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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글날, 마침 토요일 오후에 시내 결혼식에 갔다가 그 참에 새로 지은 광화문을 보러 갔었다. 그날 광화문 앞마당은 놀 토에 한글날을 기념해서 어린이 백일장 행사와 한글 가훈 써주기 행사로 많은 사람들로 다소 부산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세종로에는 세종은 없고 충무로에 있어야 할 충무공만 있다는 일부 여론을 의식한 것인지 진짜 제대로 된 세종임금의 좌상이 새로 지은 광화문과 함께 광화문 광장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 조형물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세종 임금상이 너무 지나치게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뭔가 전체적인 균형에 맞지 않은 듯 했다. 또 한 가지는 한문으로 된 '光化門' 편액을 보면서 바로 한글을 창제한 임금을 모신 자리에 크나 큰 결례는 아닌지 괜히 임금님께 죄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외국인들에게 떳떳치 못한 부끄러움을 감출 길 없었다.
그런 감정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로 보아 왔던 한글 '광화문'에 익숙해 있던 데서 오는 생경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시 지은 광화문이라면 비록 일부 석재나 목재가 옛 것을 다시 사용했다 해도 엄밀한 의미의 문화재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진대 굳이 억지로 디지털 합성을 해가며 한문체 현판을 달 이유가 뭐란 말인가?
경복궁과 광화문은 우리 역사의 상징물의 하나로 원형을 살려 다시 짓고 복원작업을 해 왔는데 기왕에 있던 옛 편액이 보존되어 있었다면 몰라도 이미 멸실된 편액까지 옛 한문체를 다시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고 박대통령이 우리 글 '광화문' 편액으로 바꿔 단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랬다. 새로 지은 광화문을 본 소회는 그리 감동적이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왠지 남의 나라 글자로 된 문패를 달고 있는 모습이 무척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光化門'편액이 만든지 불과 몇 달 안돼서 균열이 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것도 횡액에 쓰는 나뭇결이 가로로 갈라지지 않고 세로로 갈라진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이변이라 하겠다. 아마도 나름대로는 직경이 큰 귀한 나무를 구해서 편액 감으로 재재를 해 쓴 모양인데 그게 화로 작용한 게 아닐까?
내 자신이 나무 전문가는 아니니 이렇다 저렇다 속단 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목수라면 나무를 그렇게 쓰지는 않는다. 대청마루를 까는데 횡으로 재재한 나무를 쓰지 종으로 된 나무를 쓰지 않듯이 횡액용 나무라면 횡으로 재재한 나무를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상식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사건은 얼마 전 국새 사건이 연상되기도 하다. 전통기법으로 제작했다는 국새가 전통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횡액 제작도 전통적인 기법이나 용재 법칙에 어긋난 데서 비롯된 게 아닐는지...
이제 문화재청이 전문가들을 불러서 현판 균열 원인 조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문패 격인 편액을 한글로 하느냐 한자로 하느냐는 자존심과 정체성이 걸린 문제"라며 광화문 편액의 한글 복원을 주장하는 견해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편액을 다시 제작한다면 한글로 바꿔 달거나 아니면 박대통령이 썼던 바로 그 편액을 다시 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역사가 박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 하든 이미 그 분이 쓴 '광화문' 한글 편액이 한 시대를 장식했던 만큼 그 역사성 또한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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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의 의미와 유래
궁궐의 현판은 해당 건축물의 기능이나 성격 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 현판들은 한자를 주요 표기 수단으로 삼던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글 전용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모든 문자文字 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서가 근래에 출간되어서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수많은 개개 현판에 대한 설명은 전문 해설서에 맡기고 여기서는 주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한다.
현판懸板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담고 있는 말은 편액扁額이다. 현판은 ‘글씨를 쓴 널빤지[板]를 걸었다[懸]’는 단순한 뜻이고, 편액은 ‘건물의 문 위 이마 부분에 써 놓은 글씨’라는 뜻이다. 편扁은 호戶와 책冊이 합쳐진 글자로 ‘문 위에 써 놓은 글’을 뜻하고, 액額은 이마라는 뜻이다.
현판이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전하는 말로는 중국의 진秦 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문헌상에 구체적인 기록은 한漢 나라 때부터 보인다. 한 나라 개국의 일등공신인 소하蕭何가 서서署書라는 글자체로 두 궁궐에다 각각 ‘창룡蒼龍’과 ‘백호白虎’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중국의 한자 문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현판의 풍습도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궁궐 현판의 명명命名 원리
정전의 이름에 ‘정政’자가 들어간 것은 금방 수긍이 간다. 그런데 정문에 쓰인 ‘화化’자도 결국 바른 정치와 관련된 말이다.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다 워낙 가치를 높게 두어서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지만, 유가적 관점에서의 정치는 먹고 사는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올바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교화敎化를 더 우선시하였다. 그래서 각 궁의 정문 이름에 교화를 뜻하는 ‘화化’자를 넣은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정문인 광화문을 제외하고 동쪽의 건춘문建春門과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북쪽의 신무문神武門은 오행五行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오행을 계절로 따지면 동쪽은 봄이고 서쪽은 가을이다. 북쪽은 계절을 적용한 것이 아니고 ‘현무玄武’의 ‘무武’를 따왔다. ‘현무玄武’는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듯이 신화 속의 북방北方의 신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산 자락에 지형을 따라 서로 이어서 지었기 때문에 동서남북에 맞추어 문을 내기 어려워 이러한 오행이 적용되기 힘들었다. 다만 창덕궁의 서문은 ‘금호문金虎門’으로 오행에 적용된다. 오행에서 금金과 호虎가 모두 서쪽과 상관된다.
궁궐 밖에 있는 도성의 4대문四大門도 오행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오행으로 따지면 각각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에 해당한다. 중앙에는 문이 없는 대신 ‘보신각普信閣’에 ‘신信’자를 담았다. 북문인 홍지문은 조선 후기인 숙종 때 세워진 것이며 원래의 북문은 근래에 개방된 숙정문肅靖門이다. 이 숙정문은 원래는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는데 어느 땐가 글자가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9년(중종 4)부터 바뀌어 나오는데 그 연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숙정문은 평상시에는 닫아놓고 통행을 하지 않았는데 큰 가뭄이 들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오행으로 보았을 때 숭례문은 불을 상징하고 숙정문은 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동대문을 현판에 쓰인 대로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부르는 경향이 많으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속설에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地氣가 약하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보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이름을 그렇게 고쳐 부른 것이 아니고 현판을 쓸 때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종 때까지 줄곧 속칭인 동대문으로 부르거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른 예가 수백 개나 나타난다. ‘지之’자는 어조사로 넣어준 것이지 이름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문에서는 이러한 용례가 흔하다.
경복궁의 ‘향오문嚮五門’은 글자만 보아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이는 "서경書經"의 ‘향용오복嚮用五福’에서 온 말이며, ‘향하기를 오복五福으로써 한다’, 즉 ‘오복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경복궁의 ‘흠경각欽敬閣’은 글자대로만 보면 ‘흠모하고 공경함’이란 뜻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그러나 이 건물의 용도를 생각하면 이는 ?A서경書經?B의 ‘흠약호천欽若昊天’과 ‘경수인시敬授人時’에서 따온 말로 풀어야 한다. 두 구절을 합하면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 준다’는 뜻이 된다. 흠경각은 세종 때 물시계와 천문 관측 기구를 설치한 곳이기 때문에 ?A서경?B에서 유관한 구절을 따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창덕궁의 옥류천玉流川 권역에 있는 취한정翠寒亭의 뜻풀이도 주의해야 한다. 얼핏 보면 정자 주위의 숲이 ‘푸르고[翠] 서늘하다[寒]’는 의미일 것 같은데 조금 더 깊은 뜻이 있다. 이는 정자 주위의 나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푸른 자태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 해가 겨울이 되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나중에 시듦을 안다’는 뜻으로서 절개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숙종이 취한정을 읊은 시 중에 ‘삼삼족족총환정森森簇簇總環亭, 冒雪凌寒色愈淸(빽빽하게 자라나서 온통 정자를 둘러 있고, 눈 덮인 채 추위 이겨 빛이 더욱 맑도다)’이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해진다.
궁궐은 우리 전통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유형의 문화재인 건축물 자체에 대한 이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건축물에 대한 이해의 방편으로 각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에 대한 이해가 첩경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의 기호로만 스쳐 지나가던 현판을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해석해 보면 궁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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