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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텐인텐[10년 10억 만들기] 원문보기 글쓴이: Jonathan(심정섭)
<심샘의 영어 공부 Tip> 많은 사람들이 영어는 특별한 과목이고 특별할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어 훈련이나 공부나 모두 결국은 인지능력 개발이다. 다른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그릇이 잘 갖춰지면 영어도 쉽게 정복할 수 있다. |
고등학교 시절의 영어 정복
중학교 영어 공부는 정말 "교과서 위주"로 충실히 공부해서 내신과 고입 선발고사 (내가 사는 지역은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고입 선발고사가 있었다) 준비를 했고 영어 성적은 거의 100점에 가까웠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학원이라는 곳에서 단과로 성문 기본 영어 특강을 수강했다. 당시 강사님은 부정사-동명사-분사-시제-가정법 등 주로 동사 부분의 기본 개념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는데, 영문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게 된 훌륭한 강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자습 시간은 중학교 과정보다 훨씬 어렵고 양이 많아진 영어 단어와 관용 표현을 외우는 데 보냈다.
고등학교 첫 국영수 모의고사에서 역시 고등학교 영어는 쉽지 않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단어와 표현이 나오고, 사실 무작위에 가깝게 문법 사항이 나오기 때문에, 미리 영문법 기초를 떼어두지 않았더라면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었다. 고교 내신 보다 수능(당시는 학력고사) 시험이 훨씬 어렵기 때문에 수능 수준에 맞춰 공부하면 교과서에서 거의 그대로 출제되는 내신 영어 시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내신은 거의 95점 이상을 받았고, 수능형(학력고사형) 모의고사는 90점대 이상을 받았다.
내가 고3 수험생이던 1990년대 초반은 영어 교육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기존의 영어 학습서의 고전인 성문 기본, 성문 종합 영어의 문법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방식의 교재들이 나았다. 이장돌의 Reader's Bank나 이찬승의 Reading Tutor 시리즈와 같이 성문 영어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딱딱한 지문과는 다른 재미있는 독해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독해 교재가 나왔다. 또, 민병철, 정철, 오성식 생활 영어와 같은 말하기 중심의 영어 교육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입 시험에서도 듣기 평가가 들어가고 문항 수가 점점 증가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 시험의 대부분은 문법과 독해였기에 나는 문법 독해 위주로만 중고등학교 6년의 영어 공부를 했다. 현재 많은 영어 교육 관계자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문법 번역식 (GTM: Grammar Translation Method)이라고 평가하고, 한국 영어를 망친 주범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구분 |
소위 죽은 영어 |
살아있는 영어 |
학습 중점 |
문법 번역식 영어 (일본식 문법 용어가 가득한 영어) |
회화 위주의 말하기 영어 |
문법 |
- 중시됨 - 부정사, 동명사, 명사적 용법, 부사적 용법과 같은 문법을 위한 문법 용어를 사용함 |
-영어를 망친 주범으로 환멸의 대상 - 문법 용어 사용을 최소화 함 |
학습 주체 |
- 교사가 일방적으로 문법 지식을 설명함 |
- 학습자들이 많이 참여함 |
학습 목표 |
- 정확성(accuracy) |
- 유창성(fluency) |
물론 이런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교육 내용을 무조건 쉽고, 재미있게 만든다고 모든 학습자들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전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 과거에 좋은 교재가 충분하지 않고, 단지 일본식 문법 용어가 가득한 문법, 독해 책만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미권 국가에 가서 유학하고 공부한 분들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그리고 열약한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양질의 교재와 각종 멀티미디어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영어를 배우는데 여전히 한국인의 영어 구사력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추후에 설명하겠지만, 나는 문법 번역 세대의 마지막에서 영어 교육을 받았지만, 이후 부족한 회화를 보충하여 내게 필요한 영어를 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문법 독해냐, 회화냐의 문제를 떠나 더 중요한 영어 교육의 핵심은 바로 어휘이다. 교육과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중학교 수준의 어휘는 누적 어휘로 약 1000단어 미만이고 고등학교 과정의 어휘는 약 3-4000단어 미만이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영어도 결국은 단어싸움이다. 단어가 되어야 문법과 독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어만 외우면 잘 외워지지 않고, 지루하니까 않으니까 문장과 문맥가운데 즉 독해를 해 가며 단어를 외우는 방법을 권하게 되고, 결국 단어, 문법, 독해가 유기적으로 공부가 되어야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지금 히브리어나 타갈로그어와 같은 새로운 언어에 도전하고 있다. 중국어, 일본어는 중급 정도의 수준이다. 최근에는 새로 도전하는 언어를 공부할 때는 플래쉬 카드라고 명함 크기의 고리가 달린 카드 앞에 새로 배우는 단어를 쓰고, 뒤에 한글 뜻을 쓰는 식으로 새로운 단어를 외운다. 많은 분들이 추천하는 단어 암기 방법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재학 시에는 이런 방법이 번거롭게 여겨져, 일반 노트 크기에 새로운 단어, 뜻, 짧은 문장이나 연관 표현을 적어 놓고, 계속 누적해가면서 단어를 외웠다.
카드를 이용하던, 단어 노트를 이용하던 영어를 비롯한 모든 외국어 학습의 기본은 어휘이다. 그리고 어휘는 외워야 한다. 이해해서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외우는 것이다. 쉽게 돌아가려 하지 말고, 그 날 수업에 배운 어휘를 하루도 빠지지 말고 외워 보라. 글이 읽어지고 말이 될 것이다.
심샘의 영어 공부 Tip 1.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 갈 때나, 본격적인 영어 공부를 위해 영문법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을 잡는 것이 유의미하며, 이때 강의력이 뛰어난 강사의 온라인, 오프라인 강의를 활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2. 영어 공부의 핵심은 결국 어휘이다. 어떤 교수 방법을 택하던 영어 단어를 꾸준히 외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
대학교 1학년의 충격: 영어 인터뷰에서 떨어지다.
중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나는 목표했던 서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중고등 6년의 목표했던 대학에 진학해 보니, 역시 전국에서 온 수재들의 집합소였다. 내가 느낀 당시 서울대 분위기는 영어나 일본어는 외국어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1학년 때부터 교수님들께서 영어 원서 독해 자료가 나오면 좀 힘들겠지만, 서울대 들어 올 정도면 이정도 읽지 않느냐는 식으로 독서 자료를 주셨고, 일본어도 한 두 달만 배우면 웬만한 독해는 할 수 있는데, 그걸 외국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분위기였다.
서울대생은 다른 것은 몰라도 공부하는 것은 자신 있어 한다. 학력고사 영어를 거의 만점에 가깝게 맞고 들어 왔으므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그다지 어렵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외국에 살다온 경험 없이 수능 수준의 영어만 공부하다가 대학에 진학 한 1학년생이 원서를 읽으며 공부하다 보면, 당장 어휘력과 책을 읽는 속도에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고등학교 3-4000단어 수준의 어휘력으로 누적 어휘 기준으로 20,000단어 수준의 원서를 읽으려니 당연한 결과이다. 이는 나도 절감한 사항이었지만, 당장 영어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결국 단어 문제니까 영어는 천천히 공부하면 되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학년 2학기. 나는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일 학생 교류회에 지원했다. 1 학기 때 수업을 들었던 인류학과 이광규 교수님이 지도 교수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다음 연도는 일본에 가서 포럼을 열고 토론하는 것이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선발 과목에 영어 면접이 있었다. 대강 자기소개 정도를 외우고 면접장에 갔는데, 생각지도 않은 질문들이 쏟아 졌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세부 질문이 이어졌다.
"So what motivates you to apply to our organization?" (그래서 어떤 동기로 우리 모임에 지원하게 되었죠?)
"I want to learn about... about Japan, and..." (저는 배우고... 그러니까 일본에 대해서...)
(이번 기회를 계기로 국제적인 시각을 넓히고, 한일간의 문제에도 좀 더 관심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장래 희망 중에 하나가 일본 전문가나 외교관이 되는 것인데, 이 분야에서의 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은 바싹 타 들어가고...
"OK, I am sorry to say this, but your English is not good enough to discuss several topics with Japanese students. How can you improve your English within a short time?" (좋습니다.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한데, 지금 당신의 영어는 일본 학생들과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기에는 부족한 듯합니다. 어떻게 단기간 내에 영어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죠?)
"Yes, now, my English is not enough, but..." (네 지금, 제 영어는 충분하지 않은데요...그러나...)
(그렇지만,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은 있기 때문에 3개월 정도 집중 훈련을 받으면 충분히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문 용어도 익혀 가면 충분히 일본 학생들과도 토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서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 이 말도 입에서 뱅뱅 돌고 말았다.
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한 선배 면접관이 아래 질문을 했다.
"Lastly, do you have anything to add?"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 있나요?)
"As I said, now I am not ready enough, but if you give me... a chance. I will do my best. And I can speak Japanese, so I can understand what Japanese students say. And I can report it to you"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저는 지금 충분하지 않은데요... 저에게 기회...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본어를 말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일본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요. 가서 듣고, 여러분께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심사 위원들이 빵 터졌다.
그렇게 스파이 짓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표정으로...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면접장을 빠져나올 때의 난생 처음의 엄청난 창피함과 굴욕감을 느꼈다. 우울한 마음에 지하철역으로 걸으며, 결심을 했다.
"그래, 영어 회화, 하자. 맘만 먹으면 1년이면 되지 않겠나."
그래서 다음 달부터 당장 학교 내에 있는 어학 연구소에 회화 과정을 신청하고, 방학 때는 강남에 있는 회화 학원을 다녔다. 과외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을 거의 대부분 회화 공부하는데 투자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대목이 있다. 국내파 영어 고수 가운데 단기간에 영어 공부에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박함이다. 영어 때문에 사업 기회를 놓쳤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을 느낀 사람은 절박함을 가지고 공부한다. 이런 관점에서 때로는 청년의 시기에 처절한 실패를 해 볼 필요가 있다. 머릿속으로 꿈만 그리지 말고, 하고 싶은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쓰라린 상처를 맞보는 것도 자신의 발전을 위한 큰 밑걸음이 될 수 있다. 내가 만약에 1학년 때 이런 실패의 경험을 미리 맞보지 않았더라면, 서울대생이라는 자만심에 영어 공부를 우습게보고, 낮은 수준의 영어에만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20 살이 넘어서 영어에 다시 도전하고자 원하는 분들 가운데, 본인의 자기 주도성이 강하다면, 과감하게 "들이대" 정신으로 도전해 보길 원한다.
심샘의 영어 공부 Tip 단기간에 영어 공부에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박함이다. 영어 때문에 사업 기회를 놓쳤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을 느낀 사람은 절박함을 가지고 공부한다. |
나의 회화 공부와 성과
1992년부터 나는 영어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시작은 학교의 어학 연구소 회화 기초반부터였다. 당시 선생님은 영국에서 오신 원어민 선생님이었고, 한국어는 거의 기초 수준을 하는 분이었다. 당시 회화반 수업을 들으며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9월에 기초 1반 수업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약 15명 정도가 수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보름 정도 지나면 반은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월말이 되면 1-2명만 남는다. 기초 1반을 끝내고 2반을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대부분 월말에는 나 혼자 선생님하고 1:1 수업을 할 때가 많았다. 중급반 정도에 올라가니, 영국의 가디언지 기사를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했다. 이렇게 거의 1년을 수업하니 어느 정도 영어로 듣고 말하는데 자신이 생겼다.
나중에 필자가 영어 선생님이 되어서, 회화나 CNN 청취 같은 수업을 해 보아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다. 월초에는 20명이던 사람이 점점 줄어서 월말에는 1-2명이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은 한두 명이 다음 단계에 올라가고, 그렇게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실력이 는다. 언어는 습관이고,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잊혀지기 때문에 꾸준히 하는 사람만이 마스터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중 하나가 지속적인 학습이다. 그런데 많은 한국 사람들은 영어 공부를 시작함에 있어서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시간의 견적을 내지 않고, 무작정 시작해 보다가 작심삼일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20살이 넘어서 영어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분들에게 나는 농담 삼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제게 100시간을 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영어 수준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농담 같지만 뼈가 있는 농담이다. 대부분의 학습자들은 100시간을 지속적으로 내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영어 면접에서 떨어진 상처가 깊었는지, 이를 악물고 100시간을 돌파했고, 영어 회화에 우선순위를 두고 꾸준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부한 영어 실력은 뜻밖에 중국(?)에서 빛을 발했다. 2학년 2 학기 때 과 사람들과 함께 당시 막 국교가 수립된 중국을 방문할 기회를 잡았다. 당시 중국어는 완전 초급 수준이었는데, 중국에서 우리를 가이드 한 조교 선생님이나 대학생들이나 이야기 할 때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중국 대학생들도 중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영어를 배우려는 열심에 영어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3 학년 때는 경희대학교 주최 대학생 영어 토론 대회에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고, 1994년 선교한국 대회에서 대회 기자로 외국인 강사 인터뷰를 담당할 정도로 영어 실력도 늘고 외국인과 말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정도가 되었다.
심샘의 영어 공부 Tip 영어 회화의 성패는 얼마나 꾸준히 회화 연습을 하고, 실전으로 말하는 경험을 많이 갖느냐에 달려있다. 대부분 작심삼일이나 용두사미로 끝나고 연습할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에 회화 실력이 늘지 않는다. |
교수의 꿈의 포기와 KATUSA 입대
당시 대부분의 문과생들이 그렇듯이 나의 고등학교 시절 진학 목표는 서울 법대였다. 하지만 수학에 발목이 잡혀 서울 법대에 갈 성적은 안 되었고, 인문대나 사회대로 과를 낮춰서 진학해야 했다. 법대를 못 간다면, 내가 제일 재미있어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에 동양사학과에 진학해서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역사를 좋아하고, 동양사학과 진학 학생들의 단골 진학 동기 중 하나인 "삼국지"를 감명 깊게 읽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 1,2학년 때는 대학 성적도 좋아서, 대학원 진학-유학- 교수임용의 목표가 순항하는 듯 했다. 당시 좋은 조건의 장학금도 받아서 과외도 하나 두개 정도해서 생활비를 대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는데,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탓에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녀야 했다. 신앙적인 고민으로 선교 단체를 두 군데 거치고, 운동권 친구들에게 대한 열등감(나는 사회를 위해 뭔가 하는 게 없다는 그런 마음...)에 구로 공단에 가서 1년 동안 야학 교사를 하고, 과에서 비운동권 학회를 만들어서 학회장을 하고... 항상 바쁘고,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3 학년 때 반드시 봐야하는 유학과 관련된 장학금 시험을 놓치고 나는 대학원 진학과 교수가 되는 길을 포기했다.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우리 집 형편이었다. 내가 대학원 가고 유학 가서 공부만 하기에는 우리집이 너무 가난한 것을 그 때야 절실히 깨달았다. 생활비 정도는 과외로 충당할 수 있었기에 너무 세상에 대한 감이 없었다가 갑자기 현실이 무섭게 다가왔다. 어서 사회에 나와서 외무 고시를 보거나, 종합 상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고, 내 커리어를 쌓아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진득하게 앉아서 사료를 뒤지고 연구만 할 학자 타입이 아니었다.
이렇게 갑자기 진로가 수정되니, 공군장교로 군 복무를 하려고 군입대를 미루고 4학년까지 쭉 학교를 다닌 것이 문제였다. 너무 늦은 나이에 일반 사병으로 군대에 가기는 싫던 차에 마침 카투사 제도를 알게 되어, 시험을 보고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하기로 했다.
카투사 생활은 내게 2년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상의 큰 유익을 주었다. 우선 어느 정도 영어 회화가 된 덕에, 평택 훈련소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서 정보 부대로 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용인에 있는 미군 파견 부대에서 미군들과 같이 2년간 생활하며 영어 뿐 아니라 일하는 방식, 그들의 삶의 자세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선 영어가 많이 늘었다. 군사 정보를 번역하고 한영, 혹은 영한 통역을 하며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영어를 접할 수 있었다. 뉴욕 발음, 텍사스 발음, 중부 발음, 캘리포니아 발음, 흑인 발음... 그리고 필리핀이나 남미 출신 미군 병사들의 발음. 한 종류인 줄 알았던 원어민 발음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막사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일하면서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익혀갔다. 보통 카투사로 미군에 가면 수준 낮은 미군들과 어울려 욕만 배운다는 편견도 있지만, 우리 부대는 정보 부대여서 장교들도 많았고, 병사들도 정보병들이 중심이어서 대학을 나오거나 나름 똑똑하고 생각이 있는 병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백인 병사나 흑인 주임 상사에게 말로만 듣던 "인종 차별"도 당해 보면서 미국에서 사는 한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을지도 상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익한 경험이었는데 당시에는 왜 이리 기분 나쁘고, 억울했는지 며칠 동안 영어는 입에도 대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셋째는 그들의 일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역시 미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답게 일하는 방식이나 시스템이 상당히 잘 갖춰져 있었다. 장교들도 소령이상은 거의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고, 장교들이 항상 솔선수범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상세한 매뉴얼이었다. 모병제인 미국 체계상 아무래도 우수한 사병들이 들어오기 힘들다. 그래서 장교나 하사관등의 리더들은 정말 바보라도 와서 배워서 장비를 다루고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상세한 매뉴얼을 만들어 두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았던 매뉴얼의 구성 원리와 내용은 나중에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일할 때 자주 활용해 보았고, 업무 효율을 상당히 높혀 주었다.
둘째로 인상 깊은 일하는 방식은 문서로 일하는 모습이었다. 중대장이나 부대장이 바뀌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이전의 부대 정책(policy)를 검토하고, 불합리한 것은 고치고, 자기 철학에 맞게 새로운 정책을 문서화해서 공지하고 부대원에게 알렸다. 주먹구구식으로 자기 맘대로 하거나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과 원칙에 따라 부대를 운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인사 평가나 제도 개선에서도 진술서(Statement)를 통해 객관적인 인사평가를 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셋째는 수평적이고 원칙 중심적인 조직의 운영이었다. 대령이었던 부대장도 아래 사병들과 격의 없이 의사소통했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계급보다 자신이 맞은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리더들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실력으로 말했다. 장교들이 체력검정(PT)에서도 거의 최상위 성적을 냈고, 야전 훈련을 가서도 사병들이 먼저 식사를 끝내고 자신이 식사하는 모습에 정말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가 미국을 이끌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이나 성희롱과 같은 터부시 하는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바로 인사 조치되는 모습에도 깜짝 놀랐다. 부대에 이병으로 들어온 흑인 여군이 있었는데, 한 미군 백인 중사가 같이 타고 가던 밴 안에서 농담을 하다가 여군에게 bitch (암캐- 우리말로 이년)라는 말을 했다. 흑인 여군이 자기가 모욕감을 느꼈다고 바로 Statement를 썼고, 그 중사는 다음 주에 바로 다른 부대로 인사 조치되었다!
이렇게 미군 부대에서 배운 점은 나중에 사회에서 회사나 조직에서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항상 일을 할 때 매뉴얼을 만들고, 객관적인 운영과 원칙 중심의 수평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영어를 잘하면 좋은 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글로벌 스탠다드를 배울 수 있다는 이점이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진국이 아니다. 선진국의 문화와 그들의 일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어가 능통한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심샘의 영어 공부 Tip 어느 정도 기본 영어 실력을 갖춘 후에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거나 외국인 회사나 선진국과 거래를 하는 등의 그들의 문화와 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자신의 업무나 사업의 유익 뿐 아니라, 삶의 관점을 바꾸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
군 제대와 IMF 폭탄
내가 군에 들어가기 전 한국 경제는 IMF 직전으로 경제에 낀 거품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였다.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이었고, 곧 1인당 국민 소득 2 만 불을 넘고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대기업은 빚을 내서 사업을 확장했고, 항상 신입 사원을 뽑았다. 군대 가기 전 내게 취업은 가장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정말 그 흔한 토익 시험 하나 보지 않았다. 약간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서울대 학벌에 원서만 내면 거의 회사는 들어갈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이 있었다. 카투사 생활 중에 토익책 한권을 사서 틈틈이 풀어보고 제대 무렵에 시험을 한번 보았다. 지금 기억으로 약 920점대가 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제대 무렵에 그렇게 잘 나가던 한국 경제는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고, 나라 경제는 폭탄을 맞았다. 졸업과 동시에 원서만 넣으면 취직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름을 들어본 대부분의 기업은 신규 채용을 거의 3년 동안 하지 않았고, 나는 제대와 동시에 실업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마음에 나는 무조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든 취직을 해서 사회 경험을 쌓는 것이 절박했다. 중소기업 채용 박람회와 여러 채용 기회를 찾아다닌 끝에 간신히 중소 무역회사에 들어갔고, 월
급 64만원을 받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렵게 들어간 무역회사에서 원단을 나르고, 몇 백 장 되는 벨벳 원단 조각을 염색 농도에 따라 순서를 배열해야 했다. 아침 7시,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회사 원단 창고에서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여기서 훈련 받아야 하는지를" 외치며, 나의 험난한 20대 후반의 삶은 시작되었다.
군 제대 후 내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해서 살아남아야 했다. "왜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허드렛일' 하느니, 차라리 미국으로 유학 가서 머천다이저(MD: Merchandizer)를 하는 게 낫겠다." 는 생각에 첫 직장인 원단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고등학교 선배님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성인 외국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풋내기 후배에게 큰 프로젝트를 맡겨주신 원장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업 계획을 짰다.
지역적으로 회화, 토플, 토익 등을 다하기는 힘들 것 같고, 토익 전문 학원으로 주력 과목을 정했다. 지하철역과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원장님이 소개 해 준 리처드라는 캐나다 교포와 함께 토익 강의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아는 뿐께 소개 받은 두 분 그리고 학원 초등부 선생님 두 명 총 4명의 학생을 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4명을 8명으로 8명을 16명으로 늘러나갈 포부였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순진한 계획이었다. 서울의 강남과 종로에서 학원 다닐 만한 학생들을 다 빨아들이는 현실에서 수도권에 토익 전문 학원을 낸다는 것은 무모한 계획이었다. 학원생은 늘지 않았고, 최대한으로 줄인 경비지만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원장님은 계속 믿어 주시고 도와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님이 자기 대학교 후배 중 똑똑한 친구가 있다고 소개 해 주셨다. 그리고 원장님은 자랑스럽게 그 후배에게 내가 그동안 맨땅에 헤딩한 흔적들을 보여 주셨다. 사업 계획서, 외국인 강사 채용 관련 E-2 비자 진행 상황, 광고 기획 안, 마케팅 방안, 비용 절감 방안 등등. 내가 미군 부대와 무역회사, 컨설팅 회사에서 귀동냥해서 배운 모든 것을 쏟아놓은 그 동안의 파일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후배님이 한 마디 하셨다.
“네, 아주 꼼꼼하게 일을 잘 했네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네요. 왜 이일을 해야 하는지가 없어요."
그렇다. 열심을 내어서 일을 하기 전에 과연 내가 왜 이일을 해야 하고, 비전과 목표가 무엇이고, 이일이 얼마나 성공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과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내가 대학생들 수업 시간과 성공학 강좌에서 수 없이 이야기하는 “열심히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하는 것이고, 인생의 성패는 스피드(Speed)가아니라 방향성(Direction)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다.
원장님은, “야 임마, 왜 해야 하기는... 해야 하는 거니까 하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며, 머쓱해 하는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했지만, 이 말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왜 내가 열심히 했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했는지에 대한 답을 찾게 해 주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보면 '헛 똑똑이'였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 후 편입 입시에서 대학생들을 지도하면도 수많은 '헛 똑똑이'를 본다. 뼈 빠지게 일 년을 공부하고, 시험 1 달 전에 학점이 모자라거나 자격이 안 되는 것을 발견하는 학생들이 있다. 내일 자신이 정말 가고 싶은 대학 시험일인데, 불면과 컨디션 조절 실패로 자기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는다. 편입을 준비 하면서, 학생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이 "영어"이다. 영어가 당락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영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가 편입을 하는 "동기와 목표", 그리고 "자격"이다. 같은 점수라도 '일반 편입'과 '학사 편입'의 자격에 따라 당락이 갈린다. 분명한 목표와 동기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다.
이후 강좌에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통계가 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연간 노동 시간이 제일 길지만, 노동 생산성은 꼴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보다 2배 더 일하지만 1.5배 더 가난하다. 나의 20대는 결국, 열정과 열심, 도전 정신은 있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좌충우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장 단어 하나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Tips. 성공에 있어 불변의 진리 하나 "열심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하는 것이다." "내가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왜 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자. |
본격적으로 영어 강의를 시작하다.
토익 학원 실패이후에도 나의 도전은 계속 되었다. 당시 막 시작하던 TEPS 시험에 응시해서 고득점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TEPS 전문가 과정에 들어가 TEPS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문가 과정 강사로 왔던 분이 이익훈 원장님과, 나중에 학력 위조 파문으로 홍역을 치른 이지영 선생님, 그리고 김영 편입 학원의 이준봉 선생님 등이었다. 이 TEPS 전문가 과정은 나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사실 강의를 하면서도 내가 강의를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약간 있었는데, '강남 최고 강사' 라는 분들의 강의를 들으며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저렇게 강의하는 것이 강남 최고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진 생각일 수 있지만, 나중에 학원을 운영하며 많은 선생님들의 면접을 진행하고 채용을 하면서, 이 정도의 자신감이 없으면 학원 강사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교육 선생님은 사명감이 중요하지만, 사교육 강사는 근성과 끼가 있어야 한다. 내가 1등이라는 승부 근성이 없으면 치열한 사교육계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TEPS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3개월이 안되어 나는 강의만족도 1위 강사로 부상했다. 경찰대, 동덕여고, 성남고 등의 강의를 하며, 당시 TEPS 교재를 공급하던 TEPS Agency 대표강사가 되었다. 경찰대에서 강의를 하며 하나 깨달은 노하우가 있다. 강의를 들어가기 전 반드시 강의 전반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의와 연관된 유머도 미리 준비한다. 경찰대에서는 같은 강의를 두 반으로 나누어서 했는데, 첫 번째 반에서 유머를 하고 상태를 봐서, 두 번째 반에서는 실패한 유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에 나올 포인트를 철저히 정리 해 주었다. 한 시간 강의를 위해 5-6 시간을 준비했다.
TEPS 강의를 시작한지 6개월이 안되어, 강의가 깨진 지역에 강의를 맡아주고, 설명회를 주관했다. 그러던 중, 중요한 강의제의가 하나 들어왔다. 바로 육군 사관 학교였다. TEPS Agency에서는 강의 평가가 제일 좋은 두 명의 강사를 복수 추천했다. 바로 나와 지금도 유명 TEPS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희 강사였다. 당시 살고 있던 군포시에서 육사까지 거의 2시간 넘는 거리라 그리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육사강의 경력이 이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강에 응했다. 시강은 내가 먼저 했다. 나는 내가 카투사(KATUSA)에 근무했던 점과, 군대 관련 영어 표현, 그리고 고득점에 이르는 비법 중심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강의 계획을 밝혔다. 연세대 영문과를 나왔던 김태희 선생님은 도입(Opening)을 영어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영어를 전공했고, 미국으로 교환 학생을 다녀왔다는 점을 어필했다.
결과는 김태희 선생의 승리였다. 거리가 멀어서 그다지 육사 강의를 바라지 않았지만 막상 떨어지고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떨어진 가장 큰 원인이 "내가 영어 전공자가 아니어서" 라고 생각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양사학과 나온 학부 출신 영어 선생님이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학원 운영자가 아니라 강사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하는 것' 못지않게, '영어 관련 전공'을 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간 6개월간의 TEPS Agency와 함께한 강의 경험을 통해, 내가 강의를 잘 할 수 있고 이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후 나는 학생들에게, "이 일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알아보는 척도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라고 권한다.
"6개월 내에 단기간에 성과가 나는가?"
"남들보다 쉽게 빠르게 할 수 있는가?"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하는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결과가 나온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였던, 영어 가르치는데 자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도 나는 쉽게 영어 교육 쪽으로 올인 하지 못했다. 바로 비전공자라는 핸디캡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연 내가 평생을 영어 선생님으로 살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일간지 1면 기사에 난 현대 기아자동차 그룹 1기 공채 기사를 보았다. 중소기업에 다니며 그렇게 소망하던 대기업에서 일해 볼 기회가 열린 것이다. 망설임 없이 원서를 냈고, IMF 사태 이후 최초의 대규모 공채에서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대 자동차에 합격하여, 바라던 해외 영업 본부에 배치 받았다.
Tips "6개월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면 내가 잘 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
그렇게 꿈꾸던 대기업 생활을 접고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현대 배지를 달고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날.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내 목에 걸린 출입증도 너무 감사했다. 내가 배치 받은 부서는 아중동팀으로 내가 담당한 업무는 이집트, 터키 완성차 및 CKD(Complete Knock-Down: 관세를 줄이기 위해 부품 형태로 수출하는) 수출 업무였다. 중소기업에서 6 개월 동안 하드트레이닝 받으며 무역 업무 전반을 해 보았기에 업무는 수월했고, 즐거웠다. 특히 계동 사옥에서 근무할 때, 그 유명한 왕자의 난 (현대 그룹 계열에서 연로한 정주영 명예 회장님을 모시고 현대 자동차 계열을 배제하고 현대 그룹을 재편하려고 한 사건)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TV에도 회사 모습과 내 동료들이 나오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당시 현대차 최고경영자였던 이계안 사장님도 너무 존경스러웠고, 열심히 현대에서 일해서 사장님처럼 나도 평사원 출신의 전문 경영인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그리고, 미군 부대에서 배운 대로,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닌 성과를 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실천하려고 했다. 그 때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현대차 최초로 이집트에 갤로퍼를 트럭으로 개조하여 수출하는 일을 해냈다. 당시 이집트 완성차는 현대 정공에서 이어받은 산타모와 갤로퍼가 잘 팔리고 있었는데, 이집트 주재원인 임과장님이 갤로퍼를 트럭으로 개조해서 팔 수 없겠냐는 제안을 했다. 현재 갤로퍼가 승용으로 분류되어서 12%의 관세를 내고 있는데, 트럭으로 분류되면 2% 관세만 내면 되고, 그러면 가격 경쟁력에서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3-4년 전에 한번 시도하려고 하다가 포기한 사안이었다. 나는 이 업무가 내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부장님께 한번 추진해 보겠다고 건의 드렸다.
"글쎄, 몇 대나 팔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이전에 안 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인데, 심정섭씨가 굳이 해 보고 싶다면, 다른 업무 지장 받지 않는 차원에서 한번 추진해 봐."
"예, 알겠습니다."
"안되면 되게 하고, 한번 시작한 일은 될 때까지 하자"는 원리를 실천해 보고 싶었다. 우선 트럭으로 분류되려면, 갤로퍼 뒷부분을 잘라서, 뒤 트렁크 공간을 짐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짐 싣는 공간과 승객 타는 부분이 10 Cm 이상 벌어져야 트럭으로 인정을 받았다.
전주에 있는 개조 공장에 출장을 2-3 차례 다니고, 만약에 사고가 날 경우에 대비하여, 개조로 인하여 사고가 발생할 때 일체의 책임은 전주의 개조 업체와 이집트의 딜러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보상 약속(indemnification letter)을 받아두고, 마침내 갤로퍼 5대를 선적했다.
임과장님으로부터 이집트 세관에서 트럭으로 통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야, 심정섭씨 고생했고, 축하해. 몇 년 동안 한번 해 보려 했는데 드디어 이번에 해 보는구먼"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이 아이디어 주시고, 부장님이 도와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저도 이번 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터키 CKD 수출 분야는 근무 6개월 만에 내가 우리 팀 어떤 사람보다 많이 공부해서 전문가가 되고, 울산 공장 현장도 직접 가보며, 현장 중심적으로 일하려고 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읽은 대로 '내가 종업원이 아니라, 사장이라는 생각'으로 일하려고 했다.
이렇게 현대맨이 되어서 수출 역군이 되어가던 나에게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자꾸 옛날 강의하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아, 내가 왜 이러나, 이러면 안 되지.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이 불길한 생각을 자꾸 떨어 버리려고 하는데도 지워 지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이 생각이 깊어지면서 업무에 대한 만족도도 떨어져갔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주중에는 회사 일을 하고 주말에 강의를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계동 사옥에서 가까운 학원 밀집 지역인 상계동에 있는 모 학원을 찾아갔다. 원장님과 면접을 하고, 다음의 조건을 이야기 했다.
"사실 제가 지금 현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강의 페이는 별 상관이 없고요. 주말에만 토플 이상 과목을 강의했으면 하는데요."
"아 그렇게 강의를 하고 싶으시면 아예 전업을 하시지 그래요. 주말에는 지금 그다지 강좌가 많지 않고, 전임 선생님께 우선하여 시수를 드려야 하거든요"
역시 주말에만 강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회사가 계동에서 양재동으로 이사 한 이후에도 자꾸 강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어나서 출근을 하려고 할 때, 이불속에서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인가? 내가 정말 즐거워하는 일을 무엇인가? 다른 모든 것은 제쳐 놓고, 지금 내가 일어나 회사에 가는 것과 강의하러 가는 것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은 강의하러 가겠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굳혔다. 주변에서 미친 짓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을 각오하고 사표를 쓰기로 했다. 그래서 교육 연수를 끝내고 현대에 발령 받은 지 만 1년이 되는 날 사표를 부장님께 제출했다.
"아니 심정섭씨 이게 뭐야. 이제 우리 팀에 온지 1년 밖에 안됐는데, 왜 벌써 그만둬. 자네 같은 유능한 사람이 현대에 있어야 회사가 발전하지..."
"부장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영어를 가르칠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것 같습니다. 다시 강단에 서서 강의하는 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고맙게도, 부장님, 이사님 등 여러 직장 상사 분들이 유능한 일꾼 잃는 게 안타깝다고 만류해 주셨지만, 나는 끝내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나왔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정말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게 해주는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나와 같이 3년을 못 채우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나 대기업을 그만두는 '파랑새 증후군' 환자들이 신입사원의 30%가 넘는다고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세상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고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후 학생들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인지 알고 싶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라.
"그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설레는가?"
"아침에 눈을 떠서 그 일을 하러 갈 것을 생각하면, 기운이 나고 벌떡 일어나게 되는가?"
"밤을 새워서 그 일을 해도 잘 지치지 않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되었나? 하는 말을 하게 되는가?"
내가 즐거워하지 못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없다. 오래 할 수 없으면 성과가 나지 않는다.
Tips "정말 즐거운 일은 쉽게 지지치 않고 오래 할 수 있다." "내가 마음 설레며 할 수 있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
본격적인 학원 강의와 새옹지마
회사를 그만 두면서나는 2가지를 분명히 했다. 여기서 더 방황하면 이제 내 인생을 정말 꼬일 대로 꼬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첫째는 "영어교육을 제대로 전공하자"였다. 그래서 더 이상 육사에서 당한 굴욕을 당하지 않고, 영어 강사로 성장해도 다른 사람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기왕 다시 사교육으로 가는 것, 강남, 종로 등 학원가의 메이저에서 승부를 보고, 내가 회사 다니며 받았던 수익의 2배 이상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연이 닿은 곳이 지금까지 10년 이상 근무를 하고 있는 대치동의 스카이 학원이다. 스카이 학원은 해외에서 살다온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 자녀들이 수능 이외로 보는 특례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고3이었고, 아이들이 외국 생활을 오래해서 영어 수준이 높았다. 영어는 GRE 수준의 어휘 독해력이 요구되고, 영어 에세이는 GRE Writing 이상의 수준이었다. 장기적으로 영어 교육으로 유학 갈 것도 염두를 하는 상황에서 잘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수업 준비는 TEPS 가르칠 때 보다 벅찼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며, 강의를 인정받고 시수도 많이 배정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내게 기회가 찾아 왔다. 영어과를 책임지시던 영어과 원장님이 사표를 쓰고 나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2년차였던 내가 영어과 최고참이 되어, 영어과를 책임지게 된 것이었다. 영어교재와 시험 문제, 선생님 관리까지 별도 수당 없이 책임지며 영어과장의 업무를 감당했고, 거의 학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학원 일을 했다. 그 결과 영어과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고, 이러한 노력과 다른 선생님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회사는 창립 3년 만에 3-4등 학원에서 1등 학원으로 올라섰다. 이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되던 차에 위기가 다가왔다.
영어과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에세이과를 보충하기 위해 뽑은 미 명문대 출신의 강사 한 사람이 원장님 한 분과 결탁하여, 학원에서 알력을 조장했다. 영어 과장인 나를 몰아내고, 자신이 영어과를 차지하고, 이사로 들어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무리 음모가 있어도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라는 나의 순진한 생각은 세상의 잔혹함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파워게임에서 밀려, 졸지에 나는 해고 통고를 받고 그 달을 마지막으로, 학원을 그만 두어야 했다.
그동안 2-3 년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회사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원으로 돌아 온 것. 그리고 지난 2년간의 노력과 성공. 그리고 이제 찾아온 배신과 말로만 듣던, 토사구팽. 마음에 상심이 큰 가운데,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 목사님은 "복수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셨다. 심판과 복수는 하나님의 몫이고 용서가 우리의 몫이라는 로마서 말씀을 되새기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3 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하고도 자신이 기르고 양육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한 분을 소개 해 주겠다고 하셨다.
“누구시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시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해고 통지를 받고 인수인계와 마지막 강의를 해 주기로 한 1 달 동안 예수님을 묵상하고, "내가 복수 하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를 쫓아내는 그 에세이 선생님에게 지금까지 내가 만들었던 강의 자료와 수업 교재를 모두 넘겨주었다. 그동안 정성스럽게 만들어 두었던 시험 문제들도 원장님께 모두 드렸다. 아이들에게도 마지막 수업까지 내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그렇게 학원을 떠나 다른 토플 학원에서 부원장으로 강의를 하던 중, 학원의 다른 원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심 선생님, 심 선생님 떠난 후 학원에 분란이 계속 있었는데, 이번에 학원이 반으로 쪼개지게 되었어. 정말 떠날 때 막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이번에 내게 힘이 되어 주지 않겠나?"
이렇게 다시 전 학원에 합류하게 되고, 이번에는 평강사가 아닌 주주의 자격으로 지분을 받아 학원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두 학원의 경쟁에서 이기고, 다시 1 등자리를 차지하면서 학원은 이후 승승장구 하게 되었다.
그러던 2006년 소득 신고를 하게 되면서, 국세청에서 날아온 세금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소득 총액이 1억 원이 넘게 잡힌 것이다. 연봉 1억을 목표로 달려 온 것은 아니지만, 예상치도 않은 속도로 수입이 늘어났다. 너무 감사했다. 가만히 보니, 강사로 강의한 것 이외에 주식 배당 받은 부분들이 합쳐서 소득이 1억을 넘긴 것이었다. 연봉 1억을 받으려면, 내가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해 주는 분들의 노력이 합쳐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금을 내고, 나는 간만에 현대 자동차 이전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다름 아니라, 한번 찾아뵙고, 점심 한번 대접했으면 하는데요.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겠어요?"
그동안 보직 변경이 있어서 내가 아는 분들 중 다수가 기아로 해외로 발령을 받고, 이 과장님과 한 대리만 나왔다. 옛 동료들에게는 내 수입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속으로 "보세요, 제가 회사 나간 게 잘못된 결정은 아니었죠. 회사 나간 지 4 년 만에 회사에서 20년 근무해야 받을 수 있는 월급을 받았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편입 영어를 지도하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학원도 안정 괘도로 접어들자, 이제 내가 진정으로 해 보고 싶었던 것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사실 사교육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기보다,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인생에서 성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던 중 대치동에서 알게 된 선생님 소개로 종로학원에서 편입 영어 학원을 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특례 영어와 시험이 유사한 부분도 있었기에 관심이 있었고, 나도 편입을 해 본 경험이 있는지라 한번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 선생님, 그럼 저도 같이 해요."
"그러세요, 마침 어휘 선생님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어휘를 맡아 주시면 좋겠네요."
"대치동 학원일도 있어 많이 강의 할 수는 없는데, 어휘 한 과목만 하면 낮에 1-2일만 해도 되고 딱 좋네요."
그래서 종로 편입 학원의 창립부터 지금까지 7년여를 편입생들과 함께 해왔다. 처음 편입 학원에 온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는 아침 마다 영어 성경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영어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다행히, 대표님이 영어 성경 공부 모임 하는 것을 적극 지지 해주시고, 원장님과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어서 7 년 동안 한해도 거름 없이 영어 성경공부 모임을 해 오고 있다.
나의 20대는 맨땅에 헤딩하기와 수많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 가운데, 나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이고, 내가 제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그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어렵게 이 길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정서적으로 좀 더 안정되고,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시행착오를 좀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파란 만장을 겪었기에,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이 땅의 청년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전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어강사의 강사가 되다
나는 2006년부터는 학원 강사 채용 사이트인 훈장마을에서 주최하는 영어 강사 양성 과정 교수를 맡고 있다. 나름 대치동과 강남에서 성공한 영어 강사라는 타이틀로 강의 스킬이나 강의안 구성하고 교재를 만드는 법을 강의하며 다른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10여년을 영어 교육계에서 열심히 달려온 결과로 "외국에서 살다온 유학생을 가르치는 영어 선생님", "영어 강사의 강사"라는 나름의 포지셔닝을 할 수 있었다.
중학교때 처음 알파벳을 접하고, 영어와의 거리가 만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영어 강사로 10년 이상 살아온 나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파란 만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영어 교육적인 관점에서 내가 어떻게 영어를 잘하게 되고, 영어로 밥 벌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오를 수 있었나는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공부그릇이라는 하드웨어가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공부 못하는 나는 영어도 못한단 말이냐고 화내시는 독자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이 어떤 목표와 방법으로 영어를 공부하셔야 하는지는 책 뒤의 주된 내용이다)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어떻게 해야 협상을 잘하고 투자를 잘 할 수 있느냐는 래리 킹의 질문에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 하면 기분 나빠 하실 수도 있기만,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나야 하지요. 많은 교육 관계자들은 제가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죠. 머리가 나빠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져라 이렇게 이야기 해주길 바라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 중 하나입니다. 유전자 풀이 좋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는 공부그릇이란 높은 지능지수(IQ)가 아니다. 오히려 감성 지수(EQ)적인 능력에 가깝다. 오랜 시간 인내하고, 한번 정한 공부 방법을 꾸준히 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말하기를 즐기고, 부지런히 따라하고 외울 수 있는 공부능력을 말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한번 다니기로 한 학원은 거의 1년 이상 다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업에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배운 내용을 써먹으려고, 기회를 찾았고, 영어를 말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찾았다.
둘째는 재미있게 공부했다. 대학 1학년 2학기부터 회화 중심으로 공부하며 영어를 좀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서독해는 관심이 많았던 영어 성경과 전공 원서 중심으로 공부했다. 내가 알고 싶은 지식이 영어로 되어 있으니 더 재미있게 읽고 공부할 수 있었다.
셋째는 영어를 지속적으로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너무 영어 공부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위에서 말하지는 않았는데, 카투사 제대 이후에도 회사를 선택할 때도 무역이나 해외 영업을 하는 쪽을 택했고, 신앙생활도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 선교회 일을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언어는 쓰지 않으면 퇴화된다. 자꾸 써야 한다.
넷째는 가르치면서 영어가 늘었다. 나는 케이스는 영어가 아예 업이 된 경우이지만, 편입 영어 강의를 할 때도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 중에 영문법을 확실히 정복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본인이 배운 내용을 중학교 1,2학년 정도의 조카나 동생에게 가르쳐 보세요. 본인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완전히 나의 지식이 된 것이고, 본인의 입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감히 우리나라 고급 어휘 대표 강사 Top 10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recalcitrant(반항하는 defiant), choleric (성마른, 성난) 같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지 않지만, 원서나 문어체 문장에는 등장하는, 그래서 편입이나 대학원 영어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어휘를 어원분석으로 하거나 연상법을 활용하거나 해서 재미있게 강의 할 수 있다. 내가 강의 보다 다른 일에 관심이 있어서 근 1년을 강의를 쉬었는데, 나보다 강의를 잘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많은 곳에서 강의 제의가 오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어려운 어휘를 재미있게 풀어 설명할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어려운 수준의 어휘를 설명하고 동의어를 자유자재로 적어 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현대 자동차를 퇴사하고 스카이 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한 첫 1-2년 하드 트레이닝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원 상위권 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지금 기준으로 토플 110점 이상에 SAT 2200 이상의 최상위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아이들 독해나 문장 완성 수업을 한 시간 지도하기 위해 거의 5-6시간 수업 준비를 했고, 같은 수업을 5-6번 들어가서 똑같이 반복하며 수업을 하다 보니, 1년 정도 되니, 33,000 어휘 수준의 단어가 거의 다 외워졌다. 이렇게 하드 트레이닝을 받고,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 편입 시험을 보니 어휘는 거의 모르는 단어가 없었다.
만약에 내가 유학 갈 목적으로 GRE 수업 듣고, 수동적으로 공부했다면 이렇게 수월하게 이 많은 어휘를 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공부는 능동적으로 해야 하고, 내 입으로 말하고 남에게 설명을 할 수 있는 과정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어찌보면 너무 주관적인 경험이고, 개인사가 많이 이야기 되어서 이런 글을 자세히 쓰지 않으려 했는데, 중간 중간의 이야기를 몇 몇 출판 전문가들에게 설명했더니 많은 독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라고 하여 용기를 내어 써 보았다.
이 후 좀 더 일반적으로 20살이 넘은 대학생 성인 학습자들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인 관점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심샘의 영어 정복 과정 1. 공부그릇을 먼저 갖춰라. 2. 재미있게 공부하라 3. 영어를 꾸준히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라 4. 가르치면서 실력을 키워라 |
<<칼럼니스트 소개>>
글쓴이 심정섭은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영어교육학과 학사 편입 한 후, 한양대학교에서 영어 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IMF 1세대로 중소 무역회사, 컨설팅 회사, 현대 자동차 해외 영업 본부를 거치며, 바닥부터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이시기에 잠깐 했던 영어강사 생활을 통해 본인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학사 편입 한 후 강남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에게 10년 동안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제는 영어라는 물고기 보다, 인생 경영이라는 물고기 잡는 법을 전하기 위해 공부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로 고3과 대학생, 임용 고시 준비생을 지도했지만, 지금의 사교육과 가정의 해체로는 나라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사교육비 경감과 가정의 회복, 유태인식 독서, 토론 교육의 확산을 위한 이론을 정비하고 실천에 이르게 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