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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마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16-18 / [금식에 대한 가르침] 금식할 때 위선자들이 하는 것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얼굴을 창백하고 텁수룩하게 하여 보는 사람에게 측은한 생각이 들도록 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17) 너희가 금식할 때에는 얼굴을 깨끗이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고운 옷을 입어라. 18) 그리하여 모든 비밀을 아시는 너희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금식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금식할 때(16) 금식은 어떤 간절한 소원과 인간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음식을 먹지 않고 오직 기도에만 전념하기 위해 행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스스로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제사를 조심히 드리기 위하여 금식했습니다(레 23:27). 이러한 내용이 신약시대에도 이어져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얼굴에 재를 바르는 등 인간적인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이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17)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한 것은 평소처럼 몸을 단장하여 금식하는 표시를 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가 금식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8) 금식하는 자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한 일까지 아시는 하나님만 보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종교 행위 중에서의 금식은 그 어떤 것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므로 사람에게 칭찬받기 쉽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으며, 그들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더 주목받고, 더 칭찬받기 위해 얼굴에 재를 바르고 보기 흉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외식이나 형식적으로 금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금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적용: 금식은 신앙생활에 유익하고, 응답이 많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훈장이나 자랑거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금식을 통해 받았던 은혜를 서로 나누어 봅시다.
금식은 경건 훈련 중에서도 힘들고 강도 높은 훈련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경건 훈련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 위한 목적으로 한다면 진정한 경건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금식을 할 때 외모를 단정하게 하여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보이라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경건 훈련과 같은 말씀, 기도, 봉사 등 하나님의 일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 설 교 >
금식할 때에
마 6:16-18 / 김영규 목사(정윤교회)
금식을 왜 하는가?
금식(nhsteuvw)은 문자 그대로 먹는 것을 금하는 일입니다. 금식은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행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금식을 왜 할까? 성경은 몇 가지 중요한 동기를 알려줍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의미입니다.
금식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기록된 곳이 이사야 58장입니다. 거기에 보면 금식의 동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 58:3-4)
주께서 보시도록, 주께서 알아주시도록, 내 목소리를 주님께 상달하려고 금식합니다. 특별한 기도 제목을 위해 금식을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빌론에서 귀환시킬 때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스8:21) 노약자, 부녀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바빌론에서 유대 땅까지 돌아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귀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귀환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갔던 금을 비롯한 보석류, 밀, 기름, 포도주와 같은 식품을 하사 받았습니다. 이런 물자를 가지고 먼 길을 안전하게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도적떼나 들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왕명을 받았으니, 왕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평소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니 군대의 호위는 필요 없다고 공언했습니다. 이제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을 아하와 강가에 모아 놓고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하나님이 지켜달라고 금식합시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스 8:21)
여호사밧 왕은 모압과 암몬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유다 온 백성에게 금식을 명령했습니다. (대하20:3) 니느웨 사람들은 40일이 지나면 성읍이 멸망한다는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12만 명의 성읍 사람들이 함께 금식했습니다.(욘3:5) 바빌론에 있던 유대인들은 민족 말살의 위기 앞에서 금식했습니다.(에4:16)
개인적 탄원도 마찬가집니다. 정말 긴급하고 간절한 문제가 있다면 금식하고 기도하세요.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을 때에 금식하며 탄원했습니다.(삼하12:16)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었지만, 그 다니엘을 살려달라고 금식했습니다.
오늘 어떤 긴급한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까? 간절한 소원이 있나요? 금식하세요. 가족 구원을 위해서 금식하세요.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자녀들의 혼사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내가 맡은 직분을 위해서 금식하세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둘째로, 회개의 의미입니다.
금식은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수단입니다. 식욕을 억제합니다. 성욕을 억제합니다. 모든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고, 죄를 척결하려는 뜻에서 금식합니다.
먼저 국가적인 회개의 금식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약탈을 당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우상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라!(삼상7:6)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지파의 범죄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 번째, 두 째 전투에 패했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삿20:26) 이때의 전쟁은 개인적 문제가 종족의 문제로 발전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떤 레위인의 부인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강간하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죽은 부인의 시신을 12 토막을 내서 사방에 있는 지파들에게 보냈습니다. 흥분한 지파들이 모여 베냐민을 응징하려고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사과하지 않고 대들자,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전투에 졌습니다. 왜 졌을까? 사실은 그 여인은 간음죄를 짓고 친정으로 도망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적 의미가 있는 죽음인데, 임의로 복수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에 대한 응징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군대가 많다고 무조건 이기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번의 전투에 패하고 나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온 민족이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물론 세 번째 전투에서는 크게 이겼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면서 금식하고 회개합니다.(단9:3)
오늘 내게 죄 문제가 있습니까? 금식하세요. 회개가 잘 되지 않거든 금식하세요. 죄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거든 금식하세요. 악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거든 금식하세요. 욕하는 습관, 화내는 습관, 도박하는 습관, 술 먹는 습관, 음란한 습관. 끊어지지 않거든 금식하세요.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혹은 한 달이라도 금식하세요. 죄를 철저하게 뿌리 뽑고 이길 때까지 금식하세요.
셋째로,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위한 금식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금식하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자동적으로 금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 먹지 않고 40일을 달려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 다니엘은 미래에 다가올 환상을 하나님께 받으면서 삼주(약2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단10:2)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에 아나니아의 집에서 삼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행9:9)
금식은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수단입니다. 당연히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영적으로는 맑아집니다. 정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금식하세요. 신앙의 깊은 체험이 없고,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까? 금식하세요. 천국 얘기 하면 강 건너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립니까? 금식하세요. 십자가 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졸리기만 합니까? 금식하세요. 영생이 무엇이고, 지옥이 무엇인지 무덤덤한가요? 금식하세요. 최소한 사흘 이상, 혹은 일주일간 금식하면서 복음서를 읽어보세요. 분명한 결과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금식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를 세우면서 금식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행 14:23)
금식할 때에
주님은 왜 유대인들의 금식을 문제 삼으셨을까요?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보여야 할 금식을 사람에게 보여줍니다. 일부러 슬픈 기색, 흉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16-18)
유대인들이 이렇게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금식일을 정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금식일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슥 7: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슥 8:19)
사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을 기억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렘52:6-7) 오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왕하25:8) 칠월의 금식은 그다랴 학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렘41:1-10) 시월의 금식은 느브갓네살 왕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를 기억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왕하25:1, 렘52:4) 유대인들은 이런 금식을 습관적으로 지켰습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금식했습니다.(레16:16, 민29:7) 그러던 것이 포로 시대에는 일 년에 네 차례로 늘어났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매주 일주일에 두 차례(눅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월요일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라 하고, 목요일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라고 합니다.
오랜 기간 습관적으로 금식을 하면서 점점 사람에게 보이는 데 치중했습니다. 봐라! 나는 지금 금식한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하는 금식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잘못 된 금식에 대해서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사 58:3-5)
금식일은 거룩한 날인데 오히려 오락을 구합니다. 금식일은 안식일인데 오히려 남에게 온갖 일을 시킵니다. 그것도 모자라 금식하면서 논쟁하고 다투고, 주먹다짐까지 합니다. 겉모양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재를 머리에 뿌리는 고통스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세도 아니고 겸손한 자세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모독입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대신관계가 아니라 대인관계입니다. 사람에게 보여 줘야 할 것은 금식하는 모습이 아니라, 바른 삶의 모습입니다. 금식하는 사실은 하나님께만 보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금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정말 금식하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흉한 얼굴, 슬픈 기색을 보여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한 모습, 거룩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거꾸로 했습니다. 금식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대인관계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행동 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없었습니다. 바른 금식은 오히려 대인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올바른 금식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사58:6-10)
사람들에게 얽매인 결박을 풀어줍니다. 멍에의 줄을 끌러줍니다. 압제 당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멍에를 꺾습니다. 주린 사람에게는 양식을 나눠줍니다.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습니다. 타인을 향한 손가락질을 하지 않습니다. 허망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사람들을 동정하고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실천은 사람에게 합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바른 삶은 사람들 앞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 뭡니까? 이것이 다 올바른 금식입니다! 금식은 행실을 바로 하는 데서 실천 됩니다.
올바른 금식의 결과
올바른 금식에는 분명한 응답이 있고, 놀라운 결과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올바른 금식의 결과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 58:9-12)
첫째는 확실한 응답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원하십니까? 금식하세요. 결과가 곧 나타납니다.
둘째는 밝은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내 어둠이 낮과 같이 됩니다. 내 삶에 어둠이 깔여 있습니까? 눈앞이 캄캄합니까? 금식하세요. 어둠이 변하여 대낮 같이 됩니다.
셋째는 여호와께서 항상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 결과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의 만족을 얻습니다. 내 뼈가 견고하게 됩니다. 튼튼한 힘이 생기고, 지탱할 능력을 얻습니다. 나는 물댄 동산 같아집니다. 물이 끊이지 않는 샘물 같이 됩니다. 삶의 의욕, 만족과 기쁨, 생명력이 나타납니다.
넷째는, 내 후손들이 황폐한 곳을 다시 재건합니다. 무너진 모든 곳을 다시 세우는 자가 됩니다. 길을 만들고 거처를 만듭니다. 자손 잘 되기를 바라세요? 그렇다면 금식하세요. 자녀들이 형통하게 됩니다. 오늘 금식을 통한 모든 응답과 결과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싸움의 기도
마 6:16-18, 마 12:25-29 / 이윤재 목사
두 주전부터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마음의 기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는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간구하는 기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기도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아버지에게 하듯 필요한 것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영적 싸움의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는 싸우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고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 기도를 도표로 보면 이렇습니다.
마음의 기도, 간구하는 기도, 영적 싸움의 기도
친구, 자녀, 군인
각 기도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릅니다. 마음의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구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친구는 무엇을 얻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마음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자녀는 필요한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나 줄 수 있습니다. 주고 받는 관계, 그것이 간구의 기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 싸움의 기도는 우리가 영적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아, 우리는 군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싸울 대상이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주인인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를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군인으로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사람도 연령에 따라 성장하듯 기도도 연륜과 함께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간구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어린아이는 오로지 부모의 보호와 공급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셔야 하고 우리는 받아야 삽니다. 그러다가 자라면 친구와 가까워 집니다. 친구와 도란 도란 언제 날이 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10대를 넘어 20대가 되면 청년의 시대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싸워야 합니다. 진로와 싸우고 생계와 싸우고 환경과 싸우고 운명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반드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초신자때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웬만한 것은 하나님이 다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 스스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싸우기 위해 우리가 할 것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딤후2:1에서 말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영적 싸움에 승리할 사람은 강해져야 합니다. 은혜안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엡6:10절에서 말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영적 군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기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로서 그 분의 은혜와 공급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분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서 마귀와 싸우고 세상과 싸워 승리하기를 원합니까? 오늘은 승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자기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금식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6절입니다.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상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평소에 아주 많이 금식했습니다. 눅18:12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앞에 말했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바리새인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그 날이 월요일과 목요일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월요일은 모세가 시내산 올라간 날이고, 목요일은 내려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은 금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전 민족적으로도 금식했습니다. 대속죄일에는 모든 국민이 금식했습니다. 지금도 욤 키푸르, 대속죄일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당에 나와 금식합니다. 하나님이 그 날 백성들을 심판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슥8:19절에 보면 대속죄일 말고 전 국민이 금식하는 네 번의 기회가 또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아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여기에 4월, 5월, 7월, 10월은 성전이 망하고 나라가 망한 절기입니다. 바로 그때 모든 백성이 모여 금식했습니다. 유대인에게 금식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레위기 23:27입니다.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금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중에서 끊어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무적으로 금식하다 보니까 금식이 형식적이 되고 외식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지적하신 것은 그것입니다. “금식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하라”. 예수님이 형식적인 금식의 문제를 지적하셨다고 해서 금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왜 금식할까요? 다이어트를 위해 합니까? 현대인들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금식합니다. 이 경우는 금식이 아니라 “굶식”입니다. “굶는 것”입니다. 금식의 본래 의도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금방 읽은 레위기 23:27의 “스스로 괴롭게 한다”에서 나온 말 “아나”(anah)가 “금식”의 원어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의 본래 뜻은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합니까? 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몸에 대한 대표적인 생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미화의 대상입니다. 이 경우는 몸이 아름답다는 전제위에 출발합니다. 몸은 아름답고 가꿀수록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미술, 조각, 누드, 다이어트가 다 여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쾌락의 도구입니다. 이 경우는 몸은 쾌락을 가져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미식가, 패션, 모든 성적 범죄가 여기서 나옵니다. 셋째는 죄악의 소굴입니다. 몸속에는 죄를 일으키는 욕망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금식을 통해 몸을 괴롭게 하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금식은 몸속에 죄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몸은 죄의 지배를 받기 쉽다. 그래서 부지런히 다스려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금식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금욕적인 것입니다. 몰론 사도 바울이 롬7장에서 죄를 가져오는 몸은 따로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몸에 두 종류의 몸이 있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로서의 몸과 죄를 가져오는 죄의 소욕으로서의 몸입니다. 죄를 일으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몸에서 나옵니다. 이 몸을 사도 바울은 육신, 지체, 죄의 소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요즘 심리학이나 의학이 말한대로 인간의 몸을 몸과 육신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입니다. 몸안에 육신이 있고 육신안에 몸이 있습니다. 몸의 전체성, 하나의 몸입니다. 그러면 금식은 무엇입니까? 우리안에 있는 육신과의 싸움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 몸을 괴롭힘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소욕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금식은 결국 ”자아“와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안에 있는 세상적 가치관, 정, 욕심, 물질욕, 탐욕등과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영성가는 이것을 “숭고한 자기 박탈”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금식함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69:10,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이것이 금식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를 경계하고, 육신의 소욕을 경계하고, 자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다만 밥을 안 먹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안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굶주리는 것입니다. 침례교회의 존 파이퍼가 금식을 정의했습니다. “금식은 온 몸으로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는 것이다”. 밥만 안 먹어 음식에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굶주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기위해 영적으로 죽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과 싸웁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주로 싸웁니까? 자기 자신과 주로 싸웁니까? 자기와 싸워 이긴 자가 세상도 이깁니다.
영성의 역사는 곧 기도를 통해 자기와 싸운 역사였습니다. 수도원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수도원은 자기와 싸운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수도자 아바 파스토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자가 무엇보다 미워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편안한 생활과 허영이다.” 그렇습니다. 편안한 생활과 허영이 우리 영적 생활의 적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승리하기 위해 편안과 허영과 어떻게 싸웁니까? 암모나스라는 수도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늘 분노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노에서 해방되도록 수도원에서 14년을 밤낮으로 하느님께 눈물로 기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분노 하나만 가지고도 14년을 싸웠으니 우리는 얼마나 자기와 싸워야 합니까? 어떤 수도원에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은 수도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유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어느 한 순간 은혜를 받고 삶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헐뜯으면 가까이 사는 사람은 그가 직접 가서 선물을 주고, 멀리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후로 그를 헐뜯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싸웁니까? 미워하는 사람과 싸웁니까? 미움받는 나와 싸웁니까? 미워하는 사람과 싸워봐야 평생 해답이 없습니다. 내가 달라지면 됩니다. 여러분도 한번 적용해 보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를 헐뜯으면 속상해 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면 직접 가서 선물을 주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내겠습니까? 이렇게 살려면 얼마나 자기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겠습니까?
또 어떤 수도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유혹이 생기면 유혹 중에 그 장소를 떠나지 마시오, 당신이 어디를 가도 그와 같은 유혹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유혹이 지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참고 인내하십시오. 그것만이 살 길이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항상 밖에 있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다고 쉽게 갈라서지 마십시오. 참고 용서하지 않고 헤어지면 또 다시 비슷한 사람을 만납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거기서 인내해서 이겨내지 않으면 다른 교회에서도 같은 문제를 만납니다. 문제는 나입니다. 나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금식은 나와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도 금식에 약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금식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한끼 금식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루 두끼, 그러다가 세끼 금식을 한 주, 두 주, 한 달 가까이 했습니다. 금식하다문제가 자기로 모아집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시작했는 데 결국 문제는 자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자기와 싸우다 보면 문제도 사라집니다. 나를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입니다. 자기와 싸우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자기와 싸운 사람은 세상과도 싸워야 합니다. 세상과 싸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악한 자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마12:25-29이 그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귀신들린 병자를 고친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귀신들린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와 고쳐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었더니 옆에 있던 바라새인이 말합니다. “귀신의 힘이 아니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데 당신 혹시 귀신들리지 않았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망하지 않겠느냐? 귀신과 귀신은 같은 종류인데 어떻게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겠느냐? 나는 귀신으로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귀신은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집주인은 하나님이요 나다. 내가 성령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너는 주인인 내 집에 허락없이 들어온 불법칩입자다. 내 집에서 썩 나가라. 내가 주인이요 너는 불법칩입자다. 나가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락교회라고 있습니다. 이단으로 판명되었습니다만, 거기 김기동목사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은 귀신을 “불신자의 사후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신자가 죽으면 갈 곳이 없어 귀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과 많이 이야기해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귀신을 마귀의 졸개라고 봅니다.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본래 귀신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단과 같은 말입니다. 마귀는 한자말이요 사단은 히브리어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성경에서 마귀나 사단은 항상 단수로 씁니다. 그러나 귀신은 복수로 씁니다. 귀신은 사단이 부리는 졸개들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천사를 부리듯이 마귀는 귀신을 부립니다. 이 귀신들이 하나님이 주인이신 세상이나 하나님의 백성의 몸안에 무단으로 칩입해서 악한 일을 꾀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불법칩입자입니다.
비유컨대 이런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산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정성껏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었습니다. 가끔 산에 나무하러 온 사람이 있어서 주인이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한 사람이 아예 그곳에 들어와 “자연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인에게 허락받은 적도 없고 양해를 구한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즉시 가서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불법으로 여기 들어왔습니다. 내가 주인이니 나가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안 나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경찰에 고발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나가게 합니다.
눅13장에 보면 18년동안이나 귀신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었더니 회당장이 뭐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눅13:16입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귀신이 18년이나 이 사람의 몸에 불법칩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병이 다 귀신의 역사는 아닙니다. 사람이 부주의해서 생긴 병도 있고 하나님이 뜻가운데 주신 병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귀신이 들어가 잘못된 병도 있습니다. 보통 “귀신들렸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귀신이 사람의 몸에 불법적으로 들어가 자기 거처를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산다고 주인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마12:43-4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귀신의 집은 없습니다. 모든 집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자기 집이라고 주장하면서 안나갑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집에서 나가라”. 예수님이 집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무허가로 들어온 불법칩입자를 나가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엡6:16입니다. “모든 것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 불법칩입자인 마귀를 쫓아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영국의 챨스 스펄전이 주석하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어느 때나 마귀의 공격을 받는 것은 신자의 운명이지만 어느 때나 마귀를 공격을 가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공격해야 합니다. 신자로서 마귀를 공격하고 사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문제는 마귀가 간단치 않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조직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정사는 정부입니다. 정부같은 방대한 조직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밑에 세상의 악한 지도자와 악한 영들을 졸개로 두고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 몸속에 들어가 병만 만들지 않습니다. 사람속에 들어가 악한 생각, 나쁜 사상, 세속적 가치, 중독, 버리지 못하는 나쁜 습관을 갖게 합니다. 술, 섹스, 권력, 동성연애, 가정불화, 이혼, 성폭력, 살인, 나쁜 질병, 전염병, 악한 정부, 부정선거, 부정부패, 공산당, 나쁜 문화, 오염, 차별, 식민지배, 군부독재, 성적 타락, 온갖 죄악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전신갑주입니다. 엡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전신갑주는 영적 완전 무장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두르고, 의로 흉배를 붙이고, 복음으로 무장된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말씀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해 구하라”. 모든 기도오 간구, 성령안에서 기도, 깨어 구하고,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그렇게 살겠습니까?마귀의 공격만 받지 말고 마귀를 공격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적 싸움입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을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빼놓지 말고 기도할 대상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지만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교회를 맡았다는 것입니다. 행20:28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여러분”은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에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교회를 보살피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가 잘못되면 교회도 잘못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목회는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목회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불가불 영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되고 안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목회자가 살면 교회 살고 목회자가 죽으면 교회 죽습니다.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고통은 스트레스와 격무입니다. 미국의 H.B.London이 쓴 <위기에 처한 목회자>를 보면 목회자는 이렇게 삽니다. “목회자의 90%는 1주일에 56시간 이상 일하고, 80%는 일 때문에 가정적이 되지 못하고, 33%는 목회로 인해 가족이 어려움과 손해를 보고, 75%는 사역도중 최소한 한번 이상은 심각한 스트레스와 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고, 50%는 자신이 충분히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90%는 사역에 필요한 충분한 교육받지 못했고, 70%는 처음보다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고백하고 있고, 40%는 교단, 노회관계자와 33%는 교인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70%는 주변에 가까운 친구없다”. 미국교회의 경우입니다만 한국교회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목회자가 힘든 것은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 사례비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랍습니다. 월 180만원 미만을 받는 목회자가 전체의 66.7%에 해당합니다. 보건복지부가 규정한 4인 가족 기준 월 최저생계비 163만원 기준에 겨우 도달한 수준입니다. 그보다 조금 높은 180~250만원이 18.9%, 80만원 미만 받는 목회자가 16.0%, 아예 사례비를 받지 못한 목회자도 15.0%나 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투잡을 가진 목회자도 최근 늘어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농사를 짓고 도시에서는 택시를 모는 목회자도 생겨났습니다. 20~30대 목회자들의 85% 이상이 목회자의 이중직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물질문제만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지나친 기대와 요구, 평가가 있습니다. 언젠가 “완벽한 목사”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찾는 목회자입니다. “장로로부터 어린이까지 모든 교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자, 설교는 정확하게 20분만에 마치되 죄와 실수는 건드리지 말고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는 자,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일하되 헌금은 가장 많이 하는 자,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고전에서 신간까지 두루 읽되 기도는 하루에 3시간 이상 하는 자, 키는 훤칠하되 너무 크지 않고 몸은 건강하되 살찌지 말아야 하며, 얼굴은 미남형이되 배우(제비)처럼 생기면 안됨. 청년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되 노인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어야 하며 유머감감각이 뛰어나되 매사에 신중해야 함”. 어디에 이런 목회자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 기준에 해당이 안됩니다. 그래도 직업중에서 이직율이 제일 적은 것은 목회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트레스와 격무, 가난과 경제적 빈곤, 열악한 목회환경, 탈진과 목회에 대한 중압감, 책임감등으로 목회자들이 점점 자신감을 잃고 있습니다. 마귀는 목회자 하나만 쓰러뜨리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고 목회자를 쓰러뜨린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의 실수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로 볼 때 지극히 적은 퍼센티지입니다. 몇 사람의 예를 열악한 환경속에도 묵묵히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동일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형교회 문제든 소형교회 문제는 교회 문제는 영적인 싸움의 문제입니다. 기도로 바로 세우고 기도로 살릴 일이지 쓸데없는 여론전이나 비난, 편가르기, 다툼, 소송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목회자가 살아야 교회가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랫동안 목회자를 섬겨온 것은 이 때문입니다. 1988년부터 2010년까지 25년을 해온 전국 목회자세미나는 한국교회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25년간 다녀간 목회자만도 연인원 4만 5천명을 넘었고, 강사만도 500명이 넘었습니다. 참여자는 본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 모든 교단을 포괄했고 목회자의 영적 성장과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별세신앙이 선포되고 정착된 것도 이 세미나를 통해서였습니다. 이번에 메르스를 넘어 실제 목회자 세미나가 열릴 수 있을지 한 주간이 고비입니다. 그러나 만일 열리든 열리지 않든 한국교회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살전5:25에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3:1에서도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영적 싸움을 위해 기도합시다. 자신의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합시다. 세상 각계각층에 불법칩입한 마귀와 그 세력을 무찌르기 위해 기도합시다.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가 약하여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마귀를 공격을 가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금식의 원리
마 6:16-18 / 김상복 목사
사순절을 맞아서 온 교회가 40일 연속 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금식기도는 개인의 영성과 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해서, 또는 심각한 위기에 대처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자원입니다. 성경은 금식기도를 중요시하는데,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56구절에서 금식에 대해 69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금식기도가 중요한 신앙적 행위임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라고 했습니다. 금식기도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금식기도를 할 때 조심해야 할 몇 가지가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금식할 때 위선자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16절)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hypocrites)들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금식을 하는데 그 속에는 미움과 질투, 갈등, 분노가 가득 차 있어서 속과 겉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금식은 왜 합니까? 속과 겉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금식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16절). 금식이나 기도나 섬김이나 신앙생활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을 들여다보면 섬김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은 잘 모르는지 모르겠으나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신앙생활은 어디까지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읽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하나님 앞에서 해야지 사람에게 보이려는 모습을 조심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신앙이 없으면 눈에 걸리는 게 많고 속상한 게 많습니다. 보이는 것마다 별로 좋아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평화가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다 그렇게 봅니다.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학생 때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때입니다. 저희 교회의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다 싫었습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여요. 그 당시에는 예수를 잘 믿고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 슬퍼 보이는지…. 너무 경건한 나머지 모두들 얼굴이 굳어있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웃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더군요. 모두 심각해 보이고 슬퍼 보이고 어두워 보여서 “예수를 왜 믿는 건가? 내가 이런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는 건가? 이런 예수를 계속 믿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왜 슬퍼 보이고 심각해보이고 딱딱하게 보여야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제가 어느 교회의 수련회 강사로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오후에 놀이시간이 있어서 모든 참석자들이 같이 놀았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놀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들 즐겁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10m 정도 떨어진 나무 밑에 교인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눈에는 외로운 사람, 외톨이들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 지도자들에게 “저 사람보고 와서 같이 놀자고 합시다.”했더니, “저분은 놀지 않습니다. 저분은 지금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못 놉니다.”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왜 기도하는 사람은 못 놀까? 기도할 때는 기도하고 놀 때는 놀 일이지 온 교인들이 다같이 놀고 있는데 왜 저렇게 혼자 앉아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에 제가 학생 때에도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대강 믿어야겠다. 저렇게 되기 싫으니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앙과 성경을 깨달은 후에는 예수를 잘 믿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에 잘 참석하고 금식을 많이 해도 그 얼굴에 기쁨과 평화가 있고 행복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을수록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하고 더 아름다워지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금식하기 때문에, 기도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재미없는 인간이 아니라, 정말 즐겁고 아름답고 평화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며 얼굴을 흉하게 보이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종교성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성이 너무 강하거나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해서 슬퍼 보이고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인도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인도의 길거리에는 마치 정신이상자처럼 보이는 힌두교 구도자들이 많습니다. 머리를 안 감아서 기름이 줄줄 흐르고 세수도 하지 않아서 얼굴이 까맣게 되었어요.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신앙생활을 잘 할수록 머리도 잘 빗고 목욕도 잘 하고 옷도 아주 멋지게 입기를 원하십니다. 비싼 옷 입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싸다고 다 멋진 것은 아니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돋보이고, 더 좋아 보이고, 더 평화롭게 보이고, 더 행복하게 보이고, 더 자신 있어 보이고, 더 힘차게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이 정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하고 기도한다고 옷도 얼굴도 어둡고 흉하게 보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 중에서 예수님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제가 어릴 때 학교에서 “너의 영웅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님 같은 분이 없어서 “예수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중학교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보면 참 멋있습니다.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어요.
둘째로, 사람의 동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번에 제가 네 번 째 일주일 금식기도를 합니다.” “저는 두 주째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엔 40일 금식을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라고 주변에 알립니다. 이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니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고 하십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6절).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순수하고 좋은 동기로 하나님이 보시도록 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모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마음이 늘 편안합니다.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면 너무 좋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그 절반만 믿어야 됩니다. 대개 칭찬할 때는 과장해서 합니다. 만약 칭찬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8절). 사람의 동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지 말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금식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보통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심각한 일이 있을 때, 어려운 위기나 내가 견딜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먹지 않고 간절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이 좋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금식하며 기도하는 간곡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중심을 보시고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종종 가지는 것입니다.
셋째로, 의미 없는 습관적인 종교행위로 금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과 마가복음을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도 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합니까?”하고 예수님께 도전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종교행위 가운데 하나로서 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습관에 그칠 뿐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이레 동안에 이틀은 반드시 금식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사람들입니다.”신앙생활이 자랑거리요, 교만의 주제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내가 하는 신앙생활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데 쓰면 안 됩니다. “나는 수요예배에 꼭 오는데 저 사람들은 어디 갔냐? 왜 안 오냐? 저래도 믿는다고 할 수 있냐?” “나는 금식을 하는데 저 사람들은 왜 금식을 안 하냐?” “나는 새벽기도를 하는데 왜 저 사람들은 새벽기도를 안 하나?”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새벽기도를 하세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내가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지 그런 공로를 세우려고 새벽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행위를 남을 비판하는데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하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는 등의 좋은 신앙적 습관들도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고 덕이 안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가슴 속을 파고드십니다. 인간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는데 예수님은 계속 마음속의 그 순수한 동기,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 이것을 중요시하십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 여러분이 금식하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고 자신을 살피면서 여러분 모두에게 참 복된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을 따라서 우리 신앙에 방해가 되지 않고 꼭 유익이 되도록 사순절 금식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성찬을 받을 텐데, 이 성찬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과 모습을 깨끗하게 씻어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우리 입술에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마6:16-18 / 이정선 목사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던 일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구석구석에서는 제대로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오늘 우리에게 또한 이웃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것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있으면서도 먹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금식이지요. 특히 금식은 종교적 행위로서 시행되는 수도 경우가 많습니다. 이슬람에서는 금식이 다섯 가지 기둥, 그러니까 신자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기본구조의 하나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간인 라마단이 되면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침도 삼키지 않고 뱉어냅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주로 중동의 사막이나 아프리카 같은 더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 아래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금식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에서는 왜 이런 육체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스스로 고통을 가함으로써 얻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금식은 금욕의 한 가지 모습입니다. 중세 시대의 가톨릭에서는 고행이 구원을 향한 순례자의 주요한 덕목으로 제시되었지 않습니까? 고행, 금욕, 금식, 모두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고, 영혼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 반면에 육체는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영혼이 육체에 붙잡혀 있는 비극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 육체가 추구하는 쾌락에 대해서 매우 대조적인 두 가지 견해가 발달되었습니다. 하나는 스토아 학파라는 금욕주의입니다. 육체는 악하고 방종한 것이기 때문에 괴롭게 해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더 많은 악을 생산해낼 뿐이고 영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쾌락을 금지시키고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이요 미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악한 육체는 구원받을 수가 없고 이 육체의 목숨이 끝나는 날 영혼은 자유롭게 되어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육체를 선하게 계몽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무슨 짓을 하든 영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영혼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나누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과 혼과 육의 세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서로 틀렸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두 가지나 세 가지의 구성요소로 나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을 나누려고 할 때 금욕주의나 쾌락주의 같은 매우 잘못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도적질을 했을 때 육체만 범죄했고 영혼은 그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마음의 간음을 했을 때 영혼만 범죄했고 육체는 깨끗하다고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전체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성경적이고 유익한 사고방식입니다.
어쨌든 금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한번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합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결혼식 잔치하면서 손님들에게 금식하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때 금식해야겠지.”
결혼식은 기쁨과 축하의 잔치를 동반합니다. 즐겁게 먹고 마셔야죠. 그 잔치 한 구석에서 금식한다고 버티는 것은 그 결혼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혼으로 인해서 속이 상하고 괴롭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 결혼잔치 분위기를 해치게 되고 따라서 거기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납치를 당하거나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면 신부를 비롯해서 모든 손님들이 울면서 슬퍼하겠지요? 그럴 때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겠어요? 이때야말로 슬퍼하며 금식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다들 울며 금식하는데 한 구석에서 ‘아이구 잘 됐다’ 하면서 먹고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몰매를 맞고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슬픔과 고통의 외적인 표시라고 할 수 있겠군요.
구약 성경의 기록에서 보통 어느 때 금식을 했는가 하면 큰 슬픔을 당했을 때입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백성들이 그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후에 7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도 금식이 선포됩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성은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하고 회개했습니다. 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 금식을 했습니다.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는 모든 유다 인들과 더불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금식은 큰 위기가 닥쳐왔을 때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조차 없을 때 금식합니다. 이 때의 금식은 ‘나는 죽은 목숨이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범죄해서 회개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죄인이요, 그래서 밥을 먹을 자격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기대기 위해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금식입니다.
삼국지에서 촉나라가 망할 때 후주 유선은 삼베옷을 입고 자신의 몸을 꽁꽁 묶습니다. 그리고 상여를 타고 위나라에 항복을 하지요. 항복하러 가면서 황제의 의관을 갖추고 뽐내면서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황제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의미로 몸을 꽁꽁 묶고, 이제 죽은 목숨이라는 뜻으로 상여를 타고 가서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은 성도의 삶에 매우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로서 매우 장려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금식이 종교적 행위로서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다 보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경건하고 또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또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과 자기부인의 거룩한 투쟁은 자연히 금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늘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삶 속에서 종종 금식이 병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식 자체가 경건한 삶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경건하게 사는 척하기 위해서 일부러 금식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야말로 가증한 일일 뿐이지요.
금식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금식한다고 자랑하는 것은 ‘나는 밥을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입니다’ 하고 떠드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금식하는 것은 ‘나는 죽을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내야 합니까?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뭐 하러 사람 앞에서 나팔을 부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행태야말로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 앞에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그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해악 역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은 금식할 때는 깨끗한 몸으로 해야 한다고 해석하는데, 주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금식을 무슨 비밀공작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하란 말이지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금식도 사람들 앞에서 나팔불면서 하지 말고 하나님께 은밀히 하라는 것입니다.
구제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 그리고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동일합니다. 구제, 기도, 금식, 모두 성도의 삶에서 마땅히 시행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행하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겨워하시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행함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경우입니다. 종교적 행위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종교적 행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사 1:11-13)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7]. 참 마음으로 하는 회개입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금식기도원에 들어가서 일주일 금식에 도전해야겠다.” 왜 일주일 금식을 해야 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40일 금식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뭐냐? 최소한 일주일 금식은 해야 체면은 서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내가 집사이고 장로인데... 이런 식으로 하는 금식,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쓸데없이 금식하는 것 정말 쓸데없는 짓입니다. 정말 금식할 일이 있으면 그때 금식해야지요. 그것도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굳이 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금식한다는 것은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것이니까요.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송 작곡자의 매우 방탕한 가정생활과 악한 불륜행각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어 결국 그가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은혜로운 찬양을 만들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게 했던 사람이 그토록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씁쓸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가증하고 더러운 속마음과는 달리 거룩하고 아름답게 겉모양을 치장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얼마나 몹쓸 짓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범죄하는 것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속에서 일어난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범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행과 종교적 의무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에서 진심으로 행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참으로 내면의 아름다움과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절제하며 삽니다
마 6:16-18 / 박상훈 목사
오늘은 우리가 금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마태복음 6장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힘써야 할 의가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가 구제였고, 둘째가 기도였고, 셋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불의는 멀리 해야 되지만, 의는 늘 가까이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제는 우리가 이웃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이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은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힘써야 할 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남극에 가면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남극의 신사라고 불려지는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펭귄이 알을 품고 새끼가 부화되면 그 새끼를 기르는 섬이기도 합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수많은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그 작은 섬에 모여듭니다. 수천 마리 아니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에 그 섬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빽빽합니다.
펭귄의 암컷은 보통 한두 개 정도의 알을 낳습니다. 그러면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 가면서 알을 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끼가 알에서 나오게 되면 펭귄들은 새끼를 그곳에 놓아두고서 먼바다로 먹이를 찾아 나섭니다. 펭귄들은 새끼가 좋아하는 작은 물고기, 오징어, 새우 등으로 잔뜩 배를 채워서 새끼가 있는 작은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보통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름 동안에 새끼 펭귄들은 작은 섬에 남아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면서 엄마펭귄, 아빠펭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보름이 지난 뒤 펭귄들이 배를 가득 채워 가지고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부모펭귄은 자기 새끼를 찾아가 뱃속에 가득 채워온 먹이를 토해내서 자기 새끼들에게 먹여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천, 수만 마리가 되는 펭귄들 가운데서 어떻게 자기 새끼를 용하게 찾아내느냐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펭귄들은 절대로 혼동하는 법이 없이 자기 새끼를 정확하게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자기 새끼를 찾을 때 모양으로 찾는 것이 아니고, 울음소리를 듣고 찾는다고 합니다. 펭귄들은 새끼의 울음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끼들도 부모펭귄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펭귄들이 먹이를 배속에 가득 채워 섬으로 되돌아올 때, 새끼를 찾는 소리와 또 부모를 찾는 소리로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펭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정확하게 자기 새끼의 소리를 분간해내고, 또 새끼펭귄들은 자기 부모의 소리를 다 분간해낸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늘 끊임없이 우리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우리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에게 맞추면,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세상 일로 얼마나 분주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분주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마저도 단념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주기도문 안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들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6:11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거부하는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금식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심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과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식과 관련해서 간단하게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했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 모두 절제된 삶을 통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6절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금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금식을 했습니다. 다윗도 금식을 했습니다. 다니엘도 금식을 했고, 엘리야도 금식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금식뿐만 아니고, 단체가 더불어서 함께 금식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선지자 사무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했습니다. 또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유다 백성들과 더불어 사흘을 밤낮으로 금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명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금식을 한 경우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단 하루만 금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대속죄일의 경우입니다. 그날만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 온종일 금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대속죄일의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 번에 제물로 드림으로서 대속죄일의 모든 규례를 이미 다 성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성도들처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어떤 일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금식을 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레에 두 번, 곧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필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서 금식했겠습니까? 물론 명목상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을 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바로 목요일이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이기 때문에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을 기념해서 자기들도 그 두 날 곧 목요일과 월요일로 정해서 금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장날로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터에 모였습니다. 농사꾼들도 모이고, 장사꾼들도 모이고, 또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구경꾼으로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슬픈 기색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옷 가운데서 제일 헌 옷을 골라 입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옷을 잡아 찢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재를 뿌렸습니다. 몸에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슬픈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금식한 티를 내려고, 멀쩡한 얼굴에 재를 발라서 얼굴이 상해 보이도록,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그들이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했다고 했습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온전히 금식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을 한답시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로 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사람에게 향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6절 하반부입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미 그들은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사람들의 인정은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취임할 때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기는 곧 떨어지고 맙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힘들게 금식하고서도 그들이 받은 상이라고는 쉽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기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실 화뿐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머리를 헝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금식할 때 머리를 깨끗이 빗고 기름을 바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에 재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금식할 때 우리의 얼굴을 씻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하나님은 보지 않으십니다. 고개를 돌려버리십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상대로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십니다. 6:1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무슨 의를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상대로 해야지,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식을 할 때는 티를 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평소와 같이 밝고 명랑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나님만 아시도록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아프리카의 복음화를 위해서 애썼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러니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한 번도 자기가 주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생을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기뻤습니다.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 가운데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한 유머가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나운 사자가 갑자기 그를 습격해서 그의 한쪽 팔을 물어뜯었습니다. 그의 살점이 떨어져나갔습니다. 그의 팔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의 하인이 얼른 달려와서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그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나의 몸은 나의 모든 사명이 다하기까지 죽지 않을 불사신인 모양이다!"
그래서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나운 사자에게 물어 뜯겼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면서 미소를 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구 가운데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식욕입니다. 마음 속에는 그와 같이 엄청난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연 내색하지 않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은 채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되고 바른 금식입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8절 하반부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을 상대로 한 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가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 어떤 부모가 모른 척 하고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사랑하는 자녀가 금식하면서 매달리는데 그냥 무심히 쳐다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사랑이 부족해서 자녀들이 금식하면서 매달리고 있는데 가만히 쳐다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고 금식하십니까?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식에 대해 반드시 잊지 않으시고 속히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금식할 때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금식할 때란 과연 언제입니까?
마9:14-15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9:15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멀리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는 우리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금식을 해야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멀리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겠습니까? 육신의 일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육적인 일에 얽매이다 보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영적인 일에는 아무래도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는 우리의 영을 맑게 하기 위해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살이 너무 쪄서 탈입니다. 그래서 살을 좀 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겠습니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의사는 아주머니를 여러모로 진단하고 난 뒤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의 살을 빼는데는 그저 식이요법이 제일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제가 일러드리는 대로만 하십시오. 현미밥 한 그릇에 묽은 야채국물을 만들어서 함께 드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서 과일을 하나만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살이 빠질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하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무엇인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이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식전에 먹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식후에 먹어야 합니까?"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먹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목구멍이 포도청,"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이 없다," "먹는 개도 아니 때린다."
그만큼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식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몸을 쳐서라도 복종시키겠다는 심정으로 식욕을 잘 절제하면, 그만큼 우리 몸의 다른 욕구들은 쉽게 절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9:25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의 종노릇하면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돈을 너무 헤프게 쓰는 사람은 돈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몇 번 입지도 못할 사치스러운 옷을 자꾸 사는 사람은 옷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잠이 너무 많아서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잠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아침잠이 너무 많습니까? TV 드라마를 너무 오래보아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TV금식하는 법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을 함부로 남발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은 필히 말금식, 수다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겠습니까? 금식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라고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 모두가 절제된 삶을 통해 매사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라고 칭찬 받고, 또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면
마 6:16-24 / 박지온 목사
지난 주일에는 어린아이가 된 것을 축하를 했는데, 오늘 옆에 사람과 함께 인사합시다.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믿음의 조상! 정말 아름다운 말이죠. '믿음의 조상!' 그래서 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이 뭐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다! 뭐냐하면 '믿음에 후손이다!' 그런 말이거든요. 오늘 이 시간 제목을 "네 눈이 성하면" 그랬습니다.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리고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5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중요한 결론처럼 말씀한 것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눈이 어둡다는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은, 결과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한 분을 잊어버리고 놓쳤기 때문에, 눈이 어둡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가 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 가정이 어렵다! 자녀들이 어렵다! 뭐 내 경제가 어렵다! 뭐 힘들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만은, 오늘 이 시간에 내 눈이 성하면 다 됩니다. 이 시간 아마 여러분 혹시 증명을 하고 싶거든 한번 눈을 감아 보세요. 한번 눈감아 보세요. 옆에 사람 봐요 보이는가! 이렇게 해서 뭘 합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간단합니다. 혹시 그것도 모자라거든 내려갈 때 눈감고 한번 내려가 봐요. 전부 계단 더듬거릴 겁니다. 눈감아도 아무것도 안 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랬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복이 '하늘에 있다!' 그랬습니다. 하늘에 속한 복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눈이 어두우니까, 이걸 못 보니까, 맨 날 땅만 보고 살아갑니다. 될 것이 없죠. 이게 일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간단합니다. 진짜 눈을 뜨면 돼요. 눈떴는데, 뭘 뜨란 말이냐! 이게 이제 비밀 중에 비밀입니다. 정말 여러분 볼 것을 보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풀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 서신에 말씀한 것처럼,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뭐라 그랬습니까? 따라옵니다. '범사에 잘되고' 뭐가 또 옵니까? '강건하여 지기를 간구하노라!' 어떤 분은 이것을 '구원의 3박자라!' 그러는데, 구원의 3박자가 아니고 눈을 바로 뜨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순서가 그렇게 이해를 하면 더 정확할 줄로 생각이 됩니다. 먼저 이 사실을 우리가 조금 알아야 되죠.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잘한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해도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어요. 뭐 부모로서 잘 하려고 얼마나 애를 습니까! 한계가 있습니다. 자식으로 잘하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옛날에 묘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하던 그런 것을 막 방영하더라 구요. 참 눈이 안 열리니까! 망할 짓을 골라합니다. 여러분 진짜 알아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나라가 망한 것 아닙니까! 3년 동안 부모 섬긴다고, 효도한다고 묘 옆에다가 초막 지어놓고 있으면, 일은 누가 하며 뭘 합니까! 이 일이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을 지금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래서 뭐, 또 재현 해 가지고 뭐 또 보여준다고 그러는데, 여러분 죽은 부모에게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심지어 우리 성경에 뭐냐하면 부모한테 못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살아있을 때에 진짜 잘 해야 되요. 효도문제, 이런 문제 눈이 안 열리면,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그로 통해서 오는 얼마나 어두운 역사를 못 보게 됩니다. 점점 더 망하게 되죠.
지금 우리나라가 뭐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보세요. 영적인 눈으로 안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점점 더 어려운 겁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누가 있습니까? 받아봐야 소용이 없어요.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왜 이렇게 되느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이 세계에서 이해가 안 되어요. '저런 대통령을 모셨는데, 어떻게 국가가 저렇게 어려우냐!' 이렇게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참 영적인 눈이 바로 열려야 됩니다.
그래서 과학지식이 발달이 되고, 문화가 발달이 되고, 뭐 여러 가지 많은 것으로 자랑할 수 있겠습니다 만은, 꼭 알아야 될 것은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보셔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6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그랬습니다. 여러분 풀이다! 금방 말라요. 그 다음에 꽃은 아무리 좋고 아름다워도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제가 이 건장 때문에 공원에 등산을 늘 갑니다. 가면 참 꽃이 한창 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감탄이 나와요. 그런데 그냥 그것도 하루, 이틀, 몇 일 가버리면 당장 시들어 버려요. 시들면 아름다운 꽃일수록 시들면 보기도 싫어요.
여러분 우리 인간들을 표현해서 '풀이다!' 그 다음에 아름다운 '마치 꽃과 같다!' 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은 더 빨리 시들어 버립니다. 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고 반드시 우리의 한계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다는 이면에 한계를 못 보면 문제가 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인간들이 자기 문제를 해결을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금 터져 나고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눈이 안 열리면 해결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뻔히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가정가정 마다 속수 무책입니다. 안 되게 되어있어요. 이 어려운 문제죠. 여러분들이 가정에, 혹시 여기 오신 분들이 문제가 없어서 행복하다면 거짓말입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행복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이유가 영적 눈이 열리면 이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로 이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보는 사람과 문제해결이 안 되지만, 많은 경우 자신에게 일어나는 자기 가정에 일어나는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그 문제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예요. 자기 자신의 문제도 '왜, 있는가?'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앉아있는 분들이 '내 문제 내가 안다!' 혹시 그렇다면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거의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우리가 통틀어 뭐라고 말하느냐?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 문제라 그랬습니다. 영적 문제 오늘 한번 받아합시다. "영한의 눈이 열려야 행복하다!" 예, 영한의 눈이 열려야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이 영적인 문제가 안 보여서 또 이것이 열려지지 않아서 행복은커녕 점점 자기도 모르게 가정과 개인들이 어려움에 빠져 가는 일들이 부지기수예요. 이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영적 문제를 아는 사람조차도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건 세상 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지, 바로 영적 문제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지난번 대예배 시간인가, 한번 말씀드렸죠. 네가 영적 문제 있다! 그럴 때에 영적 문제라 그러면 우리는 간단하게 '영적 문제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나 이것은 사실 알고 보면 굉장히 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영적 문제라 그러면 무슨 문제입니까? 어느 것을 가지고 영적 문제라 그럽니까? 창세기 3장에 문제입니다. 바로 그 배경이 누구입니까? '사단에게 붙잡혀 있다!' 이겁니다. 사단에게 붙잡혀 있다! 그러면 지금현재 누구의 인도를 받습니까? 귀신의 인도를 받고 있다! 이것이 영적 문제에 가장 중요한 근본문제입니다. 이 근본문제! 그래서 개인적으로 모두가 창세기 3장에 붙잡혀 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완전히 해결되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로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해결을 누리지 못할 때에 오는 3장 문제는 심각하게 우리도 모르게 내 사건과 일들 속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영적 문제가 열리지 않으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모르게 당하고 있는 겁니다. 점점 깊이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개인이 안되니까, 내 개인이 이런 문제에 빠져 있으니까, 오는 문제가 뭐냐? 가정문제입니다. 여러분 처녀 총각이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가정에 일어나는 상황을 가지고 서로 핑계를 대죠. '서로 네 탓이고 서로 네 잘못이고...' 더군다나 아이 하나 낳았다! '어쩌면 저게 지 엄마를 닮았냐! 어쩌면 저게 지아비를 닮았냐!' 전부 이럽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영적 문제를 가진 개인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될 리가 없죠.
여러분 이 문제가 이 사실이 보여지지 않으면 오늘날 왜 가정이 깨어지느냐? 왜 가정을 이룩하고 사는데, 왜 가정에 부모 자식간에 문제가 깨지고 점점 더 심각해지느냐?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심각한 영적 문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이 영적 문제, 가정문제를 가지고 우리창세기 6장에 있는 문제를 말씀했죠. 그 다음에 가정 문제가 깨어진다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이 가정문제가 깨지게 되면 따라서 오는 것이 사회문제 아닙니까! 창세기 3장 문제! 지금 사회가 심각하게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뭐 우리 핵심에도 그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만은, 제가 캘리포니아에 가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범죄에 도시다! 우리가 여기서 표현이 안 됩니다. 워낙 그때는 이해를 못했고 그랬을 뿐이죠. 1960년대에 벌써 사단교회가 등장을 했습니다. 완전히 사단이 사로잡았어요. 너무 아름다운 항구고 날씨도 좋습니다. 1년 내내 23도를 넘지 않습니다. 그 이하로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그런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요, 일기 좋은 항구입니다. 또 그리고 습기가 적당하게 있어 가지고 공기도 참 쾌적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분 알다시피 게이라는 것!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특별히 그 남자들끼리 서로 연애하는 것! 제가 보니까, 너무 징그러울 정도예요. 게이 식당이 따로 있고 또 심지어는 게이가 모이는 교회도 따로 있어요. 게이 목사가 또 설교를 하고... 세상에 이게 완전히 범죄의 온상입니다. 좋은 만큼 더 좋은 데로, 따라서 영적인 문제가 심각한 그런 부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왜 이렇게 흘러가느냐? 점점 더 문제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로 통해서 나오는 후손들도 똑같이 뭐가 나옵니까? 점점, 점점 영적인 문제가 나옵니다. 제가 어떤 기록을 통해서 보면서 느낀 것은 남자 게이들 에게는 참 이 해결책이 안 되더라 구요. 그런데 여자 게이들은 여자가 여자끼리 사는 가정에는 이 해결이 돼요. 그게 뭐냐하면 후손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정자 은행에 가 가지고 정자를 빌려오더라 구요. 이래가지고 아이를 키워요. 그래서 가정을 또 꾸리는 이런...
여러분 지금 복제인간을 만들어 내니 뭐니 하는데, 점점 여러분 영적 문제 심각하게 후손문제가 오게 됩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냐? 성경은 바로 예언했습니다. 이 땅에 다른 서적들은 파라다이스가 온다고 그랬지만, 성경은 이 세상을 점점 멸망해 가지고 있는, 점점 어려워가고, 점점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그래서 나중에 극한 시대가 왔을 때에 누가 재림한다고 했습니까? 모든 족속으로 복음에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왜? 하다하다가 안되면 결국은 복음으로 돌아와야 되니까! 그리고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축복된 마지막이 올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스스로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악해갑니다.
여러분 보세요. 옛날과 지금 정신적으로 얼마나 악한 문제가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배경이 아무리 육을 보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영적인 문제가 하늘에 역사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런 눈이 안 열리면 아무리 보아도, 땅을 보고서는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이 영적인 이런 역사가 나오게 된 배경이 사단의 역사라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사단의 영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미혹이 되고 판단이 잘못되고, 생각들이 잘못되어서 다른 것들로 자꾸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어지지를 않아요. 우리 자녀들이 뭐 잘못 가기를 작정하면서 잘못 가는 게 아닙니다. 잘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지만 구체적으로 영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배경이죠. 무속 하는 사람들 우리가 잘 알잖아요.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특별히 위해서 기도하시고 영적 문제가 오신 분들이 싸워야 될 문제들이 일단 내가 귀신을 접했다! 또 그런 것으로 내가 살아왔다고 그럴 때에 그로 통해서 반드시 후손들이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적으로 영적 문제가 오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내가 괴롭다! 고통스럽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까지... 그래서 통계적으로 무속인들 후손이 40대를 잘 못 넘는다는 그런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우리가 보면서 구체적으로...
그 다음에 여러분 알다시피 종가 집에 문제가 분명히 오잖아요. 저는 그 저 안동 그 양반들에 대해서 소설로 쓴 글을 몇 번 읽어 봤습니다. 봤는데요, 심각하더라 구요. 자기 가문에 일을 자기가 소설화시킨 이런 글을 제가 읽어봤습니다. 종가 집에 문제들, 영적 문제 심각합니다. 왜?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부모가, 살아있는 부모가 살아있는 자식들로 하여금 효도를 받는 것이지, 죽은 후에 부모가 내게 잘해 줄 것이라! 그래가지고 제사 잘 지낸다 그것은 효도 개념을 넘어 가지고 그것은 완전히 이기주의 욕심입니다. 또 그래가지고 여러분 아실 것은, 자식들이 아무리 못해도 진짜 부모 같으면 제사 잘 못 지낸다고 어떤 부모가 벌을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그 부모를 이상하게 조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 제사 제도에 대한, 부모에 대한 의식입니다.
제가 늘 그런 말하잖아요. 제가 이 아들 하나 세광이, 그 뭐 별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별로... 그래도 나한테는 참 귀합니다. 그 뚱보고 이게 하는 게 그래도...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이 '저거 뭐 저래, 벌을 좀 받아야 되겠다!' 혹시 그럴지 몰라도 나는 잘못해도 나는 복을 내릴 마음이지, 요만큼도 벌줄 마음이 없어요. 내가 만약에 복을 줄 수 있도록, 혹시 죽어서 복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나한테 맨 날 욕을 한다 그래도 '야, 이놈의 자식아! 그래도 네게 복을 주마!' 이것이 부모의 심정이지, 어떤 부모가 제사 조금 잘못했다고, 묘 자리 조금 잘못섰다고 3족을 멸하고 이런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건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게 제사 제도요, 그것은 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에 성경이 엄격하게 효도를 말했어요. 오늘도 성경이 말씀 안 했습니까? 우리 장로님 기도 중에서 말씀했습니다 만은, 구약에는 더 엄격해요. 구약에는 부모를 이상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구약에는 '부모한테 대적하는 자들은 죽여라!' 그랬습니다. '부모한테 잘못하는 사람은 죽이라!' 그랬습니다. 신약에는 부모한테 잘하면, '잘살도록 해주마! 오래 살도록 해주마!' 하나님께서 효도 관의 문제는 살아있을 때 부모, 살아있는 부모, 인격을 가진 부모를 말했지, 죽은 부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죽고 나면 어디로 갑니까? 천국과 지옥 둘 중에 갑니다. 효도 관이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 그러면 잘못 되어지느냐? 영적 눈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그렇게 속이는 사단의 세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 속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1년에 제사 제도를 통해서, 그 다음에 1년에 무속을 통해서 들어가는 돈이 뭐 그런 말을 안 들었습니까! 엄청난 그런 낭비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잘못된 종교로 인해서 나오는 영적 문제가 심각하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상이 우리나라에 급증합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영향력이 급증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왜 그렇게 되어 집니까? 정치를 못해서, 잘못해서, 잘하려고 안 그래서 아닙니다. 얼마나 잘하려고 애를 쓰는데, 영적인 문제가 급증하니까! 이상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잘하고 싶어도 아니에요. 일단 어디 속에 갔다! 돌아버리는 것을 어떡합니까! 생각, 마음 다 돌아버려요. 제가 아무리 봐도 참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면 눈이 열리지 아니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또 알아야 될 것이 잘못된 종교 생활이라! 그럴 때에 여러분 기존의 교회에서 참 잘 들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약속된 언약을 붙잡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디로 빠지느냐? 율법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자꾸 잘 잘못을 가지고 따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 착한 사람이다. 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비난할 때에 교회 다니는 게 그러냐고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라 그럽니까? 만약에 교회 안 다녔으면 너를 죽였다! 복음 속에 섰다 그럴 때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생명입니다.
내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착하다는 배경이 아닙니다. 예수 생명이 들어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착하게 된 것이 나오는 것이지, 그것은 증상이지, 거기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도 결국 많은 교회들이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비친 그대로 '교회 다니면 착하다! 안 착하다!' 율법적인 배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흑암 세력들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로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솔직히 이 시간에 오신 분들, '아, 나는 안 착한데 예수 믿기를 잘했네!' 예 예수 믿기를 잘했습니다. 안 착해도 어디 갑니까? 진짜입니까? '이 이상한 사람들만 모였네!' 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은 인간은 본래적으로 영적 문제, 사단의 역사 속에 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이 낳자마자 젖 깨물어 보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지 모르겠네 그게 선해서 깨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게 누가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 영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이외에는 이 땅에서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었다! 이것을 가지고 '영적인 눈이 열렸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눈으로 볼 때에 내 개인이 심각한 영적인 문제에 빠졌다는 사실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성질을 내느냐? 영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아닙니까! 왜 오늘 아침 이 시간 예배드리러 오는데도 왜 부부싸움하고 왔느냐? 영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하려고 복 받으러 오는데도, 오다가 차 타고 오다가 옆에 사람한테 괜히 신경질 내고, 욕 한바탕하고 하느냐? 그게 전부 영적인 배경입니다. 내 개인의 이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전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분명히 되어야 되죠.
그리고 이 영적인 배경으로 말미암아 이제 말씀 드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배경이 악한 습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상한 습관들! 악한 습관들! 드러내기 힘든 악한 습관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뭐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은, 나한테 악한 습관이라 그러면, 그리고 우리 집에 악한 습관이라 그러면 지난주에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뭐든지 사람을 딱 보면 분석을 하려고 듭니다. 분석을 하려고 하는데, 그 분석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도 착하게 좋게 바로 '참, 잘 하는구나! 좋은 사람이구나!' 이런 쪽으로 분석을 안하고 이 사람이 약점이 이건 참 못된 것이구나! 이런 식으로 자꾸 분석을 하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가지고 '서로 삐딱 고기 먹지 말자!' 그랬다고 이야기를 안 했습니까 만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게 영적 배경이라는 것을 몰라요. 영적 배경인 것을 몰라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 하도 그러다가 '여보, 여보 내가 왜 당신한테, 당신이 그 기분 상하고 그러는 것을 알았다고...'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어릴 때에 부모 밑에서 막 떠받들리고 사랑 받고 자랐으면 어지간히 좀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를 해도 상처를 안 받는데, 어릴 때에 그렇게 안 자란 사람에게, 말하자면 별로 멸시보다도 뭐 이렇게 사랑 속에서 안 자라난 그게 영적인 문제로 보면 돼요.
뭐가 오느냐 하면,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려도 피해의식이 강해져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뭡니까? 자기 비아가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뭐가 있느냐 하면 뭐랄까? 어떤 그 극단적인 결론을 내려 버려요. '안 되면 치워버려라!'든지 쉽게 포기를 해 버리고 이런 어떤 것으로 빠진다는 상처에 대한 배경을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그러면서 아마 내가 지난번에, 사실은 여러분은 몰랐지만 몇 일 전에 대 전쟁이 한번 있었거든요. 아마 이 그 상처를 내가 건드린 것 같다고 그러더라 구요. 본인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그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삐딱하게 생각한다고...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느냐? 개개인이 자기도 모르게 악한 습관들이... 보통 때는 이게 드러나지도 않아요. 이 습관들이 숨어 있습니다. 잠재해 있습니다. 요만한 문제 가지고도 악한 습관들이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그 배경이 영적인 눈을 열어야 '아, 이게 내 문제구나!' 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 악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절대로 내 문제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절대로 내 문제 아니더라 구요. 모든 게 하나같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문제지! 왜? '네가 문제지!' 그래서 아들에게 문제 생기면, '꼭 저거는 지어미 닮았다!' 이렇게 되지 '나 닮았다' 는 소리는 잘 안 했거든요.
그래서 영적인 눈이 이것이 열러지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잘못 자기가 보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생깁니까? 나라는 것이 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내가 깨어지는 사건이 여러 가지 많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주로 감정적인 상처문제 때문에 내가 깨어집니다. 내가 깨어지면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여러분 내가 죽을 지경인데, 뭐 '교회에서 기도하자!' '너나 기도 잘해라! 내가 죽을 지경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깨어지면 가정에서 '가정예배 드리자!' '내가 깨어져서 죽을 지경인데...'
제가 늘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려도 깨지도록 만들어 놓고 드리면 일이 안 되거든요. 내가 깨어져 죽을 지경인데, 교회에서 '축복 받기 위해서 이렇게 하자!' '너나 잘해라! 나는 죽을 지경인데...' 내가 깨어지는 이것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깨어지는 배경이 서로 뭐냐하면 상처문제! 이 감정적으로 오는 문제들이 많거든요. 그 다음에 그런 문제를 통해서 주로 뭐가 있느냐 하면, 간단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 욕심들이 강한지 자존심 건드려서 그래요.
여러분 부부싸움 보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조그마한 자존심가지고 싸움하는 것이지, 큰 문제 아닙니다. 큰 문제 가지고 싸우면 오히려 괜찮아요. 거의 자존심 문제! 이것가지고 이혼하느냐? 안 하느냐? 그러고 따지고 보면 나중에 맨 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좀 내가 그것가지고 그랬나 싶을 정도가 아닙니까? 그 다음에 이렇게 나오면서, 이렇게 자기가 깨어지면서 오는 것이 뭐냐하면, 점점 그럴수록 완벽 하려고 애를 씁니다. 완벽주의에 빠집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자기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어디로 빠지느냐? 율법에 빠집니다. 율법에 빠지면 빠질수록 남의 잘잘못을 판단하게 되는 배경으로 빠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빠지게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확신 없으면 '아, 나는 못 쓰게 되겠구나! 나는 쓸모가 없구나! 나는 가치가 없구나!' 그래서 오는 것이 좌절 속에 빠져 버립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지금 '아, 나는 가치 없구나! 이 땅에 살맛이 없구나! 살 생각 없구나! 자살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되거든 심각한 영적 문제에 빠진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인가!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이러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막 '내가 어쩌다가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있느냐?' 그러니까 뭐가 옵니까? 좌절밖에 안 와요. 그것이 어디냐? 영적 배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적 문제가 나오게 되는 동시에 자기 깨어지고, 그 다음에 가정 깨지고, 사회 깨어지면서 오는 것이 영적 문제에 엄청난 배경인데, 이 영적 문제로 말미암아 이 자신이 먼저 깨어지고, 자기 자신이 회복이 안 되기 때문에 오는 모든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여러분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어버이의 사명 다하자! 가정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자!' 자기가 깨져 죽을 지경인데 무슨 자녀에게... 이 방향이 안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때에 여러분들이 이루어 나가고 있는 길이라면 딱 하나입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그게 뭐냐하면, 제일 먼저 내가 깨어지고, 가정이 깨어지고, 이웃이 깨어지도록! 제가 이런 말 하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목회자 치유 사명자 대회하면서 느낀 것은, 목회자라 그러면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 안 되어야 됩니까!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좋은 가정일거라고 생각 했는 사람들조차도 이 깨어지기 직전이더라 구요. 그런데 나는 저 사람은 절대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정도 딱 들어보면, 이혼하려고 몇 번 도장을 찍을까? 말까? 했던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더라 구요.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가정이 깨어졌다 그 배경보다도 먼저 누가 깨어졌어요? 자신이 깨어 졌습니다. 자신이 깨진 배경에서 제일먼저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이 이게 영적 문제거든요. 자신이 깨어져서 그런데 회복하려고 그럴 때에 나를 회복하려고 그러고, 가정을 회복시키고 뭐 아내를 회복시키고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고 아닙니다. 제일 먼저 회복되어야 할 관계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받아합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된다!" 이 교회 관계가 제일 초점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관계가 뭐냐하면, 두 번째 관계가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다! 그럴 때에 내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관계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못 믿었기 때문에 회복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참 하나님의 말씀이다! 믿고 이것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 신뢰가 되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와야 되고 그 다음에 뭐냐하면요. 아내를 바꾸고, 누구를 바꾸고, 그러지 말고 사람과의 관계! 아내를 신뢰해야 됩니다! 남편을 신뢰해야 됩니다! 자식을 신뢰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신뢰한다고 그럴 때에 앞에 문제가 안 되면 안돼요. 이상한 자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자식과의 관계가 절대로 안됩니다. 그 자식이 하나님을 모르면 그 자식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 자식이 이상해도 생명이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여러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뭐가 오느냐? 내 자신이 신뢰가 됩니다. 내 자신이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신뢰하게 되고 따라서 나를 신뢰하게 되는 믿음이 와 집니다.
나를 신뢰하게 될 때에 뭐가 옵니까? 확신이 옵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세계 복음화 일꾼이다!" 진짜 믿어집니까? 이 신뢰가 와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가치 있어요? 없어요? 엄청난 가치가 나오는 것이죠. 그러면 죽을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절대로 없죠. 그러면 낙심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누가 이 일을 계획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셨다고, 엄청난 신뢰가 나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여러분 누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회복합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마라! 왜? 점점 문제가 더 커져 버립니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나오거든 다 덮어놓으세요. 그 문제는 다 그대로 두세요. 왜? 문제는 여러분과 제가 해결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사람관계, 사람관계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입니다. 여러분 아무 게만 보면 소름 끼치는데, 그걸 해결하려고 하면 소름 더 끼쳐요.
그러면서 성경은 마태복음 8장 17절에 뭐냐하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러분 영적 눈을 뜨고 보면 그렇게 된 배경들이 전부 뭡니까?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단에게서 왔습니다. 지금 누구의 영에 인도로 왔습니까? 귀신의 인도로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때에 딱 한가지 있습니다. 오직 회복하는 자! 너도 아니고, 저 사건도 아니고, 이 문제도 아니다! 나를 회복해야 되겠다! 나를 회복할 때에 문제를 솔직히 인식을 해야 됩니다. 문제를 솔직히 바로 보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 문제는 영적인 문제지, 인간의 한계로 이겨낼 수 있는 어떤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창세기 3장에서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단은 지금 역사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마음을 누가 지배합니까? 사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가 망하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지금 속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하려고 애를 쓰지만 잘 할 수 없는 배경이 영적인 배경입니다. 이것이 가슴에 인식이 되어져야 됩니다.
분명히 이 사실이 인식이 되어져야 됩니다. 인식되어질 때에 우리도 모르게 이게 뭐가 됩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됩니다.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오히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 한 분 이름이 확실하게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영적인 전쟁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이해가 되죠.
그 다음에 이것이 인식이 되어지면서 뭐가 인식이 되어지느냐 하면, 해결하려고 할수록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받아합시다. 진짜 진실한 마음으로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다!"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옛날에 많이 안 섰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시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셔서 축복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실패한데도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뭘 의미하느냐? 축복하시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면 내가 실패한 모든 지난날의 일은 메시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처럼 호세아가 당한 가정의 모든 문제는 호세아로 말미암아서 시대적인 메시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당한 모든 가정과 모든 사건과 이 배경에서 하나님이 이 시대에 여건과 여러분 가정을 통해서 이루실 시대적인 뭡니까? 메시지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면 뭐가 나옵니까? 그때부터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진짜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옵니다. 자연적으로 여러분과 제가 딱 한가지 주만 바라보게 되는 진실한 믿음으로 인도가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게 축복하시기 위한 간절한 소망으로 오늘도 나의 모든 일과 사건을 계획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영적인 눈을 뜨셔야 됩니다. 위에 모든 축복과 약속이 있는데 위에 것을 바라보게 되면 뭐냐? 자꾸 다른걸 바라보니까! 이게 일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내 영혼이 잘됨같이' 된다고 그랬는데 내 영혼이 잘 되는 게 아니고 자꾸 육체를 바라보고 교회 와서 어떤 문제와 사건이 생겼다! 왜 이러냐? 영혼을 바라보고 영적인 눈이 열려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전능 하시다는 역사 아닙니까! 조금만 바라보면 이걸 가지고 자꾸 하나님의 방향, 하나님의 방향이라! 그랬습니다. 조금만 바라보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게 잘 안됩니다. 조금만 문제 있으면 육으로 돌아갑니다. 욕심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세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꾸 본인 수단 방법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시대에 영적 문제 회복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큰 일을 계획하셨는데, 나는 너무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지금 만드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붙잡고, 실패했습니까? 메시지입니다. 어렵습니까? 축복입니다. 문제 있습니까? 하나님 바라보라! 계시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우리 가정에 사건에 일들에 먼저 축복된 믿음의 조상으로 확실하게 세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절제하며 삽니다
마 6:16-18 / 박상훈목사
오늘은 우리가 금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마태복음 6장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힘써야 할 의가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가 구제였고, 둘째가 기도였고, 셋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불의는 멀리 해야 되지만, 의는 늘 가까이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제는 우리가 이웃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이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은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힘써야 할 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남극에 가면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남극의 신사라고 불려지는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펭귄이 알을 품고 새끼가 부화되면 그 새끼를 기르는 섬이기도 합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수많은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그 작은 섬에 모여듭니다. 수천 마리 아니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에 그 섬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빽빽합니다.
펭귄의 암컷은 보통 한두 개 정도의 알을 낳습니다. 그러면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 가면서 알을 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끼가 알에서 나오게 되면 펭귄들은 새끼를 그곳에 놓아두고서 먼바다로 먹이를 찾아 나섭니다. 펭귄들은 새끼가 좋아하는 작은 물고기, 오징어, 새우 등으로 잔뜩 배를 채워서 새끼가 있는 작은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보통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름 동안에 새끼 펭귄들은 작은 섬에 남아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면서 엄마펭귄, 아빠펭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보름이 지난 뒤 펭귄들이 배를 가득 채워 가지고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부모펭귄은 자기 새끼를 찾아가 배속에 가득 채워온 먹이를 토해내서 자기 새끼들에게 먹여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천, 수만 마리가 되는 펭귄들 가운데서 어떻게 자기 새끼를 용하게 찾아내느냐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펭귄들은 절대로 혼동하는 법이 없이 자기 새끼를 정확하게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자기 새끼를 찾을 때 모양으로 찾는 것이 아니고, 울음소리를 듣고 찾는다고 합니다. 펭귄들은 새끼의 울음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끼들도 부모펭귄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펭귄들이 먹이를 배속에 가득 채워 섬으로 되돌아올 때, 새끼를 찾는 소리와 또 부모를 찾는 소리로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펭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정확하게 자기 새끼의 소리를 분간해내고, 또 새끼펭귄들은 자기 부모의 소리를 다 분간해낸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늘 끊임없이 우리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우리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에게 맞추면,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세상 일로 얼마나 분주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분주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마저도 단념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주기도문 안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들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6:11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거부하는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금식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심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과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식과 관련해서 간단하게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했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 모두 절제된 삶을 통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6절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금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금식을 했습니다. 다윗도 금식을 했습니다. 다니엘도 금식을 했고, 엘리야도 금식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금식뿐만 아니고, 단체가 더불어서 함께 금식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선지자 사무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했습니다. 또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유다 백성들과 더불어 사흘을 밤낮으로 금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명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금식을 한 경우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단 하루만 금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대속죄일의 경우입니다. 그날만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 온종일 금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대속죄일의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 번에 제물로 드림으로서 대속죄일의 모든 규례를 이미 다 성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성도들처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어떤 일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금식을 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레에 두 번, 곧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필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서 금식했겠습니까? 물론 명목상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을 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바로 목요일이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이기 때문에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을 기념해서 자기들도 그 두 날 곧 목요일과 월요일로 정해서 금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장날로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터에 모였습니다. 농사꾼들도 모이고, 장사꾼들도 모이고, 또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구경꾼으로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슬픈 기색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옷 가운데서 제일 헌 옷을 골라 입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옷을 잡아 찢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재를 뿌렸습니다. 몸에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슬픈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금식한 티를 내려고, 멀쩡한 얼굴에 재를 발라서 얼굴이 상해 보이도록,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그들이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했다고 했습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온전히 금식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을 한답시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로 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사람에게 향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6절 하반부입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미 그들은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사람들의 인정은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취임할 때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기는 곧 떨어지고 맙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힘들게 금식하고서도 그들이 받은 상이라고는 쉽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기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실 화뿐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머리를 헝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금식할 때 머리를 깨끗이 빗고 기름을 바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에 재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금식할 때 우리의 얼굴을 씻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하나님은 보지 않으십니다. 고개를 돌려버리십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상대로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십니다. 6:1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무슨 의를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상대로 해야지,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식을 할 때는 티를 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평소와 같이 밝고 명랑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나님만 아시도록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아프리카의 복음화를 위해서 애썼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러니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한 번도 자기가 주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생을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기뻤습니다.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 가운데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한 유머가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나운 사자가 갑자기 그를 습격해서 그의 한쪽 팔을 물어뜯었습니다. 그의 살점이 떨어져나갔습니다. 그의 팔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의 하인이 얼른 달려와서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그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나의 몸은 나의 모든 사명이 다하기까지 죽지 않을 불사신인 모양이다!"
그래서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나운 사자에게 물어 뜯겼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면서 미소를 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구 가운데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식욕입니다. 마음 속에는 그와 같이 엄청난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연 내색하지 않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은 채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되고 바른 금식입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8절 하반부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을 상대로 한 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가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 어떤 부모가 모른 척 하고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사랑하는 자녀가 금식하면서 매달리는데 그냥 무심히 쳐다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사랑이 부족해서 자녀들이 금식하면서 매달리고 있는데 가만히 쳐다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고 금식하십니까?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식에 대해 반드시 잊지 않으시고 속히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금식할 때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금식할 때란 과연 언제입니까?
마9:14-15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9:15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멀리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는 우리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금식을 해야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멀리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겠습니까? 육신의 일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육적인 일에 얽매이다 보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영적인 일에는 아무래도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는 우리의 영을 맑게 하기 위해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살이 너무 쪄서 탈입니다. 그래서 살을 좀 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겠습니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의사는 아주머니를 여러모로 진단하고 난 뒤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의 살을 빼는데는 그저 식이요법이 제일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제가 일러드리는 대로만 하십시오. 현미밥 한 그릇에 묽은 야채국물을 만들어서 함께 드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서 과일을 하나만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살이 빠질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하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무엇인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이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식전에 먹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식후에 먹어야 합니까?"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먹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목구멍이 포도청,"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이 없다," "먹는 개도 아니 때린다."
그만큼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식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몸을 쳐서라도 복종시키겠다는 심정으로 식욕을 잘 절제하면, 그만큼 우리 몸의 다른 욕구들은 쉽게 절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9:25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의 종노릇하면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돈을 너무 헤프게 쓰는 사람은 돈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몇 번 입지도 못할 사치스러운 옷을 자꾸 사는 사람은 옷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잠이 너무 많아서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잠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아침잠이 너무 많습니까? TV 드라마를 너무 오래보아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TV금식하는 법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을 함부로 남발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은 필히 말금식, 수다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겠습니까? 금식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라고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 모두가 절제된 삶을 통해 매사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라고 칭찬 받고, 또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면
마 6:16-24 / 박지온 목사
지난 주일에는 어린아이가 된 것을 축하를 했는데, 오늘 옆에 사람과 함께 인사합시다.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믿음의 조상! 정말 아름다운 말이죠. '믿음의 조상!' 그래서 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이 뭐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다! 뭐냐하면 '믿음에 후손이다!' 그런 말이거든요. 오늘 이 시간 제목을 "네 눈이 성하면" 그랬습니다.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리고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5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중요한 결론처럼 말씀한 것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눈이 어둡다는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은, 결과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한 분을 잊어버리고 놓쳤기 때문에, 눈이 어둡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가 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 가정이 어렵다! 자녀들이 어렵다! 뭐 내 경제가 어렵다! 뭐 힘들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만은, 오늘 이 시간에 내 눈이 성하면 다 됩니다. 이 시간 아마 여러분 혹시 증명을 하고 싶거든 한번 눈을 감아 보세요. 한번 눈감아 보세요. 옆에 사람 봐요 보이는가! 이렇게 해서 뭘 합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간단합니다. 혹시 그것도 모자라거든 내려갈 때 눈감고 한번 내려가 봐요. 전부 계단 더듬거릴 겁니다. 눈감아도 아무것도 안 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랬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복이 '하늘에 있다!' 그랬습니다. 하늘에 속한 복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눈이 어두우니까, 이걸 못 보니까, 맨 날 땅만 보고 살아갑니다. 될 것이 없죠. 이게 일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간단합니다. 진짜 눈을 뜨면 돼요. 눈떴는데, 뭘 뜨란 말이냐! 이게 이제 비밀 중에 비밀입니다. 정말 여러분 볼 것을 보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풀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 서신에 말씀한 것처럼,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뭐라 그랬습니까? 따라옵니다. '범사에 잘되고' 뭐가 또 옵니까? '강건하여 지기를 간구하노라!' 어떤 분은 이것을 '구원의 3박자라!' 그러는데, 구원의 3박자가 아니고 눈을 바로 뜨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순서가 그렇게 이해를 하면 더 정확할 줄로 생각이 됩니다. 먼저 이 사실을 우리가 조금 알아야 되죠.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잘한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해도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어요. 뭐 부모로서 잘 하려고 얼마나 애를 습니까! 한계가 있습니다. 자식으로 잘하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옛날에 묘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하던 그런 것을 막 방영하더라 구요. 참 눈이 안 열리니까! 망할 짓을 골라합니다. 여러분 진짜 알아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나라가 망한 것 아닙니까! 3년 동안 부모 섬긴다고, 효도한다고 묘 옆에다가 초막 지어놓고 있으면, 일은 누가 하며 뭘 합니까! 이 일이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을 지금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래서 뭐, 또 재현 해 가지고 뭐 또 보여준다고 그러는데, 여러분 죽은 부모에게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심지어 우리 성경에 뭐냐하면 부모한테 못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살아있을 때에 진짜 잘 해야 되요. 효도문제, 이런 문제 눈이 안 열리면,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그로 통해서 오는 얼마나 어두운 역사를 못 보게 됩니다. 점점 더 망하게 되죠.
지금 우리나라가 뭐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보세요. 영적인 눈으로 안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점점 더 어려운 겁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누가 있습니까? 받아봐야 소용이 없어요.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왜 이렇게 되느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이 세계에서 이해가 안 되어요. '저런 대통령을 모셨는데, 어떻게 국가가 저렇게 어려우냐!' 이렇게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참 영적인 눈이 바로 열려야 됩니다.
그래서 과학지식이 발달이 되고, 문화가 발달이 되고, 뭐 여러 가지 많은 것으로 자랑할 수 있겠습니다 만은, 꼭 알아야 될 것은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보셔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6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그랬습니다. 여러분 풀이다! 금방 말라요. 그 다음에 꽃은 아무리 좋고 아름다워도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제가 이 건장 때문에 공원에 등산을 늘 갑니다. 가면 참 꽃이 한창 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감탄이 나와요. 그런데 그냥 그것도 하루, 이틀, 몇 일 가버리면 당장 시들어 버려요. 시들면 아름다운 꽃일수록 시들면 보기도 싫어요.
여러분 우리 인간들을 표현해서 '풀이다!' 그 다음에 아름다운 '마치 꽃과 같다!' 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은 더 빨리 시들어 버립니다. 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고 반드시 우리의 한계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다는 이면에 한계를 못 보면 문제가 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인간들이 자기 문제를 해결을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금 터져 나고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눈이 안 열리면 해결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뻔히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가정가정 마다 속수 무책입니다. 안 되게 되어있어요. 이 어려운 문제죠. 여러분들이 가정에, 혹시 여기 오신 분들이 문제가 없어서 행복하다면 거짓말입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행복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이유가 영적 눈이 열리면 이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로 이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보는 사람과 문제해결이 안 되지만, 많은 경우 자신에게 일어나는 자기 가정에 일어나는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그 문제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예요. 자기 자신의 문제도 '왜, 있는가?'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앉아있는 분들이 '내 문제 내가 안다!' 혹시 그렇다면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거의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우리가 통틀어 뭐라고 말하느냐?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 문제라 그랬습니다. 영적 문제 오늘 한번 받아합시다. "영한의 눈이 열려야 행복하다!" 예, 영한의 눈이 열려야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이 영적인 문제가 안 보여서 또 이것이 열려지지 않아서 행복은커녕 점점 자기도 모르게 가정과 개인들이 어려움에 빠져 가는 일들이 부지기수예요. 이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영적 문제를 아는 사람조차도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건 세상 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지, 바로 영적 문제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지난번 대예배 시간인가, 한번 말씀드렸죠. 네가 영적 문제 있다! 그럴 때에 영적 문제라 그러면 우리는 간단하게 '영적 문제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나 이것은 사실 알고 보면 굉장히 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영적 문제라 그러면 무슨 문제입니까? 어느 것을 가지고 영적 문제라 그럽니까? 창세기 3장에 문제입니다. 바로 그 배경이 누구입니까? '사단에게 붙잡혀 있다!' 이겁니다. 사단에게 붙잡혀 있다! 그러면 지금현재 누구의 인도를 받습니까? 귀신의 인도를 받고 있다! 이것이 영적 문제에 가장 중요한 근본문제입니다. 이 근본문제! 그래서 개인적으로 모두가 창세기 3장에 붙잡혀 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완전히 해결되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로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해결을 누리지 못할 때에 오는 3장 문제는 심각하게 우리도 모르게 내 사건과 일들 속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영적 문제가 열리지 않으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모르게 당하고 있는 겁니다. 점점 깊이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개인이 안되니까, 내 개인이 이런 문제에 빠져 있으니까, 오는 문제가 뭐냐? 가정문제입니다. 여러분 처녀 총각이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가정에 일어나는 상황을 가지고 서로 핑계를 대죠. '서로 네 탓이고 서로 네 잘못이고...' 더군다나 아이 하나 낳았다! '어쩌면 저게 지 엄마를 닮았냐! 어쩌면 저게 지아비를 닮았냐!' 전부 이럽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영적 문제를 가진 개인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될 리가 없죠.
여러분 이 문제가 이 사실이 보여지지 않으면 오늘날 왜 가정이 깨어지느냐? 왜 가정을 이룩하고 사는데, 왜 가정에 부모 자식간에 문제가 깨지고 점점 더 심각해지느냐?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심각한 영적 문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이 영적 문제, 가정문제를 가지고 우리창세기 6장에 있는 문제를 말씀했죠. 그 다음에 가정 문제가 깨어진다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이 가정문제가 깨지게 되면 따라서 오는 것이 사회문제 아닙니까! 창세기 3장 문제! 지금 사회가 심각하게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뭐 우리 핵심에도 그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만은, 제가 캘리포니아에 가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범죄에 도시다! 우리가 여기서 표현이 안 됩니다. 워낙 그때는 이해를 못했고 그랬을 뿐이죠. 1960년대에 벌써 사단교회가 등장을 했습니다. 완전히 사단이 사로잡았어요. 너무 아름다운 항구고 날씨도 좋습니다. 1년 내내 23도를 넘지 않습니다. 그 이하로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그런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요, 일기 좋은 항구입니다. 또 그리고 습기가 적당하게 있어 가지고 공기도 참 쾌적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분 알다시피 게이라는 것!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특별히 그 남자들끼리 서로 연애하는 것! 제가 보니까, 너무 징그러울 정도예요. 게이 식당이 따로 있고 또 심지어는 게이가 모이는 교회도 따로 있어요. 게이 목사가 또 설교를 하고... 세상에 이게 완전히 범죄의 온상입니다. 좋은 만큼 더 좋은 데로, 따라서 영적인 문제가 심각한 그런 부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왜 이렇게 흘러가느냐? 점점 더 문제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로 통해서 나오는 후손들도 똑같이 뭐가 나옵니까? 점점, 점점 영적인 문제가 나옵니다. 제가 어떤 기록을 통해서 보면서 느낀 것은 남자 게이들 에게는 참 이 해결책이 안 되더라 구요. 그런데 여자 게이들은 여자가 여자끼리 사는 가정에는 이 해결이 돼요. 그게 뭐냐하면 후손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정자 은행에 가 가지고 정자를 빌려오더라 구요. 이래가지고 아이를 키워요. 그래서 가정을 또 꾸리는 이런...
여러분 지금 복제인간을 만들어 내니 뭐니 하는데, 점점 여러분 영적 문제 심각하게 후손문제가 오게 됩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냐? 성경은 바로 예언했습니다. 이 땅에 다른 서적들은 파라다이스가 온다고 그랬지만, 성경은 이 세상을 점점 멸망해 가지고 있는, 점점 어려워가고, 점점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그래서 나중에 극한 시대가 왔을 때에 누가 재림한다고 했습니까? 모든 족속으로 복음에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왜? 하다하다가 안되면 결국은 복음으로 돌아와야 되니까! 그리고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축복된 마지막이 올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스스로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악해갑니다.
여러분 보세요. 옛날과 지금 정신적으로 얼마나 악한 문제가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배경이 아무리 육을 보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영적인 문제가 하늘에 역사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런 눈이 안 열리면 아무리 보아도, 땅을 보고서는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이 영적인 이런 역사가 나오게 된 배경이 사단의 역사라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사단의 영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미혹이 되고 판단이 잘못되고, 생각들이 잘못되어서 다른 것들로 자꾸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어지지를 않아요. 우리 자녀들이 뭐 잘못 가기를 작정하면서 잘못 가는 게 아닙니다. 잘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지만 구체적으로 영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배경이죠. 무속 하는 사람들 우리가 잘 알잖아요.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특별히 위해서 기도하시고 영적 문제가 오신 분들이 싸워야 될 문제들이 일단 내가 귀신을 접했다! 또 그런 것으로 내가 살아왔다고 그럴 때에 그로 통해서 반드시 후손들이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적으로 영적 문제가 오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내가 괴롭다! 고통스럽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까지... 그래서 통계적으로 무속인들 후손이 40대를 잘 못 넘는다는 그런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우리가 보면서 구체적으로...
그 다음에 여러분 알다시피 종가 집에 문제가 분명히 오잖아요. 저는 그 저 안동 그 양반들에 대해서 소설로 쓴 글을 몇 번 읽어 봤습니다. 봤는데요, 심각하더라 구요. 자기 가문에 일을 자기가 소설화시킨 이런 글을 제가 읽어봤습니다. 종가 집에 문제들, 영적 문제 심각합니다. 왜?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부모가, 살아있는 부모가 살아있는 자식들로 하여금 효도를 받는 것이지, 죽은 후에 부모가 내게 잘해 줄 것이라! 그래가지고 제사 잘 지낸다 그것은 효도 개념을 넘어 가지고 그것은 완전히 이기주의 욕심입니다. 또 그래가지고 여러분 아실 것은, 자식들이 아무리 못해도 진짜 부모 같으면 제사 잘 못 지낸다고 어떤 부모가 벌을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그 부모를 이상하게 조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 제사 제도에 대한, 부모에 대한 의식입니다.
제가 늘 그런 말하잖아요. 제가 이 아들 하나 세광이, 그 뭐 별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별로... 그래도 나한테는 참 귀합니다. 그 뚱보고 이게 하는 게 그래도...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이 '저거 뭐 저래, 벌을 좀 받아야 되겠다!' 혹시 그럴지 몰라도 나는 잘못해도 나는 복을 내릴 마음이지, 요만큼도 벌줄 마음이 없어요. 내가 만약에 복을 줄 수 있도록, 혹시 죽어서 복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나한테 맨 날 욕을 한다 그래도 '야, 이놈의 자식아! 그래도 네게 복을 주마!' 이것이 부모의 심정이지, 어떤 부모가 제사 조금 잘못했다고, 묘 자리 조금 잘못섰다고 3족을 멸하고 이런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건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게 제사 제도요, 그것은 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에 성경이 엄격하게 효도를 말했어요. 오늘도 성경이 말씀 안 했습니까? 우리 장로님 기도 중에서 말씀했습니다 만은, 구약에는 더 엄격해요. 구약에는 부모를 이상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구약에는 '부모한테 대적하는 자들은 죽여라!' 그랬습니다. '부모한테 잘못하는 사람은 죽이라!' 그랬습니다. 신약에는 부모한테 잘하면, '잘살도록 해주마! 오래 살도록 해주마!' 하나님께서 효도 관의 문제는 살아있을 때 부모, 살아있는 부모, 인격을 가진 부모를 말했지, 죽은 부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죽고 나면 어디로 갑니까? 천국과 지옥 둘 중에 갑니다. 효도 관이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 그러면 잘못 되어지느냐? 영적 눈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그렇게 속이는 사단의 세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 속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1년에 제사 제도를 통해서, 그 다음에 1년에 무속을 통해서 들어가는 돈이 뭐 그런 말을 안 들었습니까! 엄청난 그런 낭비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잘못된 종교로 인해서 나오는 영적 문제가 심각하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상이 우리나라에 급증합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영향력이 급증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왜 그렇게 되어 집니까? 정치를 못해서, 잘못해서, 잘하려고 안 그래서 아닙니다. 얼마나 잘하려고 애를 쓰는데, 영적인 문제가 급증하니까! 이상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잘하고 싶어도 아니에요. 일단 어디 속에 갔다! 돌아버리는 것을 어떡합니까! 생각, 마음 다 돌아버려요. 제가 아무리 봐도 참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면 눈이 열리지 아니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또 알아야 될 것이 잘못된 종교 생활이라! 그럴 때에 여러분 기존의 교회에서 참 잘 들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약속된 언약을 붙잡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디로 빠지느냐? 율법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자꾸 잘 잘못을 가지고 따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 착한 사람이다. 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비난할 때에 교회 다니는 게 그러냐고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라 그럽니까? 만약에 교회 안 다녔으면 너를 죽였다! 복음 속에 섰다 그럴 때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생명입니다.
내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착하다는 배경이 아닙니다. 예수 생명이 들어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착하게 된 것이 나오는 것이지, 그것은 증상이지, 거기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도 결국 많은 교회들이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비친 그대로 '교회 다니면 착하다! 안 착하다!' 율법적인 배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흑암 세력들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로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솔직히 이 시간에 오신 분들, '아, 나는 안 착한데 예수 믿기를 잘했네!' 예 예수 믿기를 잘했습니다. 안 착해도 어디 갑니까? 진짜입니까? '이 이상한 사람들만 모였네!' 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은 인간은 본래적으로 영적 문제, 사단의 역사 속에 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이 낳자마자 젖 깨물어 보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지 모르겠네 그게 선해서 깨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게 누가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 영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이외에는 이 땅에서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었다! 이것을 가지고 '영적인 눈이 열렸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눈으로 볼 때에 내 개인이 심각한 영적인 문제에 빠졌다는 사실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성질을 내느냐? 영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아닙니까! 왜 오늘 아침 이 시간 예배드리러 오는데도 왜 부부싸움하고 왔느냐? 영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하려고 복 받으러 오는데도, 오다가 차 타고 오다가 옆에 사람한테 괜히 신경질 내고, 욕 한바탕하고 하느냐? 그게 전부 영적인 배경입니다. 내 개인의 이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전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분명히 되어야 되죠.
그리고 이 영적인 배경으로 말미암아 이제 말씀 드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배경이 악한 습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상한 습관들! 악한 습관들! 드러내기 힘든 악한 습관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뭐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은, 나한테 악한 습관이라 그러면, 그리고 우리 집에 악한 습관이라 그러면 지난주에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뭐든지 사람을 딱 보면 분석을 하려고 듭니다. 분석을 하려고 하는데, 그 분석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도 착하게 좋게 바로 '참, 잘 하는구나! 좋은 사람이구나!' 이런 쪽으로 분석을 안하고 이 사람이 약점이 이건 참 못된 것이구나! 이런 식으로 자꾸 분석을 하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가지고 '서로 삐딱 고기 먹지 말자!' 그랬다고 이야기를 안 했습니까 만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게 영적 배경이라는 것을 몰라요. 영적 배경인 것을 몰라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 하도 그러다가 '여보, 여보 내가 왜 당신한테, 당신이 그 기분 상하고 그러는 것을 알았다고...'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어릴 때에 부모 밑에서 막 떠받들리고 사랑 받고 자랐으면 어지간히 좀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를 해도 상처를 안 받는데, 어릴 때에 그렇게 안 자란 사람에게, 말하자면 별로 멸시보다도 뭐 이렇게 사랑 속에서 안 자라난 그게 영적인 문제로 보면 돼요.
뭐가 오느냐 하면,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려도 피해의식이 강해져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뭡니까? 자기 비아가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뭐가 있느냐 하면 뭐랄까? 어떤 그 극단적인 결론을 내려 버려요. '안 되면 치워버려라!'든지 쉽게 포기를 해 버리고 이런 어떤 것으로 빠진다는 상처에 대한 배경을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그러면서 아마 내가 지난번에, 사실은 여러분은 몰랐지만 몇 일 전에 대 전쟁이 한번 있었거든요. 아마 이 그 상처를 내가 건드린 것 같다고 그러더라 구요. 본인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그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삐딱하게 생각한다고...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느냐? 개개인이 자기도 모르게 악한 습관들이... 보통 때는 이게 드러나지도 않아요. 이 습관들이 숨어 있습니다. 잠재해 있습니다. 요만한 문제 가지고도 악한 습관들이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그 배경이 영적인 눈을 열어야 '아, 이게 내 문제구나!' 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 악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절대로 내 문제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절대로 내 문제 아니더라 구요. 모든 게 하나같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문제지! 왜? '네가 문제지!' 그래서 아들에게 문제 생기면, '꼭 저거는 지어미 닮았다!' 이렇게 되지 '나 닮았다' 는 소리는 잘 안 했거든요.
그래서 영적인 눈이 이것이 열러지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잘못 자기가 보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생깁니까? 나라는 것이 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내가 깨어지는 사건이 여러 가지 많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주로 감정적인 상처문제 때문에 내가 깨어집니다. 내가 깨어지면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여러분 내가 죽을 지경인데, 뭐 '교회에서 기도하자!' '너나 기도 잘해라! 내가 죽을 지경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깨어지면 가정에서 '가정예배 드리자!' '내가 깨어져서 죽을 지경인데...'
제가 늘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려도 깨지도록 만들어 놓고 드리면 일이 안 되거든요. 내가 깨어져 죽을 지경인데, 교회에서 '축복 받기 위해서 이렇게 하자!' '너나 잘해라! 나는 죽을 지경인데...' 내가 깨어지는 이것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깨어지는 배경이 서로 뭐냐하면 상처문제! 이 감정적으로 오는 문제들이 많거든요. 그 다음에 그런 문제를 통해서 주로 뭐가 있느냐 하면, 간단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 욕심들이 강한지 자존심 건드려서 그래요.
여러분 부부싸움 보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조그마한 자존심가지고 싸움하는 것이지, 큰 문제 아닙니다. 큰 문제 가지고 싸우면 오히려 괜찮아요. 거의 자존심 문제! 이것가지고 이혼하느냐? 안 하느냐? 그러고 따지고 보면 나중에 맨 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좀 내가 그것가지고 그랬나 싶을 정도가 아닙니까? 그 다음에 이렇게 나오면서, 이렇게 자기가 깨어지면서 오는 것이 뭐냐하면, 점점 그럴수록 완벽 하려고 애를 씁니다. 완벽주의에 빠집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자기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어디로 빠지느냐? 율법에 빠집니다. 율법에 빠지면 빠질수록 남의 잘잘못을 판단하게 되는 배경으로 빠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빠지게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확신 없으면 '아, 나는 못 쓰게 되겠구나! 나는 쓸모가 없구나! 나는 가치가 없구나!' 그래서 오는 것이 좌절 속에 빠져 버립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지금 '아, 나는 가치 없구나! 이 땅에 살맛이 없구나! 살 생각 없구나! 자살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되거든 심각한 영적 문제에 빠진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인가!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이러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막 '내가 어쩌다가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있느냐?' 그러니까 뭐가 옵니까? 좌절밖에 안 와요. 그것이 어디냐? 영적 배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적 문제가 나오게 되는 동시에 자기 깨어지고, 그 다음에 가정 깨지고, 사회 깨어지면서 오는 것이 영적 문제에 엄청난 배경인데, 이 영적 문제로 말미암아 이 자신이 먼저 깨어지고, 자기 자신이 회복이 안 되기 때문에 오는 모든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여러분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어버이의 사명 다하자! 가정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자!' 자기가 깨져 죽을 지경인데 무슨 자녀에게... 이 방향이 안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때에 여러분들이 이루어 나가고 있는 길이라면 딱 하나입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그게 뭐냐하면, 제일 먼저 내가 깨어지고, 가정이 깨어지고, 이웃이 깨어지도록! 제가 이런 말 하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목회자 치유 사명자 대회하면서 느낀 것은, 목회자라 그러면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 안 되어야 됩니까!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좋은 가정일거라고 생각 했는 사람들조차도 이 깨어지기 직전이더라 구요. 그런데 나는 저 사람은 절대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정도 딱 들어보면, 이혼하려고 몇 번 도장을 찍을까? 말까? 했던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더라 구요.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가정이 깨어졌다 그 배경보다도 먼저 누가 깨어졌어요? 자신이 깨어 졌습니다. 자신이 깨진 배경에서 제일먼저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이 이게 영적 문제거든요. 자신이 깨어져서 그런데 회복하려고 그럴 때에 나를 회복하려고 그러고, 가정을 회복시키고 뭐 아내를 회복시키고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고 아닙니다. 제일 먼저 회복되어야 할 관계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받아합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된다!" 이 교회 관계가 제일 초점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관계가 뭐냐하면, 두 번째 관계가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다! 그럴 때에 내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관계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못 믿었기 때문에 회복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참 하나님의 말씀이다! 믿고 이것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 신뢰가 되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와야 되고 그 다음에 뭐냐하면요. 아내를 바꾸고, 누구를 바꾸고, 그러지 말고 사람과의 관계! 아내를 신뢰해야 됩니다! 남편을 신뢰해야 됩니다! 자식을 신뢰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신뢰한다고 그럴 때에 앞에 문제가 안 되면 안돼요. 이상한 자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자식과의 관계가 절대로 안됩니다. 그 자식이 하나님을 모르면 그 자식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 자식이 이상해도 생명이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여러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뭐가 오느냐? 내 자신이 신뢰가 됩니다. 내 자신이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신뢰하게 되고 따라서 나를 신뢰하게 되는 믿음이 와 집니다.
나를 신뢰하게 될 때에 뭐가 옵니까? 확신이 옵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세계 복음화 일꾼이다!" 진짜 믿어집니까? 이 신뢰가 와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가치 있어요? 없어요? 엄청난 가치가 나오는 것이죠. 그러면 죽을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절대로 없죠. 그러면 낙심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누가 이 일을 계획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셨다고, 엄청난 신뢰가 나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여러분 누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회복합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마라! 왜? 점점 문제가 더 커져 버립니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나오거든 다 덮어놓으세요. 그 문제는 다 그대로 두세요. 왜? 문제는 여러분과 제가 해결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사람관계, 사람관계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입니다. 여러분 아무 게만 보면 소름 끼치는데, 그걸 해결하려고 하면 소름 더 끼쳐요.
그러면서 성경은 마태복음 8장 17절에 뭐냐하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러분 영적 눈을 뜨고 보면 그렇게 된 배경들이 전부 뭡니까?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단에게서 왔습니다. 지금 누구의 영에 인도로 왔습니까? 귀신의 인도로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때에 딱 한가지 있습니다. 오직 회복하는 자! 너도 아니고, 저 사건도 아니고, 이 문제도 아니다! 나를 회복해야 되겠다! 나를 회복할 때에 문제를 솔직히 인식을 해야 됩니다. 문제를 솔직히 바로 보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 문제는 영적인 문제지, 인간의 한계로 이겨낼 수 있는 어떤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창세기 3장에서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단은 지금 역사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마음을 누가 지배합니까? 사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가 망하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지금 속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하려고 애를 쓰지만 잘 할 수 없는 배경이 영적인 배경입니다. 이것이 가슴에 인식이 되어져야 됩니다.
분명히 이 사실이 인식이 되어져야 됩니다. 인식되어질 때에 우리도 모르게 이게 뭐가 됩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됩니다.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오히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 한 분 이름이 확실하게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영적인 전쟁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이해가 되죠.
그 다음에 이것이 인식이 되어지면서 뭐가 인식이 되어지느냐 하면, 해결하려고 할수록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받아합시다. 진짜 진실한 마음으로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다!"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옛날에 많이 안 섰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시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셔서 축복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실패한데도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뭘 의미하느냐? 축복하시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면 내가 실패한 모든 지난날의 일은 메시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처럼 호세아가 당한 가정의 모든 문제는 호세아로 말미암아서 시대적인 메시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당한 모든 가정과 모든 사건과 이 배경에서 하나님이 이 시대에 여건과 여러분 가정을 통해서 이루실 시대적인 뭡니까? 메시지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면 뭐가 나옵니까? 그때부터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진짜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옵니다. 자연적으로 여러분과 제가 딱 한가지 주만 바라보게 되는 진실한 믿음으로 인도가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게 축복하시기 위한 간절한 소망으로 오늘도 나의 모든 일과 사건을 계획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영적인 눈을 뜨셔야 됩니다. 위에 모든 축복과 약속이 있는데 위에 것을 바라보게 되면 뭐냐? 자꾸 다른걸 바라보니까! 이게 일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내 영혼이 잘됨같이' 된다고 그랬는데 내 영혼이 잘 되는 게 아니고 자꾸 육체를 바라보고 교회 와서 어떤 문제와 사건이 생겼다! 왜 이러냐? 영혼을 바라보고 영적인 눈이 열려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전능 하시다는 역사 아닙니까! 조금만 바라보면 이걸 가지고 자꾸 하나님의 방향, 하나님의 방향이라! 그랬습니다. 조금만 바라보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게 잘 안됩니다. 조금만 문제 있으면 육으로 돌아갑니다. 욕심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세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꾸 본인 수단 방법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시대에 영적 문제 회복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큰 일을 계획하셨는데, 나는 너무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지금 만드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붙잡고, 실패했습니까? 메시지입니다. 어렵습니까? 축복입니다. 문제 있습니까? 하나님 바라보라! 계시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우리 가정에 사건에 일들에 먼저 축복된 믿음의 조상으로 확실하게 세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 주님
마 5:17-20 / 박봉수 목사
근자에 자주 듣게 되는 시사용어 가운데 ‘프레임’(Fra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사진을 찍는 분들이나 풍경화를 그리는 분들이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사각 창을 만들어 사진 찍을 대상이나 그림 그릴 풍광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창에 사진이나 그림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 손으로 만든 창을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사회과학에서 이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해 왔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때도 각각 개개인이 저마다 보이지 않는 이런 창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창이 사람이 사물과 현상을 해석하는 인식체계인데,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부릅니다.
또 ‘프레이밍’(Framing)이란 말도 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방송국에서 어떤 사회적 이슈나 사건을 취재 보도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특정한 프레임을 사용하게 되면, 그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시청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프레임을 따라 뉴스를 이해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프레임을 따르는 여론이 형성됩니다. 이것을 프레이밍이라고 부르고, 흔히 ‘프레임을 씌운다’라고도 말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이 프레임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진영으로 갈라놓고 진영 간의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때 이들이 사용하는 핵심기술이 바로 이 바로 이 프레이밍 기술입니다.
한편에서는 상대방을 ‘적폐’ 또는 ‘친일’이라는 프레임으로 씌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로남불’이라는 프레임으로 씌웁니다. 그 과정에서 팩트 곧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레임을 따라 해석된 사실 아닌 사실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레임을 따라 편 가르기가 이루어지고, 서로 적대시하며 공격합니다. 바로 이 프레이밍이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이런 프레이밍 기술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이런 프레임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런 프레임에 영향을 받아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려고 하시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우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특히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에 따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8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그들이 들어보지 못한, 정말 새롭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동안 성경을 가르쳐왔던 랍비들에게 들어본 일이 없는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씌워놓은 프레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폐하고, 전혀 새로운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는 그 프레임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면, 예수님 이전의 율법과 구약성경은 불완전했다는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시 19: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완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 율법은 완전하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그 율법을 잘못 대하면서, 그 사람들에게서 율법은 불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을 잘못해석해서 실천하려 하거나 가르치려 할 때, 율법은 불완전해 집니다. 그리고 율법을 알면서도 그대로 지키지 않을 때, 율법은 불완전해 집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렇게 불완전해진 율법을 올바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때문에 불완전해 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해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휴지조각처럼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 물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완전하게 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 본문 이후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율법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으로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죽이지만 않았으면, 이 율법조항을 어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하면서도 단지 죽이지만 않으려는 악행이 저질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율법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화를 내도 살인하지 말라는 이 율법조항을 어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모욕하고 인격모독을 하는 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이 율법조항을 어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말 뿐 아니라, 마음으로 미워하는 감정적인 살인도 하지 말고, 모욕을 주어서 인격적인 살인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올바로 해석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겉사람이 있고 또 속사람이 있습니다. 겉사람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에 비해 속사람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감춰진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가르칠 때 겉사람이 지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지만 속사람은 율법을 어기는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함께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살인 조항의 경우 겉사람이 죽이지 말아야 하고 폭행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지 말고 속사람이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모욕을 주지 말아야 하고, 음해하거나 모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율법이 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겉사람 뿐 아니라 속사람이 다 함께 그 말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겉사람과 속사람이 다 함께 그 말씀을 따르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마 12장을 보면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며 율법을 폐하려 한다는 프레임을 씌우려 한 것입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신 5:14)고 하는 말씀을 실천을 위해 형식화했습니다.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몇 킬로미터 이상은 걸으면 안 되고, 몇 킬로그램 이상은 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팔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담이 무너져서 길을 걷던 사람이 그 안에 깔렸는데 벽돌을 치우고 그 사람을 구조해 내는 것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라 하여 그 다음날로 미룹니다.
한 마디로 율법의 정신은 사라져버리고 형식만 남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뜻은 잊어버리고, 그저 조항만 형식적으로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것도 율법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한국교회사 기록을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볼 때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습니다. 한 번은 김재준 목사님이라는 분이 이상촌이라는 잡지 추천사에 이렇게 쓴 일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 농촌교회는 보통 낮 10-12시까지 예배를 드리는데, 주일과 시간 엄수의 정신은 물론 끝까지 이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름 농번기에는 예배시간을 조정해서 예배를 드리고 낮에는 부득이 일을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분이 성수주일을 폄훼했다고 단죄를 당했습니다.
오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집합금지를 당하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일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당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여서 전염병을 확산시켜서 우리 안에 확진자가 나오고, 우리 때문에 이웃들이 전염병에 걸린다면 잠시 모이는 일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영으로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룩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이 말씀의 기본 정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 말씀의 기본 정신을 먼저 깨닫고, 그 위에 형식을 잘 세워야 하겠습니다.
율법에 대한 올바른 실천
본문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율법 말씀가운데 그 어떤 것도 지키지 않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말씀을 분석해서 자기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계명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하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이 365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정해놓은 계명이 613개나 됩니다.
마 22장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613개 율법 계명들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서 보듯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 613개 율법계명들을 구분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이 있고, 덜 중요한 계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계명을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경중을 구분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 덜 중요한 계명, 심지어 형편에 따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계명... 이런 식으로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자기들이 말씀의 경중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우선순위를 매깁니다. 심지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양해하기까지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명하신 것을 그냥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도 되고 말고를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할 것인지 나중에 할 것인지를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잘못된 태도로 말씀을 지키려 할 때 말씀이 불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서 불완전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최근 코로나팬데믹으로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마땅히 예배는 자기교회의 예배당에서 드려야 하지만,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일정기간 동안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인 면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교회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우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교우들 가족 가운데 교회에 나오지 않던 분들도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도 온라인예배를 계속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다음은 부정적인 면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자기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유튜브를 보면 가장 조회수가 많은 사람들을 ‘인플루언서’라고 하는데, 당연히 목회자들 가운데도 인플루언서가 나타났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다보면 추천영상으로 이런 인플루언서가 소개됩니다. 교인들이 흥미로 한 번씩 들어가 봅니다. 자기교회와 비교하면서 아예 온라인 예배를 그 교회로 들어가서 드리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팬데믹 이후입니다. 한 목회연구기관에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니까 코로나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예배당에 가서 현장예배를 드리지 않고 계속 온라인예배를 드리겠다고 답한 사람이 약 20%나 된다고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마치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율법계명들 가운데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선택했던 것처럼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 가운데 예정된 교회로 보내셔서 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대면예배냐 비대면예배냐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팬데믹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비대면 예배를 드렸고, 팬데믹이 끝나면 당연히 대면예배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판단하고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고 나를 이끌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 불완전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선 그 말씀의 뜻을 잘못 이해해서 불완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지키면서 불완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에게서 말씀이 완전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올바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복 있을 사람들
마 6:17-26 / 이수영 목사
오늘은 본문을 대하며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에 있는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지설교]라고 불리기도 하는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가 여덟 가지 복을 열거하고 있는 데에 반해 네 가지 복과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20절부터 23절 사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주린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과 주님 때문에 미움과 멀리함과 욕과 악하다 말함과 버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무조건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미움과 멀리함과 욕과 악하다 말함과 버림을 당하기만 하면 다 복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대상이 제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그 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주위에 둘러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좇는 이들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모두를 일반적으로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보다 가치 있는 어떤 것, 보다 궁극적인 어떤 것, 삶에 있어서 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아 예수님께 나아온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런 힘도 희망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 약속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고자 나아온 신앙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비록 가난하지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세속적 관심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예수 믿고 교회 나아가고 하나님 말씀 배우고 하나님나라 찾고 있게 됐습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가난한 것보다 영적으로 빈궁한 것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임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하신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봅니다. 무조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최우선의 관심사로 삼고 크든 적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삶의 관심과 에너지와 자산을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쏟을 줄 아는 이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주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지금"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1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도 지금 주리거나 우는 사람들은 무조건 나중에는 배부르고 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지금 주리고 울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영원히 배부르고 영원히 웃을 수 있기 위하여 지금 주리고 울 수밖에 없음을 감내하는 이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주님만을 따르며 주의 말씀대로 살며 주의 의를 이루려고 힘쓰느라고, 이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지금의 궁핍과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이 주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게을러서 굶주리는 사람이나 나약해서 항상 징징 짜며 사는 사람이 무조건 행복하고 배부르게 되며 웃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 지금 주리고 울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보다 "영원한 삶"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주리고 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더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지금 주리고 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부요함과 기쁨을 위해서 오늘의 궁핍함과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 주님과 상관없이 배부르고 웃는 일에 관심 두지 않으며 오직 주님 때문에 배부르며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이라면 굶주릴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주님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인자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에 유의해야 우리는 22절 말씀 전체의 뜻을 바로 붙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먹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 듣고 버림받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이고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런 사람 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우리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까? "인자로 말미암아"라는 단서가 붙을 때입니다. 주님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주의 뜻대로 살려 하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버림을 받아야 할 때에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럴 때에 슬퍼하거나 위축되어 쳐지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23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럴 때에 기뻐하고 뛰놀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3절). 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고 상 타고 명예를 누리고 친구를 많이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그의 나라에서 상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상이 클 사람이기에 세상에서는 오히려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버림을 받는 일이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복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고 상 타고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실은 그럴 자격도 없을 뿐 아니라 인간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칭송을 받고 상 타고 명예를 누린다고 흥분하고 분노하고 속 끓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그런 세상인 줄 알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며 버릴 때에 우리가 기뻐하며 뛰놀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은 옛날부터 참된 선지자들에게는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3절). 다시 말하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세상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먹고 악평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선지자의 반열에 서는 것이고 참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여기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서 하신 말씀을 뒤집어 다시 한 번 먼저 주신 가르침을 반복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 있을 사람들과 정반대되는 사람들을 가리키시며 "화 있을진저" 선언하심으로써 복 있을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축하하시고 복 있을 사람의 자세를 끝까지 지키기를 권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위로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또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으로 듣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 또한 지금 부요하고 배부르며 웃고 칭찬 받는 사람은 무조건 모두 나중에 화를 당하고 굶주리게 되며 위로 받지 못한 채 애통하며 울게 되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배부른 자여 ... 지금 웃는 자여" 하신 것은 영원한 나라, 영원한 삶, 영원한 기쁨과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칭찬, 하나님의 상에는 관심 없이 그저 지금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하셨다고 해서 부자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정의로운 세상 만드는 일에 관심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는 이들을 꾸짖으시며 경고하신 말씀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하셨다고 해서 식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풍요에는 관심이 없이 먹기를 탐하는 사람, 특히 이웃의 굶주림과 배고픔에는 하등의 관심도 나눌 마음도 없이 혼자 즐기며 사는 사람을 탓하시며 경고하신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하셨다고 해서 늘 미소 짓고 명랑하게 지내며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무조건 증오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에 무신경하고 더더군다나 남의 피해와 억울함을 통해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증대시키며 만족해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엄히 경고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위로와 배부름과 웃음과 칭찬에 취하여 사느라 영원히 위로도 없고 굶주림과 애통과 부끄러움과 후회만 있을 삶을 만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26절의 말씀을 가슴에 잘 새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세상은 원래 참 선지자는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고 버리면서,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너도 나도 칭찬을 해온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든 인정을 받아 보려고 애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고, 세상에서 칭찬을 듣지 못했다고 서러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년에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말년에 가서 궁핍해지는 삶은 비참합니다. 마지막에 웃는 이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칭찬 받는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웃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이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소유하고 있고 향유하고 있는 부와 명예, 건강과 재능과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일에 온전히 투여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을 누릴 삶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 삶,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 삶,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삶, 영원한 기쁨을 소망하지 않는 삶,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 주님 때문에 울 줄도 모르고 주님 때문에 웃을 일도 없는 삶, 그것은 오늘의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고통을 영원히 연장시키는 불쌍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과 명예까지도 영원한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고통으로 뒤엎어놓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 때문에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주리고 울며 버림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만족과 칭찬과 기쁨을 누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면 복 있는 삶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히 복된 삶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를 포기하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만 하면 다 잃은 것 같은 상태에서도 다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투자
마 6:19-21 / 이동원 목사
기독교 교인들의 의식을 조사하는 연구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인들이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언급하지 말았으면 하는 주제 중에 1위가 돈(헌금)이야기이고, 2위는 정치 이야기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칼빈 당시에도 그런 문제의 제기가 있었던지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돈에 대하여 바르게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말했다고 알려 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설교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많은 비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대략 38개의 비유가 기록되고 있는데 그 중에 16개가 재물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거의 예수님의 설교의 절반이 돈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달란트이야기, 데나리온 이야기, 청지기, 과원지기, 품군, 부자이야기등은 다 물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신약성경에 평균 10구절에 한번씩 물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복음서에만 288구절이 물질에 관한 이야기이고, 성경 전체에 무려 2300구절 이상이 돈과 재정에 관한 구절입니다. 성경은 돈에 대한 관심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돈은 삶의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돈을 피해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소원 성취의 요정이 들어 있는 요술 항아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청년이 요정을 불러내자, 요정이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릴까요?”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청년은 지체 없이 “저는 돈과 여자와 결혼을 원합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곤난한 듯 “꼭 세 가지를 다 원하시나요?”하자 다시 청년은 “예, 저는 돈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한데요”했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소원대로 해드리지요” 그래서 그 청년은 얼마 후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돈 여자와 결혼 안하시고, 돈 인간으로 살지 않으시려면 돈에 대한 바른 생각, 돈에 대한 바른 헌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고상한 교훈의 하나로 알려진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본문의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19절),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20절)”는 말입니다. 저는 이 교훈 속에 성경적 재정관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우선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금하지 않으신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소유를 금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소유를 금한 말씀은 없고, 예수님도 사유재산을 금하는 가르침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Our daily bread)을 주옵시고-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양식은 우리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주인은 아니지만 양식을 맡은 청지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유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나 극단적 사회주의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2. 저축을 금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 특히 잠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할 수 없는 겨울을 위해 여름에 땀흘려 일하고 저축하는 개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잠6:6을 보실까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6:8입니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예수님은 5병2어의 기적의 마당에서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개혁자 칼빈은 여기에서 저축의 정신을 찾았습니다.
3. 삶의 즐거움을 금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물질 그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선하게 보신 하나님의 관점안에는 물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이 물질을 주신 목적의 하나가 물질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딤전6:17을 보십시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은 인생이 우리에게 허락된 물질을 적절한 한계 내에서 누리는 것을 질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함께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에 예수님께서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결코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나, 장래를 위해 물질을 저축해 두거나, 적절한 한계 내에서 물질을 누리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금하신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물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에 의하면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에서 의식주에 대한 필요를 가르치시던 주님은 마태6:3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 분명하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물질은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는 징후가 무엇일까요? 물질을 쌓아두는 그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서서히 물질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물질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닌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맘몬주의의 우상에 빠진 삶의 모습입니다.
마태6:24을 읽어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 재물이란 단어가 원어에 바로 맘몬(mamonas)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본래 우상 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재물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우상 숭배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경계할 것은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은 악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가르칩니다. 딤전6:10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2.물질에서 안전을 구하는 삶입니다.
인생에서 돈을 잃는 것은 무엇보다 인생의 안전장치가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악착같이 물질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인생의 안전을 보장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결코 안전의 보장이 되지 못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붙들고 사는 모든 세상의 보물은 결국 세가지 좀과 동록과 도둑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의복은 시간이 지나가면 좀이 쓸고, 보화에는 동록 곧 녹이 쓸어 부식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 집도 도둑의 표적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옛날 중동 지방의 집들은 흙집이어서 아무리 부자 집도 구멍을 파고 들어오면 도둑을 피할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현대의 도둑은 더 간교한 모습으로 우리의 재물을 노리고 있습니다.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물질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환률이 폭등하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다시 이 메시지를 확인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경제위기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물질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셋째는,<본문에서 예수님이 격려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하늘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물을 안전하지 못한 땅에 아닌 안전한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세상 은행은 안전하지 못하니 하늘 은행에 안전하게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이 은행의 이름을 아시나요? 바로 ‘천국 기업 은행’입니다. 벧전1:4을 함께 읽겠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쉽게 말하면 가장 안전한 상급, 영원한 상급을 보장하는 하늘의 기업(천국 기업)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늘 나라에의 투자야 말로 영원한 투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이 말씀의 결정적인 의미를 마태 복음 6장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 주시지 않습니까? 마태6:33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에 보물 쌓기에 집중하면 땅의 보물은 그분이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 의를 구한다는 의미를 예수님은 막연하게 의로운 행위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6:1-2에 의하면 예수님은 의를 행함을 구제 행위와 연관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선교와 구제등에 구체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나가는 일년 동안의 청지기적 삶을 결산하면서 구체적으로 선교나 구제 그리고 헌금 생활에 얼마나 신실했는가를 결산해야 할 시간입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쓰임새를 절약하는 중에 헌금을 제일 먼저 줄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헌금의 헌신이 줄어들 때 제일 타격을 받게 될 영역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역사 속에는 이런 경제 위기를 직면하면서 오히려 재정적인 후퇴가 아닌 재정적인 헌신을 결단한 의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작은 서점 사업을 하다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위기와 유사한 경제 공황이 닥쳐 파산을 하고 약 10만불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진지하게 기도하다가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무엇보다 과거에 자신의 헌금 생활에 대한 불성실을 회개하고 자기 집을 팔고 빚 정리를 하고 다시 십일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마당에 무슨 십일조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빚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셨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기도하며 약품 연구를 하면서 약품 제조, 판매, 영업으로 바쁜 새 삶을 살아가며 얻어지는 수입의 십의1조를, 그리고 십의 2조를, 마침내 십의 3조를 드리기 시작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재기한지 3-4년 만에 한 세계적인 제약회사를 일으켜 세우게 됩니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맨소래담 제약회사였습니다.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A.Hyde)박사의 스토리입니다. 그는 죽을 때 십의 9조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록을 남기는 성도가 됩니다. 무디 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묻게 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가 될 것이라고.” 금년 한해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얼마나 헌신하는 삶을 사실 수 있으셨습니까? 당신은 어떤 청지기로 한해를 사셨는지요? 당신의 영원한 나라의 투자 실적은 어떠하셨는지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태복음 6:19-24 / 김영규 목사
보물을 보관하는 문제
6장의 구제, 기도, 금식에 관한 교훈에 이어, 재물에 대한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는 재물이 축복의 증표입니다. 신약성경은 보다 영적인 축복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본문은 재물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첫째는 재물의 보관 문제입니다. 둘째는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재물의 보관 문제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절)
“보물”(qhsaurov")이란 말과, “쌓아 두다”(qhsaurivzw)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온 말입니다. 그 의미는 비축하고 쌓아 둔다는 뜻입니다. 보물이란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입니다. 예수님 당시 보물은 무엇이었을까요? 금은보석일 수도 있고, 금속 화폐나, 혹은 고급 천이나 의복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보물을 보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문제는 좀과 동록의 문제입니다. 좀(shv")은 “나방이”를 가리키는 말로, 종이나 천을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동록(brw'si")이란 단어 역시 먹는다(eat)는 뜻으로, 금속을 부식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좀과 동록이란 자연적인 가치 상실, 요즘 말로 하면 감가상각(減價償却)입니다. 재물을 그냥 놔두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요즘은 돈을 은행에 맡깁니다.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가 나옵니다. 그러나 은행 이자는 논리적으로 화폐 가치 하락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지금 고덕 아파트 평당 가격은 대략 2천 만 원이 넘습니다. 제가 고덕에 처음 왔을 때, 아파트 평당 가격이 대략 100 만 원 정도였습니다. 30년 동안 집값이 20 배가 올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집 가치가 올라간 겁니까, 아니면 돈 가치가 떨어진 겁니까? 집은 오히려 낡았으니 돈 가치가 떨어진 것이겠지요? 경제가 발전하는데도 돈 가치는 계속 떨어집니다. 경제가 비정상으로 돌아갈 때는 화폐의 가치는 터무니없이 떨어집니다. 과거 독일의 경제 공황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돈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고기 한 근을 사려면 돈을 손수레로 가득 싣고 가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이 물건을 사려고 돈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서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강도는 부인의 손에서 양동이를 빼앗아 돈을 쏟아버리고 양동이를 들고 도망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의 가치 하락을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둘째로, 도둑의 문제입니다. 재물을 보관하는 데 좀이나 동록보다 더 큰 문제는 도둑입니다. 자연적인 가치 하락보다도 인위적인 가치 약탈이 더 큰 문제란 뜻입니다. 로마 시대에 도둑들은 벽에 구멍을 뚫고 보물을 훔쳐갔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 국민이 약탈당합니다. 요즘 같은 평화로운 때에도 강도, 사기꾼, 도둑들에게 엄청난 재산이 약탈당합니다. 2010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영국에서 발생한 모든 사기 피해의 총액은 약 300억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51조 원이나 됩니다. 신용 좋기로 이름 난 일본에서도 서점, 수퍼에서 좀도둑질 한 금액만 연간 67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7천 억 원이나 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연간 피싱 사기가 우리 돈으로 약 2천 2백 억 원, 온라인 사기가 연간 5천 5백 억 원이나 됩니다. 꽤 발전 된 선진국이 그 정도이니, 후진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치가 하락되고, 사람이 뺏어가고, 이 세상에서 재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재물의 보관이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세상에 보관하려 하지 말고 하늘에 보관하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0절)
하늘에 보관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돈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까? 부동산이나 재물을 가지고 천국에 가야 합니까? 그러면 일찍 죽어야 하겠네요? 하늘에 보관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조금 고상한 말로 하면 가치의 교환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곧, 불변하는 가치로 교환하고, 영원한 가치로 교환하는 일입니다. 불변하는 가치, 영원한 가치가 뭡니까?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입니다. 천국, 영생,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교환입니다. 세상 모든 재물을 하나님과 교환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첫째로는 재물은 세상에서 다 써야 합니다. 재물은 보관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용도에 써야 합니다. 돈은 버는 데서 빛이 나지 않고, 쓰는 데서 빛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용하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 사주면 펄쩍 뛰면서 좋아합니다. 가정주부는 남편이 작은 선물이라도 하면 감격합니다.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얻고,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얻고 친구를 얻는 수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 19:4)
이 세상에서는 재물을 사용할수록 삶이 윤택해집니다. 돈이 없는 사람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한층 많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적절하게 쓸 때에 그렇게 됩니다.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억만금이 있어도 삶은 풍요롭지 못합니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유명한 구두쇠가 있습니다. 1835년에 태어나 1916년에 죽은 헤티 호올랜드 그린이라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81년을 사는 동안 은행에 3천 14만 달러를 저축했습니다. 총 재산을 헤아려 보니 9천 5백만 달러나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억 원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평생 찬 음식만 먹었습니다. 음식 데우는 것이 아까워서 찬 오트밀만 먹었습니다. 아파도 병원비가 아까워서 그냥 누워서 앓았습니다. 한 번은 자기의 귀한 아들이 다리뼈에 이상이 생겨서 앓아누웠는데, 돈 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무료 진료소만 찾아다니다가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 여자는 평생 재산만 지키다가 쓰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남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재물은 적절히 써야만 복이 됩니다.
둘째로는 재물을 쓰되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본문은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어디에 어떻게 쓰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을 위해 쓰는 첫 번째 방법은 헌금입니다. 헌금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무엇을 세웁니까? 국가를 세웁니다. 기업체를 세웁니다. 가문을 세웁니다. 공동체를 세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상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에 드리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바로 그런 용도로 쓰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의 용도는 기본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 즉, 성직자의 생활에 사용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비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4)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은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물이란 드리는 자를 대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자신을 바치고, 내 몸을 바쳐야 되는데, 그 대신 바치는 것이 바로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제물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8) 예배 때에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을 드립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첫 번째 제물입니다. 예배 때의 헌금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내 자신, 내가 가진 소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을 빈민 구제금으로 오해합니다. 헌금은 구제금이 아닙니다. 제물입니다. 내 몸을 대신하여, 혹은 내 몸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십일조, 감사, 건축, 선교, 구제 등등, 어떤 명목의 헌금이든지 기본 개념은 헌신이요 제물입니다. 당연히 모든 헌금은 하늘에 쌓아 두고, 하나님께 보관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는 두 번째 방법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구제를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잠19:17) 모세의 율법에는 매 삼 년마다 드리는 특별한 십일조가 있는데, 이 십일조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쓰도록 했습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7-8,10)
헌금으로 드리든지, 구제를 하든지, 다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적게는 십분의 일에서 많게는 십 분의 삼까지 십일조를 하고 구제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노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땅과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많이 쓰세요. 그것이 하늘에 쌓아두고, 하나님께 맡기는 길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마음이 가는 곳에 재물도 따라갑니다. 반대로 재물이 가는 곳에 마음도 따라갑니다. 마음과 재물이 따로 놀지는 않습니다. 항상 함께 합니다. 이것은 재물과 마음의 아주 중요한 상관관계이며, 오늘 우리에게 물질생활의 지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음 있는 곳에 돈을 쓴다! 돈 쓰는 곳에 마음도 간다!
돈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돈을 씁니다. 재물이 부동산에 있으면 마음도 부동산에 가 있습니다. 재물이 주식에 있으면 마음도 주식에 가 있습니다. 재물을 쓰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재물을 쓰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면 가족에게 마음이 갑니다. 도박에 돈을 쓰면 도박으로 마음이 끌립니다. 집 짓는 일에 돈을 쓰면 마음이 집 짓는 데로 향합니다. 취미 생활에 돈을 쓰면 취미 생활로 마음이 향합니다. 어디에 돈을 쓰든지 돈 쓰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이 원리로 사람들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신앙의 중요한 바로미터입니다. 말보다는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는 굉장히 신앙적인 소리를 합니다. “천국이 제일이지, 세상에 뭐 별 볼 일이 있나?” “나는 천국만 바라고 살아요.” “나는 하나님이 제일 좋아요.” 그런데 실제로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에 씁니다. 유흥, 향락, 도박, 세상 친구 등등. 그 사람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오늘 내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보세요. 그러면 내 신앙이 얼마나 되는지 평가가 나옵니다.
물질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신앙에 응용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을 위해 쓰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싶으세요? 그러면 돈을 하나님을 위해 쓰세요. 그래서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따르고 싶다면 네 재산을 내 명령대로 써라! 재산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결코 주님 명령대로 돈을 쓰지 못했습니다. 돈이 주님을 향하지 못함으로, 마음도 주님을 향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마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네 돈 주머니가 회개하기 전에는 너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 요즘도 많은 신자들이 헌금 문제로 시험에 듭니다. 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결코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보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세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세요. 그러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고, 천국을 향할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세 번째 주제는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재물을 소유한 사람에게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재물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재물은 소유자에게 주인 노릇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신자들 중에 누구도 돈이 주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이 재물의 부하가 되고, 신하가 되고,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재물의 지배를 더 강하게 받습니다. 보세요! 재산이 없을 때는 돈 문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돈보다는 인간적 도리가 먼저다! 돈보다는 의리, 돈보다는 우정, 돈보다는 정의! 뭐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많아지면 사람보다 돈, 인간의 도리보다 돈입니다. 의리보다, 우정보다, 사랑보다, 정의보다, 진리보다, 그 모든 것보다 돈이 우선입니다. 고등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10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 가겠는가? 절반 가까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봅시다. 주일 한 번만 빼먹으면 1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빼먹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거짓말 한 번만 하면 큰돈이 들어온다면? 대답은 상상에 맡깁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명령보다 돈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돈은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주인으로 대접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돈은 인격체도 아닙니다.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돈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돈에게 아첨하고, 돈의 명령을 따릅니다. 자발적 귀속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돈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스스로 돈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자발적으로 돈의 신하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신하가 되어라!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입니다. 돈이 중요하다면 돈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중요하다면 하나님을 선택하세요.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선택입니다. 금은보석보다, 부동산보다, 돈보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하나님이 최고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바로 그런 비유가 나옵니다. 진주 장사가 좋은 진주를 찾다가 최상의 진주를 발견합니다. 얼마나 좋았든지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마13:45-46) 어떤 사람은 우연히 보화가 묻혀있는 밭을 발견하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 밭을 샀습니다.(마13:44)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최고의 가치에 삶의 전부를 투자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둘을 한꺼번에 택하지는 못합니다. 본문에 보세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24절)
본질적으로 돈이나 재물은 미움과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경중의 대상도 아닙니다. 재물은 감정도 도덕성도 없는 물질일 뿐입니다. 미워할 대상도 아니고, 경중을 따질 대상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소비재일 뿐입니다. 인격체도 아니고, 지위도 없습니다. 그러한 재물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본문 24절에 “재물”이란 단어는 “mammwna'"”(마모나스)입니다. 재물을 의인화한 신의 이름입니다. 재물의 신, 돈의 신! 돈을 신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오늘 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오늘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재물입니까? 나는 누구의 명령대로 움직입니까? 만일, 돈이 나를 지배한다면 돈을 포기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오늘 내 재산에게 선포하세요. “재산아! 너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눈은 온 몸의 등불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눈입니다. 주님은 재물 얘기를 하시는 중에 갑자기 눈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왜 주님은 보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 얘기를 꺼내셨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눈은 사물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첫 번째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절)
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습니다. “성하면”(aJplou'")이란 말은 본래 single, 혹은 simple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일하고 단순하고 깨끗한 눈! 사람의 눈은 두 개입니다. 그러나 관점은 하나여야 합니다. 관점이 여럿인 눈은 성한 눈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눈, 오직 주님의 관점에서만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바로 성한 눈입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온 몸이 밝아집니다. “밝다”는 단어는 “fwteinov"”(포테이노스)입니다. “fw'"”(포스), “빛”이란 어원에서 온 단어입니다. 온 몸이 빛으로 충만하다! 무슨 뜻일까요? 내 눈이 좋으면 사물을 다 보기 때문에,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잘못 된 대상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즉, 영의 눈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주님을 알아봅니다. 결코 재물을 주인으로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재물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양은 모든 것이 약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능력만 있으면 평생 웰 빙 합니다. 그 단 한 가지가 뭡니까? 바로 내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눈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구별할 줄 아는 눈!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아보는 눈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4-5,9)
재물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정리해 봅시다.
첫째로, 재물은 이 세상에서 보관할 방법이 없습니다. 부식됩니다. 가치가 떨어집니다. 도둑이 훔쳐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다 써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써야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재물이 하나님을 향하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합니다. 재물을 신앙의 도구로 쓰세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쓴다면 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셋째로,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재물은 소유자를 종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 중에 단호하게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결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는 못합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이 결단이 곧 신앙의 결단입니다.
넷째로, 재물을 보는 안목입니다. 재물은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보는 눈이 있어야, 인생이 밝아집니다. 바른 안목으로 평생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19-24)
보물을 보관하는 문제
6장의 구제, 기도, 금식에 관한 교훈에 이어, 재물에 대한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는 재물이 축복의 증표입니다. 신약성경은 보다 영적인 축복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본문은 재물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첫째는 재물의 보관 문제입니다. 둘째는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재물의 보관 문제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절)
“보물”(qhsaurov")이란 말과, “쌓아 두다”(qhsaurivzw)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온 말입니다. 그 의미는 비축하고 쌓아 둔다는 뜻입니다. 보물이란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입니다. 예수님 당시 보물은 무엇이었을까요? 금은보석일 수도 있고, 금속 화폐나, 혹은 고급 천이나 의복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보물을 보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문제는 좀과 동록의 문제입니다. 좀(shv")은 “나방이”를 가리키는 말로, 종이나 천을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동록(brw'si")이란 단어 역시 먹는다(eat)는 뜻으로, 금속을 부식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좀과 동록이란 자연적인 가치 상실, 요즘 말로 하면 감가상각(減價償却)입니다. 재물을 그냥 놔두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요즘은 돈을 은행에 맡깁니다.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가 나옵니다. 그러나 은행 이자는 논리적으로 화폐 가치 하락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지금 고덕 아파트 평당 가격은 대략 2천 만 원이 넘습니다. 제가 고덕에 처음 왔을 때, 아파트 평당 가격이 대략 100 만 원 정도였습니다. 30년 동안 집값이 20 배가 올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집 가치가 올라간 겁니까, 아니면 돈 가치가 떨어진 겁니까? 집은 오히려 낡았으니 돈 가치가 떨어진 것이겠지요? 경제가 발전하는데도 돈 가치는 계속 떨어집니다. 경제가 비정상으로 돌아갈 때는 화폐의 가치는 터무니없이 떨어집니다. 과거 독일의 경제 공황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돈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고기 한 근을 사려면 돈을 손수레로 가득 싣고 가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이 물건을 사려고 돈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서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강도는 부인의 손에서 양동이를 빼앗아 돈을 쏟아버리고 양동이를 들고 도망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의 가치 하락을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둘째로, 도둑의 문제입니다. 재물을 보관하는 데 좀이나 동록보다 더 큰 문제는 도둑입니다. 자연적인 가치 하락보다도 인위적인 가치 약탈이 더 큰 문제란 뜻입니다. 로마 시대에 도둑들은 벽에 구멍을 뚫고 보물을 훔쳐갔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 국민이 약탈당합니다. 요즘 같은 평화로운 때에도 강도, 사기꾼, 도둑들에게 엄청난 재산이 약탈당합니다. 2010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영국에서 발생한 모든 사기 피해의 총액은 약 300억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51조 원이나 됩니다. 신용 좋기로 이름 난 일본에서도 서점, 수퍼에서 좀도둑질 한 금액만 연간 67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7천 억 원이나 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연간 피싱 사기가 우리 돈으로 약 2천 2백 억 원, 온라인 사기가 연간 5천 5백 억 원이나 됩니다. 꽤 발전 된 선진국이 그 정도이니, 후진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치가 하락되고, 사람이 뺏어가고, 이 세상에서 재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재물의 보관이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세상에 보관하려 하지 말고 하늘에 보관하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0절)
하늘에 보관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돈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까? 부동산이나 재물을 가지고 천국에 가야 합니까? 그러면 일찍 죽어야 하겠네요? 하늘에 보관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조금 고상한 말로 하면 가치의 교환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곧, 불변하는 가치로 교환하고, 영원한 가치로 교환하는 일입니다. 불변하는 가치, 영원한 가치가 뭡니까?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입니다. 천국, 영생,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교환입니다. 세상 모든 재물을 하나님과 교환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첫째로는 재물은 세상에서 다 써야 합니다. 재물은 보관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용도에 써야 합니다. 돈은 버는 데서 빛이 나지 않고, 쓰는 데서 빛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용하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 사주면 펄쩍 뛰면서 좋아합니다. 가정주부는 남편이 작은 선물이라도 하면 감격합니다.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얻고,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얻고 친구를 얻는 수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 19:4)
이 세상에서는 재물을 사용할수록 삶이 윤택해집니다. 돈이 없는 사람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한층 많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적절하게 쓸 때에 그렇게 됩니다.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억만금이 있어도 삶은 풍요롭지 못합니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유명한 구두쇠가 있습니다. 1835년에 태어나 1916년에 죽은 헤티 호올랜드 그린이라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81년을 사는 동안 은행에 3천 14만 달러를 저축했습니다. 총 재산을 헤아려 보니 9천 5백만 달러나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억 원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평생 찬 음식만 먹었습니다. 음식 데우는 것이 아까워서 찬 오트밀만 먹었습니다. 아파도 병원비가 아까워서 그냥 누워서 앓았습니다. 한 번은 자기의 귀한 아들이 다리뼈에 이상이 생겨서 앓아누웠는데, 돈 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무료 진료소만 찾아다니다가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 여자는 평생 재산만 지키다가 쓰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남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재물은 적절히 써야만 복이 됩니다.
둘째로는 재물을 쓰되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본문은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어디에 어떻게 쓰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을 위해 쓰는 첫 번째 방법은 헌금입니다. 헌금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무엇을 세웁니까? 국가를 세웁니다. 기업체를 세웁니다. 가문을 세웁니다. 공동체를 세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상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에 드리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바로 그런 용도로 쓰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의 용도는 기본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 즉, 성직자의 생활에 사용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비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4)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은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물이란 드리는 자를 대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자신을 바치고, 내 몸을 바쳐야 되는데, 그 대신 바치는 것이 바로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제물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8) 예배 때에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을 드립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첫 번째 제물입니다. 예배 때의 헌금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내 자신, 내가 가진 소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을 빈민 구제금으로 오해합니다. 헌금은 구제금이 아닙니다. 제물입니다. 내 몸을 대신하여, 혹은 내 몸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십일조, 감사, 건축, 선교, 구제 등등, 어떤 명목의 헌금이든지 기본 개념은 헌신이요 제물입니다. 당연히 모든 헌금은 하늘에 쌓아 두고, 하나님께 보관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는 두 번째 방법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구제를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잠19:17) 모세의 율법에는 매 삼 년마다 드리는 특별한 십일조가 있는데, 이 십일조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쓰도록 했습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7-8,10)
헌금으로 드리든지, 구제를 하든지, 다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적게는 십분의 일에서 많게는 십 분의 삼까지 십일조를 하고 구제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노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땅과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많이 쓰세요. 그것이 하늘에 쌓아두고, 하나님께 맡기는 길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마음이 가는 곳에 재물도 따라갑니다. 반대로 재물이 가는 곳에 마음도 따라갑니다. 마음과 재물이 따로 놀지는 않습니다. 항상 함께 합니다. 이것은 재물과 마음의 아주 중요한 상관관계이며, 오늘 우리에게 물질생활의 지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음 있는 곳에 돈을 쓴다! 돈 쓰는 곳에 마음도 간다!
돈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돈을 씁니다. 재물이 부동산에 있으면 마음도 부동산에 가 있습니다. 재물이 주식에 있으면 마음도 주식에 가 있습니다. 재물을 쓰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재물을 쓰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면 가족에게 마음이 갑니다. 도박에 돈을 쓰면 도박으로 마음이 끌립니다. 집 짓는 일에 돈을 쓰면 마음이 집 짓는 데로 향합니다. 취미 생활에 돈을 쓰면 취미 생활로 마음이 향합니다. 어디에 돈을 쓰든지 돈 쓰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이 원리로 사람들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신앙의 중요한 바로미터입니다. 말보다는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는 굉장히 신앙적인 소리를 합니다. “천국이 제일이지, 세상에 뭐 별 볼 일이 있나?” “나는 천국만 바라고 살아요.” “나는 하나님이 제일 좋아요.” 그런데 실제로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에 씁니다. 유흥, 향락, 도박, 세상 친구 등등. 그 사람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오늘 내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보세요. 그러면 내 신앙이 얼마나 되는지 평가가 나옵니다.
물질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신앙에 응용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을 위해 쓰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싶으세요? 그러면 돈을 하나님을 위해 쓰세요. 그래서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따르고 싶다면 네 재산을 내 명령대로 써라! 재산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결코 주님 명령대로 돈을 쓰지 못했습니다. 돈이 주님을 향하지 못함으로, 마음도 주님을 향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마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네 돈 주머니가 회개하기 전에는 너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 요즘도 많은 신자들이 헌금 문제로 시험에 듭니다. 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결코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보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세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세요. 그러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고, 천국을 향할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세 번째 주제는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재물을 소유한 사람에게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재물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재물은 소유자에게 주인 노릇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신자들 중에 누구도 돈이 주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이 재물의 부하가 되고, 신하가 되고,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재물의 지배를 더 강하게 받습니다. 보세요! 재산이 없을 때는 돈 문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돈보다는 인간적 도리가 먼저다! 돈보다는 의리, 돈보다는 우정, 돈보다는 정의! 뭐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많아지면 사람보다 돈, 인간의 도리보다 돈입니다. 의리보다, 우정보다, 사랑보다, 정의보다, 진리보다, 그 모든 것보다 돈이 우선입니다. 고등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10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 가겠는가? 절반 가까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봅시다. 주일 한 번만 빼먹으면 1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빼먹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거짓말 한 번만 하면 큰돈이 들어온다면? 대답은 상상에 맡깁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명령보다 돈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돈은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주인으로 대접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돈은 인격체도 아닙니다.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돈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돈에게 아첨하고, 돈의 명령을 따릅니다. 자발적 귀속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돈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스스로 돈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자발적으로 돈의 신하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신하가 되어라!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입니다. 돈이 중요하다면 돈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중요하다면 하나님을 선택하세요.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선택입니다. 금은보석보다, 부동산보다, 돈보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하나님이 최고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바로 그런 비유가 나옵니다. 진주 장사가 좋은 진주를 찾다가 최상의 진주를 발견합니다. 얼마나 좋았든지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마13:45-46) 어떤 사람은 우연히 보화가 묻혀있는 밭을 발견하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 밭을 샀습니다.(마13:44)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최고의 가치에 삶의 전부를 투자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둘을 한꺼번에 택하지는 못합니다. 본문에 보세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24절)
본질적으로 돈이나 재물은 미움과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경중의 대상도 아닙니다. 재물은 감정도 도덕성도 없는 물질일 뿐입니다. 미워할 대상도 아니고, 경중을 따질 대상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소비재일 뿐입니다. 인격체도 아니고, 지위도 없습니다. 그러한 재물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본문 24절에 “재물”이란 단어는 “mammwna'"”(마모나스)입니다. 재물을 의인화한 신의 이름입니다. 재물의 신, 돈의 신! 돈을 신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오늘 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오늘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재물입니까? 나는 누구의 명령대로 움직입니까? 만일, 돈이 나를 지배한다면 돈을 포기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오늘 내 재산에게 선포하세요. “재산아! 너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눈은 온 몸의 등불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눈입니다. 주님은 재물 얘기를 하시는 중에 갑자기 눈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왜 주님은 보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 얘기를 꺼내셨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눈은 사물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첫 번째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절)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습니다. “성하면”(aJplou'")이란 말은 본래 single, 혹은 simple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일하고 단순하고 깨끗한 눈! 사람의 눈은 두 개입니다. 그러나 관점은 하나여야 합니다. 관점이 여럿인 눈은 성한 눈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눈, 오직 주님의 관점에서만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바로 성한 눈입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온 몸이 밝아집니다. “밝다”는 단어는 “fwteinov"”(포테이노스)입니다. “fw'"”(포스), “빛”이란 어원에서 온 단어입니다. 온 몸이 빛으로 충만하다! 무슨 뜻일까요? 내 눈이 좋으면 사물을 다 보기 때문에,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잘못 된 대상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즉, 영의 눈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주님을 알아봅니다. 결코 재물을 주인으로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재물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양은 모든 것이 약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능력만 있으면 평생 웰 빙 합니다. 그 단 한 가지가 뭡니까? 바로 내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눈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구별할 줄 아는 눈!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아보는 눈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4-5,9)
재물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정리해 봅시다. 첫째로, 재물은 이 세상에서 보관할 방법이 없습니다. 부식됩니다. 가치가 떨어집니다. 도둑이 훔쳐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다 써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써야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재물이 하나님을 향하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합니다. 재물을 신앙의 도구로 쓰세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쓴다면 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셋째로,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재물은 소유자를 종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 중에 단호하게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결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는 못합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이 결단이 곧 신앙의 결단입니다.
넷째로, 재물을 보는 안목입니다. 재물은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보는 눈이 있어야, 인생이 밝아집니다. 바른 안목으로 평생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