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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용산구 이촌동)을 방문할 때면
3층 신안해저 유물관이라는 독립된 전시 공간을 자주 찾는다.
신안해저 유물관은
1976년부터 10년에 걸쳐 전라남도 신안군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유물 중 상당수를
연구와 분류를 거쳐 충실한 해설과 함께 몇 차례 특별전시가 있었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여 상설전시관으로 만든 것이다.
1323년 6월 중국 무역항 닝보(寧波)를 떠나
일본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 항구를 거쳐 교토로 향하던 중국 무역선이
항로를 이탈하여 고려 해역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그 배에서는 당시 고려와 교역했던 다양한 무역품과 자기, 생활용품 등 2만7000여 점의 유물,
정확히 말하면 훗날 수중 발굴조사를 통해 선체를 비롯한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동전류 28톤, 자단목 1,017개, 기타 574점이 인양돼
‘보물선‘으로 불리면서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신안 바다 속에서 건진 도자기 20,000여 점은 대부분 원나라 산이고,
일본의 세토매병 2점과 고려청자 7점도 발견되었다.
고려청자는 베개, 잔탁, 완, 주자뚜껑, 순청자 매병, 사자 연적 등인데,
고려에서 원나라로 수출된 물건을 일본인들이 다시 수입해간 것으로 보인다.
동전은 299종 800만개로 약 28톤이 발견되었다.
왕망(재위 9∼23년)이 세운 신(新)나라 때의 화천(貨泉)에서부터
1310년 원(元)나라에서 제작된 지대통보(至大通寶), 대원통보(大元通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폐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일찍이 중국 동전을 조공 하사품으로 받아 돌아왔는데,
당시 일본 상인들은 중국에 대량의 금(金)을 가져가 동전과 바꿔서 큰 차익을 남겼다고 한다.
중국 고화폐가 많이 실린 까닭은
이를 고물로 수입하여 녹여서 일본 화폐를 주조하는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무역선에서는 먹으로 쓴 화물 꼬리표인 목패(木牌) 360여 점이 출토되어
‘신안선’의 구체적인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거기에는 화물의 주인 이름, 기년명, 사원 명칭, 물자 종류와 수량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년명이 지치(至治) 3년(1323년 - 고려 충숙왕 때)으로 적혀 있어 신안선의 침몰 연대를 알 수 있다.
또한 물주 이름으로 사원 명칭인 동복사, 조적암, 왕가 명칭인 거기궁 등이 등장하여
물주들이 미리 주문한 물건을 토대로 상인들이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식물의 품종은 후추, 파두, 산수유, 사군자, 빈랑, 여지핵,
은행, 복숭아씨, 매실, 호두, 개암나무, 밤, 계피, 생강 등 다양하다.
발견된 식물류 중에는
중국 남부 지방과 인도나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재배되는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에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광범위한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불상이나 고급 목기를 만들 때 쓰는 자단목이 1,000여 자루나 발견되었는데,
이 목재 또한 동남아산으로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여러 나라를 거쳐 교역되는 물품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막부와 사찰들은
금, 은, 나전칠기, 금속 공예품 등 일본 상품을 닝보(寧波)에 싣고 가서 팔았다.
돌아올 때는 일본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수입하여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남겼는데,
이 배도 그런 무역선의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1323년 6월 태풍을 만나 우리 해역에서 좌초된 건 비극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에게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해상 실크로드를 오가는 보물선을 거저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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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안선’이 발견된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는
목포항에서 서북방 50km 지점, 서쪽으로는 망망대해 황해가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임자도가 있는 곳이다.
인근 어민들의 연안어장이지만 간만의 차와 한류의 이동이 심하기로도 유명하다.
‘보물선’은 1975년 8월 이곳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항아리가 걸려 올라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물망에 잡힌 주꾸미는 빨판이 있어 무엇인가를 힘껏 잡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자기였던 것이다.
어부는 벌흙과 조개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은 항아리를
집으로 가져가 깨끗이 씻고 보니 제법 그럴 듯한 청자와 백자들이었다.
1974년 1월 어부 최형근의 집에 온 동생 초등학교 교사인 최태호 선생님이
이들 도자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최 교사는 먼저 목포시청 문화재과를 찾았으나 담당 공무원은 냉담했다.
“바다에서 무슨 고려청자가 나오겠냐, 속임수로 보상금을 타려고 한다.”면서 말이다.
다시 발길을 돌려 신안군청을 찾았다.
감정결과 형이 건진 항아리 중 하나가 청자대형화병으로 판명되어
최씨 형제는 보상금으로 100만원을 받았다.
사실 최형근의 그물에 걸린 것이 최초는 아니고,
도덕도 앞바다에서는 예로부터 이런 도자기가 심심찮게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하지만 어부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물건이었기에
대부분 ‘재수없는 그릇쪼가리’라고 여겨 깨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혹은 일부는 집에 가져가서 개밥그릇 등 하찮게 사용하기도 했다.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옛날 고려장을 지낼 때 '사람을 수장하면서 사용했던 그릇들’
이라는 속설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수장(水葬)하면서 사용한 물건에는
죽은 자의 원귀(冤鬼)가 끼어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씨 형제의 횡재는 소문을 탔고, 어김없이 전문도굴꾼이 등장했다.
동네 주민 A는 3t급 똑딱선을 빌리고 잠수부 B 등이 참여하여,
1976년 9월 4차례에 걸친 작업 끝에 꽃병, 항아리, 향초접시 등 유물 117점을 인양했다.
이들은 유물들을 한 점에 200만, 300만원씩 받고 목포와 전주 등지에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꼬리가 길면 붙잡히는 법,
신안유물을 둘러싼 수십 건의 도굴사건은 거래 과정에서 그 범죄행위가 경찰에게 포착되었다.
이들은 경찰에서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고하면
보상금 액수가 너무 적은데다 엄청난 세금이 두려워 밀매했다.”고 말했다.
신안 유물의 바다 속 최초 목격자(?)인 잠수부는
“수심 24m의 바다 밑은 갯벌이고 갯벌 속에서 어렵지 않게 도자기를 건져냈고,
나무토막도 몇 개 발견했다”고 목격담을 털어놓았다.
‘신안선’ 유물이 전국적 유명세를 탄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들의 범행 때문이었다.
도굴범들이 건저 낸 유물을 감정한 전문가는
“중국 송·원대에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이 지점은 서해를 통해
우리나라 인천이나 군산 등지로 교류하던 상선이 항해하는 통로의 기점이었다는 점에서
송·원대의 배가 침몰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의 발굴조사단이 꾸려지고,
1976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의 발굴을 통해 해저유물의 존재가 명확하게 확인하였다.
그와 동시에 1,800점의 도자기와 6,000여 점이 넘는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첫 발굴 때는 최신장비를 갖춘 해군 심해잠수사들도 유물 위치를 제대로 못 찾아서,
고심 끝에 도굴 경험이 있는 잠수사와 도굴꾼들을 현장에 데려와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도굴사건으로 구속된 잠수사 B와 도굴 주범 A가 발굴단의 해저조사요원에 포함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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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신안선’ 발굴 작업은 1976년 11월에 시작되어 1984년까지
9년간 모두 10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동원된 잠수사가 연 9,896명, 연 잠수시간 3,474시간으로,
시야가 좋지 않고 조류가 빠른 열악한 조건 아래서
해군 해난구조대 역사상 최장기간 투입된 지원이었다.
유물 발굴이라고 하면 흔히들 왕릉, 왕궁, 절터 등 땅 속을 파서 이루어지는 발굴로만 인식하였는데,
‘신안선’ 발굴을 계기로 최초로 수중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축적된 수중 발굴 기술은 이후
전라남도 완도항, 진도 명량해역,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 발굴 등으로 활발하게 이어졌다.
‘신안선’에는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각 지역에서 생산된 당대 최고 수준의 도자기가 상자에 차곡차곡 쌓여진 채 발굴되었다.
왕릉 등에서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발굴된 청자 하나가 보물급으로 대우받는데,
‘신안선’에서는 발굴된 무려 20,661점 절반 이상이 보물급 자기들이다.
이 노다지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할 수 밖에 …
어차피 중국은 1990년대 당시 국력이 약했기에 국제적인 발언권조차 없었고,
일본은 자신의 주문이었고 자국으로의 이동이었기에 도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물은 발굴된 지역, 해역 국가의 소유라는 게 명백한 국제법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억지 부리기 좋아하는 일본도
배 아프게도 한국에서의 도자기 발굴 및 소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 통쾌하기도 하지.
나는 얼마 전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전남 신안군 증도를 찾았다.
‘신안선’ 발굴해역은 1981년 6월 16일 국가사적 274호로 지정되어
이곳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지역에 발굴 기념비가 세워져 있더라.
그리고 안내판에는 13∼14세기 남송(南宋)과 원대(元代)에
중국과 고려, 일본을 오가는 교역선의 선박과 물품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얻게 된 이 발굴은
세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킨 사건으로,
당시 해상을 통한 동아시아 교역사와 동양문화사의 실체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한·중·일 고고학 연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겼다고 소개하고 있다.
술에 취한 주인을 살린 개, 은혜를 갚은 호랑이나 꿩, 여인으로 변신하여 유혹한 뱀,
도토리 훔친 승려의 신발을 물어뜯은 다람쥐, 용궁으로 간 거북이와 토끼 등
우리 주변에는 기억할 만한 동물들이 수없이 많다.
헌데, 보물선을 발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주꾸미 이야기는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다.
그래서 나는 못내 아쉬워 매직펜을 꺼내어 안내판 옆에 주꾸미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2019. 10)
첫댓글 우리도 지금 가서 한번 캐볼까요.!
할 일도 별로 없는데. ㅎㅎ
웃어볼려고 하는 소리예요. 좋은 정보를 다시 알게되네요.
많은 것을 알게 해주어 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할 일이 없다니요? 곳곳에서 환영 받는 '보물'이신데 ...
이나저나 글 2개를 동시에 올렸는데, 이건 이틀도 안 되어 조회수가 460회가 넘으니 뭔 일이드래요?
@오창훈 하하.^^
보물이라 그러나보네요. 누가 불러들였나! 회원보다
훨씬 많아서 우리 몫은 없겠네요.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