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aling Through the Dark Emotions
어두움의 감정을 통해 치유하기
by Miriam Greenspan
미리암 그린스팬
One does not become enlightened by imagining figures of light but by making the darkness
conscious.
—C. G. JUNG
빛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어둠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가능하다.
- 칼 융
we are all experienced sufferers: grief, despair, and fear are our human birthright as much as joy, wonder, and love. There is no life without loss and therefore no life without grief. There is no life without vulnerability and therefore no life without fear. So long as we live in a world where terror, violence, environmental degradation, injustice, and scarcity exist, despair will find its unwelcome way into our hearts and souls.
우리는 모두 고통의 경험을 갖고 있다. 슬픔, 절망, 두려움은 기쁨, 경이로움, 사랑 만큼이나 우리 인간의 생득권(生得權)이다.
상실 없는 삶이 없으니 슬프지 않은 삶도 없다.
취약하지 않은 삶이 없으니 두려움 없는 삶도 없다.
우리가 테러, 폭력, 환경, 붕괴, 부정부패, 그리고 기근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한, 절망은 우리가 절대로 반기지 않을 길을 통해 우리의 가슴과 영혼으로 들어올 것이다.
These are our worst feelings, and they are part of every life. When I call them dark, I don’t mean that they are bad, unwholesome, or pathological. I mean that as a culture we have kept these emotions in the dark—shameful, secret, and unseen. As a result, we tend, for the most part, to shun them. But the emotions that we reject and suppress can become dark in an altogether different sense: like a rich, fertile soil from which unexpected flowers can bloom.
이러한 감정은 우리에게 최악의 감정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일상 생활의 일부분이다.
내가 그것들을 어둡다고 할 때, 그것들이 나쁘고 불건전 하며 비정상적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 감정을 수치스럽고 비밀스러우며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가둬 놓았음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고 억압한 감정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어두워질 수 있다. 마치 풍요롭고 비옥한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꽃들이 피어 오르는 것처럼.
In the throes of grief, fear, or despair, we generally believe that giving feelings like these too much space in our psyches is a sign of emotional weakness or breakdown. We turn away, not toward them. The enlightened Buddha saw that such aversion to suffering only worsens it. Still, for those of us who are not yet enlightened, when things go wrong, we want out. When we are besieged by afflictive emotions, we try to find a way around them. The last thing we want to do is go through them—even if doing so would lead us to unimaginable gifts on the other side.
슬픔, 두려움, 또는 절망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정신에 너무 많은 공간을 주는 것이 감정적인 나약함이나 붕괴의 신호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들을 향하지 않고 등을 돌린다. 깨달은 붓다는 혐오가 그것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우리는 일이 잘못되어 간다 싶으면 도망치고 싶어 한다. 번뇌의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 노력한다. 우리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은 그것을 통과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건너편에 상상도 못할 훌륭한 선물들을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Dread of the dark emotions is not always this extreme or so openly acknowledged. But it is always a force to be reckoned with. The fear of falling into the darkness, of going down and not being able to come up, lurks right at the edge of our ability to feel at all. Like a child who locks the closet door in terror of the monster inside, the more we lock up our dark emotions, the more we fear that they’ll jump out of the closet and devour us. Our culture reinforces this fear, which I call “emotion-phobia.”
어둠의 감정에 대한 불안함이 항상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감정은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둠 속으로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 떨어지고는 다시는 못 올라올 것 같은 두려움이 그것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의 끄트머리에 숨어 있다.
옷장 속에 괴물이 무서워서 옷장을 꼭 잠그는 아이들처럼, 우리가 어둠의 감정을 가두면 가둘수록 그들이 옷장에서 튀어 나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더욱 더 커진다.
우리의 문화는 이 두려움을, 내가 ‘감정 공포증’이라고 부르는 것을 강화시키고 있다.
As a result, when we are deluged by dark emotions, we are rarely in shape for dealing with them. We find ourselves adrift in a sea of overwhelming feelings without the ability to swim—and no life raft in sight. Just when we think we need the biggest painkiller we can get, we find out that even Prozac won’t simply remove our suffering.
그 결과 우리가 어둠의 감정에 잠겨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다룰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수영할 줄도 모르면서 우리를 압도하는 감정의 바다 위에 뗏목도 없이 표류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가 필요 하다고 생각할 때, 심지어 항우울제 조차도 우리의 괴로움을 간단히 없애 주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Distracting ourselves from emotional pain may work well enough for most of our garden-variety displeasures, so long as life doesn’t slam us on the head. But sooner or later, we all get slammed.
가장 흔한 경우엔 감정적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삶이 우리의 머리를 정통으로 후려치기 전까지만 그러하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두들겨 맞을 것이다.
Perhaps, like many people today, you are deeply aware of living in a world that is both dangerous and endangered—an environment that triggers the dark emotions on a daily basis.
Perhaps not personal adversity but awareness of the enormity of pain in the world, and of danger to our planet itself, is the source of your grief, fear, or despair. Or perhaps you feel these emotions and don’t know what to connect them to or how to cope with them.
아마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여러분은 위험하고 위험한 세상, 즉 매일 어두운 감정을 유발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이 세계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인식이 당신의 슬픔, 두려움, 절망의 근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마도 여러분은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고 그것들을 무엇과 연결시켜야 할지 혹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Our culture exhibits a curious ambivalence toward such emotional pain. On the one hand, it teaches us to control our pain or medicate it; on the other hand, we are urged to feel, express, and release our emotions.
우리의 문화는 이러한 감정적 고통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고통을 통제하거나 약으로 처리하라고 가르친다.
다른 한 편으로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풀어 놓으라고 강요한다.
“Get ahold of yourself.” “Get a grip.” “Stay in charge.” These metaphors of management and control illustrate what we believe to be the “positive” way to deal with “negative” emotions. We must manage feelings that would otherwise be destructive.
‘진정 해라’ ‘정신 바짝 차려라’ ‘상황을 통제할 준비를 하라.’
이런 관리와 통제의 은유적 표현들은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데 ‘긍정적’ 이라고 믿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반드시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은 파괴적인 것이 될 것이다.
Our distrust of the dark emotions has been heightened by recent mind-body research that concludes that negative emotions are bad for you, contributing to life-threatening illnesses from asthma to cancer, cardiovascular disease to immune system disorders. By and large, this research neglects to distinguish between emotions that are experienced mindfully—that is, fully experienced in the body in a direct and open way, as they occur—and those that are not mindfully experienced or have become “stuck” in the body.
부정적인 감정은 천식에서 암, 심혈관 질환, 면역 체계 질환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최근의 심신 연구에 의해 우리의 어두운 감정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었습니다.
대체로, 이 연구는 정신적으로 경험되는 감정, 즉, 발생할 때 신체에서 직접적이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완전히 경험되는 감정과 정신적으로 경험되지 않거나 신체에 "고착"된 감정을 구별하는 것을 무시합니다.
At the same time, the explosion of healing modalities in the psychotherapy, New Age, and recovery movements in the past several decades has heralded a new epoch of “getting in touch with your feelings.” It is now hip to be in therapy, where it was once a stigma. It seems that everyone is in some kind of therapy, recovery program, or healing path. Or on Prozac, Zoloft, or Paxil. As a nation, we seem to believe that, with the right effort, we can completely eradicate emotional suffering. In either case, whether it’s control or catharsis we seek, we regard negative emotions as a dangerous hindrance to the good life. The focus is on dispelling such feelings, not learning from them.
이와 동시에 상담 심리치료, 뉴에이지 운동, 회복 운동의 폭발적인 증가는 감정과 의 접촉이라는 신세기를 포고했다. 한때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상담 치료에 유행이 되어 버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담치료,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치료 수술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프로작, 졸로프트, 또는 팩실을 복용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제대로 노력한다면 감정적 고통을 완전히 박멸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어느 경우에도 그것이 통제이든, 우리가 추구하는 카타르시스이든,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웰빙의 위험한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몰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In this book we will explore another way: the healing wisdom of the dark emotions. We will discover that there’s something good in so-called bad feelings —but that we can only get to the good by fully experiencing the “bad.” Grief, despair, and fear are really neither positive nor negative but simply human emotions; it is our attitude toward them that’s negative. The dark emotions can be our best, albeit most demanding, spiritual teachers, when we can get beyond the compulsion to control them. By learning how to attend to, befriend, and surrender to the energies of grief, despair, and fear, we create the conditions for something new to arise in ourselves and in the world. We discover an unexpected gateway to healing and transformation. We release ourselves from the strangled grip of pain into an amazing alchemy by which grief, despair, and fear are transmuted to gratitude, faith, and joy.
이 책에서는 이와 다른 방법으로서 어둠의 감정의 치료적 지혜를 탐험할 것이다. 슬픔, 절망, 두려움은 실제로는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아니다. 단순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일 뿐이다.
다만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둠의 감정은 우리가 그들을 통제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영적 스승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슬픔, 절망, 두려움의 에너지를 돌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가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 그리고 이 세상에 새로운 어떤 것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치유와 승화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통 통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통에 억눌린 통제로부터 슬픔, 절망, 두려움을 감사, 신뢰, 기쁨으로 변환시키는 놀라운 연금술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Now is a fruitful if not urgent time to learn the alchemy of the dark emotions.
For those who desperately need a way to feel more hopeful, resilient, and joyful, take heart! The emotions that appear to afflict us can be the vehicles of our liberation from suffering. Experiencing our grief, fear, and despair in a new light, we renew our capacities for gratitude, joy, and faith. We grow in courage and compassion. We approach the world with less fear and more wonder. We have more energy for changing the things that matter. These gifts can only be found when we are unafraid to dance the dance of dark emotions in our lives. Let’s dance.
지금 어두운 감정의 연금술을 배우는 것은 시급하지는 않지만 유익한 시간이 됩니다.
더 희망적이고, 탄력적이고, 기쁨을 느끼는 방법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라면 용기를 내세요!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이 고통으로부터의 잡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슬픔, 두려움, 절망을 새로운 견지에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감사, 기쁨, 믿음에 대한 능력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용기와 자비심을 기를 수 있다. 덜 두렵고 더 경이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선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둠의 감정과 춤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만 찾을 수 있다. 자 춤을 추자.
Emotion-Phobia and the Head/Heart Split
감정 공포 증과 머리와 가슴에 분열
For many centuries, we have lived in the shadow of the great divide between reason and emotion—the head/heart split in which the Western world, since Plato, has been schooled. We believe that our rationality is what makes us human and thereby distinctly different from the apes. Emotions, as part of our instinctual animal nature, are seen as dangerous and inferior to reason. We believe that submitting to their unencumbered, uncontrolled, free flow would destroy our capacity to think and function rationally, would make us dangerous, or win us a permanent place in the loony bin.
수세기에 걸쳐 우리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 큰 분수령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 왔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 사회는 이성과 감정의 분열을 지속적으로 학습해왔다. 우리는 합리성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따라서 원숭이와 확실하게 다르다고 믿는다. 감정을 우리의 동물적 본성의 일부로서 이성에 비해 위험하고 저열한 것으로 여긴다. 그 거칠 것 없고 다루기 힘들고 제멋대로 흐르는 감정의 우리를 내 맡기는 것은,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하거나 우리를 위험 속에 빠뜨리거나 또는 영원히 정신병원에 쳐 박아 놓을 것이라고 믿는다.
Although the distinction between mind and body originated with the Greeks, it was Descartes, the seventeenth-century French thinker, who made this philosophy the systematic basis for the sciences. Only reason, he argued, is a reliable guide to truth and certainty (“I think, therefore I am”)—not the senses or the emotions. Ever since Descartes, the head/heart split has been the basis of how our society defines rationality. We think that the inferior heart is trustworthy only when dominated by the superior head. This split of head and heart is what we hold as the gold standard of maturity, even if we never totally live up to it.
이러한 철학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데카르트다. 그는 진실과 확실성으로 이끄는 가장 믿을만한 안내자는 감각과 감정이 아닌 이성이라고 주장했다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는 저열한 가슴은 오직 월등한 머리에 의해 지배 될 때만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머리와 가슴의 분리는 우리의 성숙함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 따라 살고 있지는 않다.
In fact, the head/heart split is a source of profound disconnection. Affect is detached and dissociated from cognition. We learn not to feel through what we think, not to think through what we feel. In separating reason from emotion, we’ve been conditioned to place our trust in the former, culturally masculine attribute, and not the latter, culturally feminine one. We associate reason with strength, merit, safety, and men; emotion with weakness, wildness, danger, and women. Emotion-phobia—the fundamental fear of the raw power of emotional energy—is bolstered by this set of normative, gender-polarized beliefs about the supremacy of reason over emotion.
머리/가슴의 분열은 깊은 단절의 근원이다.
감정은 인식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며 그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을 통해 생각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이성을 감정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남성적 특징을 가진 이성을 신뢰 하도록 조건화 되어 왔지만, 문화적으로 여성적 특징인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이성을 힘, 장점, 안전, 남자와 관련 짓고 감정은 약함, 미개함, 위험, 여성과 관련 짓는다.
감정 공포증은 감정 에너지의 가공되지 않은 힘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다.
이 감정 공포증은 규범적이고 성적으로 양극화된 이성의 감정에 대한 우월함에 의해 강화된다.
This wrenching split of head and heart is a cornerstone of patriarchal culture, which teaches detachment from emotion as the highest goal of emotional intelligence. The result, in the body politic as in an individual like Mark, is a fragmentation that breeds a great deal of unnecessary suffering.
머리와 가슴에 비틀어진 균열은 전제군주적 문화의 주추돌이다.
이 전제군주적 문화는 우리에게 감성지능의 최고 목표인 감정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결과는 우리 개개인에게 많은 불필요한 괴로움을 유발시키는 혼돈이다.
Five Common Ways to Cope with Dark Emotions
어둠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 5가지
It’s not the dark emotions that hurt us but our negative attitudes, unskillful ways of coping, and emotion-phobic reactions to them. When we don’t know how to listen to our pain, we rely on the stock ways of coping with the dark emotions that we learn in the culture at large. Probably none of us has ever had a single class in grade school, high school, or college called “How to Cope with Emotional Pain.” Nevertheless, through family conditioning and religious teachings, and in the culture as a whole, we are schooled to endure, deny, bypass, avenge, and escape painful emotions. These five common ways of coping have their strengths and weaknesses, but for the most part they aren’t conducive to healing and transformation.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어둠의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태도와 어설픈 대응 방법, 그리고 감정 공포증적 반응이다.
고통을 경청하는 방법을 모를 때,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문화로부터 배운 평범한 대처법들에 의존한다.
가족상황과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전체 문화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인내하고, 거부하고, 비켜가고, 보복하고, 피하라고 교육받았다.
지금부터 설명할 일반적인 대처법 5가지는 각각 장 단점이 있지만 대부분 치유와 승화와는 거리가 멀다.
ENDURE
인내
Endurance is the ability to withstand suffering without collapsing. In enduring, we survive—and humans have shown that we can survive even the most unimaginable and unspeakable suffering. At times, endurance is a simple matter of putting one foot in front of the other and moving on. Some people are helped to do this by faith. As an antidote to the pain of life, religion offers the balm of God’s plan and a glorious day in the hereafter. It’s easier to endure the sorrows of death and loss, or of desperate social circumstances if we believe that God has a plan we don’t understand and that we will meet our loved ones in the world to come. The assurance of God’s hand in our individual destinies, and the promise of tomorrow’s perfection, as Karl Marx observed, is one of the most effective opiates for suffering.
인내는 괴로움에 굴복하지 않고 참아내는 능력이다.
인내를 통해 우리는 살아 남는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최악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인내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때로 인내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으면서 걸어가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힘에 의지하여 인내한다.
삶의 고통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종교는 미래에 대한 신의 계획과 영광의 날이라는 치료 연고를 제공한다.
신은 우리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계획을 갖고 계신다. 신이 약속한 새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고 굳게 믿는다면 죽음과 상실의 슬픔 또는 절망적인 사회 환경에 대한 슬픔을 견뎌내기가 한결 쉬워진다 이는 칼맑스가 통찰했듯이 괴로움에 대한 효과적인 아편들 가운데 하나다.
Those who are not blessed with this kind of faith must base their endurance on a secular view of the world in which endurance and stoicism are synonymous.
In this belief system, adults are people who can rule their emotions and endure suffering without emotional display.
Negative emotions are a wilderness within that must be conquered to preserve “civilized” order.
A lack of control over emotions is a sign of moral turpitude or spiritual weakness.
Emotional control is a special requisite for men, who are taught early and often violently that any emotion but anger is effeminate. But women too—if they are “classy”— must learn to endure their emotions in silence.
이러한 유형의 믿음으로부터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은 인내를 금욕과 인내가 동의어로 여겨지는 세속적인 세계관에 기반을 둔다.
이 믿음 체계에서 성인은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고 드러내지 않으며 괴로움을 참아 내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문화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정복 되어야 할 야생의 것이다.
감정에 대한 통제력의 부재는 도덕적 타락함 또는 정신적 나약함에 표상이다.
감정의 통제는 어릴적부터 폭력적으로 성내는 것을 제외한 어떤 감정도 여자 같은 것이라고 배우는 남성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침묵 속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운다.
In our culture, endurance implies an ability to detach from emotion and to carry on as though we are not really torn up inside. In this idea for coping with suffering, emotion itself is the overt sign that we are not coping well.
우리 문화에서 인내란 감정으로부터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능력을 암시한다. 괴로움에 대처하는 이 방법에서 볼 때, 감정 그 자체는 우리가 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DENY
부정
Denial is unconscious detachment from emotion and the truth that emotion holds. We think of it as aberrant, but it’s actually an extension of the normal mode of coping with emotion that our society values. In Western society, we learn to detach what psychologists call “affect” from cognition—to separate feeling from thinking. This normal dissociation actually contributes to more extreme forms of denial. Extreme denial is one of the most destructive forces in the world, a kind of “hear no evil, see no evil, speak no evil” consciousness that paradoxically allows evil to flourish.
부정이란 감정과 감정이 가지고 있는 진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초연한 것이다. 우리는 이 부정을 지나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우리사회가 가치 있게 여기는 감정 대응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는 감정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부르는 것을 인식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다시 말해 감정을 사고로부터 분리 시킨다. 이러한 분열은 좀더 극단적인 형태의 부정이 기여한다.
극단적인 부정은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힘들 가운데 하나로 ‘악을 듣지도 보지도 말라’는 식인데, 모순적이게도 이것이 악을 더 판 치게 만든다.
Victims as well as perpetrators of evil use denial—but for different purposes. Many perpetrators deny that their violent actions ever took place, or that they were harmful. The victim’s denial, on the other hand, is a way of coping with emotional pain that is too overwhelming to experience directly. Denial is a survival mechanism that must be gradually replaced by the authentic experience of the dark emotions before healing can happen.
나쁜 일을 당한 피해자 뿐만 아니라 나쁜 일을 한 가해자 역시 목적은 다르지만 똑같이 부정의 방법을 사용한다.
많은 가해자들은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을 부인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을 부정한다.
한편 피해자들에게 부정은 직접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인 감정적 고통에 대처하는 한 방법으로 쓰인다.
부정은 치유가 일어나기 전에 서서히 어두운 감정의 진정한 경험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생존 메커니즘입니다.
TRANSCEND OR BYPASS
초월 또는 우회
Transcendence is about “rising above” our feelings. Sometimes we can do this by setting our sights on something “higher.” But in most cases, to transcend suffering authentically, we must be willing to live it fully. To rise above, we must go through—without any guarantees of what we’ll find on the other side.
초월은 우리의 감정을 위로 올리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시야를 무엇인가 더 높은 것을 향하여 고정 시킴으로써 초월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완전히 괴로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괴로움과 충분히 함께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위로 올리기 위해서는 저편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아무런 확신 없이 그것을 거쳐야 한다.
Problems arise when we mistake what some have called a “spiritual bypass” of suffering with genuine transcendence. The latter, in my experience, is not something you can plan, predict, or control. It’s the gift of grace. Spiritual bypass, on the other hand, is usually based on false beliefs that mask denial.
The cult members who took their own lives in the belief that they would leave the planet on a spaceship and live happily ever after in another, higher plane of existence were not transcending their suffering—they were attempting to spiritually bypass it in their denied act of mass suicide. The strand of New Age metaphysics that denies the evils of earthly existence and declares that only love and light are “real” is a more popular form of false transcendence.
문제는 우리가 진정한 초월과 소위 ‘영적인 우회’를 착각 할 때 일어난다.
진정한 초월은 당신이 계획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은총의 선물이다. 반면에 영적인 우회란 일반적으로 부정을 위장하는 거짓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신 종교집단의 신자들, 특히 지구를 떠나 또 다른 고상한 세계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짓 초월을 시도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집단 자살 등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 영적인 우회를 시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세속적 존재의 악행을 부정하고 오직 사랑과 빛만을 이 진실이라고 선언하는 뉴에이지 형상학의 조류는 좀 더 대중적인 형태의 거짓 초월이다.
AVENGE
보복
In vengeance, we neither bury nor rise above our suffering; we get mad and we get even.
앙갚음을 통해서는 우리의 괴로움을 파묻을 수도, 위로 올릴 수도 있다.
화 나서 그대로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
Angry vengeance is socially conditioned as a masculine way to cope with grief. The opposite of spiritual detachment, which teaches us not to act on our emotions, vengeance is about finding an action as violent as the act that has left us steeped in unbearable grief or despair. The hypermasculine mode of dealing with helplessness and vulnerability is to kill someone as a release for your own intolerable pain.
슬픔에 대처하는 남성적인 방법인 성난 보복은 사회적으로 습관화 되어 있다.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응대 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영적인 이탈의 반대급부로서 복수는 우리를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슬픔 또는 절망으로 몰아 놓은 그 행위 만큼 폭력적인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력함과 취약성을 다루는 극단적으로 남성적인 형태는 자기 자신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해방 시키고자 다른 이를 죽이는 것이다.
The intractable areas of unending violence in the world— between Israelis and Palestinians in the Middle East, between Bosnians, Serbs, and Croats in the former Yugoslavia, between Hutus and Tutsis in Rwanda—are places of chronic vengeance where whole populations are continually traumatized and re-traumatized by the violent death of loved ones. These cycles are both fueled by and contribute to intergenerationally transmitted unredeemed grief.
끊임없이 폭력이 행해지는 분쟁 지역들이 이 세계에 있다.
중동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구 유고슬라비아의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 등등, 이 지역들은 인구 전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의해 반복적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고 있다.
이들의 악순환은 회복되지 않은 슬픔이 세대간의 전해지도록 하며 또한 세대간의 이어지는 그 슬픔이 분쟁을 부채질한다.
Seeking relief from suffering in angry acts of vengeance only ends up enclosing us in our wounds. If “enemies” could grieve together for all the wasted blood, they might find a way to peace. But communal sharing of grief that crosses the lines dividing race from race, tribe from tribe, ethnic group from ethnic group, nation from nation, is not one of our common ways of coping with suffering.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복수라는 성난 행동으로부터 찾는 것은 우리를 우리 상처 안에 가두는 것으로밖에 귀결 되지 않는다.
만일 적들이 헛되이 흘려 보낸 피를 모두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평화로의 길을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족 사이, 부족 사이, 인종과 인종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선을 그어 놓는 슬픔을 다 같이 공유하는 것은 괴로움에 대응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다.
ESCAPE
회피
Escape would probably win the contest for most popular way of coping with suffering in the West. And nobody does it better than we do. Americans have mastered the art of distraction and escape to the highest point of any nation, and we are teaching what we know to the rest of the world—exporting more and more entertainment, celebrity worship, and addictive consumerism. Buying, owning, using gadgets, consuming experiences—these are the hallmarks of a culture of escape; so is the inability to tolerate silence.
회피는 아마 서구사회에서 괴로움에 대응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 가운데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특히 미국인들은 주의 분산과 회피의 기술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 월등 하게 통달 해왔다. 그리고 그 아는 바를 오락, 유명인 숭배, 중독적인 소비주의를 전세계에 가르치고 있다. 잡다한 것들을 사고, 소유하고, 사용하는 소비 경험은 회피 문화의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The most extreme forms of escape with the most devastating consequences are addictions. Ours is a “user” culture. Americans are the most addicted people in the world—and our primary addiction is to feeling good. Whatever else addiction is, it is always a way to numb or soothe the dark emotions we cannot tolerate. Even milder, less destructive forms of escape like renting a stack of videos when you’re sad can abort the alchemy of dark emotions.
가장 형편없는 결과를 일으키는 극단적 형태의 회피는 중독이다.
우리의 문화는 사용자 문화다.
미국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독이 강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중독은 즐겁게 느끼기다. 즐겁게 느끼기 역시 우리가 참아낼 수 없는 어둠의 감정을 마비 시키거나 달래는 한 방법이다.
슬플 때 비디오를 수북히 쌓아놓고 보는 것과 같은 덜 극단적이고, 덜 파괴적인 회피 형식도 어둠의 감정의 연금술을 좌초 시킬 수 있다.
According to Daniel Goleman, distraction is a bona fide skill of emotional intelligence that helps us cope with “negative” emotions. I would add: only temporarily. Distract yourself from a deep sorrow and it will come back to haunt you. While distraction can stave off feeling overwhelmed by intense emotional energy, it can also suppress a necessary flow of emotion. In a culture of distraction, we resort to this “skill” too often, and lack other skills that are more useful to emotional and spiritual growth. Distracting ourselves from our emotional pain, like taking painkillers to blunt physical pain, doesn’t help us get to the root of what ails us.
심리학자인 대니얼 골먼에 의하면 주의분산은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감정 지능의 진정한 기술이라고 한다. 나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오직 잠시 동안만 깊은 슬픔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돌아와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주의분산이 강도 높은 감정 에너지 압도된 느낌을 피해가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한 필수적인 감정의 흐름을 억제 하기도 한다.
주의분산의 문화에서 우리는 이 기술에 너무나 자주 의지하는 탓에 감정적 영적 성장에 도움 줄 수 있는 다른 기술들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육체적 고통을 둔화 시키기 위해 진통제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감정적 고통으로부터 분산시키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도록 돕지는 못한다.
In my view, distraction is actually one of the less skillful ways of coping with the dark emotions—a method we resort to when we have a low tolerance for discomfort or when we don’t know any other ways to cope. Indulging in a distracting “getaway” is sometimes just what the doctor ordered. But ultimately coping with grief, fear, or despair is not the same thing as using these emotions as vehicles for healing and transformation.
내가 보기에 주의분산은 어둠의 감정에 대응하는 덜 숙련된 방법들 가운데 하나다. 주의분산은 우리가 불편함에 대한 인내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응하는 다른 방법들을 모를 때 우리가 의지하는 방법이다.
주의분산을 통한 달아남에 탐닉하는 것은 종종 의사들이 처방으로 내려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어둠의 감정을 치유와 승인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These five common ways of coping with suffering have their uses. They can be a crucial part of surviving and affirming life. We can outlive what we endure. We can use “positive denial” to mute our latent fears in the interest of accomplishing a given task or goal. In this way, denial can be an important part of courage.
고통에 대처하는 이 다섯 가지 방법들은 제각기 그 사용처가 있다.
이 방법들은 삶을 살고 삶을 긍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견디는 것보다 오래 살아 남을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임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잠재된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긍정적인 부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부정은 용기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Genuine moments of transcendence are possible to those who follow a spiritual path and can work skillfully with painful emotions. Distracting yourself from emotional pain is a good skill to use—so long as you’re aware of what you’re doing. Even revenge can find benign forms.
진정한 초월의 순간은 영적인 길을 따르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감정적 고통으로 분산시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있을 때에 한해서 사용하기 좋은 기술이다.
심지어 보복 역시 좋은 형태를 찾을 수 있다.
The mother who founded Mothers Against Drunk Drivers “avenged” her child’s death in a way that brought some good into the world and helped other people heal from similar tragedies. In balance, these ways of coping with emotional suffering don’t have to be a problem. But they become a problem when they are contaminated by emotionphobia. Our fear of the dark emotions and difficulty tolerating them are primary obstacles to endurance without denial, transcendence without spiritual bypass, escape without addiction. Emotion-phobia gets in the way of our best intentions to truly transform suffering.
음주운전에 반대하는 어머니들 모임인 MADD를 발족시킨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죽은 것과 같은 비극으로부터 사고자 가족들이 회복하도록 돕는 것을 ‘보복’의 방법으로 선택했다.
균형을 맞추기만 한다면 감정적 괴로움에 대응하는 이러한 방법들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감정 공포증에 의해 오염 되었을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어둠의 감정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과 낮은 인내심은 거부 없는 인내, 정신적 후회를 하지 않는 승화, 중독 없는 회피 등의 가장 기본적인 장애물이다. 감정 공포증은 괴로움을 진정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의 최선의 의지를 가로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