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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발표된 '처용'에 관한 연구 논문이 어림잡아 400 편이 넘는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에 관한 연구 논문 숫자가 3000 편을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중 처용에 관한 논문이 400여 편이라면 '처용'이 단연 인기 있는 주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용에 관한 논문 400여 편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1년 쯤 전에 '처용연구전집'이 출판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난 적이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처용연구전집'을 펴내기 위해서 '처용간행위원회'가 구성되어 처용 관련 논문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1918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처용 관련 논문들을 수집한 후, '이 중 180여 편을 선별하고, 이를 다시 어학·문학·민속·종합·예술 등의 분야로 분류하여 전 7권, 총 5000쪽이 넘는 '처용연구전집'(역락)으로 펴냈다고 한다. 7권 짜리 전집에 지금까지 발표된 처용 관련 논문이 반도 다 못 실렸다는 얘기가 된다. 이쯤 되면 우리 학계의 처용 관련 연구의 축적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될 것이다.
'처용'에 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한 만큼 처용 연구의 역사도 제법 길다. '처용' 연구는 향가 '처용가'의 해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처용가' 연구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우리 자존심이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찍이 1918년에 일본 연구자에 의해 처용가가 해독됨으로써 처용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던 셈이다. 이 즈음의 사정을 "처용가 연구의 종합적 연구"라는 논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엔 1923년 권덕규, 1924년의 신채호에 의해 소박한 해독이 있은 후 1940년대에 양주동에 의해 전면적인 해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처용가의 해독과 연구는 고전시가, 특히 향가 작품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한편, 60년대 김동욱에 의해 처용가의 다양하고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1972년에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주최로 「처용가의 종합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각 방면의 발표와 토론이 전개되어 종합적 정리를 시도한 바 있다."
이후 처용가, 나아가서 '처용 전승'의 연구에 국어국문학, 민속학, 역사학 분야의 학자들이 대거 동원되는 형국이 되어, 국학 분야의 학자들 치고 처용 관련 논문이 없는 학자가 드물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다 국학 전공 학자들 뿐 아니라 인접 학문 분야, 심지어는 정신분석학이나 기호학 쪽에서 처용을 접근하려는 시도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처용의 실체에 관해 속 시원히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정이다. 말하자면 '처용'이라는 존재는 아직도 안개 속에 묻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주 줄여 말해서 처용은 무당이고 의인신(擬人神) 내지 의인용신(擬人龍神)이고 문신(門神)이고 하다는 주장은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에서 누구나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그런 몇 가지 얼굴 말고도 그는 후세의 읽기에 의해서 아랍상인, 난세의 지역호족의 아들 등으로 아예 전통신앙이나 민간전승에서 역사 현장으로 나서기도 했다. 달리 또 고려가요 처용가는 그 이름 부르기만 해도 무가(巫歌)를 비롯해서 극가(劇歌), 극시(劇詩), 무극(舞劇) 등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이 경지면 처용의 호적 찾기나 정체성의 단일성 추적은 포기해야 한다. 처용을 단색, 단형으로 몰아 부치면 그것은 필경 소경 코끼리 만지기나 진 배 없게 된다. 코를 알아 맞춘 사람이 다리 알아 맞춘 사람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국문학자 김열규 교수가 '처용은 과연 누군가? 누구일 것 같은가?'라는 사뭇 도발적인 제목의 글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김열규 교수는 '처용' 이미지의 변화과정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용(龍)에서 인간으로, 불사(佛寺) 창건의 발원자에서 왕정의 보좌자로, 보좌자에서 질병물림의 주술사로, 주술사에서 문신으로, 문신에서 풍류꾼으로, 풍류사에서 나례(儺禮)의 가면 쓴 극적인 역할자로, 그리고도 모잘라서 희생양일 수도 있는 주물인 제옹으로, 처용은 전신(轉身)하고 또 변신(變身)해 나아갔다. 이 다변(多變)의 연쇄 어디에나 처용은 존재하고 있다. 그게 모두 처용이고 처용 아닌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없다. 헌데 이 변화는 일차원적인 혹은 단선적인 변화가 아님에 유념하고 싶다. 이것은 적어도 서로 다른 종(種)과 종 사이의 상호전환이라서 역시 다시 한번 '범주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처용은 곧잘 물구서고 둔갑하곤 한다."
김열규 교수는 처용의 전신 또는 변신의 구체적인 형태가 '그림'에서 시작하여 '짚인형', '변장(가면 없는)한 인물'을 거쳐 '가면 쓰고 치장한 인물'의 네 가지 도형 또는 조형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가면 쓰고 치장한 인물'이라는 네 번째 모습이야말로 "앞의 세 가지에 걸친 시대적인 적층(積層) 그리고 전승현장의 다각성을 바탕에 깐 이상적인 형상임을 강조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처용의 가면은 조선조 성종 때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그림으로 나오고, 또 처용이 치장한 모습에 관해서는 '고려 처용가'에 자세하다. "어와 아비 즈스여"로 시작되는 '고려 처용가'가 묘사하고 있는 처용의 모습은 이렇다.
"머리에 가득 꽂힌 꽃을 이기지 못해 기울어진 머리에, 수명이 길고 오래시어 넓으신 이마에, 산의 모습과 비슷한 무성한 눈썹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시어 원만하신 눈에, 풍악소리가 뜰에 가득하여 우굴어지신 귀에, 붉은 복숭아꽃 같이 붉으신 뺨에, 오향(五香)을 맡으시어 우묵한 코에,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 같이 흰 이빨에, 사람들이 칭찬하고 복이 성하여 앞으로 나온 턱에, 칠보장식을 못 이기어서 숙어지신 어깨에……"(최철 해석)
'고려 처용가'의 이러한 묘사가 『악학궤범』에 나오는 그림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세히 묘사된 글과 그리고 『악학궤범』의 그림으로 처용의 생김새를 더듬을 수 있는 근거는 가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처용이 등장했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헌강왕대임에 비추어, '고려 처용가'는 고려시대의 노래이고, 『악학궤범』은 조선조의 문헌이다. 9세기 말의 신라 헌강왕대에서 『악학궤범』이 간행된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에는 약 600년이라는 시간적인 갭이 있다. 처용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 내려왔다고 믿기에는 그 6백년이 너무 멀고 길다.
이렇게 처용의 모습을 더듬던 중에 나에게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상(像), 얼굴 모습이 있었다. 경주 괘릉의, 서역인 형상을 한 무인상이 그것이었다. 괘릉은, 헌강왕보다 약 백년이 앞서는 원성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생각해 보면, 그 원성왕의 능에 있는 무인상의 얼굴 모습이 『악학궤범』의 처용가면 모습과 흡사한 것이다. 그렇게 따지다 보니 경주시 안강읍 외곽의 흥덕왕릉 무인상의 얼굴도 서역인의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통일신라 시기의 것으로 알려진 토용(土俑) 중에도 서역인의 얼굴 모습을 한 것들이 있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의 모습이 이런 얼굴 모습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역사학자들 중에 처용을 서역, 그러니까 아라비아의 상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보면, 『악학궤범』의 처용 가면을 신라 말기의 유물에 나타나는 서역인 모습과 엮어보는 이런 추정도 전혀 얼토당토하지 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49 헌강대왕 때에 서울로부터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가옥이 즐비하고 담이 연(連)해서 초옥은 하나도 없으며 도로에 생가(笙歌)가 끊이지 아니하고, 풍우가 사시(四時)에 골랐었다."
'처용랑 망해사'조 기사의 첫머리이다. 생가(笙歌) 즉, 생황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니, 백성들의 살림이 부유하고 기후마저 순조로워 태평성대였으리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때 대왕이 개운포에서 놀다가 장차 돌아올 새, 낮에 물가에서 쉬더니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여 길이 희미한지라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라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매 유사(有司)에게 조칙해서 용을 위하여 근경(近境)에 절을 세우려고 영(令)을 내렸더니 운무가 흩어졌으므로 개운포(開雲浦)라 하였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칠자(七子)를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여 춤추며 풍류를 아뢰고 그의 일자(一子)는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政事)를 도우니 이름을 처용이라 하고 왕이 아름다운 여자로 안해를 삼게 하여 머무르게 하며 또 급간(級干)을 시켰었다."
처용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하나라는 처용의 존재를 두고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역사학자들은 동해 용이 '어떤 인간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중앙의 정권과 대립하던 울산 지방의 호족이 화해하려는 의도에서 질자(質子)를 바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이재(理財)에 능한 서역인을 관리로 썼던 중국의 예를 끌어오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헌강왕 5년 조에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할 때,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 나타나 가무를 하였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이 괴이하여 사람들이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기록이 이방인의 존재룰 암시한다는 점에서『삼국유사』의 그것과 짝을 이루기도 한다. 아무튼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서라벌로 와서 급간 벼슬을 하면서 왕의 정사(政事)를 돕게 되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의 안해가 매우 아름다워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해서 밤에 그 집에 이르러 가만히 함께 자더니 처용이 밖으로부터 집에 이르러서 두 사람이 누워 자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가게 하니 노래에 가로되,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 걸 어쩌리
(홍기문 번역)
그때에 신(神)이 현형(現形)하여 앞에 꿇어앉아 가로되 내가 공(公)의 안해를 부러워하여 범하였으나 공의 성낸 것을 보지 못하니 감사히 여겨 지금부터는 맹세하여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인(國人)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가 나게[辟邪進慶] 하였다."
저 유명한 '처용가'라는 향가의 유래이다. 누군가가 처용의 아내와 통정하다가 처용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간통 장면을 목격한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고, 간부(姦夫)는 그렇게 물러난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자신을 보고도 성을 내지 않으니 그것이 감사하여 앞으로는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간통을 들킨 정도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처용이 간통 현장을 목격하고도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물러난 점이 이상하지만, 간부가 무릎꿇고 빌었던 것으로 사건이 일단 해결된 것으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찌 보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이, 상식적인 선을 넘어 상당 수준 윤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통상적으로 간부(姦夫)라고 불리워야 할 자가 신(神)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역신(疫神)이라면 인간의 병(病)을 주관하는 신이란 뜻이겠는데 무슨, 신이라는 존재가 여염집 여자 하나를 관계하고는 그 남편에게 무릎꿇고 맹세까지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 역신이 무릎꿇고 빌면서 '당신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처용 또한, 간부 나부랭이의 출입을 막아 지켜주는 문신(門神)이 되고 있다. 동해 용의 아들이라는 처용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개로 왕의 행차를 멈추게 하고는 다시 안개를 흩어버린 공로로, 헌강왕에게 발탁되어 신라의 벼슬아치가 된 후, 아내의 간통 사건을 희한하게 수습한 끝에 자신은 신(神)의 지위로까지 격상하게 된 셈이다
민속학 쪽에서는 처용을 용신(龍神)의 사제자(司祭者)로서의 무당, 또는 역신을 쫓는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봄으로써 역사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처용의 정체를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역신이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점에서 처용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주술력을 갖는 문신(門神)으로 떠받들려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용에 관한 인식의 변화와, 그 결과로 생긴 처용의 변신을 목격하게 된다.
"용(龍)에서 인간으로, 불사(佛寺) 창건의 발원자에서 왕정의 보좌자로, 보좌자에서 질병물림의 주술사로, 주술사에서 문신으로, 문신에서 풍류꾼으로, 풍류꾼에서 나례(儺禮)의 가면 쓴 극적인 역할자로, 그리고도 모자라서 희생양일 수도 있는 주물(呪物)인 제옹으로, 처용은 전신(轉身)하고 또 변신(變身)해 나아갔다. 이 다변(多變)의 연쇄 어디에나 처용은 존재하고 있다. 그게 모두 처용이고 처용 아닌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없다. 헌데 이 변화는 일차원적인 혹은 단선적인 변화가 아님에 유념하고 싶다. 이것은 적어도 서로 다른 종(種)과 종 사이의 상호전환이라서 역시 다시 한번 '범주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처용은 곧잘 물구서고 둔갑하곤 한다."
일찌기 처용을 민속학적, 신화학적으로 접근해왔던 김열규 교수가 묘사하는, 처용 정체의 변이 과정이다. "곧잘 물구서고 둔갑하는" 처용의 변신 과정에서 『삼국유사』는 용에서 인간, 불사 창건의 발원자에서 왕정의 보좌자, 거기에서 다시 주술사, 문신으로 변하는 과정까지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처용은 그 이후에도 풍류꾼으로, 다시 가면 쓴 역할자로, 더 나아가서는 주물(呪物)인 제옹으로 계속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끊임없는 변신 속에서 처용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정체성이란 어떻게 보면 정체성(停滯性)이라고 볼 수 있다. 무릇 모든 존재는 어느 한 곳,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머무름으로써 머무른 그 장소, 그 순간의 제 모습과 노릇, 즉 정체(正體)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처용의 정체란, 처용이 거쳐온 모든 시간 속의 모습과 노릇의 총합이면서 그 총합을 이루고 있는 분절된 시간 시간의 순간적인 모습과 노릇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해 용의 아들, 급간이라는 벼슬아치, 부정한 아내의 남편, 간부(姦夫)를 교화한 남자, 외입장이 사내들로부터 여인들을 지켜 주는 문신(門神). 이러한 모습과 노릇은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풍류꾼으로, 나례의 가면쓴 연기자로, 드디어는 "희생양일 수도 있는 주물(呪物)인 제옹"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쯤 되면 우리는 그 모든 모습들과 노릇들을 처용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