이 다 주인이다 이 말입니다. 국민개개인이 다 주인이다. 그래가지고는 별것 아니지만, 옛날에는 군주시대에서는 벼슬 따라서요? 사람차별이 엄청났습니다. 엄청 사람차별 했거든요.
여기 하는 소리가, 對常侍잖아요. 왕상시, 도시사 앞에서
擬瞞老僧(의만노승)이로다. 이 노승을 속이려고 하는구나.
아, 부처님ㆍ부처님. 실컷 이야기하더니 “부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니까 한 마디도 못 해. 나는 부처가 묻는 줄 알았더니 노승을 속이는 이로다.
速退速退(속퇴속퇴)하라. 빨리 물러가고 빨리 물러가거라.
妨他別人請問(방타별인청문)이니라.
다른 사람이 묻는데, 다른 사람이 질문하는데 방해된다. 그만 물러가라.
네하고는 이야기 안 된다. 이랬습니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復云 此日法筵은 爲一大事故호니 更有問話者麽아 速致問來하라
儞纔開口하면 早勿交涉也니라 何以如此오
不見가 釋尊云 法離文字며 ←1강-3
↓1강-4
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 爲儞信不及일새 所以今日葛藤이라
恐滯常侍與諸官員하야 昧他佛性이니 不如且退니라
喝一喝云 少信根人은 終無了日이로다. 久立珍重하라
復云(부운) 此日法筵(차일법연)은 爲一大事故(위일대사고)니,
다시 진짜 이야길 하는 것입니다. 此日法筵은 爲一大事라.
오늘 법석을, 오늘 법회를 연 것은 이 말입니다.
오늘 법회는 一大事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큰일을 위해서다.
하나의 큰일. 이것이 뭡니까? 살아 있는 참 생명. 우리가 뭘, 아무리 세속적인 성공을 거뒀다 손치더라도, 내가 누군지 모르면,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르면 아무리 세속적인 성공을 거뒀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세속적인 성공은요? 예를 들어서 숫자를, 제일 높은 숫자 9ㆍ9ㆍ9ㆍ9ㆍ9, 9를 한 100개쯤 나열 해놨어요. 또 거기에 진정한 생명을 불어 넣으려면ㆍ진정한 생명을 불어 넣으려면 거기에 실다운 숫자가 있어야 됩니다. 실다운 숫자가요. 실다운 숫자가 빠져버리면 아무리 세속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성공을 거둔 사람도 사정없이 그만 자살을 해버리고, 도둑질 하다가 자기가 감옥가고, 최고 성공을 거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오늘 날 이렇다 하는 사람들 전부 자기의 참 생명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참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볼 줄 알면 그것을 애지중지 할 텐데, 엉뚱한 것을 가지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엉뚱한 것을 애지중지하는 겁니다.
그래 거기에 정신을 빼앗겨요. 혼을 빼앗겨가지고 그만 거기에 빨려가다 보니까 지 죽을 줄 모르고ㆍ지 죽을 줄 모르고 그렇게 허망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참 불교를 좀 공부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요?
‘어째 인생을 저렇게 사는가? 참 가련하고 불쌍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여기 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진정 큰일이 뭐냐?”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실로 큰일이 무엇이냐?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냐? 이것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세속에서 정해놓은 그런 높은 벼슬 되는 것이 진짜 큰일이냐? 그룹의 총수가 되는 것이 진짜 큰일이냐? 뭐가 진짜 큰일이냐? 이것 한 번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임제록의 취지이기도합니다.
오늘 법회를 왜 열었느냐? 진짜 큰일을 위해서다.
更有問話者麽(갱유문화자마)아? 다시 물을 사람이 있느냐?
정말 오늘 큰일을 위해서니까...
速致問來(속치문래)하라. 와서 빨리 물어라.
儞纔開口(이자개구)하면, 그대들이 만약 입을 막 열기만 한다면
早勿交涉也(조물교섭야)니라, 벌써 交涉이 없다ㆍ벌써 交涉이 없다.
입 열고 뭐라고 하기 전에 벌써 그 자리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옛날 큰스님들 법문 그렇지요.
법사가 한 걸음ㆍ두 걸음 법상을 향해서 걸어가서 법상에 오르기 전에 이미 법은 그 자리에 다 나타나 있다. 여러분이 법문 들으려고 집에서 출발해서 여기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진짜법문, 진짜 법은 거기에 다 꽉~ 차있었습니다. 진짜법은... 진짜법이 꽉~ 차있지 않고는 이 자리에 올 수가 없습니다. 진짜법이 꽉~ 차있지 않고는 법사가 여기까지 걸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큰스님들 법문은 그래요. 법사가 법상에 오르기 전에 법은 이미 설해 마쳤다ㆍ법은 이미 설해 마쳤다. 법문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법석에 오기 전에, 법당에 오기 전에 이미 법문 다 들어 마쳤다. 법문들을 것, 진짜법문은 다 들어 마쳤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맞는 말씀입니다.
무슨 법이기에 그런가? 이것 알아야 되는 것이지요.
도대체 뭐가 진짜법이기에 그런가? 그런 뜻입니다.
纔開口하면, 막 입을 열기만 하면 早勿交涉이다. 벌써 交涉이 없다
何以如此(하이여차)오? 왜 그런가?
不見(불견)가 釋尊이 云(석존운) 法離文字(법리문자)며,
釋尊이 云. 석가모니부처님 법문을 여기 인용합니다. 법은 문자를 떠났다. 우리는 8만 대장경을 법이라고, 일단은 우리 수준에는 그것이 또 법이니까요. 法寶라고 애지중지합니다. 그런데 “진짜 법은 문자를 떠났다.” 부처님이 하신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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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