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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41장 격언 해설도>
원인 |
정(正) |
약(若) |
반(反) |
결과 | ||
도은 무명 (道隱 無名) ‥ 도는 숨겨져 있어 이름이 없다. |
양(陽) |
명(明) : 밝음 |
매(昧) : 어두움 |
음(陰) ‥ (음처럼 보임) |
도선 대차성 (道善 貸且成) ‥ 도는 잘 베풀고 완성시킨다. | |
진(進) : 나아감 |
퇴(退) : 물러섬 | |||||
이(夷) : 평탄함 |
뢰(纇) : 굽음 | |||||
상덕(上德) : 높음 |
곡(谷) : 낮음 | |||||
대백(大白) : 깨끗함 |
욕(辱) : 더러움 | |||||
광덕(廣德) : 넓음 |
부족(不足) : 좁음 | |||||
건덕(建德) : 튼튼함 |
투(偸) : 빈약함 | |||||
질진(質眞) : 질박함 |
투(渝) : 변덕스러움 | |||||
대(大) |
대방(大方) : 큰 네모 |
무우(無隅) : 모서리가 안보임 |
거의 인식되지 않음 | |||
대기(大器) : 큰 그릇 |
만성(晩成) : 완성이 잘 안보임 | |||||
대음(大音) : 큰 소리 |
희성(希聲) : 잘 듣기지 않음 | |||||
대상(大象) : 큰 모양 |
무형(無形) : 잘 보이지 않음 |
일반적으로 41장의 격언은 13개로 말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13번째 격언이 전체를 아우르는 말(원인과 결과)로 해석하여 격언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12개 격언 중에 앞의 8개는 약(若 : ~같다, 그대로)이라는 용어로 앞 뒤 단어를 연결하고 있고, 나머지 4개는 약(若, ~같다)이라는 용어 없이 앞 뒤 단어가 연결되어 있어 구분하였다. 구분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의 약(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8개의 문장을 음양이론으로 해설하여 앞 글자는 양(陽)으로, 뒤의 글자는 음(陰)으로 대응시킬 수 있는데 비해 뒤의 4개 문장은 음양으로 대응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세 종류의 선비를 구분할 때 사용한 방식(무위법 : 無爲法)에 따라, 약(若)을 ‘같다’는 의미 외에 ‘그대로’라는 의미로도 해석하였다. 즉 ‘A약B’일 경우 인위적인 이분법과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고 무위법에 따라 ‘A그대로 B’ 방식으로 해석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면 격언 중 첫 번째 문장은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는 해석 외에 ‘밝은 도는 그대로 어둡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은 ‘전진하는 도는 후퇴하는 것 같다’는 해석 외에 ‘전진하는 도는 그대로 후퇴한다’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문장에서 평탄함과 굽음, 높음은 낮음, 깨끗함과 더러움, 넓음과 좁음, 튼튼함과 빈약함, 질박함과 변덕스러움 등은 반대말인데, 반대말을 그대로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이렇게 반대말을 그대로 동일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두고 크게 비웃지 않으면 어찌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때 크게 비웃는 지식인은 자신이 진리를 인식하는 기준을 이분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분법은 사물을 구분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인식방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상(現象, appearance)을 인식하는 방식이지 실재(實在, reality)를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얕은 지식인은 낮은 등급의 선비이며, 이들이 크게 비웃지 않으면 실재를 지칭하는 도(道)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약(若)이 들어가지 않은 4개의 문장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것들은 인식되지만 그 작은 것들도 크게 확장해서 극(極)에 이르게 하면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4개의 문장(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에서 무(無)와 만(晩), 희(希)는 ‘거의 ~하지 않다’(rarely)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그러면 이들이 왜 거의 인식되지 않는가? 극에 이른 큰 것들은 인간의 감각지각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감각지각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유와 무의 단순한 이분법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41장 격언의 논리는 정(正)은 정(正)이고 반(反)은 반(反)인 이분법(二分法)이 아니다. 동양식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양(陽)은 양(陽)이고 음(陰)은 음(陰)인 이분법이 아니다. 그리고 정(正)과 반(反)이 지양(止揚)하여 합(合)에 이르는 변증법의 방식도 아니다. 양(陽)과 음(陰)이 지양(止揚)하여 양(陽)도 아니고 음(陰)도 아니면서 양과 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3의 용어인 유(有) 등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양(陽)이 그대로 음(陰)과 같다. 그리고 작은 양(陽)이 파악되는데 비해 큰 양(陽)은 파악되지 않는 무위법(無爲法)이다. 우리가 무위법(無爲法)으로 도를 파악한다고 해서 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로 보아서는 안된다. 도는 모든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하겠금 끊임없이 베풀어서 그들이 완성되도록 하는 창조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도(道)는 화이트헤드가 궁극자로 보는 창조성(創造性, Creativity)과 유사하다.
(4) 문제 제기
1. 양은 왜 음처럼 보이고, 크고 궁극적인 것은 왜 우리들의 감각기관이나 사고에 포착되지 않는가?
2. 일반사람들이 어찌 깊은 현묘(玄妙)의 지(知)를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현인이라고 불 리는 자들의 지식놀음이 아닌가?
< 다음 주 강의 예고 >
통청아카데미 通 靑 Academy |
230회 |
주제: |
노자 도덕경 읽기(24강) 도덕경 42장 |
발표자: |
이태호(통청아카데미 원장) | ||||
일시: |
2014. 7 2. (수) pm 7:00~9:00 |
장소: 대구시립수성도서관 제1 강좌실 |
문의 |
010-3928-2866 | |||||
h.p. |
cafe.daum.net/tongchungd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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