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유선방송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는 백년전쟁 당시의 유명한 전투 아쟁쿠르 전투에 관한 현대 과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더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1415년 영국 왕 헨리 5세는 프랑스 북부에서 원정을 마치고 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도버해협의 칼레로 돌아가고 있었다. 행군 도중 그의 앞에 프랑스의 대군이 가로막고 결전을 준비하고 잇었다.
1415년 10월 15일, 아쟁쿠르 마을 인근의 벌판에서 헨리 5세의 영국군 7천명과 프랑스 기사 2만 명이 격돌하였다. 세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5 세"에서는 이 당시의 영국군의 승리에 대하여 아주 감격어린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헨리 5세는 뛰어난 전술가이고, 전투 이전부터 영국군의 승리를 확신하고 자기가 선택한 전장에서 기대하였던 승리를 거둔 것처럼 묘사되어있다.
전투 결과 영국군의 손실은 소수였는데 반해 프랑스군은 전멸하였으니 그렇게 감격적으로 세익스피어가 자기 조국의 영웅을 찬양할만 하다.
역사서에 전설적으로 남은 이야기들에서는 이 당시 영국군이 형편없이 열세였음에도 프랑스군을 대패시킨 것이 영국군이 가진 장궁 덕분이었다고 서술되어있다...
열지어선 영국군의 장궁병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프랑스 기사들의 대군들에게 장궁의 화살세례를 퍼부어서 프랑스 기사들은 영국군 진지에 이르기도 전에 모두 고슴도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사실인가?
실지로 헨리 5세가 귀환 후에 작성된 더큐먼트에서는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세세한 기록이 남겨져 잇었는데 영국군에는 궁수만 무려 5천 명이엇으며 men-at-arms 중장보병들 숫자는 겨우 2천 명 뿐이었다 한다.
반면에 프랑스군이 남긴 희생자 목록도 전해 오는데, 여기에는 전투 후 죽은 프랑스 기사들의 명단이 빽빽이 남아 있었다. 모두 당시 프랑스의 내노라하는 높은 신분의 기사들이었다..
프랑스군의 구성은 정면에 쇠뇌 궁수 집단 약간과 그 양측에 기사 1만기들이 배치되고, 그 뒤에 men-at-arms 중장보병 1만명이 빽빽이 늘어서있는 구성이다. 숫적이나 장비면에서 프랑스군이 훨씬 압도적이다.
영국군에는 왜 이렇게 궁수들이 많앗을까?
전투 당시의 영국측의 회게보고서가 남아잇었다.. 각 병사와 장교들에게 주는 급료의 명세표였다.
헨리 5세는 군자금이 딸리고 있었기 때문에 휘하 병사들에게 나누어줄 급료가 얼마 없었다. 그 당시 궁수는 평민들의 지원자들로서 그 값이 매우 쌌다... men-at-arms 1 명을 살 돈으로 궁수 두명을 고용할 수 있었다.
헨리 5 세는 궁수가 전력이 강하여서 많이 고용한게 아니라 순전히 값이 싼 맛에 궁사를 많이 데리고 갔을 뿐이다..
이 당시의 영국군의 장궁은 과연 프랑스 기사들의 갑옷을 꿰뚫을 수 있었는가?
장궁은 예로부터 중세의 기관총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그 위력에 자세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군이 가진 쇠뇌보다 사정거리도 길었고, 관통력도 강했으며, 발사속도고 4 배가 빨랐다.. 발사기술도 심플하여 평민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아쟁쿠르 벌판에서 그 당시의 장궁의 화살촉을 발굴하였다. 그 당시의 장궁을 복원하여 발사시험해보았다.
속도는 약 초속 35 미터, 이것이 물체에 맞았을 때에 에너지는 약 35 주울이 나왔다.
그럼 당시의 프랑스 기사들의 갑옷의 성능은 어땠는가?
아쟁쿠르 전장에서 발굴된 프랑스 기사의 박차를 보여주었다.. 작은 것이었지만 철로 만들어졌고, 매우 섬세하게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작은 박차까지 이토록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다면 그가 입었을 갑옷은 얼마나 화려하고 튼튼하였을 것인가?
아쟁쿠르 전투가 있기 훨씬 전에 기사들이 썼던 투구들은 순철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강도가 별로였고, 타격을 입으면 쉽게 부서졌다... 그러나 아쟁쿠르 전투 당시에는 이런 갑옷의 강도에도 혁명적인 개선이 있었다.
이제 갑옷은 강철로 만들어지고 있었다...백년전쟁 당시에도 군비 경쟁이 있었고, 그것은 주로 갑옷의 강철의 강도의 개선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강철 갑옷은 중세 병기 기술의 혁명이었다.
프랑스군은 세도가 당당한 기사들로 이루어져 잇었으니 돈이 많은 기사들은 당연히 그 당시로서는 최신, 최강의 갑옷을 구비하였을 것이다..
그럼 이런 갑옷에다가 장궁을 쏘아보는 실험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실제로 장궁 화살촉의 에너지 타격을 갑옷에다가 가해보았다... 뜻밖에도 갑옷은 끄덕없다... 장궁의 화살촉만 휘어버렸다... 수 차레 되풀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전설과는 달리 영국군의 장궁은 프랑스 기사집단에 별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실제로 장궁의 사격은 전투 초기에만 잠깐 쓰여졌을 뿐이다... 아쟁쿠르 전투 자체는 그 후에도 무려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었다...
프랑스군의 패배의 원인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궁수들의 잇점은 그들이 원래 평민들이었기 때문에 매우 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다가오자, 손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고 기사들에게 대항하였다... 여러 종류의 도끼와 해머들이 사용되었고, 넘어진 기사들에게는 갑주 사이의 빈틈을 향해 궁수들의 단검이 파고 들었다.
이전까지 기사대 기사들간의 신사적이고 정통적인 스포츠 같은 전투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던 프랑스 기사들로서는 이러한 평민, 궁수들의 변칙적인 반격에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영국군의 대승이 가능할까?
어쨌든 프랑스군은 영국군보다 무려 3 배나 많았다. 그냥 인해전술로 쓸어만 버려도 영국군을 압도할 수 있는 규모였다.
프랑스군에는 왕이 없었다... 프랑스왕 샤를 5세는 정신병자로서 전투에 참가는 켜녕, 궁궐에 틀어박혀 나라 정세에 관심이 없었다. 전장에서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부쉬코 원수가 지휘하였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가 전투 10 일전에 작성한 꼼꼼한 작전 계획서가 놀랍게도 지금껏 남아있었다.
프랑스 궁수와 기사, 그리고 중장보병들이 서로 엄호하여 협동작전하면 영국군을 숫적으로 압도하고 전장에서 쓸어버릴 수 있었던 작전 계획이었다..
문제는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프랑스 기사들은 그의 계획에 따르지 않고, 저마다 서로를 불신하고 경쟁 심리에서 앞다투어 질서를 지키지 않았던 데에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아직 중세기로서 프랑스 기사들은 머 민족애라든가, 애국심이라든가 이런거는 없던 때였다. 전투에 참가한 이유로 젤 중요한 것은 값비싼 인질을 잡아서 인질 대속금으로 한 몫 단단히 챙기려는 욕망이었다. 물론 기사로서 공명심을 드높이려는 영웅 심리도 많았을 것이다...하여튼 이런 저돌맹진의 미치광이 같은 기사들의 심리를 요즘 현대 사회의 우리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전투에서 마주친 영국 병사들은,,, 대부분이 평민들, 궁수들이었다... 이것들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 잡아본들 돈벌이가 안되는 것이다... 프랑스 기사들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이다..
프랑스 기사들은 그들을 엄호할 궁수들이나 men-at-arms들을 뒤에 처져놓은체 무질서하게 영국 궁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의 갑옷은 장궁의 화살을 물리쳤으나 말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화살 세례에 겁을 먹은 말들이 마구 난리를 쳤고, 기사들은 낙마하였다.
엄호를 받지않은 기사들은 일단 낙마하자, 그 무거운 갑옷때문에 궁수들의 마구잡이식의 육박전 앞에 매우 취약하였다.
연대기에 따르면 전투 전날에 비가 와서 아쟁쿠르의 땅이 온통 진흙밭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많은 프랑스 기사들이 뻘밭에 빠져서 질식하여 죽었다 한다. 이것은 사실일까?
과학자들은 실제로 아쟁쿠르 땅속 3 미터 지점까지 파내려가보았다. 300 년전의 전쟁터의 토질은 그 정도 깊이에서야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3 미터 지점에서부터 토질이 변하였다.
그 흙을 퍼와서 분석해보았다. 물을 먹여서 흙의 성상이 변하는 것을 보니 드러매틱하였다... 진흙은 아주 찐득찐득하게 변하였다.... 그 안에 기사들이 입었던 갑옷과 같이 매끈한 철판을 넣어서 움직여보니 진흙이 마구 들어붙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반면에 영국군 궁수가 입었을 천조각을 넣어보았다. 천조각은 진흙을 쉽게 털어내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아쟁쿠르 땅의 이런 특이한 토질이 증명된 것이다..
이런 뻘 속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갑옷에 잔득 들러붙는 진흙 때문에 허우적거리거나 질식된 반면 영국군 궁수들은 펄펄 뛰어다니면서 적을 벨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도 아직 프랑스군의 대 손실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과학자들은 아쟁쿠르 전장의 특이한 지형에 주목하였다.
그 전장은 겉보기에는 망망한 평원 같지만 사실은 양측으로 급경사가 있는 좁은 평원으로 된 지형이었다... 군집단이 뛰어다닐 수 있는 평원은 폭이 좁으며, 이것은 영국군 진영 쪽으로 갈수록 폭이 더 좁아지는 깔대기 모양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점점 좁아지는 병목 같은 지형속으로 수 만 기가 갑자기 쇄도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과학자들은 이미 컴퓨터를 통하여 사람이 빽빽이 모여 이동하는 지하철이라든가, 사람이 들어찬 운동경기장의 관객석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릴 때에 어떤 역학으로 큰 압사사고가 일어나는지를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아쟁쿠르 전장에서의 프랑스 군의 행동을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더 분명하였다.. 프랑스군은 대군이 병목지역으로 갑자기 몰려들면서 서로 압착되기 시작했고, 거기에 진흙으로 인한 앞사람의 넘어지는 요소까지 가해지니, 뒤에서 밀어오는 병력들에 의해 짓밟히고 엉키고넘어지는등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이었다...
결국 아쟁쿠르에서의 프랑스군의 대패는 영국군의 승리라기 보다 프랑스군의 대형 압사 사고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좁은 전장에 너무 많은 기사들이 몰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스군의 전사자가 엄청난 데에는 하나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전투가 끝났을 때에 영국군은 프랑스 기사들 수백명을 포로로 잡았다... 백년전쟁의 일반적인 관례는 이런 귀족들 포로는 인질로서 영국으로 데려가고 대속금을 많이 챙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이들 포로들을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다..
포로들의 처형에는 영국 귀족들은 나서기를 꺼려하여 결국 궁수들이 학살을 도맡아야 했다고 한다... 물론 귀족들이 꺼린 이유는 인간애라기 보다는 인질 대속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애석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민 궁수들은 그런 계산이 없다.. 그들은 오직 헨리 왕의 명령에만 충실할 뿐이다..사정없이 포로들은 학살되었다. 결국 이렇게 하여 프랑스 기사들은 살아 돌아간 사람이 별로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헨리 5세는 전쟁영웅이 아니라 전쟁범죄자란 말인가?
역사가들은 그 견해를 부인한다.. 헨리는 어쨌든 숫적으로 압도당하여 전혀 승리가 불가능해보이는 상황에서 예상 밖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행위는 그런 상황에 충실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헨리는 생각지도 못한 대승을 거두어서 얼떨덜한 상태였고, 돌아갈 길은 아직 적진 한 가운데로서, 칼레까지는 많이 남았다.. 그런 행군길에 이런 포로들을 살려두었다간 언제 전세가 역전되어 후환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였을 것이다...
아쟁쿠르 전쟁은 그전까지의 백년전쟁의 양상을 확 바꾸어버렸다.. 이미 전쟁의 성격이 변하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모두에서 그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어 버렸다... 전장은 더 이상 예전처럼 기사 대 기사들간의 신사적이고 형식적인 스포츠 같은 것이 아니었다... 평민들이 새로운 세력으로서 일어나고 있었고, 이윽고 그들이 전장을 차지해버리고 기사들 같은 귀족들을 밀어내어 버린다...
그 전 까지는 영국도, 프랑스도 민족이라든가 애국심이라든가 하는 개념이 없는 봉건사회였지만, 이제는 평민들이 전투의 정면에 나섬에 따라, 양 국민들에게 민족애와 애국심, 민권사상들의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
아쟁쿠르 전투 후 영국군은 프랑스 땅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프랑스는 왕이 무능하고 많은 부유한 귀족들이 제거됨에 따라, 자연히 평민들에게로 사회의 주축이 옮겨지게 되었다...
즉 그 이전 까지는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에 평민들은 소 닭 보듯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뒤에 처져있었다...그들에게는 국가란 민족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귀족들이 평민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그런 기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아쟁쿠르 전투 이후 프랑스에서도 평민들의 인식이 변하였다. .이제 그들이 전장의 주 무대로 나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평민 출신인 잔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하려고 등장하게 되는 계기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영국에서도 변화가 왔다...전쟁 중 주요한 역할을 맡은 게층은 평민 출신 궁수들이었다... 그들이 귀국후에 즐겨 무용담을 들려주었고, 이윽고 영국의 평민들 사이에 민족애와 애국심, 민권 사상이 불타올랐다. 귀족들에 맞설 수 있는 평민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다.
특히 잔다르크가 등장하여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결말 지은 후에 영국 왕이 영국 열도로 쫓겨나온 후에는 영국 평민들의 권리 찾기가 더 많아졌다.. 마그나카르타 같은 영국 민주주의가 거저 생긴 것이 아닌 것이다..
만일 프랑스에 잔다르크가 등장하지 않고, 영국 왕이 백년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땅까지 거머쥐게 되었다면 영국 평민들의 신세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 영국왕은 프랑스 파리에 주로 거주하게 될 것이고, 그 왕은 제국을 다스리는 전제군주로서 영국 섬의 평민들은 별볼일 없는 가난한 앵글로 색슨 출신 천민들로서 아주 탄압하고 천대하였을 것이다....
마그나카르타는 생각도 못하였을 것이고, 영국의 자랑스런 민주주의는 그 싹 부터 말라버렸을 것이다...이렇게 현대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영국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잔다르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비록 적이었지만 현대 영국인들에 의해 여러 예술작품과 영화들에서 잔다르크가 많이 다루어지고 칭송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