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상관이냐?”
-우리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
“목사님은 친구 없지요? 예수님만 친구시지요?”
이슬만 먹고 사는 신령한(?) 목사인지라 세상연은 끊고 살리라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럴까요? 목사는 누굴 만날까요? 옛 친구들을 만나겠습니까?
물론 학교 다닐 때 가까웠던 친구들이 있기는 있지요. 가끔 고향 청주에서
동창회를 한다고, 모임을 갖고 있다고 연락 오는 때가 있습니다. 수화기로
전해 오는 목소리를 통해 그때 그 친구 모습을 떠올리며 까까머리로 돌아
갑니다. 너무 반가와 그때 별명을 부르며 목청을 높이기도 하고, 때론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 대충 아는 척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저는 옛 추억에 대한 향수(nostalgia)가 유난한 편입니다. 지금도 명절 때나
고향 청주에 가면 석교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던 유년의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청주동산교회를 비롯해서 거쳐 왔던
교회들이 그리워, 아무도 없는 깊은 밤 아내와 함께 교회를 휘휘 둘러 본 적도
많습니다. 오죽하면 그 지긋지긋했던 군대도 사무쳐 화천 북방 민통선(민간인
통제구역) 앞에서 희미해진 옛 동료들을 추억해 보기도 한답니다. 휴가 반나
절을 망쳤다고 아우성치는 아내와 아이들을 저 뒤로 하고 말입니다.
지난 주에도 군대에 함께 있던 동료에게서 한 25년여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대대군종병이었는데 지금은 광주 무진교회 담임목사님(장관철 목사님)이 되셨
어요. 금방 끊는다는 게 1시간 반이나 통화하고는, “자세한 얘기는 우리 언제 만
나서 얘기합시다.” 하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그때 그 학교 친구들, 그때 그 부대 동료들, 그때 그 교회 성도들...
박정순의 <그리운 친구들>이라는 시가 정감 있습니다.
구멍 난 검정고무신을 움켜쥔 채
운동장을 종횡무진으로
치닫던 코흘리개 친구
여학생 고무줄놀이만 보면
끊고 다니던 개구쟁이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뭘 할까
빛바랜 플라타너스 낙엽사이로
조각난 달이 얼굴을 내밀면
가버린 추억들의 소리 아련히 들려온다
다시 그 순간들
소쿠리에 주섬주섬 담아보려 해도
술술 빠져버리는 시간들
잊혀진 추억들 한 움큼이라도
다시 붙잡고 놓지 않으련만
그 시절은 어디서 쑥부쟁이 꽃처럼
부스스 웃고 있을까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추억
그들이 모인다고 가끔씩 제게 연락을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지 않습니
다. 보통 만나는 시간이 토요일이나 주일이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저와는 시
간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시간이 맞는다 해도 가는 것이 주저됩니
다. 만나도 목사라는 남다른 신분은 서로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목사님, 그땐 계급장(직업) 떼고 만나는 거지요”...?
왜 아니겠어요. 왜 안 반갑겠어요. 그런데 그게 또 아니더라고요. 함께 했던
옛이야기 외에는 공통된 소재도,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십중팔구는 술을 먹고 좀 흥청 이는 자리여서 어렵고,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
도 특별한 길을 가는 저와는 달라서 딴나라 사람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친구들과의 모임은 점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저 목회
자들끼리 모임이 전부가 되었는데요, 그것도 강원도에 오면서는 대부분 정
리(?) 했고 몇몇 친구들과의 만남만 갖고 있습니다. 멀리 카나다에 오랜 친
구 최규영 목사, 중국에 류지승 목사 김휘수 목사, 청주에서 목회하는 신현식
목사 신성재 목사...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모두 너무너무 보고 싶은 친구들
입니다.
TV에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이 있었지요. 수십 년 만에 부르는 ‘친구야-’ 음
성에 가슴이 찡합니다. 몇 년 됐지만 <친구>라는 영화가 크게 흥행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만큼 친구를 잃어버린 시대의 반증이겠지요. 학창시절에 그저
함께 있으면 좋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돌며 놀던 친구들처럼,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만나면 좋은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경쟁 상대만 있을 뿐,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적들로 가득한 세상, 그래서 카이스트의 비극이 생겨난
것이리라.
하여 <늑대와 춤을>에서 ‘내 슬픔을 등에 지고’ 라는 친구가 그립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시구도 새롭습니다. 미술공
부를 위해 돈을 벌며 기도해 준 친구, 그 친구의 손을 그린 알브레히트 뒤
러의 <기도하는 손>도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소중한 친구들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그렇
고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러합니다. 정죄만 일삼던 욥의 세 친구는 매정하게
그려지되,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는 칭송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은 나사로를 내 친구라 하시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Christ>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포르투갈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작품인데요,
그는 전설에 근거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그리고 있
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시다 발을 다치십니다. 피가 나는 발을 치료해
야 했지만 가까이 인가가 없어 애를 먹습니다. 그때 저 외딴 집을 발견하시
고는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요염하게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나옵니다. "
어서 오세요!" 창녀의 집이었지요. 그러나 그녀는 범상치 않은 분이 서있는
것을 보자 말합니다. "선생님,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오셨나요?"
"아니, 이 집이 어떤 집인가?" "창녀의 집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참 의미 있는 대목이지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만약 예수께서 놀라시며 "아이 더러버라!" 하고 획 돌아 섰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그 집으로 들어가셔서 발의 상처를 치료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날
마리아와 유숙하시며 밤새 생명과 복음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 후 한 일주일쯤 지나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가실 때, 그 집을 방문합니다.
그녀가 궁금하셨던 것이지요. “너 그 짓거리 여전하냐? 개과천선 좀 했냐?”
묻지 않으십니다. 그녀의 자존심과 아픈 마음을 생각하셔서 이렇게 말씀하
십니다. "요새 손님은 많으냐?"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깊고 깊은 사랑과 배려의 말씀이지요. 그랬더니 막달
라 마리아가 가만히 대답합니다. "선생님, 여자는 참으로 존경하는 분을 만
나면 다시 천하게 살 수 없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 제
자가 되어 십자가와 무덤, 그리고 부활의 언덕까지 따라가게 되었다는 내용
입니다.
창녀 앞에서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 감싸 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는 차디찬 별명까지 얻으신 예수님. 오늘도 사랑과 존경의 주
님을 만났는데도 여전히 천하게 사는 우리들이기에, 따스한 친구 예수님의
그 음성이 그리울 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사랑으로 샘물
첫댓글 장문의 댓글을 달았는데... 백스페이스 키를 잘못 눌러서 다 날아갔네요~ ㅠㅠ
아무튼 그게 무슨 상관?? ㅋㅋㅋ
아깝네요. 그 장문의 댓글..기억해 내서 다시 달아요. 그래야 애덜 네명 이름 다 기억해요 ㅎㅎ
애들 이름 기억하는게 자신없네요 ㅋㅋㅋ 그나저나 넷째 이름을 뭐로 할지 모르겠네요~ 상품 걸고 공모전 열어볼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