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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대전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 앞서.....>>
고대부터 이어져온 전술의 역사를 볼 때 밀집 대형의 보병 주력에서 점차 기병과 산병 부대, 포병대 등등 병종 혼성 조합 전술로 차츰 변해가게 되었다. 스타 크래프트로 말하자면 바이오닉 테란과 메카닉 테란의 조합이라고나 할까....
한 때는 기병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때문에 순수 기병으로만 군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하기도 한 전례도 있었다. 하지만 기병의 취약점은 적이 압도적인 산병 부대를 앞세워 몰려오는 기병을 활이나 석궁 등을 쏘아대고 경장 보병이나 장창 보병 등으로 달려들어 기병을 에워싸서 섬멸하는 방식 등의 대응 전술이 등장하자 더 이상 특정 유닛으로만 부대를 편성해서 적을 제압하는 전술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기병전은 어지간히 뛰어난 기병 운용 능력을 갖춘 지취관이 없고선 제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기동성과 파괴력 때문에 오로지 기병으로만 병력을 편성해봤자 방금 말한 기병대 제압 방식 앞에서는 그 두 가지의 특성을 제대로 살려보지 못하고 전멸하기가 일쑤다.
보병과 기병은 서로 가위 바위 보 같은 존재다. 보병을 제압하는 데는 기병이 좋고 기병을 제압하는 데는 역시 보병이 탁월하다. 특히 기병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산병을 조합한 보병 부대가 효과적이다. 숱한 전술가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 보병, 산병 등의 병종 조합 전술을 너나할 것없이 당연시하며 보편적 전술로 채택하게 되는 데
유럽의 경우는 고대 그리스 용병가 에파미논다스가 고안한 사선진과 기병 조합 병종 전술로부터 시작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병종 전술, 그리고 한니발의 포위 섬멸전을 위한 병종 전술에 이어 유럽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 병종 전술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근대에 있어 병종 전술의 큰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 그 역사를 크게 바꿔놓은 것이다.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프랑스의 정복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워털루 대전에 임하기 전의 나폴레옹>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보나파르트라는 하급 귀족 집안 출신이다. 처음에 그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서 독립시키겠다라는 투지를 가지고 성장했으나 청년이 되면서 코르시카 주민들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는 잠시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에 휘말리면서 혁명의 주동자였던 로베스피에르가 길로틴에서 처형되고 난 후 나폴레옹도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자코뱅당과 관련되어 있다하여 잠시 투옥되지만 무죄로 석방된다.
그 후 프랑스 군 사관학교에 입대해 정식 군인의 길이 되는 데 발빠른 승진 끝에 군 최고 지휘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고 마침내 그는 혁명의 후유증으로 인한 각종 혼란-왕당파의 반란과 자코뱅당 잔당파의 총재 정부에 대한 각종 테러 공작-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는 무능한 총재 정부의 허약함을 틈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프랑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그 후 그는 프랑스 혁명군을 이끌며 혁혁한 전과를 세우더니 종신 통령이 되고 독재자가 되다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그는 계속 승승장구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프 동맹군이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 동맹군을 완패시키고 더욱 그의 전성기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끈질기게 공격해오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인 영국이 트리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자 참다 못해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로 결정하고 대륙 봉쇄령을 내렸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고분고분 따르던 러시아가 이에 반기를 들자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지만 수도를 방패로 삼아 동장군(冬將軍)의 기후를 이용해 원정군을 피폐화시키는 전법으로 나선 러시아군에게 베레지나 전투에서 무참히 참패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퍼지자 대프 동맹이 다시 결성되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프 동맹군에게 패배하고 황제는 엘바 섬에 귀양가고 만다.
<<워털루 대전 당시의 배경 상황>>

역사적 배경: 제7차 대불 동맹(영국을 주축으로 한 대프 동맹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군대 등으로 구성)
시기: 1815년 6월 18일
장소: 벨기에의 몽생장. 워털루와 벨알리앙스 사이

[나폴레옹과 대불 동맹군의 워털루 대전 직전 포진]
전투 전의 병력 구성:
대프 동맹군: 총사령관 영국 웰링턴 공작

프랑스군: 총사령관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프 동맹군 구성: 동맹군 총사령관 영국 웰링턴 공작 지휘하의 영국군-네덜란드군의 혼성 보병 5만. 기병 1만 2천 5백명. 대포 297문 등의 약 6만 8천대군
프로이센 진영 총사령관 블리허 지휘하의 보병과 기병 6만 1천명 대군
VS
프랑스군 진영: 나폴레옹 지휘의 보병 4만 9천. 기병 1만 5천 570명. 대포 246문 등의 7만 2천. 그 나머지 약 5만 대기 병력까지 합치면 12만 대군.(그러나 워털루의 전투에서는 이 7만 병력으로만 싸웠다.)
러시아 원정의 참패는 나폴레옹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숙련병을 대부분 잃은 탓에 산병과 종진-횡진의 혼성 병종 전술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병력의 대부분을 동맹국에서 소집했지만 결전에서 외국 용병과 산병만으로는 왕년의 전술 전개가 불가능했고 결정적으로 참패한 후 1814년,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황제에서 퇴위되고 엘바 귀양이 되자 거의 20년 가까이 끌었던 나폴레옹 전쟁의 종말에 모든 유럽인들은 기뻐 날뛰었다. 빈 회의에서는 유럽의 5대 강국인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그리고 루이 18세의 프랑스 복권 왕정 등의 사절단이 앉아 종전 협상을 펴려고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를 탈출해 1815년 3월에 프랑스 마르세유에 상륙했다. 그럼으로써 동맹군 수뇌부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판단한 황제였던 것이다. 그 때는 아직 이렇다할 협상 전개가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였는데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연합군은 오히려 일치 단결해 나폴레옹을 공격하려 했다. 루이 18세는 토벌군을 연달아 파견했지만 파견되는 족족 나폴레옹에게 투항하기만 할 뿐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이였던 네 원수까지 토벌군을 이끌고 파견되었지만 오히려 황제에게 가담할 뿐이였다.
결국 루이 18세는 파리를 탈출했고 튈르리 궁전에 나폴레옹은 입성했다. 그리고 황제는 주변 국가들에게 강화와 공존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지만 빈에 모였던 대프 동맹군 4개국-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은 네 갈래 길로 프랑스 수도에 접근해 나폴레옹을 완전히 몰락시킬 작정으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맹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황제는 대동원령을 내리고 12만 대군을 편성, 그 가운데 황제 스스로 7만 2천을 이끌고 서부 전선으로 향했다.

[워털루 전투 그림]
하지만 정작 제7차 대프 동맹군은 6차에 비해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군은 7월이 되어서야 라인 강에 도착했고 러시아는 그보다 훨씬 늦었으며 영국 군 상당수 일부는 북미에서 배를 타고 와야 했다. 그럼으로써 또다시 진군은 시간상 크게 지체되었고 지역별로 분산되었다. 그럼으로써 나폴레옹은 왕년의 장기였던 각개 격파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씩 차례 차례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목적지는 벨기에였다.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프로이센 군 연합 부대가 먼저 벨기에로 진군해온 것이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직접 벨기에를 향해 출격했다. 서둘러 빨리 출격한 나폴레옹은 북부 프랑스로 향해 6월 15일 이미 샤를루와의 북부에 진을 침으로써 먼저 워털루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1970년에 제작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 러시아-이탈리아 합작 영화<워털루>의 한 장면. 로드 슈타이거 주연]
뒤늦게 도착한 영국과 프로이센군은 전력을 볼 떄 나폴레옹의 7만대군을 압도했다. 하지만 블뤼허의 군대는 진열이 너무 엉성했고 도착 전의 영국측 총사령관 웰링턴은 어이없게도 저녁 무도회에서 프랑스의 진격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6일이 되자 세 나라의 군대는 충돌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프랑스 황제는 남쪽에서, 웰링턴은 북쪽에서 블뤼허는 북동쪽에서 워털루 전장을 두고 접근하게 되었다. 이미 먼저 진을 쳤던 프랑스 쪽은 두 군대가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군대를 나누어 리그니에서 주력 부대를 이끌고 먼저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다른 부대들은 카트르브라에서 웰링턴 본대와 교전했다.
이리하여 프로이센은 패하여 후퇴했고 전장에서 밀려났다. 이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작전 기지로 퇴각했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면 두 군대를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성공한 셈이 된다. 그러나 서전에서 이겼기는 하지만 결정타를 주지는 못해 후퇴한 프로이센을 섬멸하고자 3만 병력을 분리, 그루시 원수에게 지휘를 맡겼고 나폴레옹은 웰링턴을 추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6월 17일 내내 웰링턴의 본군은 프랑스의 추격을 받아 후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그것은 벨 알리앙스와 워털루 사이에 있는 전략상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는 구릉 지대를 확보하고자 꾀한 신중한 전략이였다. 후퇴한 웰링턴은 동서 4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릉틀 따라 포진했다. 뒤는 삼림이고 앞에는 라에생트를 비롯한 몇 채의 농가들이 있었다. 밤중에 니 오가들을 요새화한 웰링턴은 방어 진형을 갖추고 진격해오는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결전의 장은 이리하여 브뤼셀 동남부에 위치한 워털루 근처의 구릉 지대인 것이다. 웰링턴은 거기서 프랑스의 포병대의 포격을 회피할 수 있었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프랑스의 포병대]
전투의 경과

[프랑스 화승총 보병 부대]
농가에서의 공방전
대치한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각각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포진했다. 웰링턴이 지휘하는 대군은 영국과 벨기에, 네덜란드 혼성 부대였다. 전장 북부 언덕을 방어선으로 삼은 웰링턴은 우익에 있는 한 농가를 요새화 하여 프랑스의 공세를 차단하는 지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시간은 웰링턴 편이었다. 전초전에서 패한 프로이센군은 그루시 원수의 별동 부대와 맞서게 될 테지만 일단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고 합류를 재시도할 것이다. 그들과의 합류가 이뤄질 때까지는 전선을 유지해 불필요한 병력 소모를 회피하면 자연히 웰링턴의 승리가 된다. 당연히 웰링턴의 여유는 나폴레옹의 불안과 초조였다. 전날 밤에 내린 비로 질척이는 길이 마르기를 기다리렸지만, 그렇게 소비한 시간이 줄곧 그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황제는동서로 길게 뻗은 연합군의 포진을 보고 작전을 결정했다.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은 그에겐 문제가 아니고 적은 영국군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면에 길게 늘어놓은 80문의 대포로 집중 사격을 해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웰링턴 사령부를 분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웰링턴의 중앙 병력이 최대한 엷게 만들어야 했다. 나폴레옹은 농가에 주목했다. 웰링턴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지만 나폴레옹은 농가를 전략의 요지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농가를 점령하면 웰링턴의 목에 검을 들이대는 형국이므로 웰링턴의 입장에서는 더욱 움츠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본래 나폴레옹의 공격 스타일은 한 지점을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포문을 집중해서 한 지점을 향해 일제 포격을 가하고 가장 취약해 보이는 그곳을 향해 기병과 보병을 투입하는 방식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앙에만 병력을 투입한 게 아니라 좌익도 동시 다발적으로 겨냥하기로 한 것이다.
1915년 6월 18일 오전 11시 30분. 프랑스군 좌익 제2군단이 농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들을 지원 포격하기 위해 80문의 포열이 집중적으로 불을 뿜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포탄이 영국군의 전열에서 연달아 작렬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병력 소모를 더욱 피하고자 웰링턴은 수하 각 사단을 능선 배후로 후퇴시켰고 프랑스군의 포탄은 땅에 구덩이를 팔 뿐이였다. 나아가 농가를 지키는 영국군은 분전을 하여 프랑스 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나폴레옹에게는 농가를 공격하는 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나 프랑스군은 점차 흥분해 이성을 잃고 공명심에 도취한 나머지 영국군의 전선 압박을 위해 배치된 각 사단은 무엇에 빨리듯 농가로 몰려갔다. 한마디로 일시적인 싸움에 이긴 것에 흥분한 나머지 자제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전성기에 결코 있을 수 없었던 사태였다. 공방전은 점차 격렬해졌다.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요새화한 곳이지만, 프랑스군이 좌익의 전 사단을 집중할 정도의-쓸데없는 전력 낭비에 불과했다. 몇몇 중대내지 대대별로 공격해도 충분한데도 과다하게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공격에 나서자 웰링턴도 조금 동요했다.
격렬해지는 백병전
웰링턴이 중앙을 지키는 사단을 농가 방위로 돌리려는 순간 프랑스의 포진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전술 단위로 오더믹스 진형을 채택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진형은 거대한 T 자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좌우에 펼쳐진 7개 사단의 대군은 그대로 적을 교란하는 산병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산병의 공격으로 생긴 틈으로 들어가고자 황제의 직속 친위대를 비롯한 3개 사단이 종진으로 돌입할 준비를 갖추어 그대로 거대한 창의 형태로 포진했다.
웰링턴은 농가에 대한 지원을 포기했다. 중앙의 방비를 약체화하려고 하는 나폴레옹의 노림수는 그렇게 어긋났다. 영국군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농가를 방위하는 영국 병사들도 방어전에 선전을 보엿다. 프랑스군이 그 쪽으로 쏠리자 당초 작전이 이상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 동안에 필시 그루시 원수의 3만명 가량의 나폴레옹 별동 군대를 따돌리고 프로이센 군이 합류를 꾀하러 접근해올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작전을 수정했다. 영국군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전법은 포기하고 실력으로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 작전 지령을 알리는 북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대열을 갖춘 우익 4개 사단이 전진한다. 이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능선에 포진한 채 총격과 포격을 하는 영국군을 향해 프랑스 보병대는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진군한다. 그리아혀 중앙에 위치한 또 하나의 요새 라에생트 농가를 함락했다. 당초라면 여기서 산병이 전개해 영국군을 알아서 공격해야 했다. 산병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사격 목표를 변경하기도 하고 전력을 집중하거나 분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군에겐 그럴 만한 숙련병이 거의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쩔쩔매는 어리버리한 신참병들로만 가득했다.
하는 수 없이 채택한 1열 횡대였지만 압박 능력은 산병보다 훨씬 뛰어났다. 영국 좌익을 담당한 동맹군은 크게 동요해 벨기에군이 마침내 먼저 무너졌다. 그러나 프랑스가 돌파구를 내기 전에 먼저 영국군 일단이 맹렬히 돌진하여 빈틈을 채웠다. 그 담당 지휘관은 전장에서 군복을 입지 않고 실크햇과 플록 코르를 고집하는 맹장 픽톤 장군이었다. 성난 파도같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낸 픽톤은 그리 오래 못가 장렬히 전사했으나 영국의 견고한 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정연한 공격도 점차 흐트러졌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웰링턴이 중기병을 출격시킨다. 보병 전열의 결절점을 찌른다는 기병 이론에 충실히 따른 반격에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다. 영국 중기병은 그 기세를 몰아 혼합 여단의 보병과 하께 맹렬한 돌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프랑스 기병대도 밀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나팔이 적막하게 울리자 정렬한 창기병들이 창 끝을 가지런히 하고 반격한다. 창을 뽑아들고 보병을 격퇴한 영국 중기병도 더 긴 창을 들고 돌진했다. 그 창기병의 앞에 프랑스의 창기병대는 대열이 찢어진다. 중기병은 줄곧 나폴레옹 사령부 쪽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이 중앙 돌파를 위해 준비해놓은 친위대 소속의 포병대 포문이 불을 뿜기 시작한다. 6파운드 대포의 집중 포화에 직격 당한 기병들이 말과 함께 산산히 무너진다. 영국 중기병이 당황해 후퇴하지만 그 대열 한 가운데로 일제 포격을 했다.
단순무식 무대포 돌격으로 대세를 그르친 멍청한 네 원수

[퇴각하는 영국군을 향해 보병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단순무식하게 추격하는 기병대]
영국의 기병대와 픽톤 사단의 맹공을 격퇴한 나폴레옹은 승패를 가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선에 배치된 포병대를 총동원하여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포격을 개시했다. 작렬하지 않는 철구탄이지만 이로 인한 사상자는 많았다. 밀집해 있던 영국군의 상당수는 이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면할 길이 없었다. 이대로 진행되면 무모한 소모전이 될 뿐이라고 판단한 웰링턴은 다시 전군에게 뒤쪽 비탈로 물러서라고 지령했다. 영국군의 자색 군복이 썰물처럼 능선을 넘어 사라지자 그 광경을 본 네 원수는 대세가 기울어 웰링턴이 전면적 후퇴에 들어갔다고 착각했다.
돌격 나팔이 울려 퍼졌다. 사실 전성 시절의 나폴레옹이라면 네 원수의 무모한 추격을 엄격하게 금지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 자신도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그 시절의 적확하고 냉철한 판단과 계산을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두뇌는 너무도 노쇠해 있었다. 애초부터 농가를 공격할 때 영국군이 무너질 기세를 보인다 해서 대규모 사단 병력으로 지나치게 너무 많이 병력을 투입한 것 자체가 심각한 실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실수를 모처럼만에 만회하게 된 상황을 네 원수는 망쳐놓게 된 것이다. 기병의 위력은 그 기동성과 충격, 즉 신속함이 곁든 파괴력에 그 강점이 있다. 그런 만큼 적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기병의 강점은 절대 필수적이며 아울러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적 병력을 궤멸시키기 위한 최종 결전 병력으로써의 역할도 담당한다. 철저한 공격 위주로써 방어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갖추고 있지만 그 대단한 기동성과 위력은 전장의 왕자로써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하지만 다른 부대와의 연계도 없이 특정 유닛 부대로만 돌진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지휘관으로써 냉정하고 신중했어야 할 원수급 장성이라는 자는 이성을 잃은 채 육안으로 들어온 현상만 보고 무대포식의 무책임한 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네 원수의 어리석은 오판과 지령으로 인해 나폴레옹 군대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되고 만다.
돌격 나팔과 함께 네 원수의 기병대가 추격하면서 영국군은 능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이대로 놔두면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한 원수였다. 그래서 초조해진 그는 보병이 집결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휘하의 중기병 5천기로만 이끌고 돌진한다.

이를 본 웰링턴은 황당해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기병의 충격력은 절대적이나 방어력이 취약한 결점을 지닌 기병으로 포병이나 보병의 엄호 없이 연계를 하지 않고 단독 돌격시킨다는 것은 용병학상 초보적인 상식을 무시한 얼간이같은 짓이다. 웰링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보병대에게 방어 진형을 짜게 했다.
구릉 경사면에 20개의 거대한 밀집 방진이 자리를 잡았다. 중앙의 보병들은 총검의 장벽을 구축했고 그런 방진들이 제단으로 편성되어 5천기의 중기병을 기다렸다. 나아가 총검의 안쪽에서는 머스킷 총(화승총)아 연발 사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 앞에서는 포병대가 대포를 죽 늘어놓고 있었다.
스타 크래프트로 보자면 공격력과 방어력이 풀 업그레이드 된 벌처 부대만으로 머린과
시즈 탱크로 구성된 기갑 부대를 향해 나를 죽여 줍쇼~~~ 하고 달려드는 머저리 짓이랑 다를 게 없었지만 그래도 프랑스 기병대는 멍청하게(네 원수라는 지휘관은 정말이지 돌대가리임이 분명하다 -_-;;)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사벨(샤브레. 그리피스가 쓰는 편수검)을 번쩍이며 온갖 개폼을 잡으며 돌격해오는 기병 집단을 향해 영국 포병대가 불을 뿜었다.
"전 벌처 부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일제 무작정 돌격~~~!!!" ㅡㅡ;;
"벌처들만 떼거리로 오잖아! 머린 시즈 탱크 기갑 부대! 원거리 공격 준비!"
시즈 탱크들 일제히 시즈 모드로 전환하고 머린은 스팀 팩을 먹고 메딕이 머린을 뒷받쳐 준다. 시즈 탱크가 불을 뿜고 사정 거리 업그레이드까지 된 머린이 총을 갈긴다. 벌처는 스파이더 마인 업이 안된 상태고 오로지 속도 업그레이드와 공방 업그레이드만 되었을 뿐이다. 그런 벌처가 적 머린 메딕 시즈탱크 조합에게 달려들게 된다면..... =ㅅ=;;; 결과는 어떻겠는가?
지금의 네 원수의 저 얼빵한 짓은 저런 꼴이나 다를 게 없다. 기병은 보병과 격돌하기 전에 원거리 사격 및 포격 부대로 제압한다. 100년 전쟁 당시 크레시 전투에서 기병의 가장 쥐약은 원거리 부대와 보병 부대의 조합이라는 것이 증명된 바가 있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로지 말을 탄 기사들... 그러니까 중장 기마대로만 영국군에게 달려들었다가 영국군의 장궁 부대에게 '조직의 쓴 맛'을 호되게 보고 전멸당한 바가 있었다. 그 때 확실히 기병 제압 방식 이론은 워털루에서 이렇게 재현된 것이다. 탄환이 시커먼 흙먼지를 일으키고 재앙을 당한 기병들이 나뒹군다.
쓰러진 동료에 걸려 그 몇 배나 되는 말들이 연달아 쓰러졌고, 내동댕이쳐 진 기병들이 직격탄에 날아간다. 게다가 간신히 접근해온 일부 기병들을 향해 머스킷 장총이 일제 사격을 한다. 뿜어져나온 피가 허공을 물들이고 군복을 적시는 격전의 와중에 영국 총사령관 웰링턴은 말을 타고 방진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힘차게 지령을 내린다. 그대로 중기병의 파괴력은 무시못할 것이었다. 굳세게 방어를 하던 보병 방진도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기 시작하고 기병의 노도는 조금씩 웰링턴 사령부로 육박했다.

그 순간 프랑스군의 오른쪽 멀리에서 프로이센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폴레옹은 돌격하는 종진 중에서 4개 사단을 급히 쪼개 우익으로 파견했다. 결코 고작 4개 사단으로 막을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지만 최소한 프로이센군의 전선 도착을 늦출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프로이센군의 영국군 합류 저지를 위해 따로 파견했던 3만명의 그루시 원수가 프로이센의 발목을 잡지 못하고 놓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본대로 좀 더 일찍 서둘러서 되돌아왔어야 하는 데 고지식한 그루시 원수는 프로이센군의 발목을 묶으라는 명령에만 충실히 따르고자 프로이센군을 찾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 3만의 병력이나마 나폴레옹의 본대와 조기에 합류했다면 프로이센이 오기 전에 영국을 완전 포위 섬멸하고 뒤늦게 합류하기 위해 몰려오는 프로이센군을 공격해 각개 격파가 가능했을 것이다.
더욱이 네 원수가 멍청하게 기병만으로 돌진하지 않았어도 불필요하게 지나친 병력 낭비를 하지 않았을 터. 나폴레옹은 원수 계급장만 달고 있는 두 무능한 저능아 장군들 때문에 대세를 완전히 그르치고 만 것이다. 아무튼 프로이센군의 도착을 지연시키고자 파견된 4개 사단을 위해 나폴레옹은 그 귀중한 예비대를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미 네의 공세는 한계점에 다달았다. 네는 보병의 엄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퇴했다-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 동안 웰링턴은 병력을 다시 모아 중앙 진용을 재건했다. 그러나 웰링턴의 전열에는 이미 커다란 균열이 생긴 상태였다. 라에생트는 함락되고 동맹군은 동요하고 있어 이미 강고한 방어를 바라기 힘들었다. 이렇게 되자 저 멧돼지 같은 단순 무식 저돌 맹진의 멍청이 네 원수는 황제에게 예비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허나 예비대는 없었다. 이미 그 4개 사단은 그루시 원수가 발목을 잡지 못하고 놓친 프로이센군 쪽으로 보낸 상태였다. 그나마 남은 것은 나폴레옹의 친위대... 즉, 근위군. 그러나 나폴레옹의 최종 히든 카드였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이 병력을 좀 더 나중에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망설임이 나폴레옹의 운명을 바꾸었다.
결국 근위군의 투입을 결정하고 공격을 재개했을 때는 이미 영국도 균열의 보강을 마친 상태였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망설이지 않고 균열된 중앙을 향해 병력을 제대로 집중할 수 있었다면 승리의 여신은 웰링턴에게 등을 보였을 수도 있었다. 지휘관은 어떠한 지령을 내리더라도 신중하되 망설여서는 안된다. 결단을 내리되 속단을 해서는 안되며 충분한 정보를 갖추고 냉철한 분석과 계산을 신속히 마치고 신중히 생각하되 망설이지 않고 신속히 결단을 내리되 오판 아래의 속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너무 늙은 나폴레옹은 예전의 나폴레옹이 아니였다. 그의 뇌세포는 너무 노쇠할 대로 노쇠해 전성 시절의 판단력과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나 다름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최악이였다.
영국군은 4열 횡대를 짜고 차폐물이 될 만한 것은 전부 쌓아 올려서 몸을 숨기던 영국군은 일제히 포격을 했다. 무방비한 친위대는 탄환 소나기를 뒤집어 쓴다. 당연히 친위대는 막대한 사상자를 낳고 친위대라는 명칭과 걸맞지 않게 겁먹고 뿔뿔히 흩어져 도망쳤다. 균열이 생긴 보병의 그 틈새를 웰링턴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후퇴하는 근위군을 향해 기병대를 투입했다.
나아가 방어용으로 투입된 프랑스 4개 사단을 격파하고 가까스로 합류한 프로이센이 후퇴하는 프랑스군 측면을 찔렀다. 이제 프랑스에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뿔뿔히 패주하는 알방적으로 유린당하고 기사회생을 꾀하던 나폴레옹의 재기의 꿈은 좌절되었다. 붕괴한 프랑스 가운데 친위대 일부는 끝까지 긍지를 지켰다. 그들은 견고한 방진을 짜고, 전우와 나폴레옹이 도피할 때까지 항복을 권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싸웠다. 그리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했다.
이 전투 와중에도 3만이라는 대규모 별동 부대의 지휘관 그루시는 프로이센이 어디에 있는 지 여전히 혈안이 되어 있을 따름이였다. 그것도 정처없이 방황만 할 뿐이다. 네 원수도 그루시 원수도 도데체 이토록 무능하고 몽매한 작자들이 원수라는 계급을 가지고 있었는 지 이해가 안될 만큼 몽매한 실책의 연속을 거듭했다. 그리고 총사령관인 나폴레옹 황제 자신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병력 운용에 있어 잦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했다. 그루시 원수는 정처없이 떠돌기만 할 뿐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워털루 대전은 끝이 났다.
[워털루 전투 종료 직후 승리한 두 총사령관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장군의 재회.] (쪽이 영국측 총사령관 웰링턴 공작. 오른쪽이 프로이센 진영의 블뤼허 장군)
전투 의의
나폴레옹의 전술은 산병으로 적 병력을 점진적으로 삭감하고 혼란을 유도하며 포병 등의 원거리 부대로 적의 가장 허술한 한 지점을 향해 집중적으로 포격해 적 군 조직의 심각한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횡진으로 전면적으로 보병과 기병으로 압박한 뒤 정예 부대(근위군, 친위대)를 종진으로 돌입시켜 적은 분산시키고 각개 격파하는 전술이였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확립한 마케도니아식 전술인 중장 보병 밀집 방진과 기병, 산병의 혼합 병종 기동진 전술로 이수스 회전에서 대왕이 보였던 망치와 모루 전법의 개량형이다. 특히 개량된 점으로써 화약의 발달에 따른 대포와 화승총의 사용으로 포탄이 보병머리 너머로 사격함으로써 격돌 직전까지도 적을 공황 상태에 빠뜨려 병력을 삭감하는 데에 있다. 산병을 중시하고, 원거리 공격 유닛 부대로 적 전력을 소모시키며 주력의 종대 돌격으로 승부를 내는 점에 있어서는 고대의 불패 패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나폴레옹은 그 기본적 전술 방식에 있어서 그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의 전술을 익히고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그 중장 보병 밀집 방진과 기병 산병의 혼합 병종 기동진 전술을 완전히 습득해 그것의 장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의 군주는 살아 생전에 그의 전술을 익힌 제자가 나타나 그에게 창부리를 들이대는 일이 없었지만 한니발도 그렇거니와 나폴레옹 역시 그 자신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적이 있었다. 한니발의 경우 그의 전법을 배우고 모방해 그것을 개량 보완해서 자마 회전에서 그를 패배시킨 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역시 그의 전법을 모방했는 데 어떤 관점에서 보면 나폴레옹 VS 웰링턴이라는 이 워털루 대전은 결국 한니발 VS 스키피오의 자마 회전을 재현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개별적인 전술 방식이야 차이가 나겠지만 스키피오도 웰링턴도 각각 해당되는 선배의 전법을 모방한 충실한 제자(?)이였을 지도 모른다. 두 젊은 장수는 각각의 선배를 상대로 그 선배들이 사용한 전술을 확실히 소화해 내 선배가 고안한 전술에 발상의 전환을 기하여 개량된 전법으로 상대했고 그러함으로써 스키피오는 스승 한니발을,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각각 굴복시켰다. 참으로 역사적인 우연치고는 묘하기 그지 없었다.
나폴레옹의 장기는 병력이 아무리 늘어나도 지휘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특히 그의 노련한 숙련 정예 부대 중에 실전형, 더구나 공세에 강한 맹장이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대병력의 집결과 운용 수완에서는 최상급이라 해도 좋다. 허나 워털루 대전때는 나폴레옹이 길러온 그 정예 숙련병이 이미 고갈된 상태였다. 손자는 "전쟁은 수단이여야지 목적이 되어선 안되며 가장 극단적인 정치 행동으로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 그러나 정작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게 되면 장기전으로 가선 안된다. 가능한한 신속히 적을 상대로 단기전으로 승리를 거둬야하며 용병의 진수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은 20년씩이나 지체되었으며 장기화된 전쟁으로 막대한 인력과 자원과 물자를 소모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니발도 로마 원정을 너무 지나치게 장기화한 점 때문에 결국 패배의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전쟁 사례야 말로 전쟁의 장기화가 어떤 비참한 참패를 초래하는 지 알려주는 필연적 결과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 숙련병이 고갈되고 그나마 남은 숙련병이라 해봤자 친위대인 근위부대나 선발 부대가 고작이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프랑스나 주변국에서 긴급 소집된 오합지졸 신병들인지라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실제로 양동 작전으로 이뤄졌어야 할 농가 공략에 있어 네 원수같은 저능아 장군들이 필요 이상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또 그 네 원수의 기병대 돌격만 해도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헬기나 보병 사단의 지원도 없이 전차만 돌격한 꼴이다. 앞서 말했듯 머린 메딕 시즈 탱크 등의 병종 부대에게 벌처만 딸랑 쳐들어갔다가 사정거리와 공방 업 된 머린의 스팀팩 사격과 시즈 모드의 맹렬한 포격을 뒤집어 쓰고 궤멸 지경에 놓인 벌집이 된 벌처 신세나 다를 게 없다. 동종의 기병대-동종의 순수 벌처 부대-라면 모르되 혼합 병종 사단을 상대로 다른 부대의 연계없이 단독으로 뛰어드는 것은 정말 자살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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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몸소 지휘하는 기병대와 보병 부대를 함께 돌격시켰다. 또 자신이 전투의 와중에 있는 만큼 전황의 변화에 따라 적확한 지시를 내려 불패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워털루 대전 때의 나폴레옹은 후방 사령부에서 지휘를 헀다. 전성기 때의 나폴레옹이라면 알렉산드로스 못지 않게 최전선 선두에 나서서 전선을 뛰어다니며 스스로 전황을 확인하고 충분한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냉혹하리만큼 정확한 계산과 판든을 내려 용의주도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허나 이 때의 나폴레옹은 네 원수의 제멋대로 돌격을 방치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일시적이나마 네 원수의 그 멍청한 저돌 맹진으로 동맹군이 흔들렸을 때 조차 나폴레옹은 즉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본래의 나폴레옹이라면 적을 쫓지 말라고 단순 무식한 추격을 금지하고 병력을 재편한 뒤 추후 지시를 기다리며 대기하라고 했을 것이다.

[워털루 대전 참패 후 세인트 헬레나에서 귀양살이 도중 임종 직전에 놓인 나폴레옹]
결과적으로 그의 우유부단함이 승패를 좌우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예비대를 확실히 확보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꼴통 그루시의 맹종적 태도 때문에 아까운 3만을 문자 그대로 노는 병력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아가 그나마 곁에 두었던 시원찮은 예비 병력은 저 얼간이 원수가 발목을 묶지 못한 프로이센을 막기 위해 투입되어 최후의 결정타는 고사하고 무참히 궤멸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최후의 전투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자주 범하였지만 전성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필적할 만큼 뛰어난 지휘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나폴레옹 전술은 산병의 사용이나 예비 병력에 의한 종진 돌파가 아니라 자기 본류의 전술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채택한 밀집 횡진에 의한 압박 전술이다.
나폴레옹의 이 워털루 전투가 시사하는 바는 전술에 있어서 더 이상 병력을 운용할 때 특정 유닛 부대만으로 무모하게 돌격해선 안되며 타 부대와의 연계가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지휘관의 자질-신속히 결단을 내리되 오판에 따른 속단을 내려선 안되며 신중해야 하되 우유부단해선 안된다-에 관한 상식을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거기다 덧붙여 전쟁은 손자가 말했듯 절대로 장기화가 되어선 안되고 가급적이면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임할 경우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속전속결로 적을 제압해 빨리 전쟁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전쟁은 인류사상 최악의 인재(人災)요 정치 기술에 있어서 최악의 극단적 수단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일찌기 전쟁 3부작을 펴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쟁은 피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즉, 정치 자체도 하나의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고 그것의 극단화된 것이 바로 전쟁 그 자체인 것이다. 피흘리는 정치인 그 전쟁은 인류사의 약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인류는 일시적인 몇몇 평화 시대들을 제외하면 온통 크고 작은 전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만큼 전쟁은 절대 필요악으로 가능한한 회피하되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시작되면 빨리 끝내야만 한다. 전쟁을 찬미하고 무의미하게 사람을 나태하고 침식시키는 평화보다 활력을 불어넣는 전쟁이 낫다 따위의 망언을 떠들어대는 자칭 군국주의자와 무기상들은 장기화된 전장의 참상을 똑똑히 보고 뼈저리게 그 참상을 직접 체험해야만 한다. 하기야 그 작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뒤에서 전쟁에 따른 온갖 이득을 독점하고 국민더러 전쟁하자고 주장하며 전장으로 내몰곤 했는 데 과연 그런 무리들 가운데 어느 누가 전장에 직접 뛰어들겠는가? 안전한 곳에 숨어서 그런 치사한 짓만 일삼는 하이에나 떼들이 직접 할 리 만무할 터....
이 워털루 전투는 병력 운용에 있어 특정 부대만의 운용과 지휘관의 지나친 우유부단, 그리고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유럽 근대사의 한 획을 그은 정복자의 몰락을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용병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사항....
1. 특정 유닛 부대만의 무모한 독단적 운용
2. 지휘관으로써의 책무 소홀(나폴레옹 자신의 우유부단함. 네 원수의 무모한 돌격 지휘. 그루시의 맹종적 태도 모두 기초적인 책무를 등한시한 것이나 다를 게 없다)
3. 전쟁의 장기화
이 세 가지의 사항의 해독을 명심해야 하며 가장 회피해야 함을 인식하고 또 거듭 몸에 배여 있어야 한다. 이 전투는 바로 그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오............엄청난 분량. 은근히 재밌는데요
나폴레옹은 위와 같은 점도 문제이지만 개인적인문제로는 치질도 한몫했다는... 오죽 심했으면 말에 타는것조차 불가능했을까 -_- 그 밖에도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많이 했다지요
워털루 전투 소설책 조나단 스트레인지와마법사노렐 에 나오는데