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낮고 생 짧았지만 항일투쟁 외길…그의 의로운 행적 오래도록 남으리
<29> 의병장 신돌석
신돌석 의병장은 1878년(고종 14)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반봉건의식에 눈을 뜬 그는 일제가 조선을 수탈하자 항일의식을 가졌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세의 나이로 영해(영덕 옛지명)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거사를 일으켰다.
사진은 신돌석 의병장 생가 전경. 김정목 기자 tigerjm@idaegu.com
복원된 신돌석 의병장 생가. 일제는 지난 1940년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이곳을 불태웠다.
이후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지난 1995년 초가집으로 복원했다.
현재 이곳은 경북도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됐다.
네 폭짜리 낮은 병풍 같은 마을 뒷산은 어둠 속에 잠겨있다.
새벽의 고요가 따라 흐르는 개울물로 얼굴을 씻은 소년은 솔밭으로 걸음을 옮긴다.
깃을 내린 날짐승들이 놀란 듯 후두둑 숲을 떠난다.
소년은 자신보다 훨씬 큰 소나무 가지를 흔들더니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듯이 건너뛰는 게 마치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타고 노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가볍게 땅 위로 발을 내린 소년은 매서운 눈초리로 앞을 노려보며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돌멩이가 날아갈 때마다 건너편 키 큰 소나무의 솔방울들이 하나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소년은 새벽마다 이렇게 뒷산을 오르내리며 날랜 동작을 익혀나갔다.
그날도 소년 신돌석은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났다.
아버지가 머슴살이하는 주인집의 아래채에 살던 돌석은 슬그머니 사립문을 열고 바깥마당을 빠져나서려는데 주인집의 황소를 몰고 나가는 건장한 사내 둘이 보였다.
돌석은 이른 새벽 마굿간을 연 사람이 아버지를 돕는 중머슴이라 여기며 “복이 아젠기요?”하고 말을 걸었다.
대답은커녕 움찔하는가 싶더니 두 사내는 오히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였다.
돌석은 직감적으로 소도둑이라 생각이 들어 슬금슬금 그들을 뒤따라갔다.
도둑들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돌석은 자갈돌을 하나 주어 들고 앞서가는 도둑의 정강이를 겨냥했다.
“야! 이 도둑놈아 당장 그 소를 놓지 못하겠느냐” 하고 고함을 치며 정확하게 돌팔매질을 했다.
그러자 약이 오른 도둑들은 “이 조그마한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하면서 위협적으로 돌석에게 바짝 다가섰다.
돌석은 이때다 싶어 몸을 공중으로 날려 한 사내를 무논 바닥으로 매치자 혼비백산한 다른 사내는 소이까리를 놓은 채 어둠 속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어린 돌석이 소를 몰고 집으로 들어서니 모두들 외양간의 소가 없어졌다고 야단법석이 나있었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돌석의 비범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혈기는 왕성하고 몸은 날래지만 신돌석은 시서를 익힐 지육의 기회가 없었다.
머슴의 아들이기도 하거니와 달리 서당이 없던 그 마을엔 최씨 어른이 훈장이고 그의 사랑방이 서당이었다.
또래의 동네 아이들이 그 댁에 모여 천자문을 읽었지만 돌석은 문간에서 들려오는 뒷글로 만족해야 하였다.
사춘기에 들어선 돌석은 좁은 산촌의 삶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날 돌석은 어머니가 사준 주먹밥을 옆구리에 끼고 마을 앞 축산 바닷가로 나갔다.
짙푸른 동해가 눈앞에 넘실거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저 끝에는 훨씬 넓고 다른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영릉의병 대장으로 일제에 항거
여러 고을을 떠돌아다닌 지 두어 해 지났다.
근래 들어 새로운 세상 이야기들이 돌석의 마음을 충동질했다.
관리들의 학정에 못 이긴 전라도 고부 땅의 농민들이 난리를 일으켰다는 소문에는 귀를 쫑곳 세웠고 청나라가 일본군에 대패했다는 소식에는 막연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런가 하면 명성황후가 일본군의 손에 시해되었다는 끔찍한 소식에는 울분이 머리끝까지 치올라 가슴이 꽉 막히고 말았다.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일본이 우리 예법을 모두 바꿔버렸대”, “돌석아 너도 나처럼 머리를 깍아야해”, “곧 순사가 쫓아와 너의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버릴걸”
남성다운 강골로 성장한 장산 신돌석은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넓어졌다.
타고난 기질이 호쾌한 그는 영해와 평해 등 지역사회는 물론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다양한 지사와 교유하고 시국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즈음 명성황후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 민족적 치욕에 분노한 각 지방의 지식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이 된 신돌석은 1896년, 영해 일원에서 명망이 높던 유림, 이수악을 중심으로 일으킨 영해의진에 참여하고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는데 가담했다.
그러다가 남한산성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병진과 안동의 유시연이 이끌던 의병진과 합세하는 등 전세를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러나 1896년 7월, 영덕을 공격하려던 개전 초기에 김하락의 부대가 대패하고 그가 목숨을 끊자 장산(신돌석의 호)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의병진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지냈다.
경북 울진에 위치한 월송정. 이곳에서 신돌석 의병장은 시국을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마을에서 오십리 밖에 있는 평해의 월송정을 다녀왔다.
청푸른 파도는 정자의 누마루 앞으로 철썩거리고 아스라이 펼쳐 있는 솔밭에는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솔가지 끝을 가려 주고 있었다.
장산은 비장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한 수의 시를 읊으며 시국을 한탄하였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선조들이 이룬 옛 터전을 탄식 하네/ 사나이 스무 일곱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불어오는 갈바람 결에 감개만 깊네//
날이 갈수록 일본의 압제는 더해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을사늑약)하고 말았다.
국망의 상황을 지켜보던 많은 지식인들은 목숨을 끊기도 하고 의병으로 일제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장산은 곰곰이 생각했다.
‘지난 을미년 때의 전투경험을 살려 보다 체계적으로 전장을 지휘하리라.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싸울 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기꺼이 나라 위해 내 한 몸 바치리라’ 스스로를 다짐한 장산은 1906년 3월, 영해 주변의 활빈당과 3백여명 농민들을 규합하고 ‘영릉의병’이라는 기치를 높이 세웠다.
“나라는 오로지 임금의 것만이 아닙니다.
풀 한 포기 날짐승 한 마리, 그리고 초민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주인입니다.
주인이 어찌 내 가족 내 땅을 잃었다고 슬퍼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분연히 일어나 힘을 합치고 생명을 걸어 항전합시다”
장산의 연설은 하늘을 감동케 하는 대웅변이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하나로 묶기에 충분하였다.
신돌석의 명성과 함께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커졌고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장산은 먼저 영해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울진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을 격침했다.
또한 평해와 원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진위대를 무력화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장산의 의병부대는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 동해안 일대와 영양, 청송, 의성, 봉화 등 경북 내륙지방과 정선, 원주 등 강원도 내륙지방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신돌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다 도망치기 일쑤였고 지역 주민들은 장산을 ‘태백산 호랑이’라 불러주었다.
1907년 겨울로 접어들자 신돌석의 의병진은 영양의 일월산에서 휴식하며,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군인 등 전문적인 전투 병력을 보충한 다음, 1908년 봄부터 가을까지 동해 중북부의 중요지역에서 유격전과 양동작전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가 하면 1907년 11월, 이인영을 중심으로 전국 의병연합체, ‘13도창의군’이 결성될 때 장산은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서른 한 살의 푸른 목숨
신돌석 의병장 유적지에 마련된 기념비와 시국한탄시비(오른쪽).
신돌석 의병장 영정을 모신 충의사를 찾기 위해서는 내삼문을 거쳐야 한다.
내삼문은 호국의지를 다지기 위해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을사늑약 이래 일제의 만행은 갈수록 더해지고 일본군의 규모가 크게 늘어나면서 의병활동의 입지가 점차 좁아들기 시작하였다.
할 수 없이 1908년 동짓달, 장산은 영덕의 눌곡으로 잠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반가운 옛 부하를 만나게 된다.
그것이 악연이었다.
일제의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가 무방비한 상태에 있던 돌석을 내려쳐 그만 비명횡사하게 한다.
오호 통재라! 오로지 전장에서 살다 보낸 서른 한 살의 푸른 나이, 그의 최후는 이렇게 허무하고도 비통하기 그지없다.
민족 구국의 항일투쟁으로 온 삶을 살다간 장산 신돌석, 비록 그 몸은 낮고 생은 짧았지만 의로운 그 행적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그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와 마을 앞 7번 도로 동편에 세워놓은 ‘의병장신돌석장군유적지’에는 그가 영생하고 있음을 글로 대변하고 있다.
항일의병사에서 전례가 드문 평민신분의 의병장. 오로지 나라 사랑에 한 몸을 바친 그의 삶은 세월을 더할수록 푸르러 청푸르리라.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